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관련 글

목화관련 글모음

*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글에 바로 연결됩니다

제목

저자

참고

1 조선전기 면직업의 발전과 생활문화의 변화

이정수

동서대  교수

2 무명베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장철수

정신문화연구원  민속학 교수

3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 옷감으로 정착

조효숙

경원대  의상학 교수

4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와 서민생활 변화

박화진

부경대  교수

5 목화씨 전래와 정천익-木棉事蹟과 正史의 차이

이우성

성대명예교수 

6 목화씨의 전래 우연이 아니다

김성준

수원대  사학과 교수

7 무명베짜기의 공정

고부자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8 무명베 길쌈의 현주소

고부자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9 고려 후기 들어온 면화 600년 넘게 옷감의 제왕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10 곡성군 검면 목화체험장

퍼온글

신문기사

11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박노해

시인

12 열알의 목화씨

권주희

서울수유초등학교학생  독후감

13 대구에 거는 희망

이호림

도서출판 인간과자연사 발행인

14 햇솜

김여화

 

15 목화

문학철

 

16 목화다래가 먹고 싶은 이유

문순태

된장에  실린글

17 삼지강 협동농장

함보현

연합뉴스

18 가도가도 한없는 목화꽃

 

월간  전라도 닷컴

19 오페라 하우스 개관 기념작-목화

 

오페라  하우스 개관 기념작

20 전래 동화

 

 

21 큰애기들의 목화따는 노동요

 

 

1. 朝鮮前期 綿織業의 발전과 生活文化의 변화
朝鮮前期 綿織業의 발전과 生活文化의 변화
- 李正守 교수 (동서대학교 외국어학부)

1. 머리말
2. 면직업의 발전과 수요증대
3. 사치 풍조와 검약 논의
4. 맺음말

1. 머 리 말

고려 말과 조선 초는 한국사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로 주목된다. 농업에 있어 시비법 발달, 품종개량으로 인해 水田의 連作常耕法의 실현과 早田의 根耕法과 2년 3작법의 실현 그리고 면화재배는 농업생산력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대내외 정치적 안정과 함께 왜구의 활동이 진정되면서 연해안을 시발로 점차 북방지역까지 경지 개간이 확대되는 경지의 대개간이 진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중국에서의 元, 明의 교체와 일본에서의 남북조 내란의 종식 등으로 인해 평화적인 대외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인구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지주제와 유통경제 발전의 기초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특히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의생활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본격화된 면포의 생산은 정부 재정과 서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시기 면포 생산 증대는 국내 경제의 성장과 함께 본격화된 대외무역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朝-中-日 삼국무역의 발전에는 조선의 綿布와 일본의 銀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면포가 갖는 사회 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여말 선초의 목면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목면의 전래 시기와 장소, 목면산업 형성에 있어서의 문익점 일가의 역할에 관련된 문제,
둘째, 농서나 농업기술상에서의 太綿 耕種法에 관련된 문제,
셋째, 면업 정책과 면직업의 발전에 관련된 문제,
넷째, 면포의 유통과 기능 및 그것이 미친 사회 경제적 영향에 관련된 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전기 면업의 발전과 대내 유통경제의 진전과 대외무역의 발전에 따른 면포의 수요 증대 문제를 살펴보고, 나아가 면포 생산의 확대가 국내의 생활문화상에 미친 영향을 사치 경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綿織業의 발전과 수요 증대

1) 면직업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목면이 생산되기 이전에 주로 생산된 의료는 絹織物과 苧麻織物이었고 그 밖에 毛織物도 일찍부터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은 많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면 품종은 여섯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 전해진 것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원산지가 인도인 亞洲면(本棉, Bombax tree)이고, 또 하나는 원산지가 아프리카인 非洲면(草棉, Gossypium)이었다. 전자로 짠 직물을 桐華布라 하고, 후자는 白첩布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목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이른 것은 신라 경문왕 9년(869)의 당나라에 대한 진헌품 가운데 白첩布가 보인다. 그 후 고려 혜종 2년(945)에 고려에서 후진에 보낸 공물 가운데 또 백첩포가 보이고 있다. 이것 이외에는 목면 관련 기록은 고려 말이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라 말 고려 초의 중국에 진헌한 목면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아마도 목면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재배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363년(공민왕 12)에 좌시중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元에 갔던 文益漸이 원으로부터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목화 재배를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衣料産業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에 임명되고 이어 벼슬이 좌사의대부에 이르렀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다시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江城君으로 증직하였다. 또한 1410년(태종 10)에는 사간원에서 올린 시무 8조 가운데 경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이용한 의복의 원료인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祠堂을 세우고 祭田을 지급하자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목면은 絹, 麻 苧 등의 제품에 비해서 美麗하면서도 그 견고한 점에 있어서 우수하고, 寒氣를 막는 보온성과 습기를 흡수하는 점에서 뛰어났다. 이러한 실용성 이외에도 기존의 다른 직물을 대체해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목면은 다른 어떤 직물을 직조하는 것보다 훨씬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방적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데 면은 마나 저, 견 등에 비해 1/5 정도의 노동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러한 직물업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은 농가경제와 국가의 재정에도 큰 보탬이 되었기에, 민간에서 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면화 생산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목면 재배의 확대에 있어 초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는 米穀 생산 증대책과 아울러 면화 재배 장려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정부는 지방관들이 면화의 재배를 민간에 적극 권장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정부의 면화 재배 정책은 남쪽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I5세기 초반 세종대 이래 북쪽 지역까지 적극 추진되어, I5세기 후반 성종대에 와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황해도 평안도의 後民들이 북쪽 지역에까지 면화를 심어 이익을 얻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도 下三道에 각기 면화씨 20碩을 준비시켜 영안도, 황해도, 평안도에 보내어 심게 한 후 관찰사로 하여금 그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면화 재배 장려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I5세기 중반 경에는 이미 면포는 마포를 대신하여 민간의 주요 의복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6세기로 들어오면 綿花 재배는 남부지역에는 이미 폭 넓게 퍼져서 旱田 외에 심지어 논을 메워서 綿花를 심는 경우도 있어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면화 재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정부에서 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綿業은 이제 농가의 경제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주요 부업으로 빠르게 정착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6세기에 발간된 農書의 木綿耕種法 수록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綿花 생산의 확대와 綿布 직조의 증대를 가져와, 면포의 가격도 점차 낮아졌다. 하지만 16세기까지는 정부의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부 지방의 경우 평안도를 제외하고는 함경도, 황해도 등은 여전히 기후나 土性 등의 이유로 인해 목면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여전히 북부 지방은 綿布의 자급자족이 곤란하여 남부 지역에 의존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2) 綿布의 需要 증대

(1) 국내 流通經濟의 성장

면포의 수요는 크게 실물 용도인 의복이나 기타 잡물의 원료로 사용된 측면과 국내외 유통경제의 발전과 함께 화폐나 상품으로서 사용된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I5세기 말부터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한 지주제와 유통경제의 진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농촌내의 자급자족적인 교환경제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地主制와 貢納制 발전은 유통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토지 집적을 통해 확보된 대량의 米穀 木花 등 생산물이 시장과 연결되어 처분되지 못한다면, 토지 집적은 큰 경제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16세기 대토지 소유의 진행이라는 이면에는 이러한 시장기구의 발달이 전제되고 있었다.

당시 營利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상품교역의 장소로서 주목되는 것은 場市였다. 극심한 흉년으로 구황미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처음 허용된 場市(성종1년, 1470년)는 곧이어 他道로 확산되었다. 하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장시는 16세기에 들어와 점차 諸邑, 諸郡에까지 개설될 정도로 급증하였다. 당시 사정을 南○은 '방방곡곡에 市場이 서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어서 이로 인해 物價가 등귀하고 있다'고8)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場市가 확산되자, 정부 내에서도 장시 개설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의 場市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그것의 개설을 반대하는 務本抑末論 입장과 찬성하는 小民保護論 입장의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대체로 장시 개설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務本抑末의 원칙하에 농민들이 상업 활동에 편입되면서 농업을 버리고 末利만을 추구하여 田畓이 황폐화되고 物價가 등귀하거나 盜賊이 증가하는 등 폐단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장시 개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당시가 凶荒의 타개와 飢民 賑恤의 한 방편으로 도움이 되며, 또 小民들이 有無相遷하므로 資生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장시 개설 주장이 특히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은 유교적 통치이념을 기반으로 한 정부의 爲民政治가 현실적으로 잘 운영되지 않는 실정에서 小民의 생업 공간으로 場市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場市에서 교역된 물건은 대부분 농촌 내에서 생산, 제조되는 품목들이었고,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부족한 물품은 상인들에 의해 다른 지방이나 장시에서 운송되어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衣食에 필수적인 穀物과 布가 중심이었다. 場市는 소농 층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교환경제가 발전하자 화폐에 대한 관심도 높아갔다. 물품화폐인 米, 布 이외에 명목화폐인 銅錢, 楮貨 등의 유통에 대한 정책적인 노력도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하지만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민간유통에서 명목화폐는 거부되고, 15세기 후반 이래 점차 綿布가 기존의 摩布를 대신하여 통용화폐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면포는 일반적인 민간에서의 거래뿐만 아니라 국가의 조세 납부에도 통용되었다. 당시 통용된 규정 綿布 1필은 升數가 5升, 길이가 35尺이고, 넓이가 7寸, 1升의 올數는 80가닥이었다. 국가에서는 당시 통용되던 布幣를 國幣로 인정하여 나름대로 관리 감독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國幣는 크게 3등으로 나누어 유통시켰다. 그 가운데 布幣는 5升布를 상등으로 하고 3승포를 중등으로 하였으며, 楮幣를 하등 화폐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민간 유통에서는 저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고, 3승35척 미만의 ○布가 저화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2) 對外貿易의 발전

I5세기 말경부터 對外貿易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에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국내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I5세기 말경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있었으며, 그리고 일본에서는 무사, 상인층을 중심으로 고급 비단과 면포에 대한 소비가 확대됨과 동시에 16세기경부터 광산의 활발한 개발로 인해 막대한 양의 金,銀,銅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도 地丁銀制 등 세제의 개편과 재정운영의 변화에 따라 銀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조선은 국내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고급비단, 도자기, 약재, 서적 등을 수입했고, 일본은 고급비단과 면포의 생산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 국내 수요가 늘자 胡椒蘇木이나 銅 銀 등을 결제수단으로 삼아 조선 면포와 중국 비단 등의 물품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

13 - 16세기의 대일 수입품은 蘇木, 胡椒, 유황, 銅, 銀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대일 수출품으로는 직물류가 중심이었다. I5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교역품은 주로 일본의 소목, 호초, 유황, 동 등을 수입하고 綿紬, 저포 마포 등을 수출하였는데 특히 마포가 주요한 답사물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중엽부터 倭使에 대한 답사물로 마포를 한다는 원칙이 점차 변화를 나타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내의 면포 생산량의 증가와 일본의 적극적인 綿布 사여 요구에 기인하였다. 실제 1464년(세조 10)에 정부가 大內殷 使行의 銅에 대한 대가로 綿布 542필과 庶布 1,080필을 주자 그들은 마포는 쓸 데가 없다고 받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면포의 사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傍使들이 마포 대신 면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에 비해 면업의 성립이 I~2세기 정도 뒤떨어졌으며 목화 종자도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다.

일본은 면포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마포와 견직물이 대중적 의료였다. 그리고 상류사회에서는 明과의 조공무역이나 상인들을 통하여 수입된 중국산 고급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컸다. 하지만 I5세기 후반 이래 일본 국내경제의 성장과 함께 무사층이나 상인층을 중심으로 의복 등에 면포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면포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면포는 수입품인 이상 비교적 고가였기에, 그 사용은 서민들 보다는 무사, 名主, 승려 등의 사이에 수요가 되었다. 그러나 應仁의 亂(1467년) 전후에 조선 무역에 있어 綿紬 보다는 綿布로의 전환이 있었고, 보다 양질의 면포가 수입됨에 따라 품질뿐 아니라 수요의 계급적 한계성을 벗어나 점차 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의 생활 속으로 침투되었다. 이에 왜상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綿紬(명주)보다는 이윤이 훨씬 많은 綿布를 선호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15기 말에 와서 대일무역은 양과 질에 있어 큰 변화를 보였다. 우선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의 규모가 커지고 그 품목도 금, 은, 동, 납, 유황 등 광산물과 소목, 포근 등으로 다양화되었으며, 조선의 답사물도 마포 대신 綿布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1503년(연산군 9)에 金甘佛 등에 의해서 鉛銀術이 발견된 이후 조선내의 端川, 永輿 등 광산 개발이 적극화되면서 국내산 은과 수입 倭物이 使行과 商人을 통해 중국으로 유출되는 朝-中-日 삼국무역 체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일본인들의 '來獻土宜'가 상업적 성격을 한충 뚜렷하게 나타냈고 무역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특히 왜객들이 가져오는 銅과 蘇木의 양이 급격하게 늘어 1500년(연산군 6)에는 대마도주가 한 번에 銅 11만 근을 보내어 공무역하기를 청하였다.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왕실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倭物뿐 아니라 中國産物의 수입도 급격히 늘어났다. 反正을 통해 즉위한 中宗은 燕山君의 廢政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대일 통교 규정의 엄격한 운영을 꾀하여 恒居倭, 對馬島民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 결과 1510년(중종 5) 4월에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함포왜란 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5년(중종 20)경을 전후하여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첫째,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늘어났고, 조선 정부의 무역 규제가 보다 강화되자 무역의 패턴은 공무역 중심에서 사무역, 밀무역으로 옮아갔다. 둘째, 倭銀이 급격하게 조선에 유입되면서 국내 유통 銀의 중심은 端川銀에서 倭銀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對日貿易은 기존의 綿布 對 南海物産에서 綿布 對 銀 교역체제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다. 셋째, 조선의 왕실과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경향이 저변층까지 확대되고 사치품의 고급화가 추구됨에 따라 中國産物을 무역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銀이 조선으로부터 중국으로 유출되었다. 이에 따라 銀을 단일 결제수단으로 하는 삼국무역 체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중종 즉위 후 약 20년간 소강, 갈등 양상을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2년(중종 17)경부터 대마도와의 관계를 화해시킨다는 구실로 日本國王使가 빈번하게 도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523년(중종 18)에 일본 국왕사가 무역한 면포의 양이 10만 필에 육박했고, 1525년에도 가져온 商物의 가격이 8만 5천 필에 달하였다. 또한 1328년에는 小二殿과 日本國왕使가 잇달아 내왕하여 공무역한 수량만도 면포 8만1천5백 필에 이르렀고 사무역한 수량은 공무역의 배나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1540년(중종 35)경 대일무역에 있어 획기적 변동이 일어났다. 대일 교역품이 기존의 銅鐵, 胡산 등에서 銀 중심으로 바뀌었다. 실제 1542년에 일본 국왕사 安心東堂 등이 가져온 商物은 銀 8만 냥과 硫黃 20만 근으로 그 가격만도 官木 약 4십5만 필에 이르러, 무역한 것이 많아 왜선 3~4척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무렵에 일본인들이 공무역에 의하여 한 해 동안 가져가는 綿布만도 선박으로 6O~7O척 분이나 되었다. 당시 공무역 보다는 사무역 밀무역이 휠씬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공무역에 이들 수량을 합치면 엄청난 양의 면포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왜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해 국내의 銀 가격은 급락했으며, 赴京 使行들이 倭銀을 대량으로 소지하고 가서 明과 무역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처럼 국내에서 왜銀의 가격 폭락으로 인해 정부와 왜使간에 수차 제기된 交易價의 마찰은 결국 1544년(중종 39)의 蛇梁왜변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사치 풍조와 검약논의

1) 사치풍조의 확대

국내 유통경제의 성장과 삼국무역의 발전 결과 국내의 富는 전례 없이 증대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富의 증대와 교환경제의 침투는 소비의 팽창을 가져온다. 대개의 경우 소비 수준(구매력)이 올라가면, 量만이 아니고 質의 면에도 소비물자의고급화가 진행된다.

木花 이전 우리나라의 의복 원료는 桑, 李, 庶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명주는 겨울용 의료였고 값도 비쌌으며 모시와 삼베는 여름용 의료로 적당하였음에 비해 면포는 흡습성과 보온성이 뛰어나 사계절 의료로 적합하였으며 값도 저렴하여 실용성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 목화가 전래된 이래 면포는 貴賤할 것 없이 보편적 의료로서 재빨리 정착하게 되어 서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특히 겨울철에 추위로 인한 질병 등에 취약한 서민 생활을 크게 개선시켜 주어 수명 연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유교적인 검약의 실천을 강조하였지만, 대내외 경제의 변화와 함께 지배층을 시작으로 점차 사치 풍조가 일어났다. 사치의 시발은 의복에서부터 나타났다. 조선 초까지 대부분의 소농층은 白衣를 착용하였지만 양반 사대부 층이나 女官, 樂人 등 色服을 착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黃, 紫, 紅, 靑 특히 紅色을 널리 사용하였다. 당시 홍색의 草木染料로 국산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紅花를 들 수 있다. 紅花染色은 大紅이라 하여 면포 염색에는 적합하고 무난하였으나 그 생산량이 그리 많지 못하여 高價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수입된 蘇木은 기존의 經花 부족을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염료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에는 紅花의 염색을 雜染이라 칭하고 蘇木에 의한 木紅을 上色으로 간주할 정도로 소목의 인기가 높았다. 당시 蘇木은 궐내의 紅袍를 비롯하여 朝服, 公服 및 宗廟用의 紅○ 의장 雜裏○ 등의 제조에 필히 사용되었으며, 또한 귀족 부녀자의 치마나 옷감의 안찝 염색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紅染의 염색을 통한 의복에서의 사치 경향은 양반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점차 하층민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端川 등 국내 銀鑛 개발과 왜은의 대량 유입에 따른 對明貿易의 활발한 진행과 함께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때 王室 등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 풍조가 점차 확산되면서, 서민층들도 紗羅綾緞 등 唐物을 착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후 사치 풍조는 더욱 확대되어 車馬 의복만이 아니라 혼인과 장례 등과 같은 일에도 사치가 심각해져 제반 物價의 등귀도 야기시켰다. 그리고 사치 풍조는 중앙뿐만 아니라 변방 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兩界의 각 고을에서 조차 경기도 廣州의 白器를 무역하여 그릇으로 사용하고, 음식물도 남쪽의 것을 무역하여 사용할 정도였다.

2) 儉約策의 실시

이러한 전 사회적인 사치 풍조의 확산 현상을 정부는 봉건적 신분 질서의 혼란을 야기 시키며 농업의 황폐화와 민생과 국가재정의 부실, 그리고 물가의 등귀를 가져오는 근원으로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곧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 왕조체제에 심각한 변질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없는 문제였다.

이에 15세기 후반 경부터 정부는 사치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중앙의 관료들과 지방의 수령들에게 누차 검약정을 강조하는 下敎뿐 아니라 법률적인 강제성을 갖춘 사치 금지령을 누차 발표하였다. 검약의 대상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배층에서 서민층으로 그리고 衣服에서 雜事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대시켰다.

I5세기까지는 대체로 사치의 중심이 衣服이었으며 서울 개성 등의 대도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치의 대상도 의복 염색과 같은 의복과 관련된 소비 증가 문제가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朝-中-日 삼국무역이 본격화되면서 倭産物品 외에 紗羅綾緞등 中國産 物品이 대량 수입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전과 달리 사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사치 금지와 검약의 촉진에 대해 수없이 논의하고 금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당시 국내의 사치 풍조는 대중국 사무역의 활발에 따른 중국산 물품의 대량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중국으로 가는 使行이나 商人들의 銀소지를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는 禁銀令을 강화할 뿐 아니라 차제에 대중국 사무역을 제한하거나 영원히 정지하자는 파격적인 논의까지도 심도 있게 다루게 되었다.

하지만 사무역의 이익이 워낙 막대했기 때문에 宮禁, 戚臣, 權貴 등과 같은 특권층들이 적극적으로 사무역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실제로 1544년(中宗 39)의 聖節使, 千秋使, 冬至使 세 행차의 사신들 모두가 禁銀法을 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성절과 천추 두 使行은 엄청난 양의 銀을 싣고 가 사무역하여, 중국의 主事 宋維元이 '두 使行이 銀을 많이 사용하므로 牙人들이 이익을 다투는데, 매우 해가 되는 일이다. 지난 일은 허물하지 않겠으나 국왕에게 回啓하여 禁約을 더욱 엄격히 하여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고 하면서 單子 2건을 주는 외교적인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당시 큰 정치적 쟁점이 되어, 세 행차의 사신들과 書狀官 그리고 點馬 등이 모두 推考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무역을 주도한 사건의 핵심 인물은 中宮의 동생이었던 윤원형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尹仁鏡은 '왜은이 流布된 뒤부터는 北京에 가는 通事들 중에 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사람이 백에 한 두 명도 없으니 추국하기로 한다면 이루 다할 수 없을 것이다'고 토로하였다. 실제 당시의 사무역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禁銀令에도 불구하고 使行들이 한 번에 소지해 가는 銀雨이 많게는 1만여 냥에 이르며 적어도 수천 냥을 밑돌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使行時의 범람이 지속되자 중국에서는 우리 사신을 '朝鮮商買'라 하여 '賣胡'나 '○子와 같이 취급하거나 그들의 과거 策題에 이것을 해결할 방안을 묻는 문제가 출제 결 정도였다.

4. 맺음말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서민생활 향상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면포는 비단 삼베 모시 등 다른 직물에 비해서 실용성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생산성이 높았으므로 농가의 부업으로 급격히 정착되었다. 면포는 I5세기 후반 이래 기존의 삼베를 대신하여 국내 기간 화폐로서의 기능과 함께 이 시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삼국무역에서 銀과 함께 주요한 交易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면포를 매개로 한 지역간 결제통화인 왜은의 대량 유입은 국내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국내 유동성의 증가와 富의 증대는 생산적인 측면 보다는 사치와 향락 등 비생산적인 소비문화에 투입됨으로써 이 시기 양반층을 시발로 하여 서민층까지 사치 풍조가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15세기 말부터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바탕으로 한 왕조 체제 내에 생활문화 패턴의 변화가 급격히 나타났다. 의복에서 시작된 사치 풍조는 16세기에 들어와 대중국 사무역이 본격화되면서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 사치 풍조는 신분적으로는 지배층에서 하층민까지, 또 그 대상이 衣服, 住宅, 車馬에서 일반 雜事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으며, 또한 지역적으로는 중앙에서 변방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질서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특히 부업으로서 상업을 경영한 하층민들도 이 변화에 동참한 것은 주목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의 확산은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 왕조체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었기에 지배층으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정부는 사치 풍조에 대해 일찍부터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령을 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I5세기 말부터 신분에 따른 주택, 의복, 집기 등의 사용 제한 규정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특권층들이 부상층과 결탁하여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는 사치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정부의 여러 노력들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2 무명베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무명베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장철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민속학)

불교적 이념을 지배원리로 삼았던 고려왕조의 말엽에 수입된 주자학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세사와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의 탄생을 예고하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표방하면서 조선왕조가 새로 건국되었으며 불교는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의 위와 같은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혁명과도 같았다. 그만큼 주자학은 당시의 사회와 생활을 뒤엎는 엄청난 힘을 몰고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의 전파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최근세에 겪었던 격동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독교와 함께 서구의 산업기술과 생활양식이 동시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주자학도 농업기술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동시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에 대한 신진사류의 관심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든다면 바로 면업과 사당제도라 하겠다. 사당제도는 바로 삶의 공간에 죽은 조상을 모시는 공간의 마련과 함께 제사를 집에서 지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제시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면업도 주자학과 함께 들여와 당시의 생활양식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말엽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신진 주자학자들의 궁극적 목표의 하나는 일부 귀족들과 사림에 집중되어 있는 방대한 토지 때문에 도탄에 빠진 민생을 되살리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변화에도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시의 옷감이었다.
이전의 옷감으로는 명주나 삼베, 모시가 있었으나 섬유질의 강도, 내구성 또는 방한을 위해서는 비실용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들 보다 더 좋은 무명이나 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들은 당시 원나라에서 독점적으로 고려를 비롯해서 외국에 수출했던 전략 수출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화씨는 절대로 외국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다량으로 생산되어 값이 쌌던 것도 아니었다. 수공으로 조금씩 생산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무명이나 솜을 구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와 생활의 격차는 컸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진 주자학자의 선두주자였던 문익점은 민생문제 해결책의 하나로서 목화의 도입을 적극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요즘의 관점에서 보아 산업스파이 역할을 스스로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목화씨를 붓 대롱 속에 숨겨서 들여온 것이다. 목화의 도입에 의해서 나타나는 변화는 내용과 차원으로 보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농경과 가사체계,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 또 다른 하나는 사회의 변화가 그것이다. 목화는 이렇게 사회와 생활전반에 걸친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생활문화의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목면제배가 가져다준 경작체계의 변화

이 혁명은 의료경작물로서 목면이 본격적으로 채택됨으로써 비롯된다. 목화의 등장으로 이전의 뽕나무와 삼, 모시풀로 이어어진 경작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일정한 면적의 경작지가 확보되어야 하는 여러 해 살이인 뽕나무와 모시풀 재배가 한해살이인 삼과 목면으로 대체될 때 초래된 경작체계의 변화는 상당히 컸다. 한해살이 경작물들은 윤작이나 간작이 가능하며 또한 목화 량의 필요에 따라 경작지를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의 경작체계와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주와 삼베, 모시 등 다른 의료 경작물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옷감 또는 여름 옷감으로 서의 가치와 효용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적인 수요가 있다. 따라서 양반계층이나 도시지역 부유층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특산물로서 여전히 생산되고 있었다. 이는 무명도 마찬가지다. 현재 외국에서 다량 생산되는 목화와 기계섬유 또는 합성섬유로 인해 목화재배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졌지만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산물과 문화재의 상관관계를 이해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혁명은 목화를 이용 일상생활에 유용한 재료를 만들어 내는 일에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업은 의식주를 가족단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농업이나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가족구성원에 의해서 식량과 옷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옷의준비는 식량 마련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데도 명주 삼베 모시의 섬유질이 약해 한 참 바쁜 때인 여름철에도 조심스럽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화가 도입되기 전에는 옷감이나 옷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노동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계절에 여성들이 치려야 할 가사노등의 부담은 지나치게 과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그 질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기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섬유질이 질긴 솜을 대상으로 한 노동은 비교적 손쉬웠을 뿐 아니라 특정한 계절에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여성은 옷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농번기를 피해 짬이 날 때 옷감을 만드는 일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솜과 실, 그리고 옷감을 빠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솜과 실과 옷감의 활용은 옷 뿐 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생활의 전반에 걸쳐 그리고 사회제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삶의 방식제공

이 영향은 이전의 생활이나 사회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삼의 방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먼저 목화의 씨를 뽑기 위해서 씨아라는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 졌다. 그밖에 솜을 타는 활 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가락과 실의 날을 고르는 날틀 등 새로운 도구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이때 무명을 짜는데 사용하는 틀은 이전부터 사용하던 베틀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됨에 따라 명주와 삼베와 모시를 짜기 위해서 사용되던 옛 도구들은 특산물로 남아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외국에서 기계로 짠 광목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목화재배의 경제성이 사라지게 되자 그에 쓰이던 도구들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이런 도구들이 지금은 민속박물관의 수집품으로 전시되어 한때의 기술수준과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솜으로는 이불과 요를 만들 수 있어 일에 지친 육체의 피로를 풀고 원기를 회복하거나 추위를 이기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서민의 민생에 기여한 목화의 효용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불과 요를 올려놓는 이불장이나 반닫이 같은 기구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흰 천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방안의 장판과 도배도 급속하게 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솜의 방한기능은 옷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솜옷, 누비옷으로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갑옷이나 방탄복으로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기름기를 뺀 탈지면은 흡수력이 높아 지혈이나 외과 치료용으로 쓰였으며 등과 초의 심지와 함께 화약이나 군사용 탄환의 심지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문화영웅

무명실은 질기고 오래가는 내구성 때문에 일상생활에 상당히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 먼저 옷을 만드는 바느질에 쓰이는 것 이외에도 노끈과 멜빵으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빨랫줄로 사용하나 돗자리 또는 발을 엮고 책을 묶는 데에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노끈을 묶어 만든 멜빵은 물건을 담는 자루나 보자기와 함께 보부상들의 필수적인 휴대품이었다.

그뿐 아니라 실과 노끈을 이용하여 만든 낚싯줄과 그물로 어로활동에 획기적인 발달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자연조건을 활용하던 어로가 그물이나 낚시라는 인공도구에 의해서 급속도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강가와 갯벌 또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생활공간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밖에 그물은 사냥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생활영역을 넓혀 풍부한 삶의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목화로부터 시작된 혁명 탓이었다. 목화의 응용성과 실용성은 농업이외에도 어업과 상업 그리고 사회제도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무명옷감의 실용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특히 방한복과 노동복으로 서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한양 육주비전이 하나로서 면포전이 설립되어 무명은 중요한 상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이후에 무명은 정포라고 하여 세금으로 받아들이기도 할 정도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그 대량생산을 위한 사회적 욕구는 엄청나게 컸다.

이러한 점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영국 산업혁명이 바로 기계무명(광목)의 생산에 의해서 본격화된 점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명의 대량생산은 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모두가 갈망하던 과제의 하나였으며 무명은 꿈에 그리던 한상의 옷감이었던 셈이다. 그뿐 아니라 무명조각은 수건을 비롯하여 행주나 걸레로도 활용하여 일상생활의 위생관념도 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활문화의 변화는 문익점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가치는 점점 확대되었기 때문에 세종 때에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 분이라는 칭호인 부민후에 봉해졌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역사상 확실한 시기에 등장한 문화 영웅이었다.

3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옷감으로 정착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 옷감으로 정착
조효숙 (경원대 의상과 교수)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직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 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면업은 조선왕조의 면업장려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성장 발전하여 오랜 전통을 지낸 마직업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견직업과 함께 조선시대 의료산업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문익점에 의해 유입된 면 종자는 지금의 산청지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으나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으므로 국가로부터 적극적인 권장정책은 취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면 종자 유입 후 고려 말까지의 27년 동안 면포의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 들어 적극화한 면업 장려정책

조선왕조로 접어드는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 말(1418)까지의 27년은 면포가 대중의 보편적 의료로 정착되는 시기다. 국가에서도 면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면업을 장려하면서 목면 종자의 도입자인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먼저 문익점이 죽은 이듬해인 태조7년(1399)에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으로 증직했다. 또 태종 10년(1410) 사간원이 올린 시무8조 중 위로는 경사에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 까지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의 원료로 쓰이는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전을 지급하자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문익점의 공로에 대한 뒤늦은 표창은 그 당시 비로소 목면이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여 국민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고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면업을 장려하려는 국가정책을 반영했다고 하겠다.

태종대의 더욱 적극적인 목면 권장정책을 보여주는 예로는 동왕 9년(1409)에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한옹이 올린 조목을 들 수 있다. 그는 면포전에 대하여 쌀로 납세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주청했으며 태종은 그와 같은 특혜조치를 허락했다. 이와 같은 국가의 권면정책이 촉진제 역할을 하여 면화재배는 서서히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아직 면포의 생산은 충분하지 못했고 태종17(1417)까지도 명나라와의 교역에서 말을 수출하는 대가로 여전히 많은 양의 면포가 수입되었다.

세종대가 되어 이제 면업은 정착기가 지나고 발전기에 접어든다. 세종7(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의 109개 군 현 중에 88곳에서 전세(田稅)로서 면포를 납부했고 83곳에서 목화를 납부했을 정도로 15세기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목화와 면포가 생산되었다. 그 후 7년 뒤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토의목면(土宜木棉)이라 기록된 면의 산지명은 경상도 뿐만 아니라 남한 전역에 급격히 확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남지방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세종은 면화 재배를 기후 풍토가 잘 맞지 않는 서북지방에 까지 보급시키고자 노력했다. 세종17년(1435)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 달라 한전(旱田)을 경작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면종자를 거두어 함길도에서 면화를 키우도록 했다. 다음해 역시 함길도 감사에게 목면종자를 보내어 재배법을 시달하고 먼저 관가에서 시범을 보여 일반 농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북방지역의 목면재배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기후가 한랭한 북방지역에 면업을 확산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왕 28년(1446)에는 평안 함길도 관찰사에게 목면 경작을 장려했고 평안 함길도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하삼도인으로 하여금 목면을 경장하게 하고 차츰 원주민들도 면업을 보급 시키도록 하는 등 국가의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동왕6년(1475) 영안(永安) 평안 황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토록 함으로써 북방지역의 목면 보급을 위해 일관된 국가정책을 폈던 것이다.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화의 특산지로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가 기록되어 재배가 평안도까지 확산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작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양의 면포가 일본, 유구 등지로 수출되었다.

삼남에선 면포가 대표적 토산공물로 책정돼 면업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은 산업경제 구조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계속되는 면업의 확산으로 의료산업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삼남지방 일대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온 마직업은 면화재배가 어려운 서북부 지방으로 옮겨지고 면포가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었다.
예종 원년(1469) 6월에 공조판서인 양성지는 공물을 지역적으로 배정할 떼에 각 지방의 토산에 따라 하삼도에서는 면포, 평안 황해도에서는 명주, 함길 강원도에서는 마포, 충청도 임천 한산에서는 저포를 납부하게 하자고 청했다.
경상, 전라, 충청도 등지에서 면호를 대표적인 토산공물로 책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예종 원년에 이르러 면포가 남한 일대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의료로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로 볼 수 있다. 16세기에 저술된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평안도에서 42개 군현 가운데 39곳이, 함경도에서는 22개 군현이 전부 그리고 황해도에서도 24개 군현들 가운데 14곳에서 마포가 생산되었던 점은 마포 산지의 이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면화 재배는 계속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에서 당시 전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면직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서에서 생산된 면포는 가볍고 고우나 약간 약하고 영호남 지방산은 질기고 견고하나 투박하며 경기지방에서 나는 것은 고양 송도에 나는 것을 가장 높이 친다.

둘째, 면포가 조선대 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 사용되었다.

면포는 견직물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나 실용적이었다. 저마다가 하복 재료로서, 견직물은 동복 재료로 적합한데 반하여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는 의료였다. 그 외 흡습성이나 보온성이 뛰어나 내의, 버선, 침구까지도 주로 면직물이 사용되었으니 면포의 국내수요는 실로 막대했다. 면포가 의료로 사용되었던 실례로서 태종10년에 위로는 경사에서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상의하상의 의료로 면포를 보급한 공로를 높이 기리어... 라고 한 것을 들 수 있거니와 이것은 당시 의생활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태종대까지는 목면이 상류계층의 의료로 쓰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여진의 사신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 목면옷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종16년(1416)에는 석자의 연을 두를 때 잠실의 공력이 매우 어려우니 이제부터 목면으로 대신하고 각전의 자리에 두르는 연도 비단을 쓰지 말고 압두록색 칠승목면을 사용하며, 동왕 18년(1418)에는 예조에서 혼인하는 사람의 금침을 토산인 주(紬;명주)와 면포로 하라는 사의(事宜)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서민들의 경우 이미 목면을 의료로 사용했으나 상류층에서는 의복보다 침구와 같은 생활용품부터 목면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면포는 상류층 의복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종 27(1445)에는 6명의 승지에게 압두록 면포와 홍주(紅紬)를 한필씩 하사하여 중국 체의의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했다. 다음해는 집현전으로 하여금 복색상정조건을 의논하게 했는데, 제1조에 공(工) 상(商) 천예(賤隸) 향리(鄕吏)는 목면 면주 저포를 8승 이하를 쓰도록 명시한 점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에게 목면이 일반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8승 이상의 고운 목면도 많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규정이 설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종대에는 명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 사신들과 그 당시 최상의 권위를 가졌던 수양대군에게도 면포로 만든 각종포류(布類)를 하사한 점으로 보아 면포는 이제 관리나 왕족의 의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면포는 왕족으로부터 천예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의료로서 자리 잡았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복식 유물 중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의 출토품에 무명옷이 많이 보이며 특히 임란 중에 사망한 사람의 유물은 거의 무명으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임란 중에 전사한 김덕령장군의 복식이나 김함의 복식 등에는 속옷은 물론 겉옷인 포류도 무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단옷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무명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면포는 외국무역 및 국내시장에서 중요한 거래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즉 면포는 세종이후 성종 중중에 이르기까지 명, 여진, 일본 등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 것에 대한 지불을 충당했고 특히 대일무역에서 면포의 수출량은 막대했다. 그리하여 조선조 대외교육에 있어서 지불수단의 주중을 이루는 대표적인 수출 품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세종 이후 국내 유통경제에서 마포를 대신하여 화폐의 역할을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시장을 기점으로 유통이 일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에는 쌀을 거래하고 있는 군현의 수가 253곳이었는데 비해 면포가 거래되는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으며, 명주는 73곳 저마포는 175곳으로 이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촌 수공업으로 발전한 면업은 염업, 광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4 조선 목면의 일본 전래와 서민생활 변화
박화진 교수(부경대학교 사학과)
1. 머리말
2. 조선 목면의 일본 전래
3. 일본의 목면 보급과 재배
4. 목면업 발달과 서민생활 변화
5. 맺음말

1. 머리말
1) 문제 관심

목면의 보급은 세계사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지리상의 발견 중에 서양에 유입 소개된 동양의 목면은 유럽도시 및 시민사회를 바꾸어 이른바 생활상의 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동양목면의 유럽전래는 속옷으로서의 뛰어난 감촉, 잦은 세탁에의 강한 특성, 다양한 염색의 가능성 등의 장점으로 인하여 칙칙했던 중세도시 생활을 일변시키게 되었다. 이른바 목면은 서양의 지리상의 대 발견 과정중의 성과로서 서양인들의 생활상을 대폭적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속옷을 입지 못하고 자주 세탁할 수 없는 모직물을 의복으로 삼았던 탓에 비교적 어두운 색감의 서양도시가 갑자기 상쾌하고 환하게 변모하는 데에 커다란 일조를 한 목면의 역할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 과정 중에 인도산 목면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유럽인들은 목면으로 된 속옷의 상쾌함에, 또 아무리 자주 세탁해도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는 목면섬유의 우수성에 매료되었으며, 흰 목면 천에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염색한 천으로 만든 여성들의 화려한 옷은 우중충했던 서양도시의 분위기를 일시에 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리상의 발견으로 시작된 유럽의 제국주의적 진출은 목면을 비롯한 이러한 동양 산물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침략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목면전래는 이렇게 의복혁명을 일으키고, 나아가 서양과 동양의 역사를 바꾸어 버리는 제1차 산업혁면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목면도입은 고려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한반도 전역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특히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본격적인 목면재배에 돌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부 지역은 목면재배에 적합지 않았던 모양으로 주로 남부를 중심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종전의 대표적 옷감이었던 모시 삼베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 조선왕조가 성립되게 되자 일본의 규슈(九州), 쥬고쿠(中國) 지방 영주들이 빈번하게 사람들을 파견하여 무역을 하게 되었다. 이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 토산품 및 서양으로 부터의 박래품을 싣고 와 조선왕조로부터 많은 회사(回賜)품을 받아 돌아갔다. 이때의 회사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는데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초기엔 마, 저포 종류이었다. 그런데 15세기 초 이래로 이 회사품 들 중에 목면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점차 일본 측의 목면 요구가 급증하게 됨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는 ’마에서부터 목면으로‘라는 일본 서민 생활문화에 있어서의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나아가 일본 경제사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를 부러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 일찍이 목면이 가져온 일상 생활상의 변화에 대하여 일본의 대표적 민속학자 야나기다 쿠니오씨는 ’목면이 가져다 준 행복‘이라고 표현한바 있다.
야나기다 쿠니오는 민속학자로서의 예리한 감각으로서, 목면을 처음으로 일게 된 일본민중들이 당장에 그 노예가 되어 그야말로 멀고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친숙하게 사용해왔던 마포에 대해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게 된 이유에 대해 매우 간결하게 설명하면서 민중생활문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활상과 감각, 그 상쾌한 촉감에 기이한 일본적 문화의 섬세함과 풍요함에 대한 탄생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는 서민생활은 물론이고 일본적 문화성립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목면의 일본 전래와 그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세계 목면의 길

(1) 목면이란

목면이란 아욱과 목화류에 속하는 1년초 또는 다년초를 말한다. 목면을 의미하는 코튼이라는 용어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하는데,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기록 속에서도 이미 목면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목면은 회교도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영어의 Cotton(코튼)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아어의 qutum 및 kutum 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목면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海島木綿, 이집트 목면, 陸地목면, 아시아목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면모의 길이, 강도 , 색상, 숙성도, 균일함, 섬유의 섬도 등에 따라 그 품질이 나뉘는데, 기계방직에는 섬유가 길고 가는 것이 좋은데 , 면모의 길이는 해도목면이 가장 길고(3.81~5.08cm) 아시아목면이 가장 짧다(0.95 ~ 1 91cm)고 한다.

일반적으로 면모의 용도는 ①의복(방적)의 원료, ②이불솜 ③화약 및 셀를로이드 원료 등으로 들 수 있으며, 특히 목면이 의복의 원료로서 상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인 것 같다. 즉 실의 강도가 강하여 방적하기 쉽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뛰어나 촉감이 좋으며 색감과 광택이 좋으며 염색하기 쉬우며, 나아가 섬유 사이가 中空인 까닭에 중량이 가벼우면서도 보온력이 매우 우수하며 흡수성이 매우 뛰어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목면 종자는 약 20% 정도의 유지분을 포함하고 있어 씨를 짜서 식용유(사라다 오일 등)를 만들기도 하고, 그 찌꺼기는 매우 우수한 유기질 비료로서도 중보되어 왔으며, 또 목면을 따고 난 뒤의 고목은 연료로서도 매우 소중하게 사용되어 그 용도는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2) 코튼 로드의 길

서민들의 의복생활에 커다란 변화와 혁명을 가져온 목면의 기원과 그 전래과정에 대하여 살펴보면, 현재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구대륙에서는 인도가 이미 약 5,000 여년 이전, 중국이 약 3,500년 이전 목면이 재배되었다고 본다. 한편 조선의 재배기원이 640여 년 전이라고 보는 견해는 너무 늦은 것 같은 감이 있다. 아마 추후의 연구 성과에 의해 수정될 것이라고 유추하는 바이다.

한편 목면재배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면, 목면은 세계 각지에서 각각 별개의 기본종자로부터 독자적으로 재배된 것 같다.
가장 오래된 목면은 BC 59세기 무렵 멕시코 지역의 육지목면으로 추정되며, 이외에도 신대륙에서는 BC 26세기부터, 페루지역에서는 페루목면, BC16세기경 부라질지역에서는 부라질목면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1704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 지역으로 유입도어 주로 육지목면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동양의 대표적 목면생산지인 인도에서는 '기다치 목면'이 가장 오래된 목면종자로 알려져 있다. BC 26세기 경의 인더스강 하류 모헨죠다로 유적에서 綿布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도 最古의 문헌인 리그베다(B.C. 1300~1000)에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시로바나‘ 목면 종자가 인도에 이어 고대부터 재배되고 있으며 이후 유럽에도 전래되었다. 그리나 후일 종래의 주류를 이루던 아시아계통 목면들이 대부분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의 육지목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마(亞麻)를 의복으로 하고 있었던 탓 때문인가 목면재배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13~14세기에 이르러 비로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집트목면은 주로 19세기에 이르러 유입된 페루목면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10세기 이후 인도로부터 종자가 유입되어 12세기부터 본격화 되었다고 하는데 송말원초 무렵에는 복건성을 비롯하여 강남지역에 까지 보급되어 원대의 1289년엔 절동, 강동, 강서, 복건 지역 등에 木棉提擧司가 설치되어 매년 목면 10만 필을 수납하였으며 1299년 각 지역 행성으로부터 수납되는 목면도 50만 필에 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에 목면이 유입된 것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려 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와 경상북도 의주군 운산면에서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조선목면은 다시 일본으로 전래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 조선 목면의 일본 전래

1) 목면 이전의 시대 – 추위와의 싸움

목면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일본의 고대, 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모시와 삼베를 중심으로 한 麻의 재배 ,방적 ,직포의 시대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각 개인의 농가에서 본인들 자신의 필요한 직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 농가의 여성들은 매우 손이 많이 가면서 또 능률적으로 그다지 효능이 좋지 못했던 이러한 마포 재배 및 직포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뒷날의 목면시대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포 즉 삼베는 섬유조직이 매우 듬성듬성하여 통풍성 측면에서는 매우 뛰어나 여름 의복으로서는 최적격이었으나, 탄력성이 부족하고 촉감이 그다지 좋지 못하여 겨울에는 여러 겹을 겹쳐 입는다 해도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그다지 적합지 못하여 상당히 추위에 시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힘든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된 목면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중국이나 조선에서부터 목면제품이 완전한 수입품으로서 전해진 시기와, 두 번째 단계는 일본국내에서 목면의 재배, 방적 ,직포가 직접 시행하게 된 시기이다.

그러면 목면 관련 기록이 일본 문헌상에 언제부터 나타났던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헌상의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戰前 일찍이 철저한 사료조사를 통하여 목면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해왔던 오노 고우시(小野晃嗣)에 의하면 元久 1(1204)년 무렵 송나라 상인이 일본에 목면포를 가져온 것으로서 당시 일본에는 없던 물건이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가마쿠라 시대초기에 이미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심유 관련 유물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 검증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가설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正平12(1357)년 10월 17일, 室覺寺의 無隱元晦가 히다치 호운지(常陸 法雲寺)의 후암 종기(後菴宗己)에게 보낸 편지 속에 "木綿方(○)一領 聯表微志" 라고 기록하고 있어 아마도 禪僧들 사이에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목면의 袍衣가 매우 귀중품으로서 취급되고 있었음을 추측되고 있으며, 또 남북조 시대에 작성된 『庭訓往來微 속에서도 '綾紫小抽','上品細美','單 之絹'등의 의료와 나란히 木綿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I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점차 목면의 사용실례에 대한 기록이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목면은 중국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박래품으로서 아직도 귀족사회에 한정된 매우 고귀한 물품이었다. 아직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가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 목면의 일본전래

일본에서 아직 목면 재배가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조선에서는 목면 재배가 시작되어 매우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었다. 조선도 원래는 모시와 삼베의 나라로서, 고려시대 말기까지는 麻布가 물건매매의 교환수단으로서 화폐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14세기 후반 고려 말 공민왕13년(1352~74년 재위) 무렵, 원나라에 갔던 사신(문익점)이 귀국하면서 목면 씨를 가져온 것을 계기로 약 10년 동안에 한반도 전역에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 말기 무렵부터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1392년 조선왕조가 성립하였을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목면제배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 같다. 기상 조건으로 인하여 한반도 북부는 목면재배가 불가능하였던 것 같으나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목면재배가 확대되어 의복생활에 있어 모시와 삼베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에 일본에서는 쥬고쿠(中國) ,규슈(九州)지방의 守護大名 및 유력한 國人영주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사신들을 한반도로 파견하여 무역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왕조는 일본국왕(=무로마치막부 쇼군) 혼자뿐만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오는 大名 , 國人들과의 무역도 그대로 수용하는 외교방침이었던 것 같다. 이에 일본 측 사절단이 비교적 빈번하게 자주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의 토산품과 남방(서양) 수입품을 싣고 갔으며, 그 대신에 조선왕조로부터 다양한 많은 하사품을 받았는데, 초기엔 모시, 삼베 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應永13(1406)년 일본국왕의 사신에 들려 보낸 하사품 중에 종래의 모시, 삼베 이외에 '靑木綿'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 2년 뒤인 오우치(大內)씨가 보낸 사신에 대해서도 '綿布'가 하사되고 있다. 이것은 오우치씨가 수오우, 나카도를 중심으로 한 유력한 수호대명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왜구 문제 및 무역 문제 등에 있어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쇼군 사신단과 비견될 만한 특별대우를 하여 목면을 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대명, 국인에 대한 하사품 중에는 귀중품이었던 목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應永25(1418)년부터 동 30(1423)년의 5년 동안 사이에 조선왕조의 일본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 중에 목면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이어 삼베와 모시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종전의 귀중품이었던 목면의 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점과 일본 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급증에 의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宝德3(1451)년 “살우일 삼주 태수 미나모토 다카히사”가 문종의 즉위를 축하하여 사신을 보내어 많은 선물을 보내었는데 그에 대한 조선왕조의 하사품이 "綿布 2,394匹"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 측의 희망이 면포로 집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李朝責錄』 世祖 成化3(1467)년 8월 己亥조 기사에 “사단, 제용 양소의 비축분은 면포가 20여 만 필이고 면주는 단지 2,000여필”이라는 내용은 목면 비축분이 면주 비축분의 100배나 됨을 알려주고 있어, 한반도의 목면생산 급증과 더불어 이에 국고 비축도 목면을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文明2(1470)년, 日本國 因伯丹 三州太守 山名少弼敎豊도 사절을 조선으로 보내어 호키(伯耆)지역 만부구찌(万福寺) 수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대장경 1부, 경자 1개, 목면 3천필, 인삼 500근, 미곡 500석, 대발 2개”를 요구했으며, 文明5(1473)년에는 "일본국 防長攝泉 四州太守 大內別駕多多良政弘"이 세이쇼지(淸水寺)의 재건하는 비용으로 銅錢 ,綿주,綿布 등을 요구하여 <정포 일천필, 면포 일천필, 玄米 500碩>을 얻어갔다.

이 무렵부터 大名 및 國人領主들의 대조선 무역 형태가 동, 철을 조선으로 수출하고 그 댓가로 綿布를 얻기를 희망하는 형태로 일반화 되어 갔다. 그리하여 文明7(1475)년에는 서울의 왜관무역과 경상도 浦所무역으로 지급된 면포가 모두 27,800필이었으며, 이듬해 文明8(1476)년에는 37,421필이라는 급증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점차 위기감을 느껴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왕조에 가져다 준 것은 대체로 사치품이 많았으므로 이것을 목면으로 교환하는 비율을 변경하여 종전의 황금1량 = 면포 30필의 비율을 고쳐 황금 1량 = 면포25필이라는 식으로 목면의 가치를 높이고, 회사품의 하사 시에도 正布, 綿紬, 목면의 세 가지로 주는 방식을 취하여 목면 국외유출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延德2(1490)년 대마도의 宗貞國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일본 측은 오로지 목면으로만 받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싶어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에 조선정부는 곤혹하여 공적무역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 및 기타규슈, 산인(山陰)지방과 조선정부는 원래 작은 배로서 왕래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었음으로 양국간 민간상인 간의 무역거래까지도 포함한다면 분명히 급증한 일본 측의 요구가 한반도에 있어서의 내수분까지도 위협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왜 이렇게 급격하게 목면수요가 늘어났을까? 때마침 일본은 오닌의 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 확대되었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 전국시대의 전성기로써 각 지역 영주들의 국운과 사활을 건 전쟁수행에 필수불가결한 군수물자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비상 사태적 시대적 요구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목면이 병사들의 의복을 비롯하여 총포인 화승총, 선박 등의 제반 군사적 용도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조선목면 성능의 우수함을 알게 된 일본 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가 더욱 더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급증일로에 놓인 일본의 목면무역에 대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음으로 목면의 대일 수출에 대하여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제한을 가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이에 다급해진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당목면(唐木綿)을 수입하려는 동향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단 이 단계에 일본에 전래된 목면은 국내의 전국적 재배로까지는 전개되지 못했던 것 같다.

3. 일본의 목면 보급과 재배
1) 일본의 목면보급 양상

(1) 목면재배 초기관련 사료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는 규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이 벼농사(稻作)가 기타규슈(北九州)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동쪽지방으로 전파되어간 것과 거의 같은 발자취를 따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거의 동시적으로 각지에서 병행하여 종자가 전파되고 이곳저곳에서 면작이 시행되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때 호쿠리쿠(北陸), 도호쿠(東北)방면이 다소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로서 국내목면 재배의 개시와 확대를 에도시대 전기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보다도 빠른 시기, 즉 16세기 중엽 무렵 전개되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우선 일본인들이 목면을 알고 그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말부터 I5세기 사이라고 보고 있다. 이후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면을 손에 넣기 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하는 한편, 조선왕조에 대하여 목면수출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초 외국의 목면수입에 의존해오던 길이 끊기게 되는 오닌의 난(1470~1480년) 전후부터 일본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 출현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빙사료로서는 채택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아래에 인용되는 사료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본국내 목면재배 관련 최초의 기사로서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문명11(1479)년의 지쿠젠쿠니 가유타노쇼 나츠쇼등연서료족주문(筑前國粥田莊 納所等連署料足注文) 속의 "木綿壹端令賢房에進之"라는 기술을 들 수 있다. 가유타쇼(粥田莊)라 불리우는 장원은 하카다 동쪽 편에 있는 장원으로서 그곳의 관장하는 난도코로(納所) 공문 기록으로부터 영현방(令賢房)에게 목면 일 단이 진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유타노쇼라 불리는 장원은 高野山 삼미원의 영지로서 이 문서도 이 금강삼매원에 전래되어 오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영현방도 이곳에 거주하였던 스님이었으리라. 여기서 料足의 청산과 관련된 기술에 이어서 <토산물을 진상하여 보내는 일(送進上之土産事)>라 하여 진상품 물품 속에 이 목면이 거론되어 있다. 즉 목면 일단을 일부러 멀리 있는 규슈지역에서 부터 보낸다는 사실은 당시의 실정상 아직도 일본 국산 목면이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일 터이다. 土産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지방의 향토 토산물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수입품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던 목면이 가유타 장원이나 혹은 그 주변에서 산출되었으므로 그 고장의 자랑하는 토산품으로서 영현방에게 보내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사료만으로 이렇게 단정하기에는 다소 불안함이 남지만, 나가하라 게이지는 일본에서의 목면재배와 관련된 최초의 사료로서 볼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山科家札記』라는 일기의 長亨2(1488)년 9월 1일자와 明応1(1492)년 8월 3일자의 기술에서 목면을 의미하는 '기와타와 와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래로 면(綿)이라는 글자는 모두 누에고치 실로 만든 眞綿을 의미하여 왔으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기와타'라고 히라가나로 기술한 것 같다. 그리고 '와타노 아후’라는 목면 종자를 짜서 만든 綿實油이다. 이 면실유는 식용인 것 같으나, ‘나무통七十'이라는 숫자는 너무 많은 것 같으므로 다소 의문이 있다. 등유요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목면 보급지역

일본근세 즉 에도시대 대표적 면작지대는 오사카만 연안 즉 기나이 야마토, 셋츠 가와치, 이즈미 지역에 밀집하고 있으며 특히 이 지역 생산 목면들은 기술적, 생산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상품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서쪽은 구주로부터 동쪽은 관동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에도시대 이전부터 목면재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역시 동북지방으로의 전개는 아직 안되었던 것 같다. 일본 국내의 목면재배는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관서지역과 관동지역, 동북지역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갔다.

2) 목면재배의 제 단계 – 이기 생략

4. 목면업 발달과 서민생활 변화
1) 목면의 제반용도

16세기 일본국내에서의 목면생산의 보급, 전개에는 이를 촉진하는 강한 수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麻에서 木綿으로라 하면 서민 의복의 재료가 마에서부터 목면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민 복식 측면에서만 고찰하기엔 편협한 감이 적지 않다.
전국시대 급속하게 목면생산이 발전하게 되는 원인에는 당연히 그 시대 특유의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의 논문 「木綿以前의事」는 그의 관점 (常民의 생활) 문제로서 논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는 목면 등장이 몰고 온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향과 의미에 대해 살펴볼 때 그 용도의 다양성 측면에서 16세기에 있어서의 구체적 조건, 특수성에 입각하여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1) 군복으로서의 목면

문명2(1470) 무로마치 막부의 재정을 맡았던 만도코로의 집사 이세마사치가는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어 목면을 요청했으며, 이어서 文明5(1473)년 오우미(近江) 이즈모(出雲)의 수호 교코쿠 마사즈네가 자신의 영지인 오우미, 이즈모지역이 오우닌의 난에 휘말려 전쟁터로 바뀌어 인민들이 군인으로 동원되어 농토가 황폐화되어 사람들이 조악한 갈포 종류 정도만 겨우 걸치게 되었다. 이에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다급하게 귀국의 면주 및 목면을 보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청원편지이다. '臣之蔽邑'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의를 취하는 문장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절박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편지에서 목면의 사용용도가 군복임을 명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제반 군사용으로서의 목면 – 진막, 식진, 우직, 마의 등

군복, 무사 복장과 더불어 군용 목면으로서는 깃발, 노보리(幟), 진막(陣幕), 陣羽織, 馬衣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시위효과를 가진 것이기도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별하거나 지휘관의 소재 등을 알려주는 등등, 전쟁 시에는 빠뜨릴 수 없는 표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색채의 선명함이 요구되었다. 이 점은 야나기다 쿠니오씨가 지적한 바 있으며 마포의 경우 염색이 선명한 색감을 얻을 수 없는 데에 대하여 목면은 원하는 색깔이 그대로 선명하게 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진막 및 노보리 등에도 목면은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목면의 초기용도는 서민들의 의복으로서 보다는 군수품으로서 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3) 화승총의 화승으로서의 목면

목면이 직접적인 군수물자로서의 성격을 띤 대표적인 예로서 種子島銃의 화승을 들 수 있다 火繩銃이란 銃身의 측면에 철확(절구)모양의 구멍(구덩이)을 가진 화약통을 붙여 바닥의 불구멍이 총구멍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또 화약통에는 화약 뚜껑이 덮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격 시에는 총구로부터 검은 색 화약을 총신의 바닥까지 채워 탄환을 장착하고 화약통에도 약간의 화약을 넣어 화승의 힘을 빌려 화약이 점화되어 총구 부분의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하게 하는 것이다.
화승이란 종자도총 그 자체는 아니지만 화승이 꺼져 있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한편 화승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드디어 결전에 이르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화하기 쉽고 또 다소 버틸 수 있으며 간단히 꺼져버리지 않는 그런 것이라야만 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는 화승총의 불이 염천의 더운 날씨에는 너무 빨리 타 소진하지 않도록 우천 시에는 화승의 불이 잘 붙지 않거나 또는 꺼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이 화승총의 화승이 처음에는 대나무 소재였으나 차차 내수성이 강한 목면제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목면으로 된 화승총이 중보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범선의 범포(돛) 로서의 목면

목면의 용도 중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帆布이다. 전국시대라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빨리 대량의 물건을 신속하게 운반하는 여부는 그 승패를 판가름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이 속도의 증가에 가장 중요한 일익을 맡은 것이 바로 목면으로 만든 돛이었다.
慶長 16(1611)년 모우리 쇼즈이(毛利宗瑞=毛利輝元) 사다메가키(定書)에 "빠른 선박은 목면 돛으로 갈색 무지이다"라는 표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짚으로 만든 돛과 왕골 대로 만든 돛과 비교하여 목면 돛으로 된 선박 쪽이 속도가 빠른 것은 목면이 바닷바람을 잘 품어 달리기 쉽고 비나 바닷물에 젖어도 다른 소재의 돛에 비하여 빨리 마른다는 점 또 조작하기 쉽다는 등의 여러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아무튼 목면 돛의 등장은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상 커다란 의미를 가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무로마치(室野) 중기이후 발달 전개된 선박의 대형화가 목면 돛에 대한 수요를 더욱더 급증시키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 전국시대는 상품유통이 활발하여짐과 동시에 지방에서 도시로 라는 구심적 물류 유통 뿐만이 아니라 각 지방 상호간의 물자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각 지방을 근거로 성장한 전국대명들은 군수물자 확보라는 전략상의 이유에서도 어용상인들을 고용하여 대량수송에 주력하였으므로 더욱더 선박의 대형화가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목면 돛에 대한 수요가 바로 목면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2) 서민생활 변화

목면의 경우 삼베와는 달리 일찍부터 상품적 성격이 농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마의 경우, 고대에서는 自家소비분을 제외하고 유통시장에 방출된 것은 일단 용,調로서 국가로 취합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에서도 年貢이나 在家役 등과 같은 장원제적 취합이라는 형태로 변화하기는 하였으나 생산자 농민의 손으로부터 근소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직접 지방시장으로 방출되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 후기 무렵부터이었다. 무로마치 전국시대로 들어서면 중앙지역의 나라사라시(奈良晒) 같은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상인들이 에치고(越後) 등 특정 모시와 삼베 생산지로부터 靑苧라는 중간 상품형태로서 다량으로 사들인다는 형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유통량은 후일의 목면과 비교한다면 아직 소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저마의 방적, 직포생산능률의 비효율성이 대량생산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국적으로 自家用 생산이 되고 있었으므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를 포함하더라도 상품시장은 대체로 협소하였던 덕이다.

그러나 목면의 경우, 상품 유통적 성격을 농후하게 띄고 있었다. 우선 목면 직물이 조세로서 직접현물 형태로서 지배층의 손에 수합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목면은 각大名등의 상품으로서 영 내외로 유통되었으며 이에 대해 대명들은 목면의 역이라는 형태로 役錢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영내 경제 정책의 관점으로부터 영외반출을 통제하기도 하고 원활한 거래를 위하여 다양한 규정을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그 전제는 일단 조세로 들어온 물품의 유통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를 비롯한 현지인들 손에서 상품으로서 유통시장에 투입된 것이었다. 원래 이 단계에서도 목면의 생산형태는 농가의 가내노동에 의한 부업적인 성격에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산규모 및 시장에의 투입량을 마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방대한 양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마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겨울부터 봄에 걸쳐서 자신들의 소비분도 포함하여 1호당 생산량이 높은 직포 능력을 가진 여자 한사람에 대해 기껏해야 3~5反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그것도 에치고의 織布지역 같이 산지집중이 전채된 곳은 그만큼 전문화된 경우에 속한다. 이와 비교하면木綿織은 實綿으로부터 紡績하여, 직포하는 노동 작업이 전반적으로 월등하게 효율이 높았다.
따라서 생산농가로부터 유통시장에 투입되는 목면포의 수량은, 대체로 가내 부업적 생산 형태를 취하면서도 횔신 많았다. 또 그에 대한 수요도 사회분업의 진전, 도시소비시장의 확대 속에서 마의 경우보다도 휠씬 높았다.

3) 경제구조의 변화

목면은 16세기 무렵엔 일본 국내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 전반 무렵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용도도 군수 용품적 성격에서부터 저마를 대신하여 서민들의 일상의복 재료로 변모하게 되었다. 더욱이 목면은 저마와 달리, 그 재배에서 가공까지 분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목면업의 상품 경제적 성격은 주변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일본근세 사회 경제구조 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藍作과 금비로서의 호시카(마른 멸치) 출어, 이에 따른 回船업 발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藍作의 발달-아와(阿波)지역의 藍(남=청색염료)생산

남(藍)은 고대이래로 저마에 사용되어온 염료이었으나 중세말기 그 수요가 증가하여 靑苧의 생산증가와 더불어 상품생산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남의 상품화는 일본이 목면시대로 돌입하여 그 목면의 염료로서 각광을 받게 되는 이후, 종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목면의 경우, 紡績 ,직포 생산과정의 높은 효율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고 나아가 또 서민 의복으로서의 소비가 증가하게 되자 그 염료인 남의 수요도 동시에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와 지역이 남의 주 생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급자족 및 기내지역에서의 일정한 상품수요를 충족할 생산은 종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목면의 폭발적인 수요증가로 인하여 생산지 집중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와번은 이미 蜂須賀씨가 입국한 이듬해인 天正14(1586)년 吳服屋 마타고로(又五郎)를 屋司로 임명하여 屋役을 징수하게 하고, 寬永2(1625)년에는 '藍方役所'를 설치하고 있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와번의 재정과 관련된 중요 생산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明曆~万治연간(17세기 중엽) 무렵. 현 도쿠시마겐 이타노군 아이스미마치(德島縣板野郡藍住町)를 중심으로 이른바 藍園28개촌이라 불리웠던 지역에서는 수백 町步에 걸쳐 藍밭이 형성되었으며 延室~元祿연간(17세기 후반)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판매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正德3(1713)년 간행된 책에서는 아와에서 생산된 남의품질이 야마시로(山城), 셋즈 다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산량 면에서는 아마도 에도시대 전반기부터 아와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주요산지였다.

(2) 어업기술 발달

목면의 상품생산화는 그 생산 증대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비료, 즉 금비 호시카(干鑛)에 대한 급격한 수요증대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멸치수확을 위한 타국 출어가 발달하게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치바현 九十九里○, 서쪽으로는 대마도해역에 이르는 멸치어업이 전개되었다. 이와같이 마른 멸치는 목면재배 증가와 더불어 대량생산되어 오사카로 집적되었다. 正德4(1714)년의 오사카(大板) 입하 상품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그 입하량이 많은 순서대로 살펴보면 米, 木綿류, 菜種, 材木, 멸치, 紙, 鐵의 순서로서 멸치는 다섯 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3) 운송업의 발달 – 이기 생략
(4) 명치시대 이후 – 이기 생략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일본에 있어서의 목면도입 및 그 보급양상, 경제적 사회적 변화 등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목면의 일본전래 이전의 시대상에 대해서 살펴보면 고대 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저마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삼베 누비옷을 입고 겨울을 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음으로 엄동설한 추위와의 투쟁이 매우 힘들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추위와의 싸움이라는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이 바로 조선 목면의 전래라는 것이다.

둘째 조선목면이 언제 일본에 전래되었을까 하는 시기에 대한 문제로서 15세기 주안 일본 서남지역 쥬고구 규슈의 유력한 슈고다이묘 및 國人 영주들을 중심으로 사신을 보내 목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때마침 일본이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 지역 영주들의 국운과 사활을 건 전쟁수행에 필수불가결한 군수물자, 즉 군복, 화승총, 선박 등의 용도에 목면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단 이 무렵 일본에 전해진 목면은 아직 본격적인 재배단계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셋째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보급과 지배는 지역적으로는 규슈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관서지역과 관동지역, 동북지역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시기적으로는 에도시대(1600 – 1876년) 이전에는 규슈 ~ 관서지역에 국한되어 나타났으며, 17세기부터 전반적인 목면재배가 전개되어 목면이 점차 서민들의 의복으로서 공급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단 이 단계에선 목면재배가 대체로 밭 재배 작물적 성격을 띄웠으며, 또 목면 생산과 작물업의 분업이 매우 국한된 지역에 한정되었고 유통과 판매도 아직 그 잉여생산물의 일부가 유통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 ~19세기에 이르러 목면의 전국적 시장 및 전국적 보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에도시대의 대표적 면작지대는 오사카만 연안 즉 가나이, 야마토, 세쓰, 기와치, 이즈미 지역에 밀집하고 있으며 이 지역 생산 목면들이 매우 우수한 상품으로 인정받았으며 오사카를 중심으로 집하 판매 관련 상인들의 조직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근세후기 특히 문화 문정(18041830년) 연간을 고비로 오사카시장으로의 목면 집하 량이 감소하고 에도시장으로의 집하 량 증가라는 유통로의 변화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관동지역 목면업의 발달과 생산량 증가에 의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넷째 목면전래가 일본 서민생활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목면의 초기 용도는 군복을 비롯하여 진막(陣幕), 마의(馬衣), 화승총, 범선 등 군수물자에 사용되었으나, 17세기 이후 전반적 보급과 더불어 서민들의 의복 등으로 용도가 확대되자 서민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상품 농작물로서의 목면재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고성능 구입비료인 호시카, 아부라카쓰의 투입, 고용노동 투자를 통한 집중적 노동력 투자, 직포 과정의 분업화 등을 통하여 지방 농민들을 화폐경제 속으로 끌어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목면업의 발달은 남(藍)을 비롯한 염색업, 호시카 획득을 위한 타국출어를 통한 어업기술, 운송업 등의 발달을 동반함으로써 일본 근세사회 경제구조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남색염료는 아이조메(藍染)라는 일본 특유의 염색법과 문양을 발달시켜 “일본적 전통미”라 부르는 일본문화의 전형이 탄생하게 되었다.

다섯째 일본 근대사회에 지대한 양향을 미쳤던 목면은 명치유신 이후 전개된 산업근대화 정책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명치 29(1896)년 의회에서 면화 수입관세 규정 철폐가 통과됨으로써 면화수입을 반대하던 목면재배 농민들은 큰 타격을 받아 이를 기화로 일본 국내 목면재배가 소멸되고 말았다. 1890년대에 이르러 수입방적기 및 수입면화 도입으로 시작된 면방직업의 근대화는, 일본의 산업혁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5 목화씨 전래와 정천익(木棉事蹟과 正史의 차이)
목화씨 전래와 정천익(木棉事蹟과 正史의 차이)
성대 명예교수 민족문화추진회장 이우성(李佑成)
-1967년 3월25일 동아일보

우리는 면화(棉花)를 말할 때에 곧 문익점을 생각할 정도로 문익점은 유명하고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면(木棉)의 종자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지고 와서 목면업 발달의 계기를 마련해 준분이 바로 문익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면업의 발달은 종자의 전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데다가 재배의 방법도 아는 바 없었던 당시에 있어서 목면의 배양번식(培養繁殖)이 매우 힘 드는 일이었을 것이고 배양번식이 성공된 후에라도 목면 씨를 골라내는 것, 베를 짜내는 것 등의 기구의 제작 및 기술적 과정이 모두 백지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지난(至難)의 작업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오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촌에 세워진 문익점의 면화시배사적비의 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목면화를 보고--그 종자(種子)를 필관(筆管)에 넣어 휴래(携來)---丁未(1367)2월에 환국(還國)하여 소거(所居)하시며 배양리에 식수(手植)하니 처음은 토의(土宜)를 몰라 조습(燥濕)을 가려심고 그 영고(榮枯)를 보아 배양의 묘(妙)를 얻어 3년 만에 번성하여 드디어 전국에 퍼지니---후에 선생의 손 정혜공(靖惠公) 래(萊)는 소차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군수 영(英)은 직조(織造)의 요(要)를 얻어 이를 문(文)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전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즉 이 비문에서는 목면의 종자의 전래는 물론이고 그 배양번식이 모두 문익점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고 뿐 아니라 소차, 직기(織機)등의 기구의 제작은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에 의해서 이룩된 것으로 말해 놓았다.

이것은 결코 이 비문의 찬자(撰者)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면의 배양, 번식에서부터 직조(織造)의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천익의 공로임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실패한 목면의 배양을 정천익이 그 번식에 성공해낸 것이라든지, 지나가는 호승(胡僧)에게 성관(誠款)을 다하여 기구제작의 방법을 알아낸 것이라든지, 가노(家婢)에게 가르쳐 베를 짜내는데 성공해낸 것 등은, 모두 정천익의 뛰어난 지혜와 참담한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그는 사리사욕에서가 아니고, 오직 목면업의 보급에 힘을 써서 그와 같이 빠른 시일 안에 일국(一國)에 혜택을 입히게 되었으니, 그는 정말 국리민복에 헌신적 희생심을 가진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그의 생거지는 진주 사월리였다. 그는 전객령으로 치사(致仕)한 후에 고향에 돌아와 퇴헌이라고 호(號)하고 송죽(松竹)속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사적은 그의 후손들이 편찬한 청계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지방 인사들은 그의 인품과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주 서쪽 마동리에 청계서원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문익점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정천익도 망각(妄却)된 인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정천익의 갸륵한 업적이 타인의 업적으로 오인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덮어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6 목화씨의 전래 우연이 아니다

목화씨의 전래 우연이 아니다
김성준 수원대 사학과 교수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는 우연이 아니었다.

목면의 원산지는 인도로 기원전 8세기경에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변경에는 일찍이 후한 때 광동이나 운남 지방에 전래하여 번이들에 의하여 재배되고 또 남북조시대에는 신강선 토로번의 고창국에서 재식한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이 한인에 의하여 재배된 시기는 송대 부터로 보여 진다. 북송 신종(1068-1085)때 광동지방에 목면이 많아 토인이 다투어 길패포(吉貝布)를 짰다하고 남송 이종(1224~1264) 때의 기록을 보면 광동이나 해남도에서 물론 복건성 천주에서도 갈패포 또는 목면이 재배되어 면포를 생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광동, 복건 등지에서 재배된 목면 또는 갈패포는 다년생의 목면생 즉 수면(樹綿)이었던 것 같아 보인다.

목면 채취 지역에 대한 논란

그러면 일년생의 목면, 즉 초명은 어떤 경로를 밟아 중국에 전래 되었을까. 초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원 세조 때(1273) 발견된 농상집요로서 목면 재배법을 소개한 중국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목면(초면)은 서역의 소산으로 근래에 협우(협서서부지역)에서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곧 목면(초면)의 동진 내지 북상을 점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농상집요는 주로 화북지방의 농업에 관한 농서라는 점이 목면재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면의 동진 ,북상에 관한 자료를 좀 더 찾아보면 남송이 아직 강남을 지배하고 있을 때 강남땅에 초면을 많이 심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또 농상집요보다 40년 뒤에 나온 왕정(王禎)의 농서에 의하면 목면종자는 본래 남해제국 소산이었는데 후에 복건의 여려 현이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강동, 협우 또한 많이 심어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없다.

원이 남북통일을 달성한 뒤 십 수 년이 지난 성종 때(1294~1307)에는 강회, 협우, 천촉(사천)으로 퍼지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황정은 초면이 남해에서 광동, 복건으로 다시 이곳에서 절강, 강소로 북상하여 온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송, 원 양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목면(초면)이 서역을 통해 협서 서부를 거쳐 본토에 전래됐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강남(화남)에서 강북(화중,화북)으로 서역에서 협서 화북으로 목면의 보급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던 송말 원초에 면작은 수익이 대단이 좋은 작물이었다. 때문에 원 세조는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목면의 북진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농상집요를 편찬 목면재배법을 자세하게 소개했던 것이다. 농상집요가 편찬될 13세기 중엽에는 연경부근에 아직 목면재배가 이우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보다 1세기가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에는 이 지방에도 면화가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문익점은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났다. 부친 숙선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하지 않고 낙향했다. 상우당실기에 숙선은 총민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청간(淸簡)하여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 칭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원 지배하에 혼탁하기 짝이 없던 정계에 몸담는 것을 기피하여 일찍이 고향(강성현)에 내려와 주경야독으로 조용히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목면전래는 필연인가

문익점은 11세 때에 멀리 한산에 가서 이곡에게 사사했다. 또 20세 때 향거(鄕擧)로 성균관 경덕재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30세인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정몽주, 임박, 이존오 등과 동방이었다. 태조실록에 익점이 가업을 이어서 독서하여 공민 경자(9년)에 등과했다고 한 것은 곧 그가 주경야독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열심히 하여 가거에 급제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문익점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하는 한편 부친 밑에서 농사의 경험을 쌓았을 것이 틀림없다.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사행하는 시기는 농상잡요가 편찬된 지 90년이 지난 때이며 왕정의 농서과 나오고 50년 뒤의 일이다. 13세기 후엽내지 14세기 초엽에 화중, 화북지방에서 이미 초면이 재배 되고 있었음은 이 두 가지 농서를 통하여 확인된 바 있고 원 세조 이후 목면의 북진정책이 꾸준히 추진된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연대가 많이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 연경 부근에도 면화가 재배 도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면화 경작법을 처음으로 소개 한 농상잡요는 간행되자 말자 고려에 유입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농상잡요가 공민왕21년(1372)에 중간된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힘쓰는 한편 아버지 밑에서 농사에도 상당한 경험이 있던 그로서는 원에 들어가기 전에 농상잡요를 얻어 보았을 런지도 모르고 목면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농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고 목면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원에 들어가서는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왕정의 농서도 보고 목면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경지방에서 일찍부터 목면이 재배되고 있었던 것을 진작 눈여겨보고 있다가 공민왕 폐립사건이 해결되고 귀국하는 길에 그 씨앗을 몰래 적취해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길가에서 목면 씨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원에 숱한 사신들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목화가 유독 문익점의 눈에 뜨인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평소에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 무명베짜기의 공정

무명 베짜기의 공정

고부자(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일부 발췌

씨앗기
(씨빼기)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로서 잘 말린 목화송이를 씨아에 물리고 손잡이를 돌리면 씨는 가락 앞으로 떨어지고 솜은 뒤쪽에 쌓인다. 1940년 이후는 솜틀집에서 뽑아다가 사용했다.

활타기
(솜타기)

목화를 부드럽게 펴는 작업으로 도구는 대나무를 활 모양으로 휘어서 만든 활을 이용한다. 씨아에서 씨와 분리된 솜을 자리에 놓고 한 손에 활을 들고 반대 손에는 활꼭지(박달나무로 만든 손잡이)로 활줄을 퉁기면 진동에 의해 솜이 뭉게구름처름 부풀어 오른다. 1940년대 이후는 솜틀집을 이용했다.

고치말기

실을 빼낼 고치를 마련하는 작업으로 고치를 말 때는 말대와 말판이 필요하다. 말대는 고르고 긴(길이 40cm에 굵기 1cm정도) 수수깡으로 했다. 말판은 빨래 다듬이 판이나 뒷박 등 편편한 것을 사용한다. 판위에 솜을 얇게 펴고 수수깡대에 말고 , 솜은 빼내서 가지런히 둔다 고치는 길이 30cm에 굵기 1.5cm 정도인 것이 좋다.

물레잣기(실뽑기,
실잣기)

실을 길레 뽑아내는 작업이다. 먼저 짚껍질 구멍에 가락(길이 30cm의 날카로운 쇠꼬챙이)을 꿰고 물래를 고정시킨다. 말아놓은 고치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손잡이를 돌리면서 실을 뽑으면 가락에 실이 감기는데 이 감긴 실을 댕이라고 한다. 물레잣기는 무명생산에서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과정이므로 능숙한 사람이 했다. 물레잣기를 할 때 고치를 풀어내는 것과 물레를 돌리는 회전속도 등 기술자의 솜씨에 의해서 실의 굵기가 판가름 나며 이는 품질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날뽑기
(무명날기)

날실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때 짜고자 하는 길이를 가늠한다. 댕이에 감긴 실을 고무레(날틀)구멍에 꿰고 한 쪽에는 큰 소쿠리를 놓고 고르게 뽑아낸다. 고무레 구멍은 더 많은 것도 있으나 10개 짜리가 앉아서 하기에 알맞다. 뽑은 날실은 엉키지 않게 사린다.
실익히기 : 뽐은 날실은 강도를 높이고 굵기를 고르게 해주기 위해서 익여햐 한다. 먼저 물과 쌀 한 움큼을 손에 넣고 끓인다. 물이 끓으면 뜨거울 때 날실을 푹 담그고 풀물이 골고루 적셔지도록 주무르고 자근자근 방망이 질을 한다. 골고루 잘 젖었으면 두 사람이 코를 내어 마주 잡고 물리글 짜낸 다음 잘 털어서 말린다.

바디에
실궤기

모든 처리를 거친 날실을 베틀의 바디구멍에 한 올씩 꿴다. 이때 몇 세짜리 베를 짤 것인가가 결정된다. 반대쪽 끝에는 도투마리를 연결시킨다.
베메기(올매기) 바디에 올린 실을 틀에 올리기 전에 마지막 손질을 거치는 과정이다. 이 때는 왕겨로 겻불을 지피고 날아놓은 실과 솔 풀 토투마리 끄싱게 뱁댕이 등을 준비한 단베를 맬 때는 넓은 마당에서 하는 데 바람이 불지 않고 햇빛이 너무 쨍쨍하지 않는 날이 좋다. 바라밍 불면 재가 날려 실이 타거나 더러워져서 좋지 않고 햇빛이 강하면 실올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 한쪽에다 도투마리를 설치하고 반대쪽에는 날아놓은 실 뭉치를 둔다. 실은 풀을 먹이는데 실 아래는 겻불을 은근하게 지펴둔다. 풀을 먹이는 이유는 실이 강도를 높이고 짤 때 실이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풀은 쌀로 묽게 밥을 하고 풀솔로 으깨어 부수면서 쑨다. 풀칠하고 손질이 된 실은 도투마리에 감는데 감을 때는 실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가는 뱁딩이(대나무를 쪼개 만든 막대)를 사이사이에 넣으면서 하다.
베메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마지막 손질작업이므로 기술자를 모셔다 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하며 세 사람이 있으면 능율이 오르고 이상적이다. 기술자는 풀칠하며 손보고 나머지는 도투마리감기나 끄싱게쪽에서 실을 적당히 푸는 등 보조 역활을 한다.

꾸리감기

베를 짤 때는 날실과 씨실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날실은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고 씨실은 폭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씨실은 북에 넣어서 짤 실이며 북에 넣도록 감은 씨실을 꾸리라고 한다. 꾸리는 길이 20cm 굵기 1.5cm 쯤 되는 전대(시누대)에 감으며 감은 실의 길이는 14cm에 굴기는 5cm 정도가 된다.
꾸리에 실을 감을 때는 한손에 전대를 잡고 이 전대를 돌려가면서 한다. 꾸리에 감는 시실은 날실보다 좀 가는 실로 하며 한핑을 짜려면 꾸리 6개 정도가 든다. 다 감은 꾸리는 전대를 뽑은 다음 맹물에 넣어 삶든가 물에 푹 적신다. 이렇게 해야 실이 굴기도 가늘면서 고르고 또 질겨진다.
꾸리는 베를 짤 때 북(길이 37 너비7.5 깊이 5cm에 홈구명 길이 16.5 폭6.5 깊이4cm 정도)에 넣는데 이 때도 축축하게 물기가 있어야 짜기 좋다. 물기를 오래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시누대 잎에 싸둔다 요즘은 비닐로 하고 있다. 짜다가 물기가 마르면 물에 적신다.
베를 짤 때 꾸리실은 안으로부터 풀려나온다 짜다가 실이 끊아지면 꾸리 안쪽 구멍속으로 나락 털어낸 꼭지를 밀어 넣어서 조심스럽게 더듬으면 실이 딸려 나온다.

베틀에
올리기

베매기가 끝나면 베를 짜기 위한 설치를 하는데 이를 베틀올린다고 한다 베틀은 주로 여성이 거처하는 방한 구석에 자리잡는다.
베짜기 앉을게(의작)에 앉아서 북을 씨실사이로 양손을 번갈아 가며 집어 넣으면서 짠다 짜는 대로 올간격이 고드로록 고르도록 바디집으로 탁탁 쳐준다 오른쪽발은 끄싱게에 꿰어 북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앞으로 놓았다 잡아 당겼다 한다

베틀
내리기

베가 약 두뼘 정도로 짜지면 밀청대로 도투마리를 쳐서 실을 풀고 배앞 허리에 맨 말코에 감으면서 짠다. 대개 한필이 되면 짠 베를 베어 내리는 작업이다

마전하기

베틀에서 내린 베를 옷감으로 사용하려면 불순물이 많이 붙어 있으므로 표백하고 빨아야 하는데 이를 마전이라 한다. 마전하지 않고 베틀에서 내린 베를 깃베라 한다. 깃베는 초상이 났을 때 상주나 복친들이 상복을 만들기도 했다. 마전을 잿물로 했다. 잿물은 콩대를 태운 재로 내린 것이 제일 좋다. 잿물을 무명사이사이에 고르게 적신다음 시루에 넣고 찐다.(익힌다고 한다) 시루에 넣고 익힉 때는 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시루떡을 찔 때처럼 가루로 시루 테를 붇인다..
잘 익힌 것을 꺼내서 방망이로 때리면서 빤다. 잘 익으면 베에 묻은 목화딱지가 떨어져 나간다. 잿물에 익힌 베는 깨끗이 빨고 맑은 물에 3~4회 담그면서 잿물기가 다 빠지도록 우려내면 하얗게 바래지면서 옷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요즘은 표백제에 가루 비누를타서 삶는다.



8 무명베 길쌈의 현주소

무명베 길쌈의 현주소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고부자

1995년 8월 현재 목화를 심는 곳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문익점 면화 시배지와,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 목포 농업진흥청 시험지, 전남 다시면 신풍리 그 외 시골 노인들이 이불솜을 마련하느라고 특별히 심는 정도이다.

"노인들이 미영베 안하면 죽는 줄 알았다" 고 할 만큼 무명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의료이며 부업이었다. 무명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간혹 시골에서 노인들에 의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전남 나주군 다시면 동당리에서 노진남(59세)씨와 동서 김흥남(56세)씨에 의해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다. 노씨는 시모 김만애(1907년생) 씨의 뒤를 이어 1990년에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121호 나주의 샛골나이(길쌈)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노씨는 너비 35cm짜리 9세를 짜는 정도이나 판로가 없으므로 1년에 약 5~6필 정도 짤 뿐이다. 이것도 기능보유자이기 때문에 국가에 출품해야 할 때나 겨우 짜고 있다.
다행히도 금년 여름에 국립민속박물관의 요청에 의해서 약 1개월간 노씨와 김씨가 씨앗기. 고치말기, 물레잣기, 베짜기, 등 베짜기 과정을 시연하여 관람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명길쌈은 나주 샛골나이가 유명했다. 샛골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의 지명이며 나이는 길쌈이란 뜻이다. 무명은 닷새에서 열닷새까지 짰으며 아홉새만 넘으면 고급이라 하여 주로 남성용 외출복으로 쓰였다. 현지에서 무명값은 1필(20자 너비 35cm)에 1960년대 말에는 8승이 1,000원, 12승은 1,500원, 1995년 7월에는 8승모(반)에 250,000원에 거래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화 재배나 무명길쌈은 다른 천연섬유인 삼베나 모시 명주에 비해 전승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수공이므로 재배 제작과정이 힘들고, 둘째는 수공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고 따라서 판로가 없기 때문에 생산할 의욕이 없게 되었다. 솜옷이나 솜이불에 쓰였던 목화는 다른 대치 물건들이 많으므로 필요없게 되었으며 무명은 기계로 짜내는 다양한 면류에 의해 설자리를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지정된 기능 보유자는 나이가 들었고 후계를 이를 젊은 연수생도 없다. 따라서 더 이상 무명길쌈에 대한 기대는 희박한 실정이다. 더구나 값싼 중국 솜과 무명의 범람은 더욱 큰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9 고려 후기 들어온 면화 600년 넘게 '옷감의 제왕'

고려 후기 들어온 면화 600년 넘게 '옷감의 제왕'

 김한동 한국 교원대 교수

지금은 겨울철이 되면 여러 가지 원료로 만든 갖가지 따뜻한 겨울옷이 나오지만, 전통적으로 겨울옷의 대명사는 무명으로 만든 솜을 넣은 솜옷이었다.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후반인 고려 공민왕 때였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던 문익점이 면화를 발견하고 귀국할 때 씨를 갖고 들어온 것이다.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면화를 재배했다. 면화 재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지방 전체로 확대됐다. 고려의 뒤를 이어 들어선 조선 정부는 면화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적극적으로 개간한 세종 때부터는 북쪽 지방에도 면화의 재배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부와 남부 지방은 물론 평안도 등 북부 지방 일부에서도 면화 재배가 활성화됐다. 

사람들은 면화로 무명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면화의 털로는 솜을 지어 사용했다. 그 이전에 평민들이 주로 입었던 것은 삼베옷이었다. 명주나 모시옷도 있었지만,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서민들이 입기에는 너무 비쌌다. 더구나 삼베는 속옷으로 입기에는 거칠었으며, 겨울에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무명옷이 등장한 것은 의생활에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에 힘입어 15세기 중반부터는 기존의 삼베나 모시 등을 대신해 무명옷이 사람들의 주요 의복이 됐다. 평민들은 여름에는 홑겹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봄과 가을에는 두 겹이나 세 겹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었다. 겨울에는 옷 속에 솜을 넣어 입었다. 무명옷은 이전의 옷에 비해 훨씬 따뜻해서 웬만한 추위에도 견딜 수 있었다. 면화는 옷을 만드는 원료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면화로 만든 옷감은 세금을 납부하거나 물건을 매매하는 데 이용됐다. 쌀, 돈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주요 수단이었던 것이다. 

농가에서는 농사일이 없을 때 부업으로 면화로 옷감을 짰다. 조선 후기 들어 면화로 옷감을 짜는 수공업은 농촌사회에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외국산 면제품이 들어오자 국내 농촌의 면직업과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일제 통치시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면화도 우리나라 재래종에서 방직공업에 적합한 서양의 대륙면으로 바뀌어 갔다. 1930년대 일제는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일본의 병참기지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공업 원료 증산정책으로 남면북양정책을 폈다. 남쪽에서는 면화의 생산을 늘려 면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북쪽에서는 양을 키워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들어옴에 따라 무명옷은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불에 사용되던 솜도 나일론 계통인 가볍고 따뜻한 캐시밀론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다가 나일론 옷이 몸에 해롭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면화를 원료로 하는 제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10 곡성군 검면 목화체험장      신문기사

                                 

솜뭉치 톡 톡‥포근한 추억 만들기곡성에서 부르는  ‘그 옛날 목화밭~’ 아침 저녁으로 추위가 제법 느껴지는 때다. 따뜻한 솜이불이 그리워진다면, 여행길에 곡성군 겸면의 푸근한 솜밭에 들러볼 만하다. 지금 목화 열매가 입을 쩍 벌려 솜뭉치들을 토해내고 있는 목화밭이 3000여평이나 펼쳐져 있다.

문익점이 들여와 재배한 이래 목화는 의류·이불류 등의 재료로 쓰이며 우리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광복 무렵까지도 전국에서 목화가 재배됐지만, 화학섬유 도입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요즘엔 목화 재배농가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는 아시아면이었고, 20세기 초반엔 일본에서 육지면이 도입돼 경기도 이남에서 주로 재배됐다.
곡성 겸면에선 이 육지면을 대량으로 심어 사라져가는 ‘추억의 목화밭’을 재현해 놓았다. 지난해까지는 겸면천변에 목화길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올해엔 아예 6000여평 터에 ‘겸면 목화공원’을 조성하고 이중 3000여평에 목화밭과 산책길, 원두막 등을 마련했다. 나머지 3000평엔 귀리·기장·갓끈동부·수세미 등 25종의 작물을 심은 희귀농작물단지와 금낭화·매발톱꽃·벌개미취 등 35종의 풀꽃을 가꾼 야생화단지를 들여 농촌생활의 추억거리를 고루 갖췄다.
지금 겸면 목화밭으로 가면 열매(다래)가 한창 부풀어올라 입에 거품같은 솜뭉치를 물고 있는 목화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여름부터 시작된 개화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부풀어터진 목화 솜꽃뿐 아니라 갓피어난 노란빛깔의 꽃과 수정이 돼 색이 변한 보라빛 꽃, 그리고 열매를 맺은 다래 따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11월 초까지 목화 수확을 미루고 관광객을 맞을 예정이다.

 



11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박노해(시인)


꽃은 단 한 번 핀다는 데

꽃 시절이 험해서

채 피지 못하는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한 생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 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 몸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 피워가는 꽃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슬프도록 환한 목화 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세상이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앙상히 뼈마디로 메말라가며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그대 따스하라



12 열 알의 목화씨(독후감)

서울 수유초등학교  5의4 권주희

고려의 충신,문익점!
햇살 한줄기 따깝게 비추는 여름,시원한 옷을 입고,선풍기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여름을 보내는 요즘과는 다르게 좋지 않은 옷을 입으며 여름을 보냈던 옛날이 궁금해 옷감의 변화를 가져왔던 문익점 선생님의 위인전을 읽어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으셨던 문익점 선생님께서는 충숙왕 16년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때만해도 고려가 원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왜 우리 나라는 많은 세월을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는지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문익점 선생님께서는 어렸을때부터 효자였다고 한다. 위인전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거의 효자였는데 생각해보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런 마음도 들었다. 앞으로는 꼭 잘해드려야지…
  또한 문익점 선생님은 과묵하고,착한 성품으로 집안일도 잘하고,공부도 잘하여 31세 때 과거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나섰고,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드디어 목화씨를 가져오시나보다!’하는 생각에 숨을 죽이고 아주아주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도망을 간 취유의 모함으로 귀양을 가시게 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이익을 나라의 이익보다 중요시 여겨 나라의 충신을 귀양보내다니…  거기에다 원나라 황제는 자기의 부하 혹은 자기 나라의 신하도 아닌데,왜 다른 나라 신하를 귀양보내는지 억울하기만 했다. 자기 나라는 부패하고 자신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다니 지도자로서 알맞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원나라 황제가 작은 나라라 해서 한 나라의 신하를 그렇게 대하니 왕으로써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목화씨 15알을 붓두껍 속에 넣어 아슬아슬하게 국경을 빠져나와 우리 나라의 옷감을 한층 더 좋게 발전시키고, 원나라 스님으로 인해 무명철을 짜는 일까지 이루신 문익점 선생님이 정말 자랑스러워마음이 뿌듯했다.
  이글을 읽는 동안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문익점 선생님의 지혜에 감탄하고,나라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벼슬에 미련이 없고,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백성만을 생각하는 강직한 성격을 가진 효자 문익점 선생님을 보며 오늘날의 정치가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13. 대구에 거는 희망

대구에 거는 희망

이호림(도서출판 인간과자연사 발행인)

우리는 누구도 더 이상 타인일 수 없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눈은 지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눈이 냉혹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주체의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첫머리부터 ‘타인의 눈’을 언급한 이유는 대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필자 자신의 자의식 탓일 것이다. 필자는 서울사람이면서도 대구에 자주 드나들면서 대구에 대해 이미 남다른 애정을 느끼고 있기에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이웃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출판사 관계 등의 일로 대구 시민들을 많이 접촉하면서 서울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과는 다른 대구인들 만의 정서적 공감대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에 역사적 기여를 한 것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그들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색평론」의 새 문화 심기


그러나 필자 역시 얼마간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출판인이기에 “대구를 보면 녹색평론사만 보인다”(박광숙)는 조금은 과장된 표현조차도 무엇에 앞서 출판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95퍼센트 이상의 출판사들이 상업적 편의를 위해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데, 녹색평론사는 대구에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생태환경과 관련된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출판사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출판사가 대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 이익과 무관한 잡지(녹색평론)를 86호까지 내놓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이 출판사는 뜻 깊은 단행본들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예컨대 ‘오래된 미래’는 성자들의 나라 티베트의 생활방식을 통해 세계화에 따른 개발지상주의의 반작용과 그 폐해를 되돌아보게 했다. 이처럼 녹색평론사는 중앙의 문화독식과 편식증에서 벗어나 척박했던 지방문화를 일깨우면서, 양질의 문화를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통의 대구답게 피어나고 있는 이러한 희망의 싹들을 돌이켜보면서 필자는 대구 시민들에게 의견 삼아 몇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요즘 대구 문화의 허파 구실을 해온 ‘(주)제일서적’이 빈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괴로운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제일서적’은 지금 36년여의 소중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활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난관은 경제적 불황과 관련된 도서 구입 감소,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 등의 지역진출, 전자매체를 통한 값싼 오락물 등의 범람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외적 요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제일서적’의 안이한 경영과 독자관리의 부실도 이러한 화를 자초한 요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일서적의 현재의 처지는 필자가 은연 중 이 지역에 대한 유감이 싹트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하다. 대구의 문화가 피폐해지다 못해 이제는 불모에 가까운 도시가 되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의 발전은 해당 지역에 뿌리내린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이 얼마나 건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며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문화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지속성은 그 자체로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문화를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이는 문화의 산업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에 더없이 중요하다.


지역에 만연한 불합리를 거둬들이자


이런 점에서 필자는 대구 시민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어떤 상태인지 늘 궁금했다. 필자가 돌아본 대구 시내 중심부는 서울 못지않게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해묵은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이 가운데 늘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정치 이야기인데, 사안을 조리 있게 파고들기보다는 모든 잘못은 상대에게만 있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필자 나름의 결론은, 대구 시민들의 정치적 염원과는 사뭇 다르게 지역이 얻은 실질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토해내는 불만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옛 정치권력에 대한 향수와 만성적인 심리적 의존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민정서를 쉽게 알 수 있는 곳은 대중교통과 대중음식점 등이다. 필자가 대구를 6개월 여 드나든 기간 동안 이용했던 대중교통은 철도와 고속버스였다. 철도는 국가 기간산업인 동시에 국민을 위한 서비스 업종이다. 그렇다면 대구 시민과 외지인들을 위해서 현재 시설을 현대화시킨 대구역에 KTX를 정차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필자가 대구를 드나들 때마다 아쉽게 느끼는 대목이다. 서울역이나 대전역, 부산역을 기억하는 방문자라면, 지금의 동대구역을 빠져나올 때 느끼게 되는 다소의 황량함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다. 대구시민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외지인은 긴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 역 출구를 막 벗어났을 때는 그 도시 특유의 정서와 힘을 감회와 함께 느끼고자 한다. 지역을 맡아 행정하시는 분들은 이와 같은 점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자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홍보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속버스에 대해서도 다른 도시와는 다른 어색함이 느껴진다. 시내 노선버스와는 분명 다르므로 고속도로 인근에 터미널을 갖추고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가고자 하는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서울이 그렇고 부산 등 다른 도시들도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다. 그런데 대구의 고속버스 운영 실태는 어떠한가? 고속버스가 이웃해 있는 동대구 인터체인지로 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동대구 터미널에서 일단 출발하면 서부 정류장으로 가서 손님을 한 차례 더 태우고 서대구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얼핏 보면 지역민에 대한 편의를 고려한 듯하지만, 지하철이 개통되기 전과 후는 다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도시를 관할하는 대구시의 전근대적이며 소아병적 불합리 행정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대구 북부 지역에 한해서는 서대구 터미널을 이용하는 것이 고속도로 진입 등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또 하나 내세우는 이유이지만, 이것도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할  고속버스의 일차적 기능을 무시한 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교통 체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대도시의 도심을 30여 분 이상 지체시켜가며 관통해도 되는 것인지 즈음에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관계자에게서 이 불합리한 처사가 지역 국회의원의 공약 사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를 듣고 필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구 시정(市政)은 어디로 간 것이며, 이는 지역이기주의에 개인이기주의가 더해진 대구 지역만이 갖는 불합리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무기력증과 그에 따른 거칠음


방문자들은 대중음식점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상한 광경에 부딪치게 된다. 주문한 밥과 반찬들이 쟁반에 담긴 그대로인 채 식탁에 놓여진다. 대구의 식당들 가운데 열에 여섯, 일곱은 이런 식으로 손님을 대접한다. 그런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셀프서비스나 쉬운 상차림 등으로 보아 고개 끄덕이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요즘 이 지역에 알게 모르게 만연되어 있는 총체적 불만과 착종된 사회적 무기력증이 그런 식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제나 근본과 도리를 따질 줄 아는 대구 사람들이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보이는 그런 모습은 예의는 고사하고 성의 없는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방문자들은 그것을 불친절로 여기고 당연히 모욕감으로 느끼거나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각 나라와 지역들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래서 방문자들에게 자기네의 고유풍속을 있는 그대로 정성과 친절을 다해 보여준다. 우리가 문화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대접을 받았을 때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만 보아도, 예전의 대구는 분명히 그들 나름의 삶의 기품과 예의가 남달랐다.

필자가 대구에서 겪은 불합리한 현상과 이상한 광경을 먼저 이야기한 것도 대구의 전통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 데에서 비롯된 반사 심리일 수도 있다. 대구에 불어 닥친 이 같은 달갑지 않은 변화의 바람에는 분명히 어떤 원인이 있을 터이고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언젠가부터 싹터온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를 일소하고, 대구 지역 특유의 품격과 가치를 복원시키는 일이 무엇에 앞서 시급하다.


문익점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을 기리자!


대구가 속해 있는 영남지방은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본산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중심이 되어온 곳이다. 특히 대구는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의 중심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이 꽃핀 곳이다. 이런 점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을 만한 역사적 인물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이 아닐까 싶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익점 선생은 최초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하신 분이다. 목화는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특히 대구 시민들은 그분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대구 경제가 제일 좋았던 시절이 언제쯤이었고, 그 때의 중심 경제재는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대구에 있는 동안 문익점 선생과 섬유공업도시와의 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대구시민의 모습은 지역에 실사구시 정신을 일깨우고, 경제적 바탕을 마련해준 분에대한 도리가 아니며, 지금까지 대구시차원의 기려드리는 제전 하나 없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은인에 대한 배은망덕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또한 대구시민들의 근본을 놓고 볼 때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섬유산업도시로 입지를 굳힌 대구는 지금 패션의 중심지로 도약하려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문익점 선생과 목화, 그리고 대구의 섬유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인조섬유가 범람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자연섬유’라는 점에서 목화가 차지하는 상징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국내에서는 섬유산업을 낙후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편견에 불과하다. 세상이 아무리 IT산업 등 첨단산업의 고부가 가치를 선호한다고는 해도 섬유산업에 기초한 패션산업이 죽었다거나 줄어들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인간은 의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섬유산업은 대한민국 판 산업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산업적 입지를 최초로 닦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구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본산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은 삼성그룹도 ‘삼성전자’ 이전에 ‘제일모직’과 ‘제일합섬’ 등을 바탕으로 오늘의 입지를 굳혔다. 삼성그룹의 ‘제일합섬’과 마산의 ‘한일합섬’ 등이 1977년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을 당시의 주역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국가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은 영남지방, 그중에도 대구의 섬유산업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의 IT산업 등으로 성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익점 선생은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먼 기원 속에 홀로 우뚝하신 분이다. 이런 점에서 문익점 선생의 탄생지이자 최초의 목화시배지인 경남 산청 지방의 지역민과 이를 산업으로 일군 대구시민들은 자부심을 한껏 누려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대구는 국내 세 번째 큰 도시로서 자부심을 누려도 좋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무력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통계로 보면, 이 지역의 다양한 산업들은 명목상의 나열일 뿐 경제적 동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인근에서 발전한 구미에 비해서도 저만치 뒤떨어져 있다.

2005년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구미는 국내 총 수출고의 10퍼센트 이상인 3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시 차원의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는 같은 기간 내 34억 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기초 경제단위의 희망수치가 한자리 수 미만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다가는 지방화 시대의 재정 자립도는 고사하고 현 대구시의 원대한 청사진과도 크게 다르게, 중앙정부에 의존하여 꾀죄죄한 시정을 펼칠 수밖에 없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무력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필자는 한마디로 대구 시민들이 시민 모두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야심만을 앞세운 몇몇 분들의 허황됨과 급조된 정치논리에 현혹되고, 이에 휩쓸리게 되다보니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이 주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 까닭에 70년대 우리나라와 대구의 경제를 선도하며 경제개발의 과실을 맛보게 했던 섬유공업을, 이후 적절한 연구와 개발을 제때에 할 수 없었던 잘못된 환경이 급기야는 섬유산업을 사양 산업으로 전락시킨 결과가 되지 않았는가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감히 한 말씀 더 드리고자 한다. 이즘 대하는 대구 시민은 내면적 실체보다는 외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유구한 전통에서 쌓여진 지역의 근본은 제쳐두고 필요 이상으로 패거리 현실정치에 민감하다 보니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역민 특유의 화끈함이 긍정적 에너지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근래 대구에는 이상하게도 여러 유형의 대형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한때는 돌이키고 싶지도 않은 최대의 지하철 참사도 겪었다. 그때 우리 국민은 대구 시민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서민들의 생활 터전인 서문시장이 화재로 인해 참담한 몰골을 드러내 놓고 있다.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중앙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이 시급히 세워져야겠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지역안정이나 시민들의 정서에 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민심이 불안해지다보니 말씨와 행동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대구는 전통적 대도시답지 않게 치부가 계속 불거지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의 불상사는 용납될 수 없기에, 하루속히 그 근본원인을 찾아내서 사전에 예방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문익점 선생의 나라사랑이 왜 서울이나 광주, 부산이 아닌 이 대구 지역에서 싹터서 한국경제의 텃밭을 일구어내게 되었는지, 이차에 대구시민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구 시민은 이 텃밭의 경제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절절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재도약의 계기가 발견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정치권력에 대한 관심은 잠시 접어두고 지역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지역 경제를 살려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동안 이 지역 민심을 토대로 정치적으로 득세한 분들의 처세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다는 정치 명분을 내세웠지만 애쓴 것과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지역사회 전반을 끝 간대 없이 추락시켜 놓았다. 대구지역이 면면히 쌓아온 올곧은 전통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은 것이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즉흥적이거나 어설프게 다루면 후에는 후유증이 거세게 돋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후유증의 무거운 짐은 지역을 지키게 마련인 지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마련이다. 현재 우리 모두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모든 책임을 밖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먼저 지역의 기존 정치인들과 이에 편승해왔던 또 다른 분들의 자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역민들은 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대구의 경제가 더없이 어려운 이때,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전통에 뿌리내린 대구만의 정신을 되찾자


지금도 늦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대구가 소중히 지켜온 전통적 가치를 복원시켜야 한다. 문익점 선생을 이 지역의 실사구시 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무미건조하고 책임감을 결여한 정치과잉 등의 들뜬 정서를 타파하고, 널리 퍼져 있는 패배주의적 치기와 자학적 불신을 거둬들여야 한다. 문익점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함께 민족 자주사상 운동의 상징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을 대구의 양대 정신으로 삼아 이를 대구만이 지닌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체험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공간, 즉 ‘섬유박물관’이나 ‘문익점기념관’ 등의 문화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와 함께 섬유산업의 연구와 개발을 통한 재건 의지를 종횡으로 다지고, 이를 발전시켜 나갈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면, 머지않아 대구와 대구 시민에게 잠재되어 있는 특유의 열정은 활기차게 되살아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구는 밀라노 못지않은 세계적인 섬유산업과 패션의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산업발전과 대구의 섬유산업이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새삼 깊이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 지역이 담당했던 선도적 역할을 너끈하게 인정하고 지원 방안을 충분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선은 지역의 자존심을 지켜 주어야 한다. 다음은 섬유공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특별 예산을 편성하여 육성하는 일이다.

정부는 7년여 년 전 대구시가 시민의 염원을 담아 기획했던 ‘밀라노 프로젝트’를 지역만의 관심사로 방치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실천과제로 삼아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향후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지금의 IT산업, 기계 산업 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서는 세계적으로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주를 우선으로 하는 전통산업이 필요하며, 바로 여기에 안성맞춤인 것이 섬유산업인 것이다.

정부는 대도시 대구가 경제적으로 슬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에 미치는 악 영향이 어떤 것일지에 대하여서도 심사숙고하고 이를 조기에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에 관한 한 대구는 결코 변방이 될 수 없음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삼성그룹은 “밀라노 프로젝트‘에 동참해야 한다


삼성그룹은 이 지역에서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지역경제를 북돋우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것은 ‘밀라노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계열기업을 지역에 진출시키는 일이다.
밀라노의 섬유산업 성장 역사는 올해로 900여 년에 이르며 발전해 왔다. 대구의 섬유산업 성장 역사 또한 머지않아 700년에 이르게 된다. 삼성그룹은 대구에서 ‘삼성상회(삼성물산)’로 출발하여 섬유 전문 업체인 ‘제일모직’, ‘제일합섬’ 등을 세웠고 1970년 대 전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전폭적인 혜택을 입었다. 즉 대구 섬유산업의 발전역사는 곧 삼성그룹이 오늘의 터전을 일군 성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섬유산업이 명맥을 이어가며 발전을 거듭하려면 정부와 대구 시 그리고 삼성그룹 3자 간의 특별한 협력이 따로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일수록 연고하는 지역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섬유산업에 관한 한 밀라노 같은 역사적인 도시의 후광이 기업 활동의 신뢰기반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와 같은 도시의 전통은 한나라의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해진다면, 우선은 이 지역의 전통적 기풍이 회복되고 그간의 허망한 삶과 불안정한 정서도 극복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바탕 위에서 대구의 경제와 문화는 다시 한 번 날개를 펼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대구를 통하여 비로소 문익점 선생님의 목화씨앗 도래와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대구 경제가 살아야만 대한민국의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다.


대구를 상징하는 꽃은 목화여야 하는 것을

아울러 지역을 상징하는 꽃도 눈부시게 피었다가 맥없이 뚝뚝 떨어져버리는 지금의 목련이 아니라 목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선정 기준이 단순히 꽂이 예뻐서가 아니라 지역과 상관하여 역사성 등에서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먼저여야 하기 때문이다. 목화는 꽃도 볼 만할뿐더러 산업에 대한 상징성에서도 이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영조 때,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비로 책봉된 것도 그런 까닭에 연유했다.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 하는 영조의 물음에 목화를 좋아한다고 대답한 혜경궁 홍씨는 “왜 좋아하느냐”고 재차 묻는 임금님께 “꽃도 완상할 만하고 백성들의 의복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목화에 대한 생각, 백성에 대한 생각, 이는 오늘날 대구에서도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대구 시민의 안식처이자 문화공간인 ‘제일서적’이 살아나는 데에 대구 시민의 몫이 크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대구 시민 여러분은 서점이야말로 해당지역의 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 그리고 서점과 그에 따른 공간은 소유관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대구 시민 모두의 자산이요 힘이라는 사실을 헤아려주시기 바란다.

그것이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향토서점이라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서점이 즐비했던 지난날의 중앙로와 동성로는 이제는 빈자의 거리로 내몰려 허전한 거리가 되고 말았다. 마치 그 모습이 오늘 대구의 총체적인 실상을 보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문익점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과 영남지역의 위대한 문화적 전통과 자주독립정신이 대구에서부터 되살아나 대한민국 전체로 힘차게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대구와 대구 시민들의 발전과 행복을 빈다. <끝>

 



14 햇 솜

     햇 솜

                             김여화

오후 내내 햇솜을 얻기 위해 미영 씨를 까발리느라고 손톱이 아팠다. 근년에 들어서 귀하디귀한 이 목화, 혹은 솜꽃, 우리 동네서는 미영이라고 하는 솜꽃을 따 와 솜에서 씨를 분리하는 특별한 행운을 얻었다.

어린 시절 시암골에 가면 골짜기 사래 긴 밭은 해마다 목화를 심었다. 물론 우리 밭은 아니지만 밭근처에 외할머니 산소가 있기에 그 골짜기는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할머니의 유언이 외손자들 보고 싶으니 날마다 보내라고 하셨던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시암골에 놀러가기를 즐겼다. 거기에 가면 꾸지뽕 열매라든가 겨울에도 고염이나 돌감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봄이면 칡순이나, 찔래순이 자라서 우리들의 주전부리가 많았던 탓도 있다.


목화는 그 잎이 넓고 꽃잎도 크다. 연한 빛의 노란 꽃이 수정이 되면 보라색이나 분홍으로 변한다고 들었다. 꽃이 지고나면 맺히는 것이 다래인데 이 다래가 영글어 이런 가을쯤이면 저절로 갈라져서 흰 솜을 물고 있는 것이다. 열매가 삭과이기 때문에 자연 벌어지는 탓이다. 아욱과라해서 그런지 이파리도 거의 아욱 잎과 비슷한데 예전에는 목화를 소중히 여겨서 다래를 따 먹는걸 막기 위해 밭에서 지키기도 하였다. 열이 한 도둑을 못 지킨다 했듯이 우리는 곧잘 이 다래를 따먹기 위해 시암골을 찾곤 했다.


   거의 잊혀졌던 목화를 본 것은 10여 년 전 순천 낙안읍성에서 음식축제가 처음으로 열리던 때다. 그곳 초가집 울 가에 목화가 피어있고 서숙 등이 어린 시절 보았던 고향동네마냥 익어가던 가을날이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우리 손으로 목화를 심기는 사십 여 년 전이니 요즘에야 누가 목화를 심어 딸 시집보낸다고 애지중지 하는 이 없다. 오히려 근년에는 목화를 잊혀지는 옛 고향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관상용으로 가꾸는 자치단체가 생겨났다. 우리 동네도 예외는 아니다. 그곳 면장님이 타 군에 가서 어렵게 목화씨를 구해 와서 면내에 도로주변 화단에 모종을 심고 가정에 나누어 주어서 올해 첫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면사무소 근처에는 잘 가꾸어져 실하게 자라고 다래도 크고 따라서 하얀 솜이 크게 벌어 있었지만 메마른 산길 도로가에 심은 것은 비료를 주지 않아서 아주 매 말라 겨우 한두 개의 다래를 달고 겨우 하나 둘씩 솜꽃을 피웠다. 서리가 온 요즘에도 아직 덜 익은 다래가 붙어있는가 하면 오래전에 피어 솜이 빠져 있는 것도 더러 있다. 씨를 구하기 위해 주머니에 따다가 사무실서 미영 씨를 발기는데 그게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제법 손톱이 아플 정도로 말이다. 마흔 살 정도의 사람에게 다래를 보여주며 아느냐고 했더니 어릴 적에 따먹었노라고 대답했는데 하지만 이제 서른 정도의 사람들은 다래가 뭔가요? 미영이요? 목화? 반문하기에 설명해 주는 것을 포기했다.


   지난여름 장마가 끝나고 시집올 때 해왔던 목화솜 이불을 뜯어 세탁기에 돌렸다. 예전부터 솜을 빨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30년 만에 빠는 이불솜은 많이 때가 끼었다. 그래도 세탁기가 저절로 빨아주니 예전보다는 얼마나 쉬운가? 겨울에 틈나면 솜을 틀기위해 다 말려서 싸매 두었다. 솜을 뜯어보니 요로 사용했던 건 아이들 키울 때 더러 오줌을 쌌기 때문에 제빛이 아니지만 덮는 이불은 빨아 말리니 햇솜처럼 뽀얀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친정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면서 이불솜을 넣을 때 요는 가운데 조금 값이 헐한 솜을 넣어서 늘 그게 마음이 아팠노라고 하셨는데 과연 빨아보니 다르긴 다르다.


   요 솜은 여러 차례 빨았지만 뽀얗게 되질 않는 것이다. 오늘 도로가에 가서 목화씨를 받기위해 몇 송이 주머니에 따가지고 들어와 씨를 발기는데 그것이 쉽질 않다.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가져온 문익점 선생은 붓두껍에 숨겨 가져오셨다는데   예전 같으면 씨아로 돌리면 금세 하련만 씨아가 있을 리 만무다. 면사무소도 씨를 받기위해 진작 목화를 딴 걸로 알지만 너무 적은 이걸 가지고 씨아를 빌리러 갈 수 도 없다. 몇 시간 동안 씨를 발기는데 미영씨알이 제법 많다. 한 송이는 사각으로 터져 각마다 조각이 네 개가 있고 하나마다 씨는 다섯 개씩 그것도 거의 같은 형태로 씨가 박혀있다. 그러니 한 송이에 씨가 스무 개씩 든 셈이다. 작은 방석 한 개 쯤의 솜이 모이고 씨는 한 움큼이 된다. 까만빛의 씨는 마치 쥐똥 같기도 하고 기름을 짜면 면실유가 될 것이다. 그 햇솜은 만져보니 지난번 빨았던 이불솜처럼 뽀얗고 부드럽다. 여러 사람이 햇솜을 만져보며 신기해하는데 문득 어린 시절 이 목화를 씨아로 돌려 씨를 빼내고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활시위로 튕기던 어른들 생각이 난다.


    물레질을 하고 솜에서 무명실을 빼던 할머니는 생각나지만 어떻게 했던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씨를 빼고 그 솜을 놓고 활시위를 통통 튕기면 솜은 요즘의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참으로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일이다.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활시위를 튕기고 나면 더불어 머리에 솜을 하얗게 이고 계셨다. 한 송이를 펴서 부풀리면 제법 커다란 솜뭉치가 되는데 햇솜은 참 귀히 여기던 것이다. 과년한 딸을 둔 집에서는 목화를 심고 햇솜을 장만하여 둥실둥실 커다란 뭉텅이로 두었다가 혼인날이 잡히면 동네사람들을 불러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이불을 만들며 덕담을 하던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햇솜은 가볍고 보드랍기는 물론 그 빛도 희다. 볼에 닿으면 포근함이 더없이 고왔다.


   목화밭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곳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에 나처럼 다래를 따먹다가 들켜 혼났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목화에 얽힌 사연은 많다. 목화는 나무도 있다지만 우리가 심는 것은 거의 한해살이풀로 꽃이 접시꽃이나 무궁화처럼 생긴 것도 탐스럽고 꽃받침이 세 개가 있어 분홍빛을 내고 꽃은 희지만 노란빛에 가깝게 피었다가 보라색 또는 분홍색이 되어 진 다음 파란 다래가 달린다. 들척지근한 그 맛은 생과일이 흔치않던 시절에 참으로 좋았다. 다래는 쇨수록 솜이 되어가기 때문에 질기다. 그러기에 연한 것만 골라서 따야했다. 다래를 따내면 그만큼 솜이 적어지니 자연 어른들은 지청구를 하셨다. 다래를 먹으면 말하자면 솜을 먹게 되는 것이다. 햇솜의 보드라운 감촉만큼이나 떫으면서도 달던 다래맛, 내년에는 내 집 울 가에 심어 바라보아야겠다. 목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햇솜을 만들어 쿠션 좋은 방석도 만들어야지…….


   빨아두었던 솜을 틀면 그것도 햇솜처럼 깨끗하고 보드라운데 이제는 내가 늙을 때까지 햇솜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는 누가 그 솜을 간직해 주려는지.



      15 목화[木花]                           

                      목화[木花]

                                               문학철


하늘에는 목화송이 같은 구름덩이 점점이 희고

교정 화단엔 꼿꼿이 허리 세운 일곱 그루 목화

굵지 않은 줄기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도타운 잎

꽃 피어날 자리마다 불꽃같은 잎사귀 세장이

피어날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다가 다섯 잎 꽃잎을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풀어낸다.


풀려나온 노란색 분홍색 꽃잎사귀 속에는

꽃술이 노란방망이로 솟아 있다.

큰누님 시집가기 두어 해 전부터 이불솜 할 거라고 

밭 한 자락에 목화 심어 가꾸시던 아버지

목화 다래 따서 단물 빨아먹고 버린 것 보시고

혼을 내시더니 그 누님 시집가서 셋째가 대학 2학년

아버지 가신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목화 다래를 지금도 따서 씹어보면

달짝지근하던 옛날의 단물이 입안에 돌까 

이제는 화단에서 화초로만 자라는 목화

그래도 목화는 꽃 지우고 다래 키우고

다시 꽃피워 하얗게 눈부신 솜꽃 피워낸다.


저 솜꽃 거두어 씨받아 작은 텃밭 가득 피워내어

목화 다래 따서 단물 삼키면

아버지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

노란 목화꽃이 갑자기 흐릿해져 눈 들어 하늘 보니

가득하던 목화송이가 엷은 이불솜처럼 퍼진다.



16 목화다래가 먹고 싶은 이유

목화다래가 먹고 싶은 이유

                                         소설가 문순태


지난겨울 척수종양수술을 받고 나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누워 있을 때 뜬금없이 다래가 먹고 싶었다. 배고팠던 유년시절 목화밭에서 어른들 몰래 따 먹었던 다래가 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지금가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배고팠던 시절의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열한 살 때 6.25를 만난 나는 누구보다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궁핍의 그 시절, 배가 고팠던 아이들에게 다래는 가장 맛있는 간식거리였다. 가을걷이 전, 산에는 오디, 구지뽕 열매, 머루, 으름, 산다래, 딸기 등이 익고 있었지만 아이들로서는 산에 오르는 일이 쉽지가 않아, 목화밭으로 숨어들곤 했다. 목화밭에서는 실컷 다래를 따 먹을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밭고랑에 저절로 열린 주먹만 한 개똥참외도 차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목화를 재배했다. 초가을이면 밭에 우북하게 눈이 쌓인 것처럼 목화가 하얗게 피어 온통 순백의 세상을 이루었다. 목화는 단풍이 들 무렵 백색이나 담황색 혹은 홍색으로 피지만 우리 마을에서 재배한 것은 모두가 흰 꽃을 피웠다.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흰 꽃이 지면 다래가 열리고 그것이 익으면 스스로 찢어지고 벌어져, 다시 흰 목화송이가 꽃처럼 피어나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목화 다래는 꽃이 지고 나서 갓 맺은 열매다. 그 맛은 육질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으며 달큼하고 상큼하다. 너무 익은 다래는 수분이 없고 섬유질로 가득 차 솜 씹는 것과 같다. 특별히 주전부리할 것이 없는 터라, 아이들은 즐겨 덜 익은 목화 다래를 따 먹곤 했다. 다래를 여남은 개 따 먹고 나서 샘물을 퍼마시면 한바탕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제법 요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극성스럽게 다래를 따 먹는 바람에 목화농사를 걱정한 어른들은 “다래를 따 먹으면 문둥이가 된다.”면서 한사코 말렸다. 나는 어느 날 학교에 갔다 도시락도 못 먹고 허기져서 털레털레 돌아오다가 비석거리 참봉네 목화밭에 들어가 실컷 다래를 따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른들 말처럼 정말 내가 문둥이가 되면 어쩌나 하고 잠을 못 이룬 채 콩닥거리는 가슴 부여안고 끙끙댔던 적이 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나서도 다래가 먹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케이크며 바나나 등 아무리 맛있는 것을 다 먹어 봐도 자꾸만 꿈틀거리는 기억속의 그 상큼한 다래 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서부터 굶주렸던 시절에 먹었던 입맛이 되살아나면서 그것들이 다시 먹고 싶어진다. 찔레도 꺽어 먹고 싶고 송기도 벗겨 먹고 싶다.


앞으로 나는 목화 다래 같은 소설을 쓰고자 한다.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바나나, 머스크멜론, 망고, 파파야 같은 과일보다는 본디 우리 땅에서 열매 맺은 토종 과일의 맛을 느끼고 싶다. 머루, 다래, 으름, 오디, 산딸기 같은 열매 맛을 통해 궁핍했던 고통의 세월과 가물가물한 무채색의 추억을 꼼꼼히 되작거려보고 싶다. 아직도 이 땅의 산에는 우리가 굶주렸을 때 즐겨 따 먹었던 산열매들이 찢어지게 열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별로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무 배가 부르고 입맛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면서도 담박(淡泊)한 옛 맛을 통해, 자꾸 희미해져가는 내 삶의 근원을 찾아가려한다. 맛이 자극적인 외래 과일보다는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자리 잡은 토종 열매의 은근한 맛을 한껏 느끼며 변질되어버린 우리의 오롯한 본디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목화 다래를 배부르게 따 먹고 문둥이가 되면 어쩌나 하고 잠 못 이루었던 시절처럼 늘 불안하다. 분명 무엇을 잘못 먹었기 때문이리라.


        


            17 목화재배 선두주자 삼지강 협동농장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황해남도 재령군의 삼지강협동농장은 북한에서 목화재배로 유명한 농장이다.
7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시기 목화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공예작업반을 가진 단위는 전국적으로 여기밖에  없었다"며  삼지강협동농장의 올해 목화 생산목표는 1정보(3천평)당 1t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신문에 따르면 북한의 각지 협동농장은 최근 목화 솜에 대한 수요를 자체  해결하기 위해 재배 면적을 확대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본보기 단위'인  삼지강협동농장에는 미치지 못한다.이 농장은 몇 해 전까지 전국의 농장에 목화 종자를 보내줬으며 지금은  황해남도 농장에 종자를 공급하고 있다.
목화생산에 필요한 기술강습도 진행돼 각지에서 농장 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양순(40) 작업반장은 올해로 고(故) 김일성 주석과 그의 부인 김정숙,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농장을 방문한 지 60돌을 맞는다며 "정보당 1t 이상의 목화를 생산해 본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은 목화에서 천연 솜을 얻고 옷감 및 공업용 섬유로 널리 쓰일 뿐만 아니라 고급 종이, 기름, 사료용 찌꺼기까지 얻을 수 있다며 재배를 권장하고 있다.

          


          18 가도가도 한없는 목화꽃                 

가도가도 한없는 목화꽃

월간전라도닷컴

곡성군 겸면천 뚝방길

이 꽃이 목화 꽃 이란다!. "얼매나 반가운가 몰라, 얼매나 고마운가 몰라" 겸면천 제방길 따라 끝 모르게 이어진 목화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은 그 꽃 만나 반갑다는 말을 노래 가락 처럼 하신다. 

 "이 꽃을 어디서 볼 것이여. 인자 영 잊어뿐 줄 알았네" 그저 꽃 한 가지 다시 보게 된 흐뭇함만은 아닐 터이다. "꽃만 이쁘가니. 흑허니 솜이 달리믄 그것이 더 볼만허네."

 '목화' 하면 누구나 문익점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갔던 그이가  어렵사리 붓대롱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때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목화 몇 송이를 땄더라는 그 장면까지 실감나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오늘날로 치면 '국제종자스파이'인 셈이나 그의 공로는 훗날 조식이라는 선비로부터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받을 정도로 칭송되었다. '외유'중에도 그 나라 사람들 입성이 반반한 것을 보고는 헐벗은 백성을 생각한 공무원이니 그만한 치하를 들어 마땅한 일일 터이다.


종자만 들여왔다고 옷이 될 일인가. 재배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으나 3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 온 나라에 목화씨가 퍼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집념이다. 게다가 목화에서 씨를 없애고 실을 뽑는 것을 궁리하다 마침내 장인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나라 승려에게서 씨 빼는 '씨아'와 실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아내 베를 짤 수 있게 한 것도 그이의 공이라 한다.


혹은, 실을 뽑는 도구를 실제로 만든 사람은 사실 문익점이 아니라 그의 아들 문래여서 그 도구가  '물레'이고, 그 손자 문영이 베를 짜는 법을 고안해 내서 그 베가 '무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몸을 감싸는 옷이 돼 온 귀한 농작물이 바로 이 목화다. 그러나 목화는 1970년대 이후 값싼  수입 원면과 화학섬유에 밀려나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80년대 이후에는 목화밭을 구경하기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다.

 "옷만 해 입었가니. 이불 맨들어서 따숩게 덮기도 허고..." 딸 시집보낼 작정이 서면 밭귀퉁이에 꼭 심어 거뒀다는 그 '미영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덮다가도 투둑투둑 두들겨서 햇볕에 말리거나 다시 타 주면 새 솜처럼 보송보송 해지는, 요샛 사람들 좋아하는 '천연솜'이다.


 "이것을 또 묵기도 솔찬히 묵었네. '미영다래' 묵을라고 침께나 생켰제." 목화꽃 지고 나면서 달리는 게  다래다. '떨떠름허기도 하고 달큼허기도 한' 그 맛이 무어 그리 맛났을까만,  끼니 잇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눈으로 드는 호사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더 귀했을 법도 하다. 그 귀한 꽃길이 십리나 이어진다.

꽃을 머금은 불꽃 모양의 초록 이파리, 이제 막 피어난 하얀 꽃, 피어난 지 좀 지나 연분홍 꽃, 더 지난 건 진분홍 꽃, 시드는 빛마저 고운 자줏빛 꽃... 가도가도 한없이 계속되는 목화꽃길을 걷는다.  속으로 채곡채곡 덕을 품은 사람을 만나는 듯한 꽃길이다. 

이 꽃들 지면서  다래 달리고, 다시 거기에 하얀 솜꽃들 피어날 것이니 다시 찾아올 기약을 해보는 꽃길이다.




19 오페라 하우스 개관 기념작-목화

 

세계적인 섬유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며  대구시립오페라단에서는 개관기념작 ‘목화’(대본 김일영, 작곡 이영조) 연습이 한창이다. ‘목화’는 3막 2장의 창작 오페라인데 1999년 6월에 기초 자료 조사에 들어가 올해 3월에 작곡과 대본이 완료됐다. ‘목화’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 이야기를 소재로 해 섬유 도시인 대구가 밀라노와 같이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1막에는 이탈리아 밀라노를 배경으로 유학간 패션 디자이너 문추백이 등장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문익점 이야기를 떠올리며, 2막은 과거 원나라를 배경으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는 과정과 그 때문에 처형위기에 몰리나 그를 좋아했던 향아가 대신 처형당하며, 그녀가 후세에 추백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할 것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이뤄진다. 3막에는 밀라노에서 귀국한 문추백이 대구의 패션쇼 무대에서 패션디자이너로 각광받는 내용이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합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목화의 감독인 김완준 씨는 “개관기념 오페라 ‘목화’의 관람자는 관람 신청 접수를 받은 후 추첨해 초대할 것이다. 무료로 오페라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관람신청은 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며, 문의는 대구시립오페라단(전화 : 623-5859)으로 하면 된다. ‘목화’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첫 공연이며 8월 7, 8, 9일 1일 1회씩 공연될 예정이다.

안/무/의/도 : 대구에 사는 무용가로 언제부터인지 지역의 순원산업인 섬유와 연계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춤은 종합예술이다.  춤을 추는 무용수, 의상,음악, 조명, 무대미술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관객은 찬사를 보낸다.
의상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들은 천의 질감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무용가들에게 항상 무대배경으로, 소품으로 각광을 받아온 천이라는 소재느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그러나 이제 그것이 표현해야 할 중심이고 보면 오히려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막막한 감도 없지 않다.  진부하지 않게 천을 어떻게 표현 할 것이며,천이 생산되는 기계적인 장면을 인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작/품/줄/거/리   프롤로그 문익점을 생각함
목화 생산을 위해 목화씨를 뿌리기에 앞서, 농부들이 풍요를 바라는 제를 올리듯이 땅의 여신은 씨앗을 품을 준비를 한다. 여신은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씨앗을 품는 대지를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게 만든다. 문익점의 혼이 목화의 화신처럼 나타나고, 여신은 대지의 힘을 그에게로 옮겨 준다.

 

제1막 목화씨 뿌려지다.
목화의 화신은 온 땅에 기운을 돋우고, 목화 생산을 위해 문익점은 어렵게 구해온 씨를 뿌린다. 목화재배의 성공으로 백성들은 삶의 윤택함을 누린다. 그 자손들이 물레를 만들고, 기계 이용은 목화생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제2막 섬유의 닻을 올리다.
대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섬유공업을 시작하고, 그 발판은 서문시장의 부흥과 함께 섬유산업을 양말공장의 발달로 이어져, 섬유산업은 활기를 찾는다.  달구벌의 경제를 발달시키는 초석이 된 섬유는 그 산업의 부침으로 경제를 움직이지만여전히 희망으로 남는다.


제3막 밀라노 프로젝트로 희망을 갖다.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밀어닥친 경제의 한파는 그회생의 계기를 밀라노프로젝트에서 찾는다.  염색과 패션, 섬유에서 진일보한 산업계획은 달구벌의 꿈이다. 섬유산업의 메카로 다시 일어설 달구벌, 그 위용을 세계에 알려 보자.

 

   



20 전래동화

 

장차 왕자를 도와 나라를 잘 이끌 지혜로운 왕자비를 찾고 있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한 끝에 왕자비를 뽑게 되었습니다.   어여쁜 소녀들이 임금님 앞에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물었습니다.  "꽃 중에 어떤 꽃이 제일이라 생각하는고."   장미, 모란, 국화 등등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린 소녀가 목화꽃이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어린 소녀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목화는 예쁜 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무명을 주기 때문이옵니다."

임금님이 소녀들에게 두 번째 질문을 냈습니다.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인지 아느뇨."
역시 대답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장 어린 소녀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보릿고개라고 생각하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녀의 입에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오자 임금님은 정말 기뻤답니다.  보릿고개란 요즈음에는 없지만, 예전에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는 채 여물지 않아 굶주리던 사람이 많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를 냈습니다.  오, 이제 비가 덜 오는군. 모두들 궁궐 지붕의 기왓골이 몇 개인지 알아 오너라." 소녀들은 우르르 나가 세기 시작했지만 세다가 잊어버리고  또 다시 세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소녀는 임금님께 나아가  기왓골이 모두 백 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어떻게 그리 빨리 셀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네, 처마 밑의 기왓골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자국을 세어  보았나이다."  

이제 네 번째 문제입니다.  "저기 강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황소의 무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꼬? "
황소를 죽여서 고기를 달아 본다는 소녀, 큰 저울을 만든다는 소녀 등등 갖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임금님은 어린 소녀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배에 황소를 실어서 강물이 뱃전에 차오른 곳에 표를 한 후 황소를 내려 놓습니다."  "호오, 그래서." 
"배에 돌을 실어서 방금 표한 곳까지 물이 차오르도록 돌을 싣습니다.  그 돌의 무게가 황소의 무게가 될 것입니다."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며 어린 소녀를 왕자비로 택했습니다. 나중에 그 소녀는 훌륭한 왕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21 큰애기들의 목화 따는 노동요

'한 나무에 꽃이 두 번 피는 것이 뭔가?'
'열매 맺은 뒤에 꽃 피는 것이 무엇일까?'
'꽃 중에 제일 아름다운 꽃은 뭐지?'

이들 수수께끼의 답은 모두 목화이다. 꽃의 모양보다 따뜻한 입성과 솜이불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화이므로 목화가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목화나무에 꽃이 두 번 핀다는 말은 목화꽃과 함께 목화 자체도 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목화 열매가 달리기 전에 연분홍색 목화꽃이 핀 다음에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를 흔히 다래라고 한다. 다래가 단단하게 익으면 마침내 터져서 목화가 피는 것이다. 물론 이 목화는 꽃이 아니고 열매의 씨앗이다. 그러나 열매가 벌어져서 흰 무명이 꽃처럼 피어나므로 면화(棉花) 또는 목화(木花)라고 하며 한결같이 꽃으로 인식한다. 목화 따는 노래를 들어보자.

광 넓고 사래 진 밭에   목화 따는 저 큰 아가
목화는 내 따서 주마    나에 품에 잠들어라
잠들기는 어렵지 않소   목화 따기가 늦어가요


경남 진양 사는 이필수 아주머니 소리다. 10월이 되면 목화나무에 열린 다래가 무르익어서 알밤 터지듯이 하나 둘 터지면 목화 따는 일이 시작된다. 일은 힘들지 않으나 허리를 굽혀서 오랫동안 해야 하는 탓에 아주 지루하다. 노래처럼 폭도 넓고 이랑도 긴 밭에서 목화 따는 일은 더욱 따분하다. 목화 따 는 일은 으레 처녀들의 몫이다. 길 가던 총각이 목화를 따 줄 터이니 자기 품에 잠들어라고 유혹을 하자, 처녀는 잠들기 어렵지 않지만 목화 따는 일이 늦는다고 거절한다. 완곡하면서도 명분 있는 거절이다

사래 지고 장찬 밭에    목화 따는 저 처녀야    부이 부이 내 따 주까   송이 송이 내 따 주까
내사 싫소 내사 싫소    길로 가는 선비거든     길만 보고 갈 탓이지    내 집 물어 뭐하시오
내 집일라 오실라만     구름 서산 넘어서서     안개 서산 내 집이오


예천 사는 최수연 할머니 소리다. 이 노래에서는 '부이 부이' 내 따 주까 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목화는 꽃이나 다름없으므로 꽃을 헤아리듯 '송이 송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런데 '부이 부이'는 뭔 말일까. 삶은 감자가 타박해서 마치 분말가루가 일어나듯 하는 것을 두고 흔히 '부(분)이' 난다고 한다. 흰 빛을 내는 채색도 분이라고 한다. '부이 부이'도 이와 같이 목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흰 빛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이다. 최수연 할머니는 "목화를 따기 싫어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를 따 주겠다는 선비를 마다하며 '길 가는 선비거든 길 이나 가라'고 충고한다. 앞의 노래와 달리 목화를 따 주겠다고만 했지 자기 품에 잠들기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를 거절한다. 길가는 선비가 뜻 없이 공연히 목화를 따 줄 일이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따라서 꼭 찾아오려면 구름 서산 넘고 안개 서산 넘어서 자기 집으로 오란다. 구름 서산도 알 수 없는데 다시 안개 서산을 넘어서 오라니 그것은 이 세상 주소가 아니라 딴 세상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구름 서산이나 안개 서산에 길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길 가는 선비가 목화 따는 처녀를 넘보는 일은 곧 길 아닌 곳을 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시적인 은유라 할 수 있다.

 

하늘에다 목화 갈아   목화 따러 누랑 가꼬   
정생원네 맏딸애기    수영도령 둘이 감세


진양 사는 김상기 할머니 소리다. '하늘에 목화를 갈아 목화 따러 누구랑 갈까?' 마치 천상 선녀나 되는 듯 하다. 푸른 가을 하늘에 흰 목화가 핀 양상은 솜털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것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운 광경이다. 따라서 목화 따러 가는 일이 지루하고 따분한 일터에 가는 길이 아니라 즐거운 산책이자 발걸음도 가벼운 나들이 길이다. 그러므로 정생원의 맏딸애기는 목화 따러 누구랑 갈까 하고 헤아리다가 마침내 수영 도령과 둘이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수영 도령은 물론 평소에 사모하던 총각일 터이다. 그렇다면 목화 따러 가는 길이 가슴 설레는 데이트 코스나 다름없다.

빈터에는 목화 심어   송이송이 따낼 적에
좋은 송이 따로 모아   부모 의복 장만하고
서리 맞이 마구 따서   우리 몸에 놓아 입세


예천 사는 전성분 할머니 소리다. 목화 따는 일이 혼자 감당하는 따분한 노동인가 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님과 더불어 하는 꿈같은 나들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화 농사의 실상은 이처럼 두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분한 노동도 아니고 사랑하는 님과 데이트도 아니다. 목화가 입성을 장만하는 가장 긴요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중한 생업의 하나일 따름이다. 따라서 목화를 따는 마음도 다르다. 그저 이것저것 마구 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일찍 맺어 크게 벌어진 좋은 목화송이와, 제대로 여물기도 전에 서리를 맞아 채 벌어지지도 못한 목화송이를 분별해서 따고 가려서 모은다. 그래서 좋은 송이로 가려 낸 양질의 목화로는 부모님 의복을 장만해 드리고 서리맞이로 설익은 목화에서 따낸 질 낮은 목화로는 우리 옷에 놓아 입자고 한다. 목화는 무명실을 뽑는 원료이자 솜의 재료이기도 하다. 목화 따는 일을 고역이나 나들이와 같이 엉뚱하게 인식하지 않고 그 본질을 제대로 포착하여 분별 있게 하는 사람은 심성도 착하다. 목화를 어떻게 가려서 따고 가려 딴 목화를 누구의 입성으로 장만하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결코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