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간원

고간원(叩諫院) - 충숙공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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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


소재지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문화재분류

충남지방 문화재 제51호

배향선조

3세 충숙공 諱 극겸 

제향일

음력 10월 1일 11:00

충숙공 휘 극겸 선조님 유적지입니다. 충숙공 묘소는 남평문씨의 현존하는 묘소중 가장 오래된 묘소입니다. 충숙공은 중시조 경절공 휘 익(敬節公 諱 翼)의 손자로 왕께 충간하다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던중 유구에서 머무르시다 별세하신 이곳에 지었던 사당이 고간원입니다.
고간(叩諫-말을 끌여 당겨 멈추게 한다는 뜻)은 공의 충간이 백의 숙제의 고간한 충절에 비유하여 고간원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방과 연고가 없었지만 여러 책에 문 선생의 머물렀던 곳으로 기록되었고 묘소도 있어 공께서 유구역의 시로 유명해지니 이 인연으로 역(驛; 말관리와 방을 제공하는 국립여관)의 주변에 지형이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머무시며 청유(淸遊)를 즐겼을 것입니다.  
특히 마을 입구를 '원당모퉁이'라 부르고 근처의 논에서 기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곳은 흐르는 시냇물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산계정사(山溪精舍)의 멋을 누릴 수있는 곳이니 옛날 별장터였던 곳을 공께서 돌아가시자, 당시의 풍속을 따라 영정을 모셔 원당(院堂)으로 삼았고, 후에 지금의 자리로 고간원을 옮긴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간원은 사당이요 영당입니다. 그러므로 공께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효(孝)를 실천하였고,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니, 고간원은 충효사상(忠孝思想)과 보국안민(輪國安民)사상의 도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내판

충숙공 문극겸(忠肅公 文克謙) 선생 약사(略史) 안내판

선생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니 고려 의종 17년(1122) 전라도 남평현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인 공유(公裕)인데, 시호는 경정공(敬靖公)이시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백부인 공인(公仁)의 음덕으로 산정도감(刪定都監) 판관(判官)이 되셨다.
이 때 세 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관원으로서는 세 번밖에 볼 수 없는 과거제도를 고쳐 다섯 번까지 허용하도록 왕에게 주청하여 조정의 의논이 그 의견을 좇아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고, 선생 또한 37세 때 문과에 급제하셨다.
벼슬이 계속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오르자 합문(閤門)에 엎드려 조정의 내시와 점장이로 인한 정사의 폐해를 상소하였는데, 의종은 받아들이지 않아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시었다. 선생이 황주에서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하자 왕의 측근들이 이를 시기하여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다시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좌천시키려 했으나 강직한 신하를 지방관으로 연속 좌천시켜 언로(言路)를 막음은 옳지 않다는 간관(諫官)의 주청에 왕도 하는 수 없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제수하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던 날 선생께서는 전중성(殿中省)에서 숙직을 하다 난군들에게 붙잡혔으나 평소 높은 명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옥에 갇히셨다. 의종은 거제도로 쫓겨가면서 선생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한다.
명종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의 벼슬을 새로 제수할 때 선생을 옥에서 석방하고 비목(批目)을 쓰게 하였다. 우승선 어사증승(御史中丞)에 제수되자 무신들도 자연 공을 의지하고 믿으며 옛적의 사실을 많이 물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지추밀원주사(知樞密院副使)에 임명되고, 정3품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셨지만, 송유인(宋有仁)의 시기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로 좌천되시었다. 사공 벼슬이 제수된 뒤부터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렴함을 탄복하고 칭송하였다. 송유인의 모함은 근신(近臣)으로서 왕의 거동에 호종하지 않았다 함인데, 선생께서는 모친 상중이어서 자식된 도리를 우선으로 실천한 효자이셨다. 명종도 국법을 따른 것이라 문책을 망설였으나 선생께서 좌천되기를 자청하여 그대로 되시었다.
좌천되신 지 1년만에 다시 태자소사(太子少師)로서 예전 벼슬로 복직하고, 오래지 않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시었다. 명종 13년(1183) 왕은 명인전에 장경도량을 베풀어 의식을 거행하고 절구시를 한 수 지어 선생께 하사함에 그 시에 차운하셨는데 군신간(君臣間)의 정의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셨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을 때 추밀부사(樞密副使) 조원정(曺元正)이 중서성의 공해전 전세(田稅)를 빼앗자, 선생은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는 소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올려 조원정을 좌천에 이르게 하였다.
정중부의 난과 김보당의 난 이후 유풍(儒風)이 떨치지 못하여 당시의 교육과 문풍(文風)이 땅에 떨어지다시피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명유(名儒)로서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어진 선비를 뽑았고,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같은 문장가를 배출하는 등 문치(文治)를 부활시켰다.
당시 문관으로는 반차가 한문준(韓文俊)의 다음이 선생이요 최세보(崔世輔)가 그 다음이었다. 반차를 최세보에게 양보하는 뜻을 왕에게 전하자 그 겸양을 아름답게 여긴 명종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예부사(判禮部事)를 겸해 아상(亞相)을 삼았다. 이어 명종 16년 중서(中書) 문하(門下) 두 성의 시랑평장사와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셨으며,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의종실록을 편찬하셨다.
명종 17년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수상의 반열에 오르시고, 명종 19년(1189) 9월에 운명하시니 선생의 춘추 68세였다. 왕은 조정의 정사를 3일간 폐하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리셨다. 부인은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이고, 선생의 묘소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언덕에 모셔져 있으며, 명종 묘정(廟廷)에 배향되시었다. 매년 10월 초하루에 묘제를 지낸다.

 

고간원(叩諫院) 안내문

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며, 정문의 이름은 망일(望日)이라 한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던(叩馬而諫)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충간(忠諫)에 견주어 유래된 이름이고, 망일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이 빛난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충숙공께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의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태우자, 관복을 벗고 귀향 도중 유구역(維鳩驛) 벽에다 마음에 품은 충절의 시를 썼다. 뒤에 역을 수리할 때 그 내용이 화공에 의해 벽화로 그려지고, 그림을 본 여러 과객(過客)들이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차운시(次韻詩)가 뒤를 이어 유명해졌는데, 묘소로 인해 마을 이름도 고간동(叩諫洞)이라 불려졌다.
고간원은 조선 태종의 명으로 옛터에 세워졌으나, 임자년 홍수에 원사(院舍)가 허물어지고 원판(院板)이 표류하자 유구역 근처의 주민들이 제액(題額)을 인양하여 유구역에 두었다.
그 후 공주목사 곽간(郭趕)은 충간의 사실을 듣고 감탄하며 현판을 걸도록 하였는데, 선조 23년(1590) 진사 이치림(李致霖)이 고간원기(叩諫院記)를 지었다. 임진왜란 중에 불타버리자 다시 건물을 짓고 광해군 9년(1617) 생원 최진명(崔振溟)이 고간원중수기(叩諫院重修記)를 지어 걸었다.
철종 2년(1851) 후손들이 현판을 수습하여 고간원을 중건하였고, 순종 1년(1907) 중수하던 중 자금이 모자라 1914년 2간(間)으로 줄여 공사를 완료하면서 현판을 교체하였다. 1989년 고간원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별사(別舍)로 충숙영당과 고간정사(叩諫精舍)를 금강재(金岡齋) 뒤에다 신축하였다. 고간원지(叩諫院址)는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남평문씨대종회 충숙공유적보존위원회

 

글모음

상량문

중건기

금강제기

신문기사

   

고간원(叩諫院) 상량문

정미 8월이십육일  후손 감찰 학술 근식

섬뜰을 치며 간쟁함은 당현의 높은 덕망 특별히 청직하였고 원을 의론하여 이름 붙임은 송상의 장려가 가장 현저하다. 실로 그 선임이 중함에 이름을 이처럼 부름이라 택리를 표하여 충성을 세움은 우럴어보니 전대에 이같았고 철문 두드리며 잘못을 지적함 또한 선철로부터 구해들음이라. 결연한 충성충성보임에 교서에 인하여 특별히 간관을 제수하고 운감이 빛에 젖어 다시 훌륭히 세움에 붉은 괴리가 정직함 더욱 덜어나더라.이미 전왕이 정표의 의 다루었으니 하물며 후손들 추원하는 생각 간정치 않으랴 성하도다 우리 충숙선조는 고려조의 명경이요 세상에 특별히 강직한 분이라 대궐에 들어 유궐을 보함에 어찌 명정의 비난꺼리며 어전에서 시비를 다춤에 아침햇살에 우는 봉일 뿐 아니라 일시의 권신들이 모두 량간을 펼치메두려움 품고 백세의 사표들이에 방정한 덕 추중하네 어찌하여 길더듬는 장님이 경계함 알렸는고 이로부터 벼슬길에 풍파가 많았네 청포로 합문에 복청하는 대열에서니 의에 가히 둘 수 없고 마침내 백의로 물러나는 날에 인하여 지명이 되었네 이에 산소드린곳을 계산 남쪽 줄기요 이에 사셨던 곡은 웅천서쪽 고을이라 이워로가 빛을 다툼에 정려각이 빛나고 풍우가 지나갓으나 열루의 도화 완연하네
역대의 현철들 길 읊으며 탄식하였고 읍지에 실려있는 문헌을 징험하였더라
진실로 만세 신명이 보호하였으나 난리를 겪은 나머지 지금까지 미치지 못했으니 우리 대에 와서 기수의 패하고 흥함 있으나 개연히 생각함에 집 지을 책임이 우리 후인에 있음이라 이에 사우 하나를 세운 것이 재실까 몇마장 가까운 거리라 영호남의 종족들이 모여 의론을 함께하고 산중의 선비들이 점괘가 더욱 좋다하네
주춧돌 옛터에 의연히 남았으니 새로 놓지 않아도 볼 만하고 곧은 기둥 선산에 소나무로 하니 예비하는데 걱정없구나
부지런히 다듬고 흙바름은 실로 자손들 정성 하 함데 있었고 먹줄을 잡아 규격 맞추니 또한 목공의 정교함 보겠더라
물이 때를 따라 만남있음에 액호 붙임 다시 회복되고 공정이 속히 이루어짐에 동우 이워짐 기대하더라
새가날아 가듯 하은 옛날 광휘를 더하였고 점잖은 분들 모였으니 완연히 당시의 풍범이었더라 공손히 짧은 노래 부르며 상량울림 도우노라
어량처 동을 보니 아침해가 빛을내며 동에서 또오르는 구나 한조각 공심이 해바라기처럼 기울었으니 열광이 지금 해동에 전하더라
어량처 서를 보니 부춘산 높이 서쪽에 대하였구나 엄자능이 한나라 벼슬 받지 않았으니 청표가 기리 호수에 이웃하였더라
어량처 남을 보니 옛적에 공이 말타고 남으로 향함 생각나니 박공이 그림 그리고 중이 창화하였으니 정채가 역 남쪽에 함께 전해오네
어량처 북을 보니 큰 서울 북쪽 하늘아래 아득히 멀구나 유상이 밝고 밝은 별 같으니 오르내리며 잊지 못하고 북쪽을 공음하네
어량처 상을 보니 쉬지 않고 돌아가 저하늘 위에 있구나 오연에 날이 기울어 다시 밝음에 높은 공훈 삼한벽상공신이더라
어량처 하를 보니 후손들 번청하여 뜰아래 나열했구나 제향 올리며 때로 담모함에 빛나는 선령께서 아래를 굽어보시네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후에 헌함이 무성한 송죽과 더불어 더욱 공고하고 택지가 천지와 더불어 기리 보존되며 충효의 문호에 옹장함에 오직 조심스럽게 하고 영신이 높이 계시어 엄히 보호하며 성하고 창대하여 쇠퇴함 없 억만 자손들 공경히 받들고 사랑으로 친애하여 기리 만녀토록 하늘의 도우심 받게 하소서.

 

고간원(叩諫院) 중건기(重建記)

선조23년(1590) 3월 일 진사(進士) 이치림(李致霖)지음

고려의 정언(正言) 벼슬하던 문극겸(文克謙)이 왕에게 충간(忠諫) 드린 일로 쫓겨나 백의필마(白衣匹馬)로 이 역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벽에다 썼었다 마침 역의 다락집을 중수하면서 단청을 한 박(朴)씨는 화상을 그려 벽화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그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몰랐었다.
후에 무의자(無衣子)라는 이가 있어, 도를 닦는 사람 천여명을 거느리고 서원(西原)을 향해 가다가 이 역에 당도해서 자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보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이 그림은 왕에게 충간을 직무로 하는 신하가 조정을 떠나는 그림이다"라 하고는 한 절구시(絶句詩)를 썼다.
그 후에 두 객이 그 시의 운(韻)을 따라서 시를 지어 썼는데 역시 성명을 쓰지 않았던 바, 추측건대 그들은 세상에서 숨어 산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 일은 고려사(高麗史)에 자세히 실려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되었다.

본 역의 옛 자취는 문헌이 증명해 주어, 오늘에 이르는 천년 뒤까지 그 풍채를 사모하여 우러러봄에,
위엄이 있어 가히 범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관계되는 것을 대략 모아서 취하고 그 시들을 아울러 써 가지고 삼가 고을 수령인 곽 영감(郭令監)에게 고하였다 영감 곽한(郭維)은 이것을 명이 긴 가래나무에 새겨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군자에 이른 서기(庶幾: 어진사람
)를 바라보는 것은 풍운(風雲: 영웅호걸의 출세
)의 아름다움을 을은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으리오

이인로(李仁老)의 만사(輸詞)에 "어제 공의 옛 별장을 지나다가 초목이 울창하고, 샘물이 돌등 에서 나는데 공이 본래 노시던 곳이었다"라는 그 별장이 과연 어디였을까. 별장은 본래 사대부와 선비들의 청유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선비의 은둔처로 한몫을 했었다. 그러나 식사를 함에 반찬 그릇이 두셋에 불과하였고, 화려하게 무의있는 옷을 입지 않았으며, 한때는 정사(政事)가 부당하게 이뤄지자 녹(祿)을 받지 않았던 청백리였으니, 자신이 건영(建營)한 별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주(詩酒)와 한일(關逸)한 나날을 보냈던 죽고칠현(竹高七賢)의 이인로(李仁老) 이담지(李灌之) 오세재(吳世材) 가 공의 문인(門人) 문생(門生)이었으니, 이러한 사람들이 별장을 지어 공파 함께 청유를 나누었을 것이요, 아니면 임금이 곽여(郭輿)에게 사액별장(賜額別莊)이 내렸던 것처럼 공에게도 충간(忠諫)의 시로서 연고가 있는 유구역 근처에 이같은 임금의 은혜가 베풀어졌을 것이다.

또 사당(祠堂)이라 함은, 고려시대에는 사대부의 묘 근처에 재암(齋암)을 짓고 조상의 영정을 봉안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곧 영당(影堂)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공주군지(公州郡誌)의 고간원조(卵諦院條)에 '본원(本院)은 유구면 추계리에 있으니, 본래 고려 충신 문극겸(文克謙)의 향사원(事祀院)으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강재(金岡齊) 기(記)

병자 계월망 후 3일 후손 진사(進士) 양 현 지음

공주는 즉 호서의 큰 도시이다. 북으로 서울을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하여 명승으로 일컬으니 사대부들의 투각과 원림이 더러 그 간에 있음을 보겠다. 내가 전일  과거보러가며 매양 이곳을 지나면서 그 지령과 일걸의 웅장함과 빼어남을 복 감상하며 탄미하였다.
그러나 이는 심상이 보고 지나는데 불과 하였으니 어찌 족히 이르리오.
이제 이 재실 창건을 선조 산소아래 지어서 배회하며 둘러보니 송백과 칡넝쿨이 완연히 옛처럼 울창하고 또한 비 후면에 실적을 기록하여 신필의 유적이 아직까지 새로운지라 이 재실에 오름에 살마으로 무릇 열기 있는자 그 물을 보면 자연히 그 선세를 생각하고 그 선세를 생각하면 추원하는 감회가 유연히 마음속에 스스로 일어날 것이니 어찌 기리 잊지 못할 마음이 없겠는가?
슬프다 선조 충숙공은 이 고려조의 명재상이라 의종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충직한 정론으로 말을 잡고 간언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옛적의 백이숙제에 비유하였다.
이러므로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고 시 한수를 지어 그 뜻을 보였으니 시에 가로대
주운이 난간을 부숨은 칭예를 구함이 아니오 원앙이 수례를 막음이 어찌 자신을 위함이리오
한조각 충성심을 상감이 알아 안주니 구태어 여윈말 몰아 물러감 주저하네 하였다.
마침내 주자의 소림에 은둔한 괘를 얻어서 이 고을에 물러나와 임시로 살다가 세상 떠났다.
그후 8,9백년을 지나는 동안 난리를 많이 겪어 묘소를 잃어 버렸으니 팔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우리 후손들의 마음 항상 개탄스럽드니 근년에 이르러 천지 신령의 도움으로 꺼꾸러진 비석이 마멸지 않고 묘역에서 나와 이미 소상히 상고하여 신빙할 수 있고 또한 읍주지 기록을 살펴봄에 살으셨던 고을과 재소 드린곳이 차례로 실려있으니 이 금란의 한 줄기가 험준하여 석자 봉분이 옛모습으로 전해오니 오르 내리는 선조의 영령이 필연히 즐거워 하시리라.
이에 을해 10월 보름에 원근의 후예들이 시향드리러 운집하여 재물 모음을 상의하여 급히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재호는 모두가 금강제로 함이 마땅하다 하는고로 중론을 쫓아 액호하고 회중으로부터 나한테 기문을 청하니 가만히 생각해 봄에 그 책임을 사양할 수 없는 고로 삼가 전후사를 이상과 같이 펴노니 훗일 보는자 또한 느껴보면 앙모하는 성심이 반드시 그 오래 될수록 더욱 돈독하리라.

 

신문기사중앙일보 [사회] 1999년 06월 02일 (수)

남평문씨 3대조 묘에서도 쇠말뚝 발견

충남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남평문씨 3대조 충숙공묘에서도 쇠막뚝과 식도가 1개씩 나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묘를 관리하는 문용화(76.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씨는 "문중 유적관리소에서쇠막뚝이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해 조사를 한 결과 1일 오후 4시께 봉분 한 가운데에서 쇠말뚝과 식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발견된 쇠말뚝과 식도가 이충무공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인 것으로 미뤄 구속된 양순자씨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 및 영상 모음

2009독축영상

2005묘제영상1

2005묘제영상2

2005묘제영상3

2005묘제영상4

고간원 모습

2009년 묘제

2009부산종친회

2009년학술발표

2002년 묘제


고간원 모습


안내판

내삼문

3世 충숙공 諱극겸 영정

신도비석

성금록

금강제 입구문

고간원터 사적비

모선문(금강제 출입문의 오른편과 왼편)

고간원 전경

금강재

고간정사

충숙공영당

고간정사 현판

모선문(대문)현판

충숙공영당 현판

왕이 극겸선조께 내린 절구시(絶句詩)입니다

 

이 시에 대한 화답의 시

일촌영대만사침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고

유여우려목가잠

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단회졸지일난단

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백발천경기만잠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년광임염암상침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두어나

보국사량일점심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깊어 지나이다

자원군은유미보

임금님

은혜 갚자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무정백발기잉잠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간언이 무시되니 사직하고 하향하면서 지은시

주운절함비천예

주운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함 아니고

원앙당차개위신

원앙이

수레 가로막은 일

일신 위함일까

일편단성천미조

일편단심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강편영마퇴준순

여윈 말 세게 채찍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린다


2009년 묘제사진

성금 접수하시는 남주 영종님과 성금을 내는 일가님들

동호위원장의 안내방송
개수된 화장실
 

축문

진설

삼헌관(경규, 병준, 상배)

분정기

 
 
 
   

집례 승열님

초헌례

찬창

집사님들

아헌례

종헌례

산신제

산신제 축문

 

음복례

헌관 기념촬영

제사후 음복

홈관리자와 기념촬영

 
종채 제주장학회장님과 제주일가님
 

홈관리자와 기념촬영

 

부산종친회 2009년도 참석 사진

동준회장 인사

정근총무 사회

종구산악회장 산행안내

병준고문 고간원 소개
일가님의 동화구연
신갑님의 역사이야기
     
 

버스내 노래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학술발표회(2009년 11월17일  공주문화원)

안내판

공주종친회, 문동호

대종회장 광주종친회장

사회자

 
발표자
발표자
 

발표회장

전경

참석자들

2002년 충숙공 묘제

진설

박주한잔, 과객의 식단인가?

찬창 병준부산종친회부회장과 장호전례이사

집례 신만부산종친회 부회장

집례 인사

 

중식도시락

분배로

소주도

한잔

놀라운성의

제주종인들

기념촬영

부산으로 가면서

일가들의 담소

묘제는 축제다

인근의 마곡사 관광

춥다

덕유산의

설경


충숙공 유적보존회 이사회(묘제 전날)

묘제 참례기

2005년

2004년

2004년

2002년

2001년

2001년

문병달

문병달

문수상

문병달

문용호

문병달

글솜씨는 없으나 행사에 참례한 소감을 적었습니다.
혹 행사를 주도하는 분들께 누가 될까 염려되지만 행사 소개를 위한 뜻으로 양해바랍니다.

2005년 충숙공 묘제(11월2일 음10월1일)  -문병달

05:50 병준총무님과 함께 승합차로 교대앞에 도착하여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06 :10 인원 점검후 오시지 않은 분들께 전화를 하니 한분은 불참이었고 3분은 곧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06:24 출발하여 만덕에서 창호님이 승차하고 동김해에서 삼계문중의 일가님들이 탑승하며 46명의 만차로 출발하였고 종친회장님의 인사가 있었으며 임원소개와 처음 참석하신 분들의 인사가 있었다.
충선공파종회 회장 영훈님은 행세 바로하고 화목한 집안이 양반집안인데  창녕에서 가장 화합한 집안이 남평문씨 창녕종친회라고 하시고, 병준부회장님은 합천용주면장의 사위 3사람이 모두 문가이며 부산석대의 천씨 집안에는 4대중에 3대를 문가 며느리를 맞았으니 양반집안의 증명이라고 했다.
08:10-30 산청휴게소 식당에서 회장님 사모님께서 준비한 밥과 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면서 양반집안의 자녀교육에 대한 말씀을 상임부회장이 하시었고
파갈림에 대하여도 설명이 있었고 순평군부산종친회 병영회장님의 보충설명이 계셨다.
09:30-09:20 금산휴게소에 쉬었고 10:10 유성나들목에서 나와 11:15 추계리에 도착하여 축관인 창근님과 헌작인 수상님은 병준부회장의 안내로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먼저 내려 제관실로 가시고
종전에는 금성제 마당에서 탁주와 안주로 간단한 술자리가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고 신실을 참배하고 회의실에 계시는 제주일가님과 인사를 나누고 사천의 태기님도 만나 간단히 목을 축였다.
일가님들과 만나 반가운 인사들을 나누었는데 남주님은도 만났다.
산소를 둘러보니 조경작업이 많이 진척되었으나 묘소앞의 경사면을 다듬어 계단식으로 하면 참석자들이 서기에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묘소 입구에는 충숙공 송덕비와 전 이사장 성규님의 공적비를 세웠는데 살아있는 분의 공적비도 어색하고 충숙공 송덕비와 같은 크기에 나란히 세운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화장실은 옛날 그대로 인데 먼저 화장실의 개수가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훈회장님의 기념식수 표석은 있었으나 부산종친회 표석은 없어졌으니 부산의 성금은 포기했나 보다.
12:00 헌관들의 호명이 있었고 500여명의 참석으로 제향이 시작되어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나
13:00 음복례가 진행될 때 식사하러 가는 분들 때문에 줄이 흐트려 지더니  분축도 하기전에 일가들은 가 버렸고 산신제에 참석하고 오니 배식이 끝났는데 국은 밖에서 주었고 밥은 안에서 배식했고 술과 반찬은 어디서 주는지 알 수 없어 국에 밥만 먹었다.
배식할 인원이 부족하고 배식의 위치도 잘못되었는데도 일가들이 한꺼번에 몰려 주최측에서는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하여 이에 항변하는 일가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작년에 이은 배식의 실패였다.
일가님이 배식을 하기 어려우니 도시락으로 할 것을 권했더니 위원장은 밥먹으러 온 것이나고 하였고
그렇다면 내년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니 오지 말라고 하였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13:30 식사를 하지 못한 분도 계셨으나 부산팀의 기념촬영을 마치고 승차하여 태기님의 인사가 있은후 출발하여 배식에 대한 사과의 말이 있었다.
14:50 동학사에 도착하였으나 주차장이 만원이라 쉴곳이 없었고 절까지 다녀올 시간이 되지 못하여 차를 돌려 나왔고 금산휴게소에서 준배해간 소주와 안주로 술한잔 들었다.
18:00-18:25 진영휴게소에서 영훈회장님의 부담으로 가락국수를 먹었으며 동준북면회장님의 성금 10만원과 삼계문중에서도 10만원의 성금이 있었다.
동래에 도착하여 일부는 노래방으로 가시고 집에 도착하니 21:00였다. 

 

2004년 충숙공 묘제(음력 10월1일, 11월 12일)  -문병달

05:45 병준총무와 교육대학앞에 도착하니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회장님, 상근부회장님등 20여분이 도착해 계셨다. 실고온 짐을 버스에 옮기고 오신 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오시는 분들과 반가운 인사들을 하면서 출발시각인 06:10 점검하니 예약하신 분중 두사람이 오지 않았는데 병국님만 도착하시어 06:15 출발하였는데 어제 총회를 위하여 칠순고문 병영부회장, 용표자문이 기차편으로 가셨으니 올 때는 좌석 2개가 부족하겠기에 보조의자를 실었다.
막힘없이 만덕을 통과하여 회장,부회장, 영훈충선회장, 진우동래파회장의 인사가 있었고 07:15 남강을 지나 07:30 서진주를 지나면서 영훈충선회장님이 문익점 목면시배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참가하신 일행들의 인사 소개가 있었다.
 07:50 산청휴게소에 주차하고 회장님께서 기증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김치와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아줌마들 5분이 배식을 하시어 질서있고 빠른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음식맛도 좋았다.
08:15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였는데 영훈충선회장님이 기증하신 중국산 고량주 3병을 한잔씩 돌렸는데 향이 좋고 52도여서 쏘는 맛도 강렬한데 절반은 드시지 않는다고 하여 한잔 더 할 수 있었다.
09:15 인삼랜드에서 15분을 쉬면서 초읍집에서 커피를 돌렸고 동준북면회장은 인삼차를 돌렸다 
10:00 유성나들목에서 공주를 향하면서 문용기의사를 생각하였고
10:25 부여 갈림길을 지나다 산청에서 오시는 일가들의 차를 만났는데 35명이 타셨다고 한다.
도로 공사중인 곳에는 다릿발만 서있어 아직은 준공까지는 멀은 것으로 보이고 10:40마곡사 입구를 지났고 잠시후인 11:00 고간원 입구에 도착했다.
일가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데 대종회장 종근고문 재구박사 남호경기회장 길철장학회국장 산청의 충선공파국장 등 단골들과의 인사를 나누었고 나를 찾는 분이 있다하여 갔더니 광주의 복만님이신데 홈페이지를 통해 알 게 되었다고 하시는데 광주에서는 버스 3대가 왔다고 했다.
많은 일가들을 만난후 남주님을 만났는데 전남종친회장을 광명광주회장이 맡았다고 하였고 묘소앞에 있던 건물을 철거하여 입구 양쪽에는 큰 나무를 심어 부산종친회장문종일과 충선공파종회 문영훈이라고 세겼고, 묘소로 가는 길을 만들고 양쪽에는 비자나무를 심어 헌수하신 분의 명패를 세웠으나 화장실은 아직 수세식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11:50 재물을 나르고 진설을 하는데 부산의 성근님이 진설을 맡았으며 대종회장이 동두서미를 주장하여 여태껏 고기 머리가 서로 향했던 것에서 변경되어 일반적인 진설로 되었는데 충선공파의 국장은 우리 고장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12:05 장호 전례이사의 헌관 및 집례의 소개가 있은후 일가들고 헌관들이 도열하였는데 500명은 넘게 짐작되었고 병준부산부회장의 묘사전의 안내말씀이 계셨고 참신에 이어 헌관들의 헌주가 있었는데 초헌은 광명광주회장, 아헌은 종일부산회장 종헌은 -------
예필도 하지 않은 음복중에 도열한 일가들의 줄이 무너지더니 모두 식사하러 가 버리고
12:55동호관리위원장의 인사는 허공의 메아리가 되었는데 금강제안의 모습도 서로 밥을 받으려고 하는 듯 질서가 없으니 멀리서 오셔서 제사나 모시고 할 일이지 딱해 보인다.
13:00 산신제를 위한 제물을 차리는데 돼지 뒷다리가 그냥 오르고 제물이 엄청나게 진설하였는데 다닌 중 산신제물이 가장 많았는데 산신제는 주과포로 간단히 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어지간한 큰제사만 하다
13:20 산신음복을 하고 내려오니 배식은 끝이나고 한산한데 밥을 어디서 주는지 국은 어디 있는지 수저또한 어디에 있는지를 한참 찾아야 했는데 우선 자리의 배정이 되지 못하였고 방안에 차려 두었다고 하여 방에 갔으나 찬만 차려있었고 형수님이 밥을 차려 준다하여 따라 갔더니 국은 문앞이요 밥은 제실왼쪽에 있었는데 마치 숨겨 둔 것 같았고, 많은 인원을 몇 명이 배식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13:45 부산팀은 기념촬영을 하기 위하여 묘소에 집결하였고 현수막을 펼치고 촬영을 한 후에 남주일가와 술한잔을 나누며 작별하고 버스에 올랐더니 동호관리위원장님과 남호경기회장이 오셔서 인사를 했다.
14:00 출발하여 어제 도착하신 분들의 소개가 있은후 어제 경과를 여쭈니 회의를 마치고 부산일행을 성동회장이 회를 대접하였고 대종회장이 호텔 숙박을 책임지셨다고 했다.
15:10 무령왕릉에 도착하여 20여분간 왕릉의 모형을 보았고 일부는 송산리 고분을 돌아보기도 하였는데 신라의 천마총에 비하여 화려하지 않았으나 옛날에도 화장을 한후 옹관장을 하였다니 지금의 납골묘와 같은 방식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14:30 금산휴게소에 도착하여 준비해온 소주와 안주로 주연을 베풀었는데 동준북면회장님이 준비하신 홍삼분말을 소주에 태우니 홍삼주가 되었고 복분자액기스를 사오셔서 부부간에 오신 분들께 대접했다.
병준총무의 사회로 노래가 한곡씩 돌아가고 남은 소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18:00 산청에 도착했다.
커피를 들면서 늦게 핀 목화 한송이를 들고 올라가 목화를 소개하면서 산청의 시배지와 생가를 설명하였고 진영에서 오늘 진설을 한 성근님과 북면회장님이 각 10만원씩을 내어 가락국수를 한 그릇씩 하였으며 교대앞에서 해산하고 병준총무와 함께 만덕을 다녀와 집앞에서 내렸다. 

 

2004년 충숙공 묘제(2)  -문수상

2004년 음력10월 1일 새벽5시 요란한 폰 알람 소리에 황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남평문씨 3세조 이신 극겸 선조님의 묘제일 이시다. 묘소가 있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 10여분후 또다시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요동을친다.그저께부터 선조님의 묘제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한 가까운곳에 사시는 종친분 이시다 , 고맙게도 아드님이 출발장소 까지 모셔드리겠다는 연락이다.
승용차가 집앞에 도착하였고 출발장소인 부산일보사 앞으로갔다, 벌써 많은 종친분들이 이미 나와계셨고, 차에 올라탄후 인원 점검을 하고 드디어 출발이다, 시간을 보니 06시10분이다. 대단했다, 감동적이었다 , 당초에 약속한 시간에 늦지않고 정시에 출발이다 , 단결, 단합 위대하신 남평문씨의 후손님들 이시다.
출발하면서 충선공(익점)파 종회 임원 소개와 부산종친회 회장님의 인사말씀이 계셨고 각 문중 개인 소개가 있었으며 처음 참여하신 종친분은 앞으로 나아가서 출신과 자기소개를 하였으며 필자 또한 어설프게나마 김해 삼계문중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충선공파 부산 종친회의 매끄러운 운영과 유머스런 진행으로 지겹지않고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할수 있었고, 충남 공주의 한 휴게소에서 부산종친회 회장님 내외분 께서 손수 장만해오신 따끈한 밥과 맛있는 시락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고 1시간 30분여를 더 간 후에 목적지인 위대하신 충숙공 선조님의 묘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마을 입구에는 전국 각지에서 우리의 문중 종친분들 께서 타고오신 전세버스와 각종 차량들로 혼잡하였고 선조님의 선영이 있는추계리 마을언덕에는 서울 대종회를 비롯한 전라도 남평,제주도, 경남,산청,마산,진주, 경기도, 경북,대구..등등 전국 각지에서 오신 종원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3~400여명은 족히 되었고 , 묘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도중에는 충남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 잠시들려 박물관을 관람하였고, 노래자랑과 익살스런 퀴즈 게임으로 주최측에서 준비하신 선물과 성의있는 음식으로 즐겁고 유익한 뜻 있는 하루였으며 주최측인 부산 종친회에 경의를 표하며 감사드림니다.

김해 성유공 종친회 (삼계문중)........총무 문수상.

 

2002년 충숙공 묘제 11월4일~5일(음력10월 1일)  -문병달

12:20 헌관과 집사는 전날 도착하라는 통지가 있어 동성제 회의중에 집례를 맏은 신만님, 찬창을 맡은 병준형님 전작을 맏은 청년회 병준씨와 함께 나는 기자 자격으로 함께 출발했다
12:30 고간원에서 실시하는 헌납집 회의에 참석하는 칠준부회장과 일가 한분을 동래에서 합류하고 의령에서 국도를 따라 가다 기다리는 일가 두분을 만나기 위해 13:40 대의에 도착해 찾았으나 보이지 않고 문태쪽으로 가다 만났는데 약속시간을 변경하려고 전화를 하니 나갔다고 하여 11:10에 도착하여 90분을 기다렸다는데 추운 날씨는 고사 하고라도 고생이 무척 많았을 것 같다
문태에서 차를 세우고 이곳에서 가학선조의 토굴이 멀지 않다는 신만님의 설명이 있었고, 집터는 못이 되었다고 하니 의거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강제를 일가들께 여쭈니 진양군 대평에 있었는데 진양호 관계로 이축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14:00 진주추어탕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추가 국을 먹었는데 그릇당 2000원씩 추가로 받으니 이건 촌인심이 아니었고 일가 중에는 소를 30여마리 키우는데 18두를 출하하니 억대란다.
14:40 문대를 출발하여 14:50 목화시배지를 지나 대전행 고속도로에 들어가니 차창에 비가 날리고 길에는 가는 눈발이 바람을 타고 이리 저리 흩날리는 중에 육십령 터널을 지나니 눈덮인 덕유산이 햇빛을 반사하는 장관을 만났다 아니 벌써 눈이 왔단 말인가?
16:00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20여분을 쉬고 남부 순환 도로를 따라 서대전을 지나고 16:40 유성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500여미터를 가다 우회전하여 32번 도로에 올렸는데 공주 24KM란 안내판이 보인다.
용이 굽이 치는 듯한 계룡산의 장엄함을 보면서 동학사와 갑사 진입로를 지나고 곰나루 터널을 지날 때가 17:00였다.
17:25 유구에서 39번 도로에 진입하고 17:40 안성 20KM 지점을 지나자 기념물 51호 고관원지 300M란 안내판에  이 있고 오른쪽에 금강제가 보인다.
금강제에는 30여분이 도착하셨는데 아는 일가들과 인사를 한후 준비해둔 술윗물 한잔을 들고 실내에 들어갔는데 18:10 60여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시작되어 유적보존회장께서 관리인이 별세 하시고 총무가 중국으로 발령이 나서 서류를 대종회 상근국장님이 작성했다고 하는데 총무를 대행하였고, 현장에서 감사를 지명하고 총무국장도 지명하여 인준을 받는 절차를 일사천리로 거치고 회비 납부에 대한 당부가 있은후 18:45경 회의를 마쳤으나 헌관 집사의 예행연습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관은 유구의 그린빌라를 잡아 두었다고 장호씨를 따라 가면 된다고 하고 회의를 마쳤다.
식사를 하기 위해 금강제에 내려가니 앉을 곳이 없어 앞사람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자리를 잡았는데 상도 없이 맨 바닥에서 먹어야 했는데 조금만 신경을 쓰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식사후 잠자리를 찾아가는데 우리차는 칠준부회장님이 헌납집 회의에 가져갔기에 연락을 하고 기다리는데 대종회의 차를 비좁더라도 타라고 하여 억지로 끼어 앉아 유구에 갔으나, 여관을 잘 몰라서 물어가면서 찾았고 주차장에 우리차가 보여 칠준 부회장님께 전화를 하니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면서 종업원이 열쇄를 가져다 주는데 만약 고간원에서 기다렸다면 황당한 경우를 당할번 했다.

옆방인 308호는 진주에서 오신 일가들 6분이 함께 계시고 우리는 309호인데 방은 구석구석이  거미줄이고 때까지 걸려있어 청소부터 하느라 부산을 떨었는데 다행인 것은 방은 따끈따근한 것이었다.
병준씨와 앞의 연쇄점에서 가서 간단히 술과 안주를 준비해 술잔을 나누면서 야인시대를 보고 있노라니 고문님이 오셔서 함께 술을 드시고 남은 것은 창해 일가님 드린다고 가지고 가셨고, 22:20경 여관아주머니가 생각하지도 않은 방값을 받으러와서 30,000원을 지불해야 했다

옆방의 대화 소리에 잠이 깨니 06:00 세수를 마치고 07:00 경 국장과 장호님이 들렸는데 신만님과 형님은 묘제는 참신이 먼저이고 강신이 뒤인데 홀기는 강신을 먼저 하게 되어 있으니 바로 잡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나 전례이사인 장호님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홀기대로 하라고 하니 앞으로 추진 되어야 할 남평문씨의 제례의 순서와 진설의 통일화는 아득하게 멀어 보이고,
전례에 대해 교육을 시키자고 건의 하였으나 대종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고 하여 그럼 전례이사가 지방을 순회하면서 교육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어도 반응은 별로여서 부산종친회 차원에서나마 시행 되어야 할 것 같았다..

08:00 고간원으로 식사하기 위해 고문님은 먼저 떠나신 후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간원에 갔으나 식사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다시 오신다는 고문님의 연락이 있어 산청의 일가들은 도천서원도 내년에는 준비 할 것이 없다고 하고  방값이랑 식대를 제하고 봉심해야 하는데 미리 주었다고 억울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유구에 사는 헌납집의 일가에게 연락하여 08:30 별미회관에 안내 되었는데 미리 오신 분들도 있고 뒤에 오신 분들도 있어 44명이 한 식당에서 만났는데 제사에 봉심을 하실 문중의 대표들인데 잠자리와 식사의 대접은 마땅하며 미리 예약을 했으면 값의 조정은 물론 아침에 밥집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 일도 없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각자가 계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면서 상근국장이 계산을 하고 받아 내겠다고 하여 식대는 일단락 되었으나 헌납집은 미리 계산했다고 한다
고간원 측에서는 제실의 관리자가 바뀌고 운영진도 새로 선임하여 일에 차질이 있으리라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헌관과 집사의 예행연습 조차 하지 않았으니 회의를 위하여 전날 올라와 객지잠 자고 새벽부터 밥을 찾아 헤메게 한 것은 무성의라는 표현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헌납회장께 상하문중의 파보이 진척을 여쭈니 헌납집 족보 만든다고 중단했다고 말씀하시니 파보를 만든다고 하여 미리 준비하느라 인건비를 지불하고 미리 입력한  600여쪽의 대동보 입력에 대한 문제는 언질 조차 없어 무척 섭섭했으나 다음에 글로써 전하기고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09:20 식사를 마치고 고간원에 도착하니 09:40이었고 헌관들은 복장을 준비하는 동안 뒷산에 올라 고간원 전경을 촬영하고 마을 주변을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11:00 제물을 집사들이 운반하는 동안 태훈씨는 대종회이 cd족보는 입력을 마치고 수정 중이라고 하고 수단도 받고 있다고 한다는 말을 상근국장께서 하시더라고 하는데  생각외로 빨리 입력이 되어 다행이나, 수단은 종친회에 연락이 없었는데 무슨 수단이냐고 하니 연락하지 않고 신청하는 사람들만 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주(호적명 승남)님을 만나 순질집안의 사이버 족보 입력에 필요하니 소문파에 대한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야 11:00경 부산의 일가들이 모습이 보이는데 38명이 오셨다고 한다.
잠시후 헌관과 집사의 소집이 있고
11:30헌관의 호명이 있은후 묘제가 봉행되었다.
집례는 신만님 찬창은 병준님 초헌은 대구의 문양회장님이 나오셨고 신만 집례는 여유있고 틀이 잡혔는데 찬창은 컨덴서마이크를 가까이 대어 소리가 자꾸만 갈라져 멀리 하시라 말씀드렸다.
묘소 아래는 일가들 250여명 정도가 도열해 배를 올리고 홀기대로 진행되어 무난히 제사를 마치고 음복을 하는 동안 식사를 타느라 많은 분들이 자리를 떠서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일회용 봉투에 들은 밥과 찬을 받아 일가들과 함께 중식을 마치고
14:50 승합차는 칠준님이 운전하여 헌납쪽의 일가님들이 타고 가시고 버스에는 43명이 승차해 출발하여 마곡사를 지나가면서 계곡을 둘어보고 무주로 들어서니 길옆에도 눈이 쌓였는데  길옆에 차를 세우고 넓은 무덤이 있어 묘역에서 준비해간 안주로 술잔을 나누면서 일가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15:40 인삼랜드에서 칠준부회장과 헌납집의 일행들을 만났고 오늘 헌관을 한 신만님과 병준님이 5만원씩을 내어서 해물우동을 먹었는데 면발이 불어터지지 않고 졸깃졸깃해서 좋았다.
차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즐기는데 나는 밀린잠을 실컷 잤다

 

2001년 충숙공 묘제 참례기(2)  -문용호

  11월 11일(둘째 일요일) 11:00  남문청년회, 35세손 문용호작성

지난 11월15일은 음력 10월 초하루였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1년 계획은 정초에..."라는 말이 있지만 옛날부터 추수를 끝내고 조상께 감사하는 달 10월!
10월이 시작되는 이날 부산종친회 영훈(英勳)회장과26명의 종친, 10여명의 며느리 등 36명은 버스를 타고 연산동 교대앞을 출발하여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에 있는 충숙공 극겸(克謙)선조의 묘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쏴한 아침 바람이 제법 춥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관광버스 사업을 하면서 종친회 일에도 열성적인 성만(成萬)일가가 운전하는 관광버스는 우리 모두가 최고의 기분으로 쾌적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었는데 차안이 너무 덥다는 불평도 못하고 고속도로를 미끄러 지듯 달려 고간원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종친들이 모여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종친회 회장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숙공 묘제에 많이 참석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숭조(崇祖)의 의미를 설명듣고 "오늘은 이렇게 하루만에 다녀 올 수가 있지만 예전에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이틀씩 걸렸다. 오늘도 며느님들이 여럿이 참석했지만 우리 문씨가문이 융성,발전하기 위해서는 며느님들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는 어른들의 감회어린 말씀도 있었다.

못난 후손이 머리숙여 조상의 음덕(陰德)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종친들과 같이 지낸 충숙공 향사의 의미를 새겨 보겠다고 마음 먹기는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조상의 유지(遺地)를 찾아 묘제를 지내면서 느낀 소회(所懷)와 감동이 어찌 없겠는가. 없는 글재주로 개인적인 생각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기 보다는 전국에서 모인 종친들 모두가 엄숙히 절하고 유업을 생각했던 충숙공 선조가 누구인지 알아 보는 것으로 그날의 의미를 되새겨 간직할까 한다.

중시조(中始祖)와 충숙공(忠肅公)
1999년 2월 25일자 중앙일보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을 씀으로써 어떤 이로부터 살아았는 문화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유적 답사기 시리즈가 연재되어 있다
유교수는 북한에 있는 묘향산 보현사를 답사하면서 이 절의 창건 내력을 새긴 보현사지기비(寶賢寺之記碑)를 만나게 되고 여성 안내원으로부터 비문의 탁본(拓本)을 입수하게 되는 경위를 재미있게 적고 있다.
인물의 공적이나 역사적 사실을 돌에 새겨두는 비의 끝 부분에는 비문을 지은이와 글쓴이 그리고 글자를 새긴 사람이 이름등을 새겨 두게 되는데 여기 보현사 창건비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극사기를 지은 김부식(1075~1151)이짓고 문공유(文公裕)가 썼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김부식과 견줄 수 있는 당대 최고(最高)의 명필가였던 그는 누구인가?

새로운 역사 사실을 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기도 한다. 고 말한 유교수처럼 신문을 보던 나도 흥분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800여년 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조상을 만났으니 흥분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문공유(1088~1159)는 고려 16대 예종(1105~1122 재위)때 급제하여 18대 의종(1146~1170년 재위)때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집현전 태학사 지문하성사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지추밀원사를 추증받은 분이다.
보현사 창사비문은 17대 인종 19년에 선조가 54세 일 때 병부시랑(兵部侍郞)경 동국시강학사로 있으면서 섰다고 한다. 72세를 일기로 타개하니 의종께서 경정공(敬靖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공유의 아버지가 문익(文翼)이며 우리 남평문씨의 중시조시다. 중시조는 11대 문종(1046~1083년재위)때 등제(登第)하여 밀직사서북면병마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좌복야산기상시 중서시랑문하평장자 상주국영동정 이라는 긴 이름의 벼슬과 함께 경절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중시조 경절공의 손자가 충숙공 문극겸(1122~1189)으로 고려 예종 17년에 태어나 인종,의종,명종대까지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며 명종4년에 에부시랑 추밀원지주사 지원사, 10년에 태자소경과 태위 15년에 판례부사 17년에는 문하양성 판병부사와 권판상서 이부사 등을 지내셨다 4대 임금과 더불어 곧은 절개와 청렴결백한 기개로 칭송받다가 68세를 일기로 타계하니 명종사당에 배향했고 조선 태종은 공의 훈업이 천추에 빛난다 하여 종묘의 숭의전에 배향토록 하고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에 있는 묘소 근처에 고간원(두드려 직언함) 이란 사당을 짓고 공덕을 기리도록 하였다
공주시는 충숙공을 공주의 인물로 지정하여 훈업을 기리고 있으며, 우리 문씨 문중은 사당과 신도비가 있는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에 초하루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 충숙공연보
충숙공 문극겸은 1122년(고려예종17년)남평현에서 태어나, 1154년(의종8년)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으로 벼슬길에 나서, 1158년 37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1170년(의종24년) 합문지후(閤問祗候)에 올랐고 이어 전중내급사로 승진했다.
명종원년인 1171년 대부시소경, 왕 3년 추밀원부사로 주임이 되었고 왕 10년에 태자소사로 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명종 15년(1185)에 중서시랑평장사 판예부사에 오르고 왕 16년 수국사가 되어 상장군 최세보와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1189년(명종19년)9월 68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왕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충숙라 시호를 내렸다. 공주 유구 추계리에 있는 금계산 갑자(金鷄山甲座)에 묘소가 있으며 1202년(신종5년) 명종묘정(廟廷)에 배향(配享)토록 했다.

2. 충숙공의 치적(治積)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치적을 짐작할 수 있지만 봉건 왕조시대에 왕의 신임을 받고 평생을 벼슬길에 있었으니(좌천되기도 하였으나) 나라를 위해 한일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강직한 기개와 곧은 절개로 오직 한길을 감으로써 "정중부의 난"이라 일컫는 무신의 난 때도 그들의 존경을 받고 살아남아 다시 왕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충숙공의 곧은 성품과 기래를 읽을 수 있는 시문(詩文)이 몇편 남아있는데 주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과 임금의 은혜 갚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내용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대신 심중(心中)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으로 충숙공을 찬양한 다른 사람의 글을 소개한다.

충숙공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 실린 만시(挽詩 ; 죽은이를 애도하여 지은시)를 보자
※이인로(1152-1220) 자 미수(眉수) 호:쌍명재 인천출생, 쌍명제집, 은대집을 지음

옥골영영응상태(玉骨英英應上台) 영특한 그 모습 상대성을 응했었고
빙호교결점영대(氷壺皎潔點靈臺) 옥병의 얼음같이 그마음 깨끗했네
조종창합배운두(早從창闔排雲두) 일찍이 대궐문의 구름을 헤치어 외치었고
만향우연취일회(晩向虞淵取日廻) 늘그막에 우연에서 해를 돌이켰네
단봉구종지상욕(丹鳳久從池上浴) 단봉은 오래도록 못(중서성)위에서 목욕했는데
백계호내몽중최(白鷄胡奈夢中催)흰닭은 어지하여 꿈속에서 제촉했나
유여사조창태영(唯餘謝眺蒼태詠)사조의 푸른이끼 시구만이 남아서
유작인간만우뢰(留作人間萬右雷)온세상 만인의 입에 우레 같이 전하네
※상대성(상정승을 표상하는 별로 상대는 수상을 뜻함) 단봉(임금의 조칙, 궁궐, 붉은색의 봉황이나 충숙공을 봉황에 비유함) 사조(중국 남북조의 시인)

한글세대인 나는 한시를 잘 모르지만 마지막 연만 봐도 선조께서 만인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겠다. 또 조선왕조 선조때 문필가로 지봉유설을 남긴 이수광은 우리나라에 글씨로서 유명한 사람은 신라때 김생, 고려때 요극일 문공유 문극겸 이망 중(승려)탄연 영업이 있고 우리왕조에는 안평대군 강희안 성임 황기로가 뛰어나다. 남창, 김현성은 서법에 능한데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의 붓솜씨는 다른 기능에 비하여 가장 좋아 중국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01년도 고간원 묘제 참례기  -문병달

이침 식사 준비를 위해 05:00 종친회에 도착하여 불위에 국을 올려 데우고 준비물과 그릇 등을 갖여 갈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컴퓨터를 만지는데 병준님 내외분이 도착하셔서 함께 준비를 마치고 07:20 도착한 버스에 짐을 실고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칠순고문님 경동부회장님 칠준부회장님 상석운영위원님은 전날 출발하시고 버스에 승차한 분은 33분 이시고 경산에서 명규님 부부가 승차 한다고 한다.
07:50 차범총무님의 사회로 영훈회장님의 인사는 지하 복지관 운영 소개와 한구좌에 년 10,000원인 후원회원에 종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고 하셨다
용표부회장님의 충숙공 선조에 대한 소개가 있은후 사회는 참석하신 분들의 소개가 있었다 상춘님내외분, 종구반여총무, 홍헌(37세), 무환(27세 반여), 영표부회장님 조카인 영규내외, 청년회부회장 용호내외(35세 목사공 창녕)분은 청년회를 믿고 지도편달을 바란다고 하고, 나(33세 북면파)는 정보화시대에 동참하자고 말씀올렸으며, 성만님부인, 상석님부인. 초읍직전회장 윤복님, 철상자문위원, 성구내외, 두하(30세), 사상파총무 병우(34세) 병준자문, 합청 광릉집의 재도(25세)님, 일모(34세)님, 병주(28세) 상돈님, 두표(31세)님, 광수산악회장(32세), 석동(34세)님, 병준(29세 순평집)운영위원내외분의 소개로 이어졌다
차창은 성애가 끼어 하얗고 딱아내어도 밖에는 서리가 내려 온세상이 희다
07:25 병준 자문위원님은 부산에는 25세에서 42세까지 거주하고 있고 동래집은 30세에서 36세까지인데 순평집은 우리보다 6-7대가 높다고 말씀하시고 여담으로 부산종친회에는 동조가 두분, 병준 2분, 병호 3분이 계시는데 김일두검사가 일두인 이름이 같은 7명과 계를 모아 계원중 총각 일두가 결혼을 하는데 주례 일두, 신랑 일두, 사회 일두, 우인접대 일두....

07:25 영훈회장님은 윤리운동과 청년회주도로 도덕재무장 운동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경산휴게소에 차를 세워 중단되었고, 용표 조카님 내외분이 합류하셨다
07:40 차가 출발하고 회장님의 말씀이 계속 되었는데 우리나라 총생산액이 12등 안에 들며 치안이 안정된 나라가 된 것은 60세 이상 되신 분들의 공로인데 외국의 인종차별처럼 노인 차별이 있으니 노인들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중국연변의 조선족은 경제는 우리보다 낮으나 노인의 위상과 공경이 대단하더라고 하셨다

이어 부회장님은 동래정씨의 선대 묘소에 대한 전설을 말씀 하시고 07:55 병준자문위원님은 산소에 관한 일화를 말씀 하시는데 금오산에 임금이 날 명당이 있다 하여 장택상씨 부친이 산을 구입하고 지관을 초청하여 찾았더니 박정희의 조부묘 자리라고 하기에 이장하라고 했으나 해방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다시 옮기라고 했지만 6.25로 무산되었고 이후 장택상씨가 국회의원일 때 박정희준장에게 옮기라고 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여 계속 압력을 행사하던중 군사혁명이 일어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설계가 장택상씨 고향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본가를 보존하기 어렵게 되자

묘가 있는 산을 박정희에게 이전하고 방문하여 본가를 보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고속도고가 굽어지게 되었다는 일화를 말한후에 손석우지관에게 부탁해 김영삼부인 명숙여사 집안에서 왕이 난다는 자리에 조상묘를 옮기려다 포기하였는데 김대중 집안에서 구입하여 묘를 쓰게 되었으며 이순자씨 집안이 아버지와 삼촌의 별을 합하면 다섯일 때 공원묘지에 묘가 있어 옮기고 나서 왕비가 된다고 하는 꿈을 꾸었다고한다
08:00 칠곡 휴게소에 도착해 따끈따근한 국에 밥을 말아 아침을 먹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10:05 눈앞에 대전월드컵 경기장이 보이고 차는 예산,공주방향인 32번 국도를 달린다
광수산악회장의 문용기선조가 3.1운동시 오른손에 태극기를 흔들다 잘리자 왼손으로 옮겨 흔들었고 왼손마저 잘리자 입으로 외치다 일경의 총검에 돌아가셨으니 애국정신이 유관순 보다 높으니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는 주장과 계룡산과 공산성을 설명하고 금강이 부여에서만 백마강이 되고 부여를 지나면 금강이 된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병준자문님이나 광수산악회장님의 기억력이 놀랍고 종사에 관한 열정이 존경스럽다.

10:45 청양 갈림길을 지나서도 계속 32번길을 달리다 11:10  아산쪽인 39번 국도를 따라 가다 11:20 고간원지의 팻말앞에 차를 세웠는데 고간원이 보인다
대형차는 진입할 수 없어 하차하니 길옆에 전북의 버스한 대와 서울의 버스 2대가 주차해 있고 250미터 정도를 걸어 고간원 앞에 도착하니 자량 32대가 주차해 있는데 참례인원은 300여명 정도 일 것 같은데 마이크에서는 집사를 찾는데 사준 기환씨, 봉노 택주씨 봉작 태기씨와 병해씨 전작 병수씨와 호범씨 등의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금강제에서 청주 한잔 마시고 태훈일가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는데 단청이 많이 벗겨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제사에 참례하였는데 실존하는 최고 선대의 묘제여서 더욱 의의가 깊은 데 비석의 글자에 색이 바래 읽지 못하고 주변의 쇠로 친 담은 보기가 좋지 않았다.   12:26 분축으로 행사를 마치고 20여분 줄을서 기다려 도시락을 받았는데 기분이 별로인데 고간원의 담을 다시하고 단청공사도 한다는 관리위원장님의 말씀이 계셨다. 서울에서 뵌 종근부회장님께 인사를 올린후 고창의 문동호님이 찾으셔서 홈페이지에 자료를 넣었으면 하시기에 자료를 보내 달라고 했고 마지막에 밥을 타서 태훈씨와 함께 산청일가들과 합류해 술을 나누고 대종회 사무국장님을 뵈었으나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약한 비를 맞으며 차에 올라 13:25 종채제주회장님의 인사가 있은후 38명이 출발했다
14:00 마곡사주차장에서 종채회장님을 다시 만나 제주종친회 홈페이지에 관한 말씀을 드렸더니 남제공에서 만드는 족보에 의계를 넣은 것이 문제라고 하시는데 "저도 전의 남제공 족보를 보니 남제공 몇세라고 표시되어 보기가 힘들더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태화산(泰華山) 남쪽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구 본사로 신라 보철화상의 설법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삼밭처럼 골짜기를 채웠다 하여 마곡사라고 한다고 한다.
14:05:매표소에서 2000원을 주고 표를 구입하고 시내를 따라 오르니 마곡사 낙엽축제(10.20-11.18) 기간중이라 광목에 불화를 그려 걸었고 둘러쳐진 광목에 페인트로 관람객의 글씨나 그림도 그려져 있는데 포스트가 단순하면서도 특이했다. 영은암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니 청기와에 푸른단청을 하고 벽오동을 심어 모두가 푸른색으로 통일되어 인상적이고 댓돌에는 하얀 고무신 3컬레만 씻어 세워두었을 뿐 경내는 바람도 조심해 지나가는듯 보이지 않는 정적으로 가득찼다.
10:15 마곡사 경내에 들어 해탈문을 지나는데 금강력사가 오른편에 있고 보현동자와 문수동자님이 코끼리와 해태를 타고 있었다. 사천왕문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니 김구 은거지 비석이 있고 라마교 형식의 오층석탑이 마당 중앙에 있고 약수터에서 물맛을 보고 경내의 사진만 찍고는 명부전에 갔는데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시왕(十王)을 모셔 시왕전 자장전 명왕전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안내글이 있다.
14:45 마곡사를 떠나 유성에서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안의 막춤이 시작된다
16:40 황간휴게소의 정자에서 영훈회장님 사모님이 준비하신 술과 안주로 족의를 다졌다 17:15 출발하여 앞으로 종친회 총회에서는 가수 초청없이 우리끼리 선발하여 한다며 몇분의 노래가 있었고 사회가 병준청년회원으로 바뀌는 막간에서의 나는 "오늘 어르신들의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선조묘사에 참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다고 전제하고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그림을 해석하니 요즈음 아이들 버릇없다는 내용이 있다는데 80노인은 50아들 걱정하고 50아들은 20딸을 걱정한다고 하니 우리 청년회도 염려말고 맡기시면 되겠고 청년회는 분발하여 정보화의 선봉이 되어 주십사 하였으며 종친회에 와 보니 모든 것이 되어 있어 내가 할 일을 찾은 것이 홈페이지이니 참례기나 글들을 보내 주셔서 함께 만드는 홈페이지가 되도록 해 주십사고 부탁말씀을 올렸다 이어 종구님이 사회를 자청하여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다
19:10 평사휴게소에서 대구 일가님이 내리시고 내차례가 되어 3000미터 산은 올라도 도레미파솔 이상은 올라가지 않으니 말이야기로 대신 한다면서 유모어로 대신하려했으나 노래는 해야 한다 하여 찔레꽃을 불렀고 흥겨운 분위기에서 언양휴게소에 도착하여 오늘 향사의 축관 경동님, 산신축관 칠준님 집사를 맡으신 상석님이 가락국수를 대접하였다. 종친회에 도착하여 병준님 부부와 함께 짐을 옮기고 병준부인은 국이 변질되지 않도록 데우는 동안 설거지까지 마치고 집으로 왔다

충숙공묘소 및 고간원 관리 제안서

2004년 2월 4일 종무회의    글 : 문형동 종무위원

묘제 축문 직함

영정

고간원 안내판

충숙공 안내판 및 고간정사 활용

조경

경절공 및 경정공 설단

제안요지

충숙공 선조의 유적에 대해 숭조정신을 발휘하여 보존관리는 물론 治山, 造景 등의 사업에 있어서는, 우리 조상의 유적이기도 하거니와 국가의 문화재로서 품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관리․조경하는 일이 바람직하고, 충숙공 선조의 업적과 정신을 옳게 전할 수 있는 안내판과 조형물을 배치함으로서 자손된 도리를 잘하는 것이라 여겨지며, 타성에게도 전범이 되고 자랑스러울 것이기에 위의 내용으로 의견을 제안함.

1. 忠肅公 墓祭 祝文 職銜

현재의 축문

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都僉議 元輔 上宰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太子太保 諡忠肅公

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高麗 때 文官의 正1品 品階. 高麗初에 開國功臣에게 授與하다 잠시 中斷, 高麗末 忠烈王 34년에 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고쳐사용됨.
朝鮮 때 大匡 輔國 崇祿大夫로 고쳤음

都僉議

中書省 門下省 尙書省의 3省을 합해서 僉議府라 했던 것을
忠烈王 12年 都僉議使司로 고쳤던 官職이므로 適切하지 않음.

元輔

領議政의 別稱

上宰

宰相을 일컬음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中書侍郞平章事는 高麗 때 中書門下省의 正2品.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는 잘못된 내용. 門下侍中에 가운데 들어갈 수 없음.

太子太保

太保는 三公의 하나.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으로 이름지었음

축문 수정안

明宗庭享功臣 權判吏部事 太子太保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修國史 諡忠肅公

明宗庭享功臣

明宗 廟庭配享(庭享)功臣의 뜻임. 한 왕조에 壁上功臣은 여러 名이 될 수 있으나
廟廷功臣은 한 王朝에 2人뿐이므로 貴한 功臣이요 史實대로 임

權判吏部事

班次 第一의 首相. 고려시대에는 班次第一의 宰相을 首相이라 부르고, 班次第二의 宰相은 二宰 亞相이라 하였다.
首相에게는 判吏部事를 兼帶케 함으로써 人事權을 掌握케 한 것이다.
보통 고려의 首相은 門下侍中이다.
門下侍中이 아니더라도 班次第一의 首相이면 判吏部事를 兼하게 마련이다.
『고려사』에「文武銓選, 分委選摠郞, 以首相領之」라 하여 文武班의 銓選을 分委한 選部(吏部)와 摠部(兵部)를 首相과 亞相이 각각 領之한다는 것은 이를 표시한 것이다.
三宰는 判戶部事가 됨이 원칙이다

太子太保

정1품. 太保는 三公의 하나로서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임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中書省과 門下省의 平章事를 兼하심. 平章事는 朝鮮時代에는 贊成事로 바뀜.
侍中 또는 政丞의 다음

修國史

史館의 정2품으로 毅宗實錄을 編纂하심

2. 忠肅公 影幀 (초상화)

인물의 모습(形)과 내면(影)을 화가가 그린 繪畵를 말한다. 이 초상화는 자손들의 조상숭배 대상으로 갖추어야 할 중후하고 숭고한 면모를 최대한 이상적으로 구현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런데 현존의 충숙공 초상화는, 모습면에서 文臣이요 많은 유학자를 길러낸 名儒의 숭고함이 보이지 않고 武臣의 경직된 像으로서 친근감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관복의 색깔도 자색에서 벗어나 홍색에 가깝다.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문무관 겸직이라는 잘못된 인식 아래 무관을 중히 여겨 그린 탓에 인자하고 근엄한 모습이 아닌 무신의 초상화였으므로 필자는 봉안을 반대하였으나 최종심의시 불참으로 결국 봉안되었다. 하지만 상장군은 곧 무신정권하에서 중방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벼슬(무식한 무신들의 자문역할, 무신들의 전횡을 견제하였음)이지 상장군의 직함으로 兵權을 호령하신 적이 없고, 또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결코 명예롭지 못한 직함이다. 그러므로 충숙공 선조의 참모습과 어지신 내면이 담긴 유학자의 氣稟의 초상화로 바꿔 봉안하는 일이 마땅하다.

3. 叩諫院 案內板 內容                

고간원지(叩諫院址)         기념물 제51호     소재지 :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산 32-1

현재

이곳은 고려 의종,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1163년(의종17)에 좌정언으로 왕에게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간곡한 상소를 하다가 지방 판관으로 좌천되었고,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3년) 이치림(李致霖)이 쓴 기문에 의하면 당시 공주 사람들이 그의 행적을 유구역 벽에 그림으로그렸다고 한다. 이 벽화는 임진왜란(1592)으로 소실되었다.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이곳에 묘소와 영당을 세웠다.
현재는 별도로 영당과 재실이 있으며 고간원(叩諫院)은 정각으로 보수하였다

수정안

이곳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1163년(의종17)에 좌정언으로 왕에게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간곡한 상소를 올렸으나 의종이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평으로 돌아가다 유구역 숙소 벽에 충간(忠諫)하는 시를 썼다.
1173년 유구역 객관을 수리할 때 화공이 벽화를 그렸는데, 뒤에 무의자(無衣子)는 충신이 조정 떠나가는 그림임을 알아 차려 시를 지은 이래 여러 시인들이 이에 차운하였다.
이 벽화는 임진왜란(1592)으로 소실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이치림(李致霖)이 쓴 기문에 의하면,
당시 공주 사람들이 이에 대한 시들을 모아 고을 수령에게 아뢰자 수령은 명이 긴 가래나무에 현판을 새겨 걸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묘소 옆에 고간원(叩諫院)을 옮겨 세웠고 정각으로 보수하였다. 현재는 별도로 재실과 영당이 있다.

이유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와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묘소와 영당을 세웠다.’는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

4. 忠肅公 案內板 및 叩諫精舍 活用

충숙공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影堂과 재실이 갖추어져 있으나 안내판이 없어 누구의 유적인지 방문자에게 친절한 안내를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TV의 ‘무인시대’ 방영으로 충숙공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 방문객이 많은데 관리면에서 소홀함이 있어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알리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또한 충숙공 선조의 忠諫했던 사실과 그 유적을 照明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 자손의 도리일진대, 현존의 고간원에는 당시에 충숙공께서 쓰셨던 忠諫詩와 여러 客이 차운한 시편, 그리고 고간원기 등이 걸려 있으나 자손들조차 알지 못할 지경이고 보면 현재 고간정사는 곧 고간원의 별채 성격인 만큼 이 강당에다 관련된 글들을 누구나 알기쉽게 한글(원문 포함)액자로 걸어 충숙공 조의 위업을 선양하여야 한다

5. 忠肅公 묘소 및 叩諫院 造景

고간원관리위원회에서는 건물의 단청 및 경내 조경을 착수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데, 한편 묘소 앞의 느티나무 등의 식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느티나무는 神木으로서 보통 마을 앞의 당산나무로 쓰이고 있는 바 묘소 앞이나 재실 영당 근처에는 식수하면 곤란하다.

  산소는 곧 산신의 영역이므로 이에 합당한, 그리고 범례에 비추어 식수를 함이 옳다고 본다. 왕의 능이나 명현들의 묘소를 둘러보고 거기에서 알맞은 격을 따와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 민족의 사상적 배경, 즉 유교사상과 도가사상을 담아 조경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요즘에는 학문적으로 風水造景이 연구되고 있는데, 거기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산소나 재실에 스며있는 天人合一思想, 그리고 조상과 자손이 하나가 되는 조상숭배사상이 뒷받침되는 식수가 되어야 한다.

  조경에 쓰이는 식물에게도 상징성을 두고 있는데, 洪萬選의『山林經濟』에 보면 가령 좌청룡(복숭아, 느티, 버들, 벽오동, 자두), 우백호(치자, 느릅, 석류, 산뽕), 남주작(매화, 대추), 북현무(벚, 능금, 살구, 진달래) 등과 같은 의미를 두기도 하였고, 상징성에 따라 등급 및 품계를 매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姜希顔의『養花小錄』에 보이는 花木九等品階論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花木九等品階論(강희안)

 

1등 :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2등 : 모란, 작약, 파초,

3등 :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

4등 : 소철, 瑞香花, 포도, 귤

5등 : 석류,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

6등 : 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나무, 오동나무

7등 : 배나무, 정향목, 목련, 앵두, 단풍

8등 :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나무

9등 : 해바라기, 금잔화, 석창포, 화양목

 

1품 : 소나무, 대나무, 연꽃

2품 : 모란

3품 : 사계화, 월계화, 영산홍, 석류, 벽오동

4품 : 작약, 서향화, 노송, 단풍, 수양버들, 동백

5품 : 치자, 해당화, 장미, 진달래, 백두견, 파초

6품 : 백일홍, 홍철쭉, 두충나무

7품 : 자두, 살구나무, 嬪嬙花, 목련, 향나무,

8품 : 蜀葵花, 山舟花, 옥매, 山薔花, 해바라기

9품 : 옥잠화, 연교화, 초국화, 석죽화, 무궁화, 개나리, 봉선화 등

또한 자연물에 의한 상징적 의미의 추구는 동양사상의 영향이나 古事逸話에 관련하여 吉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선조의 묘역이나 서원 사당에 길상적인 화목을 심어 자손들이 찾았을 때 은연중에 인품을 수양하는 공간으로 꾸미는 게 하나의 미덕이요 상례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크게 무성하면 묘소와 영당이재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숲이 중심이 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書院이나 祠堂에 식수를 할 때 정원을 꾸미듯 소박하고 넘치지 않는 花木을 심어 조화를 이루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아울러 나뭇가지가 무성하고 뿌리가 깊게 뻗은 나무는 낙엽이 많아 청소하기 어렵고, 무성한 가지 때문에 그늘진 곳은 썩기 마련이어서 관리에 번거롭다. 그리고 묘역 담장내의 식수도 금해야 하는 것이니 그늘진 곳은 잔디가 죽고 낙엽이 떨어지면 쓸어줘야 한다. 

  王陵을 보면 묘역 담장 밖으로 소나무가 있을 뿐 어떠한 수목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은 훤하게 티여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숭조 정신을 발휘하여 고간원의 보수 및 조경 사업에 착수하였으니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충숙공의 정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배치하여 방문객들이 관심있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이한 花木, 즉 와룡매나 배룡나무 영산홍 등 꽃도 볼 수 있고 老巨樹가 되어도 크게 자라지 않는 수목을 심어야 한다.

        상 징 성

  소                     재

 지조 절개 고귀한 기상

 부귀영화 고귀

 자손번성 무병

 무릉도원 탈속초연

 10장생

 신선세계

 辟邪逐鬼

 길상

 입신출세

 四季平安

 송구영신

 군자 순결 超世

 태평성세

 학자 무욕 분수

 열정 애정

 우정

 부부금실

 융성 번성 순결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소나무, 연꽃, 오동나무

 모란, 작약, 배룡나무, 계수, 오동, 닭, 원앙

 석류, 포도, 대추, 복숭아, 고추, 밤

 복숭아, 자두, 살구, 귤, 석류, 잣나무, 怪松, 거북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어성초), 거북, 학, 사슴

 주로 假山과 자연석으로 상징

 老巨樹, 대나무, 용, 봉황, 곰, 소

 소나무, 연꽃, 매화, 버드나무, 감나무, 백합, 梨花, 갈대, 용,

 호랑이, 봉황, 학, 백로, 꾀꼬리, 까치, 두견새, 갈매기, 기러기,   물오리 연꽃, 맨드라미, 잉어, 닭

 장미

 매화, 수선화, 동백(山茶花)

 연꽃, 살구

 오동, 벽오동, 대나무, 봉황

 회화나무

 동백, 앵두, 나비, 벌

 측백나무

 자귀나무, 복숭아, 원앙

 무궁화(木槿花) 등

♧ 위의 화목품계와 상징성 도표는 이대우(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  조경담당) 씨의   『風水造景』에서 발췌하였음.

6 . 敬節公 및 敬靖公 設壇 

경절공 휘 翼 1세조와 경정공 휘 公裕 2세조 두 선조의 설단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아쉬운 것은 무성공 설단시 함께 모셨더라면 이처럼 번거로움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난번 고간원보존위원회에서 공주 유구에 두 선조의 단소를 모신다는 회의를 통과시켰다고 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유보를 권한다.

歷史性 문제

역사란 한마디로 창조되어질 수 있다. 시조께서 남평에서 태어나시고 본관을 얻으셔 우리 후손들이 일천여 년 동안 남평을 본관으로 삼아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만일 공주 유구에 두 선조의 단소가 모셔진다면 백년이나 2백년 후에는 시조는 남평에서 태어나셨으나 경절공과 경정공의 단소가 공주에 있는 까닭이 있을 터이니 1세조부터는 공주에서 시작되었다고 公州誌나 혹은 다른 문헌에 기록해 놓으면 그게 氏族史가 되는 것이다. 씨족사란 후손들이 주장하는 대로 증명될 뿐 역사적으로 조명할 수 없는 맹점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고간원지 안내판에 오기된 내용 즉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처럼 먼 훗날에는 사실과는 다르게 쓰여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禮가 아니다

두 선조의 단소가 시조 유적산하에 모시는 일은 조금 소홀해도 미안하지 않지만 만일 고간원 우측 공지에 단소를 모신다면 아들과 손자의 故土에서 더부살이가 되어 민망해진다.

손자에게는 묘소와 영당 재실까지 갖추어져 있는데, 아버지와 조부는 손자의 묘역보다는 협소한 곳에 설단되는만큼 웃어른을 받드는 예로서는 죄송할 뿐이어서 유구의 경절공 경정공 설단은 禮가 아니므로 설단 추진을 중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여태까지도 기다렸으니 시간을 두고 연구 검토하여 남평의 시조 산하에 설단하는 방안을 강구함이 옳을 듯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공주 유구의 설단은 유보 되었음)

7. 結論

숭조 정신을 함양하여 위선사업을 하는 일은 경하할 일이요 대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한 일이 있으니, 심사숙고하여 집행해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위선사업 한다고 삼우당 선조의 묘소 병풍석을 해체하고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쌓은 일이다. 병풍석묘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 가치관을 무시하고 의욕만 넘쳐 위선사업을 하다보니 천추에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관계기관으로부터 문화재 지정을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경험이 있으니 우리 문중의 체면은 이미 땅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명예회복을 하려면 땅에 묻어둔 병풍석으로 복원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 충숙공의 유적지인 고간원도 도지정 문화재이니만큼 격이 높은 조경사업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이요 남이 보기 좋게 성공적으로 완성을 이룬다면, 모든 사람들의 칭송이 충숙공께 올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