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목면시배지

의성 목면시배지
교통편 : 중앙고속도로→의성IC(봉양방면 927지방도)→탑리(금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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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목면화기

면작기념비

목면유전기념비

주변 관광지


의성 목화시배지 유래

이곳은 충선공 문익점公의 장손이신 승로公께서 의성원님으로 부임하시어 목화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시험재배 한 곳으로 토질이 적합함을 아시고 목화재배를 권장하여 의성이 목화 주산지가 되게하시니 목화로 고을을 부강하게 하신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 있읍니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의 탑리를 지나 고갯길 옆 조문국 사적지 입구에 위치한 의성 목화 시배지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제오리도 가깝습니다.

면작기념비(앞면)

면작기념비(오른면)

면작기념비(뒷편)

면작기념비(왼편)

               삼우당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
               三優堂 文益漸先生 棉作紀念碑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금주성(錦州城)에서 면화종자를 필관(筆管)에 넣어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산청(山淸)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그후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金城面提梧里)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鉉)도지사 재임시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면작 기념비 (綿作記念碑)
1995년 3월 일 경상북도지사 김서규(金端圭) 삼가 지음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위인(偉人)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충과 효를 두루 갖춘 외에, 별도로 큰 공업(功業)이 있어 능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고 우리 국민에게 혜택이 되게 한 사람으로 선생같이 거룩한 이 드물다.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직위가 좌사의 우문관제학이고, 다음 조정에 와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가 내리고 처음 강성군(江城君)을 봉했다가 부민후(富民候)가 추봉(追封)되었다.
평소의 언행(言行)에 있어서도 역사에 기록이 없지 않으나 특별히 표나게 들어내어 이에 크게 쓰고자 한 것은 고려 공민왕 계묘(癸卵)의 일이다. 이때 선생께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충언(忠言)을 하다 원제(元帝)의 비위를 거슬려 남황(南蔬)에 귀양을 갔다. 3년만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올 때 도중에 백화(白花)가 눈 같이 흰 것을 보자 그것이 목면(木綿)임을 알고는 이에 금함을 무릅쓰고 씨를 붓대 속에 넣어 돌아온 즉시 집에서 심고 이어 고을에 번식시켰다.
일찍이 안찰사가 도내를 순회하며 의성이 그 지세와 토질이 거의 교지(交祉)와 같은 것을 보고 군수(郡守)에게 적지에 파종할 것을 미치게 하니 군수는 즉 그의 손자 문승로(文承魯)요 그 땅은 즉 지금의 금성(金城)이다. 또한 목면(木棉)의 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뽑는 물레, 사추(絲錐) 등은 대개 선생의 가정에서 만든 것인즉 선생의 공덕(功德)을 또한 가히 미루어 알겠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의복이 다만 마갈(麻葛) 모피(毛皮)만 있는 줄 알고 다른 물건이 있음을 알지 못했는데 다행히 선생의 공(功)에 힘입어 600년 간을 모든 백성들이 얼고 주리지 않았으니 이로써 논하면 후직이 곡식을 심고 서릉(西陵)이 누에를 처음 친 것과 지역을 바꾸면 다 같은 것이니 어찌 홀로 예전에만 오로지 아름답다 하리오? 또한 지금에 목면(木綿)은 비단 국민 생활의 요소가 될 뿐 아니라 장차 국가 경제의 중추(中樞)가 될 것인즉 위로 정부로부터 아래로 마을에 이르러 장려함을 소리 높혀 증식(增殖)할 바를 생각하니 전국의 사람들이 선생을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여 물이 동으로 흐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바가 사라지지 않는다. 장차 이 땅은 그의 유택(遣澤)이 근원한 곳으로 이에 중론(衆論)이 일치되어 마침내 금성면(金城面) 선전(選田) 한 구역은 목면(木棉)의 시범포이니 그 옆에 특별히 비석을 세워 간략히 전후 실적(實蹟)을 기록하였다. 그 일을 주장한 자는 군수 권중환(權重煥)이요 그 일을 도운 자는 관민과 유지(有志) 여러분이다. 또 한 그 소식을 듣고 협조하는 자 오히려 뒤질까 저어한 나머지 다투어 희사를 내어 몇 달 안에 준공을 보았다. 슬프다. 이 일 돌아보건대 어찌 족히 선생에 경중(輕重)이 되리오마는 후인들이 보고 느끼어 흥기(興起)함에는 어찌 도움이 없다 하겠는가?
내가 어릴 때부터 매양 무명옷을 입으며 목면(木棉)의 이제까지의 공을 생각하여 일찍 선생을 잊지 않았으니, 지금 마침 본 도백(道伯)으로 있으며 선생을 위하여 이 비문(碑文)을 짓게 됨을 또 다행하고 영화로움 아니리오? 드디어 중한 청을감히 사양 할 수 없었다.

 

목면유전 기념비(木綿遺田 記念碑)

1910년(융희(隆熙) 3년) 10월 일
행(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문소(聞昭:의성의 옛지명
) 김도화(金道和) 적음

이곳은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이 처음 목면을 심으셨던 유전(遺田)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어언 500여 년이 지나고 주인 또한 몇 백인(百人)이 되었는지 알지 못하되 한 이랑 토양은 많은 변화 속에 아직껏 아무 탈없이 보존되어 있다. 옛 일을 두루 아는 이 서로 전함 쇠하지 않고 행인(行人)들이 가리키며 감동하여 칭찬함은 그 어째서인가?
대개 공(公)은 특별히 재주가 뛰어난 자품으로 바다 밖 동쪽에 나시어 거의 끊어진 정학(正學)을 부르짓고 일세(一世)를 미혹의 빠짐에서 건져내어 대연(對然)히 크게 변하는 조짐이 있었은즉 그 도(道)를 호위하고 학문을 일으킨 공이 진실로 크다 할 것이다.
또한 일찍이 사신의 명을 받들고 원(元)나라에 가서 곧은 절의를 굽히지 않아 남황(南蒸)에 멀리 귀양가게 되었으니, 그 보국(報國) 충정(忠貞)의 절의가 또 다시 천하에 빛났다.
그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綿)씨를 감추어 만리길을 가져와서 동한일국(東韓一國)의 백성들로 하여금 동한(凍寒)의 걱정을 면하게 하여 시세(時世)에 길이 힘 입음이 있은즉 그 공리(公利)가 백성에 미침을 어찌 죽도록 가히 잊으리오?
공의 사손(嗣孫) 승로(承魯)가 마침 이 지방에 부임하여 또한 토질을 보고 그 번식을 넓히여 선조의 후세에 남을 공적을 더욱 떨쳤으니, 그 조상의 뜻과 사업을 잇는 공(功)을 또한 족히 말하는 자 있을 것이다.
아, 후직(后稷)이 처음으로 백곡(百穀)를 심음으로써 서민들의 주림을 구원하였으며, 주시(周詩)에 후직의 공(功)을 칭송하여 이르길 "능히 저 하늘과 짝한다"고 하였다. 대개 의(衣)와 식(食)은 한 근원이다. 충선공(忠宣公)이 처음으로 목면(木棉)을 심음으로써 추위에 시달리는 만인(萬人)을 덮어 주었으니 그 공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남명(南溟) 조 선생(曺先生)의 시에 이르길 '민생(民生)에 옷을 입힌 공 후직(后稷)과 같다' 하였으니 군자(君子)의 오랜 세대에 이른 공정한 비평을 가히 더욱 믿겠다.
공(公)의 후손들 중 목면밭 주위에 살고 있는 자 영환(永煥) 하영(河永) 영목(永穆) 복영(福永)이 그 밭을 지나치며 문득 두려워 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있어서 특별히 비(碑)를 세워 그 밭을 표하려고 본군(本郡)의 사림(士林) 여러분들과 협동으로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였다. 내 마음 속으로 그들의 큰 정성에 감동하여 간략히 그 대강를 펴고  명(銘)을 쓴다.
                  하늘이 만백성 내어 의식을 베풀어 주니
                  밥 없으면 어찌 배 부르고 옷 없으면 어찌 덮으리오?
                  후직(后稷)은 그 밥 먹게 하고 공(公)은 그 옷 입게 하여
                  이미 배 부르고 따뜻하니 어찌 감히 잊으리오?

부산종친회 일가님들

 

목면화기(木綿花記)
우리 나라에는 애초에 목면화(木綿花)가 없어서, 사람들의 의복은, 명주로 짓고 삼베로 지음에 불과하여 솜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만드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부유한 사람에게는 기막히게 좋은 것이었지만, 슬프게도 궁한 백성은 어찌 곤란하고 괴로운 일이 아니었으랴? 고려말 공민왕 때에 진양(晋陽) 사람 문익점(文益漸)은, 성품과 행위가 선량하고도 공평하고 글이 법도에 맞고 단정하였다 일단 과거에 급제하자 사간원(司諫院)의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는데, 조정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알아서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정 연간(至正年間)의 계묘년에는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나라 일의 어려움을 당하여 남방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낯선 땅에 서 살기를 3년, 가을에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어느 마을의 밭에 다달았는데, 밭 안에는 흰꽃이 피어 있는 것이 눈과도 같았다. 공은 그 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고, 물어 목면화임을 알았다. 공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옛 시에 이르기를, 목면화는 금강(錦江)의 서방에 핀다고 했는데, 필시 이걸 말한 것이리라." 고 했다. 그리고는, 붓대 속에다 감추어 가지고 와 꽃들에 심었더니, 봄에는 오색화(五色花)가 나고, 가을에는 흰 면화(綿花)가 피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보고는 좋다하고, 그 씨를 얻어다가 나누어 심었다. 이로부터 점점 번식이 되고, 나라 딴에 두루 퍼졌었다. 아, 문공(文公)의 혜택(惠澤)은 집으로부터 고을로 퍼져, 천지와 같이 무궁히 힘입게 되는 것이다. 그 힘입게 한 공로는 태산에 비하여 산이 더 높을 수 없고, 하해(河海)에 비하여 바다가 더 깊지 못할 것이다. 깊고도 높음에 백성들이 무어라 이름지어 말할 수 없도다.
추강 남효온(秋濫 南孝溫) 지음

[ 이 글은 행적기(行蹟記) 및 공행록(功行錄)에서 나왔는데 모두 남명(南冥)이 지은 것으로 실려 있다. 문치창(文致昌)이 기록한 바에 근거하면 곧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것이므로 바로잡는다. 추강(秋江)과 문치창(文致昌)은 동시대 사람이다 ]

 

주변 관광지 및 사적지

상세한 관광자료의 문의는  경북 의성군 금성면사무소 ☎054- 833-0301로 하십시오

공룡발자국
화석(化石)

천연기념물   373호(1993.06.01 지정) 경북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봉황곡
중생대 백악기(1억5천만년전) 공룡의 집단 서식지로 추정하며 초식공룡(발굽울트라룡, 발톱고성룡, 발목코끼리룡) 3종류와 육식공룡(한국큼룡)발자국 316개가 확인되었다.발의 크기, 보폭, 걷는 방향 등을 알 수 있어 공룡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공룡화석이 있는 제오1리

제오1리 비석과 문익점공 목면유전 원표

의성제오리의 공룡발자국 화석
천연기념물 제373호
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300여개의 공룡 발자국 화식이 이 곳 의성군 제오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발자국화석은 지금부터 약 1억년전(중생대 백악기 초엽)에 공룡들이 이 곳을 흐르던 옛 강가의 뻘밭을 산책하다가 남긴 발자국인 것이다.
이들 크고 무섭게 생긴 파충류들은 중생대 중에 번성하였으나 6,600만년 전까지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먹이의 변화와 운석충돌설 등의 몇가지 설이 있지만 운석충돌설이 가장 유력하다

발자국 화석이 찍힌 바위

발자국화석 안내판

금성산
金城山

531m ,일명 영니산
보현산(普賢山)에서 뻗어 내린 산맥의 일부로서 비봉산과 쌍벽을 이루며 사면 광경이 아름답고 금성산에 묘를 쓰면 비가 안온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모양이 기마 형상처럼 생겼다고 한다

■조문국성 : 조문국때 축조한 길이 약4km,높이 4m의 성을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폭2~4m의 석축성(石築城)으로  축성한 것으로추정됨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고 함
■경덕왕릉 :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분 앞에 화강석 비와 상석이 놓여 있음. 능 둘레
  가 74m 높이가 8m 이며 왕릉이 발견되기엔 신기한 전설이 있었음.
■봉수대 : 설치연대는 모르며 전국의 봉수대가 처음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있다
봉수전달 :동래→의홍현/토현→승목산→영니산→마산→안동부 감곡산→충주/마산→
한양/목멱산→마정산→간점산→대암산→소이산→쌍화산

오층석탑
五層石塔

국보 77호(1962.12.20 지정)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1383-1
통일신라시대의 5층 화강암(花岡岩) 돌탑이며 높이가 9.56m, 기단 폭은 4.51m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웠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인 가운데 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한 특이한 구조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든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옛 조문국(召文國) 터전인 이곳에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고분군
古墳群

경북기념물  128호(1998.04.13 지정)296,825㎡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학미리,탑리리일대
200여기에 이르는데 출토된 유물은 5~6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조문국(삼한 시대의 부족국가)의 도읍지로,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신라에 편입되었다
의성 지역 지방 세력과 사회구조 및 의성 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파악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정사
水淨寺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1(금성산 계곡)
1300년전 신라 신문왕(神文王)때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수행도중 탑리를 지나다가 숲속에서 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는데를 성지라 하여 지은 절이며  화재로 인해 선원과 불경등이 모두 타  버리자 구담(九潭)선사가 기존 절터에서 위로 옮겨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월영루(月影樓) 선원사명영당(禪院泗溟影堂) 회방등 7동의 건물이 현존한다.

휴게소

약수가 솟아 명소가 된곳에 1983년 4월 1일 착공하여 1억2천만원을 들여 3개월만에 준공함
식당과 휴게소, 샤워장, 식수대, 주차장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약물도 마시고 몸도 씻을 수 있음.
수질 - 칼슘 탄산 수소 알칼리 황산 등 함유량이 높음.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 역사기행

경북의 한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의로운 고장’ 의성 여행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으로의 역사 기행으로 이끈다. 특히 금성면 일대는 조문국의 도읍지로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에 200여기의 고분이 군(群)을 이루고 있다.
의성의 유일한 국보(제77호)로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탑리오층석탑은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분황사의 모전석탑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석탑이다. 금성면 대리리에 있는 문익점 ‘목화 면작기념비’도 빠트릴 수 없는 명소다.
금성면에 자리 잡은 영천이씨 집성 전통 양반촌인 산운마을과 점곡면의 의성 만취당 또한 고풍스런 운치를 한껏 자아낸다.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 중턱에 위치한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 진입로의 500여m에 달하는 울창한 소나무숲길(일명 솔굴)은 길손에게 색다른 볼거리와 함께 편안함을 안겨준다.

# 경덕왕릉 및 금성산 고분군

조문국의 도읍지 금성면 대리리에서는 경덕왕릉을 비롯해 40여기의 고분을 만날 수 있다.
신라 벌휴왕 2년(185년)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 조문국의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형적인 고분으로 봉분 아래 화강암 비석과 석상이 있다. 봉분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전면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문국은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병합당한 경북내륙 소국 중의 하나에 해당되며 활동 반경은 의성, 청송, 예천 용궁, 충북 괴산, 모산성 등에 활동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의성군은 유교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문국 역사문화?관광자원화를 위한 경덕왕릉 사적지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탑리오층석탑

금성면 탑리에 있는 탑리오층석탑(높이 9.6m)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신라와 백제적인 요소가 결합된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목조건축양식을 응용하였고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의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단 구조와 옥개석 상하면에서 엔터시스 수법, 기둥위의 주두 또는 전조탑에서 볼 수 있는 추녀 전각부의 반전 등에서 목조 건물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 목화면작기념비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금주성에서 목화씨앗을 필관에 넣어 귀국, 그의 장인을 통해 경남 산청에서 목화를 첫 재배했다. 이어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에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금성면에서 면화를 파종, 오늘에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1990년 목화면작기념비가 건립됐다. 의성군은 지세가 금주성과 흡사해 제오리에서 목화가 재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산운마을

금성면 산운리 산운마을은 한국 최초의 화산산이라 불리는 금성산을 병풍삼아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 집성 전통 양반촌이다.
‘대감마을’로도 불리는 산운마을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을 뒤에, 비봉산을 옆에 두고 구릉과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적에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이라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됐다.
마을의 역사는 조선 명종 연간에 영천이씨가 처음 입항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입향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1531~1609)이다. 이 후 이 마을에는 이민성(1570~1629) 참의, 이희발(1768~1850) 판서, 한일합방시 애국지사로 건국공훈을 세운 이태직(1878~1913)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문화재로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정사를 비롯해 제374호 운곡당, 제375호 정우당, 중요민속자료 제237호로 지정된 소우당 등이 있다. 특히 소우당 뒷뜰은 영남 제일의 후원(뒤뜰)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현재 40여동의 전통 고가옥이 유존하고 있으며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가 있다.

# 의성 만취당

점곡면 사촌리에 있는 의성 만취당은 안동김씨 만취당파 문중으로 지난 1983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의 제자이며 부호군을 지낸 김사원 선생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환성했으며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숙종 32년(1711) 부분적인 보수가 이뤄졌고 영조 3년(1727)에는 동쪽 방(복제)을, 이어 영조 40년(1764)에는 서쪽 방을 증축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전체적인 형태는 ‘T’자형이고 우물마루와 온돌방이 꾸며져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귀중한 목조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김사원과의 동문인 명필가 석봉 한호가 썼다.

# 고운사

고운사(孤雲寺)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전통 사찰이다. 단촌면 등운산 중턱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 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 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오법당십방사(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 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고운사는 행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의 원만 자비한 풍모는 물론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현재는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지역의 5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사찰 주변 정리와 낡은 건물들에 대한 수리 및 단청으로 위풍당당한 본사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고찰로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도 자랑한다. 일주문에 이르는 500여m 길이의 소나무숲길은 부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 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의성=김호운기자 kimh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