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목면시배지 |
연결표(아래 항목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
||||||||
|
이곳은 충선공 문익점公의 장손이신 승로公께서 의성원님으로 부임하시어 목화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시험재배 한 곳으로
토질이 적합함을 아시고 목화재배를 권장하여 의성이 목화 주산지가 되게하시니 목화로 고을을 부강하게 하신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있읍니다. |
면작기념비(앞면) |
면작기념비(오른면) |
면작기념비(뒷편) |
면작기념비(왼편) |
|
삼우당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금주성(錦州城)에서 면화종자를 필관(筆管)에 넣어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산청(山淸)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그후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金城面提梧里)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
|
|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위인(偉人)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충과 효를 두루 갖춘 외에,
별도로 큰 공업(功業)이 있어 능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고 우리 국민에게 혜택이 되게 한 사람으로 선생같이 거룩한 이 드물다.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직위가 좌사의 우문관제학이고, 다음 조정에 와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가 내리고 처음 강성군(江城君)을 봉했다가 부민후(富民候)가 추봉(追封)되었다. 평소의 언행(言行)에 있어서도 역사에 기록이 없지 않으나 특별히 표나게 들어내어 이에 크게 쓰고자 한 것은 고려 공민왕 계묘(癸卵)의 일이다. 이때 선생께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충언(忠言)을 하다 원제(元帝)의 비위를 거슬려 남황(南蔬)에 귀양을 갔다. 3년만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올 때 도중에 백화(白花)가 눈 같이 흰 것을 보자 그것이 목면(木綿)임을 알고는 이에 금함을 무릅쓰고 씨를 붓대 속에 넣어 돌아온 즉시 집에서 심고 이어 고을에 번식시켰다. 일찍이 안찰사가 도내를 순회하며 의성이 그 지세와 토질이 거의 교지(交祉)와 같은 것을 보고 군수(郡守)에게 적지에 파종할 것을 미치게 하니 군수는 즉 그의 손자 문승로(文承魯)요 그 땅은 즉 지금의 금성(金城)이다. 또한 목면(木棉)의 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뽑는 물레, 사추(絲錐) 등은 대개 선생의 가정에서 만든 것인즉 선생의 공덕(功德)을 또한 가히 미루어 알겠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의복이 다만 마갈(麻葛) 모피(毛皮)만 있는 줄 알고 다른 물건이 있음을 알지 못했는데 다행히 선생의 공(功)에 힘입어 600년 간을 모든 백성들이 얼고 주리지 않았으니 이로써 논하면 후직이 곡식을 심고 서릉(西陵)이 누에를 처음 친 것과 지역을 바꾸면 다 같은 것이니 어찌 홀로 예전에만 오로지 아름답다 하리오? 또한 지금에 목면(木綿)은 비단 국민 생활의 요소가 될 뿐 아니라 장차 국가 경제의 중추(中樞)가 될 것인즉 위로 정부로부터 아래로 마을에 이르러 장려함을 소리 높혀 증식(增殖)할 바를 생각하니 전국의 사람들이 선생을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여 물이 동으로 흐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바가 사라지지 않는다. 장차 이 땅은 그의 유택(遣澤)이 근원한 곳으로 이에 중론(衆論)이 일치되어 마침내 금성면(金城面) 선전(選田) 한 구역은 목면(木棉)의 시범포이니 그 옆에 특별히 비석을 세워 간략히 전후 실적(實蹟)을 기록하였다. 그 일을 주장한 자는 군수 권중환(權重煥)이요 그 일을 도운 자는 관민과 유지(有志) 여러분이다. 또 한 그 소식을 듣고 협조하는 자 오히려 뒤질까 저어한 나머지 다투어 희사를 내어 몇 달 안에 준공을 보았다. 슬프다. 이 일 돌아보건대 어찌 족히 선생에 경중(輕重)이 되리오마는 후인들이 보고 느끼어 흥기(興起)함에는 어찌 도움이 없다 하겠는가? 내가 어릴 때부터 매양 무명옷을 입으며 목면(木棉)의 이제까지의 공을 생각하여 일찍 선생을 잊지 않았으니, 지금 마침 본 도백(道伯)으로 있으며 선생을 위하여 이 비문(碑文)을 짓게 됨을 또 다행하고 영화로움 아니리오? 드디어 중한 청을감히 사양 할 수 없었다. |
|
1910년(융희(隆熙) 3년) 10월 일 |
이곳은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이 처음 목면을 심으셨던
유전(遺田)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어언 500여 년이 지나고 주인 또한 몇 백인(百人)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되 한 이랑 토양은 많은 변화 속에
아직껏 아무 탈없이 보존되어 있다.
옛 일을 두루 아는 이 서로 전함 쇠하지 않고 행인(行人)들이 가리키며 감동하여 칭찬함은 그 어째서인가?
대개 공(公)은 특별히 재주가 뛰어난 자품으로 바다 밖 동쪽에 나시어 거의 끊어진 정학(正學)을 부르짓고 일세(一世)를 미혹의 빠짐에서 건져내어 대연(對然)히 크게 변하는 조짐이 있었은즉 그 도(道)를 호위하고 학문을 일으킨 공이 진실로 크다 할 것이다. 또한 일찍이 사신의 명을 받들고 원(元)나라에 가서 곧은 절의를 굽히지 않아 남황(南蒸)에 멀리 귀양가게 되었으니, 그 보국(報國) 충정(忠貞)의 절의가 또 다시 천하에 빛났다. 그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綿)씨를 감추어 만리길을 가져와서 동한일국(東韓一國)의 백성들로 하여금 동한(凍寒)의 걱정을 면하게 하여 시세(時世)에 길이 힘 입음이 있은즉 그 공리(公利)가 백성에 미침을 어찌 죽도록 가히 잊으리오? 공의 사손(嗣孫) 승로(承魯)가 마침 이 지방에 부임하여 또한 토질을 보고 그 번식을 넓히여 선조의 후세에 남을 공적을 더욱 떨쳤으니, 그 조상의 뜻과 사업을 잇는 공(功)을 또한 족히 말하는 자 있을 것이다. 아, 후직(后稷)이 처음으로 백곡(百穀)를 심음으로써 서민들의 주림을 구원하였으며, 주시(周詩)에 후직의 공(功)을 칭송하여 이르길 "능히 저 하늘과 짝한다"고 하였다. 대개 의(衣)와 식(食)은 한 근원이다. 충선공(忠宣公)이 처음으로 목면(木棉)을 심음으로써 추위에 시달리는 만인(萬人)을 덮어 주었으니 그 공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남명(南溟) 조 선생(曺先生)의 시에 이르길 '민생(民生)에 옷을 입힌 공 후직(后稷)과 같다' 하였으니 군자(君子)의 오랜 세대에 이른 공정한 비평을 가히 더욱 믿겠다. 공(公)의 후손들 중 목면밭 주위에 살고 있는 자 영환(永煥) 하영(河永) 영목(永穆) 복영(福永)이 그 밭을 지나치며 문득 두려워 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있어서 특별히 비(碑)를 세워 그 밭을 표하려고 본군(本郡)의 사림(士林) 여러분들과 협동으로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였다. 내 마음 속으로 그들의 큰 정성에 감동하여 간략히 그 대강를 펴고 명(銘)을 쓴다. 하늘이 만백성 내어 의식을 베풀어 주니 밥 없으면 어찌 배 부르고 옷 없으면 어찌 덮으리오? 후직(后稷)은 그 밥 먹게 하고 공(公)은 그 옷 입게 하여 이미 배 부르고 따뜻하니 어찌 감히 잊으리오? |
부산종친회 일가님들 |
|
우리 나라에는 애초에 목면화(木綿花)가 없어서, 사람들의 의복은, 명주로 짓고 삼베로 지음에 불과하여 솜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만드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부유한 사람에게는 기막히게 좋은 것이었지만, 슬프게도 궁한 백성은 어찌 곤란하고 괴로운 일이 아니었으랴? 고려말 공민왕 때에 진양(晋陽) 사람 문익점(文益漸)은, 성품과 행위가 선량하고도 공평하고 글이 법도에 맞고 단정하였다 일단 과거에 급제하자 사간원(司諫院)의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는데, 조정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알아서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정 연간(至正年間)의 계묘년에는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나라 일의 어려움을 당하여 남방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낯선 땅에 서 살기를 3년, 가을에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어느 마을의 밭에 다달았는데, 밭 안에는 흰꽃이 피어 있는 것이 눈과도 같았다. 공은 그 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고, 물어 목면화임을 알았다. 공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옛 시에 이르기를, 목면화는 금강(錦江)의 서방에 핀다고 했는데, 필시 이걸 말한 것이리라." 고 했다. 그리고는, 붓대 속에다 감추어 가지고 와 꽃들에 심었더니, 봄에는 오색화(五色花)가 나고, 가을에는 흰 면화(綿花)가 피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보고는 좋다하고, 그 씨를 얻어다가 나누어 심었다. 이로부터 점점 번식이 되고, 나라 딴에 두루 퍼졌었다. 아, 문공(文公)의 혜택(惠澤)은 집으로부터 고을로 퍼져, 천지와 같이 무궁히 힘입게 되는 것이다. 그 힘입게 한 공로는 태산에 비하여 산이 더 높을 수 없고, 하해(河海)에 비하여 바다가 더 깊지 못할 것이다. 깊고도 높음에 백성들이 무어라 이름지어 말할 수 없도다. [ 이 글은 행적기(行蹟記) 및 공행록(功行錄)에서 나왔는데 모두 남명(南冥)이 지은 것으로 실려 있다. 문치창(文致昌)이 기록한 바에 근거하면 곧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것이므로 바로잡는다. 추강(秋江)과 문치창(文致昌)은 동시대 사람이다 ] |
|
상세한 관광자료의 문의는 경북 의성군 금성면사무소 ☎054- 833-0301로 하십시오 |
공룡발자국 |
천연기념물 373호(1993.06.01 지정) 경북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봉황곡 |
|
|
의성제오리의 공룡발자국 화석 |
|
|
금성산 |
531m ,일명 영니산 |
오층석탑 |
국보 77호(1962.12.20 지정)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1383-1 |
고분군 |
경북기념물 128호(1998.04.13 지정)296,825㎡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학미리,탑리리일대 |
수정사 |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1(금성산 계곡) |
휴게소 |
약수가 솟아 명소가 된곳에 1983년 4월 1일 착공하여 1억2천만원을 들여 3개월만에 준공함 |
|
경북의 한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의로운 고장’ 의성 여행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으로의 역사 기행으로 이끈다. 특히 금성면 일대는 조문국의 도읍지로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에 200여기의 고분이 군(群)을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