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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
내용설명 |
지은이 |
생전의 사적(事蹟)을 적은 글 뒤에 붙이는 글 |
우암 송시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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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비석에 새긴글(사각의 비석에 새긴글은 묘비명임) |
대재학 한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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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은 관직과 성명을 뒷면은 사적기록(갈명은 들어가지 않음) |
도학자 정재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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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2품 이상만 세우는데 序인 산문과 銘인 운문으로 구성 |
오위도총관 李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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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위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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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장 최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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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
가. 사적 서문(事蹟 敍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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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송시열(恩津 宋時烈: 1607~1689 우찬성 지냄) 삼가 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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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찍이 통정대부 공주목사(公州牧使) 신숙(申夙)과 농가직설(農家直說)에 대해서 논했었을 때, 얘기가 목면(木綿)의 종법(種法)에 미치었는데,
그것의 씨는 본래 우리 나라의 고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 공의 지식은 능리중(菱里中)에서 주역 팔괘(周易八卦)를 64괘로 변화 시킨 것과도 같았다.
충선공은 또한 우리 나라에서 정말로 후직(后稷)이었다. 우리의 태종대왕은 어진 정신의 자질(資質)로 먼저 그 분의 공을 칭찬하셔서
내외에 포창하사 정문(旋門)을 세우라 명하시고 제전을 더 불려 주시고 그 분의 벼슬을 높이시며,
그 분의 자손을 존중하여 벼슬 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등용하셨다. 그리고 약한 후손과 촌수가 먼 자손들의 쇠퇴하여짐을 생각하시고,
비록 혹 미천한 서자(庶子)의 파들이라 하더라도 군역(軍役)으로 삼지 말라 하셨으며,
천거하여 뽑아 맑은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허락하는 은전(恩典)을 베푸시었으니 마땅한 일이었다.
내 일찍이 남명 조식(南溟 曺植),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일두 정여창(鄭汝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등의 여러 현인의 문집을 보았던 바,
충선공의 공로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木綿)의 공리(功利)를 끼친 것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유가(儒家)의 학문에도 공이 많기 때문이다.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와 문 충선공이, 우리의 유도(儒道)를 서로 계승할 수가 있어서, 우리의 유도가 찬란히 다시 밝아졌는데,
그 덕의 깊음은 곧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다.
아, 문공의 절개와 의리의 조촐한 품격은, 뛰어나게도 고원(高遠)하여, 만고에 미치도록 전해지고 변하지 않을 것이로다.
이전의 사람으로서 문공과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으로도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뒤의 뒤에서도 역시 문공과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내 뒤의 사람들이 문공에 대해서 알지 못할 것이 염려가 되어 이 글로 말해 둔다. |
나. 묘갈명 (墓謁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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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연호(崇禎年號)를 쓰게 된 후 을사년(정조9년 1785)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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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공 문공(忠宣公 文公)이 돌아가신 지 이미 370여 년에 공의 15세손인 취광(就光)이 공의 사적(事蹟)을 수집해서 나 경원(景源)에게 묘갈명을 써달라고 원하면서 말하기를, "내 선조의 묘가 단성 갈로개산(丹城 葛蘆介山)에 있는데, 묘갈명(墓謁銘)을 지어 새겨 세워야 되겠기에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 "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 경원이 말하기를 "충선공(忠宣公)은 고려를 섬겨서, 참다운 충성과 높은 절개가 사방에 퍼져 있음에, 도리상 마땅히 묘갈명을 새겨 세워야 할 것이거늘, 내 어찌 감히 사양하겠소이까?" 라고 했다.
삼가 살펴 보건대, 공은 이름이 익점(益漸)이고 자는 일신(目新)이라 했는데, 애당초의 이름은 익첨(益瞻)이었고 진주 강성현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와 같이 문과(文科) 과거에 뽑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이 되었다.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갔었는데, 공은 강직하기로 이름이 천하에 높았다. 퉈환안티에물(원의 순제)이 공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대의 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내 그를 임금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데, 어떤가?" 라고 하자, 공이 대답해서 말하기를, "군주가 신하를 대함은 마치 하늘이 땅을 대함과 같사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 라고 했다. 퉈환티에물은 크게 성내어 말하되, "나의 뜻이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너는 속국의 신하로서 천자(天子)가 취하는 예법을 따르지 않으니, 죽어야할 죄로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로다. " 라하고, 교지땅인 남방 만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었는데, 3년 있다가 풀려 고려로 돌아왔다. 이에 학자들이 다 칭송하기를, "공은 충정 (忠貞)의 절개를 잘도 지키었다. "라고 했다.
송(宋)나라 황실이 멸망하게 된
뒤로는 학교 교육이 쇠약해지고 무너졌다. 공은 그것을 슬퍼하고, 공자(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도를 자신이 지켜야 할 책임으로 여겨 불교를 반대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반드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의 풍도를 지니라고 권장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서 고금에 통하는 수천 마디를 했지만, 왕은 그 말을 들어 쓰지 못했다. 이 때를 당해, 공은 도중에 끊어져 전해지지 않은 학문을 부르짖어서, 교육을 훤하게 다시 밝아지게 했다. 이에 학자들은 다 칭송 하기를, "공은 도덕의 깊음을 잘도 터득했다. " 라고 했다. 얼마 후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지사에 제수되었는데, 대사헌 조준(大司憲 趙漆)이 공의 관직을 그만 두게' 하라고 탄핵하자, 공은 그날로 시골로 물러나고 드디어 지리산중(智異山中)으로 숨어 스스로 사은(思隱)이라 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아버지로서 인자하고, 자식으로서 효성스러웠다. 모친상을 당하여 묘를 세 해 동안 지키는데, 왜놈들의 소란으로 사람들이 다 숨었으나 공만은 홀로 떠나지 않자 왜놈들은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왕씨 왕조(王氏 王朝)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자, 병이라 하고는 벼슬을 그만 두고 기미를 알아낸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학자들이 모두, "공은 잘도 숨어 사는 뜻을 이루었다. "라고 칭송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공이 교지 땅으로부터 돌아오다가 목면(木綿)을 발견하고 입수하였는데, 그것을 붓대 속에 감추고 나라로 돌아와 국내에다 심어서,고려의 목면이 공으로 말미암아 처음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우(禹) 임금의 세상에 이미 목면(木綿)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에 이르기를, "남방 되놈은 초목으로 짠 베를 바치거늘, 대(竹) 상자에는 조개의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이다 " 라고 했는 바 목면을 두고 말한 것이다.
즉 초목으로 짠 베라는 초목은 목면의 종류였던 것이다. 현재 남방 되놈의 목면으로 정재(精製)한 것을 길패(吉貝)라 한다. 그렇다면 목면(木綿)은 남방 뒈놈 땅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나오게 된 지가 오래다.
그런데 어찌 공으로부터 처음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명 (銘)을 다음과 같이 짓노라. |
다. 묘표(墓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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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음력 5월 하순 팔계(八溪 경남 합천군 초계면) 정재규(鄭載圭 도학자 |
아, 이는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삼우당 문 선생(三憂堂 文先生)의 묘소다. 선생은 일찍이 스스로 호
를 삼우(三憂)라 했는데, 그 삼우는 즉 나라가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가 확립되어지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었는 바, 이것은 군자(君子)로서 생명을 다하도록 걱정을 할 것이라고 이를 것이다 세계(世系)는 비갈문(碑碣文)에 자세히
말했고, 다섯 아들은 다 높이 되었거니와 선생이 유언으로 남긴 분부를 좇아 스스로를 편안히 지내어 우리 조정에 붙지 않았다. 마땅히 여러 말을 써야 할 것이로되, 일일이 다 쓰지 못하고 선생의 곧은 충성과 참다운 효도, 그리고 나가 관직에 오르고 물러나 집에서 은거함의 바름과 공(功)과 덕(德)이 컸었음을 대대의 어진 임금께서 포창을 하시고, 여러 어진 분들이 칭송하여 기록을 했는데도 뒤에 태어난 못난 사람이 감히 기리는 한 마디를 하는도다 내 사사로이 일찍이 들었거니와, 어느 사람을 논하는 데는 그 속했던 세대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
라.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 |
도천서원 입구 신도비각과 신도비 |
숭정연간(崇禎年間)에서 세 번째 신묘년 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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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직(后稷)은 농사를 지어 천하를 이롭게 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공의 이름은 익점(益漸)이고 자(字)는 일신(日新)이며, 강성(江城) 고을 출신이다.
태종대왕께서는 의정부참지사 예문관제학을 추증(追贈)하시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며,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내리시었다.
영남의 선비들은 공을 도천서원(道川書院)에 모셔 제사 지내고, 또 관산(冠山)의 월천서원(月川書院 :
현재 장흥의 강성서원)에서도 공을 제사지내었는데, 두 곳 다 조정에 현판(懸板) 내리실 것을 청원하니,
허락하시어 그 청원대로 해 주셨다. 생각건대, 공이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고 밝힌 덕은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미치었고,
우리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은 나라 안의 귀하고 천하고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어졌다.
문씨는 고려(원문은 신라이나 수정함)분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인 공신 남평백 무성공(武成公) 다성(多省)의 후손이며, 고려 시대에 들어 이름 높은 분이 많았다. 명(銘)을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
마. 삼우당 문익점 선조 추모비(追慕碑) | |
서기 1994년 4월 일 안동후인(安東后人) 김위현(金渭顯) 근찬(謹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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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선비의 지혜로운 행의(行義)가 영구(永久)히 만민(萬民)에게 면의(綿衣)로 어한(禦寒)을 할수 있도록 은택(恩澤)을 입혔으니 그 공덕(功德)은 천추만세에
해와 달과 같이 빛나고, 성망(聲望)은 북진(北辰 북극성)보다 더 높으리라.
삼우당 문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字)는 일신이며 진주 강성현 사람이었다. |
바. 추모비명 병서 (追慕碑銘竝序) | |
문 선생 탄생 후(後) 628년 단기 4291년 무술 10월 6일 - 성균관장 최찬익(崔燥端) 삼가 지음 |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초휘는 익첨(益瞻)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사은(思隱)이다. 공민왕조에 벼슬이 예문관직강
태상박사 좌정언에 이르렀는데, 그 때에 원나라 임금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워서 왕을 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서장관으로서 사신을 받들어 원나라에 가서 극구 변론함에 항의하여 굴하지 아니하니 원나라 임금이 크게 노하여 벌을 주고자 하다가 좌우의 신하들의 충간함으로 인해 드디어 풍토가 심악한 교지에 귀양 보내어졌다 선생이 걸출한 모습으로 귀양지에
생활하니 약샘이 문득 뜰 아래서 나자 원근(遠近)이 다
먹고 그곳 사람들의 병이 스스로 낫는지라 그들은 공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3년만에 원나라 임금이 크게 뉘우쳐서 명령을 내려 돌아오게 하였는데, 도중의 들밭에 꽃이 눈 같은 것을 보고 비로소 목면인 줄 알았다. 금용(金龍)에게 시키어 따려고 하자 지키는 자가 소리를 치며 빼앗고자 하다가 선생의 위의(威儀)를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국법이 심히 엄하여 외방으로써 알지 못하게 하니 엎드려 원하건대 깊이 감추어 잘 가지소서."하였다. 선생이 금용에게 명령하여 붓 대롱에 감추어 돌아왔는데, 몇 해가 못되어 성하게 퍼져서 이제까지 힘을 입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할 때 왜구가 쳐들어오자 사람이 다 숨었으나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울고 전을 올리니 도적들이 감복하여 나무를 깎아 효자를 해치지 말라 써 놓고 감으로 한 고을이 편안하였고, 이에 조정이 정려(旅間)를 내리면서 효자리 (孝子里)라 하였다.
이로부터 병을 핑계하고 숨어서 삼우당(三憂堂)을 세우고 작고 그윽한 이치를 강구하더니 중간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와서 상소한 것이
팔조(八條)였는데 극히 당시의 마땅한 일을 의논하였다. 소매를 떨치고 고을에 돌아와서 크게 후학 장려하는 것으로 일삼다가 고려 사직이 이미 기울어 지자 문을 닫고 스스로 고요함을 즐겨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정종 경진년 2월 8일에 돌아가시자 왕은 갈로개산 묘좌에 예장하고 묘와 사당을 세우고 묘지기를 두고 비와 제전(祭田)을 내렸다. 태종 신사년에 가정대부 참지의정 부사 예문관제 학 동지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증하고 갈충보국 개운순성좌익택중 광리정량공신을 내려 강성군(江城君)을 봉(封)하고 시호를 충선공(忠宣公)이라 하여 부조묘(不淋廟)를 세워서 제전과 노비를 내렸다.
세종 경신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부민후에 봉하고 그 후 열성왕(列聖王)이 치제(致祭)하였음에 전교(傳敎)로서 표창하고 사람이 제사 올려 제현이 찬양하여 선생의 충효 도학과 절의 공덕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선생은 5남을 두었으니 중용(中庸)은 조선(朝鮮)에 벼슬이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고 중성(中誠)은 한림학사 간의 대부요
중실(中實)은 문과 간의 대부요 중진(中晋)은 성균진사 밀직부사 문하시중이요 중계(中啓)는 문과 예부상서 참지도첨의니
모두 고려조의 명신(名臣)이다. 후손이 극히 성함에 세대가 변함 없음을 이에 증험할 것이다. 선생의 후손으로 영덕(盜德)과 영양(英陽)과 울진(齋珍)에 있는 사람이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비를 세워서 매년 가을에 목면(木綿)을 드리고 제사하니 그 정성이 지 극하도다. 나에게 글을 청하는 사람은 후손 명기(明瑞) 석봉(錫奉) 사손 승헌(承憲)이다. 따라서 명(銘)하여 쓴다.
죽음과 쫓김을 생각지 아니하고 임금을 위하니 그 충성 이요, |
사. 삼우당 문익점 선조 묘사기 (墓祠記) | |
창령 조식(昌寧 曺植)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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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공의 묘는 강성현의 북녁 갈로개산에 있으니, 건문(建文) 2년에 조정이 명하여서 예장한 것이다.
그 때 장사를 지내고는 묘지기의 집을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