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을 칭송한 시
충선공을 칭송한 시(詩)

1457년 세조 3년 임금이 손수 지어 내린 제문

남방 거친 땅으로 내쫓겨 3년 동안 고생을 한 것

그 절개와 의리는 높이도 솟았네.

몸이 죽는 것도 돌보지 않았으니

하늘이 복을 내리어 고려의 서울로 돌아왔었네.

좋은 씨앗 처음 가져옴에,

우리 백성들의 한이 풀렸도다.

큰 공 갚기 어렵지만,

철권(공신에게 훈공을 기록해서 준 책)으로 표창을 하여

자손을 도와 줌이, 이 후로 억만년에 이르리

남지(南智) <세종, 문종 세조때 활동하신 제상>

공리가 타인들에게 미침이 옅으면 그것은 곧 두절되기 쉽고 그것이 깊다면 무궁하게 된다. 이제 무명옷의 이로움은 천지가 다하도록 만세에 영원하여 이 백성이 있는데는 즉 이옷이 있을 것이다. 문공의 공이 옅다고 할할 것인가 깊다고 말할 것인가. 그것은 깊다고 말할 것이자 옅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세에 뛰어나서 저명한 현인군자 들로부터 읊음이 나온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니 즉 길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 그 읊은 것들중에 말해져 있다. 은덕을 갚고 갚지 않은 것은 각자의 그 마음 먹음에 있는 것이어늘 은덕을 갚고 안 갚고 간에 공의 공에야 무슨 손실됨이 있으랴 . 이에 나는 노래를 지어 노래부르거니와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 목면 있어 가는베 되어지고 거친베 된다.    

의상을 지어냄에 흰실로 온 솔기를 꿰맨다.

그 옷 입어 편안하고 훤하며 아름다워, 입고 입어도 싫증나지 않는도다.

그 누구의 은혜라 할 건가. 이는 문공의 혜택이로세 .    

그 혜택은 어떻다 말할건고. 그야 하늘같이 끝없이 크기도 하지     

내 이좋은 노래지어 그 덕을 칭송하려네

무명옷의 이로움은 하늘의 은혜  하해 같이 무궁하건만

아아 우리나라 사람들  아직 그 공에 보답하지 못했네

내 보답하려 하건만  몸의 힘이 없구나
비록 보답은 없을 지라도  그분에게 붙어져 따름이 있으라 원하네

그 붙여져 딸림은 무엇이라고 할까   자손이 만억이나 되어주고 오래 살기를 비노니

백년같이 살고 모범되어 지이다   

하느님이 중히 여기시어 큰 복있게 도우리라.

     성현(1439~1504) 공조판서 대제학

    김시습(1435~1493)

     절개에 효도있고 충성에 힘섰기에 
    君公에 侯伯까지 특별히 봉해졌네

     내 의식 갖추어지니 농가 날로 富하네

(* 君公에 侯伯은 강성군과 부민후를 말함)

 이 땅에 목화피니 농가임을 기리는데

 몰락한 임의 자손은 주리고 떠는 구나

 어즈버 초목씨 받아 산다는 건 웬말인가

     김종직(1431~1492) 중추부지사

  정여창(1450~1504) 성리학 대가

해동국 되어진지 몇천년 되어진고

옷입는 사람에겐 자연히 밭있는법

임이여 가져온 그건 재화되어 영원소

고려의 간의대부 옷입힌공 태산같다

벼슬길 물러나와 술벗삼아 숨었건만

천지중 취한 기상은 의기호탕하였네

 

김굉필(1454~1504) 성리학의 대가

우리땅에 나라된 지는 어느 무렵이었더냐   그야 아득한 옛날이어 아는 이 없어라

나라안에 움직임은 다 이나라 백성  백성에겐 오직 의식이 중요하지

옷을 입어야 추위를 따습게 지내고  먹어야 살이쪄 살수가 있느니

우리나라 하늘가 한 구석에 외따로 있어  능라의 아름다움 일찍 몰랐지

부녀가 베짜기는 나라에 나는 걸로만 해서   삼베 모시 명주만 짤줄 알았었네

진양출실 문익점님은 어질고 바르며 뜻은 학문을 좋아했다

고려공민시에 과거에 급제하니 때는 지정20녀이었네

간원의 좌정언 벼슬받자   사신따라 원에가 구속되었다

귀양간지 삼년에야 돌아오다가   가을 길가밭에 눈 같은 꽃 보았다

따보고 좋아한 임은   짐꾸러미에 깊숙이 넣어 가져왔다네

꽃들에 심어 자람을 기뻐하여   많은 금옥같은 그걸 어데쓸까 생각을 했다

그 꽃은 오색을 갖추어 귀하기도 했어라    그걸본 이웃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고

사방에서 와보는이 끊이지를 않았네    그때마침 원나라 중 와보곤

씨빼고 실뽑는 기계 만들어 주었다    어느덧 그 씨 온나라에 퍼져

방방곡곡 사람들 그 혜택 입었지    아아 장하도다 우리 비로소 무명옷 입었도다

그 누구의 덕이 이같이 원대하다고 비길손가    의식은 사람의 목숨이기에

천의 아름다운 명에 따라 백성은 싸을 먹음을 아는도다    

임의 큰아들은 중용이라 하여 과거 급제해서는 맑고 화려한 관직을 지냈었다    

다음 아들 중성은 이치에 밝아 사물에 얽매어지지 않는 선리라 일러져    
높은 지위를 초개와 같이 알아 자신의 환경을 족히 여기었네    

그 다음은 중실로 임금에게 바른 충고 잘하지 조정에 엄숙히 서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게 함이 많았었단다

그다음은 중계로 예에 밝다 이름났었고   여러 관리를 지휘함에 실수가 없었다

임의 혜택 사람들에게 미쳐졌음을 몇이나 알건가   오래도록 보답치 못했으니 가석한 일이로세

후손 치창 분해하고 낙심했음은 정망 마땅한 일이오   
내 또한 이일에는 하도 간절하고 측은히 여기는 도다

우리 세 어진 임금 임의 공을 생각하사    중신의 벼슬 더리고 그 작을 높이시었다

게다가 강성군을 봉하심에   가련히 황폐되었던 그 무덤이 얼마나 높아졌다고 할까

그건 임의 영혼을 일시 위안한 일이어   대대로 제사지내어 끊임이 없게 함 같을 손가

이제 만세에 전해져 두동하게 되었으니 임의 옛터에사당짓고 제전을 사하셨네    

임의 후손은 미미해서 공의 자취 계승 못하노니

아아 천도는 어쩌면 이리 어긋나고 있단 말인가    

그누가 임금의 귀에 드시게 자세히 아뢸수 있었을까

널리 물어 상의해서 장손을 내세웠다    

그로 제사 주관케 해서 그의 몸 높여주고 고을 원에게 명하여 노역을 면하게 했다
자자손손 벼슬이 끊어짐이 없이 후에 봉해지게 된다면 임의 공 어찌 문창후에 뒤지랴
언제까지 이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해주셔도 무방한 일이오니
영구히 보답함이 무궁하게 하옵소서

조위(1454~1503) 중추부사지사 성리학 대가

충신 효자 무엇인가

문공은 안살피고 그저 다만 꽃만 안다

그 꽃은 목면화요 면의 이 끊이지 않으니

이나라 억년까지도 민초는 다 부(富)하다

김안국(1478~1543) 중추부판사 세자이사

무성한 백설면화 나라안 두루핀다

만민이 의복혜택 만세에 입건마는

후손을 얼고 굶음에 보답없어 부끄러워

김정국(1485~1541)

면사의 공덕이야 일력으로 이룰수 벗는 것   임이야 후직같이 우러러진다

하늘같이 끝없이 보답의 제사 올림은        이나라 백성 위함이라

우리겨례 영원토록 솜옷은혜 받았거니와     아아 은덕 갚음 적어 한탄만 더해 지누나

유순(1441~1517) 영의정

풀로짠 옷입은지 천년     

천한 나라임을 한탄했었던 우리

목면을 가져온 공과 혜택은 하도 커 비할데 없어라

내 이제 붓을 들어 임의 은덕 칭송한들

그거야 부끄럽게도   큰 종을 일촌의 대자리로 치는 것과 같다

조식(1501~1572)성리학자

강성고을 충효인 임 옷 입힌공 후직같다

임이 후손이 세상에 떨쳐지지 못하노리

이나라 사람 어떻게 그 공을 다 갚을까

이지함(1517~1578) 현감 성리학자

신농씨는 백성에게 밭갈이 가르쳤고

후직은 농사짓기를 가르치었는데

우리의 충선공은 우리겨레에게 옷?혀 주었도다

임의 공은 어떠한고

그 공이야 커 옛분보다 배나 더하리

이이 (1536~1584)

베짜는 아낙네들 집집에서 화평가를 부르는데
지금토록 오막집에서 강성군 제사올린다
아아 어이타 임의 미약한 후손은 평민으로 지내어

나라에서 작은 영화도주지 않고 있을까

이규보

남방되놈 무명베를 요순에게 바치어서

동해쪽에 전해진 지 아득한 옛날이라.

놈장의 선구자처럼 문님 受報응당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