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 문익점 선조 상소문

문익점 선조 상소문(上疏文)


     가. 공양왕 봉사소 - 왕의 물음에 대한 밀봉 상소

     나. 원 조정의 주대- 왕의 물음에 대한 답변서

     다. 원의 사신 배척 청원소 - 주장을 왕께 올리는 글


가. 경오년(庚午年) 봉사(封事)의 소(疏) <공양왕 2년(1390)에  밀봉하여 왕께 올린 의견서>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遷事) 문익점 


국가가 성균관(成均館)을 처음으로 세운 이래, 학문(學文)이 비록 이루어졌다고는 할지라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아는 자는 지혜스러우나, 알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사옵니다.

원하옵건대, 안으로는 오부(五部:개성의 다섯 행정구역)에 각각 학당(學堂)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열 가호 밖에 안 되는 쇠잔해진 고을이라도 역시 향교(鄕校)를 설치한다면,

글을 숭상하는 풍속이 다시 떨쳐지고 교화(敎化)가 행해질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기강을 바르게 잡아 나라의 체통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불필요한 벼슬아치들을 줄여버리고  우수하고 현명한 자들을 등용하소서. 이것은 오늘날 가장 급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무릇 장례를 치르는 예법과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있어서도, 오로지 불교식을 숭상하고 있사옵니다. 비록 이름 있는 선비와 벼슬아치의 집이라 하더라도, 세상을 떠난 후로의 상을 백일을 지키고는 곧 마치옵고, 재를 올리면서 불공을 드리는 중에게 밥을 먹이오며, 시제(時祭)에는 종이를 돈 모양으로 오려 놓았다가, 제사를 지낸 뒤에는 바로 그것을 불살라 버리옵니다. 이것 또한 동방(東方)오랑캐의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옵고, 또 옛날의 어진 임금께서 끼쳐 주신 예의를 어기는 짓이옵니다.

원하옵건대, 동방 오랑캐의 추한 풍속의 법식을 깨뜨려 버리시옵고, 주자(朱子)의 가례(家禮: 예의에 관한책으로 5권과 부록1로 구성)의 법식을 시작 확립시키시사  사당을 짓고 신주(神主)를 만들어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 지내게 하소서.


전에 원(元)나라를 섬기게 되었을 때 오랑캐의 옷을 입고, 그 명령(令)을 받들어 오랑캐의 행실을 따르다 보니  절조가 없게 되었는데 당시의 현인군자들의 마음 아픔이 간장에 사무쳤음에, 어언 오늘날까지 백여 년이나 되었사옵니다. 오직 하늘에서는 어둠속에서도 살피시어 성인(聖人)이 나게 하여, 더러운 원나라의 풍속을 없애고, 또 어진이를 낳아 사방의 기강(紀綱)을 평정하여, 어진 덕이 모든 나라에 미치고, 어진이의 교화(敎化)가 천하(天下)에 미치게 하옵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오랑캐 옷의 제도를 고치고, 중국(中國)의 제도를 따라야 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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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8조목이었으나, 다섯 조목의 글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문건이 전하지 않는 사항들은

4. 긴요하지 않고 한가한 자리의 자들을 도태해 버리고 빼어나고 어진사람 등용할 것을 주장

5. 세금 받는 것 적게해 백성 마음 가볍게하고

6. 의창 두어 가난하여 어려움을 구해야 하고

7. 뱃길이 머무는 곳을 설치하여 배로 물자 운반함을 편안하게 함 등이다 


나. 원(元)나라 조정(朝廷)에서 아뢴 글


 - 공민왕 12년(1363), 원(元) 순제(順帝)의 물음에 대해 삼우당(三憂堂)이 대답한 글 


미친 자의 말이라도 성인(聖人)께서는 가려 취한다고 하셨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유념을 하시와 저의 의견을 채택하여 주옵소서.

신(臣)은 작은 나라의 신진으로써 외람되이 천자(天子)님의 조정을 밟고 있사옵니다. 폐하가 비록 기분을 상쾌하게 하시고 용안(龍顔)을 보여 주시면서 제가 올리는 말씀을 들으신다 하더라도, 신은 자연히 두려워 몸이 움츠려 짐을 참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항차 천둥 벼락 같은 노여움으로 위압을 가하시니 어떠하겠습니까?

폐하께옵서는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는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들으신 나머지, 아무 죄도 없는 군주(君主: 고려 공민왕)를 자리에서 내 쫓으시려 하시었으니, 사정(事情)을 아뢰어 부탁드리고 정성(精誠)을 보이지 못하게하십니다. 신은 이제까지 원통함을 품고 마음의 답답함을 참았고, 또 죽을 곳을 알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는 역적 한 사람(최유를 말함) 목을 아깝게 여기시다가, 천하 후세의 비방거리가 되지 마옵소서.

의(義)로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 함은 옛 사람의 훈계(訓戒)이옵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성인이요, 강태공(姜太公)은 현인(賢人)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지지를 잃고 홀로 남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은의 마지막 왕)을 치려고 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齋)는 무왕의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간하여 말렸습니다. 후세에서는 그 일을 칭찬하여 왔나이다.


현재 저의 나라 왕(王)은, 이제까지 은나라의 주왕과 같은 큰 죄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변방을 지키는 신하로서의 예에 어긋남이 없었사온데, 폐하께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의 말에 지나치게 미혹(迷辯)되시어 공연히 왕을 폐위(廢位)시키려 하시옵니다.

신은 백이숙제와 같이 지하에서 놀기를 원할지언정,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와 천하에 서 있기는 원하지 않사오니, 폐하께서는 먼저 신을 죽이시어서 천하에 고해 주시옵기를 원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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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고, 공민왕을 폐(廢)하자는 것을 받아들이고, 삼우당에게 그 계책(計策)에 따르라 명하고 뜻을 묻자, 이 글과 같은 말로 대답하여 이 해에 교지(월남)땅으로 유배를 당하였는데,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선생의 공적을 깍기 위하여 문익점이 덕흥군에 붙어 한패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한패가 되었다면 귀양갈 이유가 없고 귀국후 형을 받음이 마땅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할까 -홈페이지 개설자 문병달-


다.  원의 사신을 맞지 말라는 청원소(請願疏)


신(臣)들이 사사로히 들음에 의하오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먼저 대계(大計)를 정했사옵니다. 대계가 정해지지 못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의심하고 두 갈래로 나누어 집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하는 것은 모든 일의 화근인 것이옵니다.
우리의 태조(太祖)께서 당대말(唐代末)에 일어나신 이래, 중국을 예의로써 섬겼사온데, 그 섬김은 천하의 의인된 임금인가를 보아서 였을 따름 이었나이다.

지난번에, 원나라의 임금이 스스로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하자, 명(明)의 황제가 일어나셔서 사해(四海)를 다 차지하였는데, 우리의 돌아가신 선왕(공민왕)께서는 천명을 밝게 아시고, 표문(表)을 올리어 신(臣)이라 칭하였사옵니다. 이에 명의 황제께서는 칭찬하시어, 왕으로 봉하시고, 또 하사품을 내리셔서 두 나라가 서로 가까이 한 지가 이에 6년이 되었사옵니다.

금상 전하께서 임금자리에 오르신 당초에, 반역의 신하 김의(金義)는 명나라의 사신을 예로 따라 보내는 마당에 도중에서 함부로 살해하고는, 조정을 배반하여 북원(北元)으로 들어가 그는 원나라의 황제가 남긴 서자(庶子)와 변방의 왕(심양왕)을 맞아들일 것을 꾀했사옵니다.


중국의 사신을 살해하고, 또 군주를 배반하였으니, 그의 모질고 의리에 벗어난 것은 심한 것이었나이다. 그러하온즉 진실로 마땅히 그의 죄를 올바르게 정하시어, 위로는 중국의 천자(天子)에게 고하시고, 아래로는 방백(方伯)들에게 알리시며, 그를 쳐죽여야만 될 것이옵는데도, 국가는 정의의 죄를 불문에 붙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崙)로 하여금 공물(貢物)을 받들고 북원(北元)으로 가게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오계남(吳季南)은 중국의 천자한테서 봉(封)을 받은 나라의 신하인데도, 함부로 정료위(定遼衛)의 세 사람을 죽이었고, 장자온(張自溫) 등은 김의(金義)와 같이 간 사람이었는데도 정료위(定遼衛)쉐 도달하지도 못한 채 공공연히 환국을 했었사옵니다. 그런데도, 또한 그대로 두어 그 허물을 묻지 않았사옵니다


이번에, 북윈의 사신이 오자, 대신을 국경의 지점으로 보내어 예의로써 영접할 것을 의결하였는데, 복원이 심히 성냄을 원하지 않고, 군사일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 말하옵니다. 원은 나라를 잃고도 멀리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여 한번 배를 불리는, 즉 잠시 연명할 것을 기대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군왕을 용납한다는 명목을 붙이고 있사오나, 실은 자기네의 잇속을 차리는 것이옵니다. 이제, 그들을 끊어 버리신다면 그것은 곧 우리 나라의 강한 것을 보이는 것이 되오나, 그들을 섬긴다면, 오히려 그들의 뜻을 교만히 하올 테니, 그 군사 일을 없게 하자는 것이, 실은 군사일이 빨리 있게 하는 것이옵니다.


사사로이 북원의 조서(詔書) 내용을 들으니, 우리를 대역죄(大逆罪)로 몰았다가도 용서를 한다 했다는데, 우리는 본시 죄가 없사옵거늘, 또한 어찌 용서를 한 다 할 것이오니까?

국가가 만일에 그 사신을 예의로써 대접하고 돌려 보낸다면, 온 나라의 신민(臣民)은 그 사실이 없는데도 우리 스스로가 대역의 죄명을 둘러 써서, 사방에다 전해 알게 할 수가 없는 것이옵거늘, 신하된 자가 참을 수 있는 것이겠사옵니까? 하물며 또 명의 조정(朝廷)이 김의(金義)의 저지른 일을 처음 듣고는 이미 우리 나라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온데, 다시 북원과 서로 통하여 김의(金義)의 죄를 묻지 않았다고 듣는다면, 곧 반드시 사신을 죽이어 적과 한패가 되고 있음이 의심할 것 없다고 말할 것이옵고, 만약에 그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키어 해륙(海陸)으로 같이 진군하여 온다면, 국가는 무슨 말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이옵니까?

그것은 작은 적의 군사가 요동치 않게 하려다가, 실로 천하의 대군을 움직이게 하는 짓이옵니다. 이 이치는 심히도 명백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깨닫기 쉬운 것인데도, 우리 조정의 의론에서는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사온데 그 까닭은 알기에 어렵지 않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전일 여러 작은 변이 있었던 당시 재상이 명나라 조정의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해서, 사실로 김의(金義)와 통모(通謀)를 한 나머지 윗나라인 명과의 인연을 끊으려 한 일이 있었사온데, 안사기(安師埼)가 그 사정이 들어나자 자살을 했사온 바, 그것이 그 이유인 것이옵니다. 안사기가 이미 죽었사온즉, 마땅히 빨리 계책을 정해서 뭇사람들의 분함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도, 이제까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인심이 흉흥(洵溜)하여 다른 변이 생길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전하(殷下)께서는 스스로 마음에 결단을 내리시어, 원의 사신을 잡고 원나라의 조서를 몰수하시고  오계남(吳季南) 장자온(張自溫) 등 정의가 데리고 갔던 사람들과 같이 묶어 명나라 서울로 보내시온다면, 애매한 죄는 가리지 않더라도 자연히 명백해질 것이옵니다.

그리고, 정료위와 손을 잡아 양병을 하여 변이 있을 것에 대비하고 북쪽을 향해서 소리를 친다면, 원나라의 남은 무리들은 자취를 나타내지 않고 멀리 도망을 쳐서, 국가의 복은 무궁히도 기약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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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원년(1375)에,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등과 연명(連名)으로 올렸으나 왕한테 용납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당하여, 삼우당은 청도(淸道)로, 정몽주는 언양(彦陽)으로 좌천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騷隱集) 7권 4책으로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