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목화시배지

산청 목화시배지 - 대한민국사적 108호

주소 :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 106번지
교통안내 : 대전-통영 고속도로 단성나들목에서 1km 직진후 좌회전하여 2km 직진

연결표(아래 항목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유래

사적비

유허비

부민각

전시실

효자비

베짜기

목화축제

인근관광지



목면시배 전시관
삼우당 사적비와 유허비
부민각
삼우당 효자비각-경남문화재 52호


문익점 목화시배지 유래
경남 산청의 문익점 목화시배지입니다. 명칭이 원래는 "문익점목화시배지" 였으나 현재는 "목면시배유지"로 이름이 변경되어 이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충선공파 종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목화로 국민을 부강하게 한 문익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종은 부민후를 추증하였고 부조묘를 세우게 하였으며 후손들을 돌보라고 하였다. 일제때에도 목화의 기념행사를 산청군에서 매년 거행하여 왔으며 1965년 4월2일 산청군은 문익점公께서 목화를 기르신 곳에 사적비를 세우고 목화를 길러 왔고 1988년에는 국비로 200여평 규모의 전시관을 만들고 사적 제 108호로 지정하면서 문익점 효자비를 이전하고 전시관을 건립하고 마당에는 목화를 재배하여 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8년 10월 시배지의 목화밭 모습입니다

 

삼우당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

용두와 거북의 교체전 사적비 

사적비문 내용

                      綿花始培 事蹟碑
             1965년 5월   일        안동 김순동 삼가 지음
사람이 만물의 영장 됨은 오직 충(忠)과 효(孝)를 알음으로써이다. 집에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며, 밖으로 벼슬길에 오름에 맡은 바 직분에 힘쓰고, 위난(危難)에 처하면 한몸을 잊고  의(義)에 나가니 이는 아무에게나 기할 수 없는 바이다. 또한 천에 하나 얻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를 만나서 만고(萬古)에 누구도 이루지 못할 영구히 온 생령(生靈)에 입히는 바 큰 은덕을 베풀면 그 공적은 우주에 드리워 빛나며 명성과 덕망은 태두(泰斗)보다 높으리라.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오 자는 일신(日新)이며 진주 강성현(江城縣)인이니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의 아들이다.
고려(高麗) 충혜왕 신미년(1331) 3월 8일에 태어나서 이가정(李稼亭)선생 곡(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신경동당급제로 벼슬이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동지경연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이르고, 계해에 효자리(孝子里)의 표정(表旌)을 받았으며 경진(1400년) 2월 8일에 졸하니 향수 칠십이라.

태종시에 이르러 참지 의정부사를 증(贈)하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며 시호를 충선(忠宣)으로서 부조(不祧)를 명하며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포장하였고, 세종조에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贈)하였으며 부민후(富民候)를 봉하고, 세조조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사액(賜額)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공민왕 13년 계묘(1363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때에 적신(賊臣) 최유가 원나라 황후 기씨(奇氏)와 깊게 결탁하고 충선왕 별자(別子)인 덕흥군(德興君)의 옹립을 몰래 도모함에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선생이 이에 항쟁하다 덕흥의 저택에 구속됨이 무릇 42일이오 마침내 교지(交祉)로 멀리 귀양갔는데, 풍토(風土)가 고르지 않아 질병이 많았으나 선생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항상 역경(易經)과 예서(禮書)로서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였다. 문득 샘물이 솟아 올라 토인(土人)의 풍토병이 이로하여 완쾌되었다. 달성귀(達成貴)학사와 종유(從遊)하고 운남풍토집(雲南風土集)을 저술하였다.
3년 후 돌아오는 도중 목면화(木棉花)를 보고 민생(民生)에 이로움을 생각하여 종자(從者) 금용(金龍)으로 하여금 그 종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 오니, 이는 금망(禁網)의 엄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정미년(1367) 2월에 환국하여 살으셨던 배양리(培養里)에다 손수 심었는데, 처음은 그 땅에 적합한 작물인지를 몰랐으나 마름과 젖음을 가려 심고, 그 성하고 솨함을 보아 배양(培養)의 묘를 얻어 3년만에 번성하여 드디어 전국에 퍼지니 주저마갈(紬苧麻葛: 명주, 모시, 삼베 칡넝쿨>)만 입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무명옷으로 추운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후에 선생의 손자 정혜공(靖惠公) 래(萊)는 물레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군수(郡守) 영(英)은 베짜는 요체를 얻어 이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음(訛音)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대를 잇는 아들이 선열의 일을 이어 받는 좋은 행실은 세상 사람들의 흠탄(款歎)하는 바이다.
정사(丁巳)에 왜구가 왕성하여 모두 달아났으나 홀로 선생은 상제(喪制)로 묘를 지키고 곡읍(哭泣)을 평일과 같이 함에 후진(後陣)의 적(賊)도 서로 감복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勿害孝子]의 네 자를 써두어 욕보임을 금(禁)하니 온 고을이 안도하였다.
그리고 정포은(鄭圃隱;정몽주) 이도은(李陶隱;이숭인) 박 정재(朴貞齋;박의중) 제현(諸賢)과 함께 정주서(程朱書)를 깊이 연구함에 몰두하여 정학(正學)을 부르짓고 유풍(儒風)을 일으킨 공은 지금껏 빛나고 있다.
선생은 이미 충효(忠孝)를 두루 갖추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당함에 우뚝 솟은 절의(節義)를 지켜 들리는 명성이 백대(百代)에 움직이었다. 그리고 인류에게 무명옷을 입은 자 뉘아니 존경하며 그리워하리오.
이제 선생의 유적보존회(遺蹟保存會)를 조직하여 돌을 깎아 선생의 면화를 처음 파종한 밭에 세워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향인(鄕人) 변종봉(卞鍾捧) 이우상(李宇相) 제군과 후손 정동(正東)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때 정부의 원조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선력(宣力)을 힘껏 주선하고 권붕용(權鵬容)이 나에게 글을 청하니, 비록 글에 능치 못하나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흠앙(款仰)하여 사양치 않고 대강(大網)을 기술(記述)하여 밝게 빛나는 공을 후세에 밝히고자 하노라.

서기 1965년 5월 일 안동 김순동(金舜東) 삼가 지음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사월리(沙月里) 배양촌전(培養村田) 106번지
대한민국(大韓民國) 사적(史蹟) 제108호

 

삼우당 문익점 유허비
삼우당 문익점 유허비와 이를 건립한 문영훈 회장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益漸先生) 유허비(遺墟碑)
강산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이곳은 여말(麗末)의 홍유석학(鴻儒碩學)이요, 민족만대의 공신인 문익점선생이 태어나고 세거(世居)한 고향마을이다. 선생은 1331년 충혜왕 원년에 이곳 강성현 원당리(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급제한 부 숙선(叔宣)과 함안조씨(咸安趙氏)에서 태어났다. 조(祖)는 봉익대부삼사우사문한학사(奉翊大夫三司右使文翰學士) 윤격(允挌)이며, 증조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극검(克儉)이요, 고조는 강성백(江城伯) 득준(得俊)이다.
선생은 부인이 두 분인데 첫째 부인은 팔계주씨(八溪周氏)고 둘째부인은 진주정씨(晉州鄭氏)이며, 5子를 두었는데 중용(中庸) 중성(中誠) 중실(中實) 중진(中眞) 중계(中啓)이다.
이 마을은 예부터 토성문씨(土姓文氏)와 속성(續姓)인 주씨(周氏)의 집성촌이다. 선생은 일찍이 가정 이곡(稼亭 李穀)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고려공민왕 9년 포은 정몽주 선생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 벼슬에 나아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때에 공민왕 11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갔는데 그때 원의 순제가 고려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 고려왕으로 책봉하는 칙령에 반대하여 불복함으로 원제의 노여움을 사서 멀리 강남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곳의 특산물인 목면을 눈 여겨 보고 크게 기뻐하고 그 재배법과 이용술을 배워 당시 원나라에서 국외반출을 엄하게 단속하는 금수품인 목면종자 10여개를 필관(筆管)에 밀장(密藏)하여 귀국했다.
이는 오직 겨울이면 추위에 떠는 고국의 백성을 구하기 위함 이었다. 선생은 이듬 해 봄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에게 귀국인사를 드리고 소중히 간직해 온 목면 씨 다섯 개는 뜰 앞 화분에 심고 나머지 반은 진주 소남 관정리에 살고 있는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게 하였다. 정공이 심은 것이 싹이 터서 그 씨를 받아 선생께서 여기 고향 밭에 재배하여 3년 만에 전국에 전파되었다.
정공은 씨아를 만들고 무명베를 짜는데 성공했고, 선생의 손자 래(萊)와 영(英)이 물래와 베틀을 다시 개량하여 전국에 보급함으로 이로써 엄동설한 추위에 떠는 이 나라 백성에게 따스한 솜옷을 입게 하여 의료혁명의 은덕을 베풀고 당시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고려우왕은 선생의 학문과 공덕에 감복하여 중현대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中顯大夫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을 제수하고 또 선생은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1383년 우왕 9년에 처남 사부상서 주경(史部尙書 周璟)과 함께 나라에서 효자의 정려(旌閭)가 내리니 한 마을에 두 효자가 났다하여 동명(洞名)을 효자리라고 했다. 그 후에 선생이 이곳에 목면을 처음 재배한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다시 배양산리(培養山里)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선생의 고조 때부터 180년간 명문거족으로 문씨의 세거지이며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목면시배지란 사실이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국조방목(國朝榜目) 단성읍지 운창집(雲窓集) 퇴계 이황찬 효자비각기 남명 조식찬 묘사기 배산서원기 등 제 사적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태종 6년 선생의 조카 가학(可學)의 역모(逆謀)로 인해 멸문지화를 입어 명문 문씨족은 풍비박산으로 온 마을이 폐허가 되어 선생의 효자비각과 묘소관리도 못하게 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협천이씨 계통(陜川李氏 季通)에게 출가한 선생의 증손녀가 아들 승문(承文)과 윤문(胤文)을 데리고 증조부의 묘역을 지키기 위하여 소이곡(所耳谷)에서 배양리로 이사를 왔다. 참봉공 승문(承文)과 손자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 증손 죽각 광우(竹閣 光友)는 영인문씨(令人文氏)의 명을 받들어 선생의 묘역과 비각을 보살피며 외손봉사를 함에 배양리는 협천이씨 세거지가 되었다. 영인문씨는 96세에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선생의 묘 옆에 사우(祠宇)를 짓게 했다.
후일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 일파의 야심으로 고려 구세력의 탄압을 위하여 실시한 전제개혁안을 반대하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자 선생은 공양왕 원년 59세 때 모든 벼슬을 버리고 이곳 고향으로 내려와서 오직 목면재배보급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생전에 고려나라의 부진과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과 자신의 학문이 부족한 세 가지를 늘 근심하여 삼우당(三憂堂)이라 자호(自號)하고 오직 목면재배보급과 성리학의 연구와 후학교육에 몸소 진력하였다. 뒷날 조선 태조가 벼슬을 주면서 여러 차례 선생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려의 충절을 지켰다. 그리하여 70세를 일기로 별세하니 조선 정종대왕은 예장(禮葬)을 명하고 묘사(墓祠)를 세우게 하였으며, 태종대왕은 첨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증직(贈職)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不祧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영의정을 추증하고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부민후(富民侯)를 추봉(追封)하였다.
고려의 대사성을 지낸 목은 이색(李穡)은 선생에 대하여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종(宗)이라 하였으며, 퇴계 이황(李滉)은 선생이 목면을 전하여 이 나라에 의관문물(衣冠文物)을 일신시켰다고 하고, 남명 조식(曺植)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이 농사를 가르친 후직(后稷)과 같다고 시로써 선생을 칭송했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사문(斯文)의 공을 칭송하여 아동방(我東方)의 이현(二賢)은 성리학을 전하여 유도(儒道)를 계승케 한 문성공 안유(安裕)와 충선공 문익점이라 하여 이전의 사람도 문공(益漸)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도 문공 같은 이 없으며, 이후의 이후에도 역시 문공 같은 이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밖에도 전국의 사림들이 여러 차례 문묘배향(文廟配享)의 소(疏)를 올리기도 했다. 지금도 선생이 살다 간 이곳 배양마을에는 생전에 정려된 효자비가 서있고 생가유지(生家遺址)에는 선생이 수식(手植)한 행자수(杏子樹)가 무성하여 경상남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생이 처음으로 목화를 심었던 이곳을 정부에서 1959년 1월 23일자로 고적 제154호 문익점목화시배지로 지정하고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시행에 따라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8호 문익점면화시배지로 재 지정하였으며 1965년 5월에 고 박정희대통령의 성금 60만원으로 삼우당문선생 면화시배사적비를 건립하였다.
문익점면화시배지로 지정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번지 외 2필지 215평 이외 이 일대 토지 3,100평을 남평문씨충선공파종회에서 매입하고 정부에 건의하여 1988년부터 1996년 까지 30여억원의 공사비로 문익점면화전시관을 건립하여 보전관리 해 오다가 1999년 12월 22일자로 문화재청에서 목면시배유지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반드시 문익점면화시배지로 복원 되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대략을 밝혀 돌을 다듬어 선생의 고리(故里)에 유허비를 세우고 명(銘)하나니,
의피생민(衣被生民)의 공적 하늘같이 높아 위국충절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하리
사문(斯文)에 끼친 공 만세불후(萬世不朽) 하리니 문공의 고리 배양리(故里 培養里)의 이름
문공과 함께 천추만세에 빛나리
서기 2007년 3월 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후손 경현(暻鉉) 근찬(謹撰)
남평문씨대종회장 남평문씨충선공파종회장 영훈(永勳) 근수(謹竪)

유허비 제막식(2009.6.19) 동영상 보기(클릭하면 동영상 볼수있습니다)

내빈소개

축사1

축사2

회장인사

제막식

비문낭독


접수 및 안내

회의전 참석자

회의전 참석자

행사 전 참석자 모습>

유허비와

화환

축화화환
참석자들
 

참석하신 내빈

식사준비

국민의례

회장인사

내빈 축사

경과보고

사회

비문낭독

 

면화시배 전시관 안내

전시실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시실의 입장료는 300원입니다


전시관 전경

제 1전시실

제 2전시실

실과 천을 만드는  도구,기구 전시장

염색한 무명옷 전시와 염색 관련 전시실

씨아(씨앗분리기) 베틀(베짜기)  물레(실뽑는기구)
활(목화를 부풀리는 도구) 등을 전시
풍차바지 두렁치마 누비바지 토시 등의 옷과
천연염료인치자, 쪽, 황백, 잇꽃 등과 염색된 옷 전시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자 목화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 산청군의 전통 베짜기와 천연 염색 시연장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산청군은 이달부터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문익점 선생이 처음 면화를 재배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사적 108호목면시배지내 작업동에서 전통 베짜기와 천연염색을 선보이고 있는데 시연이 있는날이면 하루 평균600여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목화에서 뽑아낸 솜으로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을 연발하면서 또한 치자 대나무 등 염색재료를 섞어 직접 물을 들여 보기도 하고 시배지내 문익점 기념관에서 우리 옷이 있게 된 역사적 배경도 되새겨 보는 등 시배지가 전통의복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

20여평의 작업동에는 베틀과 베를 짤 때 씨실을 넣어주는 북, 베를 단단하게 역어주는 바디 등 베짜는 기구 한벌과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한 염액 용기등 천염염색도구를 갖추고 있다. 천연염색 연구가 이산(42)씨가 베짜기를 각각 맡아 베짜는 직조, 무명천을 물들이는 천연염색, 바느질 등 3단계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대나뭇잎으로는 연노랑 연두색으로 물들이고, 치자로는 노랑색과 쑥색을, 홍화를 섞어서 암갈색과 적갈색을 만들어 내는 등으로 무려 50여가지의 천연염색 색상을 연출해 내며 내년부터는 매일 베짜기와 천연염색을 시연하면서 우리 옷의 우수성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산청군은 핸드백 손수건 지갑 모자 등 천연염색 상품과 캐릭터를 개발하는 등 관광상품화 방안도 갖고 있다.권순영 산청군수는 목면시배지는 성철스님을 기리는 겁외사와 불과 1km 거리에 있어 가족 관광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고 밝혔다. - 국제신문  2001년 6월 26일 이원재 기자-

삼우당실기

신고려사

목화의 단계별 성장

문익점 영정

제1 전시실(실뽑기와 베짜기)

목화솜의  불순물 가려내기

씨아로 목화와 씨앗을 분리

씨아

실꾸리 만들기

여러 가지 형태의 물레(실뽑는 기구)

실메기(베짜기 준비)

베짜기

작업 공정

무명베의 손질

베틀의 종류

색깔있는 목화의 실

씨아(씨빼는 도구)

물레(실만드는 기구

베짜기(베틀)

베짜기


제2 전시실(염색)

무명 한복

나들이

염색한 무명옷

염색된 의류들

염색 준비

염색된 비단,삼베,모시

 

목화시배지의 기념 목화밭

 

부민각(富民閣)
부민각은 부민후 문익점 공을 기리기 위해 산청목화시배지 내에 설립한 건물입니다.

부민각 전경

부민각(富民閣)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고려 공민왕 때 좌정언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면화씨를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게 하였다. 이는 오직 백성과 국가를 위함이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로 벼슬을 사직한 후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시다 70세인 1400년 2월8일 본가에서 돌아가시자 정종은 선생의 공과덕이 지극히 크고 높음을 가리어 예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태종도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추증하고 강성군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공이라 하고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왕 또한 선황들의 뜻을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을 추증하고 부민후를 추봉하였다. 이 의이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7칸집을 짓고 부민각이라 이름하였다.

부민각의 주련 시문해설

동명

개국

기천추

우리나라 생겨난지 몇 천년이나 되었을까

의피

생민

자유전

백성에게 옷 입게 한

처음 목화 심은 밭

이곳이라

가석

문공

낭저물

사랑스럽다

문공 주머니 의

목화씨 몇알

번성

천화

장무유

귀중한 옷감 되고

재화 되어 크게 빛나 무궁하여라

충신

효자

과하야

왜적을 감복시킨 충신효자는 과연 어떤 분이던가

불견

선생

지관화

선생은 뵙지 못하고 임께서 가져오신 목화꽃만 보네

의시

목면

면부절

옷은 목면이 최고이니

무명솜옷 없어지지 않으리

조선

억재

부민가

조선이나 억만년 까지 모든백성 옷감 풍부하리라

김종직,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
세종때인 1431년 태어나 성종때인 1492년 별세하심
문과급제후 형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많은 저서를 내었으며 수많은 학자를 길러 국가에 공헌하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 일세(一世)의 종주가 되었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창녕조씨 자는 태허(太虛)
단종2년(1452년) 태어나 연산군9년(1503년)졸함
문과 급제후 벼슬이 대사성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대학자로서 추앙받았다

 

삼우당 효자비
삼우당 효자비각 - 경남문화재 52호(목면시배사적지 경내에 있음)

효자비각 안내문

이 누각 안에는 우왕 9년(1383년)에 하사한 효자비가 건립되어 있다.
문익점 선생이 청도군수로 보임하고 있던중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지키다가 남해안 일대를 횡행하던 왜구에게 잡혔으나 부모의 무덤 앞에서 3년간 시묘살이 하는 고려의 아름다운 풍속에 감동한 왜장은 물해효자(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란 팻말을 세우고 철수하니 이로서 문익점과 이 일대는 잔학무도한 왜구로부터 화를 면했다. 우왕은 잦은 외침 때문에 국법으로 정한 3년상의 상례(喪禮)가 무너진 시절, 이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 문익점이 태어난 동리를 효자리(孝子里)라 명명하고 아울러 효자비까지 내렸다. 그 비가 지금 여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무명베짜기의 공정
솜으로 베를 짜는 과정으로 일부는 고부자(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님의 글을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 씨앗기(씨빼기) :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
잘 말린 목화송이를 씨아에 물리고 손잡이를 돌리면 씨는 가락앞으로 떨어지고 솜은 뒤쪽에 쌓인다 1940년 이후는 솜틀집에 맡겼다

■ 활타기(솜타기) : 목화를 부드럽게 펴는 작업
대나무를 활 모양으로 휘어서 만든 활을 이용한다. 씨아에서 씨와 분리된 솜을 자리에 놓고 한 손에 활을 들고 반대 손에는 활꼭지(박달나무로 만든 손잡이)로 활줄을 퉁기면 진동에 의해 솜이 뭉게구름처름 부풀어 오른다. 1940년대 이후는 솜틀집을 이용했다.

■ 고치말기 :  실을 빼낼 고치를 마련하는 작업
고치를 말 때는 말대와 말판이 필요하다
말대는 고르고 긴(길이 40cm에 굵기 1cm정도) 수수깡이다. 말판은 빨래다듬이판이나 뒷박등 편편한 것을 사용한다. 판위에 솜을 얇게 펴고 수수깡대에 말고 , 솜은 빼내서 가지런히 둔다 고치는 길이 30cm에 굵기 1.5cm 정도인 것이 좋다

■ 물레잣기(실뽑기,실잣기) :실을 길레 뽑아내는 작업
먼저 짚껍질 구멍에 가락(길이 30cm의 날카로운 쇠꼬챙이)을 꿰고 물래를 고정시킨다. 말아놓은 고치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손잡이를 돌리면서 실을 뽑으면 가락에 실이 감기는데 이 감긴 실을 댕이라고 한다. 물레잣기는 무명생산에서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과정이므로 능숙한 사람이 했다. 물레잣기를 할 때 고치를 풀어내는 것과 물레를 돌리는 회전속도 등 기술자의 솜씨에 의해서 실의 굵기가 판가름 나며 이는 품질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날뽑기(무명날기) :날실을 마련하는 일
베 길이를 가늠하여 댕이에 감긴 실을 고무레(날틀)구멍에 꿰고 한 쪽에는 큰 소쿠리를 놓고 고르게 뽑아낸다. 고무레 구멍은 더 많은 것도 있으나 10개 짜리가 앉아서 하기에 알맞다 뽑은 날실은 엉키지 않게 사린다.

■ 실익히기 : 뽑은 날실은 강도를 높이고 굵기를 고르게 하기 위한 작업
물과 쌀 한움큼을 솥에 물이 끓으면 날실을 푹 담그고 풀물이 골고루 적셔지도록 주무르고 자근자근 방망이 질을 한다. 골고루 잘 젖었으면 두 사람이 코를 내어 마주 잡고 물리글 짜낸 다음 잘 털어서 말린다.

■ 바디에 실궤기 : 모든 처리를 거친 날실을 베틀의 바디구멍에 한 올씩 꿴다.
몇 세짜리 베를 짤 것인가가 결정하여 실을 꿰고 반대쪽 끝에는 도투마리를 연결시킨다.

■ 베메기(올매기) 바디에 올린 실을 틀에 올리기 전의 마지막 손질 과정
왕겨로 겻불을 지피고 날아놓은 실과 솔 풀 토투마리 끄싱게 뱁댕이 등을 준비한다
단베를 맬 때는 넓은 마당에서 하는 데 바람이 불지 않고 햇빛이 너무 쨍쨍하지 않는 날이 좋다. 바람이 불면 재가 날려 실이 타거나 더러워져서 좋지 않고 햇빛이 강하면 실올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 한쪽에다 도투마리를 설치하고 반대쪽에는 날아놓은 실뭉치를 둔다
실은 풀을 먹이는데 실 아래는 겻불을 은근하게 지펴둔다. 풀을 먹이는 이유는 실이 강도를 높이고 짤 때 실이 엉키지 않게 하기위함이다. 풀은 쌀로 묽게 밥을 하고 풀솔로 으깨어 부수면서 쑨다. 풀칠하고 손질이 된 실은 도투마리에 감는데 감을 때는 실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가는 뱁딩이(대나무를 쪼개 만든 막대)를 사이사이에 넣으면서 하다.
베메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공동작업으로 이루어 지는데 특히 마지막 손질작업이므로 기술자를 모셔다 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하지만 세사람이면 능율적이다. 기술자는 풀칠하며 손보고 나머지는 도투마리감기나 끄싱게쪽에서 실을 적당히 푸는 등 보조역활을 한다.

■ 꾸리감기 : 씨실을 북에 넣도록 감는일
베짜기에서 날실은 베의 길이를 결정하고 씨실은 베의 폭을 결정한다 꾸리는 길이 20cm 굵기 1.5cm 쯤 되는 전대(시누대)에 감으며 감은 실의 길이는 14cm에 굴기는 5cm 정도가 된다.
꾸리에 실을 감을 때는 한손에 전대를 잡고 이 전대를 돌려가면서 한다. 꾸리에 감는 시실은 날실보다 좀 가는 실로 하며 한필을 짜려면 꾸리 6개 정도가 든다.
다 감은 꾸리는 전대를 뽑은 다음 맹물에 넣어 삶든가 물에 푹 적셔야 실이 가늘면서 고르고 질겨진다.
꾸리는 베를 짤 때 북(길이 37 너비7.5 깊이 5cm에 홈구명 길이 16.5 폭6.5 깊이4cm 정도)에 넣는데 이 때도 축축하게 물기가 있어야 짜기 좋다. 물기를 오래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시누대 잎에 싸둔다 요즘은 비닐로 하고 있다. 짜다가 물기가 마르면 물에 적신다.
베를 짤 때 꾸리실은 안으로부터 풀려나온다 짜다가 실이 끊아지면 꾸리 안쪽 구멍속으로 나락 털어낸 꼭지를 밀어 넣어서 조심스럽게 더듬으면 실이 딸려 나온다.

■ 베틀에 올리기 : 베매기를 끝내고 베를 짜기 위한 설치 작업이다
베틀은 주로 여성이 거처하는 방한 구석에 자리잡는다. 베짜기 앉을게(의작)에 앉아서 북을 씨실사이로 양손을 번갈아 가며 집어 넣으면서 짠다 짜는 대로 올간격이 고드로록 고르도록 바디집으로 탁탁 쳐준다 오른쪽발은 끄싱게에 꿰어 북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앞으로 놓았다 잡아 당겼다 한다
■ 베틀내리기
베가 약 두뼘 정도로 짜지면 밀청대로 도투마리를 쳐서 실을 풀고 배앞 허리에 맨 말코에 감으면서 짠다
대개 한필이 되면 짠 베를 베어 내리는 작업이다
■ 마전하기 : 깃배(마전하지 않고 베틀에서 내린 베로 초상때 상복용의 베)의 불순물을 제거와 표백과 세탁작업. 콩대를 태운 재로 내린 잿물을 무명 사이사이에 고르게 적신 다음 시루에 넣고 익히는데 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루로 시루테를 붇이며  잘 익힌 것을 꺼내서 방망이로 때리면서 빨면 베에 묻은 목화딱지가 떨어져 나간다. 베는 깨끗이 빨고 맑은물에 3~4회 담그면서 잿물기를 우려내면 하얗게 바래지면서 옷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요즘은 표백제에 가루비누를 타서 삶는다

 

목화축제
(사)전통문화무명뻬짜기보존회가 주관하는 산청목화축제가 매년 가을이면 산청 목면시배유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8.10.27(토) 있었던 제 12회 산청목화축제 모습입니다


주변 사적 및 관광지
걸어서 10분 거리인 문익점공 생가터는 복원을 위한 준비 작업중이며, 차량으로 10여분 거리인 도천서원과, 문익점공의 묘소와 차량으로 5분 거리에 겁외사가 있으며, 단속사지도 멀지 않습니다.
문익점생가터

목화 시배지에서 0.7km 정도(도보로 10분)
생가는 없어지고 50년 전에는 기와집이 있었으나 후에 함석집이 있었는데 집은 무너졌다. 2006년 충선공파 종회에서는 생가터를 매입하고 생가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도천서원

목화시배지에서 6km인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7번지 ( 경남 유형문화재 237호)
문익점 선조를 모신 사액서원이다. 음력 9월1일 08:00 유림에서 향례를 모신다
문익점 묘 도천서원의 뒷산에 모셔져 있고, 매년 4월 5일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석하여 제사를 모신다
단속사지

단성면 운리 333
신라 35대 효성왕이 세자 때의 친구인 선비 신충이 효성왕이 죽은 후 중이 되어 단속사를 건립하였다.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 하고, 삼층석탑은 신라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동쪽의 탑  보물 72 호(1963.01.21 지정)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올리고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렸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서쪽탑 보물 73 호(1963.01.21 지정)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랫단은 가운데에 2개씩을 두고 윗단은 1개씩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처마를 직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밋밋한 경사가 흐르는 윗면은 네 귀퉁이에서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다.
■정당매 : 정당문학 겸 대사헌으로 공양왕의 한양 천도를 중지시킨 산청의 강희백님께서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는 600년된 매화나무.
산청의 3매(梅)는 ◎원정공 하즙의 원정매, ◎남명 조식의 남명매, ◎강희백의 정당매이며
◎ 도천서원의 매화인 도천매를 산청 삼매에 넣기도 한다

겁외사劫外寺

목화시배지에서 2km 정도
조계종 종정을 하시고 1993년 열반하신 승철스님의 생가터에 지은 절이며 입구문을 들어서면 중앙이 법당, 오른쪽에 율은고가와  사랑채 왼쪽에 포영당(성철스님 기념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또한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법문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