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 문익점 선조 비문
삼우당 문익점 선조 비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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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설명

지은이

가.사적서문(敍文)

생전의 사적(事蹟)을 적은 글 뒤에 붙이는 글

우암 송시열

나.묘갈명(墓謁銘)

원형의 비석에 새긴글(사각의 비석에 새긴글은 묘비명임)

대재학 한경원

다.묘표(墓表)

앞면은 관직과 성명을 뒷면은 사적기록(갈명은 들어가지 않음)

도학자 정재규

라.신도비명병서

종2품 이상만 세우는데 序인 산문과 銘인 운문으로 구성

오위도총관 李瀰

마.추모비

 

안동 김위현

바.추모비명병서

 

성균관장 최찬익

사.묘사기(墓祠記)

 

남명 조식

 

가. 사적 서문(事蹟 敍文)

1659년 음력 11월 하순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
은진 송시열(恩津 宋時烈: 1607~1689 우찬성 지냄) 삼가 발문

내 일찍이 통정대부 공주목사(公州牧使) 신숙(申夙)과 농가직설(農家直說)에 대해서 논했었을 때, 얘기가 목면(木綿)의 종법(種法)에 미치었는데, 그것의 씨는 본래 우리 나라의 고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지정(至正 원의 순제의 연호 1341 - 1367) 년간에는 고려에 어려운 일이 많았었다. 부민후 충선공(富民候 忠宣公)은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로 들어갔으나, 구속을 당하고 남방 되놈 땅으로 귀양살이를 갔다가 돌아왔는데, 소자경(蘇子卿)이 외국에 갔다가 잡혀 양을 치며 살다 귀국했던 일과 다름이 없었다. 하늘이 알아 그 분의 곧음에 음덕(陰德)을 베풀었으니, 3년이 되자 귀양에서 풀어 돌려 보냈었다. 마음과 정신이 멍해서 겨를이 없는 때였을 터인데도, 종 금용(金龍)을 시켜 몰래 그 씨를 따서 붓대에 감추어 돌아왔다. 처음 꽃밭에 심어 목면이 늘어나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서, 만세(萬世)에 영구히 힘입게 되고 나라 안에서 수용(需用)함에 넉넉하게 되었다.

아, 공의 지식은 능리중(菱里中)에서 주역 팔괘(周易八卦)를 64괘로 변화 시킨 것과도 같았다. 충선공은 또한 우리 나라에서 정말로 후직(后稷)이었다. 우리의 태종대왕은 어진 정신의 자질(資質)로 먼저 그 분의 공을 칭찬하셔서 내외에 포창하사 정문(旋門)을 세우라 명하시고 제전을 더 불려 주시고 그 분의 벼슬을 높이시며, 그 분의 자손을 존중하여 벼슬 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등용하셨다. 그리고 약한 후손과 촌수가 먼 자손들의 쇠퇴하여짐을 생각하시고, 비록 혹 미천한 서자(庶子)의 파들이라 하더라도 군역(軍役)으로 삼지 말라 하셨으며, 천거하여 뽑아 맑은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허락하는 은전(恩典)을 베푸시었으니 마땅한 일이었다.

내 일찍이 남명 조식(南溟 曺植),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일두 정여창(鄭汝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등의 여러 현인의 문집을 보았던 바, 충선공의 공로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木綿)의 공리(功利)를 끼친 것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유가(儒家)의 학문에도 공이 많기 때문이다.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와 문 충선공이, 우리의 유도(儒道)를 서로 계승할 수가 있어서, 우리의 유도가 찬란히 다시 밝아졌는데, 그 덕의 깊음은 곧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다. 
격양가(擊壤歌)의 어구에 말하기를, "임금의 힘이 어찌 미칠 것 있을까?" 라고 했다. 하늘의 공은 헤아리지 못하고 땅의 덕은 측량하기 어렵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우리 나라에서는 안 ·문의 두 어진 분이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안 ·문의 두 현인이 없었더라면,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도 추한 되놈의 행실을 면하지 못햇을 것이다. 우리 이씨왕조(李氏王朝)가 지위를 존엄하게 하고 영화를 누리게 해서,그 공에 보답하고 그 분의 자손을 보호하여 그 은혜 만세에 미치게 하였는 바, 이는 바꾸지 못할 올바른 법도인 것이다.

아, 문공의 절개와 의리의 조촐한 품격은, 뛰어나게도 고원(高遠)하여, 만고에 미치도록 전해지고 변하지 않을 것이로다. 이전의 사람으로서 문공과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으로도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뒤의 뒤에서도 역시 문공과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내 뒤의 사람들이 문공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이 염려가 되어 이 글로 말해 둔다.

*유사후서(遺事後敍): 이 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典) 속습유(續拾遺) 권1에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제목이 서삼우당유사후(書三憂堂遺事後)로 되어있으며, 삼우당실기에서 채록해 가지고 와서 편찬할 때 산삭(刪削)한 것 같다- 삼우당문집 150P 참조

*이글은 부조묘에 있는 삼우당유사비문의 내용임

 

나. 묘갈명 (墓謁銘)

숭정연호(崇禎年號)를 쓰게 된 후 을사년(정조9년 1785) 11월
대제학(大提學 ) 황경원( 黃景源: 1708~1787) 지음

충선공 문공(忠宣公 文公)이 돌아가신 지 이미 370여 년에 공의 15세손인 취광(就光)이 공의 사적(事蹟)을 수집해서 나 경원(景源)에게 묘갈명을 써달라고 원하면서 말하기를, "내 선조의 묘가 단성 갈로개산(丹城 葛蘆介山)에 있는데, 묘갈명(墓謁銘)을 지어 새겨 세워야 되겠기에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 "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 경원이 말하기를 "충선공(忠宣公)은 고려를 섬겨서, 참다운 충성과 높은 절개가 사방에 퍼져 있음에, 도리상 마땅히 묘갈명을 새겨 세워야 할 것이거늘, 내 어찌 감히 사양하겠소이까?" 라고 했다.

삼가 살펴 보건대, 공은 이름이 익점(益漸)이고 자는 일신(目新)이라 했는데, 애당초의 이름은 익첨(益瞻)이었고 진주 강성현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와 같이 문과(文科) 과거에 뽑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이 되었다.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갔었는데, 공은 강직하기로 이름이 천하에 높았다. 퉈환안티에물(원의 순제)이 공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내 그를 임금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데, 어떤가?" 라고 하자, 공이 대답해서 말하기를, "군주가 신하를 대함은 마치 하늘이 땅을 대함과 같사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 라고 했다. 퉈환티에물은 크게 성내어 말하되, "나의 뜻이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너는 속국의 신하로서 천자(天子)가 취하는 예법을 따르지 않으니, 죽어야할 죄로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로다. " 라하고, 교지땅인 남방 만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었는데, 3년 있다가 풀려 고려로 돌아왔다. 이에 학자들이 다 칭송하기를, "공은 충정 (忠貞)의 절개를 잘도 지키었다. "라고 했다.

송(宋)나라 황실이 멸망하게 된 뒤로는 학교 교육이 쇠약해지고 무너졌다. 공은 그것을 슬퍼하고, 공자(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도를 자신이 지켜야 할 책임으로 여겨 불교를 반대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반드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의 풍도를 지니라고 권장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서 고금에 통하는 수천 마디를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들어 쓰지 못했다. 이 때를 당해, 공은 도중에 끊어져 전해지지 않은 학문을 부르짖어서, 교육을 훤하게 다시 밝아지게 했다. 이에 학자들은 다 칭송 하기를, "공은 도덕의 깊음을 잘도 터득했다. " 라고 했다. 얼마 후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지사에 제수되었는데, 대사헌 조준(大司憲 趙漆)이 공의 관직을 그만 두게' 하라고 탄핵하자, 공은 그날로 시골로 물러나고 드디어 지리산중(智異山中)으로 숨어 스스로 사은(思隱)이라 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아버지로서 인자하고, 자식으로서 효성스러웠다. 모친상을 당하여 묘를 세 해 동안 지키는데, 왜놈들의 소란으로 사람들이 다 숨었으나 공만은 홀로 떠나지 않자 왜놈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왕씨 왕조(王氏 王朝)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자, 병이라 하고는 벼슬을 그만 두고 기미를 알아낸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학자들이 모두, "공은 잘도 숨어 사는 뜻을 이루었다. "라고 칭송했다. 

홍무(洪武) 16년 계해년에 비(碑)를 고향에 세워 포창을 했고, 1400 정종 2년 3월 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니 나이 70이었다. 정종대왕께서는 갈로개산에 예장(禮葬)하라 명하셨다. 태종원년 1401에는,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사 겸 경연지사 예문관제학을 수여하시고 충선(忠宣)의 시호를 주시며 옛터에다 묘(廟)를 세우셨다. 

공의 증조는 이름이 극검(克儉)으로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문과방목대로 본문 수정함)이요 조부는 이름이 윤각(允恪)인데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문한학사로 치사(致仕:문과방목대로 본문 수정함)했다. 부친은 이름이 숙선(叔宣)으로서 문과급제하고 경주 사록(司錄:문과방목대로 본문 수정함)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 (忠貞)이다. 처음의 부인(夫人)은 주(周)씨였고, 다음 부인은 정씨(鄭氏)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중용(中庸)은 사간원 헌납이고, 다음아들 중성(中誠)은 진사였으며, 다음 아들은 중계(中啓)로 예부상서였다. 손자들 가운데 화(和)는 승정원 도승지였고, 래(萊)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영의정을 증(贈)받고 장연백(長測伯)에 봉해졌다. -현재 족보에는 충선공의 아들은 다섯으로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이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공이 교지 땅으로부터 돌아오다가 목면(木綿)을 발견하고 입수하였는데, 그것을 붓대 속에 감추고 나라로 돌아와 국내에다 심어서,고려의 목면이 공으로 말미암아 처음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우(禹) 임금의 세상에 이미 목면(木綿)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에 이르기를, "남방 되놈은 초목으로 짠 베를 바치거늘, 대(竹) 상자에는 조개의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이다 " 라고 했는 바 목면을 두고 말한 것이다. 즉 초목으로 짠 베라는 초목은 목면의 종류였던 것이다. 현재 남방 되놈의 목면으로 정재(精製)한 것을 길패(吉貝)라 한다. 그렇다면 목면(木綿)은 남방 뒈놈 땅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나오게 된 지가 오래다. 그런데 어찌 공으로부터 처음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명 (銘)을 다음과 같이 짓노라. 
의(義)는 넉넉해서   군신(君臣)의 윤리(倫理)를 바르게 했고,
학문은 넉넉해서   천리와 인도(人道)의 참다움을 다 밝히었다.
지식은 넉넉 해서   세속(世俗)을 떠난 몸을 완진(完全)케 했네.
어찌 반드시 남방 되놈 땅에서 가져온 한 꽃을 가지고 공의 어짐을 칭송해야 할 건가?

 

다. 묘표(墓表)

1900년 음력 5월 하순 팔계(八溪 경남 합천군 초계면) 정재규(鄭載圭 도학자

아, 이는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삼우당 문 선생(三憂堂 文先生)의 묘소다.
선생은 이름이 익점(益漸)이고 자(字)는 일신(日新)이다. 충혜왕 신미년에 태어나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정언을 제수받았다. 계묘년에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갔는데 구속을 당하였고 굴복을 하지 않자 운남(雲南) 땅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용서를 받아 돌아올 때에 길에서 목화를 보고는, 문득 큰 덕의 뜻을 품었다. 씨앗을 입수하여 돌아왔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무명의 솜옷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을묘년에 포은 정몽주, 반남 박상충(潘南 朴尙衷) 등과 상소하여 말하기를 원나라의 사신(使臣)을 맞아들이지 말고, 명(明)나라를 배반하지 말라고 했다가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쫓겨났다. 
정사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묘를 지킴에 남달리 3년상을 치렀다. 당시는 왜구의 기세가 왕성해서 고을들이 텅텅 비게 되었지만 선생은 울며 제물을 바치며 묘를 지키니, 도적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전생이 있는 곳을 빙빙 돌면서도 강성(江城) 땅에는 침입하지 않았다. 우리 이씨조선의 태조(太祖)께서는, 왜놈들을 치러 남쪽으로 내려 가셨을 때, 친히 찾아 위로하시고, 왜놈들을 섬멸시킬 방책을 물으셨는데, 그 때 일로 말미암아 포창할 것을 왕에게 아뢰었고, 계해년에 고향에다 표창의 비를 세웠다. 무진년에는,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춘추관 일을 겸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상소하여 당시 꼭 해야 할 여덟 가지에 대해서 의견을 폈으나 왕은 응답을 내리지 않았다. 좀 있다가 조즌(趙凌)이 파직시키라고 탄핵을 하자, 선생은 그 탈로 고향으로 돌아가 집문을 꼭 닫고 찾는 이들을 사절했다. 얼마 아니 되어서, 고려조(高麗朝)가 망하고 경진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니 나이 70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스스로 호 를 삼우(三憂)라 했는데, 그 삼우는 즉 나라가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가 확립되어지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었는 바, 이것은 군자(君子)로서 생명을 다하도록 걱정을 할 것이라고 이를 것이다
우리의 정종대왕께서는 예장(禮葬)하라 명하시고, 묘지기의 집을 두시며 제전(祭田)을 하사하셨다. 태종대왕께서는 의정부참지사 예문관제학의 벼슬을 증직 하시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며,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주셨다.
세종대왕께서는 영의정으로 높여 추증하시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시고 또 충신비(忠臣碑)를 세우라 명하셨다.
그리고, 사관(史官)은 선생의 열전(列傳)을 지어 유학(儒學)의 핵심이라 기리었고,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은 효자비각기를 지었고, 문정공 조식(文貞公 曺植)은 묘사기(墓祠記)를 지었다.
선비들이 제사를 드리는 곳은 일곱 군데가 있는데, 강성(江城)의 도천서원과 관산(冠山)의 월천서원은, 조정에서 서원의 현판을 내리시었으니, 덕을 숭상하고 공에 보답함이 지극한 것이었다.

세계(世系)는 비갈문(碑碣文)에 자세히 말했고, 다섯 아들은 다 높이 되었거니와 선생이 유언으로 남긴 분부를 좇아 스스로를 편안히 지내어 우리 조정에 붙지 않았다. 마땅히 여러 말을 써야 할 것이로되, 일일이 다 쓰지 못하고 선생의 곧은 충성과 참다운 효도, 그리고 나가 관직에 오르고 물러나 집에서 은거함의 바름과 공(功)과 덕(德)이 컸었음을 대대의 어진 임금께서 포창을 하시고, 여러 어진 분들이 칭송하여 기록을 했는데도 뒤에 태어난 못난 사람이 감히 기리는 한 마디를 하는도다

내 사사로이 일찍이 들었거니와, 어느 사람을 논하는 데는 그 속했던 세대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의 때는, 어떠한 세상이기에 되놈을 물리치고 중화(中華)를 존중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올바른 학문을 숭상하며, 추장한 풍속을 고쳐 예의에 맞는 가르침을 밝히었단 말인가? 이것이 존경받는 선생으로 만든 것이고, 그리고 백성들이 오늘까지 그 끼친 혜택을 받게 된 것이며, 옷의 일 같은 것은 즉 선생에 있어서는 말단의 일이었다.
아, 갈로산(葛蘆山)이 무너지지 않고 신안의 강물이 마르지 않을 터에, 높이 4척의 비석 서 있어 같이 서로 오래오래 있을 것이로다. 이는 삼우당선생(三憂堂先生)의 무덤 이다.



라.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


도천서원 입구 신도비각과 신도비

숭정연간(崇禎年間)에서 세 번째 신묘년 월 일
가선대부 이조참관 겸 경연동지사 의금부 동지사 춘추관동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미(李瀰) 지음

후직(后稷)은 농사를 지어 천하를 이롭게 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 분은 공으로서 근본을 삼을 바가 물론 있으되, 시경과 서경의 전하는 기록에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후직의 덕 또한 그의 공에 못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후직을 칭찬하고 후세에 후직을 찬양함에 공을 가지고 하지 덕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즉 이와 같은 공이 있다기에 곧 그의 덕됨을 알수 있어서인 것이다. 옛날의 사람을 논하는 자가 본(本)과 말(末)을 가지고서 두갈래로 말하지 않았음에, 나는 고려 문충선공(文忠宣公)에 있어서 그러함을 실제로 맛본다.

공의 이름은 익점(益漸)이고 자(字)는 일신(日新)이며, 강성(江城) 고을 출신이다.
1331년에 태어나 1360년에 나이 30이었는데, 신경(新京)에서의 제술과에 급제했고 계묘년에 좌정언(左正言)을 제수 받았다. 동년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잡혀 갇히었으나 굴복하지 않자 운남(雲南)의 만리 땅으로 귀양보내었고, 3년이 되자 용서하여 귀환시키었는 바 그 분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서였다. 몸이 남방에 있을 때 밭 가운데에 목면화가 많음을 보고, 종 금용(金龍)을 시켜 그것을 따게 했는데, 그 때 한 노파가 발견하고 놀래어 말하기를, "이 나라에서 엄금하고 있는데 감히 당신이 따는가?"라 했다. 공은 가만히 그 씨앗 몇 개를 붓대 구멍에 넣어서 돌아와 꽃들에다 심고, 그 중의 하나를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심은 지 3년에는 크게 번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서로 같이 실을 켜는 수레와 솜 타는 기계, 사추(絲樞) 씨빼는 것들을 처음 만들고 널리 심되 솜을 내어 옷에 두고 실을 뽑아 베를 짰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국내에 골고루 퍼져서, 공경(公卿)은 물론 일반 백성으로부터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솜과 면포를 저장하여 두고 옷을 지었다. 그래서 여우와 담비의 두터운 가죽옷이 있다는 것을 다시는 알지 못하는 바 이것은 다 공의 붓대 구멍에 들었던 몇 개 씨앗의 소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의 사람들이 공을 우러러 받듦은 후직과 같이 하고, 공을 목면공(木綿公)이라고 칭하여 공의 덕을 덕으로 여겨 마지않는 것이다. 공은 영명(英明)하고 숙성(夙成)한데다 면학에 힘써 영명함을 더하게 했다.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여러 책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전해짐에 공은 마음을 가라 앉히고 깊이 생각하여 자세히 풀어 그 이치를 묘하게 얻어서 드디어 학문의 요지를 마음에 깨달았다. 공은 본가 이외의 다른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진주(晋州)의 강성현(江城縣)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집현산(集賢山) 밑에 있는데, 그 곳의 내는 도천(道川)이라 하고 고을 이름은 오리(悟里)라 하며 마을 이름은 배양(培養)이라 했다. 그곳의 산골물이 흐르는 골짜기는 지극히 깨끗하고 초목이 우거졌다.
공은 나라의 명운이 기울어지려는 것을 보고는 힘을 쓸 수 없자, 병이라 핑계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깊이 들어앉아서,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삼우거사(三憂居士)라 칭했었다. 삼우(三憂)는 즉, 나라가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는 것이고, 성인의 학문이 잘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는 것이며, 자신의 도가 확립되지 못했다고 근심하는 것이었다.
1377 우왕 3년에 왜구가 깊이 침입하였다. 그것들이 지나간 고을들은 처참하게 멸망을 하여 남은 것이 없자 사람들이 다 달아나 숨었다. 공께서 모친상의 복을 입고 있을 때였다. 묘를 지키면서 상복을 끌고 울며 제물 바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도적들이 그 효도에 감복하여 해를 끼치지 않았다. 계해년에 고향집 마을에 표창을 하라 명하고, 안렴사(按廉使) 여극인 고성군사 최복린을 보내어 빗돌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기었다.

무진년에 공을 불러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춘추관의 일을 겸하게 하니, 공은 잠시 나가서 응했는데 공은 글을 왕에게 올려 학문을 위하는 도는 논했지만 임금은 답을 내리지 않았다. 당시 간관(諫官)인 이준 등이 사전(私田)은 돌려 줄 수 없다는 것으로 상소해서 논쟁을 함에, 공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같이 병을 핑계대어 서명(署名)하지 않자, 대사헌 조준(大司憲 趙浚)이 공을 탄핵해서 곧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때를 걱정하고 형세를 알았는데, 어찌 만년에 벼슬길을 따를 생각이 있으랴. 그러나, 충성스럽고 어짐이 임금을 아끼어 감히 경솔히 거절을 못했음에, 때의 임금의 처지가 끝내 충간할 수가 없고,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를 끝내 구해낼 수가 없다고 알았을 건가? 그래서, 왕의 부름을 듣고서는 마음을 번득 돌려 응하고 몸을 일으키어 먼저 나라 다스리는 근본이 되는 것을 말씀드렸으나 역시 자신의 의견이 채용(採用)되어지지 않자 곧 단념을 했으니 다시 바랄 것이 없었다. 이에 깨끗한 옷을 다시 찾아 입고 평소 지닌 뜻대로 하려 했던 것은 장차 몸을 숨기려고 한 것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글로 말할 것이며, 어째서 이 때다 하고 기를 펴는 자들의 뒤를 따르고 평범한 사람들이 말자(末者)를 좇는 글발에 서명할 것이랴?

조준의 식견은 공의 깊숙한 뜻을 엿보기에는 부족해서, 덕을 저버리고 거짓의 말을 꾸미어 공을 탄핵하여 떠나게 했다. 그러나 공은 한 마디의 청백(淸白)을, 다툼도 없이 몸을 돌보며 고향으로 돌아가 도를 즐기며 생애를 마치었는데, 유유히 태연하게 크고도 원만한 태도를 취함에 그 끝을 보이지 않아 은연히 옛날의 군자의 풍도가 있었다.
이(李) 문순공(文純公 :퇴계 이황의 시호)은 "공의 큰 절개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혹 이것을 알지 못하려나? 라고 했는데 아, 이는 공에 대해서 다 한 말씀이었다. 얼마 아니 되어서 고려의 왕조가 뒤집히고 새 왕조가 들어서자 공은 집문을 꼭 닫고 나가지 않았다.
경진년에 공이 돌아가시니 나이 70이었다. 이씨왕조(李氏王朝)가 광영(光榮)을 베풀었는데, 우리 정종대왕께서는 공을 단성(丹城)의 갈로산(葛蘆山)의 유방(酉方)을 향한 언덕에 예장(禮葬)케 하시고, 묘지기 집을 두어 묘를 지키게 하시며 제전(祭田)을 주시었다.

태종대왕께서는 의정부참지사 예문관제학을 추증(追贈)하시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며,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내리시었다.
그리고, 세종대왕께서는 영의정(領議政)으로 높여 추증하지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시며, 그 분의 자손을 등용하시었으니, 여러 사람이 높고 좋은 벼슬에 올랐다.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은, 공의 전(傳)을 지어 고려 시대의 이름 높은 신하들의 열전(列傳)에 끼여 넣고, 우리나라 도학의 종주(宗主)였다고 찬양을 했고,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混)은 공의 효자비각기를 지었고,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은 공의 묘사기(墓祠記)를 지었는데, 다 고려사 열전에 공을 칭송한 것과 같이 말했다.

영남의 선비들은 공을 도천서원(道川書院)에 모셔 제사 지내고, 또 관산(冠山)의 월천서원(月川書院 : 현재 장흥의 강성서원)에서도 공을 제사지내었는데, 두 곳 다 조정에 현판(懸板) 내리실 것을 청원하니, 허락하시어 그 청원대로 해 주셨다. 생각건대, 공이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고 밝힌 덕은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미치었고, 우리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은 나라 안의 귀하고 천하고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어졌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쉽게 알게 되는 데는 친함이 있고, 쉽게 따르게 되는 데는 공이 있는 것이다.
친함이 있으면 오래 갈 수 있고, 공이 있다면 크게 될 수 있다.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은 즉 어진 사람의 덕이오, 클 수 있다는 것은 즉 어진 사람의 덕업 이니라라고 했는데, 공이야말로 이 말에 맞는 어진 분일 것이다.

문씨는 고려(원문은 신라이나 수정함)분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인 공신 남평백 무성공(武成公) 다성(多省)의 후손이며, 고려 시대에 들어 이름 높은 분이 많았다.
공의 증조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이름은 극검(克儉)이다.
조부는 봉익대부 삼사우사 문한학사로 치사(致仕)했고 이름은 윤각(允恪)이다.(문익점의 문과방목에 맞게 수정함)
부친은 좌정언 겸 지제고를 지냈고, 충정공(忠貞公)의 시호가 주어졌으며, 이름은 숙선(叔宣)이다. 모친은 조(趙)씨로, 호부상서(戶部尙書) 진주(珍柱)님의 따님이다.
공의 처음 부인 주(周)씨는, 이부상서(吏部尙書) 세후(世候)의 따님으로 팔계(八溪)군부인에 봉해졌다.
다음 부인은 판사(判事) 정천익(鄭天益)의 따님이었는데, 정천익은 즉 먼저 말한 바 실을 켜는 수레를 처음 만들고 목면의 공을 도운 분이다.
다섯 아들이 있으니, 중용(中庸)은 헌납(獻納)이고, 중성(中誠)은 한림(輪林)이며, 중실(中實)은 간의(간의대부)였고, 중진(中晋)은 진사(進士)였으며, 중계(中啓)는 상서(尙書)였다.

후손은 창성해서 번창함이 또한 목면의 씨앗 퍼짐과도 같다.
9세손 위세(緯世)는 문순공(文純公)을 스승삼아 배우고, 임진년(선조 25 1592)의 국난(國難)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므로 월천서원(月川書院)에 모셔 제사 지낸다.
10세손 홍헌(弘獻)은 글과 덕행이 컸으되, 임진왜란(壬辰侵亂)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지키다 죽어가니, 벼슬을 추증했고 정문(維門)을 세워 포창했다.
10세손인 재도(載道)는 병자년(인조14년 1636)에 왕을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따라갔는데 벼슬은 수사 (水使)에 이르렀다.
이에 든 분들은 그 업적이 표나게 나타난 분들이다

명(銘)을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밭 한가운데 열매 있어, 그 숭어리 펄렁거리네.
따 광주리에 담으면, 솜이 되고 베가 되기도 한다.
봄날에 칡의 베 찾을 것 없고, 겨울에 양의 가죽 옷 입을 것 없다.
그 씨는 남방에나 있었던 것이지만, 그 누가 되놈 땅에서 가져왔던가?
덕 밝고 참된 마음 가졌던 문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주셨네
따스한 옷만 입고 가르침이 없다면, 백성이 어찌 착할손가?
하늘이 좋은 이를 주셔서, 어진 덕이 빛나도다.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에 깊이 들어 그 계책 크고도 넓었도다.
임을 말한 글은 옛부터 전하지만, 선비들도 식견이 없는 것 같네.
도천(道川)을 찾아간들, 임의 실상(實相) 알기엔 어둡다.
아, 문님 가르침은 밝기도 하였어라.
그 은택(恩澤)이 표나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후세에 무궁히 전해질 걸세.
모든 사람들이, 잊을 수 있기 쉽기에,
우리는 벗들을 다듬어, 묘의 근방에 세우는도다
앞으로 나무꾼, 목동도 이 빗글을 보리라.

* 참조 - 삼우당 문집 - 501p 참조

 

마. 삼우당 문익점 선조 추모비(追慕碑)

서기 1994년 4월 일 안동후인(安東后人) 김위현(金渭顯) 근찬(謹撰)

어진 선비의 지혜로운 행의(行義)가 영구(永久)히 만민(萬民)에게 면의(綿衣)로 어한(禦寒)을 할수 있도록 은택(恩澤)을 입혔으니 그 공덕(功德)은 천추만세에 해와 달과 같이 빛나고, 성망(聲望)은 북진(北辰 북극성)보다 더 높으리라. 삼우당 문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字)는 일신이며 진주 강성현 사람이었다.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2월 8일에 충정공(忠貞公) 휘 숙선(叔宣)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선생(先生)은 12세가 되던 해 봄부터 2년간 이가정 선생 곡(穀)의 문하에서 수학하시고 20세가 되던 해에는 군현의 추천으로 경덕재(經德齋)에 입학하시어 3년간 학문을 더 닦으시고 향시(鄕試)에 합격하시었다.
그 후 7년간 더욱 학문을 연마하셔서 공민왕 9년(136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어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으로 나가시었다. 그후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공민왕12년( 1363년)에는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이 되시었다. 그해 3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 가셨다가 동왕(同王) 16년(1367년) 2월 환국(還國)하시니 왕(王)은 선생의 충의(忠義)를 칭찬하시고 중현대부(中顯大夫) 예문관제학 겸 지제고(藝文館提學兼知製誥)를 내리셨다. 우왕 원년(1375년)에는 전의시주부(典儀寺注簿)가 되셨다.

우왕3년(1377)에 자상(慈喪)을 당하자 시묘(侍墓)하고 있었다. 이 때 왜구(儀寇)가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여러 군현을 노략질하여 살상(殺傷)을 일삼았다. 그러나 선생(先生)은 평상시(平常時)와 같이 궤전호곡(饋奠號哭)을 하며 여막(廬幕)을 떠나지 아니함을 보고 그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한 왜구들이 그 곳에 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표목(標木)을 세워 뒤에 오는 다른 왜구들이 선생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先生)의 여막(廬幕)은 물론이요 단성일향(丹城一鄕)이 병화를 면(免)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성계 장군이 진달(進達)하여 그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명명(命名)하고 우왕9년(1383년)에는 효자비(孝子碑)를 건립(建立)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되시었다. 그러나 공양왕4년(1393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다가 조선 정종(定宗) 2년(1400년) 2월 8일 향년(享年) 70세로 고종(考終)하시었다. 정종(定宗)은 진성현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시고 제전(祭田)도 하사(下賜)하셨다.

이후 조선조(朝鮮朝) 역대 왕(王)들은 목면전래(木綿傳來)의 공(功)을 기려서 증직(贈職)과 교서(敎書)를 여러 차례 내리셨다. 태종(太宗) 원년(1411년)에는 가정대부 지의정부사 예문관제 학 동지춘추관사 겸예문관제학 홍문춘추관사를 추증(追贈)하고 갈충보국계운순성좌익택중광리정량공신의 호를 사(賜)하셨다. 그리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追封)하시고 시(諡)를 충선(忠宣)이라 내리셨다. 또 묘(廟)를 세우게 하시고 제 전(祭田)과 노비(奴婢)를 내리셨다
세종 22년(1440년)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가자(加資)하시고 부민후(富民候)에 추봉(追封)하셨고 그뒤 정조(正祖)는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사액(場額)하셨다.

목면 전래(木綿傳來)의 내력(來歷)을 보면 공민완12년(1363) 3월에 선생은 문하찬성사 이공수(李公遂)의 품신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가셨를 때 간인배(奸人輩)가 원제(元帝)에게 참소(讒訴)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왕의 서제(庶弟)인 덕흥군 혜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알고 그 무리들과 항쟁하시다가 원제(元帝)의 미움을 사서 남황(南荒) 만리밖의 교지(交趾)로 유배되시었다. 그 곳에서 3년 간이나 적거생활(謫居生活)하시다가 방환(放還)되시었다. 귀환도중에 목면을 보시고 국리민복에 유용하리라 생각하시고 그 종자 10개를 필관(筆管)속에 넣으셔서 금망(禁網)을 피해 가져 오셨다. 공민완 16년(1367) 2월에 환국하시어 강성현 배양리에서 번식시켜 10여년 만에 전국에 보급되었다.
훗날 선생의 손자들까지도 유지를 받들어서 정혜공 래(靖惠公 萊)는 방차(紡車:믈래)를 만들었고, 군수(君守) 영(英)은 직조의 기술을 개발하여 면포를 짜게 되었으니 면포를 일컬어 문영(文英:무명)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무명은 오늘날 까지도 소중하게 쓰이고 있다.

선생 일가(先生一家)의 행의(行義) 충효양전(忠孝兩全)만으로도 빛나는데 목면 전래까지 하셔서 증민(蒸民)을 광리(廣利)케 하셨으니 그 공(功)은 영원(永遠)히 칭송(稱頌)되리라. 선생(先生)의 목면전래 629주년을 맞이하여 유지(有志)들과 후손(後孫)들이 뜻을 모아 돌을 깎아 그 공(功)을 새기고 목면재배(木綿栽培)의 터전을 일구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글을 청해왔으므로 능하지 못하지만 감히 붓을 들어 공적(功績)의 대강(大綱)을 적는다.

* 참조 - 삼우당 문집 536p

 

바. 추모비명 병서 (追慕碑銘竝序)

문 선생 탄생 후(後) 628년 단기 4291년 무술 10월 6일 - 성균관장 최찬익(崔燥端) 삼가 지음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초휘는 익첨(益瞻)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사은(思隱)이다.
중세(中歲)에 왕국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학(聖學)이 밝지 못함을 근심하고 자신의 도(道)가 서지 못함을 근심하여 집을 강성의 도천(道川)위에 세우고 삼우(三憂)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삼우거사(三憂居士)라고 하였다. 고려 삼광선생(三光先生)의 휘 다성(多省) 시호 무성공(武成公)과 고려 명현 휘 극겸(克謙) 충숙공(忠肅公)의 후라. 고려 충혜왕 원년 신미 2월 8일에 선생이 강성(江城)의 배양리(培養里)에서 태어나 문학(文學)이 일찍 이루어졌으니 가정 이선생( 稼亭 李先生)문하에 수학하고 이목은(李牧隱)과 정포은(鄭圃隱)과 성리서(性理書)를 강구하였다.

공민왕조에 벼슬이 예문관직강 태상박사 좌정언에 이르렀는데, 그 때에 원나라 임금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워서 왕을 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서장관으로서 사신을 받들어 원나라에 가서 극구 변론함에 항의하여 굴하지 아니하니 원나라 임금이 크게 노하여 벌을 주고자 하다가 좌우의 신하들의 충간함으로 인해 드디어 풍토가 심악한 교지에 귀양 보내어졌다 선생이 걸출한 모습으로 귀양지에 생활하니 약샘이 문득 뜰 아래서 나자 원근(遠近)이 다 먹고 그곳 사람들의 병이 스스로 낫는지라 그들은 공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3년만에 원나라 임금이 크게 뉘우쳐서 명령을 내려 돌아오게 하였는데, 도중의 들밭에 꽃이 눈 같은 것을 보고 비로소 목면인 줄 알았다. 금용(金龍)에게 시키어 따려고 하자 지키는 자가 소리를 치며 빼앗고자 하다가 선생의 위의(威儀)를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국법이 심히 엄하여 외방으로써 알지 못하게 하니 엎드려 원하건대 깊이 감추어 잘 가지소서."하였다. 선생이 금용에게 명령하여 붓 대롱에 감추어 돌아왔는데, 몇 해가 못되어 성하게 퍼져서 이제까지 힘을 입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할 때 왜구가 쳐들어오자 사람이 다 숨었으나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울고 전을 올리니 도적들이 감복하여 나무를 깎아 효자를 해치지 말라 써 놓고 감으로 한 고을이 편안하였고, 이에 조정이 정려(旅間)를 내리면서 효자리 (孝子里)라 하였다.

이로부터 병을 핑계하고 숨어서 삼우당(三憂堂)을 세우고 작고 그윽한 이치를 강구하더니 중간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와서 상소한 것이 팔조(八條)였는데 극히 당시의 마땅한 일을 의논하였다. 소매를 떨치고 고을에 돌아와서 크게 후학 장려하는 것으로 일삼다가 고려 사직이 이미 기울어 지자 문을 닫고 스스로 고요함을 즐겨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정종 경진년 2월 8일에 돌아가시자 왕은 갈로개산 묘좌에 예장하고 묘와 사당을 세우고 묘지기를 두고 비와 제전(祭田)을 내렸다. 태종 신사년에 가정대부 참지의정 부사 예문관제 학 동지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증하고 갈충보국 개운순성좌익택중 광리정량공신을 내려 강성군(江城君)을 봉(封)하고 시호를 충선공(忠宣公)이라 하여 부조묘(不淋廟)를 세워서 제전과 노비를 내렸다. 세종 경신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부민후에 봉하고 그 후 열성왕(列聖王)이 치제(致祭)하였음에 전교(傳敎)로서 표창하고 사람이 제사 올려 제현이 찬양하여 선생의 충효 도학과 절의 공덕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선생은 5남을 두었으니 중용(中庸)은 조선(朝鮮)에 벼슬이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고 중성(中誠)은 한림학사 간의 대부요 중실(中實)은 문과 간의 대부요 중진(中晋)은 성균진사 밀직부사 문하시중이요 중계(中啓)는 문과 예부상서 참지도첨의니 모두 고려조의 명신(名臣)이다. 후손이 극히 성함에 세대가 변함 없음을 이에 증험할 것이다. 선생의 후손으로 영덕(盜德)과 영양(英陽)과 울진(齋珍)에 있는 사람이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비를 세워서 매년 가을에 목면(木綿)을 드리고 제사하니 그 정성이 지 극하도다. 나에게 글을 청하는 사람은 후손 명기(明瑞) 석봉(錫奉) 사손 승헌(承憲)이다. 따라서 명(銘)하여 쓴다.

죽음과 쫓김을 생각지 아니하고 임금을 위하니 그 충성 이요,
칼과 창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여묘를 지키니 그 효성이요,
마음을 의리에 다하여 정밀하게 연구하니 그 학문(學問)이 크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문을 닫으니 그 절개가 크고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길뜰 감추어서 돌아와 덕으로써 입히니 그 공이 넓은지라.
슬프다, 선생은 참 동방의 대헌(大賢)이로다.

* 참조 - 삼우당문집 528P에 "묘비명 병서"로 실려 있음

 

사. 삼우당 문익점 선조 묘사기 (墓祠記)

창령 조식(昌寧 曺植) 지음

고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공의 묘는 강성현의 북녁 갈로개산에 있으니, 건문(建文) 2년에 조정이 명하여서 예장한 것이다. 그 때 장사를 지내고는 묘지기의 집을 두었다.
공은 이름이 익점(益漸)이고, 자(字)는 일신(日新)이며, 강성땅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의로운 행동을 잘 하였다. 지정 연간의 경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여러 벼슬을 거쳐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에 이르렀다.
이씨조선(李氏朝鮮) 되어, 태종대왕께서는 돌아가신 공의 공(功)된 행위를 기리어 의정부참지사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추증하시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시며 충선(忠宣)의 시호를 주시었다. 세종대왕께서도 특별히 벼슬을 높이시고, 부민후(富民后)에 봉하셨다.
그 분의 공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지정 연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나라 일의 어려움을 만나 남방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갔다. 3년이 되어서야 풀려 돌아왔는데, 도중에서 목화가 유용하게 쓰임을 깨닫고는, 엄중히 금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남몰래 감추어 가지고 왔다.
이윽고 우리 나라에 퍼뜨려, 온 백성으로 하여금 만세토록 혜택을 입게 했음이 그 공이라 이르는 것이니, 어찌 공이 적다고 할 것이랴? 그러나, 공의 충절이 중국 천자(天子)를 노하게 해서, 월남으로 가게 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 씨앗이 해외에 옮겨질 수 있을 것인가? 일신(一身)의 나그네길을 가지고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이 일을 한 이를 나는 공에게서 보았다. 대체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 이씨조(李氏朝)가 특별히 은혜스러운 명을 내리어 포창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세조7년에, 도천(道川)에다 사당을 짓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올리게 되었는데, 이 또한 위로부터 특명하시어 고을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옅을 떠난 일이 없었고, 비록 벼슬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한 해에 두 번 휴가를 얻지 못함을 걱정하였으니 그 멀고 먼 만리의 거친 땅에서 세 해를 있다가 돌아오게 되자 돌아가 뵐 것을 급히 서둘렀다. 그래서, 원나라 조정에서 사직한 것은, 관직을 제수받은 지 10여일이고, 본국에서 휴직한 것은, 관직을 받은 지 닷새가 채 못되어서였다.
그 당시의 아는 분들은, 공이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근심 걱정이나 즐거운 때에도 절대 잊지 않는다고 여기었던 것이다. 뒤에, 모친상의 복을 입어 묘를 지키고 있다가 왜구들이 제멋대로 날뜀을 만났다.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었으나 공은 상복을 입고서 소리내어 울고 제물(祭物) 바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도적들 또한 감탄을 하고 나무를 빠개어 "효자를 해치지 말지어다(勿害孝子" 네 자를 써 놓고 떠나 버린 것이었다 . 이것은 곧 홍무(洪武) 16년에 빗돌에 새겨 포창하게 된 일이다.
만년에, 고려의 나라 운수가 다하려는 것을 알고는, 병이라 하고서 벼슬하지 않고 고향집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항시 효도하고 우애하며 충성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을 말한 글을 읽었다.
신라와 고려시에 비록 설 홍유(薛弘儒 :설총의 시호 추증)와 최 문헌(崔文憲 : 최충의 시호 추증 984~1068 해동 공자로 대유학자)이 있어서 학문을 잘한 바였지만 말엽에 이르러서는, 학문이 파괴되어 점차로 쇠망해지고 학교가 쇠퇴해지며 세상 사람들이 다 불가(佛家)로 쏠리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로 성인(聖人)의 학문이 전해졌던 것이 거의 다시 진흥(振興)되지 못하게 되었는데, 공이 흘로 이에 대해서 슬퍼했다 이에, 공은 학문에 힘을 써 뒤의 학자들의 돌아갈 길을 가리켜 보이었다.
그러므로 공은 스스로 삼우거사라 일컬었다. 공의 세 가지 근심이란 것은, 나라가 떨쳐지지 못함을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전해진 것이 망해짐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덕이 확립되어지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한 번 난다 하더라도‥‥‥
(以下 글이 없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