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 문익점 선조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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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참고

1.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정수일

단국대  사학과 교수

2.겨레의 은인이 된 충군애민의 삶

정순태

시사월간win편집위원 

3.역사에 가려진 산청의 큰인물

권재우

산청문화원장

4.영호남 곳곳에 큰덕 기리는 유적들

김일곤

시사월간win기자 

5.문익점 생애와 목면전래 사적검토

김해영

경상대학  교수

6.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경상대학 교수

7.민족의 은인 삼우당

조영일

국제섬유신문

8.동정의역사

대종회

조선왕조실록



1.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정수일 단국대 교수 2005년. 3. 15 한겨레신문


널리 백성을 따습게 할지니


얼마 전 한 정당인이 동료 의원이 외국에서 들고 온 자그마한 선물용 포장 쌀 샘플을 소개하면서 의원 저마다가 ‘문익점이 되어 달라’고 독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받아들일 만한 외국의 좋은 아이디어로서 그것이 바로 ‘현장정치’라는 것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간에, 600여 년 전에 살고 간 문익점이 오늘 우리들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서 추모를 뜻하는 사당 수가 많기로는 최영 장군과 충선공 문익점이 쌍벽을 이루며, 국가에서 사당을 짓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주요 부조묘의 주인공도 문익점이다. 그만큼 문익점은 우리겨레의 사랑과 모심을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받는 위인이다.


고려 말 문반으로 관직 진출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문반 출신으로 여러 가지 관력을 거치면서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자의반타의반 휘말려 부침을 거듭하다 보니 그에 관한 기록이나 평가에는 이론이나 왜곡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전설적 요소마저도 끼어있다. 충절이나 효심, 학문도 출중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부민(富民)정신에서 오는 목화씨의 반입이다. 그 옛날 몇 알의 목화씨를 들여다가 우리겨레의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목면공’, ‘문화영웅’으로서의 그의 교류사적 업적은 커다란 현실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문익점’이 필요한 것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이며 학자인 문익점은 1328년(혹은 1329년, 1331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낙향한 선비의 둘째로 태어나 열 살 때 대유학자 이곡의 문하생이 되었다. 20살 때 시경만을 가르치는 국립학당 격인 경덕재에 들어갔고, 23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향시에 급제했으며, 33살 때는 공민왕이 새로 지은 궁궐인 신경에서 실시한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 벼슬은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김해부사록이다. 이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로, 그리고는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에 발탁되었다. 재사에 따르는 승승장구의 관력이다.


‘충절 행적’ 기록마다 엇갈려


이 무렵 공민왕이 실시한 국권회복 정책과 친원파 숙청으로 인해 고려와 원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원나라 순제는 일방적으로 그에게 내린 인수를 철회하고 26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한다. 이에 공민왕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해결을 시도했으나, 원은 사절단마다 매양 억류해버린다. 그래서 왕은 다시 1363년 3월과 4월에 사절단을 각각 파견하면서 문익점에게 문서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 직책을 맡겼는데, 어느 사절단에 속했는가 하는 기록부터가 엇갈리면서 그의 원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시기 및 목화씨 재래 등에 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예컨대, <고려사>에는 그가 덕흥군에 아부했다가 덕흥군 쪽이 패하자 1364년에 ‘득목면종(得木綿種)’, 즉 ‘목면 종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했다고 하며, 조선조의 <태조실록>에는 원에서 돌아올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1464년에 편찬한 <가장(家狀)>을 비롯해 남평문씨의 가전을 집대성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1819년)에는 이와 정반대의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고 하면서 원제와 덕흥군 쪽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내 지킨다. 그러자 원제는 42일간 구류했다가 그래도 불복하니 남방인 교지(운남)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원 유배 귀국길에 목화씨 반입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가 조선조의 건국에 제동을 건 고려인들의 행적을 폄하했던 경향이나, 문익점이 귀국 후 처벌되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도 충신의 예우를 받은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덕흥군 아부설’은 일종의 낭설로 판단된다.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의 귀국 연대도 3년간의 차이(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 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가공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2세기 경 중국 공주가 누에씨를 모자 솜 속에 감추어 호탄(현 신쟝 위구르자치주)에 전해주고,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신부가 인도 북부로부터 역시 누에씨를 지팡이 속에 숨겨 몰래 로마로 반출했다는 유사 일화도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그밖에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반출금지품인가 아닌가와 선비로서 밀반출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등 이러저러한 시비 거리도 있다.


1398년(혹은 1400년)에 70살을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 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으로 지어 불렀다. 바로 이러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탔기에 그 숱한 사람이 원나라를 오가면서도 무심했던 목화를 그만이 눈여겨 보고 헐벗은 백성들의 옷감을 마련코자 씨를 구해가지고 와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면화 재배에 전념해 결국 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생활·문화·산업 혁명적 변화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의 전래와 재배 및 목면의 생산은 우리나라 직물사 뿐만 아니라, 산업구도나 생활문화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 제작의 단초를 열었으며,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되었다. 내구성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전래와 그 생산물인 목면은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우리겨레의 생활영역을 전례 없이 넓히고 풍부화 시켰으며, 사화발전 전반에서 가위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그의 목면 전래를 통해 이 나라의 의관문물을 일신시켰다고 하고, 남명 조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칭송했으며, 우암 송시열도 “이전의 사람도 문공(문익점)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도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이후의 이후에도 역시 문공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적이 지대한 만큼 국가의 포상도 성대했다. 고려조 우왕 때에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 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 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후(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 드물게 목화씨의 수용과 무명의 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 한 부민교류의 큰 별이다.


일본은 전파 100년 만에 재배


목면 전파에서 특기할 것은 조선의 목면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15세기 초 조선 태종 때부터 ‘청목면’이란 이름의 목면이 일본사신에 대한 하사품 중에 포함되기 시작하다가 20년도 채 못 되어서는 하사품 중에서 주종을 이루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앞을 다투어 매해 수천 필씩 조선의 면포를 무역해갔다. 17세기 초 에도시대에 출간된 일본 최고의 농서인 <청량기(淸良記)> 등 사적에 의하면, 일본은 ‘오닌의 난’(1470~1480년)을 비롯한 전란이 발발하여 군복 같은 옷감 수요가 급증하자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 명나라와의 거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를 들여가게 됐으며, 우리보다 약 100년 후에 단작작물로 목화재배를 시작했다. 요컨대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에 의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지고,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하고 그 질이 높았으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2. 영원한 겨레의 은인이 된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삶

영원한 겨레의 은인이 된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삶
정순태(시사월간 win 편집위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저항한 고려충신이면서도 조선왕조로부터 추앙을 받고 백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던 인물 - 황금을 돌같이 여기며 외적과 1백번 싸워 전승불패의 기록에 빛나는 최영,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단심가로 유명한 정몽주도 민중들로부터 이 사람처럼 지속적으로 추모 받지는 못했다. 그는 누구일까? 고려사에서는 이 인물의 공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지 몇 자로 소홀하게 적고 있다.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했다. 처음엔 배양하는 기술을 알지 못한지라 거진 말라죽고 단지 한 줄기만이 살아나 3년 만에 드디어 크게 번식했다.

한민족의 행동반경 넓힌 무명문화

우리 민족의 의(衣) 주(住) 생활을 혁명적으로 진보시킨 목화씨 전래 자, 바로 문익점이다. 당시 원나라의 해외유출 금지품이던 목화씨 그 씨앗 10개를 그는 붓두껍 속에 넣어 귀국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꽃을 피우고 직조기술을 진보시켜 이 땅의 무명문화가 일어난 것이다.

문익점의 이전 우리 민중들의 의생활은 비참했다. 예 컨데 고려사 공민왕 13년 1월 임오일 조(條)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군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도롱이를 몸에 두르고 지내었다. 죽은 시체가 길에 잇대어 있었다. 대오를 떠난 군졸 등이 길에 밀려다니며 걸식했고 그들의 얼굴은 파리했다. 당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북면(함경도)으로 출정했던 고려 군인들의 참상이었다. 무명베(면포)가 생산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 민중들은 삼베나 갈(칡넝쿨)포로 옷을 해 입었다. 비단과 모시 같은 것은 귀족용이었다. 삼베나 칡넝쿨로 만든 옷으로 겨울을 나기는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대개는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민죽의 행동반경이 몹시 옹색했다는 얘기다.

무명베가 생산된 이후 비로소 한민족의 의관이 그럴 듯 해졌다. 또 솜으로 누빈 이불속에서 편안히 잠을 자게 된 이후에야 생활의 리듬과 활력을 누릴 수 있었다. 백의민족, 이것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위생생활의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흰 무명옷을 입게 되니까 더러움을 타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그러다 보니 방안에 도배를 해야만 했다.

목화재배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가을철에 목화를 수확해 놓으면 겨울철 농한기에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 베틀에 올릴 수 있었다. 겨울철 유휴노동력의 활용, 이것은 국력신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드디어 베틀일 잘하는 며느리가 시집오면 논밭을 산다는 얘기가 나돌게 된다.
밭작물인 목화의 재배가 늘어가자 국내의 경지면적이 급속히 늘어난다. 고려 말 국가 장악의 경지가 50만결에 불과했으나 조선 건국초기(1404)에는 거의 두 배인 93만결로 늘어났다. 이 같은 경지면적의 배증은 사전정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면화 등 밭작물 재배면적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까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도 문익점의 공적에 무심할 수가 없었다.

태종은 그의 즉위연도인 1400년 문익점이 나이 70세로 별세하자 참지정부사(정2품) 충선공으로 추증했다. 태종이라면 고려 멸망 직전 정몽주를 쇠몽치로 쳐 죽이는 등 고려 충신들에게 무자비 했던 이성계의 제5자 방원 바로 그다. 태종을 이은 세종은 역시 명군이었다. 6진 개척으로 국토를 확장하면서 남쪽지방의 농민들을 계속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특히 목화재배지역의 전국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14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 있는 전국 토지결수는 건국 초(1404)의 두 배인 1,719,860결에 달했다.

세종은 사후 40년이 된 문익점에게 조선왕조가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계인 대광보국승록대부 정1품 영의정을 추증했다. 그의 봉작도 부민후로 높여졌다.
문익점이 목화씨 전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성종17년(1486)께는 왜인이 수입해간 면포가 연간 50만 필에 달했다.(김병하, 조선조 전기의 직물생산과 대일수출 경희대 논문집)

왜인들이 얼마나 조선제 면포에 집착했는지는 현 일본 최고 인기작가 시바로타로의 최신작 “이 나라의 모양”(문예춘추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 조선무역에서 일본은 조선의 면포를 좋아했다. 일본에서 면은 귀중품으로서, 도요토미 시대에서도 봉건영주들의 사치품 중 하나였다. 토요토미라면 1592년 임진왜란을 도발한 당시 일본의 집권자. 과대 망상가였던 그가 왜 7년 전쟁을 도발했는지 아직도 그 진정한 이유가 모호한데, 도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사치품이던 조선의 면포가 탐이 나서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면화종자를 얻고 재배법, 직조기술을 배워 간 것은 16세기 중엽이었으나 일반 서민에게 면포가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 말 부터였다.

우리나라 면업사는 대체로 세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여말 선초에 해당되는 14~16세기의 성장발전 기간이며, 2단계는 임진왜란이후 17~18세기의 성숙기로 볼 수 있고 3단계는 19세기 이후의 쇠퇴기다. 따라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선조 때는 면화산업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15세기 후반기 이후에는 면포가 단순한 상품 이라기보다는 현물 화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동전은 조선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했다. 쌀도 중요한 현물 화폐이긴 했지만 갖고 다니기에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특히 여행자들은 면포를 등짐으로 지고 다니면서 술, 밥값과 숙박비 등으로 셈을 쳐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면포가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는 운창지(雲窓誌)에 잘 기록되어 있다. 경상감사 김수가 왜적 방어용 성을 쌓으면서 규격에 맞는 돌 5개를 가져온 백성들에게 면포 1필씩 지급했다. 더욱 절묘한 애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의병들 중에서도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의령 출신 곽재우다. 왜적들은 붉은색 옷을 입은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며 몹시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홍의를 입었던 것일까. 당시 조선 민가에선 면포와 솜으로 이불을 만들었다. 이불의 바닥 쪽은 검은색, 위쪽은 붉은색 면포였다. 흰색 이불은 때가 잘 묻어 염색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 의병들도 군복이 필요했다. 곽재우 장군의 아이디어가 또한 발군이었다. 이불을 뜯어서 장교 급은 붉은색, 군졸들은 검정색 군복을 지어 입게 한 것이다.

이색과 정치적 운명 함께한 배경

문익점은 충혜왕 원년(1331) 경상도 강성현 사월리(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언(정4품)을 지낸 숙선과 함안 조씨 사이의 4형제 중 둘째였다. 여덟 살에 학당에 들었고 열한 살 때 한주(韓州 ;현재 충남서천)에 낙향해 있던 대유학자 이곡(李穀)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것이 그 후 문익점의 벼슬길을 파란만장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곡의 아들이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줄기차게 견제했던 대문장가 이색(李穡)이었기 때문이다. 문익점은 세 살 위인 이색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 문익점은 20세에 경덕재에 들어갔다. 경덕재는 시경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국립학당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23세 때 정동성향시에 급제했다. 정동성향시는 (元)이 고려에다 설치한 종동행중서성 주관의 향시였다.

이어 30세 때 문익점은 신경동당시에 응시 급제자 33인중 제 7등으로 뽑혔다. 공민왕 9년 개경 근교의 백악에다 궁궐을 짓고 그곳을 신경이라고 했는데 신경동당시는 신경에서 실시한 제술과(製述科)였다. 공민왕 9년 11월 25일 신경동당시에서 제1등은 그때 나이 24세였던 정몽주였다. 문익점과 동방급제한 사람들 중 정몽주 이외에도 문익점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둘이 있다. 바로 제2등 급제자 임박과 제9등 급제자 이정이다. 임박은 공민왕 12년(1363) 덕흥군 사건의 해결을 위해 원에 파견되었던 계문사 이공수를 따라갔던 서장이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같은 고려사열전에서 문익점에 대해서도 정언이 되매 사명을 받들어 원에 갔다가 유(留)하여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운운의 기사가 있다. 그래서 이공수를 수행했던 서장관이 문익점이냐 임박이냐는 역사적 의문이 생겼고 이 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덕흥군은 원나라가 한때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 기도했던 제 26대 충선왕(1308~1313)의 서자다. 덕흥군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문익점의 벼슬길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화씨 전래의 시기 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뒤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동방급제자들 중 또 한 사람인 이정은 이성계의 경제 제1참모인 조준과 함께 문익점의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다. 다음은 고려사 문익점 전에 기록된 관련기사 "그때에 간관 이정 등이 사전(私田)은 불가하다 하여 다시 상서하여 다투므로 익점이 이색 이림 우현보에게 부의하여 병을 칭탁하고 서명하지 아니한 채 익일에 바로 서명해 나아가니 대사헌 조준이 탄핵하기를.." 위의 기사는 이성계 파에서 조선왕조 개국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전제개혁에 문익점이 반대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때문에 문익점의 벼슬길이 막혀 버렸다. 이 대목도 그의 인물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부분, 역시 글의 흐름상 뒤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신경당동시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 보직은 김해부사록이었다. 사록이라면 지금의 부 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외직, 썩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순유박사로 발탁된다. 순유박사라면 유교 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종7품 벼슬. 문익점의 벼슬은 거듭 올라 33세에 사간원의 좌정언에 이르렀다. 사간원이라면 왕에게 간(諫)하는 것을 업무로 삼는 봉건왕조의 핵심기관이며 좌정언은 이 기관의 정6품이다. 이무렵 고려와 원 사이엔 일대 사건이 벌어져 관계가 몹시 험악해 졌다. 원나라가 공민왕에게 내린 인수를 회수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버린 것이다. 이 같은 원의 행동은 공민왕이 1356년 친원파로서 악행을 일삼았던 기철 일당에게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원나라가 설치했던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 구토회복 정책을 감행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덕흥군에게 아부했다는 고려사의 기록

기철은 원 순제의 세자를 낳은 기황후의 친정 오빠였다. 원은 기철의 목을 벤 고려의 처사에 분노했다. 때마침 고려 출신의 최유가 원나라 조정에 붙어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옹립하고 본국에 대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 모의에는 원의 승상인 삭사감 고려출신의 내시관 박불화 등이 가담, 기황후와 원 순제를 움직였다. 공민왕은 원 순제에게 헌첩사, 하정사, 하성절사 등 사절단을 파견 문제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원 조정은 고려의 사절단 중 한사람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 12년 3월 찬성사(정2품) 이공수를 정사, 허강을 부사로 하는 계품사를 원나라에 파견했다. 이때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수행한 인물에 대해 임박 설과 문익점 설이 있다. 서장관이라면 사신들 중 문서기록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을 맡는 핵심적 포스트로 장사, 부사에 이은 랭킹 3위의 직이다. 누가 계품사의 서장관이었느냐는 문제를 놓고 그때 서장관이 2인 이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공민왕 12년 3월의 서장관은 임박, 동년 4월의 서장관은 문익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사 공민왕 12년 4월 갑인일 조(條)에는 “밀직상의 홍순, 동지밀직사 이수림을 원나라에 보내어 배고간기로서를 원나라의 어사대에 제출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든 이공수. 임박 등은 목숨을 걸고 공민왕을 변호했던 반면 문익점은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와 관련 고려사 문익점 전에는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덕흥군이 핍(貶)함에 미쳐 이에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서 돌아와서...라고 쓰여 있다.

위의 짧은 구절이 두 가지 중요한 시비를 낳고 있다. 과연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붙었는지에 관한 의문과, 그의 귀국 연도에 관한 엇갈린 해석의 문제인데 고려사의 기록은 문익점이 남긴 시문과 후인의 평가, 남평문씨의 가전 등을 묶어 편찬된 삼우당실기의 내용과는 정면 배치된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라고 원나라에서 부여한 벼슬을 끝내 거부 원순제의 노여움을 받아 덕흥군의 집에 42일간 구류를 당한 끝에 교지(베트남 하노이)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래서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고려사에 의하면 정사 이공수가 귀국한 1364년 10월 일 터이고, 실기에 의하면 1367년의 일이다.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바로 목화씨의 전래년도가 언제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조선조에 완성된 고려사의 기록은 조선왕조가 개국에 저항한 고려 왕가 및 충신들을 깎아 내린 대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실기는 남평문씨 후손들이 편찬한 것으로 선조 미화의 의심이 간다는 점에서 모두 그 신뢰도가 100% 확보되기 어렵다. 덕흥군 옹립사건은 결국 고려 측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최유는 원의 요동병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포위, 한 때 군세를 떨쳤으나 1664년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여 원나라로 도주했다. 요동군이 패하자 원의 대 고려정책은 180도로 돌아섰다. 원 순제는 덕흥군을 귀양에 처하고 최유는 고려로 쫓아 보냈다. 원에서 덕흥군 측에 가담했던 최유와 그 추종자들도 고려로 묶여와 참수되었다. 그때 문익점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실기에 의하면 그때 문익점은 교지의 귀양지에서 ”운남풍토집“을 저술했다고 되어있다. 이 책은 서명만 전해지고 있다.

목화씨의 전래 연도의 1364년 설과 1367년 설

그렇다면 문익점은 공민왕을 배신한 역신이 아니라 충신이다. 조선조 태종이 전교에서도 문익점은 고려충신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대목 등으로 미루어 보면 문익점이 교지로 귀양을 갔거나 적어도 강남지방을 어떤 이유에서든 여행했다는 얘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이와 관련 경상대 한국사 교수 박성식은, 당시 목화(1년생 초면) 재배기술로 미뤄보면 북위 38도 이북에서의 목화재배는 어려웠다고 전제 문익점이 북위 40도가 넘는 북경(당시대도)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목화씨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37세 때인 1367년 2월 귀국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덕흥군을 지지 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문익점을 폄한 고려사에서도 귀국 직후 파직의 흔적은 없다. 5년 만에 귀국했으므로 노부모를 공양하겠다는 명분으로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문익점의 환로(벼슬길)에는 공백 기간이 많다. 중국에서 3년간 귀양살이 한 데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씩 시묘 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375년 공민왕이 침실에서 측근들에게 피살되었다. 공민왕은 국권회복 등 볼만한 치적이 많았으나 왕후 노국공주가 요절한 후 성질이 돌변했다. 말기에는 자제위란 미소년집단을 곁에 두고 남색에 빠지는가 하면 자신의 비들을 총신과 교접하도록 하는 등 괴상한 짓에 빠져 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고려판 10.26 사건이었다.

우왕 원년(45세)에 문익점은 전의주부를 제수 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전의주부는 국가의 제사와 벼슬아치의 시호에 관한 일을 맡는 정의사의 정6품관이다. 곧이어 문익점은 배원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청도현령으로 좌천당했다. 함께 상소한 정몽주도 언양현령으로 쫓겨 갔다. 우왕 즉위에 공을 세워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 등이 다시 친원 정책으로 돌아섰는데 문익점, 정몽주 등의 원의 사신을 축출하라고 청원하다가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실기)

문익점은 청도현령에 재직 중이던 우왕 2년 겨울, 모친 함안 조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 중 왜구가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문익점만 홀로 묘를 지켰다. 이에 왜구들도 감탄 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철수, 마을 전체가 왜구의 분탕질을 면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문익점은 왜구 토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로 차 문익점을 찾아가 만났다. 이성계는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 아들 방원(후의 태종)에게 문익점은 의로운 선비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왕 9년 동북면병마사이던 이성계는 문익점의 효행을 표창하라고 왕에게 청원했다.(실기)

지금 상제(喪制)가 무너지고 늘어져서 이름 있는 사대부라 할지라도 다 백일에 탈상을 하는데, 익점 만은 부모의 묘를 지킴에 슬퍼하는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여 바다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효도에 대해서 감복케 한 자취가 있습니다. 풍속을 도탑게 하고 세상 사람들을 교화시킨 그의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표창하는 명이 있어야 하옵니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의 주청에 따라 문익점의 고향마을에 효자리라는 이름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몇 간의 초옥을 지어 현판에다 삼우당(三憂堂)이라고 써 붙이고 삼우거사라 칭했다. 왕국이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이 도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 아호에 담긴 뜻이다.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 조민수의 쿠데타(위화도 회군)로 8도도통사 최영이 참수되고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 갔다. 우왕의 아들 창왕이 대통을 이었다. 이때 신흥세력 이성계와 구가세족인 조민수의 견해가 엇갈렸다. 파워 게임을 벌인 끝에 창왕 옹립을 주장한 조민수 측이 이색의 지원으로 일단 승리했다.
이에 이성계파의 반격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창왕 즉위 다음 달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려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수상 직에 있던 조민수가 전제개혁을 막으려 했다. 이에 조민수는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 갔다. 이어 이색이 문하시중이 되고 이성계가 부수상격인 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실제에 있어서는 군사상 정치상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부터 이성계 중심의 신흥군벌 세력은 구세력을 배제하여 고려정국은 그 일파의 독무대가 된다. 바로 그 무렵(창왕 원년 가을) 58세의 문익점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에 제수되었다. 왕을 곁에서 보좌 의견을 피력하는 종3품의 포스트였다.

이성계 대두 막기 위해 전제개혁 반대

창왕 2년(1389) 강화로 귀양 갔던 우왕의 복위 모의가 드러났다. 이성계 일파는 창왕의 아버지 우왕이 원래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꾸며 창왕도 왕 자리에서 몰아내고, 공민왕의 먼 일가이며 이성계 자신의 인척이기도 했던 왕요를 세워 공양왕으로 삼았다. 바로 공양왕 원년에 문익점은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때 탄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익점은 본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몸으로 진주의 구석 땅에서 몸소 밭을 갈았습니다. 전하께서 현량으로서 불러 간대부를 주어 좌우에 두고 좋은 물음의 상대로 삼으시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올리고 치도를 개진하고 성치를 보좌하여야 하는데도... 허리를 굽히고 손을 맞잡고 오직 지당하다고만 하였습니다. 근일 동사랑 오사충, 이서는 각자 상소하여 시사를 극언하는데 익점은 가진 녹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또 상사랑이 연명 상소하여 전제를 극론하는데,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고 병을 칭탁하여 출근하지도 않아 그 의론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마땅히 그 직위를 삭탈하여 전야에 쫓아내 언책에 있으면서도 말하지 아니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구구절절 대단한 인신공격이며 모략이었다. 문익점은 쫓겨났다. 이때는 이색. 이림. 우현보 등 고려충신들도 모두 탄핵되어 귀양을 갔다. 이림은 창왕의 장인이었고 우현보는 우왕의 복위 기도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미 우왕, 창왕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색과 이성계와의 관계는 매우 흥미 있는 대목이 많다. 원래 두 사람의 정책노선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은 우왕 초기 부패한 집권세력이었던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을 제거하는 데에 선 최영,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학자 출신의 관료로서 사전 정리를 강력히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구세력이 대농장을 없애고 사전을 정리하여 공전을 늘림으로서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또한 대외관계에서도 신흥 명에 접근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와 이색 계열은 속셈과 목표가 서로 달랐다. 이색 계열의 목표는 고려왕조의 부흥이었던 반면 이성계 일파의 속셈은 역성혁명이었다. 따라서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조준, 정도전 주도의 전제개혁을 반대한 것은 고려 충신으로는 당연한 행위였다. 이성계 파는 반대파의 리더 이색을 귀양에 처하기는 했지만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못했다. 이색의 명망이 국내외 적으로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색의 지모도 대단했다. 문하시중 이색이 창왕시절 왕의 입조 교섭 차 명나라로 들어가면서 굳이 이성계의 아들 방원을 서장관으로 수행시킨 것은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그의 부재중에 쿠데타를 할 수 없도록 방원을 인질삼아 데려간 것이었다. 또한 창왕의 입조 교섭에 성공했다면 이성계의 야망을 꺾어 고려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색이 추진한 입조 교섭은 그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명 태조 주원장의 거절로 실패했다.

이색과 이성계의 인간적 맞대결도 볼 만 했다. 귀양지를 전전하다 돌아온 이색과 이성계의 대면이 그 하이라이트다. 이색은 이성계의 집에 불쑥 찾아갔다. 이성계는 이색을 상좌에 모시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술잔을 올렸다. 이색은 선 채로 술잔을 기울인 후 이성계의 집을 곧장 떠났다. 이색의 기백이 드러난 이 대목을 고려사에서는 무례한 짓으로 표현했다. 이 무렵이면 이성계의 위력은 이미 왕을 앞질러 있었다.

어떻든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생명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공양왕 2년 8월 낙향했던 문익점이 다시 상경, 전직에 복귀했다가 3개월 후 다시 사임했다. 거리에서 문익점의 낙향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서 문공은 조정을 떠나는데 외로운 정공은 어찌할 것인고 하는 탄식이 나돌았다고 한다. 정공이란 정몽주를 가리킨 것이다.(실기)

전제개혁을 둘러싼 시비가 불꽃을 튀겼을 때 정몽주의 태도가 대단히 절묘했다. 창왕 원년(1388) 7월 조준의 사전개혁안을 도당에서 논의케 되었는데 "시중 이색이 '가벼이 구법을 고치는 것이 불가하다' 하매 이림. 우현보. 변안렬과 권근 유백년 등은 이색의 의견에 찬동하고 정도전. 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가담하였으며 정몽주는 양편에서 미결의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정몽주는 용의주도했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것은 공양왕 4년(1392)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자마자 정몽주의 전광석화를 방불케 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정몽주는 재빨리 간관 김진양 등에게 "먼저 이성계의 우익을 잘라 버리고 그런 뒤에 이성계를 도모하자"고 했다. 그래서 조준. 정도전을 비롯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의 직첩과 공권이 몰수당하고 특히 조준. 정도전 등은 원지에 유배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벽란도에 옮겨져 치료 중이었는데, 이방원이 달려와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고했다. 이에 이성계는 야밤에 교군을 타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은 장사들과 모의, 정몽주를 제거하려 하니 이원계(성계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문관답지 않게 담대 호탕했다. 정몽주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빙자, 찾아갔다. 돌아오던 길에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 수하의 자객 45명에게 쇠뭉치로 얻어맞고 절명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곧이어 고려 멸망에 연결되나 "만고충신"의 이름을 남기게 했고, 그 후 8년을 더 살아 70세에 병사한 문익점은 명철보신의 길을 따르면서 무명 문화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김시습.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이지함. 김장생. 이수광. 송시열 등 조선조 일류 인물들은 모두 문익점을 기리는 시문이나 비문을 썼다. 특히 송시열은 문익점을 안향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이라고 흠모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으로부터 정조까지 문익점의 공적에 감사하는 왕의 전교만 해도 14회에 이른다.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청원하는 선비들의 상소만 해도 4번이나 올라갔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문익점을 문묘에 모시는 것만은 끝내 거부했다. 유교국가의 선비들로서는 공자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것이 지상지고의 영광이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는 문익점이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그의 공로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소득 1만 달러 시대의 주춧돌 쌓은 사람

문제는 문묘 배향을 거부한 이유에 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금지사항인 목화씨를 반입시킨 것이 선비로서 떳떳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그 이유였다. 왜냐하면 목화씨를 문익점이 붓두껍 속에 숨겨온 것이 아니고 무심코 소맷자락 속에 넣어왔다는 등의 "문익점을 위한 변호"(?)까지 대두되어 논란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조선왕조의 한계였다. 알맹이 없는 명분주의가 실용주의를 눌러버린 꼴이다. 그런 상황에서 면업은 조선왕조의 하대로 갈수록 위축되었다. 면직 산업은 가내수공업에 머물렀던 것이다. 근대적 산업혁명을 추동하는 지도력도 없었다. 봉건왕조의 수탈체제로 인해 면직물의 질적 향상에도 소홀했다.

그럼에도 우리 여성들의 길쌈솜씨는 체화되어 대를 이어 전승한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 여성들의 길쌈 솜씨를 근대적 공장제 산업에 동원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20세기 초 일본 자본주의의 견인차는 관서지방의 방직산업. 이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무수히 오사카 등지의 방직공장 여공으로 끌려갔고, 이것이 또 오늘날 70만 재일동포의 모태가 되었다.
8.15해방 후 한국의 목화재배는 세계시장을 지배해온 미국산 면포에 밀렸고, 이제 국내에선 시배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명맥조차 끊어졌다. 고임금 체제 속에서 목화 재배는 상업성도 없다. 한여름의 흰색, 붉은색, 노랑색, 분홍색 목화꽃, 그리고 들판을 뒤덮었던 초가을의 흰색 목화송이는 추억속의 정경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문익점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 여성들에게 체화된 면직 산업은 개발연대 한국의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1등공신은 수입면을 가공한 섬유산업이었고, 그 주역은 우리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인이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구가할 수 있게 된 주춧돌을 문익점이 쌓았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3. 역사에 가려진 산청의 큰인물 - 고려충신 삼우당 선생

역사에 가려진 산청의 큰 인물 고려충신 삼우당 선생
산청문화원장 권재우(權載旴)

머 리 말

역사의 고장 이 곳 산청은 옛 부터 위대한 분이 많으므로 선비의 고장이라고 일컬어 오고 있습니다. 선비는 먼저 학식과 덕망을 갖추어야 하고 아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예절에는 실수나 과오를 저질러서는 아니 되고 자신에게는 추상(秋露) 같이 엄하면서도 남을 용서할 줄 알고 가난하게 살아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며 옳은 일을 위해서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바른말을 하다가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 가는 것을 오히려 큰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산청에는 일찍부터 이러한 기풍(氣風)0| 조성되어 있다.

고려 말엽에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당시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경(元京)에서 덕홍군(德興君)의 모반(謀反)에 불응(不應)하여 운남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가 원나라에서 당시 엄하게 유출(流出)을 막는 목화씨를 붓 대롱 속에 넣어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온 백성에게 따스한 솜옷을 입게 하여 주었는데 그것은 국민을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大義)와 소이(小利)를 분명히 구분하여 행한 것이었다. 또한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행(孝行)이 뛰어나서 포악한 왜구마저도 선생의 효심에 감동되어 한 고을이 병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내 고장 위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자손만대에 바르게 전하여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산청의 고유전통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곳의 역사를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국 어디를 가둔지 산청에 산다고 하면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으며 또 속으로 어깨를 추스리게 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거나 또 알더라도 흔히 경관이 아름다워서 물 맑고 산 높은 지리산이 있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산청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하겠다. 오늘날 여러 사가(史家)들이 이곳 산청을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 중엽(朝解 中葉)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이곳 지리산을 찾아 덕산에 자리 잡고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뒷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도포자락을 걷어 올리고 장검(長劍)을 뽑아들고 이 강토를 지켰다. 그리고 덕계 오건(德溪 吳健)선생은 청렴강직으로 일관하여 국가의 비정을 바로잡고 그 정신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구한말(舊韓末) 면우 김종석 선생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평화회의에 보내고 일본경찰의 고초를 겪다가 옥고로 돌아가셨다.

이러한 정신이 온 고을에 팽배하여 이어져왔다. 고려조정에서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바른말을 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곳 산청 단성고을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시고 오직 목화 재배에만 정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뒤 이성계(太祖)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불러도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 뒤 이성계 조정에서 만들어 낸 태조실록과 고려사 열전에 충신을 역으로 몰아 문선생의 기록들이 잘못되게 전하여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두 사서(史書)에 의하여 그 빛을 잃고 있으니 우리 산청의 큰 인물 이신 삼우당 선생의 절의(節義)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을 재 발굴하여 그 분의 인간상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삼는 바입니다.

역사에 가려진 삼우당 문익점선생

삼우(三憂)는 세 가지 근심과 걱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호를 삼우라 하셨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나라가 진홍(振興)하지 옷함을 걱정하며, 둘째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셋째는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삼우란 호의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蕭王) 원년(辛未) 1331년 2월 8일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충정공(忠貞公) 문숙선의 둘째 아들로 문벌 높은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일찍이 학문의 길에 올라 가정 이곡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그 자제 삼은(三隱)의 한사람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동문으로 함께 정동향시에 합격하였고 계속 학문에 정진하여 그 뒤에 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과 같이 신경동당시(新京東堂試)에 급제하는 등 올바른 윤리관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높은 교육이 근본(根本)이 되어 당시에 세상이 기울어져도 휩쓸리지 않고 오직 바른 자세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불 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부러지듯이 과도기의 정치혼란을 만나 숫한 역경 속에서 일생을 얼룩지게 살아오셨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朝蘇)이 서면서 도덕 정치가 폐쇄되고 세력정치를 주도함에 따라 당시 많은 중신(重臣)들이 함몰되었고 그 세도에 굽히지 않았던 문익점 선생은 조선조의 사서(史書)에 유린되어 정의(正義) 로웠던 선생의 위업이 왜곡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태조실록(太祖實錄) 고려사(高麗史) 열전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태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7년 6월에 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졸(卒)하다. 갑진년(甲辰年)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앗 반(半)을 본 고을사람 전객령(典客令)으로 치사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오직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 씨를 향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번영하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이 천익의 집에 머무르면서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가르쳐주어 천익의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 한필을 만드니 마을에 전하여 십년이 못되어 온 나라에 퍼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흥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서 전의주부를 삼았다.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는데 이는 목면 유래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0|다. 그 근거는
첫째, 목면 배양년도를 갑진년이라고 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선생의 년보(年譜)와 사실기(事寶記), 효자 비각기, 묘비 등 여러 고증에 의하면 계묘년에 순유박사로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승진하여 이공수(李公送)와 같이 사신으로 원조(元朝)에 들어가서 그 부당성을 간하다 순제(順帝)의 미움을 사서 갑진년에는 원나라의 운남성(雲南省)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삼추(三秋)의 세월을 보내고 귀향하였는데 그때가 정미년(丁未年)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갑진년 목화시배(木花始培)설은 날조 된 것으로 보아진다.

둘째, 목화 천익 배양설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있는 것은, 3년 동안 귀양살이에서 풀려 죽음을 무릅쓰고 오직 내 조국의 헐벗은 백성을 생각하여 소중히 감추어서 가지고 온 몇 알에 불과한 그 귀중한 것을 남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는 것이 공감 할 수 없는 것이며 더욱이나 일가친척과 부모형제가 번창하게 한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타인에게 부탁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설령 사실이 그렇다면 그처럼 가까운 사이에 네 것 내 것을 가려 재배공적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천익이 심은 것이 살아서 3년을 가종하여 정미년 봄에 향리사람들에게 씨를 나누어 주었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번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목면의 가공기술까지 정천익이 모두 창조하였다라고 하여 물레와 무명베의 유래를 무색케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물레를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 래(萊)라는 사람이었음으로 그 이름을 인용하여 실 뽑는 기구를 문래(文萊)라고 하였는데 와전되어 물레라고 하며 또한 베짜는 기구는 래의 동생 영(英)이 개발하여 문영(文英) 틀이라 하였으며 베 이름 또한 문영베라고 하였는데 무영베로 불러지다가 와전되어 무명베라고 불러지고 있다 라고 선생의 실기에 적고 있다.

셋째, 이 사실(목면가공기술보급)이 알려지니 익점(益漸)을 불러 전의주부로 삼았다.. 내용은 정천익과 그 여종까지 공로를 기록하면서(천익과 그 여종에게는 아무런 대우를 보이지 않고) 익점에게 벼슬을 주었다.. 라는 것은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있으며 문익점선생에게 전의주부를 주었다는 것은 선생의 품위를 크게 위축시킨 것이다. 그 당시 전의주부는 종7품의 하급관리로서 선생의 초기 관직인 좌정언 정6품에도 못 미치고 있으며 그때 우왕원년에 선생은 충현대부 좌대언우문관제학 정3품에 보임되셨다.

이상은 태조실록에 관한 것이며 다음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본다.
고려사열전 문익점 편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德興君)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敗)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 죽고 한 포기만 살아 삼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 ※ 공양왕원년(1389) 이성계 시중(待中)의 무리들이 추진하고 있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조준(趙浚) 이정(李靖) 등이 강행을 시도하고 사전(私田) 불가론(不可論)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라 안은 매우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선생께서는 이색, 이림, 우현보등에게 장차의 나라 일을 염려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그들의 개혁에 서명을 거부하고 다음날 서연(書筵;임금을 모신 회의장)으로 나가니 대사헌으로 있던 조준이 선생을·탄핵{彈劾) 하기 시작하였다. 탄핵골자는 문익점은 본시 무명인사로서 시골에서 밭갈이를 하였는데 그런데도 전하(殿下)께서는 현량(賢良)0|라 불러 간의대부로 제수하사 좌우에 있게 하시고 충략하고..... 왕의 결에서 성치를 보좌해야 할 것임에도 충직한 모양만 꾸미고 간정(정치의 옳고 그름)하는 절개가 없으며 근일 같이 주상을 모시고 있는 동료 오사충(吳思忠), 이서(李舒) 상소하여 전제에 찬동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익점은 가진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바 없고 그 의논에도 참여하지 아니하고 대중의 비방을 피하여 자기 안전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이는 왕과 사림이 기대하는 뜻을 져버리는 행위로서 마땅히 간직을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하여 어린 왕이 그들의 뜻을 따라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선생의 인품을 흐리게 하였는데 이 모두가 날조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덕흥군에 부하였다는 것이 왜곡된 것이다. 선생은 원나라에 가서 원제(元帝)로 부터 덕흥군에 따르라는 명을 받고 바르지 못한 덕흥군의 뒤를 따를 수 없다는 글(奏對)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미천한 소신이 외람되게 천자님께 글을 올리나이다. 신은 이제까지 원통함을 품고 마음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 비록 적은 나라 소신이라고 바르지 못한 일을 보고도 어찌 모르는 척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데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고 죄 없는 군주를 물러나게 함은 정당한 일이 못 되오니 이들의 야망을 버리게 하옵소서. 저의 나라 왕은(恭民王) 이제까지 선정을 베풀어 왔던바 아무런 잘못이 없나이다. 소신은 정의롭지 못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들과 같은 하늘아래 있다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죽어 지하에서 백이숙제와 같이 머물지라도 사대부의 자존의식은 버릴 수 없나이다.”

이상과 같은 글을 올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선생은 또한 덕흥군의 정치업무 문서 수십 통을 소각하였으므로 그 모략을 저지하였던 대담성을 나타내었는데 그러한 큰 뜻을 무시하고 덕흥군에 아부하였다고 한 것은 충신을 역으로 몰아 역사의 오점을 남긴 것이다.

둘째, 선생은 좌사의 시학으로서 상서하여 위학하는 도를 논하니 그때에 조준 간관 이정 등이 사전(사유농지법)은 불가하다고 다투므로..... 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다음 이어지는 글에는 익점은 가진 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전제개혁)의논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글이 일관성이 없으며 또 록을 잃을까 걱정하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와는 달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으므로 록을 잃게 된 것이다. 속임수로 글을 꾸며 사서(史홈)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 것이다

셋째, 전제개혁안은 마치 조준이 창안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 토지제도가 문란하여 백성들이 소작권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과도한 조세를 바쳐야 함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이 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감안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여러 신하들로부터 거론되어 왔던바 그 당시에 국가에 공적이 두터웠던 선생이 구국정신으로서 시무론(시급한정책) 8조를 상소하였는데 그것을 한번 살펴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건학당(建學堂), 치향교(置鄕校), 입묘주(立朝主), 혁호복(革胡服), 정기강(整紀網), 박세렴(薄租敏), 건의창(建義倉), 설수침(設水砧) 등인데 이중에서도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하고 수로를 개척하여 물자 운반을 쉽게 하고 각 고을에는 창고를 지어 흉년에 대비케 하고, 5부에 학당을 세우고 작은 고을에도 향교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에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토지 사전제도와 문교진흥정책의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시무론8조는 신세력들의 저지로 모두 이룩되지 못했고 이성계의 조언에 따라 구상된 조준의 전제개혁안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모든 토지를 복구적인 국유정신에서 재편성하는 것으로 구세력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환원하여 새로운 규정에 의하여 재편성하게 되므로 고려 왕조의 최후를 종결하려는 의미와 동시에 신세력을 확장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때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하였던 사람은 문익점, 이색, 우현보, 변안열, 권근, 유백유 등 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반듯이 그 서열에 들어야할 문익점선생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역사가 잘못된 기록을 남기게 한 것이다.

아, 아.... 선생께선 무엇을 위하여 몰아치는 태풍에도 휩쓸리지 않았을까? 고려조 기개가 그토록 중요하였을까? 오늘에 와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는 깊은 마음속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로 조선조의 사서에 선생의 위업이 유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개탄하여 저명하신 퇴계(退溪) 이황(李愰)선생께서는 문선생의 효자 비각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조준(趙浚)이 한순간에 억지로 험담을 꾸민 말이 어떻게 공(公)을 더럽힐 수가 있으랴. 그로 인하여 선생의 절의가 더 한층 빛나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잘 모를까 염려가 되도다.” 하셨다.

또, 가선대부, 이조참판 이미(李彈)선생께서도 문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준의 견식이 선생의 숨은 뜻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여 이에 반문으로 그릇된 말을 만들어 선생을 탄핵하여 물러가게 하였는데...... 그 후에 태종대왕이 선생의 뜻을 기리어 공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세종대왕이 다시 영의정과 부민후(富民候)를 가증하셨으며 그 자손들을 돌보아 출세하는데 특혜를 내리셨으며, 문순공 이황 퇴계선생은 선생의 효자비에 기록하고, 문정공 조식(南莫曺植)선생이 공의 묘사기를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가 역사를 전하는 뜻이 높음을 근거한 것이다. 선생은 목면으로 나라의 커다란 공을 세우셨지만 학문에 있어서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서적이 왔을 때 이를 침착하고 세밀하게 추구하여 그 깊은 뜻을 깨달아 이 땅에 전할 수 있었으니 하늘이 도와 진실 된 일을 내린 것이다.

아,아.... 문공(文公)이시여 교양의 시작 이였도다. 보이지 않는 그 혜택이 무궁토록 흐를
지로다. 모든 합생(合生)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어찌 가히 있게 할 것인가? 라는 글을 쓰셨고 또 선생과 소년시절부터 동문으로 사귀어 온 목은 이색은 대사성의 직위에 있을 때 사성이었던 선생에게 치하한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문공(文公)은 목면으로 큰 공을 이룩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도 역학을 창명하였고 효제와 성리학으로 삼한의 과습을 세거(洗去)하여 어두웠던 천도(天道)가 밝아졌으니 가히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종(宗)이 된다“라고 하셨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사후서에 선생에게 드리는 글에는 내가 문충선공의 공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일두 정여창,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모제 김안국, 사제 김정국·, 추강 남효온 등 여러 현인의 문집을 보았으므로 문선생의 공로가 막대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목면의 공 뿐만 아니라 유가(儒家) 유교의 학문에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문성공 안유(안향으로 전해짐)와 문충선공 두 현인께서 우리나라에 유도를 계승하여 전해왔는데 그 덕의 깊은 뜻을 격양가(노래제목)의 한 구절에 임금님 힘이 어찌 미칠 것인가? 라고 했다. 안문(安文) 두 어진 분의 덕택으로 고려가 되놈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씨 왕조가 지위를 존엄케 할 수 있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큰 뜻을 이룩하셨도다. 아, 아..... 문공의 절개와 의리 조출한 풍격이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도다.. 하시며 시로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전의 사람도 문공과 같은 이 없었고 후의 사람으로서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뒤의 뒤에도 역시 문공과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내 뒤의 뒷사람들이 선생에 대하여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글을 남기노라. 이와 같이 간곡한 글로서 선생의 위업을 극찬하셨다.

근세에 와서는 영특하고 현명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목화시배지에 사적비를 건립하게 하였으며 그때에 박대통령께서 내린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귀 선조 강성군 충선공 삼우당선생을 기념하는 비가 이제 강성(단성)의 옛 고율에 우뚝 솟았으니 실로 국가의 춘추를 미루어 보거나 교지의 한낱 종자롤 생각하면 이는 우리 생민(生民)0| 모두 다 축하롤 올려야 할 것이요. 라고 하셨고,
또 사단법인 진주문화원에서는 향토의 얼을 캐는 시리즈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제1집은 남명 조식선생에 이어 제2집에는 삼우당 문익점선생 편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에 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故 이창호(李昌鎬) 문화원장께서 발문을 쓰시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반론(反論)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우리겨레 불망(不忘)의 공덕을 세운 위대한 선인(先人)0|다. 중략하고......당시 공민왕의 사신으로 원(元)나라에 간 사람이 어찌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던가. 또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국하였다 되어있는데. 이를테면 모반(謀反)의 대역죄(大逆罪)를 저질렀던 사람이 어찌 다시 공민왕 치하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또 귀국한 즉시로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 및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해서 덕흥군이 어떤 분인지 살펴보았다.
덕흥군은 고려 충선왕의 서자로서 이름은 탑사첩목아이며 어머니는 궁인인데 출궁하여 백문거 집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 있었으며 원나라 황제께 아부하여 고려에 많은 해를 끼쳤으며, 고려의 왕이 되려고 공민왕 13년에는 최유와 함께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침입하였다가 안우경, 최영 장군 등에게 참패를 당하고 돌아갔다로 되어 있는데,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황제가 덕흥군을 따르라는 것을 반대하다가 남방으로 귀양 갔던 것이다. 그런 것을 뒷날 이태조 4년에 꾸민 고려사 열전에 유부 덕흥군이라는 허위의 말을 써 넣어 오늘의 혼선을 빚게 한 것인데 그 원인은 선생께서 이씨 왕조의 혁명을 지지했거나 또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여 벼슬에 나갔으면 이런 곡필(曲筆)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미루어 선생께서 덕흥군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이태조(이성계)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건만 같이 여조(麗朝)에서 벼슬을 살았을 때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으로 끝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절개(節槪)를 지켜낸 사실(事實)을 들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의 업적이 역사에 왜곡된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서(史書)에 의존하는 오늘의 학자들이 영남의 인물지를 발간하면서 가장 제일 먼저 앞 서열에 모셔야할 문선생을 일천 명의 서열에도 들지 않게 하고 있으니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목면유래 또한 정천익 공적설이 가시화되면서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역사유적의 하나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있는 이 나라 대통령이 지정한 사적 제108호 문익점선생면화시배지 명칭도 고려사 및 태조실록 기록에 맞추어 문익점선생 이름을 빼고 그냥 목면시배지로 지정한다고 문화재청에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홍직 박사는 몇 년 전에 국사대사전을 만들면서 목화유래에 대하여 실 뽑는 기구 물레와 베 짜는 기구 베틀을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인 문래와 문영 인데 이 두 분을 정전익의 아들과 손자라고 오도하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두 사서에 가려서 그 빛을 잃고 있으니 이는 오늘의 사회를 다스리는 지성인들의 책임으로서 하루속히 역사에 왜곡된 실체를 밝혀 사리에 맞도록 역사가 전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사서에 가려져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는 고려조 출신이시며 우리 산청의 큰 인물이신 삼우당선생의 절의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과 인간상을 재 발굴하여 그분의 정신과 얼을 후세(後世) 사람들이 본받게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삼우당실기, 삼우당선생 연보, 효자비각기 신도비문, 고려사열전, 태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진주의 인물

< 원나라에서 남황(월남지방)으로 귀양살이 가면서 남긴 시문>

이젠 이내 얼굴 대하기 어려울 걸세
낯선 거친 먼 땅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늘이 감동하여 혹시라도 말머리에 뿔나면
그대는 알아라 내 살아온 줄을
눈물이 쓸쓸한 비를 가려 만리 남항 길 아득 하도다
사람들아 의심 말라
나는 신념 있어 젊은 기운 태산과도 같도다.
빨리 가자고 수레군 재촉하지 말아라
내 마음 고향 갔다 아직 오지 않았다
가을달이 뜰 때 그대 곁을 떠나 거친 땅에 가고 있네
봄바람 불 때 다시 만나서 한번 웃어 볼 때를 기다려 주소서

 

4. 영호남 곳곳에 큰덕 기리는 유적들

영호남 곳곳에 큰 덕 기리는 유적들
역사의 인물탐구 집중기획- 시사월간 win 기자 김일곤

문익점의 유적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민족의 기림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공덕이 온 나라 안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와 그를 도와 목화의 재배와 보급에 힘쓴 장인 정천익이 사적을 찾아보았다.

96년 개관될 목면시배지 기념관

지리산 자락이 길 게 뻗다가 남강을 만나 멈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문익점이 태어난 고향이자 목화를 처음 재배한 목면시배지다. 사적 108호로 건립됐고 88년부터는 기념관 건립을 비롯한 사적정비 사업이 시작돼 8년째 진행 중이다. 3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 중 200여 평의 전시관은 이미 건물이 세워져 단청작업만 남았다. 그러나 예산지원이 원활치 못해 당초 93년 완공예정이었던 것이 96년 개관으로 늦춰졌다.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병태(李炳泰.85)옹은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마을회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1백 평 남짓한 집터에 아담한 기와집이 단정하게 들어앉아 있다. 넓은 앞마당에는 갖가지 채소를 심어 가꾸는 텃밭이 있다. 다른 쪽에는 감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한창 농사철이라 어른들은 들에 나가고 꼬마들만 방학이라 집을 지키고 있다 낯선 손을 맞는다.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 집은 사월리 529번지로 현재 이병미(李炳美)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물론 집은 옛집이 아니고 당시 문익점의 자취 또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나지막한 동산을 등지고 산간치고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집터는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이란 느낌을 주었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현재 산청군 보호수로 지정(1982)돼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10년 정도로 아직도 왕성하게 잎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원 뿌리가 한동안 죽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되살아나 후손들이 단을 쌓고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제를 올린다.

문익점 생가가 있는 배양마을에 현재는 문씨 일족이 한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외손인 합천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이 합천 이씨들의 세거지로 변하게 된 것은 문씨들이 후대에 이곳에서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은 선생의 외손가인 합천이씨들이 지켜왔다. 이병태 옹의 말이다.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 신도비

문익점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병능 산청문화원장은 문익점후손들이 기림보다 후학들의 기림을 더 받았다. 이는 선생이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한다 고 말한다.

문익점은 목화의 전래자로서 뿐만 아니라 후일 우암 송시열의 말처럼 안향과 더불어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다. 문익점의 서원 등이 훼손될 때마다 사림들이 상소하여 이를 중수하는 정성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주에서 원지를 거쳐 산청읍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문익점선생 목면사적지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과 신도비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신안면 신안마을에 속한다. 신안면에 사는 24대손 문병운 씨는 마을 안 월성초등(교장 하대규)에서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씨는 이 학교에 삼우당 교실이 있다며 돌아보기를 청했다. 한때 전교생이 500여명에 달했던 이 학교는 여느 농촌 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이 50명 정도로 줄어든 미니학교다. 방학 중이기는 하지만 운동장에는 동네 꼬마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만 요란했다.
72년에 처음 문을 연 삼우당교실에는 문익점 선생과 조선왕조의 대유학자로 이 지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기른 남명소직 선생의 행적 등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목화의 실물 목화씨를 빼는 씨아 물레 베틀 등 무명천을 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이 실물대의 작업인형과 함께 재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삼우당교실을 둘러본 후에 바로 이웃해 있는 도천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천서원은 문익점 사후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원래 문익점이 말년에 은거했던 도천가에 지었던 것인데 중간에 소실되는 바람에 중건하며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도천은 지금도 도내라 불리는 곳으로 집현산 아래 양천강가를 말한다. 도천서원에는 문익점의 영정이 있다. 당초 문익점의 영정은 영남의 선비들이 중종6년(1511)에 두벌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벌은 도천서원에 한 벌은 선생이 어릴 때 글을 읽었던 벽계서원에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 도천서원과 장흥 강성서원, 광주의 충선공영당 등에 모시고 있는 영정은 모두 그 후의 모작이다.

서원 왼편 산자락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경호강 너머로 지리산 주봉을 바라보며 서향한 묘소는 첫째부인 팔계 주씨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묘비를 단장하면서 새로 세운 석물들이 오래된 석물들과 나란히 서있다. 문익점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합천 이씨 일족의 묘소 세 기가 자리하고 있다. 맨 아래쪽에는 이퇴계, 조남명과 동갑친구인 청향당 이원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청향당은 문익점의 손녀인 문씨 부인의 손자로서 도천 서원의 중수에 공이 컸다. 배양 마을과 마찬가지로 외손인 합천 이씨가 170여 년간 외손봉사를 한 적이 있어 문익점의 묘소 아래쪽에 이들의 묘소가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비각 사적지 입구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는 순조 34년(1834)에 경기도 강화도 앞바다에서 캐낸 돌을 옮겨와 글을 새겨 세운 것이다. 목화가 한민족 모두에게 혜택을 준 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운반 길에 자리한 각 고을의 수령과 보부상들이 모두 나서서 3년여에 걸쳐 등짐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신도비는 원래 종 2품관 이상의 무덤 앞에다 그의 공적을 기려 세우는 것이다.

목화의 재배와 전파에 공헌한 정천익의 추적할 길 없는 생애

신도비에는 문익점과 함께 장인인 정천익의 기여도 언급하고 있다. 진양 정씨 집안에서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라 정천익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선시대에도 진주 사람들은 도천서원과 연락을 하며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 때문에 서열을 정하기 어려워 도천서원에 함께 향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국사편찬위원회와 비서실 등에 지시하여 진양 정씨 문중의 청원에 대한 사실 조사를 명하고 그에 따라 유방백세 라는 휘호를 내렸다.
산청에서 취재 도중 우연히 만난 정현택 씨(남명학연구원 이사)는 진양 정씨 문중의 24대 종손. 마침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에서 성균관 한림원 학생들의 하계 수업이 있어 이곳 일을 맡아보고 있는 그도 산청에 머물고 있었다. 정씨는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평문씨 문중이 시배지 기념비를 세우면서 모든 공을 문익점에게 돌리고 정천익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죠. 시정을 약속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 따로 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겁니다. 청계서원은 원래 진양군 대평면에 있었으나 진양호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어 진주성내 현 위치로 옮겨온 뒤 정천익의 사적비도 세워졌다. 양 가문의 감정대립은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양 가문 출신 정치인들에 의해 중재되어 현재는 서로 인정을 하고 있는 상태다.

정천익은 단성현 소남에서 태어나 배양마을로 이사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양마을에서 지리산 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감나무와 고택으로 유명한 남사마을이 있고 그에 조금 못미처 관정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타난다. 진양정씨 일족이 아직 지키고 있는 이 마을에서 만난 정태은 옹은 기자에게 마을의 내력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옛날 우리 조상분 중에 관정이란 아호를 쓰는 분을 따라 관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게 6백년 전의 일이다. 정천익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그 후 배양으로 이사 가서 살았다. 때문에 목화시배지는 현재의 배양마을이 맞다" 정옹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정천익이 문익점의 어린 시절 천자문 선생이었으며 나중에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고 말했다. 지금 관정마을은 논이 많지만 과거에는 마을 입구의 논도 모두 밭이었다.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마을 앞길이 있는 곳에 둑을 쌓아 물길을 내는 바람에 그 좋던 우물마저 말라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정옹은 관정리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초 관정 선생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로 쭉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전에 진양 대평 쪽으로 옮겨갔다. 관정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백여 년 전이었다. 돌아와서 마을을 복구하는데 옛날에 밭이었던 저 앞 논에서 정자만 남아있는 비석토막을 발견했다고 한다. 분명 집안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논들을 전부 뒤엎다시피 했지만 결국 본체는 찾지 못했다. 이로 보아 관정마을이 진양정씨들의 역대 세거지였으나 병란을 비해 일족이 이동하는 바람에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천익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문익점전의 일부 기사 외엔 그가 지었다는 한시 한 구만 전해오는 이유도 설명된다. 진양 정씨 문중에서 펴낸 청계지를 보면 정천익과 문익점 간에 화답한 한시 한구가 남아있다.

"세상일 어지러워 돌아보면 무엇하리 / 대와 솔 푸른 그늘 뜨락에 가득한데
/ 바람에 그윽한 뜻을 맡겨두고 사느니"(정천익)

"산 이내 물에 어려 갈매기 하얀 날래 / 숨어서 사는 이 몸 뉘 있어 날아주리
/ 골짜리 깊숙한 숲속 드높은 뜻 기르네"(문익점)

옹서간 화답한 시의 세계는 얼마나 높고 맑은가.

취재도중 만난 한 사람은 남평문씨와 진양 정씨 가문의 분쟁을 한마디로 "의식이 아직 씨족사회에 머무르고 있다"고 평했다. 전국에 산재한 문익점의 사적은 수없이 많지만 특히 전라도 지역은 면포의 최대산지였던 관계로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발길을 돌려 전남 장흥의 강성서원으로 향했다. 장흥읍의 입구격인 유치면에서 월천을 건너자 동네 아낙들이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강성서원에는 홍색 관복을 입은 문익점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이 영정은 복식과 관모가 당시의 관작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정을 모신 숭덕사 문 옆에는 문익점비로 잘못 알려진 풍암 문위세의 신도비도 서 있다.

온 나라에 두루 미친 목화의 공덕

강성서원은 숙종 28년(1702)에 창건되어 정조 9년(1785)에 사액되었다. 3백5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이는 문익점의 13대손 문천우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취재진의 발걸음이 지체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서원 앞 정자에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 있던 문태열 옹을 마을회관 앞 정자 위에서 만났다.
"원래 강성서원에 모셨던 분은 풍암 선생이다. 그 분은 퇴계 선생은 제자인데 퇴계 선생이 유독 그분에게만 병서를 주어 익히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창의해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나라에서 파주목사를 제수했지만 병을 핑계하고 은거했다. 그런데 문익점 선생을 합향하게 되면서 후에 사액 받게 되었다"
문옹은 조상인 문익점이 "유학자요 충신이며 효자이면서 목화로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힌 겨레의 은인"이라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 사림이 상소를 올린 대목에서는 "아무리 그 공덕이 커도 선비가 할 일은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서 끝내 배향은 못했지"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선비가 할 일 가운데 백성을 편안케 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을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보성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부조묘란 영원히 폐지하지 못하는 사당으로 태종의 명에 따라 처음 세워졌으나(태종원년인 1400년) 후사가 이어지지 못해 제사가 끊기는 등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다가 철종 5년(1854)에 보성의 도개리에 다시 세워졌다.

의성 목화시배지

경북지방도 전라도지방과 더불어 목화의 대량 생산지였다. 경북 의성에는 한말 융희3년(1909)에 세운 "충선공 삼우당 문선생 목면유전표비"가 금성면 제오리에 있고 일제 시대에 세운 "충선공 부민후 강성군 삼우당 문익점 선생 면작기념비"가 금성면 대리에 있다.
"이 지방의 구전으로는 조선 태종 때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고을살이 하러 왔을 때 문익점이 손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의성의 토질이 금주성과 비슷한 것 보고 목화를 재배했다고 한다. 의성문화원 이중헌 원장이 굳이 구전이란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이를 고증하기 위해 국조방목 등 자료를 검토해봤으나 문승로가 과거에 합격했거나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을 찾지 못한 때문이란 것이다. 문승로의 동생이 등과했으나 의성지방에 고을살이 한 적은 없었다. 이 이야기는 교남지와 의성승감 등에도 기록돼 있으나 모두 일제 시대에 세운 "면작기념비" 이후에 엮어 진 것들이라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목면유전표비의 바로 곁에 노인회관을 짓고 주변도 시멘트로 발라 볼품없이 됐지만 이 고장에서 면화재배가 성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에 있는 일제 시대 때 세운 면작기념비는 그 내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조선 태종 때 그의(문익점의)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밭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했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의 현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지 않은 내용을 그대로 비에 새긴 경위를 이원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의성은 예부터 면화의 생산량이 국내 으뜸가는 곳이었다. 이 비가 세워진 1935년은 중일전쟁 도발을 앞두고 일제의 면화공출독촉이 심해지던 때였다. 결국 이 비 건립에 참여한 인사들이 일본인들과 이 지역의 친일파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면화공출을 독려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문익점의 유적지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확인한 문익점 제향서원만 13곳에 이른다. 우리 역사상 인물 중 후세 바람들에 의해 널리 추모되기로는 모시는 사당 등으로 따져볼 때 문익점 선생과 최영 장군이 쌍벽을 이룬다. 최영은 고려말 외적과의 전투에서 전승을 기록한 명장이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만주 옛땅을 회복하려다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간 민족의 영웅으로 특히 남,서해안지역에 그를 모시는 당집이 많다. 그런 최영과 더불어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이 많다는 사실은 그가 민중들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두텁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文益漸의 생애와 木綿 傳來 事蹟의 검토
文益漸의 생애와 木綿 傳來 事蹟의 검토
- 文致昌 撰 「家傳」의 내용을 중심으로 - 김해영 교수(경상대학교 사회교육학부)

1. 머리 말
2. 문치창의 가전(家傳)과 삼우당실기
3. 가전 所載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4. 맺음 말

1. 머리말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와 이를 보급시킨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져온 10 餘 枚의 목면 씨앗이 그의 고향(경상도 강성: 현 산청군 단성면)에서 기적적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전국에 보급된 목면업은 농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의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이후 오로지 문익점에게 그 공적이 돌아가게 되고, 더욱이 그러한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가 문익점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衣冠 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功이 강선군 보다 클 수 없고 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한 수 없다”라고 극찬했던 것은 이 같은 사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익점은 비단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金宗直을 비롯해서 鄭汝昌, 金宏弼, 曺植, 李滉 등 영남 유학의 거벽(巨擘)들이 한결같이 목면 보급에 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한편, 더불어 그의 道學과 德行 忠節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이나 「조선왕조실록」의 卒去 기사에 간략하나마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상세한 기록과 관련자료는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이들 기록 간에는 문익점의 생졸 연대와 사환(仕宦)이력, 在元시 행적에 관한 기록에 상위한 점이 있고, 따라서 목면종자의 전래 및 재배 시기와 관련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있어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가 使行으로 元都에 간 시기는 원제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신왕으로 책봉하던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그가 원도에 있으면서 취한 행동에 대해서 『고려사』와 『삼우당실기』 간에 전혀 상반된 내용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학술적 성격의 연구에서는 “삼우당실기”의 기록 보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보다 신뢰하여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였던 것을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삼우당실기』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행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家傳」의 존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家傳」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오랫동안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남평문씨 문중에서 족보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순조 8년(1808)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반에 알려진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가운데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이나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보이지 않고 “가전”에서만 확인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가전”의 자료적 신뢰도를 살피는 것은 “삼우당실기”를 통해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문익점의 생애나 행적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검토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문치창의 「家傳」을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 가운데 몇 가지 문제시되는 부분에 대해 관련 내용을 검토한 글이다. 따라서 그의 생졸 년월과 사환 이력, 재원시 행적 및 목면 종자 전래 시기에 관한 “가전”의 기술 내용을 주된 검토 내용으로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문치창이 “가전”을 찬술(1464년 찬)하게 된 배경과 “가전”의 발견(1808년 발견)을 전후로 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물에 나타나는 중요한 변동 내용도 살펴보고자 한다.

2. 문치창의 “가전”과 “삼우당실기”

1) 문치창(文致昌)과 “가전(家傳)”

“家傳”은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세조 10년(1464)에 찬술한 것으로 전해지며 “삼우당실기”에 재록되고 있다. 문치창은 문익점의 장자 中庸의 손자로서, 부는 承孫이다. 문치창의 祖 中庸은 문익점의 목면 전래 공적에 대한 음덕으로 태종조에 사헌부감찰의 벼슬에 특배되었고, 그 뒤 사간원 정언의 벼슬을 거쳤음이 확인되는 만큼, 태종조에 관도에 오른 이후로는 상당 기간 고향을 떠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치창의 父 承孫도, 『남평문씨족보』에 따르면 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戶曺佐郎에 이르렀으며 문치창 역시 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監察의 벼슬을 거쳤던 것으로 나타난다. 문치창이 家傳을 짓게 된 것은 세조 7년의 단성 방문이 계기가 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의 단성 방문이 그로서는 선조의 고향을 처음으로 찾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가전”에 따르면 문치창은 세조 7년(1461) 겨울 선조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三從兄과 같이 서울에서 丹城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 宗家에 들러 선대에 남긴 遣蹟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종가에서 본 것은 병오년(1426)의 화재를 입고 남은 나머지 문적가운데 일부로서, 그나마 당시 화재를 면하여 남아있는 것은 얼마 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대로 방치해서는 세월이 흐르면 더욱 없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주위에서 선조의 행적과 관련 있는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그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해서 이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에는 세조 7년(1461) 당시 문치창이 단성에 이르러 선조 의 유적지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 쓴 詩와 함께 시의 서문이 남아 있는데,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사년(1461) 겨울, 나는 서울로부터 龜城(단성의 별명)에 이르러 도중에 선조께서 사신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나무는 우리들의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고, 저 언덕과 저기 흐르는 강은 또한 우리의 선생께서 낚시질하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고삐를 놓고 방황하여 눈을 들어 산하를 둘러보니 오래된 나무는 가지가 적어 엉성하고 찬물 흐르는 강은 눈을 내뿜는 듯하여 나를 위해서 감회를 돕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을 사람들은 다 선조를 존경하여 우러러 칭송하기를, "선생의 공은 다만 한 고을이 힘입은 바가 아니라, 한 나라가 힘입은 바이고, 다만 한나라가 힘입은 바 일뿐만 아니라 만세가 힘입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선조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문치창으로 하여금 증조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 보존해야겠다는 결심을 자주하여 그 결과 오늘날 『삼우당실기』 속에 실려있는 「家傳」이 찬술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家傳」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순조8년(1808)에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海島에 살고 있는 문익점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중요한 자료가 문치창이 “가전”을 지은 이래 340여 년 동안 그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다가 남평문씨 족보 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해도에 살고 있는 후손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이밖에 소장자의 인적 사항이나 입수 경위의 전후 사정에 대한 다른 설명이 없는 점도 자료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하튼 현재 文益漸이 남긴 遺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가 순조 19년(기묘 1819년)인데, 삼우당실기의 발행은 바로 이 「家傳」의 발견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우당실기』는 문익점의 제 18세손 文桂恒의 주도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삼우당실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가전”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문계항의 다음 설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삼우 선생이 내게는 17대조이시다. 돌아가신지 400여년에 세대가 綿遠하고 宗祠가 屢乏하여 선생이 지으신 詩文과 疏章이 적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집안의 화재로 잃고 다음에는 병화로 소진되어 탕연히 전해지는 것이 없었고 중간에 수록한 것으로 단지 '家傳' 한 본이 있었으니 대개 天順 甲申에 감찰공 致昌이 지은 것이나 이 또한 잃어버렸다. 이후 전하는 것은 특별히 각 집안에서 기록한 약간의 私乘 뿐이었다. 지난 병술년에 단성의 사림 朴思微가 찬한 행적기 한 권은 道川院蹟으로 인해 만든 것이고 또 무신년에 冠山에 사는 宗丈 泳光 씨가 간행한 “공신록”은 여러 집안에 소장된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도답襲 巾衍한 문자일 따름이어서 大義가 궐약하고 錯亂된 것이 파다하며 또 년월과 시대가 상호 그릇되어 뒷날 의혹을 일으킬 곳이 심하였다. 지난 무진 여름에 다행이 족보를 간행하는 일로 인해서 이른바 「家傳」 한 卷을 얻었으니 바로 天順 8년에 遺集한 것이었다. 나는 곧 손을 씻고 책을 펼치니 훤하게 마음의 눈이 열리었다. 이로부터 어리석고 식견이 좁은 줄도 모르고 외람된 생각을 품어 지금까지 선조의 행적에 관해서 잘못 되었던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다 . 이에 선조의 행적에 관한 여러 이름 있는 글과 諸賢이 남긴 문집을 열심히 찾아보고, 비록 한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도 증거와 신빙성이 있으면 애써 한군데로 모았다.

즉 문계항은 문치창이 지은 가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그 동안 그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가졌던 여러 의문이 풀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급기야 그간에 잘못 알려져 있었던 문익점의 행적을 바로 잡아 고치는 일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계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우당실기』의 초간은 이렇듯 「家狀의 발견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家傳」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술이 현전 『삼우당실기』의 삼우당 행적에 관한 내용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삼우당실기』는 가전 발견 이전에 있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잘못 알려져 있었던 부분을 가전의 내용에 맟추어 고쳐서 바로 잡은 결과물이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家傳」의 발견과 『三憂堂實記』의 編刊

앞서 보았듯이, 『삼우당실기』는 초간 당초부터 「家傳」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행적을 중심으로 편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삼우당실기』는 문익점 후손가에서 그 이전에 輯錄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다른 기록과는 차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삼우당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여러 글들을 모아 정리하려는 노력은 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이는 주로 문익점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賜額을 청원하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문치창의 가전을 논외로 하면, 문익점 사후 그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려는 어떠한 형태의 기록정리 작업도 없었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 「行蹟記」라는 것이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행적기」가 만들어지는 숙종 34년은 단성 유림이 朴恒泰를 硫首로 해서 道川書院의 사액을 청원하던 해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행적기」는 도천서원의 청액을 위한 근거 자료의 확보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 현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뒤 영조 42년(1766)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 있던 朴思微의 주도로 『忠宣公行蹟記』라는 책자가 편찬되었는데, 당시 박사휘가 쓴 「忠宣公行蹟記序」에는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에 행적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은 알지 못하나 지난 무자년(1708)에 고을의 父老들이 여러 명현이 기록해 놓은 몇 가지 글을 대략 써서 책자로 만들었으나 갑신년(1764) 가을에 尊廳이 화재를 입어 재가 되었다. 못난 내가 마침 욕되게도 서원의 원임을 맡고 있어서 선생의 행적이 없어져 전하지 않음을 개탄하여 고찰할 수 있는 것을 널리 구했었지만 지나간 왕조의 일을 누가 자세히 기록했을 것인가. 나는 같은 직임을 지닌 都命嵩, 朴思權과 더불어 사방으로 물어 찾아, 국조 역대왕의 褒贈은 國乘에 실려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혹 고려사에서 베끼고 혹은 선현들의 기록한 것을 모은다든가 또는 문씨족보와 勝覽에 실려 있는 것 중에서 채택해서 모아 『忠宣公行蹟記』라 이름하였다.

이 때의 『충선공행적기』는 「家傳」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국조 역대왕의 衰贈 기록”과 高麗史, 先師들의 기록, 文氏譜書와 勝覽 등 당시까지 전해져 알려진 여러 기록을 참고로 하여 문익점의 행적을 정리 기술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충선공행적기』 역시 현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살필 길이 없다. “충선공행적기”(1766) 이후 “삼우당실기”에 앞서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관련 기록을 집록한 것으로, 현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 12년(1788)에 文泳光이 편한 『功行錄』이다. 이 『공행록』은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전승이나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수습하여 편집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삼우당실기』가 나오기에 앞서서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의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는 『공행록』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행록』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문익점이 졸거한 시기를 우왕 9년(홍무 16년 계해, 1383)에 비정한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서 추정하건대 현전 『삼우당실기』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정종 2년(1400년)으로 하게 된 것은 바로 「家傳」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전”의 발견은 문익점의 사망 시기를 고려 말이 아닌 조선왕조 개국 이후였다고 하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공행록』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우왕 9년에 비정한 것으로는 "강성군 충선공 부민후 삼우당문선생"이라는 제하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고, 또 영조 48년(1772)에 李漏가 찬한 “神進碑銘 倂序”와 정조 9년(1785)에 黃景源이 찬한 "묘비명 병서"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다. 이들 모두 문익점이 홍무 16년 계해(1383, 우왕 9년)에 병으로 졸하며, 이 때 조정에서 특별히 예장을 명하고 효자비를 세워 정려하였다는 내용을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다.
『공행록』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기록이 이처럼 흥무 16년으로 나타난다면,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은 조선완조 개국 이전에 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문익점의 졸년이 조선왕조가 개국되기 수년전인 우왕 9년(1383)이 아니라, 조선왕조 개국 후 수년이 경과한 정종 2년(1400)이라는 「家傳」의 기록은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의 기본 줄거리를 새롭게 살펴보게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李彌가 찬한 문익점의 “神道碑銘”이나 황경원이 찬한 문익점의 “묘갈명”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과 관련된 내용은 그 후 고쳐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한 이정 작업의 흔적은 현전 『삼우당실기』에 실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 밖에 “공행록”의 “江城君忠宣公富民候三憂堂文先生”에는 그가 使行으로 入元한 시기를 至正 甲辰(1364)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당시 원으로 가는 사행에는 德興君이 上使, 문익점이 副使, 崔擺가 從事官이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여 “삼우당실기”와 비교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음도 엿볼 수 있다.
戊寅刊 초간본(1870) 『三憂堂實記』의 編次를 보면 (世系) (年報) (遺文) (衰典) (舒述) (追錄)의 여섯 편에 序文과 跋文이 붙어있다. 이를 영조 42년(1766) 박사휘가 편한 『충선공행적기』와 정조 12년(1788) 문영강이 집록한 『공행록』과 비교해 보면, 『삼우당실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가장중요한 변모는 문익점의 생애에 대한 '年報'가 비로소 나타나고, 연보의 내용이 충실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문익점의 생애에 대한 연보가 충실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가전”의 발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삼우당실기를 통해서 현재 일반인에게 알려진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이 얼마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가전”의 자료로서의 신뢰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3. 「家傳」 所載 文益漸의 行蹟

1) 생졸(生卒)

문익점의 생졸 연대는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밝혀 두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전”은 문익점의 생몰 시기를 월일까지 분명히 드러내어 기록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 신미 2월 8일에 태어나 建文 2년 경진(정종 2년, 1400) 2월 8일에 卒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생졸 년월은 그대로 “삼우당실기”에 받아들여져, ”삼우당실기“ ”년보“에 기술된 그의 행적은 모두 이 생몰 연대에 맟추어 기술되고 있다.
문익점의 출생 연도만큼은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의 출생 연도가 일찍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민왕 9년에 한 때 천도 예정지로 계획되었던 신도 한양에서의 東堂監試에 정몽주, 임박 등과 함께 급제하였고, 당시 동방 급제자의 명단이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의 卒年이 언제인지는 밝히 드러나지를 않아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 못 알려진 듯하다. 그의 졸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조실록”을 포함해서 조선왕조의 “실록”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랜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익점이 언제 졸하였는지는 오랜 동안 확실한 근거 자료가 없어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48년(1772)에 이미가 찬한 신도비명이나 정조 9년(1785)에 황경원이 찬한 묘지명에 그가 우왕 9년(1383)에 졸거한 것으로 새겨지기도 한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가전”의 생몰 기록 가운데 우선 문익점이 정종 2년(1400)에 사망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의 졸년이 언제인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태조실록”에 나타나는 졸거기사라고 할 수 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태조 7년(1397) 6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사망 년월에 대한 “태조실록”의 이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문익점의 졸년이 태조 7년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있음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 원년(1401) 3월에 양촌 권근이 문익점의 아들 중용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서 가운데, “(문익점의) 아들 中庸은 아비의 喪을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고, 이어서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에는 그대로 晉陽에 숨어 있다.”
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종 원년 당시는 이미 문익점이 사거한지 적어도 수년이 경과되었음이 확인되고, 따라서 그의 졸년은 「家傳」에 나타난 것처럼 定宗 2년(1400)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문익점의 생애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그가 태조 7년에 사망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한편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거 기사에 따르면 그의 사망 시 나이는 70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의 출생년은 1328년(충숙왕 15년)이 된다. 이는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의 科擧事蹟에 나타난 출생년(신미년)과 2년의 차이가 있게 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문익점이 졸년 당시 나이가 70이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공민왕 9년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 科擧事蹟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어느 한 기록이 잘못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家傳」에 나타난 문익점의 출생년도가 「前朝科擧事蹟」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은 문치창이 “가전”을 찬할 당시 그가 종가에 소장된 문서 등을 참고하여 선조의 출생 연대를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家傳」에 나타난 그의 졸년이 문치창이 잘못 추정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그의 추정 근거는 「家傳」에 나타나고 있듯이, " 定宗 2년에 禮葬을 명하여 祭田을 하사하고 墓祠을 세우도록 하였다"라고 기술된 부분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증조부의 졸거한 해를 잘못 기록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납득하기 어려우며, 이점 “가전”이 과연 문치창에 의해 찬술된 것 인지를 의심케 하는 단서의 하나가 된다.

2) 사환(仕宦)

「家傳」의 기록이 "열전"이나 “졸기”와 비교할 때 아주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문익점의 생애는 주로 그의 재원시 행적이나 귀국 시기 및 목면 시배 시점 등을 두고 관련 기록간에 상위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와 관련해서 그의 관력에 대해서도 『實錄』과 같은 官撰기록과 「家傳」의 내용 간에는 상위한 내용이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거 기사에서 관력에 관한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左司議大夫 문익점이 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으로 아버지 文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諄兪博士로써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左侍中 李公遂의 書狀官으로 원에 갔다‥‥ 洪武 乙卵年에‥‥ 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左司護大夫에 이르렀다가 졸하니, 나이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을 贈하였다.

이상 “태조실록”의 “졸기”에 드러나는 그의 관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익점은 공민왕 경자년에 급제한 후 처음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고, 계묘년 左正言에 승진되어 원에가기 직전에는 순유박사였고, 원에서 귀국한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며, 그 뒤 목면 보급에 따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洪武 을묘년에 典儀注簿에 제배되고 ,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家傳」에 따르면, 문익점은 사행 이전 시기인 신축년에 藝文館 直講, 임인년에 承奉郎, 계묘년에 사간원 좌정언에 이르고 이 때 언관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원에서 귀국하는 해인 정미년(1367)에는 中顯大夫 藝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直拜되나,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이해 겨울에 成均館 學官에 선발되며, 다음해인 무신년(1368) 겨울에는 禮文館提學 兼成均館司成이된다. 기유년 가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행하고 喪制를 다한 뒤에도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가 그가 다시 벼슬에 오르는 것은 계축년(1373)으로 나타난다. 이 때 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제수되나, 이해 겨울 정몽주 등과 함께 北元 使臣의 접견을 항의하는 소를 올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淸道郡守로 좌천되었다. 그 후 왜구의 침략과 모친상을 겪은 뒤, 무진년(1388) 가을에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兼서연동지사를 제수받았으나, 다음 해 昌王 2년(1389) 8월에 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恭讓王 2년(1390) 8월에 다시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筵同知事 兼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는 것을 끝으로 이해 11월에 신병으로 사임을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상 『태조실록』 졸기와 『삼우당실기』의 「가전」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관력을 비교 열거하여 표로 나타내면 위의 <표 1>과 같다. <표1>을 통해서 살피건대, 일견해서 문익점의 관력과 관련된 “가전”의 기록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음이 발견된다. 우선 “실록”에 분명한 언급이 있는 “김해부사록” “순유박사” “좌정언” “전의주부” “좌사의대부”라는 다섯가지 관직 가운데, “좌정언” “좌사의대부”를 역임하였다는 것만 “가전”에 나타나고 “김해부사록” “순유박사” “전의주부”를 지낸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전”이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나타난 5종 관직 가운데 3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록”에는 그가 “순유박사”로서 “좌정언”에 승진되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가전”에는 “순유박사”의 관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반면에 좌정언에 앞서 “예문관직강”과 “승봉랑”의 벼슬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된 바, 그가 좌정언으로 승진하기 직전의 관직인 순유박사는 종7품직으로서 직강(종6품)이나 승봉랑(6품)보다 하위의 관직으로 나타나 가전의 이같은 기술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실록에는 목면 보급의 공적이 알려지면서 우왕 1년(1375)에 전의주부에 제배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의주부는 정6품직으로 앞서 원 사행시 관직인 좌정언과는 같은 직품의 벼슬이다. 그런데 가전에는 전의주부에 제배된 사실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공민왕 16년(1367) 중현대부예문관제학겸지제교, 공민왕 17년(1368)에 예문관제학겸성균관사성, 공민왕 22년(1373)에 중현대부좌대언우문관제학겸지제교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현대부는 종3푼의 관계이고, 예문관 제학, 성균관 사성, 우문관 제학은 각각 정3품, 종3품, 정3품의 관직으로서, 그가 정6품직인 전의주부에 앞서서 이들 관직을 거쳤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록”과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在官(在京), 在鄕 시기는 뚜렷이 차이가 나타난다. 즉 “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이듬해인 갑진년 이래 전의주부로 다시 관도에 오른 시기까지의 기간(1364 - 1374)을 줄곧 고향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에, “가전”에는 1368년에서 1372년까지 대략 4년 동안과 1375에서 1388년까지 대략 13년 동안을 도중에 청도군수를 잠시 역임한 것을 제외하면 고향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가전”이 문익점의 증손에 의해 찬술된 것이라면 유명 선조인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서는 상세하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남겨야 한다고 하겠다.
“가전”의 관력에 관한 기술은 비록 상세한 점은 있으나 정확성에 분명히 문제가 발견됨으로 이 때문에도 “가전”이 과연 문치창의 찬술인지가 의문시 된다.

3) 元 使行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전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가 사행으로 元都에 간 시기와 그 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의하면, 그가 使行으로 元에 간 시기는 공민왕 12년(1363)으로, 당시 그는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원에 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실록』에는 이처럼 그가 원에 간 시기가 공민왕 12년이고, 또 그가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 자격으로 갔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지만, 후대에 기술된 그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에는 그가 원에 간 시기를 갑진년(1364)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하며 그가 어떤 사행단의 일원으로 원에 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명기한 경우는 그다지 찾아지지 않는다.
한편 『高麗史』의 문익점 열전에 따르면, 이 때의 사행에서 문익점은 원에 머물면서 德興君 측에 가담하였고 덕흥군이 패함으로 인하여 귀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원도에 머문 기간과 귀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그가 원으로 갈 무렵에 진행되고 있었던 공민왕의 폐위와 덕홍군 옹립 사건의 시간적 추이와 그리고 이즈음의 국내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것은 元 順帝 22년(1362) 12월이었다. 이 사실은 곧 바로 고려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은 이 전문을 접하자 朝臣들 가운데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吏部尙書 洪師範을 西北面體覈使로 삼아 진위 여부를 조사케 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강구하게 된다. 한편 당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해 있던 福州(安東) 행재소를 떠나 개경으로의 환도를 서둘러, 이듬해 공민왕 12년 1월에는 청주에 이르다. 2월에는 다시 청주를 출발하여 이 달에 개경 興王寺에 이르러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하례를 받고 이 곳을 임시 어궁으로 정한다.
贊成使 李公遂 일행을 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개경 환도 직후인 공민왕 12년 3월이었다. 이 때 이공수 일행의 사행은, 그 동안 홍건적의 난으로 불가피하게 복주(안동)에 까지 피난하게 된 사정을 원에 설명하고, 그로 인하여 그 사이 원 조정과의 정상적인 사절 왕래가 불가능하였던 사정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행이었다. “고려사”에는 이 때 이공수가 원에 올린 “陳情表”와 “賀平海盖賊表”의 두 종류 表文이 기록되어 있는바, 이 표문에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성 등을 호소하는 내용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당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실을 이미 전문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면상의 사행 목적 이외에 원도에서의 동정을 살피려는 의도가 수반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해 4월에 파견된 密直商議 洪淳, 同知營直司事 李壽林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앞서 이공수 일행과는 달리 공민왕의 폐위와 덕흥군의 고려 국왕 책봉에 항변하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진정할 목적을 띤 사절단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때의 사절단은 바로 전월 윤3월에 있었던 金鏞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파견된 사절단이기도 하였다.
소위 '與王寺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원제의 명에 내응한 고려 측 附元 세력의 준동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시해로까지 이어질 번했던 이때의 변란은 崔瑩 등 무장 세력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직후 공민왕이 원에 파견한 흥순 등의 사절단은 성격상 앞서 이공수 등의 사절단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즉 김용 일당이 타멸되면서 국내에는 더 이상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할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때의 사행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려는 원 조정의 처사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성격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때 원의 御史臺, 中書省, 詹事院 등에 百官 耆老의 뜻이라고 하여 보내진 항변서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의 폐위 결정은 元都에 있는 고려의 不逞한 무리들이 조장한 허망한 말을 따른 것이니 이들 흉도들을 강력히 처벌하여 報功去讒의 의지를 보여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였다.
문익점이 원도에 간 것이 『실록』에 나타난 대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 였다면 당시 그의 사행 목적은 개경 환도 이후 아직 “흥왕사의 변”이 있기에 앞서서, 그간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과의 외교적 교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정을 알리는 한편, 원 조정의 동정을 살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家傳」에는 문익점이 계묘년(1363)에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사실은 나타나고 있으나, 어떤 사절단의 일원으로 갔는지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家傳」의 내용 중에는 문익점이 원도에 있으면서 이공수를 찾아가 만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가 이공수를 수행해서 온 서장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가전”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 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이에 앞서 국가에 틈이 많았으니, 서로는 紅賊, 남으로는 왜구가 걱정거리였다. 또한 元朝로 부터 見責을 받아 앞서 원에 들어간 모든 사신이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또 봄이 다 가도록 正朔의 頒赦를 행하지 않았고 출국한 사신은 돌아오지를 않으니, 안팎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하고 두려워 마음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을 다시 보내어 사정을 아뢰어 원제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일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원으로 가는 것을 꺼려했으나 선생은 서장관으로 원나라로 갔다.

이 「家傳」의 내용에 의하면 그의 사행단은, 원에 들어간 많은 사신이 돌아오지 못하고, 또 봄이 다 가도록 매년 천자의 正朔 때 관례적으로 행하는 頒赦의 조칙마저 이르지 않아, 의심과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본국 사정을 알려 원제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의 사행이었다는 것이다.
“가전”에 기술된 사행 배경과 사행 시점은 흡사 그가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가 아니라 홍순, 이수림 등의 사행단의 일원으로 원도에 간 듯이 보이기도 한다. 흥순, 이수림 일행이 원의 御史臺나 中書省 등에 올린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小邦이 賊을 평정하고 길을 통한 뒤에 獻捷 賀正 謝恩 賀聖節 등의 使者가 서로 이어졌으나 아직 한 사람도 본국으로 돌아온 자가 없고, 또 봄이 다 가는데도 正朔의 頒賜가 없고 출국한 사신이 이르지 않으니..."라고 하는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이는 가전에 기술되어 있는 위 인용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익점이 홍순, 이수림과 동행하여 원에 간 경우라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원도에 체류하면서 원에 억류되어 덕흥군을 만난다거나, 우여곡절을 겪어 3년간 체류를 한다거나 하는 상황을 맞을 까닭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공수의 경우 일시 원에 억류되는 상황을 맞기도 하고, 실제로 원으로부터 태상경, 우정승 등의 벼슬을 제수받아 덕흥군 측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지기도하여 고려 조정으로부터 일시 파직당한 일이 있기도 하였으나, 홍순과 이계림 등은 사행과 관련해서 덕흥군 사건에 직접 연루됨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가전”에 기술된 문익점의 사행 시점과 사행 배경에 대한 설명은 “태조실록”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라고 하는 내용에도 부합되지 않고, 고려사에 기술된 것처럼 “사신을 받들고 원에 감으로 인하여 머물면서 덕흥군에 붙었다(奉使如元 因留附德興君)"라고 하는 내용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점에서 가전에 기술된 원으로 간 사행 시점과 사행 배경에 대한 설명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이 간취되는 것이다.

4) 在元 行跡

가전은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이 가운데 그의 재원시 행적과 관련하여 『고려사』나 『실록』의 기사와 상충되는 부분이 바로 그가 귀국한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문익점의 귀국 시기는 재원시 행적과 체류 기간 등에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家傳」에 기술된 그의 재원시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익점은 처음 원에 도착한 뒤 禮部侍郎이란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元帝가 이미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명한 시기였으므로 元都에 이른 사신들은 대부분 덕흥군으로부터 僞書와 僞官 등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위서나 위관은 덕흥군 측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덕흥군 즉위 후의 관직 보장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자신의 이름을 趙可達이라고 하는 자가 그를 찾아와 은근히 유혹했으나 이를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이공수를 만날 일이 있어 그에게 물어보니 그가 이 때 만났던 조가달이라는 자가 바로 덕흥군 이었다고 한다.
그가 덕흥군의 제의를 거절하자 다음에는 원제가 황제의 위세로서 덕흥군을 따를 것을 직접 종용하였는데, 이 또한 문익점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시 원제가 강압적으로 덕흥군에 가담토록 종용한 것에 대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 두 군주가 없다"는 말로 즉각 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문익점의 충절을 드러낼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때 문익점은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42일 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구류를 당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 역신 崔濡는 그가 덕흥군 측에 붙었다는 헛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원제가, 덕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회유하기 위해 구류에서 풀어 다시 일을 보게 하자 그는 僞書와 認帖 및 誘書 수십여 장을 불에 태우는 등 元帝의 명을 거역하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서 이해 11월에 교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유배지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1364) 2월이었고, 병오년(1366) 9월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가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 원근에서 사람들이 샘물을 길어 가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 귀양살이 중에 達成貴라는 고상한 사람과 상종하여 雲南 지방의 풍물을 많이 알게 되어 손수 『雲南風土集』이라는 책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목면씨를 얻게 되는 것은 이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 원도로 귀환하는 도중 밭 가운데 핀 목면화를 보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다음 해(1367) 정월에 그가 元都에 이르자 원제는 그를 다시 예부시랑 어사대부에 임명하였으나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올라 2월에 송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곧바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家傳」에 따르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鄭天益과 함께 목면 종자를 심게 되는 것은 정미년(1397) 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해를 갑진년이라고 명기하고 있고, 고려사 열전에는 "덕흥군이 패하자 귀국하였다"라고 하여 역시 갑진년에 귀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鮮初의 官撰 史書에 나타난 그의 귀국 연대는 가전에 기술된 귀국 시기와 3년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근래의 학술적 연구는 그의 3년간 유배 생활을 의문시하고 그가 갑진년에 귀국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르면 그가 원에 가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은 나머지 목면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다소 극적인 그의 행적은 자동적으로 부인되며, 또 이와 관련해서 고려사에 기술된 "奉使如元 因留附德與君"이라는 재원 시 행적이 기정사실화 될 개연성이 크다. 이 경우 목면 종자의 취득 과정도 달리 설명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의 갑진년 귀국을 타당시하는 견해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목면이 이미 북경에 까지 보급되었고, 따라서 당시 목면 종자를 구하는 일은 강남 지역에서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북경 근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전에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원에서의 3년간 유배 사실에 대해서는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서도 일찍이 이를 의문시 한 경우가 찾아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사후 불과 4년이 지난 태종 1년에 권근이 문익점의 장자 文中庸을 서용할 것을 상서하는 내용 가운데, "故간의대부 文益漸이 처음 강남으로 들어가 목면 종자 수매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그의 원에서의 체류 기간을 논외로 하면 일단 그가 元都를 떠나 강남으로 갔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 밖에 현전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과 세조 정축년(1457)의 賜墓祭文이 보이는 바, 여기에도 그의 南荒 유배 사실이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다음에서 보듯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에 언급되고 있는 문익점의 재원 시 행적은 문치창의 “가전”에 나타난 재원 행적과 정확히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네. 중국 諫院에서 僞書를 불에 태우고 말은 天潢을 움직이게 하였네. 귀양살이 3년을 하였지만 그 의로운 기운은 펄펄도 하였네.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는 고려 서울 개성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利를 끼쳐 우리 백성 옷 입혀 주었네.

위 제문은 그의 사후 불과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문익점의 공적을 집약적으로 기린 내용으로, 諫院에서 僞書을 불에 태우고 3년의 귀양살이를 했다는 내용은 문치창의 가전에 나타난 문익점의 재원 행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가전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이 단지 후손가에 의해 어느 시기에 날조된 기록으로 가볍게 넘길 수 만은 없게한다.

4. 맺 음 말

본고는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撰한 『三憂堂實記』 所載의 「家傳」이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임을 확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시기 등, 그의 생애와 행적에서 주로 의문시되는 내용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본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文益漸이 남긴 遣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의 처음 발간 과정을 살펴보면 “가전”의 발견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현전 『삼우당실기』 연보의 내용은 가전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을 현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家傳」의 발견은 그 이전까지 잘못 알려졌거나 분명하지 않은 문익점의 행적을 많은 부분 바로 잡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 앞서 문익점의 행적을 輯錄한 『功行錄』을 살펴보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이 원에 사행한 시기나 목적, 그의 졸년 등이 잘못 기술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문익점이 甲辰年에 正使 德興君의 副使로서 원에 갔던 것으로 기술하거나 그가 우왕 9년에 사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만큼, 가전의 발견 이전만 하더라도 문익점의 행적은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지만, 「가전」에 기술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내용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를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 등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의 출생 년도는 가전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卒年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의 졸년은 한동안 우왕 9년(1383)으로 잘 못 알려져 신도비명이나 묘갈명 등에 그렇게 새겨지기도 하였고, 가전 발견 이후에는 정종 2년(1400)으로 또한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문익점이 정종 2년에 졸했다는 “가전”의 기록도 잘못된 것으로, “태조실록” 졸기에 나타난 대로 그가 사거한 시기는 태조 7년(19398)이었음이 사실로 확인된다.
가전의 기록이 官撰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家傳」은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 등 관찬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확인된다.
가전의 기록 내용 가운데는 문치창 자신의 추정이 개입됨으로서 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사실 관계를 잘못 기록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증조의 생애나 행적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 이를테면 생몰 연대라든지 사환 이력을 잘 못 기술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부분의 기록에 현저한 오류가 발견된다면 “가전”을 문치창이 지은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전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가전을 통해서 볼 때, 문익점의 사행은 시기적으로 보아 계묘년 3월의 이공수 일행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실제 기술된 내용에는 문익점이 그보다 앞서 원에 체류 중인 이공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가 이 해 4월에 파견된 洪淳, 李壽林 일행과 동행하여 원에 갔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홍순 등의 일행이 사행에 오른 시기는 덕흥군의 국내 측 내응 세력이 일망타진된 뒤였기 때문에 덕흥군 사건에 연루될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시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가전에 기술된 사행 시기와 사행단, 사행 목적 간에는 실록이나 고려사의 기록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발견된다.
가전은 문익점의 재원 3년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이나 태조실록에는 그가 사행으로 원에 들어간 이듬 해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어 가전에 기술된 재원 3년의 행적은 그 사실 여부가 의문시 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물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없이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전에서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를 통하여 줄곧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체류한 것은 일단 사실로 접근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그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삼우당실기에 문익점의 증순 문치창에 의해 찬술된 것으로 등재된 가전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상세하고도 풍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이를 문치창의 찬술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전의 자료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 입수 경위도 석연치 않고, 1808년 발견 이래 현존 여부도 분명치 않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삼우당실기” 소재 “가전”은 문익점의 증손 문치창이 직접 찬술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6.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교수 (경상대학교 사회교육학부)

1. 머리말
2. 후대의 평가와 국가 및 관의 포전(褒典)
3.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4. 맺음말

1. 머 리 말

三憂堂 文益漸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지대한 영항을 미친 인물이다.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 중에서 “衣”의 부분에 미친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 조선시대의 여러 지식인들도 지적했듯이 문익점의 목화 씨앗 전래는 조선시대의 衣冠文物을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후대의 유명 인물들의 칭송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문익점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글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그것도 그가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퍼뜨린 과정에 집중하거나 그의 정치적 행적에 관한 것을 주로 언급한 것이었다.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문익점의 행적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현창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책의 목적은 문익점의 목면전파 과정 및 그것이 우리 사회와 인근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의 행적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서 필자는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당시 지식인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현창하려고 했던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후 후대의 인물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 왔던가 하는 것과 국가 및 관에서는 문익점에 대해 어떤 포전(褒典)을 베풀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문익점에 대한 현창을 위해 자손들과 지역 사림들이 어떤 활동을 해 왔는가를 실기간행과 증보, 서원 건립 청액운동과 문묘종사운동, 부조묘 복구운동 등을 통해 살펴보고, 지역 사림들 증에서도 특히 문익점의 고향인 단성의 사림들이 벌였던 적극적인 활동의 내용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국가의 포전이나 후대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에는 자손과 인근 사림들이 그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일정한 기여를 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 자료로 이용한 것은 1900년에 편찬된 『三憂堂實記』이다. 이 실기가 나오기까지 문익점과 관련된 문헌은 여러 차례 증보되면서 이름도 『忠宣公行蹟記』(1766), 『江城君事實錄』(1788)에서 1818년부터는 『삼우당실기』로 바뀌고 1870년에는 『道川院蹟』도 만들어졌다. 필자는 이중 『강성군사실록』과 『도천원적』도 참조하였다. 이외에 19세기 중반 도천서원에 간여하였던 李邦儉(1798-1865)의 『道淵述言』 과 1640년에 만들어진 李時馩(1588-1663)의 『雲窓誌』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2. 후대의 평가와 국가 및 관의 포전

1)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삼우당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역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중에 退溪 李滉이 평가했던 부분을 장황하긴 하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江城縣 남쪽에 있는 培養山里는 전 왕조 때 사의대부였던 文公이 살던 옛터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洪武 16년(1383)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기려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원래 공이 모친상을 당해 산간에 있었는데,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여 지나는 곳마다 무참하게 짓밟아서 인민들이 도망하여 숨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홀로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며 맹세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칭하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모친의 영전이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② 공의 功이라 하는 것은, 至正 甲辰年에 공이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의 거친 곳으로 귀양 갔다가 풀려 돌아오면서, 길에서 목면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함이 급하기에 가져오는 것을 금지함을 무릅쓰고 주머니에 넣어와 온 나라에 번식시켜 만세토록 길이 덕을 입혔으니, 이것이 公의 공인 것이다.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져 유통된 것은 결국 그 공이 五穀六財와 같은 것이니, 三韓의 많은 백성이 파리해지고 어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환하게 일신시켰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 왕조가 추가로 은덕의 명을 내린 것은 헛된 은전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③ 그리고 공의 효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임해 나타났었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을 칭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 구해낼 수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으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일차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뀌기 전이었는데 趙俊이 일시적으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었으랴. 내가 염려하는 것은 공의 큰 절개가 이에서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중 ②의 부분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래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면포가 우리 사회에 퍼진 것은 오곡을 경작하는 법과 土, 金, 石, 木, 皮, 草 와 같은 기물의 재료를 다루는 법이 처음 창안된 것과 같은 공헌을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백성이 추위에 떨고 얼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극찬하고 있다.
①과 ③의 부분에서는 그가 솔선하여 유교적 기본덕목의 하나인 효행과 왕조에 대한 절의를 실천했다고 하며 도학적 입장에서의 그의 공헌을 칭송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황은 趙浚이 문익점을 탄핵했던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조준이 일시적으르 문익점을 헐뜯은 말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절의에 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익점은 공양왕 때에 간쟁을 맡은 사의대부로 있으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던 온건개혁파 즉 목은 이색 등과 연대하여 과격한 사전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런 입장은 곧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그 일원인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는 파직되었던 것이다.
새 왕조가 개창된 직후에는 문익점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다만 목면 전래라는 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심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의 업적이 일부 논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면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은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이 강화되고 전 왕조 고려에 대한 충절의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중시하는 사림파들이 발언권을 점차 강화해 나가는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문익점의 충절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황의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 정계와 사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우암 宋時烈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后稷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또 程子, 朱子가 죽은 후 우리 동방의 安裕와 문익점 두 현인이 그 도를 잘 전수하였으니 두 분 이 아니었으면 우리 등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많은 유명 인물들이 詩章을 통해 그의 목면 전래의 공적과 충효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 예로는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南智, 傭齋 成俔(1439-1504), 梅月堂 金時習(1435-1493), 점필제 金宗直(1431-1492), 정여창(1450-1504), 寒暄堂 김굉필(1454-1504), 梅溪 曺偉(1454-1503), 慕齋 金安國(1478-1543), 思齋 金正國(1485-1541), 文山 柳洵(1441-1517), 南冥 曺植, 비隱 이규보, 율곡 이황(1536-1584), 土亭 李之函(1517-1578), 沙溪 金長生(1548-1631), 秋浦 黃愼(1562-1617), 竹林 卓中, 芝峯 이지광(1563-1628), 學沙 金應祖(1587-1677), 판윤 姜世晃(1713-1791), 승지 兪恒柱, 승지 姜연, 단성현감 蒙腐一, 진사 朴정원 등을 들 수 있다.

2. 국가 및 관의 褒典

국가로부터의 포전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여묘살이 했던 효행이 알려지자 우왕 9년(1383)에 조정에서는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최복인을 보내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각을 외우지 않아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 같다. 權潗(1569-1633, 호 黙翁)의 '孝子碑閣重修記'에 의하면 비를 세우던 당시에 비각도 세운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이전에 쓰여진 이황의 “효자비각기”에는 명종18년(1563)에 와서 당시 단성현감 安琠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비각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해 비각이 소실되자 광해 15년(1623) 당시 단성현감이던 이원길이 앞장서 효자비각을 중건하였고, 헌종 7년(1841)과 고종 25년(1888)에도 재차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또 조선왕조에 들어와 정종 2년(1400)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田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 4인을 두어 묘를 지키게 하고 復戶 2결을 내려주었다. 이로부터 150여년 이후인 명종 16년(1561)에도 문익점의 증손녀 문씨가 감사에게 청원해서 묘사를 중건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문씨의 손자 李源이 주도하고 수령 成遵이 협력하여 묘사와 제전을 늘렸다. 이때 묘사 기문을 쓴 사람은 南冥 曺植이었다.

문익점에 대한 贈職과 封君 등의 조치도 이루어진다. 태종 원년(1401)에 와서는 藝丈館 提學을 증직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다. 그리고 문익점에 대한 부조묘(不祧廟)를 세우게 하여 祭田 100결과 奴婢 70구를 하사하고 복호도 내려주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부민후(富民候)로 봉하였으며, 南智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뒤에 언급하듯이 도중에 사손이 끊겨 부조묘의 제향도 오랫동안 실시되지 못하자, 철종 5년(1854)에는 사손을 세워 문익점에 대한 부조묘 제향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기도 하였다.
이후 역대 왕들은 문익점에 대해 賜祭文을 내리고, 또 십여 차례에 걸쳐 傳敎를 내려 자손에 대해서는 특별히 채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와 일반 군역에 충정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계속 지켜지게 하였다.
세조 7년(1461)에 오면 국가의 명에 의해 문익점의 고향인 丹城脚에 祠宇도 건립된다. 후대에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이 올린 上言에는 태종때 서원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아마 부조묘를 서원으로 잘못 착각한 것 같다. 상언에서 언급한 강성군, 부민후로 봉한 시기도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과 차이가 있다.
사실 태종 10년(1410)에 사간원에서 문익점을 위한 사우 건립을 요청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결과, 이미 여러 가지 포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우 건립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문익점 사우의 건립이 조정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2년(1456)에 가서였다. 이때 집현전 직제학 梁誠之가 목면을 전래한 문익점과 화포제작에 공헌한 崔茂宣의 사우를 각각의 관향에 건립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향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천서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어 제향이 시작된 것은 국가의 승인을 받은지 몇 년 지난 1461년이었다. 처음 사우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건립 장소를 선정하거나 단성 사림, 문익점 자손의 재정적 협조 등을 조직하고 구체적으로 사우를 건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도천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고 이건되면서 서원 사액 또는 복액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액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임란 이후 소진된 도천서원을 복구한 이후 단성지역 사림들은 점차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도천서원에도 사액이 내려져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언급하듯이 숙종 34년(1708) 朴恒泰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해 사액을 청하는 등, 청액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조11년(1787)에 도천서원이 사액되었다 . 도천서원과 관련하여 碧溪影堂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삼우당실기』의 연보에는 중종 6년(1511)에 벽계영당이 咸陽에 세워지고, 명종 22년(1567)에 가서 사액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사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丹城違院記'를 썼던 박사휘(1689-1776, 호 黙窩)에 의하면, 正德年間(1506-1526)에 단성현에 벽계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익점 후손 문희석의 기록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서원이 咸湯 碧溪에 있다고 되어 있고 文允明의 上言 중에는 문익점의 行狀이 함앙의 벽계서원에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박사휘는 단성현이 함양에 속해 있던 적이 있어서 그런 언급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I5세 때인 忠목王 元年(1345)에 '함양의 碧溪山堂에서 독서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어 함양에 서원이 건립된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박사휘가 살았을 때나 지금 현재에도 함양에는 '벽계'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다. 반면에 단성에는 벽계라는 곳이 있다. 李時馩의 『雲窓誌』에 의하면, 이곳에는 문익점의 조카였던 文可學의 독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곳은 문익점과도 관련있는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박사휘가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문익점의 사우가 세워졌다가 뒤에 도천으로 옮겨져 중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중에 사액된 곳으로 전라도 장흥의 江城祠를 들 수 있다. 강성사는 원래 月川祠라 불리고 있었고, 문익점의 9세손인 楓菴 文緯世(1534-1600)를 제향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운 사우였다. 문위세는 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영조 9년(1732)에 월천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배려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익점이 추가로 제향되면서 이름도 강성사로 바뀌었다. 이 서원도 전라도 유생들의 상소가 제기되면서 정조 9년(1785)에 사액이 내려졌다.

3.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1. 실기 간행과 증보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면, 이상과 같은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사의 칭송이 많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에는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관련 지역의 사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일조를 하였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당시 특정 인물을 세상에 알리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문집이나 실기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와 관련된 문적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文可學 사건 이후 자손들이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져버리고 단성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과 부조묘를 모시는 사손의 대가 오랫동안 끊긴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 임진왜란 등 병화로 인한 소실도 그 한 원인이었다.
다만 증손 사헌부 감찰 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지은 家傳(事實本記)이 있었지만, 이것도 도중에 유실되어 버리고 세상에 공개되지 목하였다.
이보다 악 250년 이후인 숙종 34년(1708)에 고향인 단성에서 향부로들이 명현들이 기록해 놓은 문익점 관련 글들을 토대로 行蹟記를 만들었으나, 이것도 영조 40년(1764)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766년에 도천서원 원임을 맡고 있던 朴思徽(박사휘) 등 단성 사림들이 다시 '忠宣公行蹟記'를 만들었다. 역대 왕들의 褒贈으로 관찬사서 및 고려사에 실려 있는 것, 선현들이 기록해 놓은 것, 文氏族譜, 勝覽 등에 실려 있는 것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도천서원 사액 직후인 정조 12년(1788)에는 장흥의 강성사에서도 후손 泳光이 주도하여 『忠宣公功行錄』(江城君事實錄)을 간행하였다. 여러 가문에 소장된 문익점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집하였는데, 강성사에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江城祠圖와 문위세의 행장도 추가했다. 그러나 행적기나 공행록은 모두 얼마 안 되는 자료를 토대로 편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들의 시기와 연월이 다르고 내용이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 이후 순조 8년(1808) 족보간행 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앗던 文致昌의 家傳이 섬에 살던 후손에게서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17대손인 文桂恒 (1766–1829)등이 본격적으로 관련 문적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1811년 각처에 사는 문중 인사들에게 통문을 돌려, 각기 거주하는 고을에 소재하는 여러 선현의 문헌에서 문익점과 관련된 문적은 미세한 것이라도 찾아내어 문집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자고 호소하였다.
그 이후 그는 서울 등지에서 공사서적을 참조하고 차이가 나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1817년에 마침내 『삼우당실기』를 편집하였다. 당시의 명망가였던 金庭堅, 洪永燮, 吳羽常, 閔泰鏞 등을 찾아가 편차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하고 예조판서 金義淳, 공조판서 洪義浩 등에게는 서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18년 겨울 하동에서 인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종결하였다. 이 작업에는 계항뿐만 아니라 관산의 泳光, 안성의 鍾九, 장흥의 達祖, 하동의 翊謨 등 각지의 문중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남평문씨의 世系, 문익점의 年譜, 문치창이 지은 家傳, 列朝褒典, 각 祠院의 事蹟 및 諸公敍述 등이 수록되는 등, 실기가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1827년에도 경기도 安城에서 실기를 다시 발간하였지만, 고친 것은 없고 문중 내에 널리 배포하기 위해 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철종 2년(1851)에 가서도 계항의 아들로서 문익점의 사손이 된 秉烈이 京中에서 실기 증보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 실기에는 海奎律髓集에 실려 있는 忠宣公詞律 三首와 여러 선현의 吟詠 및 輓章 등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계항이 후에 수습한 것으로 1818년의 실기에는 미처 실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해인 1852년에도 전라도 雲峰에서 후손인 文達孝가 삼우당실기를 중간하였는데, 이것은 1851년의 건과는 판본 자체가 다르고 또 世系가 생략되어 있으며 李燮, 朱重翁 등의 “請不祧廟疏” 2편이 추가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1870년에 와서도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단성현 신안의 문익점 묘각에서 문씨 대동보를 발간하면서 실기를 중간하였고, 『道川院蹟』도 새로 편찬하였다. 이때 간행된 실기는 1851년에 인쇄된 실기와 체제가 거의 동일하고, 일부만 약간 증보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남평문씨의 上系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것과 金自粹(1351-1413)의 『桑村集』에 실려 있던 시가 추가된 것, 그리고 1852년 판본에 새로 추가된 “請不祧廟疏”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이 그것이다.
“도천원적”을 간행한 것은 『삼우당실기』에는 도천서원의 내력이 소략하기 때문에 그 내력에 관련된 글을 많이 실어 도천서원을 좀 더 체계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삼우당실기』에 실려 있던 글 중 상당 부분은 목차에 나열하면서 실기에 실려 있다고 註記만 하고 내용은 아예 싣지 않았다.
현재 각 가문과 각종 도서관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실기는 1900년에 후손들이 단성사림과의 협력 단성의 新安思齋에서 중간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삼우당실기와 도천원적에 실린 글을 모두 모으고 일부를 수정해서 아예 새로운 체계로 발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편차와 규례에서 순서가 잘못된 것과 문자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연보에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추가하였다. 가전에 수록되어 있던 庚午封事, 元朝奏對 부분을 빼내어 별도로 싣고, 포은 정몽주와의 聯名疏, 목은 이색 등과의 贈別詩 등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단성의 명망가였던 明湖 權雲煥(1853-1918), 厚山 李道復(1862-1938)등으로부터 검교 받았고, 松沙 奇宇萬(1846-1916), 月波 鄭時林, 勿齋(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에게서 서문이나 발문을 받았다. 이 과정을 정리하여 표로 제시해 보면 <표1>과 같다.

2). 서원 건립,청액 운동과 문묘종사 운동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도천서원을 세우도록 명령했고 강성사에 대해서도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켜 주었는데, 이렇게 되면 서원의 지위가 그만큼 강화되고 관의 지원도 일정 정도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서 이렇게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남긴 공헌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손과 지역 사림들의 문익점을 위한 끊임없는 현창 노력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도천서원의 예를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다.

도천서원은 세조의 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 사액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임란으로 중건한 이후 액자가 불타버리고 사사로운 액자를 걸어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 중에서도 등급이 낮고 관의 지원도 별로 없는 지방의 鄕賢祠와 마찬가지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34년(1708) 단성의 朴恒泰를 비롯한 경상도 유생 300여명이 연명해서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는 서원의 신설이나 사액의 금지조처를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왕이 예조에 논의할 것을 명령했으나 담당 부서에서 동의를 하지 않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 뒤 정조 8년(1784)에 오면 전라도에 사는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장흥의 강성사에 대한 사액을 요구하였고, 이어 이듬해에는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 600여명이 상소해 강성사가 사액되었다. 강성사가 사액되자 곧 이어 정조 11년(1787) 도천서원 복액운동이 일어났다. 李亨復을 비롯한 경기, 경상, 전라의 3도 유생 600여명이 상소해서 도천서원의 액자를 복구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조정에서는 액자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서원을 창립한 이후에는 해당 선현에 대한 奉祀와 사림의 교육장소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여러 가지 규칙과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적절한 운영을 해 나가야 했고, 이는 결국 자손과 인근 지역 사림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원의 건물이 노후화되어 새로 짓거나 고쳐야 했다. 도천서원도 1461년 문익점이 공부하던 별채 三憂堂이 있던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 된다. 그런데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명종 19년(1564)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광해 4년(1612)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13년(1672)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이후에도 중건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1744, 1770, 1797, 1805, 1865년으로 이런 중건과 이건과정에서는 자손과 인근 사림이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을 모신 서원은 도천서원, 강성사 외에 여러 곳이 있었다. 황해도 松禾縣의 三峰書院, 전라도 昌平縣의 雲山書院, 경상도 義城縣의 鳳崗書院이 그것이다. 이중에는 문익점의 자손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면서 그곳에 거주했던 다른 조상과 함께 문익점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건립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창평현 사림들이 문익점의 손자인 越川君 文彬(?~1413)이 유배되었던 곳이라 하여 雲山書院을 세웠는데, 1859년 이곳에 문익점과 손자 長淵伯 文萊를 추가로 제향하였다. 문빈은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월천군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담양, 창평에는 문빈의 자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文致龍(1746-1814, 호 雲齋)과 文天壽(1736-1810, 호 梅堂) 등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는 의성 사림들이 문익점 손자 承魯가 수령으로 와 있으면서 晩川洞에 사묘를 세웠던 것을 기려 그곳에 鳳崗書院을 건립하였다. 이곳은 문익점이 이 고을에 처음 목면을 확산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손자인 승로가 의령현감으로 와서 기념지로 가꾸어 놓은 곳인데, 문씨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실기에는 이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서 인조 22년(1644)에도 황해도 유생들이 송화현 桃源 三峰山 밑에 삼봉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송화현에 은거했던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 그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정황도 알 수 없다. 좀 더 다른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볼 여지가 남는다.

자손과 사림들이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말경부터는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정조 16년(1792)에는 생원 李禑를 소수로 하는 다수의 유생들이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상소문을 지은 魏伯珪(1727-1798, 호 存齋 또는 桂巷, 전라도 장흥 출신)가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며 내세운 논리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면을 전파함에 가죽옷과 갈포옷을 입었던 풍속이 크게 변해서 우리의 冠帶의 풍속이 이루어졌고 백성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주나라의 후직과 더불어 사당에 모셔져야 하고 팔도의 백성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제사 지내는 곳은 다만 단성의 도천서원과 장흥의 강성사 두 곳 뿐이니, 삼백 고을의 인심이 그 누가 문묘에 제향되는 반열에 이르도록 노력해서 경모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국가의 금지정책으로 인해 결국 왕에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그 이후 한동안 문묘종사운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기가 분명치 않지만, 1870년을 전후해서 다시 청무운동이 시작된다. 즉 鄭在慶, 朴尙台(1838-1900, 호 鶴山)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문익점의 문묘 배향을 요구했으나 이를 불허하는 왕의 비답이 내려졌다. 그 뒤에도 洪在誠과 朴齋晩 등을 중심으로 한 3차 상소와 金健秀와 沈宜肅 등의 4차 상소가 이어졌지만,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비답이 내려졌을 뿐이었고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3). 부조묘 복구 운동

문익점의 부조묘가 설치되어 있는 단성에는 그의 손자, 증손대에 이르러 자손들이 별로 살고 있지 않았고 단성 이외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男歸女家 현상 등으로 인해 인구 이동이 활발하여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벼슬살이로 인해 서울 근처에 거주하는 현상도 많았다. 문익점의 자손도 마찬가지였고, 봉사손인 종손 이외에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문익점의 자손이 단성에 많이 살지 않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文可學 사건으로 인한 단성 이탈현상이 그것이다.

문가학은 문익점의 동생 益夏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태종대에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2년(1402) 진주 출신인 예문관 직제학 鄭以吾가 진주에 사는 문가학이 비를 내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하여 왕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러들여 시험하였는데 그가 치제를 하자 과연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항상 神衆經을 외워 도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테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 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 후에 효험이 별로 없자 내쳐서 開城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이후 이곳에서 생원 金천, 주부 任聘, 생원 趙方輝, 부정 曺漢生, 소윤 金亮 등 여러 사람과 공모하여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太宗實錄』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妖人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 崔有慶에게 명해 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李叔蕃 尹祗, 형조 판서 金希善, 사헌 집의 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 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 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별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金천에게 말하기를, '이제 佛法은 쇠잔하고 天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神衆經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 있고, 天兵과 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 하니, 김천이 그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任聘, 생원 趙方輝, 전 부정 趙漢生, 전 소윤 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사직 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니, 黃喜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 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말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중대한 모반사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결국 문가학과 일부 핵심 연루자가 처형당하고, 문가학의 어린 자식도 교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의 친족들이 연좌되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한해를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던 朴苞와 문가학 등의 친족들은 제외되었다.

원래 모반죄를 저지르면 당사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와 형제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 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방계로 조카 및 백숙부 등도 연좌되어 먼 곳에 유배되었다. 문익점의 자손들은 이 연좌제의 직접적인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그들에게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문익점 자손 중에도 그 영향을 받아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익점의 손자 文承孫이 '從叔(문가학)의 처형으로 화가 종족에 미쳐 여기저기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는데 공은 溟洲로 들어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정황은 17세기 중반 李時馩에 의해서 편찬된 『雲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운창지』에는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가학이 젊었을 적에 淨趣庵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여 사람을 흘리고 있어 이를 잡아 죽이려 하자 여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둔갑술이 적힌 비결을 제공하였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궁궐 내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문가학은 죽임을 당하고 단성현에는 그 자손들이 살 수 없도록 모두 바닷가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지금 東萊府에 거주하는 문씨들이 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익점의 4대 장손인 光瑞는 큰 피해를 받지 않고 단성에서 살고 있었다. 문익점의 공훈에 대한 국가의 은전이 상당하고 그에 대한 부조묘나 묘사에 대한 봉사를 맡아야 하는 장손이므로 국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광서에게는 서자 彦國 이외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부 박천군수 李鶴(여주이씨)의 아들 李承宗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여주이씨는 단성에서 세거하지 않고 서울 인근으로 이거해 버렸다.

서자인 언국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문중 내에서는 광서의 조부 善仝의 동생인 義仝의 증손 世華를 사손으로 삼았다가 다시 문익점의 제2자 中誠의 5대손인 善昌을 사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단성에 거주하지 않고 경기도 楊州 또는 長湍에 거주하였고 선창의 증손인 彦祥 때에 가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사손이 끊겼다. 그 이후 오랫동안 사손이 끊겨 있다가 19세기에 가서야 중성의 지파 자손 중에 桂恒의 아들 秉烈이 부조묘의 제향을 책임지는 사손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이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손들이 여러 차례 사림을 움직여 부조묘 복구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730년경에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부조묘의 복구를 요구했지만 상신들이 그대로 덮어두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고, 정조대에 와서 장령 李燮이 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뒤 정조 20년(1796)에 다시 장령 朱重翁이 상소를 올려 부조묘 문제를 제기 하였다.

이때에도 국가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자손들의 부조묘 복구운동은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헌종 7년(1841) 문중 내에서 병렬을 사손으로 인정하는 회의를 거쳐 완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호남, 영남, 호서 등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삼우당 자손의 대표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44년에는 관의 허락을 받으려고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연명해서 예조에 상서를 올렸다. 부조묘의 사손으로 병렬을 세우고자 했으나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어 허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1854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유생들이 나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때에 와서야 비로서 국가로부터 다시 부조묘의 계승봉사를 인정받게 됭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까지는 부조묘가 단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손이 있는 전라도 보성으로 옮겨야 했다. 국가가 인정하는 부조묘를 옮기는 데는 관의 여러 가지 도움이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려 경유하는 고을의 관아로 하여금 옮기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4) 단성 사림의 적극적 참여

지금까지 언급해 왔듯이 문익점에 대한 현창운동에는 자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림들이 참여해 왔다. 그중에서도 단성 사림들의 참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단성현은 원래 작은 고을로서 고려 말까지만 해도 강성현과 단계현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강성현은 진주에, 단계현은 합천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때에 수령이 파견되면서 두 고을이 합쳐져 단성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단성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성 출신의 인물은 진주 출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는 내용에서도 문익점을 진주출신으로 보고 있고, 문가학이 천거될 때도 진주 출신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고을이었기 때문에 문익점과 같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이 고을 사림으로서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가학 사건 이후 단성에는 문익점의 자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사손으로서 단성을 지키고 있던 문광서가 여주이씨를 양자로 들인 것이라든지, 조선중기 문익점의 증손녀로서 합천이씨 季通과 결흔한 문씨가 묘사 중건에 앞장섰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성에서의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 묘사 등의 관리 및 문익점에 대한 현창 작업은 합천이씨 등 외손들과 단성의 사림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양마을에 정착한 합천이씨가 외손으로서 문익점을 현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淸香堂 李源의 역할은 『운창지』에 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효자비각을 건립하는 것과 이를 기념하는 기문을 당시 명사에게 요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딘성의 다른 가문의 사림도 고향 출신인 문익점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느끼고 도천서원의 운영과 중건뿐만 아니라 청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단성에서는 사액서원으로서 내세울 만한 서원은 도천서원 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천서원도 1461년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 되었다.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1564년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1612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가 1672년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그때마다 단성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건하고 관아에 지원을 요청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이후에도 1744, 1770, 1797, 1805, 1865년에 중건되었는데 합천이, 성주이, 안동권, 진주유씨 등 단성의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중건의 실질적인 직임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이중 1865년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서 서원 중건을 주도했던 李邦儉의 “道端述言”에는 당시 서원중수과정에서 단성 사림들이 활동했던 여러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즉 1864년 7월에 도천서원에 비가 새어 여러 가지 집물이 젖고 일부 서까래가 기울고 창과 벽이 일부 무너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이방검은 단성 사림 각 가문에 통지하여 다른 서원의 향사 모임 때 논의하고 전달하여 서원 중수 방향을 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65년에는 講堂과 酒庫를 중수하였고 그 후 西齋, 典廳, 庫舍 등도 새로 세우고 사당의 수리도 시급해서 위패를 강당에 임시로 봉안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여 다시 단성 사림의 각 가문 대표들에게 회의소집을 알리고 있다. 또 이에 드는 비용 부족 때문에 인근 고을에 통문을 돌려 각 고을 사림들의 도움도 요청하였고, 각 고을에 사는 문익점 자손에게도 자금 모금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부 고을의 문씨들이 협조하지 않거나 자금모금을 맡은 일부 인사가 자금을 보내지 않은 등 문제가 생기자, 진주, 하동, 곤양 사림들과 연대해서 이에 대한 징계를 관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단성 사림들은 문익점의 위패 환봉시에는 관의 경제적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708년 박항태 등 단성 사림이 도천서원 청액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사액서원이 된 후에는 權思國 등 단성 사림들이 도천서원에 대한 면세운동도 전개하여 관의 지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방법으로 1708년과 1766년에는 단성 사림들이 行蹟記를 만들기도 하였고 자손들과 함께 실기와 도천원적 편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도천서원이 사액된 후 배향되어 있던 東溪 權濤의 위패 처리로 단성 사림들이 반발하거나 또 문익점의 외손인 합천 이씨와 문씨문중이 묘역과 위토의 관리 문제로 대립하는 등 한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단성 사림들은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에도 단성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중반 문익점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朴尙台가 지었다든지, 이 당시에 이방검 등이 도천서원을 중심으로 각 사림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활동을 했던 것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 맺 음 말

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이 남긴 행적에 대해 후대의 유명 인사들의 칭송은 줄을 이었다.
이황은 문익점이 목면전래를 통해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하고 효행과 절의를 통해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송시열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후직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안유와 문익점 두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문익점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켰기 때문에 국가의 포전은 성대했다.
우왕 9년에 조정에서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고, 후에는 비각도 세워졌다. 정종 2년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田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과 復戶를 내려주었다. 그가 조선왕조에 와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종 원년에는 藝文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하였으며. 그에 대한 不조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侯로 봉하였으며, 세조 7년에는 고향인 단성에 사우도 건립된다. 그리고 후대에 가면 이 도천서원과 함께 전라도 장흥에 세워진 강성사에 사액이 내려진다.

이처럼 극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바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실기를 간행하고 증보하였다. 그리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고, 소략한 부분은 보충하였다. 그가 제향된 도천서원을 알리기 위해 『도천원적』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도천서원을 중건해서 운영하고 사액을 받아내기 위한 운동도 여러 차례 전개하였다 단성의 도천서원 및 장흥의 강성사 이외에 황해도 송화현의 삼봉서원, 전라도 창평현의 운산서원, 경상도 의성현의 봉강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자손과 사림들은 더 나아가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문가학 사건 등으로 자손들의 단성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부조묘 제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었다.

이런 현창운동에는 어느 지역 사림보다도 단성 사림의 열정이 켰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어서 더욱 더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천서원 건립, 증건, 운영뿐만 아니라 사액운동, 문묘종사운동 등 여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실기의 편찬과 『도천원적』 편찬에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후손, 사림들의 현창활동을 정리하여 보았지만, 이 글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기나 기타 자료가 지니고 있는 사료로서의 한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이 부분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치밀한 분석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단성뿐만 아니라 문씨들이 사는 다른 지역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좀 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갈 필요성도 느꼈다. 자료가 많이 발굴된다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7. 민족의 은인 삼우당

조영일칼럼(국제섬유신문 발행인) 국제섬유신문 2006년 6월5일

2006년 6월 2일은 우리나라 섬유,패션 전문지의 새지평을 연 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일이었다. 단순한 본지의 창간기념행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생활혁명을 일으킨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숭고한 뜻을 담은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 대상" 시상식이 열린 뜻깊은 날이었다.

백성에게 옷을 입힌 선각자

정치가 혼탁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우리현실에서 충신이자 민족의 의생활을 해결한 은인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고려말의 거유(巨儒)로 성리학의 거장인 문익점 선생은 고려 충혜왕 1년 1331년 신미년에 탄생했다. 자는 일신으로 호는 사은,  삼우당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여 가문의 사랑과 향리의 촉망을 받았다. 26살에 향시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9년)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장원급제는 정몽주였다. 이때 김해부 사록으로 관계에 진출한 후 성균관 순유박사(종7품)을 거쳐 중서문화성 좌정언의(정6품)에 승진했다. 1363년 공민왕12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삼우당 선생은 이듬해 10월 목화씨 10개를 숨겨가지고 귀국하게 된다. 그길로 낙향한 선생은 1365년 공민황 14년 고향인 진양 강성현에 10개의 목화씨를 가지고 가서 5개는 선생이 심고 5개는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 파종했다. 그러나 선생이 심은 목화종자는 모두 말라죽고 정천익이 심은 종자는 겨우 한그루가 싹터 살아났다.

이같이 우리나라의 목화의 재배 과정에는 피나는 간난신고dhk 고심참담한 노력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한 한줄기의 목화는 잘 성장하여 가을에 소담한 목화송이로 피어났다. 이것을 가지고 3년간을 확대 정미년부터 향리에 분향하기 시작했다. 삼우당선생이 목화씨를 그 장인에게 주어 재배에 성공하여 조선 목화의 못자리가 된 곳은 진주목 강성현 효자리. 지금의 산청군 단성읍 사월리로 대한민국 사적 108호로 문익점 목면시배지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모든 산하가 목화밭이됐다.  목면산업은 농공 결합 산업형태로서 고려말에 조선왕조의 교체혁명의 진통기에 시작되어 본격적인 개화는 조선왕조 혁명이 완성되는 태종조부터 이루어졌다. 조선왕조는 목면산업에 대해 적극적인 장려와 특혜조치를 베풀어 삼남일대에 급격히 보급 전파되었다. 세종조에는 경상,전라, 충청지역에 목면산업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서 세조 세종 성종은 서북지방에 목면산업의 전파에 전력하여 그 결과 전국에 널리 퍼지게되었다.

목면산업은 조선왕조의 산업구조였다. 조선왕조의 의류산업에 혁명을 가져왔고 그것은 조선왕조 재정의 중추적 기둥이었으며 농가경제의 중요한 봉법보완경제였다. 특히 목면산업은 조선왕조 유통경제의 교환수단이었고 농공 결합형태의 산업이었다. 그리고 백성, 천민, 사대부 등 계급을 초월하는 평등산업이었다. 목면산업은 조선왕조 대외무역품중 왕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대일무역에서 목면을 수출하여 유황, 동, 금, 은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총과 무기 화약을 재조하여 국방에도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명주나 갈포 모시 삼베외에 마땅한 의류소재가 없어 헐벗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충신이자 민족의 은인 삼우당 선생은 1400년 정종2년 2월8일 수70을 일기로 돌아가셨다.
태종은 전국에 전교를 내려 고려말 충신인 삼우당에게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依被生民之功)을 만세까지 이어지도록 명했고 조정에서 그 공을 높이 치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갖도록 했다. 더불어 태종은 명을 내리어 관봉과 작을 증하고 호를 내리며 사당을 세우도록했고, 논과 밭과 노비를 주어서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삼우당의 자손들에게는 문,무를 가리지 말고 등용하고 자손들이 공과 사의 죄를 범해도 벌하지 말라면서 훗일 억만년이 지나도 이같은 영을 변경하지 말라고 명할 정도였다.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의류혁명을 가져왔고 국가와 민족에 위대한 공로를 세운 은인 삼우당선생은 섬유산업의 효시이자 아버지였다. 이같이 위대한 민족의 은인의 참뜻을 되새겨 13년전 우리나라 섬유패션산업의 명운을 좌우할 전문신문을 자임하며 출범한 국제섬유신문이 창간정신을 살려 임금을 걱정하고 부모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삼우당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상을 제정한 것이다.

삼우당은 섬유패션 노벨상

섬유, 패션분야의 노벨상으로 정착한 삼우당 섬유,패션 대상은 그 취지에 걸맞게 섬유,패션산업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세운 기업인이나 공직자, 섬유,패션 유관인사를 선발하여 시상하는 권위있는 시상제도이다. 수상자 전원에게 순금메달과 상패가 수여되고 수백명의 참석인사들의 축제의 한마당으로 승화된 삼우당 삼유,패션 대상은 올해도 훌륭한 인사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2년간 친섬유 장관으로 섬유,패션 산업에 헌신해온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현 무역협회장)이 공로상을 받았고 의류수출의 기적을 올린 치신물산과 내수패션의 와지 지위에 오른 형지어패럴 최병오 회장과 동광인터내셔날 이재수 대표이사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또 의류,직물, 염색가공 업계의 대표주자들과패션경영과 디자인의 세계화를 이룬 톱1디자이너, 섬유,패선 유통혁명을 이룬 공로자 그리고 노스페이스 단일브랜드로 1억불 수출을 주도한 수출유공자, 산업진흥과 신기술 개발주역 등 18명이 영예의 삼우당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축하와 경의를 표하면서 내년에도 이같이 훌륭한 수상자가 많이 배출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관련기사 아래에 첨부함

2006년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 · 패션 大賞

영예의 수상자 선정            
6월 2일 섬유센터 대회의실서 성대한 시상식·리셉션

섬유패션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우는  2006년 삼우당 섬유패션진흥 대상 수상자가 대상을 포함해 총 18개 부분별로 최종 확정되 오는 6월 2일 오후 3시 섬유센터 17층 대회의실에서 본지 창간 13주년 기념식과 함께 지난 2일 섬유센터 대회의실에서 성대하게 거행된다
삼우당은 문익점 선생의 아호로 본지(국제섬유신문)가 지난 1994년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재정한 이래 올해 열세 번째로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업체 및 개인에게 수여하는 명실공히 섬유패션업계의 노벨상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올해 2006년 삼우당 섬유패션진흥대상의 최고상인 대상의 최고상인 영예의 대상에는 수출부문에 최신물산(주) 김기명 대표이사, 내수패션부분에(주)형지어패럴 최병오회장 (주)동광인터내셔날 이재수 대표이사가 각각 선정됐다. 이밖에 각 부문별로 총 18명의 수상자가 선정돼 각각 상패와 함께 순금메달을 수여받게된다
올해 수상자는 각 섬유단체 및 업체의 추천을 받아 경세호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 정우영 대한직물 연합회장, 박연흠 성균관대학교수, 김호영AMC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5인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됐다.

섬유패션인 한마당 축제 대성황

제 13회 삼우당 섬유 · 패션 시상식 본지(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식

섬유패션의 노벨상으로 자리매김한 제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 대상 시상식이 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식과 함께 지난 2일 섬유센타 회의실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날 시상식에는 특별공로상을 받은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前 산자부장관) 등 정부인사들과 경세호 섬산련 회장을 비롯한 전국 섬유단체장 및 상근책임자 18명의 삼우당 수상자, 내빈등 총5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섬유단체에서는 원대연 패션협회장, 방상태 섬유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윤성광 한국섬유개발연구원 이사장등의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조영일 본지 발행인은 기면사를 통해 지난 13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국제섬유신문은 앞으로 섬유패션 정론지로서 업계의 밝은 등불이 되는 선도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섬유,패션인의 대화합의 장이었던 이날 시상식의 영예와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공로상: 한국무역협회 회장 이희범  대상(내수부문):(주)형지어패럴 대표이사 회장 최병오  (주)동광인터내셔날 대표이사 이재수  대상(수출부문):최신물산(주) 대표이사 김기명  합성직물:(주)신흥대표이사 이동수 의류수출:(주)우인인더스트리즈대표이사 조수혁  패션경영인:(주)아이올리 대표이사 최윤준  패션디자인개발:(주)씨인터내셔날 대표이사 최연옥  패션진흥부문:(주)대경물산대표이사 김두철  패션유통부분:애프원(주)대표이사 박경노  패션교육부문: 사디(삼성이트앤디자인 인스티튜트)학장 원대연  섬유,패션유통부문:(주)한섬204사장 고병인   패션모델리스트부문:(주)이상봉 김인철부장 염색가공기술개발:(주)부용화섬대표이사 조헌호  수출진흥부분:(주)영원무역 김은희차장  산업진흥부문: 한국염색기술연구소 본부장 류종우  신기술개발부문: 함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조대현 

제 13회 삼우당 섬유패션 대상 시상식, 本紙 창간 13주년 기념식 소식

이처럼 성대한 행사 거뜬히 치뤄내는 저력 놀랍다" 감탄

본지 창간 13주년 기념식 및 제 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상 시상식이 거행된 지난 2일 섬유센터 17층 대회의실.
행사시간을 한시간 정도 앞둔 오후 2시를 조금 지나면서 영광의 삼우당 수상자들을 필두로 낯익은 얼굴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속속 대회의실 기념식상으로 들어섰다.
2시 50분경 공로상 부문 수상자인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前 산자부장관)이 대회의실에 입장, 먼저 와있던 섬유·패션인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어 경세호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등 12명의 섬 단체장들이 단상에 좌정했다. 개회시간 3시를 조금 앞두고 피아노 3중주의 감미로운 선율속에 18명의 삼우당 수상자 전원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단상의 귀빈석에는 조영일 본지 발행인을 비롯, 경세호 섬산련회장, 정우영 대한직물연합회장, 안영기 화섬협회장, 원대연 패션협회장, 박상태 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박풍언 의류산업협회장, 윤성광 한국섬유개발연구원이사장 등 내외 귀빈들이 자리했다. 또 단하에는 각 단체 상근책임자 및 업계 대표자, 수상자들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경세호 섬산련 회장을 비롯 안영기 화섬협회 회장, 박상태 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함정웅 염색기술연구소 이사장, 김정수 방직협회 회장 등이 보낸 대형 화환이 무대 좌우를 장식했고,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보내온 아름다운 양란 등 수십개의 난꽃 화분들이 단상 전면을 장식해 식장 분위기는 화려함을 더했다. 참석자들은 이처럼 축제열기 가득하고 정감이 넘쳐흐르는 행사장 안팎 풍경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 했다.
조영일 본지 발행인이 공로상 수상자인 이희범 무역협회장(前 산자부장관)에게 시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희범 회장과 경세호 섬산련회장이 수상자들에게 차례차례 시상했다.  18명의 수상자들에게 상패가 증정되고 순금메달이 수여될 때마다 하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이들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날 조영일 발행인은 기념사를 통해 "창간 13주년을 맞은 국제섬유신문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업계의 명쾌한 비전제시, 정확한 정보제공, 정부와 업계를 향한 진심어린 충언 등 섬유패션산업 발전을 위한 전문언론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고 강조했다.
또 경세호 섬산련 회장은 축사를 통해 "이처럼 알차고 성대한 행사를 거뜬히 치루어내는 국제섬유신문의 저력에 놀랐다" 면서 "국내 섬유·패션산업을 선도할 명실상부한 섬유전문언론의 필독지 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치하했다.
시상식이 끝난후 500여명의 참석자들은 일제히 잔을 높이 들어 국제섬유신문의 창간 13주년과 제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상 시상식을 다시한번 축하했다. 축배에 이어 수상자, 정부관계자 그리고 축하객들은 식장 중앙에 마련된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음식을 들면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정겨운 시간을 가졌다.

 
8. 동정의 역사

동정이란 한복의 목이 닿는 부분에 덧 붙이는 좁은 백색천의 테두리를 말합니다.
동정을 달 게 된 유래는 .
세종원년 기해년 강성군 문익점 할아버지의 목면으로 인하여 이룩된 산업의 혁명과, 외화획득의 공로, 의류혁명의 위대한 공덕을 이 세상에 영원히 기념하는 뜻으로 세종임금이 특별히 만조백관을 모아 조야에서 명하기를 "이나라 백성이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덕인고로 동정을 달아 기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색깔있는 동정을 달지 못하게 하고 흰 동정만 달 게 한 것은 문익점 선생의 사후였기 때문에 영원히 상복을 입는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