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 문익점 선조관련 전교와 국가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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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문익점 선조 관련된 전교(傳敎)

전교는 왕이 내린 명령서입니다. 조선의 여러 왕들(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경종, 영조, 장조)은 문익점 선조의 손들을 돌보라고 누누이 명령하였지만  그 명령들은 중앙에서 지방에서 거의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태종원년
1401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 (文益漸)은, 충과 효를 다했고, 학문이 순수하고도 바른 것이었으며, 또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은 영원히 힘입게 되었으니, 만세에 빛나는 불멸의 것이다. 조정(朝廷)이 그 은덕에 보답하는 길에 있어서 생각을 일으키는 정사(政事)가 없을 수 없도다. 그것은 나라의 법도에  따라 은명(恩命)을 내릴 일이다. 벼슬을 증직하고 작위를 봉하며 시호(證號)를 내려 공훈(功勳)을 기록하고, 살던 마을에 포창을 하여 사묘(祠廟)를 세우고 전토와 노비를 주어 특별한 은전을 내리노라. 
문익점의 자손은 문관(文官) 무관(武官)에  두루 들게 해서 계급의 차례를 거침이 없이 등용을 하고,비록 외롭고 가난한 자손이나 먼 자손이나 서자(庶子)의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군역(軍役)에 넣지 말고, 혹  관청의 종이 되었거나 개인의 종이 되어 있거든,남녀를 막론하고 다 같이 속량함을 면제하여 억만세에 이르도록 그 은전을 변동하지 않을 일이다.

세종22년
1440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덕행과 공로가 저같이도 남보다 뛰어나게 달라 선왕(先王)께서 이미 은전을 베푸시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대를 이어 임금이 된 당초에 마땅히 선왕의 뜻을 좇아 받들되,선왕의 덕을 따르지 못하고 떨어지지 말게 해서, 교화(敎化)를 격려(激勵)하는 뜻을 보여야 할 바였다. 특히 총애(龍愛)하는 표시를 내리니 벼슬을 높이고 작위를 주며, 제사를 드리어 공로를 높일 일이로다. 그의 자손은 문무관(文武官)으로 계급을 밟음이 없이 채용하고, 비록 갈려 나간 천한 서자손(庶子孫)이라  할지라도 군역에 넣지 말 일이다.  선왕의 은전에 따라서 각별히 경계해서 시행할 일일지니 라.

세종 22년 1440년 상국(相國 삼정승을 뜻함) 남지( 南智 좌의정)가 지어 올리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었네.
중국(中國)의 간원(諫院)에서 허위 문서 불에 태우니,하늘의 은하수도 감동하였어라,
귀양살이 3년을 하였건만,  그 의(義)된 기운은 펄펄도 하였지,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 고려(高麗) 서을 개성 (開城)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유익을 끼쳐 우리 뭇 백성 옷 입혀 주었네.

세조3년 1457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공덕에는, 우리 나 라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 영원토록 잊기 어려운 혜택이 있었으니, 마땅히 만세(萬世)에 잊지 않을 보답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영(令)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전토를 불려 주어야 할 일이로다 그의 자손으로 혹 벼슬에 오른 자 있으면 좋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고, 계급의 차례를 밟음이 없이 등용하며, 만일에 자진해서 나서는 자가 있거든 문무관(文武官)을 막론하고 그의 소원을 따라  산관(散官 한직을 말함)에 붙여 주고, 비록 갈려 나간 가닥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천한 일군  속에 섞여 빠져 있는 자들을,  바로 특별히 사정을 보아 속전(贖錢)바치는 것을 면제케 할 일이니라. 각별히 서울과 지방의 관원을 단단히 경계를 해서, 조정의  은덕에 보답하는 진실한 뜻을 따라, 만세에 불변할 두터운 은전을 보이게끔 할 일이 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세조3년 1457 세조임금이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남방 거친 땅으로 내쫓겨, 3년 동안 고생을 한 것  그 절개와 의 리는 높이도 솟았네.
몸이 죽는 것도 돌보지 않았으니  하늘이 복을 내리어 고려의 서울로 돌아왔었네.
좋은 씨앗 처음 가져옴에,  우리 백성들의 한이 풀렸도다.
큰 공 갚기 어렵지만, 철권(공신에게 훈공을 기록해서 준 책)으로 표창을 하여 
자손을 도와 줌이, 이 후로 억만년에 이르리

성종 8년 1477

옛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자손들에게는 더욱 은혜를  베풀어 도와주어야 할 일이니라. 모든 것을 다 선대 임금님들로부터 받은 전교의 조목대로 받들어 빠짐 없이 시행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중종18년 1523

전 왕조시대(前王朝時代)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덕행과 공훈과 공로가 지금도 우리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고, 그에 대한 포창의  큰 은총으로 이미 그 은전 내림이 자주 있었도다. 그의 자손이 좋은 벼슬길에  나가도록 해 주고 계급의 차례를 밟음이 없이 채용을 하며, 비록 갈려나간 서손 (庶孫)이어서 미천하다 할지라도 스스로 나서는 자가 있으면 원하는 바에 따라  관직에 붙여 줄 일이니라. 이조(吏暫)와 병조(兵暫)는 이러한 전교의 뜻을 받들어 각별히 단단하게 경계를 해서 시행토록 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선조3년
1570

비국(備局 비변사의 별칭)에 특명을 내리신 조목의 말씀 뜻은 다음과 같다.
강성군(江城君)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게 해 준 덕이 있으니, 관공서와 조정이 그 보답하는 길의 살핌을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일곱  유명한 현인(賢人)의 후손들 중에서도 강성군(tl城君)의 자손은 특히 군역(軍役)에 넣지 말고, 혹 관청의 종이나 개인의 종이 되어 있으면 다 같이 속(贖)을 바치는 것을 면제하고, 혹 문무(文武)의 관적(官籍)에 몸을 붙이고 있거든  좋고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할 일이니라. 왕이 재결(裁決)한 취지를 받들어 빠짐 없이 시 행하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선조27년1594 

문진강(文振綱)이 말씀 올림으로 말미암아 내린 것이다
병조(兵暫)에서 아뢰기를, "강성군(江城君)의 후손은 다 군적(軍籍)에 넣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군적에  정해 넣었다 하더라도 바로 풀어줌이 은덕에 보답하는 정사(政事)에 실제로 합 당하오니, 각 도의 감사(監司)에게 분부하여 이 뜻을 전해서 단단히 단속하고 지 방관이 다 잘 분간해서 시행하게 함이 어떠하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재가(裁可)한 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다.
강성군의 공덕은, 천지와 더불어 같이 있게 될 것이로다. 그 자손이  고단하고 가난하며 미천함도 또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군역의 대열에 섞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특별히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도와 줘야 할 일이니라. 선대 왕들한테 받은 전교의 뜻에 의해서, 각별히 단단하게 안 팎을 경계할 일이다. 승지(承旨)인 신하 윤담무(尹覃茂 도승지역임)는 이 일을 맡고 있으 니, 밑으로 전달을 해서 이에 따르게 할 일이니라.

경종2년

1722

- 월천군(越川君) 문빈( 文彬 익점공 손자)을 포상하는 일로 말미암아 내림 -
충선공의 자손은 좋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허용하고, 아울러 더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와 줘야 할 일이니라, 각별히 전교의 뜻을 받들어, 서울과 지방의 관공서를 부디 단단히 경계를 해야 할 일이다.

영조23년
1747 

왕이 충훈부(忠勳府 국가에 공이 많은 사람이 있는 관청)에 오시니 한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정훈(正勳)의 자 손은 별도로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와 주고, 군역에 넣지 말아야 할 일이 옵니다. "라고 하였는데 왕이 재가한 중에는,
"일곱 유명한 현인(賢人) 중에서도 강성군(江城君)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준 공은 다른 이의 공과는 달리 구별되니, 결코 군역은 물론 집집마다  부과(賦課)하는 부역 일꾼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전교의 뜻을 곧 받들어 잘 시행하되 이것을 안밖으로 알리고, 일일이 밑으로 반포(頭布)가 되어 조정이보답하는 진실한 뜻에 알맞게 할 일이니라."

영조34년 1758

왕께서 춘당대(春塘臺 창경궁내 과거장 )에 납시어 구름 모양의 천막(天幕)을 가리키시고,
모시고 있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문씨(文氏)의 공은 크기만 하도다. "라 하시고,
이어 "제사를 맡고 있는 후손을 찾아가서 등용하되, 만일 관원으로  있는 자가 있거든 곧 대궐로 들어와 나를 만나게 할지니라."

영조42년
1766

왕이 재가한 일을 새로 반포(頌布)한 조목 안에는,
"정훈(正勳)의 자손에 대하여, 각 고을에 조정의 정령(政令)이 없었던가 천한 일군으로 섞어 넣고 있는데 비록 전에 정해진 역(役)이다. 세계(世系)가 명백한 데도 곧 책임의 면제를 내리지 않으면 수령(守令)을 잡아다 물어 죄(罪)를 다스리고, 그 일을 맡은 아전(街前)은 잡아들여 자백시켜서 장소를 정하여 귀양보낼 일이니라, 좌승지(左承旨)인 신하 유언민(兪彦民 삼사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고, 예조찹판, 대사헌))은 이 일을 맡아 받들어 잘 시행할 것이니라
이에 강성군(江城君)의 자손은 다른 정훈의 자손들과 다르므로  결코 군역(軍役)은 물론 또 집집마다 부과(賦課)하는 부역(賦役) 일꾼에 넣을 수  가 없으니, 새로 반포하는 일의 조목을 지방관에게 여러 가지를 비추어 자세히  고찰해서 일일이 펴 내리고, 조정이 보답하는 진실한 은혜에 부응(副應)토록 해서, 어기는 곳이 없어야만 마땅한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영조44년 1768

전교를 내리어 말씀하시되, "우리나라가 3백년 전 이래 의관문물이 빛나게 일신(一新)된 것은, 실로 강성군(江城君)이 목면의 씨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공적이 강성 군보다 큼이 없고 덕이 강성 군보다 훌륭함이 없도다. 조종(祖宗) 때로부터 보답하는 길은 이미 좋은 은전 베푸심이 있었으니, 여러 선왕의 전교의 조목으로서 그 때 그 때의 것이 다 이에 있는데도 도감사(道監司) 지방 수령(地方守令)들이 아직도 소흘히 하였는데, 실로 군왕의 뜻을 우러러 받드는 길이 아니로다. 그 자손으로 관원(官員)이 되어 있는 자는 좋은 지위(地位)에 오르도록 허용하고, 혹 자진해서 나  서는 자라면 계급을 밟음이 없이 등용하며, 비록 갈린 가닥이 천한 서손이라 할 지라도 별도로 후한 은혜를 베풀어 더 도와 주되 군역 및 잡역에 섞여 끼여 넣지 말 일이니, 밑으로 뜻이 닿게 하여 받들어 잘 시행해서 조정의 진실한 뜻에 부응(副應)케 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정조8년1784

예조(禮曺)에서 아뢴 중에는,
"강성군(江城君)의 공적이 남보다 뛰어남은 다시 말할 것 없사오니, 서원(書院) 혹은 고을의 사당(祠堂)을 곧 수선하고 고치어서 기울어지고 무너짐을 면할수 있게 해야만, 실로 그 분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 는 정사(政事)에 알맞사오니, 도감사(道監司)에게 분부를 내려, 지방관(地方官)을 단단히 경계해서, 재정을 지원하여 빨리 수리하게 하고, 그 자손은 지방관청이나 감영(監營)에서 불러 쓰라는 등의 뜻과 같이 다 분부하옴이 어떠하오리까 라는 말이있었다 왕의 재가 중에는 특별히 그리하라고 허락하노니 시행하고서 그 자초지종을 곧 글로 보고하게 할 일이니라. 동부승지 인 홍인호(洪仁浩)가 이일을 맡고 밑으로 전달을 하여 이에 따르도록 알 일이로되 완전하게 행함이 있도록 밑으로 뜻을 전달하고 받들어 잘 시행토록 할 일이니라 

정조11년 1787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하와 같은 성인 전주이씨와 전쟁에 죽은 공신의 자손에 대해서는 각각 일정한 한도가 있사온즉  조종(祖宗)때의 조목대로 영원히 비천한 일꾼으로 넣지 말게 하옴이 어떠하오리까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왕의 재가 중에는 문충선공의 덕행과 공로가 그렇게도 칭찬할 것이어늘 ,오직 역대왕 때에 받은 전교의 뜻에 따르고 받들어 시행하여 교화를 격려하는 것으로 삼음이 마땅한 일이로다.

 순조4년1804

 자손들에게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우라 묘갈명 완성됨
순조 18년 문치광 문계환에 의해 년보 지어짐

 철종5년1854

 부조묘 재건립과 사손을 정하여 세울 것 명함

고종22년

 문묘배향 청함( 윤병일 및 삼남유학)    고종 1년 봉강서원 건립

 1928년

 장연서원에 배향

 1935년 

 경현사에 배향(장성 만수산 아래)

 2002년

충선사(경북 영덕)에 배향

 

년보의 요약 뒷부분은 후손이 추가함

 


나. 문익점 선조 관련된 국가사료(國家史料)

문익점 선조와 관련된 국가사료는 다음과 같으며 클릭하면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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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국역 비변사 등록 2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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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려사 2건 바로가기

     5) 고려사절요 2건 바로가기


1) 조선 실록 - 13건


1. 전 좌사의대부 문익점 졸기.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와 재배하게 된 내력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13일 정사 1번째기사 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경자년(주 068)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몇 일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을묘년(주 069)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註 068]  경자년 : 1360년.

[註 069]  을묘년 : 1375년.


○丁巳/前左司議大夫文益漸卒。 益漸, 晋州 江城縣人。 父淑宣登第不仕, 益漸承家業讀書。 恭愍庚子, 登科, 調金海府司錄。 癸卯, 以諄諭博士, 陞左正言, 爲計稟使左侍中李公遂書狀官, 赴元朝。 將還, 見路傍木緜樹, 取其實十許枚, 盛囊以來。 甲辰, 至晋州, 以其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 種而培養, 唯一枚得生。 天益至秋取實至百許枚, 年年加種, 至丁未春, 分其種以給鄕里, 勸令種養。 益漸自種, 皆不榮。 胡僧弘願到天益家, 見木緜感泣曰: "不圖今日, 復見本土之物。" 天益留飯數日, 因問繰織之術, 弘願備說其詳, 且作具與之。 天益敎其家婢, 織成一匹。 隣里傳相學得, 以遍一鄕, 不十年, 又遍一國。 事聞, 洪武乙卯, 召益漸爲典儀注簿, 積官至左司議大夫。 卒年七十。 至國朝, 以議者之言, 贈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 子三, 中庸、中實、中啓。



2. 문익점의 아들 중용과 최무선의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리다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3월 1일 경인 2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이거이(李居易)를 파면하여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이서(李舒)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곽추(郭樞)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직(李稷)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박(趙璞)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조호(趙瑚)로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를 삼고,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權近)이 상서하기를,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木緜種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 집[村舍]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進上)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익점이 준 것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공덕(功德)이 있는데도 응보(應報)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아들 중용(中庸)이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3년을 시묘(侍墓)하고, 이어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고, 상을 마친 뒤에 그대로 진양에 숨었으니, 근근(勤謹)하고 효렴(孝廉)하여 쓸 만한 선비입니다. 고(故)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하여 능히 해구(海寇)를 제어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功)이 있습니다. 그 아들 해산(海山)도 또한 마땅히 서용(敍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罷李居易爲西原府院君, 河崙爲晋山府院君。 以金士衡爲左政丞, 李舒右政丞, 趙英茂、郭樞議政府贊成事, 李稷參贊議政府事, 趙璞三司左使, 趙瑚藝文館太學士。 擢文中庸爲司憲監察, 崔海山軍器注簿。 參贊權近上書曰:

故諫議大夫文益漸, 初入江南, 覓木緜種子數枚齎來, 送於晋陽村舍, 始織木緜進上。 是故木緜之興, 始於晋陽。 由此廣布一國, 凡民上下, 皆得以衣之, 是皆益漸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早逝。 其子中庸遭父喪, 廬墓三年, 仍遭母喪, 又廬於墓三年終制, 仍隱於晋陽, 勤謹孝廉, 可用之士也。 故知門下府事崔茂宣, 始劑火藥, 能制海寇, 實有功於國家。 其子海山, 亦宜敍用。 從之。



3. 무고금지법·과전체수법·교육진흥·매장법·왜노 혁파 등 사간원의 8가지 시무책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4월 8일 갑진 2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사간원(司諫院)에서 시무(時務) 여덟 가지 일을 조목조목 진달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중략)

여섯째에 이르기를, "사람이 의뢰하여 사는 것은 의식(衣食)뿐입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처음에는 뽕나무[桑]와 삼[麻]만 알고 목면(木綿)이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중원(中原)에 사신 갔다가 그 씨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우리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 위로 경사(卿士)에서 아래로 서인(庶人)에게 이르기까지 상의(上衣)·하상(下裳)을 모두 이것으로 만드니, 백성에게 공(功)이 있음이 가위(可謂)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이미 포상(褒賞)의 법(法)을 거행하여 작질(爵秩)을 추숭(追崇)하였으니, 가위(可謂) 온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전을 상고하면 무릇 한 도(道)에 공(功)이 있는 자도 모두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사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에 공(功)이 있는 자이겠습니까? 원컨대, 관향(貫鄕)에 사당을 짓고 제전(祭田)을 주어서 제사지내어, 성조(盛朝)의 덕(德)을 높이고 공(功)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의논하기를, "이미 일찍이 포상(褒賞)하였으니, 사당(祠堂)을 짓고 제전(祭田)를 주는 것은 아직 정지하소서." 하였다.


○司諫院條陳時務八事, 下議政府擬議以聞:

其六曰, 人之所賴以生者, 衣食而已。 吾東方始知桑麻, 而不知木綿之爲何物也。 諫議大夫文益漸奉使中原, 得種而還, 以惠吾民。 上自卿士, 下至庶人, 上衣下裳, 皆以此爲之, 其有功於民, 可謂大矣。 故國家已擧褒賞之典, 追崇爵秩, 可謂稱矣。 然稽之於古, 凡有功於一道者, 皆設祠堂而祀之。 況有功於一國者乎? 願構祠堂於貫鄕, 給祭田而祀之, 以示盛朝崇德報功之意。 議得: "已曾褒賞, 其構祠堂給祭田, 姑且停之。"



4.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진성현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진성현


◎ 진성현(珍城縣)

강성현(江城縣)은 본디 궐지군(闕支郡)인데, 경덕왕이 궐성군(闕城郡)으로 이름을 고치고, 고려에서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명진현(溟珍縣)은 본디 매진이현(買珍伊縣)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다. 경덕왕이 명진(溟珍)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원종(元宗) 신미년에 왜적을 피해 육지로 나와서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영선현(永善縣)에 교거(僑居)하였는데, 본조(本朝)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 두 현을 합하여 진성(珍城)이라 이름하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단계(丹溪)이다. 이는 본디 적촌현(赤村縣)인데, 경덕왕이 단읍(丹邑)으로 이름을 고쳐서 궐성군(闕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내속(來屬)시켰다.

신안진(新安津) 【그 근원이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서 현(縣) 동남쪽을 지난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주(晉州) 토천(吐川)에 이르기 7리, 서쪽으로 진주(晉州) 단속(斷俗)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문천(文川)에 이르기 6리, 북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34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2백 34호, 인구가 8백 72명이요, 단계(丹溪)의 호수는 1백 39호, 인구가 4백 9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5명, 영진군(營鎭軍)이 29명, 선군(船軍)이 1백 62명이다.

강성현(江城縣)의 성이 4이니, 문(文)·송(宋)·여(呂)·이(李)이요, 내성(來姓)이 1이 니, 하(河)이며, 【진주에서 왔다. 】 속성(續姓)이 6이니, 주(周) 【초계(草溪)에서 왔다. 】 ·김(金) 【용궁(龍宮)에서 왔다. 】 ·김(金) 【송림(松林)에서 왔다. 】 김(金) 【계성(桂城)에서 왔다. 】 ·탁(卓) 【근본은 알 수 없다. 】 ·김(金) 【김해에서 왔다. 】 이다. 명진(溟珍)의 성이 5이니, 임(任)·조(曺)·한(韓)·허(許)·하(河)이요, 속성이 1이니, 신(申)이며, 【아주(鵝州)에서 와서 지금 향리가 되었다. 】 단계(丹溪)의 성이 6이니, 이(李)·하(河)·서(徐)·여(余)·사(史)·송(宋)이다. 인물(人物)은 좌사의 대부 증 참지의정부사(左司議大夫贈參知議政府事)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이다. 【고려 말기 사람인데, 본조 태종 때에 추증(追贈)하였다. 】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7백 50결이다. 【논이 7분의 4가 넘는다. 】 토의(土宜)는 벼·기장·피·뽕나무·삼[麻]·감·목면(木綿)이요, 【우리 동방에 오랫동안 목면(木綿)이 없었는데, 문익점이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들어갔다가 그 종자를 구하고, 또 가꾸고 길쌈하는 방법을 알아 가지고 와서, 화분에 심었다. 점점 고을[鄕曲]에 전하여 드디어 일국에 퍼졌다. 】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은구어·왕대[簜]·칠·종이·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단계현 동쪽 두곡리(豆谷里)에 있다. 【하품이다. 】

강산 석성(江山石城)은 현(縣) 북쪽 6리에 있다.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 그 반이고, 둘레가 1백 50보이다. 안에 작은 못 2, 작은 샘 1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 역(驛)이 2이니, 신안(新安) 【현(縣) 경계에 있다. 】 ·신역(新驛) 【단계에 있다. 】 이요, 봉화(烽火)가 1곳이니, 입암(笠嵓)이 단계현 동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晉州) 광제산(廣齊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삼가현 금성(金城)에 응한다. 】


◎ 珍城縣、江城縣: 本闕支郡, 景德王改名闕城郡, 高麗改爲江城縣。 顯宗戊午, 屬晋州任內, 恭讓王庚午, 始置監務。 溟珍縣, 本買珍伊縣, 海中島也。 景德王改名溟珍, 爲巨濟郡領縣, 高麗因之, 後置監務。 元宗辛未, 避倭出陸, 僑寓晋州任內。 永善縣, 本朝恭靖王元年己卯, 倂二縣, 號珍城。 屬縣一, 丹溪, 本赤村縣, 景德王改名丹邑, 爲闕城郡領縣, 高麗改今名。 顯宗戊午, 屬陜州任內, 恭讓王庚午, 來屬新安津。 【其源出自智異山, 過縣東南。】 四境, 東距晋州 吐川七里, 西距晋州 斷俗八里, 南距晋州 文川六里, 北距三嘉三十四里。 本縣戶二百三十四, 口八百七十二。 丹溪戶一百三十九, 口四百九十六。 軍丁, 侍衛軍二十五, 營鎭軍二十九, 船軍一百六十二。 江城縣姓四, 文、宋、呂、李; 來姓一, 河; 【晋州來。】 續姓六, 周、 【草溪來。】 金、 【龍宮來。】 金、 【松林來。】 金、 【桂城來。】 卓、 【本未詳。】 金。 【金海來】 溟珍姓五, 任、曺、韓、許、河; 續姓一, 申。 【鵝州來, 今爲鄕吏。】 丹溪姓六, 李、河、徐、余、史、宋。 人物, 左司議大夫贈參知議政府事江城君 文益漸。 【高麗末人, 本朝太宗時追贈。】 厥土肥, 風氣暖, 墾田一千七百五十結。 【水田七分之四强。】 土宜, 稻、黍、稷、桑、麻、柿、木綿。 【東方久無木綿, 文益漸以書狀朝京師, 求得其種及耕織之術以來, 種于盆, 漸傳鄕曲, 遂遍一國。】 土貢, 蜂蜜、黃蠟、銀口魚、簜、漆、紙、鹿皮、獐皮、狐皮、水獺皮。 藥材, 麥門冬。 磁器所一, 在丹溪縣東豆谷里。 【下品。】 江山石城, 在縣北六里。 【天作之險, 居其半。 周回一百五十步, 內有小池二、小泉一。 又有軍倉。】 驛二, 新安、 【在縣界。】 新驛。 【在丹溪】 烽火一處, 笠嵓在丹溪縣東。 【南準晋州 廣齊山, 北準三嘉 金城。】



5.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서 대위(大位)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와 민속(民俗)의 간난(艱難)한 일을 통찰(洞察)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宵旰)159) 으로 부지런히 도치(圖治)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 년 태평 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三韓)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병(利病)을, 대신(大臣)은 꾀하고 대간(臺諫)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侍從)하는 직사(職事)들도 논사(論思)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經幄)160) 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成効)도 없어 성덕(聖德)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微衷)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萬)의 일(一)이라도 비익(裨益)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便宜) 24사(事)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중략)

1. 문익점(文益漸)·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남녀(男女) 할 것 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新羅) 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중략)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 光登大位, 古今治亂之跡、民俗艱難之事, 靡不洞照, 宵旰圖治, 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 誠三韓一盛際也。 方令朝廷得失、民間利病, 大臣謀之, 臺諫論之, 其他侍從之職, 在於論思, 臣以庸劣, 獲侍經幄, 愧無寸効上報聖德。 凡國家大小之事, 罔不商確於微衷, 而思有以裨益乎萬一, 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 惟聖鑑財幸。(중략) 一, 文、崔立祠。 蓋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則祀之, 能禦大患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奉使留元,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末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元,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鎭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宥罪錄用 (중략) 上嘉納。


6. 청백리와 충신·효자의 자손들을 녹용함을 의논하게 하다

중종실록 4권, 중종 2년 11월 25일 갑자 4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주강에 납시었다. 최숙생이 아뢰기를,

"장오(贓汚)799) 의 자손은 기록하여 징계하라 하였으나,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은 표창하여 권장하는 법이 없으니, 이는 성대(聖代)의 궐전(闕典)(주 800) 입니다."

하니, 상이 ‘옳다.’ 하고, 정승에게 전교하기를,

"전한(典翰) 최숙생이 아뢴,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일은 매우 당연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충신·효자의 자손들도 녹용함이 옳을 것 같으니 의논하여 아뢰라."

하자, 회계하기를,

"숙생의 아뢴 바가 매우 당연합니다.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청백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효자·충신의 자손을 녹용한다는 것도 역시 당연합니다. 효자 자손의 녹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또한 어찌 해로움이야 있겠습니까? 전조 말엽에 문익점(文益漸)은 면화(綿花)로, 최무선(崔茂先)은 화포(火砲)를 발명한 것으로 모두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니, 이 모두가 권장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니, ‘옳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조정을 바로잡는 것은 대간의 책임인데, 요사이 대간이 늘 사은(私恩)으로 말하기 때문에 나 역시 힘써 따랐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배척한다면 국척(國戚)(주 801)은 장차 조정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조종에서는 안윤덕이 후궁의 족속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입조(立朝)한 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낙점을 한 것이다. 대간의 말이 지나치기는 하였으나, 내 또한 너그러이 용납하였다. 정승의 의도는 어떠한가?"

하니, 회계하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대간의 말이 지나친 것 같으나, 조정이 문란하기 때문에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아뢴 것이니, 상께서 결단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註 800] 장오(贓汚) : 탐관 오리.

[註 800] 궐전(闕典) : 불충분한 전장(典章).

[註 801] 국척(國戚) : 왕실의 외척.


○御晝講。 崔淑生曰: "贓汚子孫, 錄而懲之, 淸白吏子孫, 則無褒奬之法, 此聖代闕典也。" 上曰: "可。" 傳于政丞曰: "典翰崔淑生所啓, 淸白吏子孫錄用事甚當。 予意以謂忠臣、孝子子孫, 亦可錄用, 其議啓。" 回啓曰: "淑生所啓甚當。 淸白吏子孫錄用, 則(也)〔他〕 人勸奬矣。 孝子、忠臣子孫錄用亦當, 但孝子子孫錄用, 未及知也。 然亦何害? 前朝末, 文益漸以緜花, 崔茂先以火砲, 竝錄用其子孫, 此皆勸奬之事也。" 傳曰: "可。" 又傳曰: "正朝廷, 臺諫之任也, 近日臺諫每以私恩言之, 故予亦勉從。 然如此排斥, 則國戚將不得立朝矣。 今朝以安潤德爲後宮族屬, 此人立朝已久, 故落點。 臺諫之言過當矣, 而予且優容之, 政丞之意何如?" 回啓曰: "上敎至當。 臺諫之言似過, 朝廷板蕩, 故以正風俗, 而啓之也, 自上裁斷可也。"


7. 강원도 양전의 일과 고려 태조 묘도 상설 수치 문제 등을 논의하다

숙종실록 49권, 숙종 36년 9월 16일 정미 3번째기사 1710년 청 강희(康熙) 49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중략)

민진후(閔鎭厚)가 을묘년에 정식(定式)한 선성(先聖)·선현(先賢)의 자손(子孫)과, 칠반 천역(七般賤役)(주 348) 외에는 군역(軍役)을 탈면(頉免)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을 거듭 밝히고, 왕씨(王氏)의 사람들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자, 승지 이제(李濟)가 잇달아 말하기를,

"기자(箕子)·문성공(文成公)(주 349) ·문익점(文益漸)의 자손(子孫)은 군역(軍役)을 면제한 구규(舊規)를 빙자하여, 그 해당된 부역(賦役)까지도 여러 가지로 계책을 내어 모면하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은 병조(兵曹)의 하리(下吏)와 부동(符同)하여, 수교 문적(受敎文籍)을 도득(圖得)해 내고는 수령을 속여 중도에서 벗어나 빠졌으니,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하니, 임금이 아울러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註 348] 칠반 천역(七般賤役) : 천한 계급이 종사하는 일곱 가지 천역(賤役). 즉 관아의 조례(皁隷), 의금부의 나장(羅將), 각 지방청의 일수(日守), 조운창(漕運倉)의 조군(漕軍), 수영(水營) 소속의 수군(水軍), 봉화대(烽火臺)의 봉군(烽軍), 역참(驛站)의 역졸(驛卒) 일곱 가지를 말함.


[註 349] 문성공(文成公) : 안향(安珦).


○引見大臣、備局諸宰。(중략) 閔鎭厚請申明乙卯定式先聖、先賢子孫、七般賤役之外, 毋得頉免軍役, 王姓人亦依此例施行。 承旨李濟繼言: "箕子、文成公、文益漸子孫, 憑藉免軍役之舊規, 竝與相當之役, 而百計圖免。 新羅 敬順王子孫, 符同兵曹下吏, 圖出受敎文籍, 瞞過守令, 中間脫漏者, 其弊甚多。" 上竝命申飭。



8. 증 충선공 문익점의 서원에 사액하고 치제를 명하다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9월 5일 신해 4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증(贈)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이어 치제(致祭)를 명하였다. 예조에서 전라도 유생 김상추(金相樞) 등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문익점은 사명(使命)을 받들고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공민왕(恭愍王)이 어둡고 포악스러운 이유로써 원나라에서 장차 폐위(廢位)시키고 새로 다른 임금을 세우려고 하니 조칙(詔勅)을 받들 수 없다고 다투어 드디어 검남(劒南)으로 유배(流配)되었는데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오게 되자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주 154) 께서 그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큰 공을 생각하여 강성군(江城君)을 추봉(追封)하였으며 태종조(太宗朝)에서 서원(書院)을 세우라 명하였고, 세조조(世祖朝)에서는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으며, 충선(忠宣)이라 증시(贈諡)하고, 사전(祠田)을 더 설치하였습니다. 지금 이 사액(賜額)의 은전(恩典)을 요청함은 많은 선비의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조정에서 존숭(尊崇)하고 권장하는 도리에 있어 청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註 154] 공정 대왕(恭靖大王) : 정종(定宗).


○ 宣額于贈忠宣公、文益漸書院, 仍命致祭。 禮曹以全羅道儒生金相樞等上言啓言: "益漸奉使入元, 以恭愍昏暴, 將欲廢立, 則爭不奉詔, 遂竄劍南, 三載始還, 中朝潛取木綿, 敎人織造, 其利於民如此。 恭靖大王, 念其衣民大功, 追封江城君。 太祖朝, 命立書院, 世祖朝追封富民候, 贈諡忠宣, 增置祠田。 今此恩額之請, 出於多士之公議。 在朝家崇奬之道, 事當依施。" 從之。



9. 예조에서 고 교리 성희를 충현 서원에 추배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8월 17일 임자 4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략) 또 아뢰기를,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이형복(李亨復) 등이 상언하기를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의 단성(丹城)에 있는 도천 서원(道川書院)에 해조(該曹)를 시켜 다시 사액(賜額)하소서.’ 하였습니다. 강성군은 일찍이 고려 때에 도학(道學)과 풍절(風節)이 세상에서 존중받았고 국조(國朝)의 유현(儒賢)이 모두 칭찬하는데 목면(木綿)을 가져온 일로 말하면 참으로 동방에 은혜를 준 큰 공(功)이므로 본향(本鄕)에서 제사하고 은액(恩額)을 내렸습니다. 전에 임진년270) 의 병화로 사당이 재가 되었는데 그 뒤에 중건(重建)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다시 사액하지 않았으니, 존숭하고 보답하는 도리로서는 시행하도록 허가하는 과목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言 (중략) 又啓言: "三道儒生李亨復等上言: ‘江城君 文益漸 丹城 道川書院, 令該曹復額。’ 云。 江城君, 曾在麗朝, 道學、風節, 爲世所尊, 國朝儒賢, 擧皆稱述, 而至若木綿賫來之事, 實爲衣被東方之大功, 俎豆本鄕, 宣賜恩額矣。 乃者壬辰兵燹, 廟宇灰燼, 後雖重建, 而尙未復額, 其在崇報之道, 宜置許施之科。" 從之。



10. 호남 위유사 서영보가 별단을 올리다

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2월 25일 무인 3번째기사 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호남 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별단을 올려 아뢰기를, (중략)

"신이 이번 길에서 연안의 군과 여러 섬들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러한 곳에 반드시 고구마를 많이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에 곡식이 없는 것을 목견하고는 구제할 방도가 없어 시험삼아 고구마의 유무를 찾아보다가 그 사실을 갖추어 알았습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따라서 이르면서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습니다. 관에서 백 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좋은 물건이 있어 다행히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文益漸)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갑자기 가렴주구를 행하여 어렵사리 해외의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좋은 종자를 오래 자랄 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촉나라에는 토란이 있어 백성들이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고, 우리 나라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소나무 껍질과 칡부리로 크게 기근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징험할 만한 일로 이미 시험해 효험을 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남의 도신 및 각 해당 수령에게 분부하여 먼저 연해안 고을부터 번식시키도록 신칙하고, 그 과정을 엄하게 하여 마을마다 일을 주관할 사람을 한 사람 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하여서 어느 마을 어느 집이든 다 심게 하고,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이임(里任)을 태장(笞杖)을 쳐서 죄를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들이 감히 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만세토록 영원히 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나라 제도에 집에 나무를 심지 않는 자에게 옥속(屋粟)을 내게 하였고 《서경》에서는 아홉 가지 공[九功]을 서술하면서 ‘위엄으로 감독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한다.’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잘사는 방도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권장하는 것과 위엄을 세우는 것 그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겠습니까. 남방의 토지 성질은 어디든 고구마 심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은 산밭이나 돌밭에는 더욱 심기가 좋습니다. 그러니 우선 삼남 연해안 고을과 섬 지방부터 널리 심기를 권장하고 차차 토질이 알맞은 곳에 보급시켜 나간다면 서북 지역 외의 6도에는 심지 못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3읍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섬이라 호령이 행해지기 쉬울 것이고 또 대마도와 마찬가지여서 토질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 심으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거의 배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심는 자가 많으면 종자가 부족할 걱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고구마라는 곡물은 넝쿨이 뻗어나가면서 열매가 생기기 때문에 종자를 전하기가 매우 쉬우니 한 치의 덩쿨이나 고구마 한 알이면 한 묘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차차 이식하면 한없이 전해질 수 있으니 종자가 적다는 것은 근심할 게 못됩니다. 이왕 이것을 계획하는 김에 영과 읍의 토색질하는 폐단에 대해 먼저 과조를 세워 엄하게 금지를 가한다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지금의 담배나 수박처럼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물이나 불처럼 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토색질하는 폐단도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훗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강진의 남당포에 있는 병영의 외창에 관한 일은, 한 호가 받는 환곡이 거의 수십 석이 넘는다 하니 이웃을 침범하고 종족에게 징수해가는 폐단을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營屬)이 이익을 보는 자본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바로잡아 고치지 않고 있지만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현(縣) 내의 일면에는 호수를 계산하여 곡식을 헤아려 주되 줄이는 쪽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그 나머지 수는 본관(本官)에 넘겨서 부근의 읍창(邑倉)으로 이송하여 그대로 부근의 면리(面里)에 나누어 주게 하고, 색낙조(色落條)는 값을 돈으로 바꾸어 정해서 본관에서 해당 병영으로 보낸다면 이익을 누리는 것은 전과 같고 민폐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 지방의 이해를 직접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바로잡고서 즉시 보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중략)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湖南慰諭使徐榮輔進別單曰, (중략)

臣於今行, 多歷沿郡及諸島, 意此等處, 必多種者’, 而目見歲饑無穀, 無術可救, 試訪藷之有無, 備知其事。 藷種之初來也, 民爭種之, 以資其生者, 往往而多, 曾未幾何, 營邑之誅求, 又隨而至, 悍吏到門, 叫呼搜索。 官求百本, 吏盡一畦, 種之者受困, 未種者相戒, 樹藝之勤, 浸不如初, 今則至稀貴矣。 世有如此美物, 幸而致種, 於國事是宜, 授民課種, 敎之成俗, 使一國之人, 共賴美利, 如文氏之綿種可也。 不待蕃殖, 遽行徵求, 使苦心得來於海外異國之嘉種, 不得長養碩果而食, 何以取種? 蜀有蹲鴟, 民以不饑。 雖以我國言之, 松皮、葛根大濟饑荒, 此皆可徵之事, 已試之驗也。 臣意則分付兩南道臣及各該守令, 先自沿海邑, 申飭播植, 嚴其課程, 每里擇幹事一人掌之, 無里不種, 無戶不種, 有不勤者, 該里任笞杖懲罪。 如是則民不敢不種, 而一號令之間, 爲萬世永賴之利矣。 周制, 宅不毛者出屋粟, 《書》敍九功, 董之以威, 勸之九歌, 敎民厚生之道, 威之勸之, 不可偏廢。 聖人之訓, 豈徒然哉? 南方土性, 無處不宜, 而山田戴石, 不宜五穀處, 尤善立種。 先從三南沿邑及島嶼, 勸其廣植, 次次遍及於宜土之地, 則西北外六道, 無不可種之處。 至於濟州三邑, 彈丸小島, 號令易行, 宜土又與對馬島一般。 此而善種, 雖當歉歲, 庶或除船粟之弊矣。 如或曰: "植之者多, 則種子患不足。" 此有不然者。 藷之爲物, 蔓生抱卵, 傳種甚易, 寸藤一卵, 可布一畝, 次次移植, 可至無窮, 種子之少, 有不足慮矣。 旣以此爲計, 則營邑求索之弊, 先立科條, 嚴加禁斷, 不出十年, 將見其遍於國中, 如今之南草、西苽, 同於水火, 則所謂求索之弊, 不期無而自無矣。 爲他日備豫之策, 恐無過於此。 備邊司覆奏曰: "康津 南塘浦兵營外倉事, 一戶所受, 幾過數十餘石, 侵隣徵族之弊, 不言可想。 雖以營屬沾漑之資, 尙未釐革。 縣內一面, 則計戶量穀, 從略均俵, 以其餘數, 付之本官, 移送附近邑倉, 仍分於附近面里, 色落條則以價折定, 自本官輸送該營, 則沾漑如前, 民弊可祛。 遠外利害, 有難直決, 令道臣從長釐正, 卽爲報來爲宜 (중략)

竝允之。



11.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정재경 등이 상소하다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 5월 6일 갑진 5번째기사 1885년 조선 개국(開國) 494년


유학(幼學) 정재경(鄭在慶) 등이 상소하여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높이고 공경하는 것은 도(道)를 보위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이것은 구태여 그대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대번에 허락할 수 없다. 모두 그리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幼學鄭在慶等疏請 忠宣公 文益漸陞廡。 批曰: "崇敬所以衛道, 此固不待爾等之言。 而陞廡, 事體至重, 有不可遽許。 其各知悉, 退修學業。"


12. 이색, 문익점을 문묘에 합사하도록 홍재성 등이 상소하다

고종실록 22권, 고종22년 9월 29일 갑자 2번째 기사 1885년 조선 개국(開國) 494년


방외 유생(方外儒生)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합사(合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현인(賢人)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일을 어떻게 그대들의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진달한 문제를 갑자기 윤허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신중하고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잘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方外儒生洪在誠等疏, 請文靖公 李穡、忠宣公 文益漸陞廡。 批曰: "崇賢尊道, 何待爾等之言? 而所陳之未可遽允, 以其事體之至愼至重也。 爾等知悉, 退修學業。"



13. 이색,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김건수 등이 상소하다

고종실록 22권, 고종 22년 11월 7일 신축 4번째기사 1885년 조선 개국(開國) 494년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건수(金健秀) 등이 올린 상소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과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전에 이미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그대들도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이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方外儒生金健秀等疏, 請文靖公 李穡、忠宣公 文益漸 陞廡。 批曰: "前此已有批諭, 爾等亦知事體之至重, 又何煩瀆? 諒悉退去。"





2) 국역 비변사 등록- 2건


*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후기 국방문제에 대처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었음


1. 都事의 考講案에 잡된 이유를 기록하는 것을 容認하지 못한다고 거듭 밝혀 통보하자는 備邊司의 啓 국역비변사등록 42책  >   숙종 14년 1월  >   (1688-01-06(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양(江襄) 도사가 첩정(牒呈)으로 올려보낸, 본도 유·교생(儒校生)으로서 작년 가을의 고강(考講) 때에 도태시켜 군역(軍役)에 충정한 자 및 사고로 처리된 내용의 장부를 보니, 그 가운데 선현(先賢)의 후예, 대군(大君)의 후예 및 기자(箕子) 자손 한씨, 신라 경순왕 자손 김씨, 고려조 장절공(壯節公)의 자손 신씨로서 고강에서 면제시키고 사고 처리된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일찍이 을묘년 (숙종 1년 (1675))간에 고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 탑전에서 아뢰기를 '선현의 후예로서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일찍이 조정에서 규례를 정한 내용을 들으면 비록 선현의 후예라 하더라도 칠반천역(七般賤役)(註 001)  외의 기·보병(騎步兵) 등 양역(良役)에는 모두 충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마다 모두 한가로이 놀려고 하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대왕 자손의 적파(嫡派)로서 충의위(忠義衛)에 편입이 되어야 할 자 외의 천서(賤庶)에 해당하는 부류도 6대(代)로서 한정(限定)을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역에 보충하도록 이미 결정하였으니 다시 밝혀서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께서 말씀하기를 '아뢴대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조에서 사목을 만들어 기씨·한씨로서 기자의 후예라고 하는 자, 안씨로서 문성공(文成公)의 자손이라 하는 자, 설씨로서 홍유후(弘儒侯)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우씨로서 우좨주(禹祭酒)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문씨로서 문익점(文益漸)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신씨로서 장절공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명씨·진씨로서 고황제(高皇帝)의 명지(命旨)를 받았다고 사칭하는 자, 양씨로서 양백기(楊伯起)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 공씨로서 멀리 선성(先聖)의 후예로 인정이 되는 자, 한씨로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자손이라 하는 자는 모두 군역에 보충하지 말도록 열거하여 각도에 통보하였습니다. 조정의 사목이 이와 같이 명백한데도 지방에서는 접어두고 시행치 않아 부정한 폐단이 과거와 같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또 이른바 대군의 후예라는 자가 만약 적파로서 충의위에 편입이 될 자라면 원래 거론할 것이 없으나 만약 천서(賤庶)의 파인 경우라면 이를 이유로 장부에 기록하며 사고로 핑계 대서는 옳지 않습니다. 본조 대왕의 자손도 대수를 제한하는데, 신라의 항복한 왕을 지금 거의 천년이 지난 뒤에도 그 자손의 역을 면제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그 외에 선현의 자손이라고 이유를 붙인 자는 다만 성씨만 있고 그 명자(名字)도 없으며 또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들 문제를 허위와 난잡한 대로 두고 그 기만하려는 꾀를 이루어지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여러 도에 신칙하여 이러한 부류들을 일체 사목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의당할 듯합니다. 교생의 고강은 본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한 것으로서 도태시켜 군역에 보충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선현의 후예 등 여러 사람들은 비록 역에서 면제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능히 글자를 알지 못하면 결코 교안(校案)에 함부로 기록하여 글을 읽지 않는 자가 숨어 있는 소굴(巢窟)로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강에서 낙방한 뒤에 혹 역을 정하는 데에 분간(分揀)할 수는 있으나 미리 한 장부를 작성하여 처음부터 강(講)에 들어가지 않게 함은 매우 극히 무리한 일입니다. 이는 곧 과거의 그릇된 예로서 도사가 어물어물 따르고 살피지 않은 결과인 듯합니다. 그러나 살피지 않은 채 드러나는 대로 책임을 묻는다면 뒤에 오는 자도 역시 이러하여 법령은 마침내 시행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도의 당해 도사를 우선 파직한 뒤에 추문하고, 앞으로는 도사의 고강안(考講案)에 과거와 같이 이러한 잡된 이유를 기록하는 것은 용인(容認)하지 못할 일로서 각 도의 도사에게 거듭 밝혀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註 001

칠반천역(七般賤役) : 비천한 신분이 종사하는 7가지 천한 역. 곧 관아의 조예(皁隷), 의금부의 나장(羅將). 지방관아의 일수(日守), 조운창(漕運倉)의 조군(漕軍), 수영(水營)의 수군(水軍), 봉화대의 봉군(烽軍), 역참(驛站)의 역졸(驛卒) 등.


司啓辭, 卽見江襄都事牒呈, 上送本道儒校生, 上年秋考講時, 汰定及有頉成冊, 則其中, 以先賢後裔·大君後裔·及箕子子孫韓氏·新羅敬順王子孫金氏·麗朝壯節公子孫申氏, 免講懸頉者居半, 曾在乙卯年間, 故淸城府院君金錫胄, 爲兵曹判書時, 陳啓榻前, 以先賢後裔, 規避軍役者甚多, 曾聞朝家定式, 雖是先賢後裔, 七般賤役之外, 騎·步兵等良役, 竝皆充定, 而今則國綱解弛, 人人皆欲閑遊, 事極寒心, 至於大王子孫, 嫡派當爲忠義者外, 凡係賤庶之類, 亦六代爲限, 其餘竝爲充定軍役事, 亦已定奪, 更爲申明施行似當矣, 上曰, 依爲之事命下, 自兵曹, 作爲事目, 奇氏·韓氏之稱以箕子後裔者, 安氏之稱以文成公子孫者, 薜氏之稱以弘儒侯子孫者, 禹氏之稱以禹祭酒子孫者, 文氏之稱以文益漸子孫者, 申氏之稱以壯節公子孫者, 明氏·陳氏之詐稱受高皇帝命旨者, 楊氏之稱以楊伯起子孫者, 孔氏之遠認先聖後裔者, 韓氏之稱以上黨府院君子孫者, 竝爲勿施定後事, 列錄知委於各道矣, 朝家事目, 如是明白, 而外方廢閣不行, 冒濫之弊猶夫前日, 殊甚可駭, 且所謂大君後裔者, 若是嫡派忠義, 則元無擧論之事, 若是賤庶之派, 則不可以此懸錄稱頉, 本朝大王子孫, 亦限代數, 新羅降王, 到今近千載之後, 許免其子孫之後, 尤涉無據, 其他以先賢懸頉者, 只有姓氏而無其名字, 又不知其何人, 此等事有難一任其虛僞濫雜, 俾售其奸欺之計, 似當更爲申飭於諸道, 凡若此類, 使之一切以事目施行宜當, 至於校生考講, 則本爲勸課學業, 非但爲汰定軍役而已, 凡先賢後裔等諸人, 雖是應許免役者, 不能識字則決不可冒錄校案, 以爲不讀書之淵藪, 落講之後, 或可分揀於定役, 而預作一案, 元不入講, 尤極無理, 此似是從前謬例, 而都事因循不察之致, 然諉之於不察而隨現論責, 則後來者亦復如是, 法令終無可行之日, 本道當該都事, 先罷後推, 此後都事考講案中, 不許仍前以如此等雜頉懸錄事, 各道都事處, 申明知委何如, 答曰, 依啓。



2. 舊逃亡은 연한을 정하지 말고 모두 充定할 것 등을 청하는 備邊司의 계와 良役變通節目

국역비변사등록 63책  >   숙종 37년 12월  > (1711-12-26(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등대하였을 때에 양역도고(良役逃故)로 인한 인징·족징의 폐단을 특교(特敎)에 의하여 형편에 따라 변통하기로 하고 절목(節目)으로 만들어 추후 재가를 받겠다는 뜻으로 이미 앙달하였습니다. 절목을 이제야 초(草)을 잡았으므로 각 항목으로 갖추고 별단(別單)으로 써 올려 예재(睿裁)를 앙품하옵니다마는 그 중에서 도망자는 종전에 연한을 법으로 정한 바가 있었으나 지금 만일 줄곧 법만을 고수하고 그 많은 궐액을 즉시 대정하지 않는다면 인징·족징의 극심한 폐단을 당장에 말끔히 고칠 수 없겠고 또 빨리 구제하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었기 때문에 특별히 변통하는 바이오니 오늘 이전의 구도망(舊逃亡)은 연한을 정하지 말고 다 충정하여 한번 말끔히 정리하도록 하며 오늘 이후의 신도망(新逃亡)은 우선 전에 정한 연한대로 시행하고 앞으로 다시 이정법(釐正法)의 성과 여부를 보아 품달하고 작량 처리하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보고대로 하라 절목이 매우 잘 정비되었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 (중략)

1. 한번 이정법(釐正法)을 행하면 한 마을의 각색 명목에 잘못 투입(投入)한 남정(男丁)을 일일이 구별하고 도태(淘汰)하여 궐액에 충정하는 일은 실로 수령에게 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혹 전물(錢物)을 바치고 면강(免講)하여 '교생(校生)이다.' '원생(院生)이다.' 칭하는 자와 혹 교원안(校院案)에는 들지도 않고 장적(帳籍)에 들어있는 교생·원생이라고 거짓 칭하는 자와 혹 교원(校院) 낭청(郞廳) 이하의 양인(良人)에 들어있는 자와 각 처의 둔장(屯庄)에 양인으로 모입(募入)된 자는 모두 들추어 내어 곧바로 군정에 태정(汰定)할 것이다. 이 밖에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양역을 면하려고 한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각읍의 잘못된 준례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혹은 양민으로 향청(鄕廳)에 돈을 바치고 권차품관(權差品官)이라고 이름한 자 또는 고을 밖 해변의 전선조통장(戰船造桶匠) 및 이른바 채연군(採鉛軍)·수철장(水鐵匠)·역학생도(譯學生徒) 혹은 노유학(老幼學)·아기패관(兒旗牌官)·업유(業儒)·녹사(錄事)·창준(唱準)이라고 일컫는 따위도 상세히 사핵하여 바로 태정한다. 역촌(驛村)의 한잡인(閑雜人)과 목장의 가목자(假牧子) 중에서 양민으로 역(役)이 없는 자도 모두 역에 충정하되 다만 연호역(烟戶)만은 제외하여 해당 역과 목장의 잡역을 돕게 하고, 역보(驛保)로 다른 지경에 있는 자는 전일에 결정한 바에 의하여 그만두게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정역(定役)한다. 여러 궁가(宮家)의 둔장(屯庄)과 각 아문(衙門)·군문·영문(營門)의 둔전(屯田) 모군(募軍) 따위는 신역을 면제할 수 없으며, 그 중에서 양민은 그 고을에서 군역에 태정한다. 해당 아문에서 혹 모군한 곳이 있어 쌀과 베를 받는 준례가 있는데 이는 더욱 명목이 없는 것이므로 역시 혁파한 후 태정한다.
또 기성(箕聖 : 기자(箕子))·경순왕(敬順王)·설홍유후(薛弘儒侯)·신장절공(申壯節公)·안문성공(安文成公)·우좨주[禹祭酒]·문익점(文益漸) ·진리(陳理)·양기(楊起)·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등의 후예된 자는 칠반천역(七般賤役) 이외의 상당한 역에 충정하기로 일찍이 임술사목(壬戌事目)이 있었고 경인년(庚寅年)에 다시 신명(申明)하여 반포한 바가 있으므로 이런 무리는 여기에 의하여 사실(査實) 정역(定役)한다.
교생(校生)으로 이름이 교안(校案)의 액내(額內)·액외(額外)에 있는 자와 각색 군관(軍官)과 기패관(旗牌官)으로서 이름이 감영·통영·병영·수영·방영(防營)·영장(營將)·수성장(守城將)·중군(中軍)·우후(虞侯) 및 각기 본관(本官)의 안(案)에 있으나 신역이 없는 자는 수령이 별도로 고강(考講)과 시사(試射)를 행하여 떨어진 자는 즉시 상당한 역(役)에 태정(汰定)하되, 시규(試規)는 기패관은 ≪병학지남(兵學指南)≫의 대문(大文) 한 곳과 진법(陣法) 한 곳으로 시강(試講)하고, 군관은 유엽전(柳葉箭) 1순(巡) 1중(中)과 후전(帿箭) 1순 2중과 육냥전(六兩箭) 단시(單矢) 이시(二矢)의 백보(百步) 중에서 자원에 따라 시사하게 하여 한 기예(技藝)로 뽑으며 기패관의 액수(額數)는 각 영문에서 대략 경군문(京軍門)의 예를 모방하여 1영(營) 3부(部) 6사(司)에서 35인씩 정액하고 (본래 이 숫자가 차지 않은 곳은 加設을 불허한다) 각읍에 나누어져 있는 자는 그 군병의 다소에 따라 매 초(哨)에 1인씩 정액(定額)하며 다만 1, 2초만 있는 곳은 2인으로 가정(加定)한다. 교생은 첫단계에서 모조리 고강하여 능통한 자를 가려 원액(元額)에 충정(充定)하고 여타는 일시에 다 강정(降定)하여 소요로울 폐단이 있게 할 것이 아니라 매년 한 차례씩 고강하여 각리(各里)의 궐액(闕額)을 점차로 보전(補塡)하도록 하는 것이 편의로울 듯하다. 외방의 장관은 거의 구차하게 수효를 채우는 것이 많아 한번 첩문(帖文)을 받으면 종신토록 놀고 지내는 자가 많으니 반드시 양반의 자제나 혹 무과출신자로 극히 가려 차출하고, 군보(軍保)의 자질과 공사천(公私賤)으로 면천(免賤)된 무리는 비록 장관을 지냈다 하더라도 모두 군관의 예대로 취재(取才)하여 태정한다. 각 읍면 각 리(里)에 혹 양민으로 관가에 전재(錢財)를 바치고 역을 면제받은 자가 있거나 혹은 양반의 울타리 안에 몸을 의탁하고 역을 피하는 자가 있으면 일체 엄금하고 사출하여 정역(定役)하며 각처의 혈역(歇役 : 수월한 신역)은 원액 이외에 아약자(兒弱者)로 대년치부자(待年置簿者 : 성장을 기다려 충정하기로 문서에 작성된 자)도 모조리 바로 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정식대로 열읍에 분부하여 첨정(簽丁)하는 길을 넓힌 연후에 신구(新舊)를 막론하고 신묘년 (1711) 12월 이전의 도고(逃故)로 생긴 각종 궐액은 임진년 (이듬해) 8월까지 빠짐없이 대정(代定)하되 도망을 10년으로 기한하여 대정하는 법은 명년 정월 이후는 의당 그대로 시행하고 천천히 이정법(釐正法)이 참으로 실효가 있는지를 보아 간계를 부리거나 거짓으로 도망자라고 칭하는 폐단이 없으면 한년(限年)하는 일은 다시 상의하여 처리함이 사의(事宜)에 합당하다. 상항(上項)에서 논한 각조 외에는 본사에서 일일이 다 알 수 없으니 만일 또 어떤 명목을 칭탁하고 중간에서 누락한 자가 있거든 각읍 수령으로 하여금 일일이 들어 본사에 점보(粘報)하게 하여 일체 사정(査定)한다.


司啓辭, 頃日登對時良役逃故隣族之弊, 依 特敎隨便變通事, 作爲節目, 追後啓下之意, 旣已 仰達矣, 節目今始草出, 各具條項, 別單書進, 仰稟 睿裁, 其中逃亡年限, 曾有定法, 而今若 一向膠守, 許 多闕額, 不卽代定, 則隣族極弊, 無以一新釐改於目 前, 以承汲汲救拯之聖旨, 故另爲變通, 從今以前 舊逃亡, 則使之勿限年盡充, 以爲一番沒數整頓之 地, 今後新逃, 則姑依舊定年限施行, 前頭更觀釐正 法行否, 稟達量處何如, 答曰, 依啓, 節目頗爲詳 備, 依此爲之,

良役變通節目 (중략)

一, 旣行釐正之法, 則一里男丁各色名目之冒濫者, 一一區別沙汰, 以充闕額者, 固當專責守令是白 在, 如中或納物免講, 稱以校生院生者, 或不入校 院之案, 冒稱校院生入籍者, 或校院鄕廳以下良 人之入屬者, 各處屯莊良人之募入者, 皆可直爲 刷出汰定是白乎旀, 此外巧作名目, 圖免良役者, 不可勝記, 而各邑謬例, 亦非一端, 或有良民納錢 鄕廳, 名曰, 權差品官, 又曰, 鄕外海邊之戰船造桶 匠, 及所謂採鉛軍·水鐵匠·譯學生徒, 或老幼學·兒 旗牌官·業儒錄事唱準之類, 亦宜詳査, 直爲汰定, 驛村閑雜人及牧場假牧子中, 良民無役者, 亦皆 定役, 而只除煙役, 俾助該驛該場之雜役, 驛保之 在他境者, 依前日定奪, 勿爲施行査實定役爲白 乎旀, 諸宮家屯莊·各衙門·軍門·營門屯田募軍之類, 不當竝免身役, 其中良民, 則該邑汰定軍役爲白 乎旀, 自該衙門或有募軍處, 收米布之規, 尤極無 名, 亦令革罷後汰定爲白乎旀, 又有稱以箕聖敬 順王·薛弘儒侯·申壯節公·安文成公·禹祭酒·文益 漸·陳理·楊起·上黨府院君韓明澮後裔者, 七般賤 役外, 充定相當役事, 曾有壬戌事目, 庚寅又復申 明頒布, 此類亦爲依此査定爲白乎旀, 至於校生 之名, 在校案額內外者, 各色軍官·旗牌官之名在 監統·兵·水·防營·營將·守城將·中軍·虞候及各其本 官之案, 而無身役者乙良, 守令別爲考講試射, 見 落者直爲汰定相當役爲白乎矣, 試規段, 旗牌官 則兵學指南大文一處·陣法一處試講, 軍官則, 柳 葉箭一巡一中, 帿箭一巡二中, 六兩單·二矢百步 從自願試射, 取一技爲白乎旀, 旗牌官額數段, 各 營門略倣京軍門例, 一營三部六司良中三十五 人式定額, 本不滿此數處不許加設而分在各邑 者, 則隨其軍兵多少, 每哨一人式定額, 只有一兩 哨處, 加定二人爲白乎旀, 校生則初頭一倂者講, 取其能通者, 以充元額之外, 其餘則不必一時盡 爲降定, 致有騷擾之弊, 每年一巡考講, 以爲漸次 塡補各里闕額之地, 似涉便宜是白乎旀, 外方將 官, 率多苟充, 一受帖文, 終身閑遊, 必以兩班子枝, 或武科出身者, 極擇差出, 軍保子枝及公·私賤免 賤之類乙良, 雖曰曾經將官, 竝依軍官例, 取才汰 定爲白乎旀, 各邑面·里或有良民納物官家, 而除 役者, 或有托身兩班籬下而避役者, 一切嚴禁, 査 出定役爲白乎旀, 各處歇役元額外, 以兒弱待年 置簿者, 亦令一倂直爲汰定宜當, 依此定式, 分付 列邑, 以廣其簽丁之路, 然後使之勿論新舊, 辛卯 十二月以上逃故各樣有頉, 限以壬辰八月無遺 代定爲白乎矣, 逃亡限十年代定之法, 明年正月 以後, 則自當仍舊施行, 而徐觀釐正法果有實效, 可無用奸僞逃之弊, 則限年一款, 更議處之, 亦合 事宜是白在果, 上項所論各條外, 自本司亦難一 一盡知, 如或又有托稱某名目, 中間漏落者是白 去等, 使各邑守令, 一一歷擧粘報本司, 一體査定 爲白齊,




3) 승정원 일기-23건


1 考講案에 잡다한 이유를 懸錄하여 면제하는 인습을 답습한 都事를 先罷後推하고 此後에는 엄금하라고 申明할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계 1688-01-06 숙종 14년 1월 6일 

승정원일기 327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 1월 6일 경진 18/20 기사 1688년  康熙(淸/聖祖) 27년


○ 又以備邊司言啓曰, 卽見江襄都事牒呈上送, 本道儒校生上年秋考講時, 汰定及有頉成冊, 則其中, 以先賢後裔, 大君後裔, 及箕子子孫韓氏, 新羅敬順王子孫金氏, 麗朝壯節公子孫申氏, 免講懸頉者, 居半, 曾在乙卯年間, 故淸城府院君金錫胄, 爲兵曹判書時, 陳啓榻前, 以先賢後裔, 規辟軍役者甚多, 曾聞朝家定式, 雖是先賢後裔七般賤役之外, 騎步兵等良, 竝皆充定, 而今則國綱解弛, 人人皆欲閑遊, 事極寒心, 至於大王子孫嫡派當爲忠義者外, 凡係賤庶之類, 亦六代爲限, 其餘竝爲充定軍役事, 亦已定奪, 更爲申明施行, 似當矣。上曰, 依爲之事, 命下矣。自本曹作爲事目, 奇氏·韓氏之稱以箕子後裔者, 安氏之稱以文成公子孫者, 薛氏之稱以弘儒侯子孫者, 禹氏之稱以祭酒子孫者, 文氏之稱以文益漸子孫者, 申氏之稱以壯節公子孫者, 明氏·陳氏之詐稱高皇之令旨者, 楊氏之稱以楊起子孫者, 孔氏之遠認先聖後裔者, 韓氏之稱以上黨府院君子孫者, 竝爲勿施定役事, 列錄知委於各道矣。朝家事目, 如是明白, 而外方, 廢却不行, 冒濫之弊, 猶夫前日, 殊甚可駭。且所謂大君後裔者, 若是嫡派忠義, 則元無擧論之事, 若是賤庶之派, 則不可以此懸錄稱頉, 本朝大王子孫, 亦限代數, 而新羅降王, 到今近千載之後, 許免其子孫之役, 尤涉無據, 其他以先賢懸頉者, 只有姓氏, 而無其名字, 又不知其何人, 此等事, 有難一任其虛僞濫雜, 俾售其奸邪之計, 似當更爲申飭於諸道 凡若此類, 使之一切以事目施行, 宜當。至於校生考講, 則本爲勸課擧業, 非但爲汰定軍役而已, 凡先賢後裔等諸人, 雖是應許免役者, 不能識字, 則決不可冒錄校案, 以爲不讀之淵藪, 落講之後, 或可分揀於定役, 而預作一案, 元不入講, 尤極無理。此似是從前謬例, 而都事因循不察之致, 然若諉之於不察, 而不爲隨現諭責, 則後來亦復如是, 法令, 終無可行之日, 本道當該都事, 先罷後推。此後都事, 考講案中, 不許仍前以如此等雜頉懸錄事, 各道都事處, 申明知委, 何如? 傳曰, 依啓。



2 閔鎭厚 등이 입시하여 敬順王 등의 후손의 軍役을 면제해주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1710-09-16 숙종 36년 9월 16일 

승정원일기 456책 (탈초본 24책) 숙종 36년 9월 16일 정미 17/18 기사 1710년  康熙(淸/聖祖) 49년


○ 兵曹判書閔鎭厚所啓, 先聖後賢之餘裔七般賤役之外, 毋得頉免軍役者, 乃是乙卯年定式, 而近來外方, 多不遵行。至於校生考講之時, 稱以先賢後裔, 都事狀啓中, 直爲懸頉, 誠可駭然。設令落講, 而當定餘丁, 餘丁非賤, 固無減免之理, 況何可不爲受講乎? 宜〈以〉乙卯年定式, 更爲頒布諸道, 使知法意。且王姓人, 亦欲盡免軍役, 每有煩訴之弊, 我朝宗室後裔, 亦不免軍役, 則王姓人, 何可盡爲頉下乎? 此亦依先賢子孫例, 七般賤〈役〉外, 充定, 何如? 左承旨李濟曰, 外方, 此弊甚多, 蓋箕子·文城公[文成公]文益漸子孫, 自前有免軍役之規, 其後雖有相當定役之事目, 而稱以先賢子孫, 百計謀免者, 不勝紛紜。守令之不知事目者, 信聽其言, 賤役之外, 竝與相當之役而許免, 其中, 新羅敬順王子孫稱有受敎, 圖〈免〉軍役, 敬順王, 是亡國之主, 則我朝豈有免軍役之受敎乎? 所謂受敎文籍, 乃是呈兵曹謄書者, 此不過符同下吏而圖成, 守令之不察而許頉者, 間亦有之, 以致奸民之漏脫, 軍丁之難充, 誠可寒心, 自今以後, 別定事目, 申飭外方, 似好矣。右議政金昌集曰, 承旨所達, 誠是矣。我朝宗室後裔, 代盡後, 亦不免軍役, 況前朝子孫乎? 稱爲敬順王子孫者最多, 至於印出族譜, 誣訴官家, 以爲圖免之計, 事涉無據, 自兵曹, 更爲申明知委, 宜矣。上曰, 外方守令, 不能詳知而然矣。依兵曹判書所達, 各別申飭, 可也。兵曹謄錄    



3 제목없음 1727-08-10 영조 3년 8월 10일 

승정원일기 643책 (탈초본 35책) 영조 3년 8월 10일 계사 29/30 기사 1727년  雍正(淸/世宗) 5년


○ 昌寧幼學裵晉三疏曰, 伏以臣, 半生窮經, 白首無聞, 犬馬之齒, 已迫八耋, 而惟是愛君之誠, 願忠之心, 根於秉彝, 消鑠不得, 思欲一達愚忠, 而天門九重, 無路陳暴, 緘封在髓, 徒切耿耿。目今天災時變, 式月斯生, 民憂國計, 可憂者多。故不避僭妄之誅, 仰陳狂瞽之說, 以備財察焉。伏願殿下, 試垂察焉。殿下以聰明睿智之資, 承艱大投遺之業, 丙枕靡安, 日昃不遑, 孜孜講究者, 救民之策也。顓顓商確者, 革弊之政也。而移民移粟, 以恤飢饉, 蠲租蠲費, 以救民生, 絲綸誕頒, 十行諄懇, 責己之辭, 憂民之意, 溢於辭表, 有足以泣鬼神, 則凡我環東土含生之民, 孰不欽仰聖德? 願少須臾無死, 思見德化普洽也。然而風俗日淆, 姦僞日生, 良丁之消縮, 白骨之怨呼, 罔有紀極, 故特令設廳, 名之曰釐正, 則其憂傷之念, 拯救之意, 雖古先聖王, 無以加此。而一自釐正設廳之後, 悠悠泛泛, 泄泄沓沓, 雖曰講究, 不得端緖, 甲乙之是非紛然, 救民之實惠莫究。因循荏苒, 迄無籌畫, 怨呼日滋, 流散相繼, 此臣所以痛哭流涕, 而不能自已者也。臣謹以十條之說, 爲殿下申復焉。勿以人微而採其言, 則其於釐正白骨之道, 未必無少補焉爾。近來冒稱幼學之習, 實爲今日之痼弊。不但名分之相紊, 良丁之消縮, 實由於此。可謂寒心之大者, 各邑幼學之稱, 有三品焉。所謂鄕內幼學云者, 卽士大夫閥閱之稱也。所謂鄕外幼學云者, 卽鄕品官閑散之類也。所謂冒稱幼學云者, 卽庶孽良民之欲免軍役者之稱也。庶孽良民之謀避軍役者, 行賂齋任, 圖入靑衿錄, 而戶籍戶牌, 皆稱幼學, 冠儒冠服儒服, 敢與士夫, 比肩同列者, 滔滔皆是。上下之混淆, 名分之紊亂, 莫此爲甚, 而軍丁由此以難充。此豈非國家大憂? 而無人仰達於紸纊之下, 則此微臣所以仰屋長歎者也。今若斷自乾剛, 頒降綸音于八路, 使各邑別定釐正鄕內鄕外之任, 名之曰, 都有司·鄕內則以士大夫有風力彈壓本邑之人, 差定其任, 使之修整鄕內儒案。鄕外則以鄕品官中有名望者, 差定其任, 與鄕內都有司, 眼同商確, 品題門閥之高下, 修正鄕外儒案, 而或有循私不公之弊, 則令其本邑官長, 規察臧否, 論報營門, 以爲從重科罪之地。鄕內鄕外儒案, 修整三件, 守令親自監封, 別定差使員, 領納政院, 卽爲入啓踏印。一件留于太學, 一件置于監營, 一件置于本官, 以爲憑後之地, 則所謂冒稱幼學之類, 不攻自破, 盡歸於荷戈出布之役,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一也。列邑鄕校校生, 書院院生·保老等額數, 自有朝家之定式, 而近來校院齋任輩, 貪其肥己, 巧作名目, 其數夥然, 一曰章甫, 二曰額內, 三曰額外, 四曰儒案, 五曰童蒙, 六曰願納。良民之稍有產業者, 擧皆投入, 以一邑言之, 則校·院兩處所屬, 小不下四五百, 多亦過千數, 或稱據禮曹關, 或稱遵流來規, 稱以補用於祭器祭服供士之費云, 而捧米捧錢, 已成謬規, 隨其米錢之多寡, 而高下於六等名目中, 故歲抄時軍丁充數之難, 實由於此, 而疊役之弊, 亦由於是, 貧殘良民, 安得不怨呼乎? 時有剛明之官, 或欲搜括額外, 以爲補軍丁之計, 則校·院儒生輩, 群起呈單, 百計阻遏, 或謂之不有鄕校, 或謂之不顧書院, 罵詈譏毁, 無所不至。故爲其官長者, 莫敢誰何, 終歸安徐之地。不但事之寒心, 顧其校·院儒生輩, 貪其酒肉賂物, 耗食良民者, 有甚蟊賊, 而國家莫重軍丁, 由是而消縮, 則其罪可勝誅哉? 自今別頒事目, 鄕校校生, 則定給十五名, 書院院生, 則定給十名, 以爲掃除唱謁守直之備已, 而一定之後, 欺罔朝家, 加數充屬, 則當該儒生, 以壓良之律, 繩之之意, 申明頒布, 則似祛宿弊, 而良民自有餘裕, 何患軍丁之不足乎?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二也。各邑將官·旗牌官, 旣有定額, 而近來人心巧詐, 食粟良民子枝, 紛然投屬, 以爲因此拔身之計, 而此輩全昧坐作進退之節, 弓馬擊刺之技, 而只欲圖免軍役之計, 脫有緩急, 其將可恃, 而良丁之消縮, 亦由於此。同知·僉知·察訪受帖者之年甲, 自有定限, 而一自丙·丁以後, 飢饉連年, 賑救無策, 賣帖之規, 極其紛然。故圖免身役之類, 雖在襁褓, 自願納米, 而官家一依面任所報, 不計年限, 收米許帖, 故良丁日耗, 而堂嘉善子枝, 亦以其蔭, 圖頉軍役, 事之寒心, 莫此爲甚。自今別頒事目, 將官·旗牌官, 則額外不得加定, 而納粟堂上, 則限年六十五, 納粟嘉善, 則限年七十, 察訪則限年六十, 永爲定式, 而或有圖入額外者及增年受帖者, 則繡衣廉問時, 這這摘發, 以爲科罪充軍之地, 則奸僞可防, 而不患良丁之不足,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三也。各邑所謂忠壯·忠順·忠翊·忠贊, 藉其遠祖之功臣, 持錄券口傳, 謀避軍役者, 在在皆然, 而功臣子孫, 旣有代數, 過限之後, 則所當無辭應役, 而不知代數, 徒得其姓之類及功臣之旁親子枝, 亦藉其蔭, 百計謀避者, 亦多有之。以孔爲姓者, 稱以大聖後裔, 擧皆免役, 國朝以來, 功臣慶復興·李豆蘭·文益漸三臣之苗裔, 亦皆免役。較之於五世斬澤, 十世可宥之文, 則旣非過重之甚者乎? 目今良丁鮮小之日, 不可無變通之道, 忠壯·忠順·忠翊·忠贊功臣及孔姓人及三功臣子孫, 定其代數, 過限之後, 則一竝充定軍役, 事甚得宜, 此釐正白骨之不可斷已者, 四也。監營所屬各邑所置山城城丁軍·內外守堞軍·硫黃焰硝軍·舡格軍·水鐵匠·雇馬倉諸般募屬軍, 名號多岐, 良民之類, 利其一疋之歇役, 行賂投入者, 其數無算, 亦宜定其名數, 以防姦細之徒。統營·兵水營, 勒定各邑良民, 名之曰硫黃焰硝軍, 而多收身布, 以歸無名之費者, 亦甚無謂。此亦不可無變通革罷之擧,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五也。聖廟事體, 至重且大, 而春秋釋菜之外, 元無儒生輪直之擧, 而只以校生輩立番者, 事甚不敬, 名爲儒生, 尊慕先聖者, 反出於免軍役校生之下, 實爲儒林之羞恥, 而聖廟反作齋任輩討食酒肉, 興訛造謗之場, 聖朝三百年培養之盛意, 到此掃地, 可勝慨歎。今後則別爲定式, 使齋任論番替直, 以爲勅勵之地, 而所謂閑散幼學, 中庶良民子枝之額外加錄者, 一竝沙汰, 以充軍役, 而列邑營吏保人·吏保·通引保·使令保·軍牢保·假鄕所·妓生等保, 亦皆革罷, 以補軍役, 則簽丁之時, 庶免難得之弊,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六也。列邑簽丁之數, 極其夥然, 而閑丁擧一村, 十無一二, 故搜括之際, 官家之推捉, 民間之繹騷, 殆同亂離, 而面任劫於官令, 以不離襁褓之兒, 稱爲閑丁, 而捧疤記充軍役, 民人以此而歌不重生男重生女之句, 則其怨呼, 從此可想。襁褓之兒, 一入軍籍, 則每年徵布, 法例當然, 故爲其官長者, 雖知其冤枉, 而不得不徵捧。貧殘之民, 無以應役, 負兒逃走, 什居八九, 而徵族徵隣之擧, 在所不已。無告之民, 安得不痛怨乎? 今後則一依癸卯軍制, 年不滿十歲者, 不得充軍役之意, 永爲令甲, 以示朝家德意, 列邑邑底良民等, 生長邑底, 處決官吏, 謀避軍役, 遊閑自在者, 擧邑底而皆然, 亦宜嚴立科條, 以防其奸, 則良丁可得, 而民怨可紓, 此亦釐正之斷不可已者, 七也。各邑私賤之類, 旣已免賤, 而其帳籍中, 如前懸主, 欲免軍役, 究厥奸計, 則實爲萬萬痛怨。如此之類, 各別査出, 以爲還賤充軍之地, 則免賤人懸主, 謀避軍役之弊, 自然革祛, 此釐正之斷不可已者, 八也。各營牙兵及馬軍之類, 各有保人二名, 而一名則渠自收捧私用, 一名則自該營徵捧用之, 此等牙兵·馬軍, 元無立番於營門, 春秋操練時, 數日立役而已, 則定給保人, 實爲不當。今後則營牙兵·馬軍等保人, 一竝革罷, 以充軍役, 實合事宜, 此釐正白骨之斷不可已者, 九也。列邑鄕所輩, 羞恥營門之推論受罪, 選定富民, 名曰假鄕所, 而其數極其夥然。以一邑言之, 則或有八九十名之邑, 或有數百名之邑, 而若自營門, 推論鄕所, 則起送假鄕所, 而一到營門, 則營屬之誅求索賂, 罔有紀極, 故以一人之力, 不可責應。故逐案收斂, 以爲糧資責應之費, 而營門之推論頻數, 收斂之度數頻仍, 此實民所難堪之端。良丁之耗縮於此者, 推一邑而可知其數, 此亦革罷釐正之不可已者。朝家事目內, 寺奴逃亡, 限以十五年, 布保良民之逃亡, 限以十年, 始爲公頉減給, 故其逃亡人族隣, 不能支當於徵隣徵族之擧, 民之呼怨, 實基於此。自今別頒事目, 寺奴則限以五年, 布保良民則限以三年, 過限卽爲頉給, 以紓小民之困瘁, 亦合事宜, 此亦釐正之斷不可已者, 十也。凡此十條中所陳者, 一竝釐正, 可得百萬閑丁。以此百萬, 充定白骨徵布之役, 則不患不足。此乃三四朔所可了當之事, 而釐正設廳, 于今幾年, 曾未聞一事之變通, 下民之抑鬱, 當復如何哉? 臣謹以十條之說, 爲今日釐正白骨之救弊, 而抑有一二事, 故不得不附陳焉。近來僧徒之役, 實爲滋甚, 大小寺刹, 殆將空虛, 奠居者絶少, 每當國役, 則山陵軍·義僧軍·城役軍等役, 擧皆雇立, 而雇立之際, 貧殘僧徒, 無以支當, 不免侵徵隣族, 以資其費, 此甚可矜, 而至於紙地之役, 實爲僧徒不能支當之一大巨弊。故僧人以此流散者, 在在皆然, 宜有變通, 優給其價, 以爲保存之地, 亦王政之不可已者也。臣請悉陳其弊焉, 所謂紙地, 有十餘品, 而有小壯紙·壯紙·大壯紙·大搗練紙·白面紙·小戶紙·大戶紙·時政記紙·狀啓紙·草注紙·厚白紙·別白紙·小白紙等諸般紙地, 皆出於緇徒之手, 而公私之廣用, 莫紙地若也。各邑官定之價, 壯紙一束, 則價米一斗, 而壯紙一束, 買楮浮出之際, 必費四五斗之米, 然後始得浮成一束, 則其餘各樣紙地之所費者, 推此可知, 而州縣一朔所用之紙, 無慮數百束, 則僧人責應備納之難, 當復如何, 竭盡死力? 今日納官, 則明日又爲卜定, 星火督催, 如或愆期, 則鞭扑狼藉, 貧殘僧徒, 安得不怨呼離散乎? 臣謂加給其價, 且定給雜物, 凡卜戶[復戶], 以絶其呼怨, 而使之保存之地, 而且遐方軍士中, 禁衛·御營軍, 乃是輦下侍衛之卒也。一哨之軍, 散在各邑, 而或在一二日程, 或在三四日程, 每當私習之時, 則雖値方農嚴冬之節, 盡賣家產, 裹糧往來, 貧寒軍兵, 不勝堪當, 棄家逃亡者有之, 此亦軍兵之民瘼者也。殘邑則兩邑竝作哨, 大·中邑則各自獨哨, 而軍丁如或不足, 則束伍牙兵之保, 破定作哨, 以救軍卒之倒懸, 可也。臣跡沈草莽, 而憂同肉食, 敢以蕘說, 冒瀆宸嚴, 伏望恕其狂僭, 而察其愚忠。下臣此疏於廟堂, 畫卽變通, 釐正白骨, 以解萬民倒懸之急, 則國家幸甚, 生民幸甚, 臣無任云云。答曰, 省疏具悉。條陳之事, 誠爲詳實, 令廟堂確議, 稟處。



4 제목없음 1751-02-18 영조 27년 2월 18일 

승정원일기 1065책 (탈초본 58책) 영조 27년 2월 18일 병술 18/18 기사 1751년  乾隆(淸/高宗) 16년


○ 辛未二月十八日卯時, 上御春塘臺, 庭試親臨入侍時, 行都承旨趙明履, 右承旨尹光毅, 左副承旨黃景源, 右副承旨鄭宲, 同副承旨尹東度, 假注書蔡緯夏·鄭述祚, 記事官申五淸·朴正源等, 隨詣春塘臺下。左通禮李宅心跪, 啓請中嚴。鼓三嚴。啓外辦。上具冕服御座·上曰, 時刻漸遲, 試官先令肅拜, 可也。承旨僉曰, 試官落點未下矣。上曰, 已下矣。上仍敎曰, 事極駭然。當該中官, 令該府處之。又啓曰, 當該中官, 施以制書有違之律。仍命書落點人員曰, 某某。又下敎曰, 試所承旨, 知申落點矣。試官肅拜後。上曰, 今番場中, 頗從容。雜流似少矣。曾前則杙聲壯矣, 而今則無之矣。仍命書傳敎曰, 溫泉帳殿, 旣已下敎, 而尙未果焉。今日武科殿試畢後, 當試宗臣帿箭, 以此分付。文官則今日入侍承旨·試官中溫幸隨駕人, 一例許試。御將此鳳漢, 雖亦隨駕, 身在將任, 一體擧案。上曰, 吏判之撕捱, 不是異事。而今日試牌則膺命, 可也。至於五牌不進, 誠太過矣。仍命書傳敎曰, 左相, 雖亦行公, 與大官, 分義有間。況特敎之下, 五牌違命, 分義事體, 俱涉寒心。藝文提學, 下金吾推考。仍曰, 吏判, 頃免禁推, 而終不免矣。仍命書帿箭傳敎後, 上曰, 科場體重, 試官未受點者, 試所門閉前, 使之書去, 可也。上曰, 入場儒生, 幾許耶? 明履曰, 當初錄名四千七百, 而入門時, 錄名無數, 不知其幾許矣。上曰, 侍衛中有武臣乎? 明履曰, 李徵瑞有之矣。上曰, 徵瑞進來。徵瑞進伏。上曰, 片箭比柳箭則似難矣。今番入格, 當爲幾許耶? 徵瑞曰, 似不能滿百矣。上曰, 片箭之一中, 比柳箭之二中, 何如? 徵瑞曰, 似等等矣。柳箭, 若許以二分則易矣。上曰, 前大提學及弘文提學進來。仍命讀券官兩員進來書題。洪鳳漢·申思建進來。命書賦題曰, 孝悌也者爲人之本, 限以午初。上曰, 此題, 何如? 景夏曰, 今以元孫誕降之慶, 有此設科。而以孝悌命題, 聖意本自甚好。前頭又有東朝稱慶之科, 此題尤好矣。上曰, 今番慶科, 異於他慶。雖一儒生, 予不欲停擧。而若有隨從往來之弊, 則當停擧矣。分付四館所, 可也。明履曰, 頃已分付矣。上命大提學及提學都承旨入侍。敎曰, 孝悌爲仁之本。卿意以爲旨意, 如何? 景夏曰, 孝悌乃爲仁之本也。更有何商量耶? 明履曰, 所謂孝悌爲仁之本, 非是孝悌眞爲仁之本體也。言行仁, 自孝悌始, 所謂本者, 卽本始之義也。上命景源入侍。敎之曰, 兩臣所爭, 何如? 景源曰, 都承旨之言, 是矣。景夏曰, 小臣不過科文所見, 而如明履則學問, 是蠶絲牛毛, 故所見如此矣。景源曰, 只說仁之本則是失義而舖收先收爲仁之意則可矣。上命兵判入侍。此啓禧進伏。上曰, 孝悌爲仁之本, 其意, 如何? 啓禧曰, 仁有許多般數, 仁爲綱而孝悌爲目。仁之中, 有孝悌。自孝悌推去, 以至親民愛物, 無非仁中之事, 故言行仁自孝悌始。而孝悌, 是目中之最大者也。上曰, 儒生, 能知此意而體之耶? 觀彬曰, 巨儒則皆知其意而作之, 而年少新學之士, 亦難保其能盡曉此義也。上曰, 第二年之所作, 必詳審, 可也。上下敎於景源曰, 今番乃慶科也。武所擧子, 若有呼所之弊, 則使入門官知之, 可也。武科擧子中入格者, 則上命景源取其單子, 一一奏達。有伏地者, 上命景源問之。景源問之而後進曰, 寶城朴漢成爲名人。而其先山爲洞居崔姓人所偸葬, 呈于巡營而不見施, 故仰達云矣。上曰, 極其猥濫, 使之退去。又有伏地人。使景源問之。景源達曰, 楊州金萬柱而其父生時, 以軍丁事作冊子, 欲一登徹而未果, 故今持來云矣。上曰, 當納于政院, 伏地則猥濫, 使之退去, 可也。光毅進曰, 李天輔五牌不進, 罷職傳旨, 當入于東宮。而今旣有拿推之命, 傳旨則置之, 何如? 上曰, 置之。又有伏地人。使景源問之。景源達曰, 仁同人而仁同前倅, 有自備穀, 將行賑事, 而意外貶下, 故方欲上言而待令云矣。上曰, 甚是猥濫, 使之退去, 可也。武試官朴纘新進曰, 擧子金天精, 矢記有着名, 而招渠問之則無得中之事云, 拔去, 何如? 上曰, 拔之, 可也。明履進曰, 頃者御製續五禮儀補小識中, 威儀禮儀之下, 有孔聖曰之文, 而更考中庸則非孔聖之訓, 乃子思之訓也。上曰, 以子思改之, 可也。明履又曰, 小識中有列祖之深仁厚澤之語而列祖字似涉, 如何矣? 上曰, 非列祖而乃列朝也。有伏地人。上命景源問之。景源對曰, 恩津李奎宅爲名人, 而以恭靖大王十二代孫, 入於軍役, 故仰達矣。上曰, 嫡派云耶問啓。承旨曰, 嫡派云矣。上命書傳敎曰, 大王姓孫嫡派, 勿限代勿定軍役, 已有古規, 又載續典。則今伏地幼學李奎宅, 以大王十二代嫡派姓孫, 定軍役云。噫, 此令甲, 爲聖孫之厚典, 可與朝鮮不朽, 而爲守令者, 焉敢若此? 當該恩津縣監, 令該府從重堪處, 其軍役, 分付道臣, 卽爲頉下。出榻敎 景源以武擧子入格單子陳達之際。上曰, 今番鄕擧子多爲之而平壤之得中者, 尤夥然矣。僉曰, 兩西武技最優, 故然矣。有伏地人。上命景源問之。景源曰, 廣州李顯祿云。而以其祖先, 入於扈聖功臣, 子孫不免軍役, 故仰達矣。上曰, 猥濫矣。使之退去。有伏地人。上命景源問之。景源曰, 牙山趙重采而以官倉方圮毁, 故是爲更修而有上言待令云矣。上曰, 當呈政院, 退去, 可也。上命洪鳳漢進來。鳳漢進伏。上曰, 昨日, 卿見元孫症候, 何如? 鳳漢曰, 感氣似少愈。而咳嗽頗有之, 泄瀉亦間間發作, 似是乳道更滯, 故然矣。擧子始呈券而未卽作軸。明履進曰, 擧子今方呈券, 故催促收券官而不卽入來,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上又命書傳敎曰, 原榜人五百人, 外直赴幾人? 當以三貫革立之日, 一貫革三人作帶事, 分付。其在嚴科場之道, 儒生, 或集春門近處及墻底有往來, 則當停擧事, 分付四館所。出榻敎  上曰, 鄕黨篇, 不曰趨進翼如乎? 有一儒生, 雙手解繞而去, 渠何敢不敬於君父之前乎? 以此曉喩場中, 復有如此者, 則令四館所停擧, 可也。有伏地人。上命景源問之。景源曰, 機張金希正云而以其父年九十, 乞蒙老職之恩矣。上曰, 猥濫, 使之退去, 可也。景源曰, 藥房提調申晩, 將爲問候而待令矣。旣曾隨駕, 故仰達。上曰, 文臣試官中, 溫幸時中路隨駕諸臣及禮曹判書申晩, 一體許射。出榻敎 景源曰, 訓將, 亦令射之乎? 上曰, 溫幸時, 已射矣。置之。有伏地人。景源曰, 驪州文泰領。而以康成公子孫, 其族屬, 多入軍役, 故仰達云矣。上曰, 猥濫, 使之退去, 可也。諸試官, 方分軸考試之際, 有濃墨致汚於試券者。上命書傳敎曰, 科次之際, 有先爲濃墨者, 不謹宜飭。當該試官, 從重推考。出榻敎 宲曰, 使諸試官聞知, 而有所申飭, 則好矣。上曰, 依爲之。上曰, 慈殿, 以今科異於他慶科之故, 有御饌之頒賜者, 文武試官及侍衛政院共喫, 可也。俄而內侍持宣醞四五床, 置諸前。上曰, 先令右承旨飮酒, 可也。景源進曰, 帿射時, 先令宗臣射之乎? 上曰, 可矣。上命聖應進前敎曰, 申勅拾箭軍, 使之詳拾, 可也。渠輩借箭必多矣。諸臣飮訖。上下敎於聖應曰, 武臣中, 亦有善飮者, 則使之進飮, 可也。有武臣數三人進來。各飮四五盃。光毅進曰, 兼春秋及翰林, 雖是溫幸時隨駕之人。而史官事體, 與他有別, 似不當許射矣。上曰, 臨射時, 告達而射之, 可也。史官申五淸·朴正源·鄭述祚等, 適少出。上命戶判入侍。金尙魯進曰, 今此入侍時, 史官不備, 事體未安, 承旨亦難免不爲檢勅之責, 當該承旨·史官, 竝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上敎於尙魯曰, 俄有伏地人, 恭靖大王十二代孫而嫡派云, 故有所下敎矣。嫡派則無代數之限, 庶派則有九代之限, 此已有定規。而聞其時有士夫樣子者, 勿定軍役之敎, 更思之, 此言甚野俗矣。光毅讀庚申宗簿寺草記及丁卯年傳敎。上曰, 稍存, 士夫樣子之說, 極怪異矣。尙魯及光毅曰, 然矣。光毅曰, 似是伊時史官, 誤書擧條之致也。上曰, 續大典, 已載嫡派勿限代之文, 則更無可疑也。上曰, 今番儒生輩, 頗整齊矣。光毅曰, 臣等曉頭, 偕儒生入來時見之, 則無雜亂之弊。大抵今番, 預加申勅故也。上命明履取次上軸一丈而來, 使讀之。仍敎曰, 此孝悌大文, 曾讀五十遍, 而今則如隔前生矣。命鄭宲·尹東度入侍。上問曰, 孝悌爲本之義, 何如? 宲曰, 孝悌, 乃仁中一事。若曰, 行仁之本則可, 謂之仁之本則不可矣。尹東度曰, 言由孝悌而爲仁也。非謂孝悌爲仁之本, 體也。明履曰, 仁者, 一心之全德。今夫性分中, 有仁義禮智之目, 而摠而言之則包於仁矣。仁固愛之理而發則爲情, 故由孝親悌長, 推以至於親民愛物, 方爲仁之大用。若以體用本末言之, 則仁是體而孝悌是用, 仁是本而孝悌是末也。然人欲行仁, 則必自孝悌始, 故必曰孝悌爲行仁之本也。上曰, 仁是性耶? 明履曰, 仁是性也。而本字, 乃本始之義也。上曰, 然則何不曰爲仁之始, 而必曰爲仁之本耶? 明履曰, 本者, 亦始之義也。上曰, 一言蔽之曰孝悌是行仁道之本云爾, 則可矣。宲曰, 漢儒以孝悌看體仁之本體, 至程·朱始闡明斯義矣。上曰, 右副亦曾聞關雎章前日講論之語耶? 宲曰, 臣亦以爲文王宮中人之所作也。東度曰, 此乃宮人, 體文王之意而咏歌者也。小臣, 以儒臣入侍時, 已爲仰達矣。上曰, 宮人, 豈其爲文王而至於琴瑟友鍾鼓樂耶? 宲曰, 琴瑟友鍾鼓樂, 是形容文王盛德也。而至於寤寐思服轉輾反側, 則似過矣。上曰, 樂而不淫, 是琴瑟友鍾鼓樂之謂也。哀而不傷, 是寤寐思服之謂耶? 宲曰, 然矣。明履曰, 故進善臣金昌翕, 每歎後人誤看朱子之註, 故自家參互考訂, 有註釋之文矣。諸臣帿射畢後, 上命書傳敎曰, 宗臣·文臣帿箭時, 茂林守塘二中, 半熟馬一匹賜給。夏溪君KC02330, 靈川君壄, 密林君煃, 咸溪君櫄, 花豐君楏, 行洛城副守壇一中, 各兒馬一匹賜給。行副司果南泰耆·金善行三中, 各熟馬一匹賜給。觀彬·景夏兩人進曰, 試券幾盡合考, 當取幾人耶? 上曰, 今番乃慶科也。取十人, 可也。觀彬·景夏取合考十三張而進伏。上曰, 金善行·韓光肇進來對讀, 可也。又敎曰, 曺命敎·洪啓禧·金尙魯·鄭翬良進來參見, 可也。景夏與觀彬, 取合考試券評論後, 觀彬, 以次書等。上曰, 壯元之文, 上之, 可也。先欲柝號矣。上親柝而曰, 觀其父名, 昔人之弟爲之矣。因取十張, 以次而上。次次親柝, 上敎曰, 壯元吳瓚也。又曰, 李海鎭而星州人也。又曰, 直長李最中而父名顯應也。僉曰, 是乃故相臣李濡孫也, 洪鳳漢之從弟矣。上又曰, 奉事朴道源也。僉曰, 故判書師益之姪子也。上又曰, 金相慶而父名則瑞澤也。僉曰, 是先正子孫而金相福之行列也。上又曰, 尹坊而父名光祚也。僉曰, 右承旨尹光毅之從姪, 而參判彙貞之孫也。上又曰, 徐逈修而父名命勳也。正源曰, 松留徐宗伋之再從孫也。上又曰, 趙宗溥而父則故參判彦臣也。上又曰, 申致堯而忠州人也。上又曰, 趙潤玉而定州人也。仍敎曰, 日勢已暮, 新恩使之速爲招入。上曰, 香醞尙多, 諸試官承史皆痛飮, 可也。諸臣承命, 各自隨量而飮。上命東度進來。下敎曰, 俄聞尹坊, 乃尹光毅之從姪云。予心深以爲幸矣。今番接中, 鄕人亦得多參, 而一邊之人獨闕焉。予亦爲之悵然, 但見出榜時, 一邊試官, 氣色愁沮, 誠可慨然矣。東度曰, 科擧者, 非試官之所可爲, 而亦非人君之所能予者也。苟得國家可用之人, 則好矣。何擇於東西南北乎? 上命洪鳳漢進來。敎曰, 卿之伯父善飮矣。今日乃元孫慶科。卿特飮三盃。將臣事體, 與他自別, 此後則戒酒可矣。鳳漢曰, 臣之兩父善飮, 其後隱卒之典, 亦有此敎, 臣每感泣矣。臣又受國厚恩矣。處地如此, 若或過飮, 則恐有妨於軍務, 敢不奉承聖戒耶? 上命朴弼幹進來。敎曰, 頃爲承旨時有下敎矣。今此慶科, 以試官入來, 可貴也。上命柳儼入侍, 下敎曰, 久而後, 今始見卿矣。儼曰, 臣蹤跡臲卼, 久未入侍。今仍試事, 得覲淸光, 下情, 誠喜幸萬萬。上曰, 君與臣, 今皆白髮矣。卿曾有披見常訓之語, 至今不忘矣。少輩之言, 不必相較也。朴景源之事, 弱卿而然矣。若於稍大者而駁論之, 則予必有責, 故於卿則易之而有所云云矣。今朴正源在此, 予兩解之矣。儼曰, 論臣者, 非朴正源而乃盛源也。上曰, 予亦知爲朴盛源, 而使正源, 歸語其兄矣。儼曰, 盛源, 乃其弟也。上曰, 然乎? 仍下敎於正源曰, 予每謂盛源爲汝兄矣。若是汝弟則汝歸語汝弟而戒勅之, 可也。上又下敎於儼曰, 予已知卿於乙巳問郞時矣。朴盛源之事, 不必憎之也。予今兩解之, 卿幸勿介懷也。上仍敎曰, 今接一邊空矣。此莫非渠之數也。而一邊群下, 有愁沮之色, 誠慨然矣。俄以此意, 已下敎于尹東度矣。今日見之, 諸臣有氣沮者, 眞所謂淺丈夫也。若此而將何以事元良乎? 儼曰, 今聞此敎, 臣誠欲死矣。科擧本非試官之所可任意。而雖以人君之尊, 亦不得低仰於其間, 則臣等何敢有一毫慨恨之意哉? 上曰, 今此下敎後, 卿復事撕捱耶? 後日備局日次, 則必爲入來, 可也。儼曰, 聖敎如此, 臣謹當入侍, 而亦必復有人言矣。上曰, 如是下敎之後, 復豈有人言耶? 吏參曺命敎進曰, 判書拿處, 參議病不進, 小臣獨政未安。上曰, 仍爲之。儼曰, 臣方待罪工曹, 故敢達矣。津船者, 所以過涉行人, 其事亦重矣。前者自本曹, 每捧船稅而造船矣。一自均役廳創設而船稅盡歸之後, 工曹無造船之財力, 見方津船腐傷, 行人有阻絶之慮。若分付均廳, 工曹津船所造, 則劃給, 幸矣。上曰, 靈城, 善爲之而來矣。均廳事, 乃爲民創設, 今不可遽有變通矣。上曰, 李周鎭家旌閭事, 金致仁則以爲過矣。此是故奉朝賀之女而故判書之妻, 故如此而其言, 亦是矣。而其賢哲, 予亦知之矣。儼曰, 李周鎭之子溵, 卽臣之壻。故臣詳知其家事矣。自周鎭卒後, 久處廬幕, 仍而生病捐身, 而聞本家難受恩典云矣。上曰, 若不受之則李溵非孝子也。儼曰, 聖敎如此, 臣當歸語其子, 使之承受矣。上曰, 故相不請諡, 故特敎賜諡。今李溵若不受旌閭則非孝子也。上仍命明履書御題一句曰, 今日酒盃豈忍辭? 命飮酒諸臣聯句以進。李顯重進伏。上曰, 知人未易, 翰林召試時, 予果憎之矣。伊後見之, 誠可矣。聞汝有老母, 御饌歸遺, 可也。上曰, 今日景象, 可謂好矣。予則不欲宣醞。而東朝以爲今此慶科, 異於他慶, 故有此酒食之頒宣。日後雖欲更得此, 其可易乎? 尹植進伏。上曰, 卿曾以南陽事, 多年見枳矣。向者特命加資。今又以卿之年而陞秩, 又任摠府。摠府, 是予之所踐也。可謂貴矣。植曰, 今値三百年所無之慶。有此設科, 臣民之幸, 何可勝達? 光毅曰, 此三朝舊臣也。曺命敎封進望筒。上覽後, 敎曰, 金始煒擬望矣。卿事是矣。命敎曰, 伏聞已有許擬之聖敎, 且近已復通矣。上曰, 趙鎭世, 何不擬司諫而擬諸洪牧耶? 卿可謂氣少矣。金陽澤進伏。上曰, 國舅之族, 今科又爲之, 心甚感愴矣。金致仁進曰, 今以三百年所無之慶。而有此設科, 臣民忭幸, 何可勝達? 念臣父曾在己酉年間, 以兵曹判書, 兼內局提調行公時, 自上有知無不言言無不盡之敎。臣時在童時而尙知感激矣。今臣竊欲以臣父之所事殿下者事之。若有所懷而不自盡, 則是非事君之無隱之威也。臣請陳之, 吏議今日以試官入來, 不參新恩政事, 而旋卽出去。臣問其故, 自家雖不言, 而他人傳云與吏參, 意見有異, 不可參政, 故出去云。大凡政格, 必三望相議通塞。而今當獨政之時, 金始煒·趙鎭世·沈䥃三人, 竝備擬, 誠爛熳矣。上曰, 南泰齊之心, 貴矣。金致仁曰, 沈䥃則臣亦非謂以前事, 不可作提擧。而長銓, 旣不參政, 獨自備擬, 誠涉未安矣。上曰, 予以趙鎭世洪牧之擬, 可謂氣少, 已言于吏參矣。沈䥃之陳章, 非矣。而其命之許養, 卽予之使然也。致仁曰, 政格, 不當如此。而隄防, 不可不嚴矣。上曰, 一國公議, 予何遏之耶? 仍命書傳敎曰, 今聞儒臣陳達, 吏曹參判曺命敎所爲, 其涉寒心。特遞其職。出榻敎  上曰, 趙鎭世, 春坊時, 予已知之。金始煒, 予固惜之, 欲除承旨。而尹東度, 念其父而特除。鄭宲, 乃祖之孫, 故特除。未暇及於金始煒矣。上曰, 非予不知, 而非儒臣則予何以聞此言乎? 儒臣可貴矣。特飮賞盃三盃, 可也。宲曰, 以南泰齊事觀之, 能守其所執, 誠可嘉矣。致仁曰, 若爲停流所强而爲之, 則非矣。而此則自家所執, 能不撓, 可貴矣。上曰, 此亦南泰良·南泰溫之所流來者也。致仁曰, 然矣。而泰齊則似勝矣。上曰, 一邊之人, 獨未參榜, 可欠也。致仁曰, 此非人君之所可能者, 亦非試官之所可容者也。上曰, 儒臣及右副, 若以己黨之獨參爲幸則非矣。致仁曰, 臣與洪鳳漢, 語及此事, 亦以爲然矣。上曰, 洪鳳漢, 其從弟爲之。而其心如此, 可謂公矣。上仍曰, 南泰齊之吏議, 出於特除矣。致仁曰, 知臣莫如君也。上命書吏參特遞傳敎之際, 敎曰, 吏參此事, 亦非負予也。仍命文武唱榜, 唱榜時夜色昏黑, 炬光不明。上曰, 工曹堂上, 何其惜其炬而不使之光明耶? 從重推考下敎之後, 若又微暗, 當令該府處之。明履進曰, 終日親臨帳殿, 眩候, 何如? 而湯劑進御乎? 上曰, 眩候一樣。而瓊玉膏進御矣。放榜後, 上曰, 門鑰必已下矣。當下標信。通化門·金虎門留門, 可也。仍命文武榜引見。各問姓名後, 上曰, 今番慶科, 異於他科。爾等, 宜以一公字存心, 可也。吳瓚曰, 臣請以一直字仰報矣。李海鎭曰, 臣請以一忠字爲心矣。李最中曰, 直字·忠字俱好, 臣請以二字從事矣。朴道源曰, 忠字好矣。趙宗溥曰, 忠字·直字, 俱好矣。金相度曰, 臣本喬木世家也。敢不以至公爲心, 而至於是, 臧否之際, 何可不辨之乎? 徐逈修曰, 一介直字, 爲仰答之頭腦矣。申致堯曰, 公字之戒, 敢不奉承。趙潤玉曰, 臣亦以公字存心矣。尹坊曰, 聖敎如此, 敢不體承。上曰, 汝輩他日, 事我元良, 不負公字之戒, 可也。上又曰, 金相度, 頗殊常矣。其言似爲將來將本矣。上仍還入大次。諸臣退出。



5 제목없음 1784-02-25 정조 8년 2월 25일 

승정원일기 1551책 (탈초본 83책) 정조 8년 2월 25일 신사 34/50 기사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禮曹啓目, 粘幼學文命純·文應龍上言內辭緣云云。上言內辭緣, 今姑置之, 何如? 判付啓, 事涉猥越, 依回啓爲有矣, 江城君文益漸, 功勞卓異, 勿論書院或鄕祠, 隨卽繕葺, 得免傾頹, 實合記念之政。分付道臣, 使之申飭地方官, 顧助物力, 斯速修改, 其子孫, 衙門·營門間, 收用之意, 一體分付。



6 제목없음 1784-08-24 정조 8년 8월 24일 

승정원일기 1565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 8월 24일 정미 61/67 기사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刑曹啓目粘, 金命履擊錚回啓云云。又縱其子, 如是呼籲者, 尤極狡惡, 原情內辭緣, 勿施何如? 判付啓。此獄案, 向因審理, 雖已看閱, 獄貴屢諗, 更令道伯別定査官詳査, 仍具意見, 狀聞後稟處爲良如敎。又啓目粘, 猥濫擊錚人等, 依道臣狀請, 各別嚴勘之意, 竝以, 分付, 何如? 判付啓。依回啓施行爲旀, 豐德幼學柳興德原情段, 元非四件事, 雖極猥越, 旣稱幼學, 則與常漢無倫之言有異兺除良, 所謂鄭可容之欺人奪券, 情狀痛駭, 必是牟利奸民就斷之計, 可容身乙, 令該道推捉嚴査決給, 俾無彼隻更訴之弊爲旀, 安州金一鴻原情段, 遐土奸細之輩, 不待査事結末, 有此煩籲, 不可以民隱言, 此等民習, 在所嚴處編配, 則雖以纔經大赦, 姑且分揀, 而亦不可仍以置之, 下送本道, 以爲懲治之地爲旀, 定山李興福原情段, 未詳本事顚末, 本曹相考草記爲旀, 坡州盧建星原情段, 憑藉傳訃云云。殊甚訝惑, 元供辭, 亦自本曹節該草記爲旀, 擊錚諸人, 今日內決放之意, 竝以分付該道爲良如敎。又啓目粘, 文春才擊錚回啓云云。向前文春才娚妹等, 依受敎, 一竝免賤之意, 分付道臣, 何如? 判付啓。江城君文益漸子孫, 雖支庶遠裔之微賤者, 勿定軍役, 或犯公私賤者, 使免賤事, 獻陵朝受敎, 昭在勳府事目云爾, 則趁卽免賤, 不容少緩, 依回啓施行爲有矣。尋常壓良, 自有禁令, 況受敎昭在者乎? 無論奴貢身布, 依受敎後勿更侵之意, 其矣處, 自本曹成給文券爲良如敎。



7 擊錚 罪人에 대한 勘處를 청하는 刑曹의 草記 1784-09-19 정조 8년 9월 19일 

승정원일기 1567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 9월 19일 신미 67/80 기사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林濟遠, 以刑曹言啓曰, 再昨日動駕時, 慶尙道三嘉居幼學文德龍, 擊錚於衛外, 故取考其原情, 則以爲渠卽木綿功臣文益漸十四代孫, 而癸卯年, 渠之妻同姓族人鄭宅周, 倉穀逋欠, 分錄於渠, 故不爲施行, 則宅周銘怨告官, 渠從兄弟德獻·德胤, 充定軍役。伏乞依受敎, 竝爲免役云矣。雖曰切己之事, 旣非四件之內, 而肆然鳴金者, 已萬萬無嚴, 近來民習詐譎, 姓文者, 輒稱益漸之後, 圖免軍役之弊, 亦甚紛紜。今此德龍, 自言益漸十四代裔孫, 則渠輩之遙遙世派, 難辨其眞僞, 原情勿施, 自臣曹, 考律勘處, 何如? 傳曰, 不足深責, 纔經大赦, 亦是宥旨前事。今番分揀放送, 可也。



8 제목없음 1784-09-27 정조 8년 9월 27일 

승정원일기 1567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 9월 27일 기묘 31/51 기사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李時秀, 以禮曹言啓曰, 觀此慶州進士李標等上言, 以本道丹城縣道川書院, 湖南長興府月川書院, 爲前朝儒賢文益漸之遺祠, 而雖已修改, 未有宣額, 請賜美號爲言矣。今春旣因其子孫上言, 至蒙修葺廢宇, 收用後裔之恩典, 則聖朝紀功崇報之典, 亦云至矣。 賜額與否, 旣無增損, 院號新宣, 亦啓後弊。海州幼學孔成集等, 稱以大聖後裔, 請入本州校案, 苟其人可合章甫之列, 則許錄校案, 何至於煩籲朝家乎? 其所猥屑, 莫此爲甚, 孔成集令該道道臣參酌勘治, 以懲民習。南部幼學權銈, 以其十一代祖母海寧府夫人爲花山府院君景惠公專之夫人, 墓所在於安東, 而衆塚累累, 終未尋得, 乞令設壇致祭, 各別禁護云, 而致祭雖有古例, 係是特恩, 禁護自有本官, 非可煩請, 論以事體, 亦甚猥屑。順興幼學徐彭胤, 以其十代祖進士翰廷爲端廟朝遺逸, 持綱守義, 請以褒贈, 而旣是上舍之生, 初非棄官之人, 則雖或有節義之可稱, 未見有表章之實蹟, 事係久遠, 有難憑信, 上言內辭緣, 竝置之, 何如? 傳曰, 竝依草記施行, 可也



9 德龍等의 軍役을 頉給토록 分付할 것을 청하는 忠勳府의 草記 1784-09-27 정조 8년 9월 27일 

승정원일기 1567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 9월 27일 기묘 35/51 기사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李時秀, 以忠勳府言啓曰, 今番上言回啓, 依頃日陵行時例, 以草記爲之事, 命下矣。慶尙道三嘉居幼學臣文德龍上言, 以爲渠以木綿功臣文益漸十四代奉祀孫, 僅僅保存矣。不意今者, 其三從兄弟幼學臣文德獻·文德胤·文德龍等, 一時充定於軍役, 故不勝冤枉, 呈于本官, 仍訴巡營, 則相考世派後, 頉給爲題, 而本縣座首鄭宅周, 色吏姜再根等, 有嫌不少, 符同幻弄, 尙今未頉云矣。木綿功臣江城君子孫勿侵身役, 卽列聖朝受敎也。前後頉役, 非止一再, 則今此德龍之稱冤, 不是異事, 而敢以監色輩有嫌之說, 至煩天聽, 極涉猥越, 不可不懲治, 所謂監色輩之符同幻弄, 果如德龍之言, 則亦不可不査實嚴處, 德龍等所侵軍役事, 當依受敎頉給, 竝以此意, 分付道臣, 何如? 傳曰, 依草記施行, 可也。



10 제목없음 1785-09-08 정조 9년 9월 8일 

승정원일기 1589책 (탈초본 85책) 정조 9년 9월 8일 갑인 32/45 기사 1785년  乾隆(淸/高宗) 50년


○ 李祖承, 以禮曹言啓曰, 觀此全羅道幼學金相樞等上言, 則爲其忠宣公文益漸書院請額事, 令該曹稟處矣。蓋文益漸, 卽麗季人也, 以左正言, 奉使入元, 元以恭愍昏暴, 將欲廢立, 則爭不奉詔, 遂竄劍南, 而矢死不貳, 三載始還中朝, 潛取木綿, 敎人織組, 其利於民如此, 當麗運之將迄, 謝病不仕, 敎訓生徒, 明正學斥異端, 洪武中, 倭寇衝斥, 而時持母服, 朝晡哭擗, 無異平日, 賊不能害, 立石書之以孝子里, 及其歿後, 恭靖大王, 念其衣民大功, 追封江城君, 贈諡忠宣, 增置祠田。肅廟朝, 因儒生請額疏, 下批曰, 士氣不振, 尙未延額, 孤負聖朝之厚恩, 不勝嗟惜之至, 仍命禮曹稟處, 而仍循未擧, 英宗朝, 致祭于所享之院, 而筵臣金有慶撰祭文, 至若先正臣金宏弼·曺植·金安國, 俱有撰述, 先正臣成渾, 相臣安瑭, 創立孝子里碑閣, 先正臣文純公李滉作碑記, 先正臣文正公宋時烈爲之跋, 此皆斑斑可考於諸先正文集者也。其書院, 在於長興之月川, 而忠宣公子孫, 昨年春上言請額, 則該曹格以干恩, 而我聖明, 特命道臣, 修葺院宇, 雖未蒙宣額之恩, 遐土弊院, 倍增光色, 一方士女, 莫不歌詠聖德云者, 可見列聖朝崇報之典, 諸先正尊慕之義, 而今此恩額二字之請, 特出於多士之公議, 非比尋常院宇之請額, 則在朝家追奬之道, 事當依所請許施, 而事係重大, 如非出於特許, 則非臣曹所可擅便, 上裁, 何如? 傳曰, 特爲許施, 遣官致祭, 可也。



11 제목없음 1785-09-10 정조 9년 9월 10일 

승정원일기 1589책 (탈초본 85책) 정조 9년 9월 10일 병진 16/36 기사 1785년  乾隆(淸/高宗) 50년


○ 柳焵, 以禮曹言啓曰, 因全羅道幼學金相樞等, 爲其忠宣公文益漸書院請額事上言, 臣曹覆啓, 傳曰, 特爲許施, 遣官致祭可也事, 命下矣。祭文及額號, 令藝文館撰出, 何如? 傳曰, 允。



12 제목없음 1785-10-22 정조 9년 10월 22일 

승정원일기 1590책 (탈초본 85책) 정조 9년 10월 22일 무술 9/28 기사 1785년  乾隆(淸/高宗) 50년


○ 尹尙東, 以禮曹言啓曰, 卽接全羅監司李在學移文, 則長興府使牒呈內, 忠宣公文益漸書院延額及祗受致祭日字, 以來十一月初十日推擇云, 祭物執事官, 令本道差定進排事知委, 而本曹郞廳則定日臨時受香祝進去, 以爲致祭宣額之地, 何如? 傳曰, 允。



13 제목없음 1787-08-28 정조 11년 8월 28일 

승정원일기 1632책 (탈초본 87책) 정조 11년 8월 28일 계해 22/34 기사 1787년  乾隆(淸/高宗) 52년


○ 朴天衡, 以禮曹言啓曰, 因京畿·慶尙·全羅, 三道儒生李亨復等, 爲其江城君文益漸, 丹城道川書院復額事上言, 臣曹覆啓判付內, 依回啓施行, 遣官致祭, 以示朝家崇報之意, 獻官, 以道內侍從守令差定, 待香祝下送, 卽爲擧行事, 判下矣。祭文則令藝文館撰出, 額號則旣是復額, 仍舊號以道川書院書寫, 宣額, 何如? 傳曰, 允。



14 제목없음 1787-11-09 정조 11년 11월 9일 

승정원일기 1636책 (탈초본 87책) 정조 11년 11월 9일 임신 25/31 기사 1787년  乾隆(淸/高宗) 52년


○ 南鶴聞, 以禮曹言啓曰, 卽接慶尙監司金光默移文, 則丹城縣監牒呈內, 忠宣公文益漸書院延額及祗受致祭日字, 以來十二月初四日推擇云, 祭物及執事官, 令本道差定進排事知委, 而本曹郞廳, 則正日臨時受香祝進去, 以爲致祭宣額之地, 何如? 傳曰, 允。



15 제목없음 1788-01-05 정조 12년 1월 5일 

승정원일기 1638책 (탈초본 87책) 정조 12년 1월 5일 무진 22/24 기사 1788년  乾隆(淸/高宗) 53년


○ 副司直姜世晃疏曰, 伏以臣薄有筆墨之技, 無論親疎, 有求輒應, 手蹟所及, 殆遍遠近, 其平日不能矜愼之失, 固所自訟。向在乙巳年間, 全羅道長興文姓人名不記者, 來請其遠祖江城君文益漸私廟柱聯。臣果漫書而應之曰, 泣玉玦於劍南, 功存社稷, 傳綿種於海外, 澤被生民, 伊後歲月寢遠, 置之忘域矣。今伏聞慶尙道丹城江城君道川書院宣額致祭官禮曹正郞臣李重所傳, 以爲當其宣額之日, 院儒告曰, 御製懸板, 昨已奉安云, 而其文曰, 卓忠孝於百代, 扶植綱常, 倡道學於東方。樹立斯文, 李重心竊疑, 宸章之未聞頒下, 又怪其事面之極其無理, 急令撤去, 密探其委折, 則有觀光者一二人, 私相酬酢曰, 不但此事, 曾聞全羅道長興江城君私廟, 有柱聯揭板, 其處人或謂之, 自上頒下, 而實是姜世晃之筆, 則今此書院所揭者, 未可知何人所書也云。噫嘻, 痛矣。此何言也? 虛謊誕妄, 乃至是耶? 臣自聞此語, 心骨震悼, 神爽飛越, 不知所以措躬也。仍伏念, 近來遐土多有愚妄叵測之類, 譸張虛說, 轉相倡和, 此實爲世道莫大之憂。目今丹城揭板, 旣已綻露, 自當嚴覈勘律, 而至於長興事, 旣有他道人之爛漫傳說, 則其必有做作詿誤之苖脈, 斷不可置而不覈。玆敢疾聲煩陳。伏乞聖明, 亟加明覈於長興府, 究得言根, 撤去揭板, 以正奸民謊妄之罪, 以安賤臣惶蹙之私焉。臣無任隕越屛營之至。



16 제목없음 1790-02-14 정조 14년 2월 14일 

승정원일기 1672책 (탈초본 88책) 정조 14년 2월 14일 을축 43/62 기사 1790년  乾隆(淸/高宗) 55년


○ 申耆, 以刑曹言啓曰, 昨日動駕時, 猥濫擊錚人中, 智禮金泰亨, 則以爲其先祖吏曹判書忠毅公文起, 爲國家殺身成仁於六臣殉節之日, 而子孫則定屬於永同吏役, 田民則籍沒, 賜牌於其時勳臣尹姓之家矣。辛亥年, 復其官爵, 頉其定屬, 籍沒田民, 一竝出給事判下, 故其父生時, 推還田地, 數年收稅, 父死之後, 尹哥又復奪去, 乞令推給。且金文起子孫, 所定軍保, 皆爲頉下, 勿論公私賤, 一竝頉給事, 連有受敎, 敬順王子孫儒衣·儒服者, 許錄通淸事, 又有列聖朝傳敎, 而渠是敬順王子孫, 得免軍保, 許錄通淸事也。敢以四件外猥屑之事, 肆然呼籲, 極爲無嚴, 自臣曹考律勘處, 至於籍沒土地, 旣命還給, 則尹哥之更爲奪去, 極涉疑怪, 令該道査實推給。春川淸平寺僧泰性, 則以爲本寺舊有賜牌田畓百餘結, 而中間還收矣。丁未年於義宮屬李七才來言, 厥田畓移付於義宮云, 故以三百四十兩, 買得秋收, 更以二百四十兩, 放賣於其宮屬, 而七才處閪失者百餘兩, 乞蒙復舊之恩事也。旣非四件, 而以如此瑣屑之事, 敢爲登聞者, 紀綱所關, 萬萬無嚴, 原情勿施, 自臣曹從重嚴勘。泰安柳贊壁, 則以爲, 丙申年海美居李長化, 以其妻金女及其甥世云, 謂以隱避奴婢, 以一張立旨起訟, 海美世云田畓, 沒數奪取, 渠則以凌辱士夫, 定配河東後, 縛打金女, 搜探三百餘兩田畓文券, 以廉價斥賣持去, 而金女被其亂打, 因以致死。世云族屬, 憤恚致死者, 被打致死者, 竝金女爲七人之多, 而渠今蒙放, 敢此呼訴, 嚴繩其罪。推給田畓事也, 事實果如此, 則何不呈訴本道, 以請査治, 而今於十五年之後, 始爲呼籲者, 極涉虛詤, 有難準信, 而旣曰人命致死, 又係良賤辨別, 則亦不可遽然勿施。令道臣詳査狀聞後, 稟處。楊州樓院崔南碩, 則以爲, 樓院民, 以生鮮都庫事相訟, 而渠父興世, 年今七十, 初不干涉於訟庭, 橫被狀頭之罪, 定配恩津, 宿病危劇, 方在難救, 乞令放釋事也。其父罪謫, 旣係邀路抑執, 則屢次呼籲, 誠極無嚴, 原情勿施, 其猥越之罪, 自臣曹從重勘處。豐川幼學呂善籥, 則以爲, 其父光運, 自在髫齡, 敬事父母, 行年十二, 奄遭母喪, 哀毁之節, 感動隣里。繼祖母李氏之病, 漸至危劇, 醫云人肉最是良劑云, 故其父割出股肉, 熟以分進, 果獲神效, 竟以天年下世, 則其時道臣, 因士民之等訴, 入於褒啓中, 得蒙給復之聖恩, 若無旌門於篷筆之下, 則恐無垂美後世, 旌門一節, 特爲判下, 以聳遐方觀感, 以爲爲親揚美之道事也。已因道啓, 照例給復, 則朝家盛典, 於渠足矣, 而敢以棹楔[綽楔]之請, 又此煩籲, 極涉猥越, 原情勿施。驪州報恩寺僧敬心等以爲, 本寺自是英陵願堂, 而特賜位田十八結內, 九結在於醴泉地, 初則每結十五兩定式矣。今則僧殘民頑, 每結只以六兩錢備給, 兩陵四時支供, 春秋進上無以擔當, 醴泉秋收, 依當初施行事也。此不過收稅微事, 則呼訴本邑, 使之釐正, 何所不可, 而渠以僧徒, 肆然鳴金於蹕路之下者, 究厥情狀, 極涉痛駭, 原情勿施, 考律重勘。西部私婢起梅, 則以爲, 渠夫鐵金, 以九月金處錢兩推徵事, 相無爭詰, 九月金推擠鐵金, 脛骨違傷, 而九月金方染時病, 故待差病呈官爲計矣。九月金死後, 其妻構捏發狀, 積受刑訊, 乞蒙事辨事也。此獄之成, 今已五年, 而鐵金以錢兩債物事, 與九月金爭鬨, 手打足踢, 傷痕狼藉於要害, 致命乃在於八日, 獄情無疑, 已爲完決訊推, 而且經審理, 毫無可原之端, 則到今變幻事實, 敢以因病致死等語, 冒煩天聽, 萬萬無嚴, 不可以爲夫訟冤, 有所曲恕, 自臣曹懲治放送。海州使令崔二才, 則以爲, 其兄惡才, 癸卯入於殺獄, 乞令査處事也。渠兄惡才, 以營鎖匠, 符同舊囚李從奉, 侵徵新繫朴海得, 着之以枷, 縛之於脚, 恐喝困苦, 罔有紀極, 終至於缺傷喉吭, 過十日致命, 論其手勢之凶毒, 未有若此獄之甚者, 尙未用法, 已是失刑, 而昨今兩年, 其母其弟, 換面迭出, 瀆擾不已者, 究厥情狀, 萬萬痛惡, 原情勿施, 崔二才自臣曹考律嚴勘。東部居民孫良澤等, 渠輩所居孫家庄田土, 見奪於故奉朝賀金尙翼孫仁得, 故昨年九月, 渠輩仰瀆天聽, 自京兆因傳敎推給之下, 良澤家都文記, 終不出給, 故良澤父義大, 憤鬱自縊死, 義大之母, 痛子非命, 仍又繼死, 乞令査處事也。此不過土地相爭之事, 則呈訴法司, 何所不可, 而張皇爲說, 猥越鳴金者, 極爲無嚴, 原情勿施, 狀頭考律勘處, 而至於本事, 取考文案, 則昨年自京兆, 以金家買得者外, 所謂立案處, 竝出給民人之意, 草記蒙允, 則此是已啓下決給, 而不給文記者, 極涉可駭。然而一邊呼籲, 有難準信, 更爲詳査決處。大丘童蒙徐亨曾, 則以爲, 其父應福, 橫罹殺獄, 故癸卯上言, 行査本道, 而査官見賣檢吏, 斷案成罪, 更令明覈事也。取考原案, 則膺福踢打崔允德, 翌日致命, 實因詞證, 俱爲明白, 錄啓訊推, 今已年久, 其間屢經審理, 無容更議, 而癸卯年亨曾, 始爲粧出檢案所無之說, 誣罔天聽, 及其行査, 許多諸招, 事事落空, 應福依前同推, 亨曾照律勘處, 則到今亨曾之不知懲畏, 乃敢以査官見賣等說, 惟意假飾, 又復呼籲, 尤極無嚴, 原情勿施, 昭法重勘。仁川業儒鄭殷達以爲, 其父翀良, 甲辰定配巨濟, 乙巳遇赦蒙宥, 因秋曹覆啓, 尙爲仍配, 故丁未鳴金哀籲, 又蒙天恩, 依前下敎放釋, 而秋曹又爲覆啓, 乞令放釋事也。翀良以謙賊孽屬, 出沒京鄕, 密傳書札, 踰越防守, 恣意往來, 論其罪犯, 罪固罔赦, 流配絶島, 在渠末勘, 故臣曹之前後覆難者, 實出於嚴隄防杜後弊之意, 而乃敢以覆啓未放等語, 肆然呼籲, 萬萬痛惡, 原情勿施, 照法嚴勘。林川幼學權相彦, 則以爲, 矣身六代祖恪, 卽故領議政仲和之玄孫, 重峰趙憲之高弟也。重峯倡義之初, 赴錦山之戰, 張拳冒刃, 其力不足, 與重峯同時殺身, 其勁節韙績, 與重峯一也。今去壬辰, 世代旣遠, 或不無眞贋難辨之患, 而重峯集抗義編云, 賊鋒叢集, 趙先生呼恪曰, 汝家名祖忠節, 專在汝身, 今日只有一死, 無愧義字云爾, 則恪遂不旋踵, 力戰死之, 其貞忠高節如此, 乞蒙旌褒事也。壬辰兵燹, 殉節烈士, 自朝家已施崇褒之典, 則到今世遠之後, 有難輕議, 原情勿施。安邊崔鳳三, 則以爲, 其父以本府納蔘監官, 爲人被打, 方在死境, 且本府土産人蔘, 故乾蔘四斤, 有上納官用之規矣。年年採得, 蔘不如舊, 年例官用, 無以應納, 故本官除其四分之三, 以價錢春秋上納, 至爲一千三百餘兩, 而面任處情債錢, 又至官納之數, 民戶散亡, 支保無路, 旣以錢代納, 而錢無雜糅, 則宜無情錢之可論, 傷人者抵罪, 三章大關, 渠父縛打人事, 當詗捉, 將爲復讎, 乞令本道, 除去科外人情錢, 詗捉縛打其父之人, 以爲復讎事也。渠父被打, 設有稱冤之端, 則呈訴營邑, 何所不可, 而敢以至猥至屑之事, 無難瀆擾, 已極無嚴, 因其父被打, 贅及他說者, 尤極痛駭, 原情勿施, 自臣曹考律重繩。長城奴二丁, 則請放其上典金必鑑事也。必鑑以師事妖人, 傳授妖言, 惑亂民衆, 掠奪財賂罪, 本道以快正典刑事, 旣已狀請, 則縱奴呼籲, 萬萬無嚴, 原情勿施, 二丁自臣曹考律重勘。南部童蒙尹喆乭, 則以爲, 其父弼壽, 以申萬大擊錚原情書給罪, 被囚捕廳, 乞令放送事也。萬大之構誣舊帥, 旣係重律, 而弼壽之書給原情者, 論其罪犯, 與萬大一而二, 則縱子請放, 尤極無嚴, 原情勿施。靈光幼學金達鉉, 則以爲, 本邑陳良面, 劃付法聖鎭, 鎭則爲利, 邑則爲弊, 乞令仍舊貫之, 以安民心事也。昨年八月宋道煜等, 以此事呼籲, 故本曹以陳良割劃, 設有爲弊之端, 道臣自當據實狀聞, 而朝令纔下, 民籲踵至, 其受嗾吏鄕, 欲售奸計之狀, 萬萬痛駭, 各別嚴勘之意, 草記蒙允, 則到今達鉉之又此煩瀆, 極爲無嚴, 不可以事係民情, 有所容貸, 原情勿施, 自臣曹照法重勘。瑞山幼學文漢德, 則以爲, 渠以前朝名賢江城君益漸十八代孫, 列聖朝受敎內, 其殘孫遠裔, 雖有微賤支庶者, 有勿定軍役之之事, 而渠之族姪宗弼·宗得·景運等三人, 自本郡充定軍役, 乞蒙頉下事也。敢以四件外事, 至煩呼籲者, 極涉猥越, 原情勿施, 自臣曹考律勘處。南部童蒙宋舜民, 則以爲, 其父道煒, 被人構誣, 甲辰定配於光陽縣, 而其父以四代獨身, 只有九十老母, 晝夜呼泣, 願一相見, 乞令放釋事也。取考本曹文案, 則甲辰至月, 其父道煒, 以誣人以賊, 四次衝火於人家罪, 依律定配, 而丁未二月, 因渠鳴金, 伊時判付內允, 誠如是也, 不可但以勿施, 後勿敢籲之意, 嚴飭放送事, 判下, 而又煩天聽, 尤極痛駭。原情勿施, 不可以爲父訟冤, 有所曲恕, 舜民自臣曹考律勘處。南部良女孫召史, 則以爲, 昨年五月, 幼學兪漢五, 以時病身死, 其妻繼痛, 洞里閭家, 借入調病, 故矣夫車福伊, 峻辭防遮, 則以謂凌辱兩班, 照律定配, 已至周年, 而渠舅母, 以八十篤老之人, 未見其子, 病死權葬, 乞令放釋, 俾得掩土事也。罪係凌辱士夫, 赴謫不過周年, 不思懲畏之心, 敢爲呼籲之擧者, 萬萬無嚴, 原情勿施。黃澗幼學金驗碩, 則以爲, 渠祖仁尙, 智略過人, 勇力超倫, 戊申之亂, 生擒熊輔·希良等賊, 功居第一, 而本邑混侵軍役, 卽爲頉給事也。敢以至猥屑極無嚴之語, 肆然瀆擾, 至請頉役者, 揆以民習, 萬萬駭然, 原情勿施, 其罪狀, 照律嚴勘。樂安鄭召史, 爲其夫孫病入老味殺獄稱冤事也。再昨秋, 因鄭女之鳴冤, 再次行査, 因判付同推矣。觀於檢案, 傷痕明白, 詞證俱備, 而致死韓女患癘之說, 屍親滯囚之言, 渠旣以誣罔自服, 則到此獄情昭著, 鐵案已成, 而今又張皇爲說, 縱妻呼籲者, 情狀尤極凶獰, 原情勿施, 鄭女瀆擾之罪, 不可以爲夫訟冤, 置而勿論, 考律嚴勘。東部典僕宋遂鎭, 則以爲, 渠等挽近以來, 人齒繁盛, 近千戶萬餘口之遊食遊衣, 都由於國家罔極之恩, 而方當新設營作隊之時, 泮民中願帶束伍者, 可作二三哨, 無非壯健, 或爲萬一之報, 乞蒙處分事也。泮僕之入屬軍門, 曾無是例, 則敢以猥屑之事, 至有煩瀆之訴, 揆以民習, 誠極無嚴, 原情勿施, 自臣曹考律勘處? 果川良女曺召史, 則以爲, 矣夫金昌元, 龍洞宮願堂, 淸溪山栗園直, 因禮曹及本宮帖文, 差定隨行, 而不避任怨, 恪勤禁斫矣。昨秋山下居民, 十百爲群, 謂以害及衆民, 構訴本官, 照律定配於山淸縣, 矣夫招怨, 本非爲己之私, 卽出奉公之意, 而竟被刑配之律, 極爲冤痛, 卽爲放釋事也。取考徒流案, 則昌元稱以孝昌墓外案山直, 廣占標外諸山, 竝爲收稅, 作拿村閭, 勒稅於去來柴商, 使半千民人, 將至難保罪, 流三千里定配於山淸, 則昌元之當初所坐, 已極通駭, 到配纔過五朔, 縱妻呼籲者, 尤涉無嚴, 原情勿施, 其猥越之罪, 照法懲治。東部鄭氏, 則以爲, 其子厚墩, 昨年八月分, 橫罹潛屠, 定配於旌善地, 因病致死, 乞令其時郞官及禁隷等, 竝爲嚴治, 以洩至冤事也。潛屠犯禁之杖配, 法典所載, 厚墩冒犯屠牛, 到配經年, 因病物故, 而敢稱洩冤, 肆然鳴金, 侵斥法官者, 萬萬無嚴, 所當照法請勘, 而係是命婦, 參酌勿施。中和劉城, 則以爲, 其父德庚, 以白光圭妾金召史, 偸桑籬內之事叱責矣。光圭乘憤突入渠父處, 執石自打, 其頭血出, 揚惡數日往來, 觸風致死, 至於成獄, 乞令分揀事也。此獄前行査, 自歸誣罔, 已成鐵案, 連行同推, 而敢生希覬之計, 縱子煩籲, 極甚猥越, 不可以四件內事, 每每曲恕, 原情勿施, 劉城自臣曹懲治。典僕婢遺腹, 則以爲, 其夫黃興坤, 爲鄭盤奉之打殺, 尙未復讎, 乞令雪冤事也。盤奉以殺獄元犯, 方在推訊, 則取服償命, 自是次第件事, 而不待決末, 徑先呼籲, 極涉無嚴, 原情置之。忠州童蒙崔福慶, 則以爲, 渠之祖先, 以孝廉相承, 九代俱蒙褒旌之典, 而渠祖宗運, 年纔六歲, 乃失所恃, 事父與繼母, 供旨侍湯, 一出誠敬, 及其喪出, 斷脂呼天, 齋蔬哀毁, 極盡禮節, 乞令攸司, 卽爲旌表事也。此等之事, 呈訴營邑, 自該道詳査實蹟後狀聞, 旣有定式, 則渠之呼籲, 不可準信, 原情勿施。淸安幼學朴晉德, 則以爲, 其六代祖承宗, 五代祖自凝, 當光海昏亂斁倫之時, 終始扶護母后, 一不參凶賊廢母之論, 而及至反正之日, 死得其所者, 質諸神明而無愧矣。當時廷議不甚分別, 渾入追奪中, 殘孫末裔, 未得控白, 乞蒙昭雪事也。當初朝家之不爲區別, 可見公議之自有卙量, 則敢以年久之事, 肆然煩籲者, 極涉無嚴, 原情勿施, 晉德自臣曹考律勘處。晉州幼學李正復等以爲, 晉州·昆陽·固城·泗川四邑濟民倉, 都在於泗川地, 以陸路言之, 則或八九十里, 或百有餘里之峻嶺, 以水路言之, 則或過數十險津, 或有二百餘里之越海, 冬雪鯨浪, 船隻覆沒, 人口死亡, 穀物沈失, 牛馬致斃, 其他公然退還狼藉, 散穀則一石所納, 乃費二十餘斗, 一石所受, 只爲五六七斗, 一床食價, 又至一斗, 許多民人, 積自留連者, 俱是置倉於他邑之致也。各該邑船泊處, 有勝於泗川者, 移轉水路, 亦順於四川者, 則泗川今設之倉, 實是殺人之穽, 乞令一依順天·羅州濟倉例, 以其穀數, 各付該邑事也。事非四件, 而猥越呼籲之狀, 誠極無嚴, 自臣曹考律勘處, 至於本事, 果如所訴, 則係是民瘼, 從長決處之意, 分付道臣。延豐幼學崔碩弼, 則以爲, 渠父萬昌, 卽揚武功臣, 而前行原春道觀察使蓋國之六世孫也。粵在戊申, 其父萬昌, 仗劍倡義, 招集人丁, 拒賊鳥嶺之際, 乃發私儲, 積日饋飼, 又設奇計, 捉納魁賊, 及夫論功之日, 自本縣報巡營, 而所謂持公文者, 溺死於中路槐江, 未及登聞, 追後指名牒報, 而未暴其功, 故公然見漏於一等, 只有三等錄券, 一依錄券中傳旨辭意, 乞蒙追贈事也。果如所訴, 則其父萬昌之節義, 雖極嘉尙, 流漏於再昨年本道査啓, 則以渠呼籲, 有難準信, 令本道詳査狀聞後, 稟處。安東李重祖, 則以爲, 其曾祖玄逸, 以乙巳九月應旨疏中處變之辭, 被罪名, 而委官南九萬讞辭曰, 其疏本意, 非出於謀害侵逼, 辛巳疎決時, 吏判李畬之言曰, 玄逸本情, 非謀害, 領相崔錫鼎之言曰, 若以謀害爲罪, 則實非本情。自上有敎曰, 李玄逸之事, 非出於謀害中宮, 卽許以全釋。辛卯冬, 又有復官之命, 而旋被臺繳中寢, 庚子十二月, 首命復官, 而政院覆逆, 辛丑六月, 又命給牒, 而廷議繼請還收。先大王朝, 其從祖栽, 特授掌樂主簿, 其祖KC01870, 又授永禧殿參奉, 若使其曾祖, 果有罔赦之罪, 則豈使其親子姪, 收用不拘乎? 特許伸雪, 還復官爵事也。玄逸之疏語絶悖, 後世之公議至嚴, 則不自畏蹙, 至請伸暴者, 事極猥越, 跡涉放恣, 不可以事係四件, 有所曲恕, 原情勿施, 自臣曹考律重勘。楊州寡女崔召史, 則以爲, 渠父益男至冤之狀, 更瀆天聽, 特蒙蕩滌之典事也。益男之罪犯至重, 先朝處分, 至爲嚴截, 則稱以呼冤, 屢煩天聽者, 無嚴極矣, 猥越極矣。原情勿施, 還逐本鄕。江華府族親衛李東相, 則以爲, 渠之亡兄東機, 爲人被打, 竟至橫死, 不勝至痛。昨夏擊錚, 幸蒙行檢按査之判付, 而詞證分明, 傷處眞的, 韓三昌之打殺, 明若觀火, 而三昌締結官府, 粧撰構誣。噫, 彼法官, 惟事舞弄, 殺一不辜, 視若尋常, 乞令攸司, 嚴加究覈, 俾洩幽明事也。東機昨夏, 以此事擊錚, 因判下行査本道, 査官之論報, 道臣之跋辭, 備陳顚末, 獄情毫無可疑, 臣曹覆啓中判下辭意, 明竝日月, 被逮諸囚, 俱已酌處, 則稱以復讎, 敢以此等無嚴之說, 侵斥官長, 不有餘地。如許頑民, 決難容貸, 原情勿施, 其罪狀, 照法重勘。仁川成性乭, 則以爲, 金卜老味, 乘醉凌辱渠父上典朴義揆, 則義揆使渠父三特及其婢夫車加應伊金, 笞治卜老味七度矣。厥後十日, 卜老味以暑瘧致斃, 而朴義揆定配蒙放, 車加應伊金, 亦被放釋, 渠父則牢囚十四年, 受刑三百餘次, 乞令處決事也。此獄傷處分明, 詞證丁寧, 旣經審理, 已成鐵案, 無容更議, 而如是呼籲者, 雖情係爲父, 跡涉猥越, 原情勿施, 自臣曹考律勘處。沃川良人鄭履容, 則以爲, 渠父晢吾, 與崔益男, 不幸知面, 而與其弟伯男, 有所爭詰矣。伯男以其宿憾, 誣引渠父, 含冤就死後, 益男亦以已絶之間, 昭昭納供, 乞蒙伸暴之典事也。晢吾之負犯至重, 先朝處分何如, 而乃敢以伸暴等說, 肆然瀆擾, 至煩天聽, 紀綱所在, 萬萬無嚴, 此等猥越之類, 不可以事係爲父, 有所曲恕, 原情勿施, 自臣曹從重懲治。驪州船人李聖福, 則以爲, 渠父甲同, 昨年五月, 以本邑大同上納時, 船人弊瘼事, 有所上言, 本邑以渠父之誣罔天聽, 嚴刑定配, 乞以渠代配, 大同亦依他邑例, 均蒙一視之澤事也。渠父之當初所坐, 旣是四件外, 猥越呼籲之罪, 則刑配屬耳, 不思懲畏, 外托宥父之請, 潛售設弊之習者, 萬萬痛駭, 原情勿施, 考律嚴勘? 大同驛十三站驛卒鄭俊哲, 則以爲, 本驛所管, 安州站馬位畓二十結零, 自歸豈失之弊一也, 宣川馬位畓七結零, 莫可收拾之弊二也, 龍川九十餘石落, 爲官軍輩盜賣之弊三也, 中和等各站田畓, 漸削之弊四也, 所負營債, 已過五萬五千六百兩, 而逐年添加, 以致債上之債, 替徵隣族之弊五也, 渠等本驛, 卽赴燕直路, 驛役浩繁, 非比他道, 甚至雇人貰馬之弊六也, 草料夫馬供喂之節, 以如干給料, 如例供億, 方在難支之弊七也。七條弊瘼, 如右所陳, 而當此本道大歉之時, 飢死丁寧, 特蒙天恩事也。係是四件外事, 而有此煩籲者, 極涉猥越, 自臣曹考律勘處, 而至於七條所陳, 誠如所訴, 則宜有矯救之道, 分付道臣, 從長釐革, 俾安其業後, 使之狀聞, 何如? 傳曰, 智禮金泰亨事, 猥越之罪科治。渠先忠毅公金文起之事蹟, 與六臣匹美, 人孰不知? 猥濫自猥濫, 記念自記念, 渠果是直孫或奉祀, 豈可使之名編軍保, 不齒人類乎? 詳問更爲草記。田民還屬一款, 付之道伯, 詳査決處。春川僧泰性事, 極爲猥越, 嚴刑, 該道殘寺充役。泰安柳贊壁事, 樓院崔南碩事, 豐川呂善籥事, 竝依施。報恩寺僧敬心等事, 旣有昨年該曹啓下, 査實釐弊之關文, 則渠所上言, 未必猥濫, 更令伊時擧行有司堂上, 往復該道, 從長釐弊, 更有頑民拒納之弊, 使渠輩來訴畿營, 隨現痛治, 以爲如前守護之地。西部婢起梅事, 依施。海州崔二才事, 渠兄惡才之以官隷, 侵虐罪囚, 甚至有殺越之變, 尙未用法, 卽失刑之大者, 何敢如是呼籲? 不卽取服, 縱弟上京, 莫非該倅不能事事之致, 惡才則令道伯嚴飭推官, 除尋常嚴刑, 欺速捧結案, 二才則自本曹, 爲先各別嚴刑, 下送該道, 別加重治, 以懲民習, 以慰死冤。東部孫良澤事, 昨年京兆草記決處之後, 又敢呼訴, 設置詞訟衙門, 此等事, 不卽決給, 如許訟官, 將焉用哉? 此後更以此事登聞, 卿等亞·三堂, 爲先重勘, 以此知悉。大丘徐亨曾事, 下送該道, 嚴刑懲勵。仁川鄭殷達事, 如渠無識之類何足責? 斯速放送。林川權相彦事, 依施。安邊崔鳳三事, 下送該道決處。長城奴二才事, 南部尹喆乭事, 靈光金達鉉事, 竝依施。瑞山文漢德事, 雖似猥越, 此輩上言頉免之習, 自昔已然, 便成前例, 分付頉給。南部宋舜民事, 孫召史事, 竝依施, 歸葬不給暇一款, 孫召史處査問, 一依法典施行。黃澗金驗碩事, 依施。樂安鄭召史事, 嚴刑懲勵。東部宋遂鎭事, 依施。果川曺召史事, 萬萬痛惡, 渠夫金昌元之稱以墓所山直, 侵虐果廣之民, 民不堪苦, 昌元生出獄門, 亦云幸免, 焉敢縱妻呼籲? 昌元令配所道臣, 捉來嚴刑還配, 曺召史亦爲嚴刑懲勵。東部鄭氏事, 中和劉城事, 典僕婢遺腹事, 忠州崔福慶事, 淸安朴晉德事, 晉州李正復事, 竝依施。延豐崔碩弼事, 令道伯詳考文蹟, 實則狀聞, 否則置之。安東李重祖事, 楊州崔召史事, 江華李東相事, 竝原情勿施, 卽送本鄕。仁川成性乭事, 原情勿施。沃川鄭履容事, 渠父晢吾之毋論與伯男有宿憾與否, 事關先朝處分, 且非大霈之時, 豈敢輕易議到? 不可以四件內事仍以置之, 參酌決杖, 懲勵放送。驪州李聖福事, 自本曹嚴治放送。大同驛卒鄭俊哲事, 係是民隱, 已經道伯者, 亦莫不曰爲弊滋甚, 令道伯拔例留意, 從長論理狀聞事, 分付。因此思之, 撥路釐弊事, 屢煩飭敎, 使之成出節目, 而廟堂尙不擧行, 雖因其間時任大臣遞易而然, 擧行慢忽, 難免其責, 有司堂上推考, 斯速擧行事, 令政院申飭有司諸堂處, 可也。



17 제목없음 1796-08-09 정조 20년 8월 9일 

승정원일기 1766책 (탈초본 93책) 정조 20년 8월 9일 신사 20/22 기사 1796년  嘉慶(淸/仁宗) 1년


○ 掌令朱重翁疏曰, 伏以, 臣以螻蟻微蹤, 猥蒙聖眷, 祗緣上天之隨處覆燾, 糜粉難酬, 而戀主微誠, 狗馬亦有, 臣亦有一分知覺, 豈無攢手感祝之心也哉? 敢以螢爝之微, 仰補日月之光。伏願聖明垂察焉。臣是草野庸陋, 見聞不博, 雖未知京鄕間, 曾有幾人之如此, 而以臣平日所稔知欽歎者言之, 吾東木綿之出, 始自文益漸, 取核於萬里遐荒, 冒禁藏管而來, 先種花階, 待其蕃衍, 而敎民耕種, 創機爲制, 手作引絲之車, 俗所謂文來者是也。若言其播種之功, 則與后稷之播穀, 無異也。若言其作車之方, 則與神農之作耒, 一般也。況其倡正學扶吾道之功, 又與鄭夢周諸賢竝稱, 而際聖朝受命之初, 丕變我衣毛被草之俗, 使衣章一新, 煖之以綿裘縕袍, 顧其爲功也, 實是萬世永賴者也。洪惟我太宗大王, 封之以江城君, 命爲不祧之廟, 亦粵我世祖大王, 追封爲富民侯, 旌其閭曰, 高麗忠孝衣民功臣富民侯文益漸之閭。逮我先朝戊寅, 御春塘臺, 指示雲幕, 而下敎于入侍大臣曰, 文氏之功大矣。因命搜訪其奉祀孫錄用, 而因循未果。我殿下御極以後, 屢下致祭之命, 而賜額於兩院, 前後恩典, 可謂蔑以加矣。惟其報功之道, 猶有所未盡者, 蓋功者, 或有一時之功, 或有百年之功, 顧此文益漸之功, 均被吾東方絲身之類, 雖至千百世而無窮期者矣。惟是我國之人, 故雖不得與論於農蠶之祀, 而其廟之不祧, 已有聖祖之特恩, 而今其後孫零替, 無以奉香火, 其在思其功, 尙其人, 誠爲矜惻。伏願殿下, 特加存恤之典, 使今日衣綿之人, 咸知聖朝懋本報功之德意焉。龍岡之金景瑞, 卽萬夫之特, 而千載之烈也。語其功則當倭奴猖獗, 法駕西巡之日, 賤兵充斥於箕城, 而倭酋小西飛, 智勇且鷙, 擁精兵肆屠掠, 雖以天將之威, 屢戰不利, 人莫敢嬰其鋒者, 入據淸華館, 施鈴帳, 據椅坐宿, 張目按劍, 人不敢近其前。惟景瑞尺劍飛入, 能斫其頭, 使群酋氣奪, 遂成掃蕩巢穴之功, 中興赫業, 實基於此。此其宣武諸勳中, 最爲雄快之蹟也。語其節則當戊午深河之役, 受制於賤臣弘立, 誤落賊中, 而六年瀋獄, 不改中郞之苦節, 畢竟遼街, 終作柴市之忠魂, 雖或以一死之後於金應河爲言, 而後死之許遠, 何愧於張巡? 且況五坡之不死, 罕光文山之貞節, 則見墮奸賊之譎中, 被執虜營, 何損於景瑞乎? 至若彌山之馬畜, 誘之以利, 新城之白刃, 脅之以威, 而終始一節, 暴心事於密疏, 振義聲於强虜, 則直千古一人耳。其忠其節, 惟我聖上, 洞燭無餘。特依金應河例, 旌之以綽楔, 又賜之以易名之典, 隱卒之恩, 可謂蔑以加矣。惟彼西土人士, 猶有齎咨而抑鬱者, 蓋高句麗之乙支文德, 我朝之金良彦, 俱以西土之人, 一則以其立勳於滻水[蕯水]之戰, 一則以其殉節於丁卯之亂, 而立祠竝享於箕城, 名之曰忠武祠, 而惟此景瑞, 獨無俎豆矜式之所, 斯可謂聖朝之欠典也。以臣愚見, 其在激勸忠節之道, 宜有加等於逖矣之土, 以此景瑞之巍勳壯節, 竝享於忠武祠, 則褒忠奬節之方, 尤有光焉。伏念凡有勳勞於王室, 而朝家崇奬之典, 一或未盡, 則豈無一世齎咨抑鬱者乎? 臣所以不避猥越, 瀆撓天聽。伏乞聖明, 勿以人微而廢言焉。臣無任云云。省疏具悉。兩件條陳, 令該曹稟處, 爾其勿辭察職。



18 제목없음 1796-08-10 정조 20년 8월 10일 

승정원일기 1766책 (탈초본 93책) 정조 20년 8월 10일 임오 29/33 기사 1796년  嘉慶(淸/仁宗) 1년


○ 吏曹啓目, 粘連觀此司憲府掌令朱重翁上疏, 則以爲吾東木綿之出, 始自文益漸, 取核於萬里遐荒, 敎民耕種, 創機爲制, 手作引絲之車。況其倡正學扶吾道之功, 又爲鄭夢周竝稱, 先朝戊寅, 命搜訪其奉祀孫錄用, 而因循未果。今其後孫零替, 無以奉香火, 其在思其功尙其人, 誠爲矜惻, 特加存恤之典亦爲白有臥乎所, 臺疏旣以文益漸奉祀孫錄用, 明有先朝戊寅受敎爲言, 故溯考臣曹文跡, 初無差漸後孫收用之命, 臺臣所論, 有何考據是白乎喩, 況其後孫之世免軍役者, 在朝家存恤之典, 實出尋常敎是乎, 則如是煩請, 事涉干恩, 置之爲白乎旀, 金景瑞竝享, 事係祀典, 令禮曹稟處, 何如? 判付啓, 依允。



19 제목없음 1803-10-12 순조 3년 10월 12일 

승정원일기 1872책 (탈초본 99책) 순조 3년 10월 12일 계유 16/20 기사 1803년  嘉慶(淸/仁宗) 8년


○ 掌令李燮疏曰, 伏以臣, 卽遐土之一賤品耳, 猥荷先朝罔極之恩。 釋褐之日, 天褒鄭重, 至被賜樂之盛典, 寵光所被, 德意隆摯, 每一追思, 感淚如泉, 而門寒跡冷, 重以衰朽, 榮途一步, 夢想不到, 迺者掌憲除命, 有隕自天, 臣誠惝怳隕越, 罔知攸措。 天牌之下, 不敢荐違, 冒沒出肅, 一再詣臺, 只出於仰謝洪恩, 俯伸微忱之計, 而夤緣蹲據, 久玷名器, 非但臣義分之所不敢出, 上辱淸朝之官方, 下招四方之嗤點, 非細故也。 且臣年迫桑楡, 疾病沈痼, 見方呻委旅邸, 蠢動無路, 伏枕惶懍, 冞增死罪, 玆敢略入文字, 冒控血懇於天地父母之前。 伏乞聖明, 曲加鑑諒, 亟遞臣非分之職名, 以幸公私, 千萬幸甚。 臣方丐免, 何敢以見職自居, 且臣聞見寡陋, 蹤跡齟齬, 亦何可開口論事, 而忠愛之悃, 根於秉彝, 略控狂瞽之說, 以備蒭蕘之擇, 惟聖明, 垂察焉。 嗚呼, 國之所以爲國, 惟名義紀綱是已, 故自古明王, 莫不以崇名義振紀綱, 爲出治之本, 而惟我先大王, 二紀治平, 功化郅隆, 彰善癉惡, 民志壹而土趨端, 雷奮風飛, 大綱擧而衆目張, 此豈非我殿下之所繼述者哉? 今殿下上荷太母之光覆, 下仗廊廟之夾贊, 義理大明, 邪穢廓淸太平萬世, 自今伊始, 而夫何近日以來, 大小恬憘, 百隷怠慢, 凡百擧行, 任其因循以言乎名義則朝廷之氣節, 漸就委靡, 士夫之言論太沒模棱, 以言乎紀綱, 則惡少之變怪相續, 閭巷之僭踰無節, 此豈國家之細憂也哉? 噫嘻, 痛矣, 再昨年邪逆之獄, 實是窮天地亘古今所未有之大變怪也。 每一念之, 骨靑膽掉, 爲今日嚴防之道, 當如斬釘截鐵, 窮搜旁詗如有遺種之漏網, 則劓滅無育, 俾無易種, 然後方可以永絶滋蔓, 庶無後患, 而日月稍久, 法禁漸弛, 畿沿·湖右, 或有醜類之潛煽, 秋曹捕廳, 間多邪孽之見捉, 此而置之, 則何變之不有耶? 臣謂亟令廟堂, 更飭京外申明統戶之規, 芟絶更熾之患宜矣。 式年東堂, 專取能講之儒, 俾赴會講, 卽古制也。 今年東堂, 有文而無講者, 擧皆願赴, 傳說不美, 故向來一儒臣, 先事筵白, 至出擧條 及夫科榜之出, 外邑雄經之生, 百不一參, 京華無講之儒, 率多冒占, 臣謂當該試官, 竝施譴罷之典, 以嚴科規宜矣。 抑臣又有所訝惑者, 徐鼎輔之不赴向來殿試, 何所執也, 主試者旣遭人言, 則被選者之引嫌, 固不害爲士大夫發軔律己之義, 而第伊時人言, 全沒把捉, 泛論將來, 則實無拶逼於自己, 苟如鼎輔之處義, 則前後被選者, 擧皆引嫌乎, 從古主試之囫圇被論者, 指不勝屈, 而未聞被選者之引義自靖, 此路一開後弊難言, 此亦不可不詢于廟堂, 一番嚴飭者也, 故忠宣公臣文益漸, 卽當時之蘇武, 而東方之后稷也, 奉使上國, 仗節還朝, 忠義之炳烺, 氣節之卓異, 與夫移種木綿, 衣我東民之功, 備載於世宗朝褒賞致侑之傳敎及先正臣李滉·宋時烈發揮撰述之辭, 臣不必更事疊床, 而若稽, 我太宗盛時, 追念厥功, 屢加褒賞, 策勳贈秩, 靡不用極。 又賜田結, 立廟舊墟, 俾延其祀, 第以世代之玄遠, 屢經兵燹, 派裔散落, 支嫡莫詳, 祀禮之闕不知在於何時, 而往在先朝庚戌, 因其後孫之上言, 特軫不祧之盛典, 酬功報本之命, 譪然於絲綸之間, 特下議啓之命, 而賊臣濟恭, 仍爲掩置, 至今爲聖代之闕典, 嗚呼, 立廟主祀, 世世無替, 則其所以敦尙孝理, 修擧曠典, 導吾民追本之誠, 廣朝家報功之典, 有足以光聖德而敦末俗矣。 臣謂特令該曹而議啓, 以卒先大王遺志焉。 臣無任云云。 答曰, 省疏具悉。 東堂初試試官罷職事, 此非覆試, 則試官何以知能講與否而取捨? 爾言無乃傳聞之誤乎? 不允。 徐鼎輔事, 人之處義, 有過不及, 自古已然, 非他人所可知, 爾言無或太多事乎? 文益漸不祧事, 從當有量處之時, 爾其勿辭察職。



20 제목없음 1808-05-28 순조 8년 5월 28일 

승정원일기 1946책 (탈초본 103책) 순조 8년 5월 28일 계해 15/15 기사 1808년  嘉慶(淸/仁宗) 13년


○ 戊辰五月二十八日申時, 上御誠正閣。 坐直承旨, 與玉堂上下番, 持小學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右副承旨宋知濂, 假注書李仁迪, 記事官鄭元容·李憲琦, 校理金魯應, 持小學第二卷, 修撰徐鼎輔, 持小學第二卷, 檢校直閣洪奭周, 以次進伏訖。 上開卷命讀, 魯應, 讀自禮記曰父命呼, 止雖父母沒不衰。 上曰, 下番讀之。 鼎輔, 讀自子甚宜其妻, 止必請於舅姑。 上曰, 左承旨讀之。 文會, 讀自適子庶子, 止號泣而隨之。 上曰, 右副承旨讀之。 知濂, 讀自父母有疾, 止可謂孝矣。 上曰, 閣臣讀之。 奭周, 讀自內則曰父母雖沒, 止不造燕器。 上曰, 文義陳之。 魯應曰, 此孝子之疏節也。 註以立身行道, 以顯父母爲至孝, 帝王之孝, 與匹庶有異, 必也如武王·周公踐位行禮, 善繼善述, 宗廟享之, 子孫保之, 然後方可謂達孝。 惟我列聖朝治法政謨, 皆從一孝字, 推本, 而以御製序文觀之, 小學一部, 卽我朝家法, 殿下今日繼述之道, 亦無過於服膺是書, 而一遵列聖之謨訓, 則斯可謂殿下之至孝, 惟殿下念哉。 上曰, 當留念矣。 下番陳之。 鼎輔曰, 今此孝子之疏節一章文義, 上番已盡仰奏, 而衣服飮食起居凡百, 皆莫非孝之疏節也。 至若孝之至者, 詳見於大註,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卽孝之大節也。 大抵孝爲百行之源, 天下萬事, 何莫不推孝以及, 而修身齊家治國平天下, 皆本於孝之一字, 而帝王之孝, 與匹庶有異, 此宗社之托, 所重在焉故也。 是以, 德敎加於百姓, 而能保其社稷, 然後始可謂之達孝也。 孝之大小輕重之別如此, 而聖人之於孝之疏節, 猶不敢一毫不用其極, 而況孝之大者乎? 凡看文義, 貴在由淺而入深, 雖以此章推之, 先從孝之疏節, 必推廣而擴充之, 以至乎孝之大節處, 而躬行心得, 則三代之治, 不出於此, 伏願體念焉。 上曰, 當留意矣。 上曰, 父沒而不能讀父書, 母沒而不能飮杯圈, 何也? 魯應曰, 詩·書, 父之所嘗誦習者, 而手澤留焉, 故不忍讀也, 杯圈, 母之所嘗飮食者, 而口澤存焉, 故不忍飮也。 上曰, 非但書冊·杯圈, 外此亦皆如是耶? 魯應曰, 然矣。 上曰, 曾子曰, 孝子之養老也, 以飮食忠養之云者, 與孟子所言口體之養, 有異焉, 何也? 魯應曰, 孟子之所以戒口體之養者, 爲其欠於養志, 而但知養口體者發也。 此章則旣先之以樂其心, 不違其志, 則其能養志, 自可見矣。 飮食之於養老之節, 又不可不重, 則結之以忠養, 此也。 上曰, 醫不三世, 不服其藥, 如有不三世而良於醫術者, 亦可不服歟? 魯應曰, 醫必須三世者, 醫至於三世, 則其傳家術業, 必醇熟謹愼, 不至於妄試不當之劑, 故世醫然後方可以服其藥, 而雖自己之病, 猶不可不愼, 況父母之病乎? 然其人也可愼, 其術也極精, 則雖非三世, 亦可以服其藥, 此章所訓, 特言其愼重之大義耳。 上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如有所當改者, 必逾於三年然後可改歟? 魯應曰, 無改, 卽不忍改也, 槪指可以改可以未改者耳。 若武王, 承文王之謨, 則雖終身無改, 可也, 宣王繼厲王之後, 有不得不急改者, 則何待三年也? 上曰, 閣臣之見, 何如耶? 奭周曰, 三年無改之說, 論語集註及或問, 皆已備言之矣。 使父之道, 皆合於義, 則其在繼志述事之道, 固當終身服行, 豈但三年而已哉? 若其一日不改, 有一日之害, 則以哀痛惻怛之意而改之, 正所以蓋父之愆而成父之美, 又何可遲待三年之久哉? 上番所奏, 儘得經旨, 而宋司馬光, 當元祐之初, 盡改靑苗助役之法, 或以三年無改爲言者, 光, 答以爲太皇太后, 以母改子, 非以子改父云, 而朱子謂其失言, 蓋如靑苗助役之法, 貽害於社稷生靈, 固不可膠守於三年無改之訓也。 上曰, 以後世論之, 改何許事而可也? 奭周曰, 苟不能明理, 則誤引聖賢之訓, 以害於事者多矣, 此所以學問之功, 必以格致爲先者也。 上曰, 祭之日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旋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嘆息之聲, 何謂也? 魯應曰, 當祭而見乎其位, 聞乎其容聲, 出戶而聞乎其嘆息之聲者, 蓋自家之心, 卽祖考之心, 精誠所到, 心在神在, 宛若覩聞於耳目, 則此所謂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者也。 至於祭畢而愾然聞嘆息之聲, 必居於末句者, 味其文勢語脈, 其次序, 自然如此也。 上曰, 王制曰, 大夫祭器不假, 祭器未成, 不造燕器, 但云大夫者, 何也? 魯應曰, 此章祭器一事, 只擧大夫而不及於諸侯·士者, 諸侯邦君, 不可以假貸議到也, 士則官卑祿薄, 多有貧不能辦者, 故所以不及, 而惟食采之大夫, 方可責之以假也。 上曰, 祭義曰, 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於雨露旣濡則言如將見之, 於霜露旣降則不言如將失之, 此可以互見者耶? 魯應曰, 履者踐履之謂也。 履霜露而有悽愴之心者, 爲其當萬物衰落之時, 自然有傷感之意, 故曰非其寒之謂也, 履雨露而有怵惕之心者, 方春發生, 萬物回蘇, 則皇皇如求之誠, 若將復見矣。 本註, 雖以如將失之與如將見之, 一句對說, 而其視上文執玉奉盈, 如將失之之意, 則恐似有間焉。 蓋彼則直言其誠敬之或恐失之也, 此則但明上下段關節之互言耳。 奭周曰, 方氏之說節節對言, 固可見作文互言之法, 而臣意則有不然者。 此章所言, 蓋在父母旣沒, 聲容永閟之後, 故有如將見之之言, 若曰如將失之, 則於文義有不襯矣。 且上章所謂如將失之, 則承執玉奉盈而言其不敢失墜之意, 與此章不同也。 上曰, 父母有疾, 冠者不櫛, 行不翔言不惰, 琴瑟不御, 食肉不至變味, 飮酒不至變貌, 笑不至矧, 怒不至詈, 疾止復古, 何謂也? 魯應曰, 言不惰者, 言不及他事也, 食肉不至變味者, 食不至飫口也, 飮酒不至變貌者, 飮不至醺顔也, 笑不至矧者, 笑不露齒根也。 上曰, 父母有疾之時如此, 則無疾之時, 肉至於變味, 飮至於變貌可乎? 魯應曰, 此章所云復古者, 但言其復其常節耳, 至如過飽過醉, 在所當戒, 爲人子事父母者, 固不當如此也。 上曰, 君有疾飮藥, 臣先嘗之, 親有疾飮藥, 子先嘗之, 何也? 魯應曰, 臣子之於君父, 凡事靡不用極, 而藥亦有苦口難堪之味, 則爲臣子者, 固當先嘗, 以盡其愼重之義也。 上曰, 三諫而不聽, 則號泣而隨者, 何也? 魯應曰, 父母有過, 則子不可不諫, 諫而不聽, 則亦不可不起敬起孝, 悅而後復諫, 而諫而不入, 至於屢諫而終不得回聽, 則號泣隨之之外, 無他道焉。 蓋自古君臣則有可去之義, 父母天屬, 本無可去之義故也。 上曰, 閣臣陳之。 奭周曰, 三諫云者, 蓋擧成數而謂之三也。 父子之道, 旣無可去之義, 而孝子之心, 惟恐其父之陷於過惡, 則其所以起敬起孝, 靡不用極者, 又奚但止於三而已哉? 或下氣怡色, 以導其志, 或流涕號泣, 以動其心, 惟當盡其在吾之誠, 期於必聽而已。 上曰, 諫而不逆, 旣云不逆, 則顧安得爲諫乎? 魯應曰, 父子天性之親, 常主於恩, 與君臣有異, 故禮記亦曰, 君臣有犯無隱, 父子有隱無犯, 無犯之意, 卽不逆之謂也。 上曰, 子有二妾, 父母愛一人焉, 子愛一人焉, 由衣服飮食, 由執事, 毋敢視父母所愛, 雖父母沒不衰, 何謂也? 魯應曰, 孝子, 以父母之心爲心, 故父母所愛, 亦愛之。 雖以下章子不宜其妻, 父母曰, 是善事我者, 子行夫婦之禮, 終身不衰之語觀之, 二妾中, 父母所愛者, 尤重於己之所愛者, 明矣。 上曰, 父母之所愛, 亦愛之, 則郭巨之欲埋其子, 抑又何也? 魯應曰, 郭巨親老家貧, 甘旨之供, 竭力以奉, 而母常減食與孫, 故巨憂其子奪母膳, 至於欲埋其子, 其心雖切於愛親, 其事則非常道也。 奭周曰, 郭巨, 閭巷間人也, 常人之情, 孝多衰於妻子, 而郭巨, 能以奉親之心, 割其愛子之情, 故古人或有稱道之者, 而若以君子之道論之, 則孝於其親者, 不敢失妻子之歡心, 況於棄其子乎? 雖謂之無識, 可也。 是以郭巨之事, 載於三綱行實, 而先朝命撰五倫行實之時, 特命削去不錄, 以其不可爲訓故也。 上曰, 適子·庶子, 祗事宗子·宗婦, 雖貴富, 不敢以貴當, 入宗子之家, 雖衆車徒, 舍於外, 以寡約入, 不敢以貴富, 加於父兄宗族, 何謂也? 魯應曰, 適子, 小宗之長子, 庶子, 通稱支子也, 妾子亦在其中矣。 至於宗子·宗婦, 則大宗之嫡長也, 凡諸小宗·支派之所當敬事也, 則不敢以己之富貴, 加於宗子·宗婦, 而又不敢以加於諸父·諸宗也。 上曰, 舅姑使冢婦則曰毋怠, 使介婦則但稱毋敢敵耦等語, 而不及毋怠, 何也? 魯應曰, 冢婦旣承舅姑之命而任事, 則不敢恃舅姑之愛而怠慢者, 固其宜也。 至於介婦·衆婦也, 而與冢婦, 分有尊卑, 則奉舅姑之命, 其不敢敵耦於冢婦, 亦其分也。 旣云不敢敵耦, 不敢竝行, 則毋怠自在其中, 故不言矣。 上曰, 祭統曰, 夫祭也者, 必夫婦親之, 所以備外內之官也, 官備則具備, 何謂也? 魯應曰, 男子齋於外, 思其居處志意, 主婦處於內, 潔其粢盛蘋蘩, 然後方可謂內外之官備, 而官備然後, 祭具亦從以無不備矣。 上曰, 是故, 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 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愨則著, 著存不忘乎心, 夫安得不敬乎, 何謂也? 魯應曰, 不忘乎目, 不絶乎耳, 不忘乎心, 所謂致愛則存也, 上文之見乎其位, 聞乎其容聲嘆息, 所謂致愨則著也。 上掩卷, 仍命玉堂先退, 魯應等退出。 上曰, 留院公事入之。 出傳敎  仍命持入, 可也。 賤臣, 承命持入。 又敎曰, 留院公事, 盡爲持入也。 賤臣, 承命出, 還入奏曰, 無公事矣。 知濂, 讀公事訖, 命書判付。 又命文會書傳敎曰, 未下直閫帥守令, 皆令不多日內辭朝。 又敎曰, 向者李晩昇, 有來待之敎, 而在外云, 故置之矣。 今則上來乎? 知濂曰, 尙未上來矣。 上曰, 卽令斯速上來, 微稟後使之來待, 可也。 知濂曰, 儒疏伏閤者, 有二人, 一則海西儒生, 以高麗名臣文益漸書院請額事也, 一則方外儒生, 以端廟朝名臣朴忠元寧越彰節祠請配事也。 文益漸賜額院宇, 旣在於嶺南·湖南, 則今此儒疏, 請額於海西所建之院宇者, 係是疊設, 有關朝禁, 朴忠元追配事, 月前儒疏, 大臣已有稟處者, 而今又疏籲, 自下不敢遽然捧入, 何以爲之乎? 上曰, 一則院宇疊設, 旣係禁令, 一則大臣筵奏未久, 竝卽曉諭退送, 可也。 仍命退。 承史·閣臣, 以次退出。


21 兵批의 관원현황1830-09-15 순조 30년 9월 15일 

승정원일기 2258책 (탈초본 114책) 순조 30년 9월 15일 경오 18/32 기사 1830년  道光(淸/宣宗) 10년


○ 兵批, 判書南履翼進, 參判柳河源入直, 參議李渭達, 參知金啓淵病, 行左承旨韓義運進。 以趙貞喆爲知事, 姜渼·洪鳳運·廉在彦爲僉知, 李熙輔爲宣傳官, 安性淵爲內禁將, 趙存奎爲兼司僕將, 李配浩·李潤俊·金始鳴爲五衛將, 李羲肇爲曺司衛將, 慶恒運爲忠翊將, 李治夏·徐得寶爲慶熙將, 李㙽爲文兼, 宋得鼎爲右捕從, 李復鉉爲守門將, 申紈爲順天營將, 洪羲祿爲KC00032(갈 초두 밑에 더할 가 밑에 새 을)波知僉使, 崔弘良爲古今島僉使, 李廷大爲寅火堡萬戶。 訓鍊判官加設單柳相鼎, 副護軍金相謨·文益占, 副司果單尹希大, 前營將梁宣洙, 今降禦侮事, 承傳。



22 제목없음 1885-09-29 고종 22년 9월 29일 

승정원일기 2940책 (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9월 29일 갑자 23/23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 方外儒生洪在誠等疏曰, 伏以報崇儒賢, 聖王務治之本, 尊慕道德, 後學繼聖之源。 是以, 列聖朝右文之化, 必先於斯。 雖或有一行一節之士, 猶能奬其德褒其功, 逮至我殿下, 聖學日躋, 文物賁闡。 文烈公趙憲·文敬公臣金集, 竝擧從享文廟之典, 八域含生, 莫不蹈舞於作人之化。 而苟或道德學問, 樹風聲於百代, 節行忠孝, 作楷範於一世者, 語其蹟則不但記之於太常, 論其烈則不止祭之於里社, 而尙未躋配於聖廡, 其國典之欠缺, 士林之嗟惜, 當何如哉? 此臣等所以相率而呼籲者也。 竊伏念麗季儒賢文靖公臣李穡·忠宣公臣文益漸, 學問之純粹, 淵源之嫡傳, 爲東方儒宗, 爲後學標準。 請以國乘之所載, 先輩之所與, 列聖朝所奬崇者, 略擧其實, 以備睿鑑焉。 臣等, 謹按文靖公臣李穡, 當麗末, 義理晦塞, 邪說奔騰, 釋佛之弊, 彌滿一國, 滔天之禍, 浮於洪水。 先生於頹波之中, 屹若砥柱, 以衛正爲實行, 以闢邪爲己任。 禁絶僧徒, 請行三年喪, 明伊·洛之學, 屢擧抗章。 此則斥異端·復古禮·崇儒術而沿源乎斯文, 補助於當世者大矣。 我東諸賢, 皆以先生, 爲道學性理之宗, 而先正公臣文成公李珥·文元公金長生, 故相臣文靖公尹斗壽·文忠公閔鼎重·文簡公洪命夏, 推重欽慕, 俱極讚頌, 先生之眞行實德, 非後人所可議到也。 嗚呼, 先生之被誣, 緣於史官之猜嫌, 目以擗佛不嚴·學術不精·佛亦聖等說, 而黜享聖廡。 此三條說, 考諸文獻, 一無可徵, 實爲覓疵而難得者也。 臣等請援史冊而辨白之。 麗史恭愍王卷有云, 先生不拜佛, 先生疎略有云, 新創之寺, 竝令撤去, 僧徒直充軍伍, 此乃擗佛不嚴者乎? 又於先生文集中詩有云, 孟氏闢楊·墨, 其功配三才, 傷哉可流涕, 闕里多莓苔。 是則聖道愈邈, 惟恐掃地無餘, 慨然憂世之深切底意, 發乎尋常吟咏之間。 此非學術之精微乎? 大抵道之極處曰聖, 孔子曰, 西方有聖人, 此非吾道之聖, 卽指彼道之極也。 先生之佛亦聖云, 不無所據, 而於是時也, 寺刹之役, 徧於國中, 生靈塗炭, 其於聖人憂世之道, 所不忍之政。 故佛亦慈悲之聖, 庶可慈悲衆生句語, 諷諫而欲止之也。 此乃敬佛聖之意乎? 先正臣文正公宋時烈, 撰先生神道碑曰, 罪我者春秋, 知我者春秋, 以繼孔夫子道統。 又曰, 先生受誣, 有關於世道也不少, 史氏之簡冊, 炳如丹靑, 諸賢之讚頌, 昭揭日星, 三說被誣之目, 可以煥然氷釋者也。 先生, 可謂吾東之眞儒, 命世之大賢, 而迄今三百有年所, 尙未復享者, 豈非朝家之欠典, 士林之齎鬱哉? 謹按忠宣公臣文益漸, 生丁麗季, 目見學校頹廢, 後學竟至於蓁蕪, 塔廟連天, 擧世競染於梵唄, 先生, 獨慨然欲繼絶學, 倡明正道, 詆誹異端, 以孝弟忠信, 敎人不倦。 時, 程·朱書東來, 人莫能曉, 而獨沈潛反覆, 融會貫通, 溯性理之源, 修心學之要。 與文忠公臣鄭夢周·文靖公臣李穡, 刮劘講論, 恭愍朝爲左正言, 上書論爲治之道, 出入古今數千言, 無非格致誠正之術。 又請建學置校, 立廟設主, 弦誦之風, 由是而振, 喪制之禮, 由斯而備。 及其勇退中流, 歸臥鄕里, 敎授生徒, 號三憂居士, 其意憂王國之不振, 憂聖學之不明, 憂己道之不立也。 悅鄒·魯之芻豢, 飽程·朱之菽粟, 昏衢大闢, 斯文不墜, 此其道學之煥然者也。 又嘗奉使入元, 以公事, 謫南荒三載, 秉節彌堅, 當麗運將訖, 終身守節, 明君臣之大義, 苟非平日學問之正大·操存之窮固, 則其所樹立, 豈非[能]卓卓然如是乎? 此其忠義之卓然者也。 至於孝性由天, 嘗持母服, 侍廬墓不怠, 値倭寇猖獗, 所過殘滅, 人皆縮首逃竄, 而先生, 獨以衰絰, 伏前號哭, 誓死不去, 賊感嘆稱孝, 不敢加害, 此其孝行之炳然者也。 凡於國家經濟之策, 靡不講究, 自南歸路, 得木綿種子, 藏來筆管。 至于今國賴其功, 民受其利, 挾纊之恩, 邁種之德, 固其不少, 而此特道學德行外餘事耳。 按麗史贊云, 文益漸, 非徒有功於木綿之(之)利, 倡明正道, 詆斥異端, 泝洗三韓之染, 天理之晦復明, 文風之熄復振, 可謂東方理學之祖也。 是故, 列聖朝欽慕道學, 追思功德, 屢贈褒奬, 至矣盡矣。 先正臣文靖公李穡曰, 公之發難微奧, 無不當理, 宜爲道學之宗。 文純公臣李滉曰, 公有行誼, 又以學問著世。 文貞公臣曺植曰, 麗末佛敎大行, 東方聖學之傳, 幾不復振, 公獨勉强學業, 以示後學。 文正公臣宋時烈曰, 程·朱旣沒, 能得其傳, 復明吾道者, 惟文成公安裕·忠宣公文益漸二賢, 而未二賢, 吾東方, 迄未免涉於醜虜之行。 又曰, 前之人無如文君者, 後之後亦無如文君者。 恐其後之後人, 莫識於文君, 故以此爲說。 文簡公臣黃景源曰, 義足以正君臣之倫, 學足以窮天人之眞, 此其諸賢之撰述者也。 豈非一國之大賢, 百世之尊師乎? 臣等竊伏惟文靖公臣李穡·忠宣公臣文益漸, 道學功德, 繼洙·泗之源, 接洛·閩之統, 照耀方冊, 開發群蒙, 亘萬古而不泯, 俟百世而不惑, 而尙闕復享之擧, 未暇陞廡之典, 固欠乎聖王尊賢之治, 後學慕道之方也。 臣等不避僭越, 齊聲叫閽。 伏願殿下, 念崇報之必腆, 軫公議之所同, 亟降允俞, 竝擧兩賢, 陞享聖廟, 則國家幸甚, 斯文幸甚。 臣無任云云。 省疏具悉。 崇賢尊道, 何待爾等之言? 而所陳之未可遽允, 以其事體之至愼至重也。 爾等知悉, 退修學業。



23 제목없음 1885-11-07 고종 22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 2942책 (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11월 7일 신축 30/32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 方外儒生金健秀等疏曰, 伏以天之於人, 有感應之理, 故以天之高焉, 而有願則必遂, 父之於子, 有至慈之恩, 故以父之嚴也, 而有事則必告。 伏惟我殿下, 天地於臣也, 父母於子也, 豈可有願而不陳, 有懷而不告哉? 是故, 臣等之日前率籲, 天理人情之不能自已者也。 竊伏念麗季儒賢文靖公臣李穡, 忠宣公臣文益漸之道學, 則程·朱淵源, 而實爲東方之儒宗, 後學之標準, 列聖朝褒奬, 昭在國乘, 先賢輩尊崇, 備在簡冊。 若其衛正斥邪, 建學設校, 明天理之晦冥, 講性理之微奧者, 則已陳前疏, 不必更擧, 而及伏見聖批, 則以其事體之至愼至重, 尙靳從享之敎, 尤切輿情之齎鬱。 夫旌德禮賢, 化道所先, 念功簡勞, 聖哲上務, 德乃休明, 沒而彌著。 是以文烈公臣趙憲, 文敬公臣金集, 以其學問之高明, 當此文物之賁飾, 俱以躋享, 莫不榮恩。 而伏念文靖公臣李穡, 忠宣公臣文益漸, 與彼兩賢, 同德一揆, 而祭禋只止於家廟, 籩䇺未設於聖廟, 豈非聖世之欠典, 而多士之含鬱者哉? 嗚呼, 文靖公臣李穡, 以若卓越道德, 時無錢唐忠諫, 緣於史官猜嫌, 仍爲文廟黜享。 是以先正臣文正公宋時烈曰, 先生之受誣, 關世道也不少。 且忠宣公臣文益漸, 生丁麗季之亂, 自任於斯文, 繼絶學而明道, 排異端而興敎。 是以文簡公臣黃景源曰, 義足以正君臣之倫, 學足以窮天人之眞。 前賢之贊美若此, 今日之公議如彼, 允爲一國之觀感, 豈非百世之師範乎? 臣等竊恨李文靖·文忠宣, 不幸不起於殿下圖治之世, 協贊堯·舜之聖化, 又恨宋文正·黃文簡, 不幸不在於臣等率籲之日, 開達殿下之睿聰也。 臣等伏讀日前聖批, 事當退去, 竊慕道德, 不避僭越, 玆敢更爲齊聲叫閽。 伏願殿下, 勿爲靳兪, 克擧兩賢陞享聖廟, 則奚但士林之顒望? 抑亦國家之幸甚。 臣等無任云云。 省疏具悉。 前此已有批諭, 爾等亦知事體之至重, 又何煩瀆? 諒悉退去。




4) 고려사 2건


고려사 > 권111 > 열전 권제24 > 제신(諸臣) > 이자송


이자송(李子松)은 청양(靑陽)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되었다.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 이자송이 홍순(洪淳)과 함께 원(元)에 있었는데, 황제가 고려(高麗)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였다. 김첨수(金添壽)·유인우(柳仁雨)·강지연(康之衍)·황순(黃順)·안복종(安福從)·문익점(文益漸)·기숙륜(奇叔倫) 등이 모두 〈덕흥군에〉 붙었으나, 오직 이자송·홍순·황대두(黃大豆) 등은 〈몸을〉 숨기고 따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연경(燕京)에 머물다보니 돈과 양식이 떨어졌으나 끝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귀국하자 왕이 그들의 절의(節義)를 가상하게 여겨 각각 쌀과 콩 30석(碩)을 하사하였고, 이자송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하였으며, 단성보조공신(端誠輔祚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한참 뒤에 동북면존무사(東北面存撫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왜구(倭寇)가 안변(安邊) 등지를 침략하여 부녀자들을 노략질하고 창고의 쌀 10,000여 석(石)을 약탈하였으므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李子松, 靑陽人. 恭愍朝, 拜典法判書. 德興君之變, 子松與洪淳在元, 帝令高麗人, 皆從德興之國. 金添壽·柳仁雨·康之衍·黃順·安福從·文益漸·奇叔倫等, 皆附之, 唯子松·淳·黃大豆等, 匿不從. 久居燕, 錢粮匱竭, 終始不貳. 旣還, 王嘉其節義, 各賜米豆三十碩, 授子松密直副使, 賜端誠輔祚功臣號. 久之, 出爲東北面存撫使, 倭寇安邊等地, 掠婦女, 奪倉米萬餘石, 坐罷歸田里.



고려사 > 권111 > 열전 권제24 > 제신(諸臣) > 문익점


문익점(文益漸)은 진주(晋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 정언(正言)이 되었다. 사신이 되어 원(元)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면서 덕흥군(德興君)에게 붙었다가 덕흥군이 패하자 곧 돌아왔다. 목면(木緜)의 종자(種子)를 얻어 돌아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처음에는 배양(培養)하는 기술을 알지 못하여 거의 말라죽고 다만 1줄기만 남았는데, 3년 만에 마침내 크게 번식하였다. 취자차(取子車)와 소사차(繅絲車)는 모두 정천익이 만들었다.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좌사의시학(左司議侍學)으로 글을 올려 학문하는 도리를 논하였다. 그때 간관(諫官) 이준(李竴) 등이 사전(私田)을 되돌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글을 올려 간쟁(諫爭)하자,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편에 붙어서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았다. 다음날 곧바로 서연(書筵)에 나가자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탄핵하여 말하기를, “문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晉州) 구석진 곳에서 몸소 농사짓던 사람이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덕행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여[賢良] 불러 간대부(諫大夫)로 임명하여 곁에 두고 자문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충언(忠言)을 올리고 치도(治道)를 아룀으로써 전하의 다스림[聖治]을 보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경연(經筵)에서 전하를 모시면서 아부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충직(忠直)한 모양을 꾸미고 순종하며 영합하여 간쟁(諫諍)하는 절개 없이 허리를 굽혀 손을 맞잡고 ‘예예’나 ‘옳사옵니다.’라고만 하였습니다. 근래에 동사랑(同舍郞)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는 각각 상소(上䟽)하여 시사(時事)를 거리낌 없이 말했지만, 문익점은 받고 있는 녹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동사랑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전제(田制)를 철저하게 논의하였지만 문익점은 권세가의 편에 붙어서 병을 핑계로 근무하지 않아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좋은 꾀를 얻었다고 하여,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士林)의 기대하는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削奪)하여 시골로 돌려보냄으로써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이에 그를 파직시켰다. 아들은 문중용(文中庸)·문중성(文中誠)·문중실(文中實)·문중진(文中晋)·문중계(文中啓)이다.


文益漸, 晋州江城縣人. 恭愍朝登第, 累遷正言. 奉使如元, 因留附德興君, 及德興敗乃還. 得木緜種, 歸屬其舅鄭天益種之. 初不曉培養之術, 幾槁止一莖在, 比三年, 遂大蕃衍. 其取子車·繅絲車, 皆天益創之.

辛昌立, 以左司議侍學, 上書論爲學之道. 時諫官李竴等, 以私田不可復, 上書爭之, 益漸附李穡·李琳·禹玄寶, 移病不署名. 翌日, 徑赴書筵, 大司憲趙浚劾曰, “益漸本以遺逸, 躬耕晋鄙. 殿下以賢良, 徵拜諫大夫, 置之左右, 以資淸問, 誠宜進盡忠言, 敷陳治道, 以補聖治. 而乃日侍經帷, 依阿苟容, 以飾忠直之狀, 承順逢迎, 而無諫諍之節, 傴僂束手, 唯唯諾諾. 頃者, 同舍郞吳思忠·李舒, 各自上䟽, 極言時事, 益漸持祿患失, 無一語及之. 又同舍郞聯名上䟽, 極論田制, 益漸依阿權勢, 稱疾不仕, 不與其議. 規避衆謗, 自以爲得計, 上累殿下知人之明, 下負士林期待之意. 是宜削其爵位, 放歸田野, 以爲有言責而不言者之戒.” 乃罷之. 子中庸·中誠·中實·中晋·中啓.




5) 고려사 절요 - 2건


1. 홍순·이자송 등이 원에서 돌아오다

고려사절요 권28 > 공민왕3(恭愍王三) > 공민왕(恭愍王) 13년 > 9월 >


○홍순(洪淳)·이자송(李子松)·김유(金庾)·황대두(黃大豆)가 원(元)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에 황제가 고려인(高麗人)으로 하여금 모두 덕흥군(德興君)을 따라서 고려로 가게 하였는데, 김첨수(金添壽)·유인우(柳仁雨)·강지연(康之衍)·황순(黃順)·안복종(安福從)·문익점(文益漸)·기숙륜(奇叔倫) 등이 모두 그에게 붙었다. 홍순 등은 숨어서 따르지 않고 절개를 지켜 옮기지 않았다.


○洪淳李子松金庾黃大豆還自元. 初, 帝令高麗人皆從德興之國, 金添壽柳仁雨康之衍黃順安福從文益漸奇叔倫等皆附之. 淳等匿不從, 執節不移.



2.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34 > 공양왕1(恭讓王一) > 공양왕(恭讓王) 1년 > 8월 >  1389년 8월 미상(음)


○간관(諫官) 이준(李竴) 등이 사전(私田)을 부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상서(上書)하여 간쟁하자, 좌사의(左司議) 문익점(文益漸)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에게 붙어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다가 다음날 곧바로 서연(書筵)에 나갔다. 조준(趙浚)이 탄핵하여 이르기를, “문익점은 본래 유일(遺逸)로서 진주(晉州) 구석에서 몸소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현량하다는 이유로 간대부(諫大夫)에 임명하여 〈왕의〉 좌우에 두고 자문에 이바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남김없이 올리고 나라를 다스릴 도를 아뢰어 성상의 다스림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인데도 우물쭈물하고 남의 비위만 맞추어 간쟁하는 절개가 없었으며 몸을 굽히고 손을 묶고서는 유유낙낙(唯唯諾諾)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동료 오사충(吳思忠)과 이서(李舒)가 각자 상소하여 시무에 대해 극언하였으나, 문익점은 녹봉만 붙잡고서 잃게 될까 근심하여 한 마디도 언급함이 없었습니다. 또한 동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전제(田制)에 대하여 극론하였는데도 문익점은 권세가에게 아부하고자 병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좋은 계책을 얻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사림(士林)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니, 마땅히 그 관작을 삭탈하여 시골로 돌려보냄으로써 말을 할 책임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곧 문익점을 파면하였다.


○諫官李竴等以私田不可復上書爭之, 左司議文益漸附穡琳玄寶, 移病不署名, 翼日, 徑赴書筵. 趙浚劾曰, “益漸本以遺逸, 躬耕晉鄙, 以賢良拜諫大夫, 置之左右, 以資淸問. 誠宜進盡忠言, 敷陳治道, 以補聖治, 而依違苟容, 無諫爭之節, 傴僂束手, 唯唯諾諾. 頃者, 同舍郞吳思忠李舒各自上疏, 極言時事, 益漸持祿患失, 無一語及之. 又同舍郞聯名上疏, 極論田制, 益漸依阿權勢, 稱疾不與, 自以爲得計. 上累殿下知人之明, 下負士林期待之望, 是宜削其官爵, 放歸山野, 以爲有言責而不言者之戒也.” 卽罷益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