충선공 문익점 선조소개

충선공 문익점 선조 소개


문익점(文益漸) 선조님은 1331년 2월8일 출생하시고 1400년 2월8일 별세하시었습니다.

자(字)는 일신(日新)이고 초휘(初諱)는 익첨(益瞻)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과 사은(思隱)이시고 부민후(富民侯)의 작위와 강성군(江城君)의 군호(君號)와 충선공(忠宣公)의 시호(諡號)를 추증 받으셨습니다.

부인 팔계주씨에서 2남(중용,중성)을 출생하고 별세하셨고, 후처로 진양정씨를 맞아 3남(중실, 중진, 중계)을 두어 모두 5남을 두셨는데 각 후손들을 헌납공파(중용), 순질공파(중성), 의안공파(중실) 시중공파(중진) 성숙공파(중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삼우당 문익점 영정과 도천서원내 동상

문익점 선조 소개 순서는 아래와 같으며 각 항목을 클릭하면 세부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가. 문익점 선조 약사(略史)

               나. 문익점 선조 년보(年報)

               다. 문익점 선조 가전(家傳)

               라. 문익점 선조 방목(榜目)

               마.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바. 삼우당 실기서문(實記序文)

               사. 행단기(杏壇記)

               아. 문익점 본인 시문(詩文)


가. 문익점 선조 약사(略史)


문익점 선조님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2월 8일 단성현 배양리(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충정공 문숙선과 평장사 조진주公의 딸 삼한국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익점(益漸) 초휘는 익첨(益瞻)이고 자는 일신이다.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인데 삼우의 의미는 항상 국가가 어려움을 걱정하고, 성리학이 보급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것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牧隱)이색(李穡)선생과 함께 정동향시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선생과 함께 신경동당에 급제하였다.

그후 벼슬이 여러차례 올라 33세에 좌정언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면종자를 가져와 문물혁신과 국가경제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3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하고  43세인 공민왕 22년 성균관 대사성에 보임되었으며, 45세에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를 역임하였다.

62세에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서 여러 차례에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였으며

70세인 1400년 2월 8일에 돌아가니 5월에 예장으로 장례하였다.

사후인 태종1년 1401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증직되고 강성군으로 봉하고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정사를 추증하고 갈충보국 계운순성 좌익택중광리 정량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시호를 충선이라 내리고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로 봉하였다.



문익점 묘소(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산75-1)-지방문화재 66호


1. 문익점 선조의 충의

충의에 있어서는 평소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위했음은 물론이고 목숨을 바쳐 간쟁하기도 하였다.

33세에 고려의 서장관으로 사신되어 원나라에 가자 원제(元帝)는 예부시랑을 제수하고 장차 크게 기용하고자하였다. 이때 마침 고려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이 간신 최유와 원후기씨와 함께 음모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하였으니 선생은 이 일을 바로 잡으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쟁하였으며 간원에 들어가 위조문서 수십 통을 소각하였으니 이에 최유 등이 가진 모략을 하여 선생을 덕흥군 편실에 42일간 감금하고 공명과 부로 유혹하고 권세로 협박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고 신하에게 두 임금이 없다라고 하여 충의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목숨을 깃털같이 가벼이 여기니 원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감탄하여 충신이라고 하며 원제에게 간청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고 운남성 교지(현 월남)으로 귀양 가게 하였다. 그 후 원제도 후회하여 사면하고 소환하니 다시 복직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하여 이태조가 여러 번 벼슬을 주었으나 두문불출하였다.


2. 문익점 선조의 효행

효행에 있어서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효동(孝童)이라 이름이 높았다.

당시에 불교가 대성하여 비록 유명한 사대부라도 부모의 상을 100일 만에 벗었는데 선생은 홀로 3년 상을 하고 6년 동안 묘를 지켰다. 특히 4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를 지킬 적에 왜적이 침입하여 지나는 곳마다 살생을 일삼아 모두 피난하였는데 선생은 홀로 여막을 지키고 평시와 같이 곡을 하였다. 이에 무지 무도한 왜적들도 감탄하여 참된 효자라 하고 나무를 깍아서 물해효자(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의 표시를 하여 부하와 후침차로 하여금 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비단 선생의 여막뿐만 아니라 단성현 일대가 모두 안전하였다.

그 후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지휘사로 있을 때 선생을 위문하여 왜적을 섬멸하는 대책을 문의하고 고려 조정에 주청하여 그 마을을 효자리로 명명하고 홍무 계해년 선생53세에 효자비를 세웠다. 현재 단성면 배양리 마을 앞 목화전시관 내에 효자비가 남아 있다.



문익점 효자비(경남 산청 목화시배지 내에 있음)-경남문화재 52호

3. 학행(學行)과 도학(道學)

학행과 도학에 있어서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자질을 가졌고 당시 유현이신 이곡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아들 목은선생과 도의의 교류를 맺고 정학(正學)을 밝히며 사도를 배척하였다.  또한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박선중 이숭인 선생 등과 함께 성균관을 창설케하였다. 당시 석유(碩儒)를 뽑아 관원에게 강의하게 하였는데 대사성 이목은 선생의 강론을 제유(諸儒)가 따라가지 못함을 보고 칭찬하기를 문일신(文一新)은 동방 이학(理學)의 종(宗)이라고 하였다. 또 시무론 8조를 진상하여 안으로 5부에 학당을 건설하고 밖으로 주군에 향교를 설치할 것과 중국제도를 따르고 호속(胡俗)을 폐할 것 등을 극간하여 좋지 못한 풍속을 바꾸었다. 고려사에 찬하기를 문익점은 한갓 목면의 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찍 학문에 힘써 정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쳐 사람을 효제(孝悌)와 성리학으로 가르치고 삼한의 나쁜 풍습을 바꾸어 천도(天道)를 밝히고 없어졌던 문풍(文風)을 다시 일어나게 하였으니 가히 동방도학의 종이 된다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내 일찍이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일두 정여창,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모재 김안국 추강 남효온 등의 문집을 보았는 바 충선공의 공로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의 공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리학에도 공이 막중하다고 서술하였다.

세종은 도천서원에 사액하였고 명종은 벽계영당에 사액하여 서원으로 승격시켰고 인조갑신년에 해서유현(海西儒賢)들이 삼봉서원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다.

영조 임자년에 월천사(강성서원)에 사액하고 봉향하였고 정조 기미년에 운산서원에 봉향하였으며 영호유림(嶺湖儒林)의 사차에 걸친 문묘종향의 소청이 있었다. 이외 전국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이 무수히 많으나 여기에 선생의 사적 및 사료를 간략하게 기록한다.

1997. 2. 10. 남평문씨 충선공파종친회

 

* 부조묘는 조선에서 고려 충신중 3인에게만  내렸는데 매헌 안유선생, 포은 정몽주선생, 사은 문익점선조입니다. 효행은 도행록에 기록되었으며 국가에서 마을 전체를 효자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도천서원 전경(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 경남문화재 237호


부조묘 사당(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 전남문화재 165호



나. 문익점 선조 년보

1331년

충혜왕 원년2월 8일(음력) 강성현(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서 출생   
부친은 숙선, 모친은 평장사 조진주 공의 딸 삼한국대부인, 초명을 익첨(益瞻)이라함

1338년

8세에 학당에 입학함

1342년

12세에 가정 이곡(이색의 아버님)선생 문하에서 수학

1345년

16세에 배양촌의 상서 주세후의 따님 팔계주씨(호: 팔계군)와 성혼
※년대미상   배양촌의 판서 정천익 따님 진양정씨를 계배부인으로 맞음

1350년

20세에 경덕제(시경 전문교육기관)에 입교후 이름을 익점이라 지음

1353년

23세에 정동성 향시(鄕試)에 목은 이색과 함께 합격

1360년

30세에 초, 중, 종 3장을 연거푸 통과 신경동당(제 7품)에 포은과 함께 급제

1363년

33세에 12월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원의 예부시랑을 받음

1364년

34세인 9월(공민왕15년)에 최유와 기씨 황후가 후원하는 덕흥군(충선왕의 서자)의 왕위 찬탈에 불응하고 황제의 협력 협박에 하늘에 두 해가 없듯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고 반박해
감금되었으나 황제의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려 11월 교지(월남)로 귀양감
귀양지에 풍토병과 싸우며 독서에 열중하며 운남풍토집 저술(실전됨) 

1366년

36세에 북경으로 가던 중 솜을 보고 종자 금용에게 씨앗을 따오라고 명했더니
감시원이 이를 저지하려다 공의 풍모에 눌려 "목화는 비밀리에 기르니 잘 감추어 가시라"  하여
붓 뚜껑 속에 담고 북경으로 돌아와 원나라의 예부시랑 어사대부를 지냄

1367년 

37세 1월에 황제에게 고향에서 늙은 부모님의 봉양을 청원하여 환국시 목화씨 고려에 전래
중현대부 예문관제학겸 지제고를 받고 우문관제학에 오름

1369년

3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로 병을 얻음
병중에서도 대학과 주역에 심취하고 목화를 재배함

1373년

43세 이색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 받았으나 병으로 취임치 못함

1374년

44세 정몽주 등과 원의 사신을 물리치라고 상소해 청도군수로 좌천

1375년

45세 지제고 좌정언을 내림

1377년

47세때 왜구가 침입해 모두 피난 갔는데 묘소에서 곡을 하는 모습에 왜구가 감동
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의 경고판을 세워 후속부대도  마을을 비켜감

1382년

52세때 초옥을 지어 삼우당(三憂堂)이라 했는데 삼우의 뜻은
 1.국운의 쇄약  2.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 3.자신의 도(道)의 미확립

1383년

53세때 국가에서 효행을 표창하고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내림

1388년

58세때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

1389년

59세때 전제개혁에 서명하지 않으므로 인해 조준의 탄핵을 받아 물러남

1390년

60세때 11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 집무중 신병으로 사임

1392년

62세때 정몽주의 순국에 통곡하고 고려가 망함에 두문불출하시고
조선의 태조께서 수차례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음

1400년

70세인 2월 8일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의 유언을 남기고 별세함 
조정에서 고향마을에 '고려충신지문'의 정문 세우고 국장으로 모심
부조묘(영원히 제사를 모실 재단)를 세워 제전 백결과 노비 70을 내림

1401년

태종1년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사(議政府恭知事)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경연지사(經鐘知事) 홍문관지사(弘文館知事)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의 벼슬을 명(命)함
갈충보국계운순성 좌익 택중광리 정량공신의 칭호와,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충선(忠宣)의 시호(諡號)내리며 특별히 선생의 공덕을 생각하시고 부조묘(不桃廟)를 세우라 명하시고, 제전(祭田) 백결(百結)과 노비 70인을 하사 하셨다.(조선에서 부조묘는 안향, 정몽주, 문익점 뿐임)
선생의 고향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하고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이름 내림
집에 세(稅)와 부역을 면하며, 특별히 자손을 등용하라고 하시다

1430년

세종 12년 영의정 추증 및 부민후에 봉하고 왕이 제문을 지어 예관을 보내 제사모심 

1440년 

세종22년 제일 으뜸가는 공을 세운 분으로 지위를 올리고 벼슬을 올려서, 대광보국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贈)하고, 부민후(富民候)에 봉(封)함. 
영남(嶺南)을 감찰(監察)중이던 재상인 남지(南智)에게 명하셔서, 묘 앞에서 제사 지내게 하셨는데, 그는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옛 고려(高麗) 좌사의 (左司議) 문공(文公)의 묘(墓)'라고 했다   자손을 뽑아 쓰고 두텁게 은혜를 베풀어 돕는 은전을 베풀라고 명함

1451년 

문종1년 3년 전 세종 때 편찬을 명한 고려사 열전(列傳)이 꾸며졌는데 사신(史臣)의 찬(贊)에 이르기를 "공은 다만 목면(木綿)의 이익(利益)에만 공이 있을 뿐 아니라, 일찍이 학문에 힘써 올바른 도(道)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했으며, 사람들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효도하고 우애할 것과 성리학(性理學)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좋지 못한 것에 물들여 졌음을 씻게 하고, 천리(天理)가 어두워졌음을 다시 밝게 했으며, 글을 숭상한 풍속이 시들었음을 다시 떨치게 해서, 우리 나라 도학(道學)의 종(宗)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1457년 

세조3년 임금님께서는 친히 글을 지으시고 예랑(禮郎)을 보내시어 묘제를 지내게 하고,
제전(祭田)을 늘려주고 자손을 등용하고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은전을 내림

1461년 

세조7년1460년에,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여, 사당(祠堂)을 지을 것을 청원함에, 임금님께서 재물을 주시어 사당을 짓게 하여 영남(嶺南) 의 선비들이 도천(道川)위에 지었는데, 그 곳은 선생의 집이자 도학(道學)을 강(講)한 집이 있었던 옛터였다. 
사당에 도천사(道川祠)의 현판을 하사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함

1464년 

세조10년 익점공의 증손(曾孫)인 사헌부(司憲府) 감찰(監祭) 치창(致昌)이 가전(家傳)을 완성했으나 분실되었는데 순조8년(1808), 문씨의 족보(族譜)를 편찬할 적에, 해도(海島)에 살고 있는 후손한테 입수했다.  문헌공(文憲公) 정여창(鄭汝昌)이 지은 행장(行狀)은 전해지지 못했다.

1477년 

성종8년 후손을 등용하고 후하게 대해서 도와주라고 말씀을 내리셨다

1511년 

중종6년 영남(嶺南)의 유학(儒學) 선비들이 벽계(선생이 글을 읽던자리)에다 선생의 화상을 모시는 당(堂)을 세웠는데, 선생의 화상(畵像)은 두 벌이 있어서, 한 벌은 도천(道川)에 받들어 모셨고, 한 벌은 벽계에 받들어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다.

1523년 

중종8년 대사헌(大司憲) 양연(梁演)이 청원하여 후손(後孫)을 등용하라는 명(命)을 내리셨다

1567년 

명종22년 벽계영당(碧溪影堂)에 현판을 하사하시어 서원(書院)으로 삼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시었다. 원사(院舍)는 임진란의 병화(兵火)에 불탔으나 다시 짓지 않았다.

1564년

명종19년 단성현(丹城添)의 선비들이 사당의 터가 낮아 물에 해를 입을까 염려가 되어서,
1리쯤 위의 땅에다 옮겨 지었다. 임진년에 사당집이 병화(兵火)에 타고, 그 후 31년째인

1594년 

선조27년 참봉(恭奉) 문진강(文振綱)의 청원에 자손을 후하게 대해서 도우라고 명함

1612년

광해군 4년 봄에, 생원(生員) 이각(李각)이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도감사(道監司)에 사정을 호소해서, 임금님에게 아뢰어 도천(道川)의 다른 땅에다 사당을 다시 지었다

1644년 

인조 22년 삼봉서원(三峯書院)을 세웠다. 황해도의 유학 선비들이 송화현(松希添) 도원(桃原)에 있는 삼봉산(三峯山)의 기슭에 세웠는데, 그 곳은 선생이 머물던 곳이어서 택했던 것이다

1672년

현종13년에 사당을 선생의 현손 광서(光瑞)가 살았던 곳에다 옮겨 세웠다.

1772년 

경종2년 후손을 등용하고 후하게 대해서 도우라는 명(命)을 내림

1732년 

영조 8년 장흥(長興)의 월천사(月川祠)에 모시어 제사 지내도록 했다.
월천사는 선생의 9세손 풍암 위세(緯世)를 모시어 제사 지내는 사당인데. 호남(湖南)의 유학(儒學) 선비들이 성균관과 서울에 있는 동학(東學) 서학(西學) 남학(南學) 중학(中學)의 네 학당(學堂)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의 통장(通章)으로 말미암아 선생을 이 사당에 모시어 풍암과 제사로 모시게 되었다

1747년 

영조 23년 대왕이 충훈부(忠勳府)에 납시었을 때, 대신(大臣)이 아뢴 바에 의해서 후손을 등용하고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우라는 명을 내리시었다

1758년 

영조 34년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구름 같은 막(幕)을 가리키시면서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문씨(文氏)의 공(功)은 크기도 하다. "라 하시고는, 사손(祀孫)을 찾아가보고 후손을 등용하라는 명을 내림

1766년 

영조 42년 왕께서 재가(裁可)하신 일들의 조목 중 다시 자손들을 후하게 대하여 도우라는 명을내린 내용이 행적집록(行蹟集錄)을 고을 사람인 박사휘(朴思徵)가 편찬하였다

1768년 

영조44년 다시 자손을 등용해 쓰고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도우라는 명(命)을 내리시었다. 이에 앞서, 내리신 전교(傳敎)에 대해서 의정부(議政府)가 우물쭈물하여 결과 보고를 하지 않았기에 이 명(命)이 있었다 

1771년 

영조 47년 이도감사(道監司) 이미(李潮)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재물을 주어 일이 이루어지도록 서들렸건만, 비를 세우는 일은 미루어졌다. 

1784년 

정조8년 문명순(文命純) 등이 말씀 올림으로 도감사(道監司)에게 명하시어, 선생을 모시는 사당과 서원을 수리하라 하시고, 자손을 후하게 대하여 도우라는 명을 내리셨다.

1785년 

정조9년 호남(湖南)의 유학을 닦는 이들이 말씀을 올림으로 월천사(月川祠)에 강성사(江城祠)의 현판을 하사하시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고 해가 오래 됨에 돌의 결이 일어나서 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이 묘갈명(墓鑛銘)을 지어 묘갈이 세워졌다.
141년 뒤인 1925에, 후손 종귀(鍾龜)가 독담하여 묘도(墓道)를 고치고 새 비를 세웠다.

1787년

정조11년 경기 전라 경상 삼도(三道)의 유학(儒學)들이 소를 올려 도천사(道川祠)에 현판을 하사(下賂)하셔서 서원(書院)으로 삼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셨다

1788년 

정조 12년 후손 영광(泳光)이 공행록(功行錄)을 적었다

1799년

정조 23년 창평(昌平)의 운산서원(雲山書院)에 모셔 제사 지내기로 했다. 전에 선비들이 선생의 손자 월천군 빈(越川君 彬)의 귀양살이 땅에 사당을 지었다. 이 해에 이르러 선생과 선생의 손자 장연백 래公을 모시어 제사 지내기로 하고 정조 21년 선비들이 수리함

1804년 

순조 4년 문덕후(文德후)가 말씀 올림으로 자손들에게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묘갈명(墓鑛銘)이 지어졌고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수리를 했다

1818년 

순조18년 연보(年譜)를 지었다  후손 취광(就光) 계항(桂恒)이, 행적에 관한 기록 및 여러 분들의 글에 의하고 공사의 기록을 가지고 곁들여 상고해서, 여러 해 동안에 걸쳐 꾸몄다. 이것을 서끝에 있는 박학(博學)의 이름난 분들에게 널리 청하여 교정을 더하여서 글편을 이루었다

1827년 

순조27년 후손 계항(桂恒)이 강화(江華)에서 채석한 빗돌을 운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남에, 그의 아들 병열(秉烈)이 광헌(光憲)과 합력하여 운반해 순조34년)에 깎아 세웠다. 

1854년 

철종5년 부조묘를 다시 짓고, 사손(祀孫)을 정해 세을 것을 명(命)하셨다.

1864년 

고종원년 의성(義城)현에 봉강서원을 지었다.
선생의 큰 손자 승로(承魯)가, 일찍이 이 고을을 다스리었음에 고을의 남쪽인 만천동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고종 갑자년에 선비들이 이에서 제사를 드렸다 

1871년 

고종8년 사손 재형(在衡)이 재현(在賢)과 비각을 지었으나 1940년 실화(失火)로 소실됨. 
2년 뒤 선생의 묘(墓) 밑의 대로상으로 옮겨 짓자는 전국의 공론이 있어 비(碑)를 옮기고
새 비각(碑閣)을 세움에, 사손 승헌과 후손 용한(龍翁) 및 영철(永哲)이 도왔다.

1872년 

고종 9년 윤병일(尹秉一)이 삼남(三南)의 유학 선비들을 이끌고, 선생의 사손을 등용해 주실 것을 청원드렸다.

1885년 

고종 22년 선비들이 상의해서 노산정사(蘆山精舍)를 건립했다. 윤병일 및 삼남유학을 이끌고 문묘배향을 청원
도천서원 철폐 시 서원의 재산이 향교에 이전되고, 향교의 구석방에다 흥학당(興學堂)이라는 간판을 걸고, 선비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으로 삼아 지내오다 선비들의 버릇이 변하고 박해져 공연히 낭비를 하여 거의 다 여유가 없었으나 고을에서 빼어나게 학문을 한 권상적(權相적) 이회근(李회根) 등이, 선비들 및 선생의 본손과 상의를 해서 사재(思齋)의 옆에다 정사를 지어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현판을 걸고 매년 봄 가을에 선생에게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방실(房室)이 좁아 많은 인사(人士)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정사(精舍)에다 사재(思齋)의 현판을 걸고 사재에는 정사의 현판을 걸기로 하고 박상태가 그 사실의 기(記)를 지었다. 세월이 오래 되어짐에, 기둥이 더러워지고 대들보가 꺾여져 임진년(1952)의 가을에 선비와 문씨(文氏)들로부터 특별히 다시 짓자는 의논이 나와 힘써 성취시키자고 합의를 보았다.
좌우에서 도운 사람은, 이병석(李炳錫) 권영현(權永鉉) 및 사손 승헌(승憲)과 병호(秉鎬) 주호(宙鎬) 창식(昌植)이었고, 일의 주관은후손 채호(彩鎬)였다.
윤병일 및 삼남유학을 이끌고 문묘배향을 청원함

1885년

고종22년 삼남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원드렸다.
전에도 정조대왕 때에, 태학생 이우(李福) 위백규(貌伯達) 등이, 선생을 문묘에배향하기를 청원드렸으나 결국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 해에 이르러, 정재경(鄭在慶) 박상태(朴尙含) 박제만(朴齋晩) 심의숙(沈宜肅) 홍재성(洪在誠) 김건수(金健秀) 이동범(李東範) 등이, 삼남(三南)의 선비들을 이끌고 거듭 상소하였다.

1928년 

장연서원(長淵書院)에 모시어 제사 지내기로 했다. 무진년에, 남쪽 땅에 사는 선비들이 성조(姓祖) 무성공(武成公) 및 경정공(敬靖公 公裕), 충숙공 극겸(忠肅公 克謙), 효혜공 유필(孝惠公 惟弼), 그리고 삼우당(三憂堂)선생의 충효, 도학, 절의, 공덕을 사모하고 의논하여 이 서원을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냈다.

1935년 

경현사(景賢祠)에 모셔 제사 지내기로 했다. 경현사(景賢祠)는 장성(長城)의 만수산(萬樹山) 밑에 있다 전국의 선비들이 고려 종말기의 여러 현인들의 도학과 절의를 숭모(崇慕)하여 의논 끝에 이 사당 (祠堂)를 짓고 봄 가을로 제사 지내기로 했다.


다. 충선공 문익점 선조 가전(家傳)

*가전(家傳)은 문익점 선조의 증손 치창(致昌)이 지은 글로 삼우당실기에 수록되어 있음

  - 天順 八年 갑신년( 세조9년 1464)   증손 사헌부 감찰 치창(致昌) 삼가 지음  

선생의 성은 문(文)이고 이름은 익점(益漸)이며 자(字)는 일신(日新)이고 호(號)는 삼우당(三憂堂)이라 하고 진주 강성현(晋州 江城縣) 출신이다. 그 분의 앞 세대(世代) 분들은 대대로 남평(南平) 출신이었고, 남평개국백 무성공(武成公)이며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한 어른의 후손이다.

고려시대에 공유(公裕)라는 분이 있어 벼슬이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 집현전(集賢殿) 대학사였으며, 시호(論號)를 경정공(敬靖公)이라 했다. 그리고 이름을 극겸(克謙)이라 한 분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였고 시호를 충숙공(忠肅公)이라 하였는데 그 분은 선생의 9대조가 되신다.

선생의 고조(高祖)는 이름이 득준(得俊)이고 강성백(江城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의안(毅安)이라 했다.

증조부(曾祖父)는 이름을 극검(克儉)이라 했고 세상을 뜬 뒤에 판도판서(版圖判書)의 벼슬이 수여되었으며 시호는 정열공(靖烈公)이라 했다.

조부는 윤각(允恪)으로 문한학사의 벼슬을 지냈고 세상을 뜬 뒤에는 전리판서(典理判書)가 수여되었다.

부친의 이름은 숙선(叔宣)이라 했고 성품이 맑고도 간결(簡潔)하고 음란한 색과 음탕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 옷과 음식을 검소하게 취함을 상례(常例)로 삼음에 세상에서는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 칭했다.

그 분은 오산(경북 청도) 고을을 맡아 다스린 일이 있었다. 그 고을의 풍속이 극심한 추악에 빠져 있고 불교에 현혹되어서 인륜도덕을 차리지 못하기에, 그 분은 즉 예의와 효제의 도를 밝히었다. 그 도를 행한 지 3년만에 풍속이 크게 좋아져서, 그로 말미암아 고을 이름을 청도(淸道)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분은 벼슬이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끼었으며, 세상을 뜬 뒤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수여받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었다. 모친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에 봉해진 조씨(越氏)였는데, 세상 뜬 뒤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수여받았는데, 평장사 조진주(趙珍柱)라는 분의 따님으로 정숙하고도 아름다운 덕을 지니었다. 그 분이 잉태를 했을 때에, 큰 별이 안겨졌다가 갑자기 그 별이 떨어진 꿈을 꾸었다. 그 꿈을 꾼지 얼마 아니되어 선생을 낳았는데, 그 때는 곧 지순2년(至順2年: 충혜왕원년 )인 신미년(1331)의 2월 8일이다.

선생은 태어나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빼어나게 영특했고, 왼쪽 어깨에 노란 점이 있어 마치 삼태성(三台星)의 모양과 같았다. 세 살이 되었을 적에 모부인께서 꿈을 꾸니, 공이 손으로 달 속의 계수(桂樹)의 가지를 꺾는 것이었다. 부친 충정공께서는 그 꿈을 이상히 여기어, 공의 이름을 익첨(益瞻)이라 부르게 했다.

6, 7세에 이르자, 공의 태도와 성질이 부드럽고 자세하며 강직하고, 뜻은 크고도 깊어 여러 아이들과 즐거히 놀려고 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처음으로 학당(學堂)에 들어갔는데, 심히 추운 때나 아주 더운 때나 비가 오더라도 반드시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처소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하고난 뒤에야 공부를 하였는데, 책 읽기를 언제나 상례적(常例的)으로 함으로,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다 칭찬해서 말하기를, "이 애는 반드시 큰 진보(進步)가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열한 살이 되어서 가정 이곡(稼亭 李穀) 선생한테 학문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이곡 선생의 아들 이색(李穡)은 학문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어서, 선생은 그 분과 교제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벗이라 여겨 잘 대했다.

열여섯 살에 혼례식을 올리고, 스무 살에는 고을의 천거로 경덕재(經德齋 :예종4년 1109 에 설치한 국립학당 7제중 시경전문 교육기관)에 들어갔다. 때에, 선생은 방정(方正)한 품행에 선량하고 공평했으며, 문장은 법식에 맞고 아담하여 당시의 세상에 이름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선배들이 천거(薦擧)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이 경덕재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는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풍산(風山) 두 글자를 주었다. 그래서 선생은 '점(漸)"자를 따서 오늘에 전하는 이름으로 고치었다.

23살에는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급제하고 30살 때는 신경 동당시(新京 東堂試)에 급제했는데, 삼장(三場: 과거의 초,중,종장)에 연거퍼 통과하여 제7등으로 뽑히었다. 신축년(1361)에 예문관(藝文館)의 직강(直講)에 선임되고 임인년에는 승봉랑(承奉郎)에 올랐으며, 계묘년(1364)에는 여러 차례의 승진으로 사간원(司諫院)의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이르렀다. 조정의 옳고 그른 것을 알아서 말하지 않음이 없자, 임금의 부족을 잘도 다 족하게 해준다는 칭찬이 있게 되었다.

이에 앞서 국가에는 우려되는 일이 많아 서방으로는 홍건적(紅巾賊)이 걱정이었고, 남으로는 왜놈의 도적들이 걱정거리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조정한테 책망을 받았는데, 이미 원나라로 들어간 모든 사신들이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봄이 다 가도록 매달 초하루에 천자가 천하의 제후들에게 정령(政令)을 내리면서도 허물을 용서한다는 영(令)을 내리지 않아 사신으로 가서는 돌아오지를 못하였는데, 안팎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하고 두려움에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아뢰고 원의 황제 마음을 돌리게 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사신 가는 것을 위태롭게 여겨 원나라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은 서장관(書狀官: 사신은 정사, 부사, 서장관의 순서임)으로 원나라에 갔다. 원은 선생에게 벼슬을 주어 예부(禮部)의 시랑(侍郎)으로 삼고 머물게 했다. 선생은 여관에서 숙식(宿食)을 하고 있었는데,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조가달(趙可達)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여관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여기는 시랑이 유숙할 곳이 못 되니, 나를 따라가 놀고 지내면서 본국으로 돌아감을 기다림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선생은 그 사람이 교만스럽고 뽐내는 태도를 보이기에, 마음이 심히 좋지 못해서 사양하여 말하기를 "작은 나라의 사람이 큰 나라에 와 벼슬을 하고 있는데, 그 기간이 길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 사람은 웃고 가며 말하기를, "당신은 사양하지 마오.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소이다"라고 했다. 선생은 그 사람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고 의심이 나서, 사람을 시켜 그 뒤를 좇게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본국 고려의 찬성(贊成)인 이공수(李公遂 : 함께간 정사)가 또한 원의 태상경(太常卿)이라는 관직을 받고 있었다. 마침 제사에 관한 일로 선생이 가서 만나고, "어제 나를 찾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이공수가 말하기를 "모양이 어떤 사람 같았소?" 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이 말하기를, "그는 반드시 흉한 사람일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공수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그는 반드시 타쓰티에물(塔思皓木兒)이라고 부르는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3남)일 거요." 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비로소 덕흥군이 찾아와 자신을 꾀하려고 한 것임을 알았다.

애당초 최유(본국압송후 사형됨)가 원나라로 도망하여 원의 황제 및 황후 기씨(奇氏)에게 거짓말을 해서, 본국을 죄에 빠지게 꾸미었다. 즉 고려왕을 폐하고 그대신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가 있는 이들을, 다 덕흥군에게 붙게 하고자 혹은 관직을 가지고 뵈고, 혹은 뇌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선생만은 강직함을 꺼리어서 덕흥군으로 하여금 속을 떠보게 했고, 결국 한패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원의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되, "문 아무개는 신진(新進)이기는 하지만 강직한 선비이옵니다. 그는 반드시 따르기를 응하지 않을 것이오니 특히 위세로 제압을 하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어명(御命)에 대해서 이럴까 저럴까 하고 우물거리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 황제는 그러겠다 했다. 이 때에 원의 사신으로 고려에 갔던 이가노(李家奴)가 고려의 왕인(王印)을 몰수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는 덕흥군을 내세워 고려 왕으로, 치산빠오누(奇三寶奴 : 기씨의 族子)를 원자(元子)로, 김용(金鏞)을 삼사판사(三司判事)로 하고, 최유는 자신이 좌승상이 되고 고려의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있던 사람들을 다 거짓 관직에 임명해서 덕흥군의 정권에 복종케 했다.

선생이 불응하고 따르지 않으니 황제는 곧 공을 불러 억누르고 위협해서 말하기를 "근래에 너의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 도적이 나라 안에 가득케 했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며 나라가 망해지려 하고 있다. 그래서 내 이제 그를 폐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노니 너희들은 다만 내 명을 따르기만 하라." 라고 했다.

 선생은 황제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바로 대답해서 말하기를,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 두 군주가 없사옵니다. " 라고 했다.

이에 황제는 성내어 말하기를, "내 이미 영을 내렸는데도 네가 거역할 수 있단 말이냐?" 라 하고는, 곧 덕흥군의 한쪽 방에 구류(拘留)를 시키고, 42일 동안이나 외부와 통하지 못하게 두절시키었다. 그리고 최유는 외부 사람들에게, "문 아무개는 이미 우리 쪽에 붙었다. "라고 선언을 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비로소 최유한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만고의 거짓말을 하는 도적 최유가 본국을 해칠 것을 꾀해서 덕흥군에게 협동하고 원의 황후 뜻을 받아 도리어 야합(野合)하며, 황제의 명을○○○○○○(글이 불분명한데 오자로 짐작됨 )하고 재상되는 신하들과 어울려 사취며 우리 나라 사람들을 속여 꾀더니 그만 이런 꼴에 이르게 했구나.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그 놈의 꾀에 말려 들까보냐?" 라고 했다.

최유는 굴복시킬 수가 없음을 알고, 덕흥군에게 꾀해서 이르기를, "무릇 사람이 오래 욕되어지면 원한이 생기고 나무람이 쌓여지면 원수가 되어 지는 것이니, 빨리 해치우는 것만이 좋은 일이겠습니다. 이제 만일에 당을 맺어 무리들과 연합이 되어진다면, 그 때엔 후회한들 어찌 하겠습니까?" 라고 했다. 그러나 덕흥군은 그 이름남을 싫어한 나머지 그리 못하게 하고 황제에게 말하기를, "문 아무개는 달래어 회유를 해야 하고, 억눌러서는 아니 되옵니다. " 라고 했다. 황제는 그의 말을 따라 공에게 일을 보도록 명했다.

이에 선생은 구속을 면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인데, 선생은 바로 간원(諫院)으로 가 말하기를, "나는 고려의 정언(正言)으로 비록 이 큰 나라에 와 있기는 하나, 어찌 잘못에 대해서 언책(言責)이 없을 것이리오?" 라 하고는, 모든 거짓의 서류나 황제의 명령서 및 회유하는 글 수십 여 통을 다 불태우고, 자신의 소신(所信)을 펴는 글을 황제에게 올려 황제가 보고 알기를 기약하려 했다. 황제는 선생의 뜻을 알고서 마음 속으로 퍽 가상히 여기었으나 이미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아 요앙(遼陽) 땅의 군대를 내어 보냈던 터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을 위하여 말하기를, "이익되는 것도 없고 그리고 위태로운 일이오." 라고 했으나, 선생은 더욱 소신을 굳게 가져 굽히지 않았다. 선생이 아직 글을 올리지 않고 있는데, 황제가 불러 회유해서 말하기를, '너희 임금은 황음(荒淫)하고 법도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폐위시키고 다른 이를 세우려는 것인데, 네가 어찌 여러 말을 하는 거냐?"라고 했다.

선생이 대답해서 말하되, "미친 자의 말이라도 성인(聖人)께서는 가려 취하신다고 하셨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유념을 하시와 저의 의견을 채택하여 주옵소서 신은 작은 나라의 신진으로써 외람되이 천자님의 뜰을 밟고 있사옵니다. 폐하가 비록 기분을 상쾌하게 하시고 용안(龍顔)을 보여 주시면서 제가 울리는 말씀을 들으신다 하더라도, 신은 자연히 두려워 몸이 움츠려 짐을 참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항차 천둥과 같은 성내심과 생각지 않은 것으로 억누르심에 있어서야 다시 말할 나위가 있사옵니까?

폐하께옵서는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는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들으신 나머지 아무 죄도 없는 군주를 자리에서 내쫓으시려 하시었으니, 사정을 아뢰어 부탁드리고 정성을 나타낼 수 있게 못하고 있사옵니다. 신은 이제까지 원통하옴을 품고 마음의 답답함을 참았으며, 또 죽을 곳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는 역적 한 사람의 목을 아깝게 여기시다가 천하 후세의 비방거리가 되지 마옵소서." 라고 하자, 황제는 얼굴빛을 가다듬어 신중한 태도로 "말은 진실로 충성스럽다만 생명에 대한 꾀는 어떻게 세웠는고?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된 것이니 너는 그런 말 하지 말라."라고 했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사나이의 굳은 뜻은 뺏을 수가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신이 비록 말을 않는다 하더라도 본국에는 신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사옵니다. " 라고 했다.

황제는 발끈 화를 내어 말하기를, "네가 이같을 수 있단 말이냐?"라 하고는, 곧 분부를 받아들이라고 명했다. 선생은 손으로 땅을 짚고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의지는 천지와 같이 분명하옵고, 군주를 배반하여 역적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부끄러운 바이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 라고 하니, 황제가 크게 노해서 말하기를, '너는 변방 속국의 지체 낮은 신하로서 천자의 명을 좇지 않는데, 네가 살자고 한들 살아날 수가 있겠느냐?" 라고 말했다.

선생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의(義)로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 옛 사람의 훈계 이옵니다. 옛날의 주나라 무왕(武王)은 성인이요 태공(太公)도 현인이었는데, 함께 모질고 무도한 군주 주왕을 정벌하였사옵니다. 그리나 백이, 숙제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어 멈추게 하며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하였는데도, 후세에서는 그 일을 칭찬하여 왔나이다. 현재 저의 나라 왕은, 이제까지 상(商)나라 주황과 같은 큰 모짐이 없었고 변방의 신하로서의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사온데, 폐하께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의 말에 지나치게 미혹되시어 공연히 왕을 폐위시키려 하시옵니다. 신은 백이숙제와 같이 지하에서 놀기를 원할지언정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와 천하에 서 있기는 원하지 않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먼저 신을 죽이시어서 천하에 고해 주시음소서 " 라고 했다. 이 말에 황제는 더욱 노해서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원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충간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충신이옵니다, 원컨대,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이에, 옥에 가두었다가 11월에 교지(월남)로 귀양을 보내니, 원나라 조정의 모든 학사(學士)들이 선생의 충성과 절개를 사랑하고 선생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을 사람들은 비록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반드시 구해 줄 것이오. 종의(鍾儀)는 다른 나라에 잡혀 갔으나 죽지 않았고, 소무(蘇武)는 북해(北海)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남쪽 거치른 땅인들 어찌 신령(神靈)이 없겠소?" 라고 하였다.

다음 해 2월 귀양살이 땅에 도착했다. 토인(土人)들이 선생의 거동과 모양이 단정(端正)한 것을 보고는, 선생을 위하여 탄식해서 말하기를, "이 땅은 풍토가 심하게 나빠서, 평소 이상한 병이 많습니다. 군자께서 만일에 병이 나면, 반드시 생명이 위태롭게 될 것이니, 부디 약을 구비하십시오." 라고 했다. 이 말에 선생은 웃고 말하기를, "내 나라를 지킬 수가 없으면서 산다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일세. 그런데 어찌 더 살자고만 원할 것인가? 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병이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나를 구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땅에서 죽을 것이고 하늘이 만일 구해 주실 것 같으면 나는 반드시 살아 돌아갈 것인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나? 그러니 그대들은 다시 내게 떠들지 말게."라고 했다. 선생은 항상 주역(周易)과 예(禮)의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좀 있다가 거처소에 자연히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생기었다. 그 물맛이 달고도 시원하여 마시면 심신이 경쾌하게 되었는데, 토인들이 그 물을 마시면 전에 있던 병도 낫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그 물을 길으면서 말하기를, 문어른은 하늘이 아는 분이다 라고 했다.

황제는 요양(遼陽)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해서 말하기를, "내 무슨 낯으로 다시 문 아무개를 만나 볼 거나?" 라 하고는, 곧 돌아오도록 명을 내리었다. 선생은 3년만인 가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 귀환을 했는데, 병오년(공민왕 15년 1366 36세때) 9월이었다

처음 선생이 교지의 땅에 당도했을 때엔 같이 말 벗이 될 사람이 없고, 다만 선비 달성귀(達成貴)라는 사람이 찾아와 상종을 했는데, 사람이 아주 바르고 고상(高尙)하고 우아(優雅)한데다가 글의 실력도 여간 아니었다. 선생은 그를 심히 기꺼이 대하여 같이 많은 것을 토론(討論)했었다. 선생은 운남(雲南)지방의 일을 많이 알 수 있어서, 손수 그것을 기록하여 운남풍토집(雲南風土集)이라 이름을 붙였다. 달씨(達氏)는 선생이 용서를 받아 귀환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찾아가 위로하고 축하를 하며 시 한 수를 지어주었고, 토인들도 지방의 경계까지 나와 전송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중국의 서울을 향하여 출발을 했다. 도중 밭 가운데에 백설과 같이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심히 이상히 여기어, 따르고 있던 김용(金龍)으로 하여금 그 꽃을 따게 하자 갑자기 한 노파가 나타나 다급한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길래 엄하게 금지하는 것을 따는 거요? 만일 관청에서 알게 되면 당신이나 나나 같이 벌을 받소." 하고는, 황급히 와서 빼앗다가 선생의 당당한 풍채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서, "이건 목면(木綿)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법으로 금함이 여간 엄하여, 다른 나라가 이것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께서 이것이 욕심나시거든 모름지기 비밀히 감추시어서 수색당하지 않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그 때 옛 시에 목면의 꽃은 금강(錦江 : 중국 사천성의 강)의 서방에서 피는 것이라고 했는데, 반드시 이것일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고, 붓대 속에다 담아 가지고 왔다. 중국의 서울 연경(燕京: 현재의 중국 북경)에 도착을 하자, 황제가 극진히 위로하며 뉘우치고 깨달은 뜻을 보이고, 다시 예부시랑(禮部侍郎)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하면서, 장차 크게 등용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해의 정월이었다. 선생은 여러 번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해임(解任)을 요구했으나, 황제가 허락 하지 않으므로, 늙은 어버이가 고향에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정을 지성으로 아뢰어, 사임하는 뜻을 간절히 나타냈다.

황제는 안타깝게 여겨 허락하며, 좋은 말과 황금을 하사하고, 예부에 명해서 예를 극진히 차려서 보내라 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의 뭇 선비들은 선생을 애석히 여겨 송별연(送別宴)의 자리에 나와 시를 지어 주고 선생이 화답을 하였는데 그 시와 글들이 한 책이 되었다.

2월, 선생이 개성(開城)에 도착하니 왕이 탄복하여 마지않고,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 藝文官提學 兼 知製敎)를 제수(除授)했는데, 얼마 아니 되어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어버이 뵈러 갈 것을 원했다. 선생이 어버이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집에 있으면 잠깐이라도 어버이의 옆을 떠나지 않았고,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한 해에 두 번 뵈려 못 감을 한탄하였다. 이 때에 만리 밖의 이역에서 3년만에 돌아감이라 다만 돌아가 뵐 것을 급하게 서두르니, 그분을 아는 사람들이 선생은 근심 중이나 부귀한 중에서도 효도를 다할 수 있는 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목면의 씨를 정원에다 심었는데, 토질이 마땅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결국은 건조한 땅과 습(濕)한 땅에 나누어 심고 백방으로 마음을 써 배양(培養)했다. 그러나 아직 재배의 재주에 밝지 못해서 처음에는 번성했다가도 끝내는 시들어, 다만 한 나무만 남아 있었던 것이 3년에 이르러선 번창해서, 그 꽃받침은 5색을 갖추고 꽃의 털은 옥의 빛과도 같았다. 이에, 원근의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 들었는데, 즐겨 구경한 사람들이 각기 씨를 얻어다가 심으니 목면은 한 마을로부터 한 나라에 퍼져서, 그 유익함은 넓혀졌다. 그러나 특히 목화를 이용케 할 기계를 알지 못해서 사람들이 다 손으로 씨를 뽑았는데, 마침 원나라의 승려로 장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산천이 기특하게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유람을 하다가 영남(嶺南) 땅에 이르렀는데, 그는 곧 외방의 물산(物産)을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득 목면화를 보고는 깜짝 놀래서 말하기를, "이건 남방 땅의 산물이어서 동방의 땅에서는 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땅으로 옮아와 이 같이 번성하고 있을까?"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선생의 장인인 정천익(鄭天翼)의 집에 유숙하면서, 씨를 빼는 수레를 만들어 공개하여 보였다. 그 후에 선생의 손자인 래(萊: 삼우당의 삼남 중실의 장남)가 실 뽑는 수레를 만들었고, 영(英 : 삼우당의 삼남의 차남)은 무명베 짜는 방법을 마련했다. 그래서 뒷사람들은 그 일로 말미암아 이르되, 실을 뽑는 것을 문래라 부르다 물레가 되었고, 짜서 베가 되어진 것을 문영이 '무명'이 되어 마침내 이 나라의 말로 되었다는 것이다.

겨울에, 성균관(成均館)의 학관(學官)으로 선발되었다. 전에 국가가 신축년에 병화(兵禍)를 입은 이후 학교가 황폐되어. 왕은 열심히 학교의 부흥에 힘써, 성균관을 다시 짓고, 가르치는 학관이 적으므로, 당시에 학문이 깊은 학자들을 선발함에 즉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승인(李崇仁) 등이 다 그 선발에 들었다. 다음 해의 정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겸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때에 목은 이색(李穡)이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고 있었는데, 공의 강론함이 뜻 깊어 다른 학자가 미치지 못함을 보고 자주 칭찬하고 말하기를, "문 일신(文日新)이 어려운 것을 말함에, 그 미묘한 말 깊은 뜻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다. " 라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근본 인물(人物)이 된다고 추앙을 했다.

기유년(공민왕18년 1369)의 가을, 부친상을 당하고 묘소 지키기 3년을 했는데, 그 상을 지내는 예법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법식을 따랐다. 신해년에 3년 상을 마치고 임자년에는 병이 나 거동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책을 항상 좌우에 펼쳐 놓고는 베겟머리를 이리저리로 돌려 기대어 보았는데, 평소 공부는 대학(大學)과 주역(周易)을 깊이 했었다. 계축년에 목은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천하여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을묘년(우왕원년 1375)에 중현대부 좌대언(中顯大夫左代言: 정3품)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겸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고, 그 해 겨울에는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좌천당했다.

당시에 북원(北元)이 사신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전했는데, 그 내용에 교만스러운 말이 있었다. 권세를 잡고 있는 신하인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은 여전히 원나라를 섬기고자 하되, 그들은 그 사신 맞이함을 의논함에, 선생은 정몽주 정구용 박상충 등 열 몇 사람들과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원나라 사신을 물리칠 것을 청원하였는데, 그 상소문에 쓰인 말이 심히 알맞고 적절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간(臺談)이 또한 그 일을 논하여 부당하다 말했는데, 지윤과 이인임은 임금에게 충간함을 맡은 신하들이 대신(大臣)을 탄핵(彈劾)함은, 작은 일이 아니라 하여 다 옥에 가두었다. 이에 선생을 청도군수로 내쫓고 정몽주는 언양군수(彦陽郡守)로 내쫓았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다 곤장으로 치는 형벌과 먼 고을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내렸다.

선생이 길을 가다가 한주(韓州: 한산군의 옛이름)로 목은을 방문했다. 당시에, 목은은 병으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요양하고 있었는데, 그 분은 시를 지어 주고 전별을 했다.

병진년(우왕2년 1376)에 죄 사함을 받았다. 당시에 왜놈의 도적들이 큰 떼를 지어 몰려와서, 영남지방의 바닷가 고을들이 그 도적들한테 짓밟히게 되자, 그 안의 백성이 달아나는 등 소요를 떨었다. 이에 조정이 걱정되어, 특별히 선생에게 그 곳의 공사(公事) 처리를 허용(許容)했다.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고 3년간 묘소를 지키었는데, 상을 마치는 동안에 지키는 예(禮)는 모두 먼젓번에 상을 치루었을 때와 똑같이 하였다. 정사년(우왕3년 1377) 봄, 왜구들의 세력이 왕성해서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는 바람에 고을 안이 쓸쓸하게 텅 비었으나, 선생은 흘로 상복을 입고 소리를 내어 울며 영전(靈前)에 제물 올림을 평상시와 같이 하고 죽더라도 그 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므로 도적들도 감탄을 하였다.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나무를 쪼개어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지어다)의 네 글자를 써서, 묘의 길 밖에다가 세우고 물러갔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을 모신 곳만 처참한 화를 면했을 뿐아니라, 강성(江城)의 한 고을이 다 그 덕을 입어 모두 완전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늘 옆에 모시고자 하여 떠나지를 않았다. 


무오년(우왕4년 1378)에, 우리왕조 태조(이성계)께서 선생을 위문하러 가셨다.

때에, 태조께서는 벼슬이 이미 2품의 위치에 계셨고, 남으로 내려가시어서 왜놈들을 막고 계셨다. 선생을 위안하러 가셔서는, 나라의 당면한 일을 물으시기를, "왜놈들이 백성들을 모질게도 해침을 당한 지가 이미 몇 해가 되어서, 호남 영남 땅이 우리나라의 소속이 아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만 공께서 있는 곳만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강성의 온 고을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는데, 그건 어찌하여 그런 것입니까? 원컨대 공께서는 국가를 위하여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내 지금 적들을 막아내는데 그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 라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가난하고 지위 낮은 선비인데, 어찌 군대일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장군이 만약 양가(良家) 자제(子弟)들이 포로가 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수천금(數千金)을 내던질 수가 있어서 간첩을 이용하여 돌려오게 된다면 적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적을 쳐부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길이 혹 그러한 일중에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라고 했다.

태조께서는 기뻐하고 말씀하시기를, "공의 말씀을 따른다면 왜놈들을 쳐 부수기는 필연적이겠습니다. "라 하고는, 곧 작별을 하고 떠나갔다. 태종(太宗)에게는 "문군(文君)이야말로 진실로 의리의 선비다. "라고 말씀하셨다. 뒤에 태조께서 선생의 말대로 해서, 많은 포로된 자를 손에 넣고 적군의 허실을 알지 못함이 없더니, 과연 경신년(우왕 6년 1380)에 운봉(雲峰:전남 남원)에서의 대승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에, 상을 다 마치었다. 우왕5년 1379에는 병이 나 드디어는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그 때, 간악한 신하가 제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고, 승려들이 마음대로 행동했었다. 선생은 몸담지 못할 세상임을 스스로 깨닫고, 곧 숨어 살기를 마음에 두었다. 밖의 일을 듣지 않고 병을 이기며 경학(經學)에 골몰하고 자신이 사은(思隱)이라는 호를 지어 썼다.

선생은 일찍이 한탄해서 말하되,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선비가 일 없이 날과 달을 보내는 것은 천지간의 한 마리 좀이라'고 하였으니 내게는 이왕 이때를 구할 힘이 없기는 하나 어찌 세상을 구하는 데 책임이 없단 말인가?" 라고 했다. 끊어진 학문을 이어지게 하고, 옳지 못한 도를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래서 날로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을 읽으며, 전국의 세속(世俗)이 잘못 물들여진 것이 개혁되기를 염원했다. 계해년(우왕9년 1383) 봄에, 조정이 선생의 착한 행위를 칭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고향 마을에 포창하도록 명했다.

이조의 태조는 동북면 병마지휘사(兵馬指揮使)로 있었는데, 선생의 효행을 왕에게 아뢰어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상례의 법이 무너지고 잘못되어 비록 이름 있는 선비나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다 백일 만에 탈상을 하여 복을 벗사온데, 다만 문익점(文益漸)만은 어머니의 묘를 지키고 슬퍼하는 예의를 다 지켜서, 바다 속에서 사는 되놈들로 하여금 극진한 효도에 대하여 감복케 한 자취가 있사오니, 그의 풍속을 두텁게 하고 세상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킨 아름다운 짓은, 마땅히 정문을 세워 포창하라 는 명이 있어야 하옵니다. " 라고 함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가을에, 몇 간의 초옥(草屋)을 지어 현판에다 삼우당(三憂堂)이라 써 붙이고, 선생은 삼우거사(三憂居士)라 자칭했다. 선생은 즉 왕국이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했고, 성인의 학문이 잘 전해지지 못했음을 근심했으며, 자신의 도가 확립되어지지 못함을 근심했던 것이다. 이에, 학자들은 이로 말미암아 삼우선생이라 일컬었다.

을축년 여름에, 선생의 큰 아들 중용(中庸)과 다음 아들 중성(中誠)이 같이 문과(文科: 방목에 중용은 기록이 있으나 중성은 없다)에 급제하자 그 영광스러운 소문이 크게 퍼졌으나,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는데, 그것은 곧 급제자의 발표에 대해서 헐뜯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왕14년 1388 가을, 왕의 부름을 받고, 선생은 병을 이유로 사양을 할 수 없어, 드디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서연동지사(書達同知事)를 제수 받았다. 그 때, 목은(牧隱)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고, 이태조(이성계)께서는 시중(侍中)을 맡고 계시며, 서연(書筵)을 열었는데 또 사헌부(司憲府)와 중방(重房)에 영을 내려 사관(史官) 1인이 바꾸어 날로 들어와 왕을 모시게 했다. 그러므로 선생을 불렀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글을 올려 학문을 하는 도를 논했다.


창왕및 공양왕원년인 1389 8월에, 탄핵을 받고는 관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

전에, 선생이 벼슬 없이 지냈을 때 항상 국가가 마음이 걸렸는데, 비록 조정에 서게 되었다 할지라도 역시 속에 품었던 것을 펼 수가 없어서, 마치 궁한 사람이 돌아갈 바가 없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당시 간관(諫官)인 이준등이, 사전(私田)은 돌려 줄 수 없다는 것으로 상소해서 논쟁을 했다. 선생은 이색(李牆) 이림(李림) 우현보(禹玄寶) 등과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므로, 병을 핑계대어 서명하지 않았었다.

다음 날,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자리로 바로 갔는데, 대사헌(大司憲)인 조준이 탄핵하여(내용은 고려사 열전에 있슴)  이에 선생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양왕2년 1390 8월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때 목은은 탄핵되어 귀양 감을 면하지 못했다. 선생은 전야에 깊이 묻혀서, 그대로 여생을 마치려 했는데도 이미 벼슬을 제수하는 명을 사양할 수가 없어 드디어 조정으로 나갔다. 10월에는 상소를 하여, 당시 해야 할 일을 논해 열거했는데 그것은 여덟 가지였다 (내용은 경오년 봉사의 소에 있슴) 이런 것을 상소하니, 왕께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1월에는, 신병으로 사임하게 해달라고 청원드려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에, 선생을 송별(送別)하는 사람으로는 조정의 인사(人士)가 다 나왔다. 조준(趙凌)도 또한 왔었는데, 즉 선생의 아량(雅量)에 감복해서였다. 그 때에 도로에서 보는 자들 중 어느 사람은 탄식하고 말하기를, "문공(文公)은 조정을 떠나나, 외로운 정공(鄭公 정몽주)은 어찌할 거나?" 라고 했다.  신미년(공양왕 3년 1391) 2월 8일은, 곧 선생의 회갑(回甲)날이었다. 당시, 가문이 한창 왕성할 때여서 자제와 일가 사람으로 벼슬이 높은 이가 많았다. 잔치자리 베풀기를 번갈아 모시며 기쁘게 했지만, 선생은 다만 안색에 근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술자리가 끝난 후 일가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선생께서는 말하기를, 저녁에 하늘의 현상을 보니 별이 법도를 잃었고, 낮에 인사(人事)를 살펴보면 백성들은 각자의 생업(生業)이 없다. 그런데 어찌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느냐?" 라고 했다. 공양왕4년 1392에, 선생은 집 문을 꼭 닫고 매양 자탄해서 말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4월에, 정시중(鄭待中정몽주)이 순절(殉節)했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아무 죄도 없이 죽었구나. 아무 죄도 없이 죽었어! 아, 어찌 할거나 어찌 할거나 "라 하고는, 자리에 누어 신음하고 거동을 하지 않았다.

7월에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땅에 엎드려 소리를 내어 울기를 며칠이나 하고, 집문을 꼭 닫고 찾는 손님을 사절했는데, 이후로 집 앞의 뜰밖에 나가지 않은 일이 5년 간이나 되었다.

갑술년 4월, 이 태조께서 사람을 보내시어 부르시었지만, 병이라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고, 7월에 다시 불렀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자(使者)가 돌아가니, 태조(太祖)께서는 가엾게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문군(文君)은 진실로 의로운 선비여서 끝내 나를 위해서 굴복하기를 응하지 않는구나." 라고, 감동하여 칭찬을 마지않으시고는, 3품의 벼슬을 제수하고 봉록(俸祿)과 상을, 조정에서 일하는 대신들의 예대로 주라고 특명(特命)을 내리시었다.

기묘년의 겨울 정종대왕(定宗大王)께서 예랑(禮郎: 예부의 정랑과 좌랑)을 보내시어 문병(間病)을 하셨는데, 선생은 일어나 감사의 절을 할 수가 없어 다만 감사의 말만 했을 뿐이었다. 사자가 돌아가자, 왕께서 "문군(文君)의 기거와 동작은 어떠하더냐?" 라고 물으심에 대답해서 말하기를, "신(臣)이 그 분의 형색(形色)을 보건대, 온몸이 여위어 문답을 할 수 없었사옵니다 " 라고 하니, 왕께서는 슬픈 탄식을 하시어 마지않았다.

경진년(정종2년 1400) 2월 8일에 선생이 본댁에서 세상을 마치니, 진성현(조선초의 단성현의 이름)의 현청 소재지에서 서부로 5리에 있는 갈로개산(葛蘆介山)의 유방(酉方)을 향한 언덕에 예장을 하라고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하시며, 묘사를 건립하고, 묘 지키는 사람 넷을 두게 하시고 세금과 부역을 면케 하고 땅 2결(二結)을 주시었다.

신사년 겨울에 태종대왕께서는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사(嘉靖大夫 議政府參知事) 경연지사(經筵知事)겸 예문관제학 홍문관 겸 춘추관지사의 벼슬을 수여하시고, 갈충보국계운순성좌익택중 광리정량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고 충선(忠宣)의 시호를 내리셨다. 부조묘(공이크고 덕이 큰 분을 4대가 넘어도 영구불변하게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현재 전남 보성군 미력면에 있다 )를 세우게 하시고 제전 백결(祭田 百結)과 노비 70인을 하사하시며, 정문(旅門)을 세우게 하시고 집에 조세(租稅)와 부역을 면케 하시며,자손을 등용함이 있어 두텁게 은혜를 베풀어 구호하심은 만세에 고쳐 더하지 못할 은전이었다.

경신년에 세종대왕은 특명을 내리시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벼슬을 높이시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시어 제일 으뜸되는 큰 공을 세운 분으로 올렸다. 또 정승 남지(南智)에게 명하여, 영남지방을 살피어 잘못을 바로 잡게 하시고 선생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게 하시며, 자손을 등용하는 두터운 은혜로 보살적시는 은전을 펴시었다. 세조3년 1457에 왕께서는 친히 글을 지어 예랑(禮郎)을 보내시사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시게 하시고, 제전(祭田)을 더 불려 주시며, 다시 자손을 등용하여 두터운 은혜로 보살피시는 은전을 펴시었다. 아, 어진 임금이 다스리고 계시는 조정이 선생의 공을 생각하셔서 후손에게 깊은 은혜를 내리시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떠났으되 은택은 없어지지 않는다.

선생의 천성은 지극히 꿋꿋하여 충효의 큰 절조를 지키었고, 어려서 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에 성리학의 깊은 지경에까지 이르러 정밀하고 자세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해 말함이 다 알맞음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덕이 높은데도 위치가 낮아 그 큰 포부를 다 펼 수가 없었다. 큰 어려움을 당할 때도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대책을 세우고서도 그 공을 차지하지 않은 것은, 평생에 닦은 학문 중에서 나온 바였음이 아닐까 여겨지나, 그것은 다만 천성으로서 만 그랬을 것이 아니로다.

선생은 자신의 몸을 단속함에 검소함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 가르침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해 우애하라는 것을 가지고 으뜸을 삼았으며, 물러나 있음에는 자신의 학문을 걱정하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걱정하여 학교를 건립해서 옛날 어진 임금의 법도를 회복케 하고, 상제(喪祭)의 법을 바르게 함에는 주자(朱子)가 지은 가례(家禮)의 법식을 쓰며, 의관(衣冠)의 제도를 고쳐 명(明)나라의 제도를 따르도록 할 것을 청원했다. 이것이 선생께서 한 일의 대강인데, 하물며 또 목면(木綿)이 사람들의 생활상 밑천으로 쓰이어 끝이 없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 것인가? 우리 어진 왕조(王朝)의 명운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훤이 빛나게 된 것은 실로 목면으로 말미암아서 였다. 어진 왕조가 선생을 포창하고 높이며 자손을 너그러이 등용했음은, 그 어찌 아무렇게나 한 일일까보냐.

나는 못났으나, 역시 조상의 은덕으로 외람스럽게도 사헌부(司憲府)의 관원이 되었는데, 성품이 어리석고 둔한데다가 학술(學術)을 익히지 못하여 인재가 못되므로 버림을 받았으니, 이것은 다만 어진 세대가 바라는 바를 저버린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선대의 가문을 욕되게 함이다. 아, 지난 세조7년 1461의 겨울에 3종형과 같이 서울로부터 진성(珍城: 단성)으로 선대의 묘를 살피러 가 종가(宗家)에 들러서 선대께서 남기신 것들을 두루 보았다. 그것들은 병오년에 불타고 남은 것도 제법 없어져서 남은 것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에 오래 갈수록 더 없어질 것이 염려가 되어 분수에 넘는 짓임을 불구하고, 사방으로 찾아 모으고 보고 들은 것을 서로 참고로 대어 보아서, 약간의 글을 적고 이 뒤에 선인의 업적을 계승하여 지을 이가 나을 것을 기다리는 도다.

 

가전(家傳)의 뒤에다 붙이는 글

- 중중21년 1526 음력 5월 10일 음애(陰崖) 이자(1480~1533 우참찬 농가직설편찬) 지음 

내 문공(文公)의 이름을 역사책에서 보고 속으로 목면(木綿)으로 말미암아 유명하다고 여기었으나, 그 분의 후손 치창(致昌)이 서술한 말과 여러 어진 분이나 명망이 높은 분들이 지은 글을 보고선 곧 일을 논의함에 소홀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닦는 도에 공이 있었으며 진실로 도학으로 자립할 수 있었던 분이었음을 알았다. 그 분은 목면(木綿)의 씨앗을 짐꾸러미에 넣어다가, 그것을 뜰의 흙에다 뿌려 길렀다. 그 분은 본시 뜻을 물건에 두었음이 아니나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功이 공(公)으로 말미암아 시작이 되었으니, 우리의 역대 어진 임금께서 벼슬로 포창하시고 후손에게 은택을 내리신 은전(恩典)은 물론 지나친 일이 아니다.

대체로 끼친 공로와 베푼 이익이 사람들에게 미쳐졌으되 얕으면 말하기 쉽지만, 그것이 깊으면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고려말 나라 꼴이 어지러워 이리저리 흔들리었던 때를 당하여, 흘로 사람이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를 뿌리박아 심을 수가 있었고, 천지가 돌아감에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지난 날을 알게 했었으니,(다음 구절에는 글자가 빠졌기에 번역을 않는다)  치창(致昌)이 그의 조상의 업적을 기록할 수가 있어서 그것을 후세에 끼치니, 또한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도다.



라. 문과 방목(文科 榜目)

* 방목(榜目)이란 문과 급제자를 연대, 시험의 종류, 성적의 순서로 적은 명부를 말합니다.

공민왕 9년 10월 25일(원문은 11월 25일) 동당시(東堂試) 신경(新京) 과거에 급제자 명단입니다.


을과(乙科) 삼인(三人)

* 국자진사(國子進士) 정몽주(鄭夢周)   본관은 연일(延日) 정축생(24세)

     부친은 성균관의 복응재(服膚齋) 학생(學生) 정운관(鄭云鑛)

     조부는 직장동정(直長同正) 정유(鄭裕). 증조부는 군기감(軍器監) 정인수(鄭仁壽).

     외조부는 선관서승(謄官署童) 이유(李幼)이고, 본관은 영주(永州)


* 국자진사(國子進士) 임박(林璞)    본관은 길안(吉安) 정묘생

     부친은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추봉(追封)된 임성찬(林成贊).

     조부는 보승랑장(保勝郎將) 임무(林茂).증조부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임세(林世).

      외조부는 보승별장(保勝別將) 이영(李美)이고, 본관은 평택(平澤).


* 국자진사(國子進士) 백군영(白君瑛)   갑술생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내원서승(內園署丞) 백주(白珠).

     조부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백연(白연). 증조부는 보승별장(保勝別將) 백수장(白秀章).

     외조부는 지후(祝候)의 관(官)을 그만둔 김습(金濕)으로 본관은 진잠(鎭券)


병과7인(丙科七人)


* 경덕재(經德齋) 학생(學生) 문익점(文益漸)  본관은 강성(江城) 신미생

    부친은 급제(及第) 문숙선(文叔宣). 

    조부는 봉익대부(奉端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문한학사(文輪學士) 치사(致仕) 문윤각(文允恪)

    증조부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문극검(文克儉).

    외조부는 영동정(令同正) 조진주(趙珍柱)로, 본관은 함안(咸安).

 

* 복응제(服應齋) 학생(學生) 신인보(申仁甫)    갑자생, 본관은 호주(鎬州)

    부친은 영동정(令同正) 신홍(申弘). 조부는 영동정 신수(申守).

   증조부는 영동정 신득안(申得安) 외조부는 호장(戶長) 박채로 본관은 울주(齋州) 


* 국자진사 수직랑(修直郎) 추밀원의 당후관(堂後官) 김주(金樓), 기묘생,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전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 김두(金糾).

  조부는 중현대부(中顯大夫) 전객령(典客令) 김남정(金南正).

  증조부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사재경(司宰卿) 김윤경(金允卿).

  외조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통례문판사 우문관제학 지제교인 방우번(方于蔘).으로 본관은 온수(溫水


* 태학진사(太學進士) 김질(金質)   신미생,본관은 경주(慶州)

    부친은 승봉랑(承奉郎) 통례문지후(通禮門福候) 김인식

   조부는 안일호장(安逸戶長) 정조(正朝) 김보(金甫).

   증조부는 호장(戶長) 정조(臺朝) 김순익(金純益).

  외조부는 호장(戶長) 정조(正朝) 이휴(李休)로, 본관은 동주(同州). 


  * 새로 뽑힌 진사 전(前) 보승산원(保勝散員) 박계양(朴啓陽), 임자생, 본관은 밀양(密陽).

    부친은 중정대부 밀직사(密直司)의 우대언(右大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삼사지사(三司知事) 박문윤(朴文允).

    조부는 중현대부(中顯大夫) 선공시사(繕工寺事) 박원(朴元).

    증조부 조열대부(朝列大夫) 보승장군(保勝將軍) 박성진(朴成進).

    외조부는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匿) 도첨의사(都會議司)의

     중찬(中贊)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김태현(金舍鉉)으로, 본관은 화평(化平)

  

* 국자진사(國子進士) 이준(李端), 무인생이고, 본관은 경주(慶州).

   부친은 광록대부(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 한림수국사(輪林修國史) 지제고(知制詰) 이달충(李達衰).

   조부는 추성보리공신(推誠輪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陸) 월성군(月城君) 이천(李薦),

   증조부는 봉익대부(奉端大夫)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 이세기.

   외조부는 금자숭록대부(金紫崇錄大夫) 참지정사(恭知政事) 수문관대학사(修文

   館大學士) 동수국사(同修國史) 조문근(趙文謹)으로 본관은 횡천(橫川). 


* 국자진사 선덕랑(宣德郎) 의영고부사(義盜庫副使) 김군정(金君정),본관은 선천(善川) 병자생

    부친은 정의대부(政義大夫) 추밀원(權密院)의 우부승선(右副承宣) 공부지사(工部知事) 김달상(金達祥)

    조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우사의대부 보문각직제학(實文閣直提學) 지제교(知製敎) 김우유 (金右謬).

    증조부 합문통사사인(閣門通事舍人) 김신함(金愼織),

   외조부는 광록대부(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 오희(吳禪)로, 본관은 동복(同福).




마.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문익점 선조님은 이조의 역성혁명의 기반이 될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탄핵을 받았고,  정몽주 이색과 함께 역성혁명에 반대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계의 등극후 두차례나 내린 벼슬을 거부하고 은거하여 조선의 신하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고려사열전을 이조에서 편찬하면서 수차례의 수정이 있었고 역성혁명을 정당화 시키고자  반대하였던 사람들의 공을 깍는 등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文益漸.

○文益漸晉州江城縣人恭愍朝登第累遷正言. 奉使如元因留附德興君及德興敗乃還得木緜種歸屬其舅鄭天益種之. 初不曉培養之術幾槁止一莖在比三年遂大蕃衍. 其取子車繅絲車皆天益創之. 辛昌立以左司議侍學上書論爲學之道. 時*諌{諫}官李*준等以私田不可復上書爭之. 益漸附李穡李琳禹玄寶移病不署名翌日徑赴書筵. 大司憲趙浚劾曰 益漸本以遺逸躬耕晉鄙殿下以賢良徵拜諫大夫置之左右以資淸問誠宜進盡忠言敷陳治道以補聖治而乃日侍經帷依阿苟容以飾忠直之狀承順逢迎而無*諌{諫}諍之節傴僂束手唯唯諾諾. 頃者同舍郞吳思忠李舒各自上*䟽極言時事益漸持祿患失無一語及之. 又同舍郞聯名上*䟽極論田制益漸依阿權勢稱疾不仕不與其議規避衆謗自以爲得計. 上累殿下知人之明下負士林期待之意是宜削其爵位放歸田野以爲有言責而不言者之戒. 乃罷之. 子中庸中誠中實中晉中啓.列傳卷第二十四.列傳卷第二十五. 高麗史一百十二.正憲大夫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 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奉 敎修.


문익점(文益漸)은 진주 강성현 출신이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사신(使臣)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머물며 덕흥군(德興君)의 편이 되었다.

덕흥군이 패배하게 되자 돌아왔는데, 목면(木綿)의 씨를 얻어 돌아와 그것을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었다. 처음 그것을 배양하는 요령에 밝지 못해서 거의 다 시들었고, 단지 한 줄기만 살아 남았던 것이 3년이 되자 드디어 크게 번식되었다. 그 씨를 빼는 수레와 실을 켜는 수레는 다 정천익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신창(辛晶)이 임금이 되자, 좌사의대부 전학(左司議大夫 傳學)의 벼슬로 있으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학문을 위한 도를 논했다. 당시에 간관인 이준 등이 사전(私田)은 돌려 줄 수 없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논쟁을 했다. 익점은 이색(李穡)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와 한패가 되어 병을 핑계로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다음 날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바로 나갔는데, 대사헌(大司憲)인 조준(趙俊)이 탄핵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익점은 본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몸으로, 진주의 한구석 땅에서 몸소 농사짓기를 했사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현량(賢良)한 사람이라고 부르시어 간의대부를 제수하사 좌우에 있게 하시고  좋은 물으심의 상대로 삼으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올리고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아뢰어서 어진  다스림을 도와야 할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날로 주상(主上) 앞의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비위를 맞추고 아부를 하여 구차하게 마음에 들게만 하며, 충성스럽고 곧은 척 꾸미고 명령을 받드는데 충간의 논쟁을 하는 절개가 없사오며, 허리를 굽혀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오직 지당하다고만 하였사옵니다.

근래에 같이 주상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오사충(吳思忠) 이서(李舒)가 각자 상소하여 시사(時事)에 대해서 갖은 말을 다하여 의견을 올렸사오나 익점은 벼슬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한 마디의 말도 함이 없었사옵니다. 그리고,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전제(田制)에 대해서 거리낌없이 논했는데도, 익점은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아부하며 병을 핑계대어 논쟁에 간여하지 않았사옵니다.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핑계삼아 피함을 스스로 좋은 꾀라 여기었으니, 전하(殷下)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선비들이 기대하는 뜻을 저 버리고 있나이다. 이는 마땅히 벼슬을 빼앗고 전야(田野)로 쫓아 돌려 보내어, 언론을 힘껏 펴야 할 책임이 있으면서도 할 말을 하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아야 하옵니다. "
이에 곧 파직시켰다. 아들은 중용(中庸), 중성(中誠), 중실(中實), 중진(中晋), 중계(中啓)이다.


** 홈페이지 관리자(문병달)의 생각 **

"사신(使臣)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머물며 덕흥군(德興君)의 편이 되었다."
덕흥군은 원나라의 지원으로 공민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하여 세력을 규합할 때 문익점선조는 불응하고 오히려 반박하다가 교지에서 귀양 살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덕흥군이 고려와 전쟁에서 패한 후 원나라 황제가 생각을 고쳐 문익점 선조를 귀양에서 풀어주어 돌아 오는 길에 목화씨를 가져 오시게 된 사실을 위의 첫문단 처럼 왜곡한 것입니다.

 적군에 붙어 공민왕에 반역한 사람이 귀국하였다면 사형이 마땅하고 일족에 화가 미칠 것인데  공민왕은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고"를 제수한 것으로도 알수 있는 사실입니다. 현재에도 귀양설은 후손들의 조작이라고 하고  덕흥군에 붙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도 있으나, 인도에서 전래된 아세아면은 원의 수도인 북경(북위 40도임)에서는 추워서 자라지 못하는 식물이란 점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목면(木綿)의 씨를 얻어 돌아와 그것을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었다."

목면은 원나라의 금수품으로 얻어 올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을 위하여 위험함을 알면서도  숨겨서 갖여 오셨기에  후세의 유학자들이 문익점 선조를 문묘의 배향을 청하는 청원소를 올렸으나  선비로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목면을 소홀하게 취급했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못합니다.


"그 씨를 빼는 수레와 실을 켜는 수레는 다 정천익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씨아(씨뽑는 기구)는 원의 승려가 가르쳐 준 것이고 물레(실을 뽑는 기구)는 14세 문래 선조가 발명하여 이름이 물레로 불리게 되었으며  또한 14세 문영 선조는 베짜는 기계를 만들었기에 이 기계로 짠 베를 문명베라고 하다가 무명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15세 승로선조는 의성에 목화를 보급하여 현재도 시배지가 남아있으니  전 가족이 목화보급에 노력하였음에도 공적을 깍기 위해 정천익의 공이라 한 것입니다.


태종과 세종은 벼슬을 추증하고 영원히 제사를 모실수 있게 사당과 논밭 및 노비를 내려주는 부조묘(이조 500년 역사에 안향, 정몽주, 문익점 세분 뿐임) 내리고 부민후(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적)의 작위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역대 임금들도 후손을 돌보라는 전교를 내릴 이유가 없으며 또한 문익점선조의 열전에 정천익(문익점선조의 장인으로 우리의 외할아버지가 됩니다)님께서 만들었다고 문익점의 공적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강한 긍정인 것입니다.


조준의 탄핵의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인 잘못은 한 줄도 찾을수 없으며 인신공격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벼슬에 연연 하였다면 전제계획에 앞장서거나 최소한 찬동이라도 하여 미움을 싸지 않아야 벼슬을 유지할 수 있는 세태였음에도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아 다음날 탁핵을 받아 파직되는 우를 범할 리가 없습니다. 조준의 탄핵 내용이 알맹이 없는 악의에 찬 인신공격일 뿐인데도 바로 파직을 시킨 것은 이미 왕권이 힘을 잃었는데 권력있는 사람들에게 아부 하였다는 말은 해괴한 말입니다.


※고려사의 잘못을 지적한 김창강(金滄江澤榮)의 신고려사 내용을 소개합니다 

 

한국역대 소사(金滄江澤榮 작)의 번역문 일부


앞의 내용은 생략....

진실로 익점이 덕흥군에 부치었다면 이는 공민왕의 역신이니 귀국한 후에 공민왕이 기필코 죽였을 것이며 요행이 죽엄을 면하였다 해도 악명이 필연 세상에 알려졌을 것인데 조준의 탄핵에 어찌하여 그 일을 먼저 거론하여 그 탄핵의 설을 견고히 하지 않고 도리어 유일이니 현량이니 하였는가?

또한 오사충은 매국의 큰 간신이니 그 시사를 논한 바 이에 최영 등을 옥에 가두어 죽임을 청한 것이니  익점이 한마디도 언급한 바 없음인즉 그 정의를 가히 알 만하다. 사전의 논의는 이성계가 주장한 바이니  익점이 또한 여기도 부합하지 않은 즉 그 충절을 또한 가히 알만하다.

대개 이같은 여려 설이 모두 이른 바 덕흥군에 부치었다는 것과 크게 상반되어 한 전기중에 상하의 문의가 마침내 서로 모순됨이 있으니 그렇다고 보면 덕흥군에 부치었다 한 것은 이 어찌 정씨의 오기가 아니겠는가? 또한 효에 힘입어 충이 됨이 고금의 떳떳한 법칙이거늘 익점의 효행으로 나의 임금을 배반하고 타인에게 붙을 리가 있겠는가? 이에 익점이 원나라에 간 사실은 그 가록을 쫓음이 옳다 하겠노라.




바. 삼우당 실기(實記)의 서문(序文)


실기(實記)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으로   삼우당 실기가 발행된 년대별 내역은 아래와 같다

        - 1819년 4권 2책
        - 1827년 4권 2책
        - 1851년 4권 2책
        - 1852년 4권 2책
        - 1864년 4권 2책 봉강서원 간행
        - 1870년 4권 2책
        - 1891년 5권 2책 경숙공파 간행
        - 1900년 6권 3책 도천서원 간행
        - 1926년 일본인 간행
        - 1955년 -
        - 1976년 충숙공 삼우당실기- 남평문씨대종회 간행
        - 2015년 삼우당 문집 -삼우당문집편찬위원회 간행


1819년 발간 삼우당실기 2책 4권


1851년 발간 삼우당실기 2책 4권


1864년 삼우당실기 4책 2권-봉강서원 발간


1891년 삼우당실기 5권 2책-경숙공파 발간


1900년 삼우당실기 6권 3책-도천서원 발간


1926년 삼우당실기 -일본인 발간


1976년 충숙공 삼우당실기 -남평문씨대종회 발간


2015년 삼우당문집 -삼우당문집편찬위원회 발간


삼우당실기의 옛서문(舊序文)은 아래와 같다


1) 삼우당실기 옛 서문 -1


- 숭정연간(崇禎年間) 삼병술(三丙戌 1766년 영조42년 5월 일) 후학(後學) 박사휘(朴思微) 삼가 지음

옛적 어진분의 학문과 효행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깨닫고 스스로 자랑할 수가 있었던 바이니, 그 학문과 그 효행의 자취가, 비록 후세에 그대로 다 전해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스스로 마음에 깨닫고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일에 무슨 손실이 있으랴?

그러나, 후학이 옛날 어진 분에 대하여 그 이름을 듣고 존경하며 사모하는 자로서,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학문과 효행의 한두 가지를 기록할 수가 없으면 어떻게 그 분이 생존했던 당시의 스스로 마음에 깨닫고 스스로 자랑했던 진실을 살피어 알아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올릴 것인가? 이에 옛 군자(君子)는 이전 어진 분의 학문과 효행을 반드시 자세히 기록해서 그 사실을 기억함에 대비시키어, 후학들의 심정적 안목을 아름답게 하도록 하려 했다

 아, 충선공(忠宣公) 문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유학을 숭상하였고, 효행은 실로 천성에 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절의는 덕흥군(德興君)이 배반했음을 기록하여 크고 높게 나타내었고, 공덕은 목화(木綿)를 전하여 이롭게 함에 크게 나타내었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대현(大賢)이시다. 그러나, 고려의 말엽에 태어나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했었는데, 세대가 이미 오래 되어서 집안에 내려온 책이 오늘에 전해 있지 않기에 연보(年譜)와 그 분의 사적과 지었던 글을 구해 보지 못하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선생의 학문과 효행이 당시에 스스로 마음에 깨닫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었음에, 비록 그 실적(實蹟)을 갖추어 기록할 수가 없을 망정, 그 분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길에 있어서야 어찌 덜하고 더할 것이 있으리오.

전의 행적기(行蹟記)가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나, 지난 무자년(戊子年)에 고을 어른들이 명현의 기록한 바 두세 조목을 대강 써서 책자로 꾸몄는데, 갑신년의 가을 재실(齋室)이 화재로 말미암아 모든 곳이 다 잿더미가 되었다

 불초한 내가 마침, 서원(書院)의 임원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는지라 선생의 행적이 없어져 전하지 않음을 개탄하고  고찰할 수 있는 것을 널리 구했건만, 지난 왕조의 일을 그 누가 자세히 기록했을 것이랴? 나는 같은 임무를 띠고 있는 도명숭(都命崙) 박사권(朴思權)과 더불어 사방으로 수소문하였는데, 우리 이씨조선의 역 대왕께서 포창하고 벼슬을 추증한 일들이 나라의 역사 기록에 실려 있음을 알았다. 이를 기록하고 혹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는 것을 베끼고, 혹은 선현들의 기록한 것을 모은다든가, 또는 문씨 족보와 동국여지승람(勝覽)에 실려 있는 것 중에서 채택해 모아, 견문이 적어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집이 센 것을 잊고서 책을 꾸며 만들었는데, 다행히 유식한 분들의 질책을 면할 수 있을는지?

나는 삼가 이상과 같은 서문을 붙여 이름을 충선공행적기(忠宣公行蹟記)라 하겠다. 그러나 이제 모아 기록한 이것은 부족한 내가 말하는 한 줄의 찬사는 아니고, 모두 다른 분들이 기록한데서 나온 것으로 책자를 이룬 것이다. 이 후의 박식한 군자가 혹시 고려조의 사실적인 자취를 기록한 것을 손에 넣어서 빠지고 허술하게 되어진 것을 보충하여 올바르게 하는 날에는, 반드시 적지 않게 보충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해 두는 바다.


2) 삼우당실기 옛 서문 -2

 - 숭정 연간(崇禎年間) 사무인(四戊寅 순조18년 1818) 음 8월 상순

   숭정대부(崇政大夫)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의순(金義淳) 삼가 지음

어떤 선비가 남쪽으로부터 나에게 왔는데, 그는 그의 선조인 강성군(江城君) 충선공(忠宣公)의 실기를 지니고 권두언(卷頭言)으로 붙일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또 말하길 "나의 선조께서는 충성이 간절했고 효도가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오늘에 그 사실들이 희미해져 나타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자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앞으로 이것을 출간하도록 하여 후세에 길이 남도록 하겠으니, 공께서는 나에게 한 말씀을 써 주시어 이 일이 두텁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은 고려의 신하로 공민왕을 섬겨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원나라 조정의 명령에 항의하다가, 교지(交祉, 중국 운남성) 땅으로 귀양을 갔고 돌아와서는 나라의 일이 날로 글러짐을 보고는 입산은둔(入山隱遁)하여 다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나라가 바꿜적에 이태조(李太祖)께서 여러번 부르셨으나, 나가지 않고 자신의 절개를 밝히었으니 이 또한 충렬(忠烈)이 아니겠는가? 또 상복을 입고 모친(母親)의 묘소를 지키며 외적들이 침입해 와도 떠나지 않자, 왜적의 우두머리가 감동하여 "그에게 위해(危害)를 하지 말라"고까지 경계를 했으니 이 또한 효도(孝道)가 아니겠는가?

위에 든 그 세 가지 일은, 선생에 있어서의 다만 한 마디의 일인 것이고, 즉 이것들보다도 더 큰 것이 있다. 선생은 일찍이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의 부친 1298~1351)께 배우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 더불어 사귀며 학문을 쌓고 그릇된 것을 버리며 학문을 강론하였으니, 속에 쌓인 것이 넓고도 큰 것이었다. 그래서, 나아가서는 군주를 바르게 돕고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성인(聖人)의 도를 지키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유교(儒敎)가 세력있게 하였는데, 진실로 시들어진 세속(世俗)을 개혁시키려 함이었다. 그러나 국운이 다하자 마침내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어찌 운수가 아니었던가? 나라의 위세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학문의 밝지 못함을 근심하며, 덕이 획립되어지지 못함을 근심 했으니 바로 이 세가지 근심(三憂)을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

선생의 뜻은 이에서 알 수가 있는데 어찌 까닭없이 그러했겠는가? 역대 왕들이 포창(褒彰)하여 높이시고, 여러 어진 분들이 선생을 떨치게 현창(顯彰)함에 고금(古今)에 밝게 빛나리라.

 그러나, 사람들이 선생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의 은혜가 있음을 알면서도 충과 효가 있음은 모르고, 충이 있고 효가 있었음을 알면서도 뜻이 있고 근심이 있었음은 알지 못하였도다.  아, 알고 모름은 사람들에게 매인 것이지 선생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선생의 이름은 익점(益漸)이요 자(字)는 일신(日新)인 선비였는데, 나에게 글을 청하러 온 이들은 선생의 후손인 취광(就光)과 계항(桂恒)이었다.


3)삼우당실기 옛 서문 -3

- 순조 18년(1818) 음력 8월 일

  자헌대부 전(前) 공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담원(擔園) 홍의호(洪義浩1758~1826) 삼가 서문을 지음 

옛날의 군자(君子)는 덕(德)이 완전하고 도(道)가 갖추어져 인(仁)을 근본으로 삼았었다. 그러므로 덕과 도를 쓰고 드러내되 반드시 공리(功利)를 뭇사람에게 널리 베풀었는데, 타인으로서 그것을 본 자는 그 일단(一端)만을 지적하여 인이 이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는 눈이 작은 것이니 어찌 군자를 논할 수가 있을까 보냐?

강성군 삼우당 충선공 문 선생은, 전 왕조 말기의 순수한 군자요 유학자였다. 일직이 이가정(李稼亭)을 좇아 배우고, 목은(牧隱)과 도의적인 교제를 맺었으며, 과거에 급제할 때에는 정포은(圃隱; 정몽주)과 동방(同榜)이 되었는데, 실로 두터운 정의를 두고 지냈다. 그 분들은 서로 같이 정주학(정자와 주자의 학문인 성리학)을 강론했고 성균관(成均館)을 창도(倡導)하며, 이단을 배척하고 유도를 실행했다.

선생은 좌정언(左正言)으로 있으면서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갔는데,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선생은 반대하는 언론을 펴고 힘써 충간을 하다가 잡혀 갇힌 몸이 되었고, 끝내 굴복치 않음에 교지(交祉)땅 남쪽 만리 밖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만에 돌아왔다. 선생의 곧고 충성스러운 큰 절개는, 진실로 한(漢)나라의 소무(蘇武)가 북해(北海)에서 행한 일과  홍호(洪皓)의 냉산(冷山)에서의 일에 비하여 부끄럽지 않는 일이었다

상제가 되어 복을 입었는데, 산중에 움막을 짓고 지내며 묘를 지키고 있다가 왜구(倭寇)가 함부로 날뜀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은 다 피하여 숨었으나, 선생만은 홀로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며 그 앞에 엎드려 슬프게 우니, 왜구의 두목이 의롭게 여겨 해를 입히지 않고, 나무를 쪼개어 선생이 계시는 곳에 표시하고 가 버렸던 것이다. 선생의 참다운 효도와 탁월한 행위는, 강혁(江革)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한 것이나 도적이 화추(華秋)에 대해서 감복했던 일 보다도 더 빛나는 일이었다.

고려 왕가의 운이 다 되어짐에 정치가 문란하자, 선생은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병이 났다고 관직을 그만 두고 집현산(集賢山) 밑의 도천리(道川里)에서 세속을 떠나 은거생활을 하고, 아호(雅號)를 삼우(三憂)라고 했다. 선생이 근심하는 것은, 즉 종국(宗國)이 떨쳐지지 못함과, 유학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과, 자신의 도가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 피할 것을 점치고 정절(貞節)을 지킨 일로서, 선생의 진의(眞意)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으나, 중간에 억지로 한 번 벼슬길에 나섰다가도, 조 도헌(都憲 대사헌 조준)한테 탄핵되어 다시 떠났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場) 선생의 비기(碑記 문익점 효자비각기)에, '나는 공의 큰 절개가 이에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혹 이를 알지 못하지 않나 하고 의심이 된다'고 말한 대목이 보이는데, 이것은 진실로 선생의 마음을 납득한데서 나온 말이라고 할 것이다. 아,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께서 부르심에, 선생께서는 나가지 않자 대왕은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문군(文君)은 진실로 의로운 선비로구나. 끝내 나를 위해 굴복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셨으니 큰 성인이 한 말씀이었다.

임금님께서 진실로 천추만대에 말씀을 남기시고, 그리고 우리 역대왕들께서 선행과 공적을 표창하고 은덕에 보답하신 바로 오늘에까지 그 명성이 높아 마지 않는데, 결국은 선생의 충효와 절행이 뛰어나 도가 완전하고 덕이 갖추어진 군자가 되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선생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다만 의복의 일 한 가지만 가지고 칭송하고 그 어른의 덕이라고 하여 목면공(木綿公)이라고 한다. 목면공이라는 것은, 후직(중국 농림부장관 격)의 농사일을 맡음으로 불려진 것이나 서능씨(西陵氏)의 누에를 친 일에 비유해서 하는 말이고, 이전의 사람들이 글을 지을 때도 흔히 이 일에 공을 돌림에 치중했었는데, 그것은 선생의 덕의 공로가 만세에 길이 힘입음이 된다는 것을 아주 몰라 그런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이제 선생의 후손인 취광(就光)과 계항(桂恒)이 세계(世系)의 연보와 가전의 본기(本記), 역대왕이 포창한 은전, 사원의 사적 등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서술을 널리 고찰하고 널리 찾아 차례대로 편성을 하고, 그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실기로 하여 판(版)을 새기는 사람에게 넘기었는데, 그 전해짐을 영구하게 하려 함에 나 의호(義浩)에게 찾아와, 책머리에 붙이는 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번 사양을 했다가도 내 뜻대로 못하고 이에 선생이 충효 도학의 앞에서 덕을 세우고 다음에 공을 세운 것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세상이 선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끝의 인(仁)만을 알아보는 좁은 소견으로 선생의 거룩한 은혜만 구구히 말함이 없게 하는도다.


4) 삼우당실기 옛 서문 -4


 - 숭정(崇禎) 이후 다섯번째 기해(1899)년 행주(幸洲) 기우만(奇宇萬) 삼가 씀

나라가 떨치지 못 하는 것을 걱정하고,성인(聖人)의 학문이 밣지 못 하는 것을 걱정하고 자신의 덕(德)이 닦여지지 못 하는 것을 걱정하였나니,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서 이 세가지 걱정이 근본이고, 그 나머지 서술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다. 지엽적인 것까지 수집해서 이 책을 만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선생의 곧고 위대한 충절(忠節)은 , 세월이 오래가면 갈 수록 더욱 빛나 동방의 해와 달과 함께 빛 날 것이다. 역대의 임금님들께서는 선생께서 나라를 붙든 의리를 기렸고, 지도층 인사들은 선생께서 도(道)를 보호한 공적을 숭상하였고,백성들은 선생께서 옷을 입게 해 준 혜택을 입었다. 위로는 임금님의 글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천백 세(世)에 이르기 까지까지 끝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자료를 거두어 모아 해와 달의 비친 빛을 더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러한 책은 있어야 하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것이 지금 이 책을 중간하는 까닭이다.
선생의 모든 언행은 이 책 속에 다 들어 있으니, 책을 펼쳐보면 훤히 알 수 있다. 학문이 얕은 보잘 것없는 후세의 사람이 그 사이에다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인들 덧붙이겠는가?
우암(尤庵)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안공(安公)이나 문공(文公) 두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동쪽 나라는 더러운 오랑캐의 행실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 문공이란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하니 동방이 천만세(千萬世)토록 그 혜택을 입게 된 것은 선생 덕분이 아니고 누구 때문이겠는가?

역대로 여러 임금님들의 포창과 장려를 입은 것을 골라보니, 성대하고 밝은 시대에 나온 것이고, 여러 훌륭한 분들의 서술도 정치가 잘 되던 때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책을 중간(重刊)하는 일을 다행히 오늘날 하는 것은, 어찌 긴 밤에 다시 아침이 오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책이 이루어 지면 마땅히 집짐마다 비치해 두고서 삼우당선생께서 근심하던 바를 근심으로 삼는다면, 나라가 떨쳐지지 못하던 것이 떨쳐지고, 성인(聖人)의 학문이 밝지 못하던 것이 밝아지고, 자신의 덕(德)이 닦여지지 못하던 것이 닦여지게 될 것이다.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거나 성인의 학문을 없애려는 자들이 자취를 감추고서 감히 숨도 쉬지 못 할 것이다. 혼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발을 구르는 즐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못나고 서툰 것을 생각지 않고 이렇게 서문을 쓴다.

영남(영남) 선비들의 뜻을 받들어 와서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사람은 선생 후손 재술(在術)이다.


5) 삼우당문집 서문과 헤제(解題)

                                             2015년 3월 경북대학교 교수 허권수(許捲洙) 근서(謹序)
















사. 행단기(杏壇記)- 충선공 문익점 생가의 은행나무


경남 산청군 신안면 배양리의 집 앞에 문익점 선조님이 손수 은행나무를 심으시면서 이나무가 "잘 자라면 후손이 번창할 것이요, 잘 자라지 않으면 후손들이 고생할 것이라" 하셨다고 전하는데, 중간에 벼락을 맞아 원가지가 말라 죽었으나 수년 후 곁에서 돋아난 3개의 가지가 자라 지금은 큰 키를 자랑하며 까치집을 품는 넉넉함을 보이나, 생가는 무너지고 대밭이 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2006년 대지를 구입하고, 2007년 생가터라는 비석을 세웠고, 은행나무 옆에는 행단기의 비석을 세웠습니다.
충선공파종회에서는 생가 복원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산청군에서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문익점 생가복원을 추진 중입니다



휘 익점 선조가 사시던 집터 표식 - 문영훈 대종회 명예회장 건립)


휘 익점 선조가 심으신 은행나무 - 산청군 지정 보호수 12-42


행단기 (杏壇記) - 생가터 은행나무

순조 5년 1805년   월    일  성균생원(成均生員) 유문용(柳波龍) 지음



행단기 비석 - 문영훈 대종회 명예회장 건립


은행나무는 식물에 있어서 흘로 문(文)자를 붙여 이름 불려지고,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이 그 밑에서 학문을 강(講)하는 예(禮)로써 대했는데, 즉 공자로부터 시작이 되어 그것은 만고의 법칙이 되었다.

우리 고을의 배양촌(培養村)에는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이 사시던 옛터가 있고 문행(文杏)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선생께서 손수 심으셨다는 것이다.

선생의 충효는 중화인(中華人)과 되놈들에게 알려졌고, 도학은 회헌(唯軒)의 도학과 나란히 유명했으며, 공(功)은 후직의 공에 못지 않았다.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가 쉬시며 이 곳에서 학문을 강습(講習)하여 뜻대로 이룬 바가 있어서, 후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었다.

선생의 외손인 청향당(淸香堂) 이씨(이가원 )와 청향당의 조카 죽각(竹閣)이 서로 뒤를 이어 남기신 아름다움을 이어받았고, 퇴계(退溪) 남명(南潔)의 두 선생을 강구(講究)하고 닦게 했으니, 이것을 재배(栽培)한 공(功)은 이에 더욱 컸고 원 뿌리와 뒤에 난 가지들은 지금까지도 무성하기 만 하다


아, 이상도 하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400년이 지났고, 그 간에 병화(兵火)를 당하고 벼락치고 바람 불음이 많았는데도 한 가지도 꺾여지고 말라 죽은 것이 없으니 신명(神明)의 도움이던가? 오랜 세월 자랐음에도 둘레는 열 뼘이 되지 못하는데, 씨가 떨어져 그 씨가 산 것일까?

그 나무 아래에 있는 많은 집은 다 이씨(李氏)다.

은행나무를 둘러 단을 모았는데, 행단(畜臺)은 선생의 비각(碑閣)을 앞 삼고 청향당과 죽각의 사당을 왼편 삼고 있다. 선비의 벗으로 왕래하는 이라면 즉 이 단의 위에 올라 은행나무를 쓰다듬는 것인데, 그 어찌 다만 바람을 쏘이고 달을 맞이하여 그늘을 지게 하여서 놀게 하는 것일까 보냐? 바로 곧게 서 있는 모양은 선생의 절의(節義)와도 같고 무성한 모양은 선생의 덕택(德澤)과도 같으며, 맑고 수려함은 선생의 지조와도 같고 높은 모양은 선생의 기상(氣象)과도 같으니,진실로 이 나무를 보고서 현인(賢人)을 그리워할 수가 있다면 즉 또한 성인(聖人)을 그리워할 수가 있을 것이로다.

크도다, 은행나무여! 근본은 다 되어서 원 근본은 없는데, 은행나무로써 은행나무를 생각해 봄에 위로 공자의 은행나무로 거슬러 올라가는도다.




아. 문익점 본인 시문

문익점 선조께서 본인이 직접 지은 시문(詩文)이 상당히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타 시문들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익점공 시문(詩)

謫南荒敍別   남쪽 변방으로 귀양가면서 이별의 정을 이야기하다

他時難對 此時顔 (타시난대 차시안)
安得平存 水隔山(안득평재 수격산)
天感人生 生馬角(천감인생 생마각)
諸君知我 好生還(제군지아 호생환)

이후에 이내얼굴 대하기 어려울 걸세
낯선 먼 땅에서 편히 살수 있을건가
감천하여 말이 뿔나면
내가 살아올줄 알게나

潛潛漏灑雨凄凄(잠잠누쇄우처처)
萬里南荒去路迷(만리남황거로미)
人不疑時吾有信(인불의시오유신)
小年豪氣與山齊(소년호기여산제)

눈물로 비 되는데
교지땅 멀고 멀다
타인때 의심치 않고 내게는 신념이 있어
소년의 호탕한 기운 태산과도 같도다

  御者莫崔 萬里裝(어자막최 만리장)
  心魂無日不還鄕(심혼무일 불환향)
  別君秋月三歎地(별군추월 삼탄지)
  待我春風一笑場(대아춘풍 일소장)

갈길이 멀다고 수렛군아 재촉말라
내마음 고향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가을달 님을 이별하고 모진곳 가거니와
좋을 때 같이 기리게 기다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