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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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
문화재분류 |
충남지방 문화재 제51호 |
배향선조 |
3세 충숙공 諱 극겸 |
제향일 |
음력 10월 1일 11:00 |
충숙공 휘 극겸
선조님 유적지입니다. 충숙공 묘소는 남평문씨의 현존하는 묘소중 가장 오래된 묘소입니다.
충숙공은 중시조 경절공 휘 익(敬節公 諱 翼)의 손자로 왕께 충간하다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던중
유구에서 머무르시다 별세하신 이곳에 지었던 사당이 고간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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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문극겸(忠肅公 文克謙) 선생 약사(略史) 안내판 |
선생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니 고려 의종 17년(1122) 전라도 남평현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인 공유(公裕)인데, 시호는 경정공(敬靖公)이시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백부인 공인(公仁)의 음덕으로 산정도감(刪定都監) 판관(判官)이 되셨다. 이 때 세 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관원으로서는 세 번밖에 볼 수 없는 과거제도를 고쳐 다섯 번까지 허용하도록 왕에게 주청하여 조정의 의논이 그 의견을 좇아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고, 선생 또한 37세 때 문과에 급제하셨다. 벼슬이 계속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오르자 합문(閤門)에 엎드려 조정의 내시와 점장이로 인한 정사의 폐해를 상소하였는데, 의종은 받아들이지 않아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되시었다. 선생이 황주에서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하자 왕의 측근들이 이를 시기하여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다시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좌천시키려 했으나 강직한 신하를 지방관으로 연속 좌천시켜 언로(言路)를 막음은 옳지 않다는 간관(諫官)의 주청에 왕도 하는 수 없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제수하고 이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던 날 선생께서는 전중성(殿中省)에서 숙직을 하다 난군들에게 붙잡혔으나 평소 높은 명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옥에 갇히셨다. 의종은 거제도로 쫓겨가면서 선생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한다. 명종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의 벼슬을 새로 제수할 때 선생을 옥에서 석방하고 비목(批目)을 쓰게 하였다. 우승선 어사증승(御史中丞)에 제수되자 무신들도 자연 공을 의지하고 믿으며 옛적의 사실을 많이 물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지추밀원주사(知樞密院副使)에 임명되고, 정3품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셨지만, 송유인(宋有仁)의 시기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로 좌천되시었다. 사공 벼슬이 제수된 뒤부터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렴함을 탄복하고 칭송하였다. 송유인의 모함은 근신(近臣)으로서 왕의 거동에 호종하지 않았다 함인데, 선생께서는 모친 상중이어서 자식된 도리를 우선으로 실천한 효자이셨다. 명종도 국법을 따른 것이라 문책을 망설였으나 선생께서 좌천되기를 자청하여 그대로 되시었다. 좌천되신 지 1년만에 다시 태자소사(太子少師)로서 예전 벼슬로 복직하고, 오래지 않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시었다. 명종 13년(1183) 왕은 명인전에 장경도량을 베풀어 의식을 거행하고 절구시를 한 수 지어 선생께 하사함에 그 시에 차운하셨는데 군신간(君臣間)의 정의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셨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을 때 추밀부사(樞密副使) 조원정(曺元正)이 중서성의 공해전 전세(田稅)를 빼앗자, 선생은 그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는 소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올려 조원정을 좌천에 이르게 하였다. 정중부의 난과 김보당의 난 이후 유풍(儒風)이 떨치지 못하여 당시의 교육과 문풍(文風)이 땅에 떨어지다시피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명유(名儒)로서 세 번이나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어진 선비를 뽑았고,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같은 문장가를 배출하는 등 문치(文治)를 부활시켰다. 당시 문관으로는 반차가 한문준(韓文俊)의 다음이 선생이요 최세보(崔世輔)가 그 다음이었다. 반차를 최세보에게 양보하는 뜻을 왕에게 전하자 그 겸양을 아름답게 여긴 명종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예부사(判禮部事)를 겸해 아상(亞相)을 삼았다. 이어 명종 16년 중서(中書) 문하(門下) 두 성의 시랑평장사와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셨으며,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의종실록을 편찬하셨다. 명종 17년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수상의 반열에 오르시고, 명종 19년(1189) 9월에 운명하시니 선생의 춘추 68세였다. 왕은 조정의 정사를 3일간 폐하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리셨다. 부인은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이고, 선생의 묘소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언덕에 모셔져 있으며, 명종 묘정(廟廷)에 배향되시었다. 매년 10월 초하루에 묘제를 지낸다. |
고간원(叩諫院) 안내문 |
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며, 정문의 이름은 망일(望日)이라 한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던(叩馬而諫)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충간(忠諫)에 견주어 유래된 이름이고, 망일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이 빛난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충숙공께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의왕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태우자, 관복을 벗고 귀향 도중 유구역(維鳩驛) 벽에다 마음에 품은 충절의 시를 썼다. 뒤에 역을 수리할 때 그 내용이 화공에 의해 벽화로 그려지고, 그림을 본 여러 과객(過客)들이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차운시(次韻詩)가 뒤를 이어 유명해졌는데, 묘소로 인해 마을 이름도 고간동(叩諫洞)이라 불려졌다. 고간원은 조선 태종의 명으로 옛터에 세워졌으나, 임자년 홍수에 원사(院舍)가 허물어지고 원판(院板)이 표류하자 유구역 근처의 주민들이 제액(題額)을 인양하여 유구역에 두었다. 그 후 공주목사 곽간(郭趕)은 충간의 사실을 듣고 감탄하며 현판을 걸도록 하였는데, 선조 23년(1590) 진사 이치림(李致霖)이 고간원기(叩諫院記)를 지었다. 임진왜란 중에 불타버리자 다시 건물을 짓고 광해군 9년(1617) 생원 최진명(崔振溟)이 고간원중수기(叩諫院重修記)를 지어 걸었다. 철종 2년(1851) 후손들이 현판을 수습하여 고간원을 중건하였고, 순종 1년(1907) 중수하던 중 자금이 모자라 1914년 2간(間)으로 줄여 공사를 완료하면서 현판을 교체하였다. 1989년 고간원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별사(別舍)로 충숙영당과 고간정사(叩諫精舍)를 금강재(金岡齋) 뒤에다 신축하였다. 고간원지(叩諫院址)는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
고간원(叩諫院) 상량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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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8월이십육일 후손 감찰 학술 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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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뜰을 치며 간쟁함은 당현의 높은 덕망 특별히 청직하였고 원을
의론하여 이름 붙임은 송상의 장려가 가장 현저하다. 실로 그 선임이
중함에 이름을 이처럼 부름이라 택리를 표하여 충성을 세움은 우럴어보니
전대에 이같았고 철문 두드리며 잘못을 지적함 또한 선철로부터 구해들음이라.
결연한 충성충성보임에 교서에 인하여 특별히 간관을 제수하고 운감이
빛에 젖어 다시 훌륭히 세움에 붉은 괴리가 정직함 더욱 덜어나더라.이미
전왕이 정표의 의 다루었으니 하물며 후손들 추원하는 생각 간정치 않으랴
성하도다 우리 충숙선조는 고려조의 명경이요 세상에 특별히 강직한
분이라 대궐에 들어 유궐을 보함에 어찌 명정의 비난꺼리며 어전에서
시비를 다춤에 아침햇살에 우는 봉일 뿐 아니라 일시의 권신들이 모두
량간을 펼치메두려움 품고 백세의 사표들이에 방정한 덕 추중하네 어찌하여
길더듬는 장님이 경계함 알렸는고 이로부터 벼슬길에 풍파가 많았네
청포로 합문에 복청하는 대열에서니 의에 가히 둘 수 없고 마침내 백의로
물러나는 날에 인하여 지명이 되었네 이에 산소드린곳을 계산 남쪽 줄기요
이에 사셨던 곡은 웅천서쪽 고을이라 이워로가 빛을 다툼에 정려각이
빛나고 풍우가 지나갓으나 열루의 도화 완연하네 |
고간원(叩諫院) 중건기(重建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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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3년(1590) 3월 일 진사(進士) 이치림(李致霖)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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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언(正言) 벼슬하던 문극겸(文克謙)이 왕에게 충간(忠諫) 드린 일로 쫓겨나 백의필마(白衣匹馬)로 이 역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벽에다 썼었다 마침 역의 다락집을
중수하면서 단청을 한 박(朴)씨는 화상을 그려 벽화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그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몰랐었다. 본 역의 옛 자취는 문헌이 증명해 주어, 오늘에 이르는 천년 뒤까지 그 풍채를 사모하여 우러러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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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李仁老)의 만사(輸詞)에 "어제 공의 옛 별장을 지나다가 초목이 울창하고, 샘물이 돌등 에서 나는데 공이 본래 노시던 곳이었다"라는 그 별장이 과연 어디였을까. 별장은 본래 사대부와 선비들의 청유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선비의 은둔처로 한몫을 했었다. 그러나 식사를 함에 반찬 그릇이 두셋에 불과하였고, 화려하게 무의있는 옷을 입지 않았으며, 한때는 정사(政事)가 부당하게 이뤄지자 녹(祿)을
받지 않았던 청백리였으니, 자신이 건영(建營)한 별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시주(詩酒)와 한일(關逸)한 나날을 보냈던 죽고칠현(竹高七賢)의 이인로(李仁老) 이담지(李灌之) 오세재(吳世材) 가 공의 문인(門人) 문생(門生)이었으니, 이러한 사람들이 별장을 지어 공파 함께 청유를 나누었을 것이요, 아니면 임금이 곽여(郭輿)에게 사액별장(賜額別莊)이 내렸던 것처럼 공에게도 충간(忠諫)의 시로서 연고가 있는 유구역 근처에 이같은 임금의 은혜가 베풀어졌을 것이다.
또 사당(祠堂)이라
함은, 고려시대에는 사대부의 묘 근처에 재암(齋암)을 짓고 조상의 영정을 봉안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곧 영당(影堂)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공주군지(公州郡誌)의 고간원조(卵諦院條)에 '본원(本院)은 유구면 추계리에 있으니, 본래 고려 충신 문극겸(文克謙)의 향사원(事祀院)으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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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 계월망 후 3일 후손 진사(進士) 양 현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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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즉 호서의 큰 도시이다. 북으로 서울을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하여 명승으로 일컬으니 사대부들의 투각과 원림이 더러 그
간에 있음을 보겠다. 내가 전일 과거보러가며 매양 이곳을 지나면서
그 지령과 일걸의 웅장함과 빼어남을 복 감상하며 탄미하였다. |
신문기사중앙일보 [사회] 1999년 06월 02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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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3대조 묘에서도 쇠말뚝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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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남평문씨
3대조 충숙공묘에서도 쇠막뚝과 식도가 1개씩 나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묘를 관리하는 문용화(76.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씨는 "문중
유적관리소에서쇠막뚝이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해 조사를 한 결과 1일 오후 4시께 봉분 한 가운데에서 쇠말뚝과 식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발견된 쇠말뚝과 식도가 이충무공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인 것으로 미뤄 구속된 양순자씨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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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
내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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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世 충숙공 諱극겸 영정 |
신도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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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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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제 입구문 |
고간원터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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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문(금강제 출입문의 오른편과 왼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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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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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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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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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영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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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문(대문)현판 |
충숙공영당 현판 |
왕이 극겸선조께 내린 절구시(絶句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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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대한 화답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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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촌영대만사침 |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고 |
유여우려목가잠 |
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
단회졸지일난단 |
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
백발천경기만잠 |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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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광임염암상침 |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두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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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사량일점심 |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깊어 지나이다 |
自 原 君 恩 猶 未 報 |
자원군은유미보 |
임금님 은혜 갚자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
情 白 髮 己 盈 簪 |
무정백발기잉잠 |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
간언이 무시되니 사직하고 하향하면서 지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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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운절함비천예 |
주운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함 아니고 |
원앙당차개위신 |
원앙이 수레 가로막은 일 일신 위함일까 |
일편단성천미조 |
일편단심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
강편영마퇴준순 |
여윈 말 세게 채찍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린다 |
2009년 묘제사진 |
성금 접수하시는 남주 영종님과 성금을 내는 일가님들 |
축문 |
진설 |
삼헌관(경규, 병준, 상배) |
분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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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승열님 |
초헌례 |
찬창 |
집사님들 |
아헌례 |
종헌례 |
산신제 |
산신제 축문 |
음복례 |
헌관 기념촬영 |
제사후 음복 |
홈관리자와 기념촬영 |
홈관리자와 기념촬영 |
부산종친회 2009년도 참석 사진 |
동준회장 인사 |
정근총무 사회 |
종구산악회장 산행안내 |
버스내 노래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
학술발표회(2009년 11월17일 공주문화원) |
안내판 |
공주종친회, 문동호 |
대종회장 광주종친회장 |
사회자 |
발표회장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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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 |
2002년 충숙공 묘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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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 |
박주한잔, 과객의 식단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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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창 병준부산종친회부회장과 장호전례이사 |
집례 신만부산종친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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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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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도시락 분배로 소주도 한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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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성의 제주종인들 기념촬영 |
부산으로 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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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들의 담소 |
묘제는 축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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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의 마곡사 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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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춥다 덕유산의 설경 |
충숙공 유적보존회 이사회(묘제 전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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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2004년 |
2004년 |
2002년 |
2001년 |
2001년 |
문병달 |
문병달 |
문수상 |
문병달 |
문용호 |
문병달 |
글솜씨는 없으나 행사에 참례한 소감을 적었습니다. |
2005년 충숙공 묘제(11월2일 음10월1일)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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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병준총무님과 함께 승합차로
교대앞에 도착하여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
2004년 충숙공 묘제(음력 10월1일, 11월 12일)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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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병준총무와 교육대학앞에 도착하니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회장님, 상근부회장님등 20여분이 도착해 계셨다. 실고온
짐을 버스에 옮기고 오신 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오시는 분들과 반가운
인사들을 하면서 출발시각인 06:10 점검하니 예약하신 분중 두사람이
오지 않았는데 병국님만 도착하시어 06:15 출발하였는데 어제 총회를
위하여 칠순고문 병영부회장, 용표자문이 기차편으로 가셨으니 올 때는
좌석 2개가 부족하겠기에 보조의자를 실었다. |
2004년 충숙공 묘제(2) -문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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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음력10월 1일 새벽5시 요란한 폰 알람 소리에 황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남평문씨
3세조 이신 극겸 선조님의 묘제일 이시다. 묘소가 있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
10여분후 또다시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요동을친다.그저께부터 선조님의 묘제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한 가까운곳에 사시는 종친분 이시다 ,
고맙게도 아드님이 출발장소 까지 모셔드리겠다는 연락이다. |
2002년 충숙공 묘제 11월4일~5일(음력10월 1일) -문병달 |
12:20 헌관과 집사는 전날 도착하라는 통지가 있어 동성제 회의중에
집례를 맏은 신만님, 찬창을 맡은 병준형님 전작을 맏은 청년회 병준씨와
함께 나는 기자 자격으로 함께 출발했다 옆방인 308호는
진주에서 오신 일가들 6분이 함께 계시고 우리는 309호인데 방은 구석구석이
거미줄이고 때까지 걸려있어 청소부터 하느라 부산을 떨었는데
다행인 것은 방은
따끈따근한 것이었다. 옆방의 대화 소리에 잠이 깨니 06:00 세수를 마치고 07:00 경 국장과
장호님이 들렸는데 신만님과 형님은 묘제는 참신이 먼저이고 강신이 뒤인데 홀기는 강신을
먼저 하게 되어 있으니 바로 잡아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나 전례이사인 장호님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홀기대로 하라고 하니
앞으로 추진 되어야 할 남평문씨의 제례의 순서와 진설의 통일화는
아득하게 멀어 보이고, 일회용 봉투에 들은 밥과 찬을 받아 일가들과 함께 중식을 마치고 |
2001년 충숙공 묘제 참례기(2) -문용호 |
11월 11일(둘째 일요일) 11:00 남문청년회, 35세손 문용호작성 |
지난 11월15일은 음력 10월 초하루였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1년 계획은 정초에..."라는 말이 있지만 옛날부터 추수를 끝내고
조상께 감사하는 달 10월! 쏴한 아침 바람이 제법 춥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관광버스 사업을 하면서 종친회 일에도 열성적인 성만(成萬)일가가 운전하는 관광버스는 우리 모두가 최고의 기분으로 쾌적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었는데 차안이 너무 덥다는 불평도 못하고 고속도로를 미끄러 지듯 달려 고간원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종친들이 모여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종친회 회장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숙공 묘제에 많이 참석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숭조(崇祖)의 의미를 설명듣고 "오늘은 이렇게 하루만에 다녀 올 수가 있지만 예전에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이틀씩 걸렸다. 오늘도 며느님들이 여럿이 참석했지만 우리 문씨가문이 융성,발전하기 위해서는 며느님들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는 어른들의 감회어린 말씀도 있었다. 못난 후손이 머리숙여 조상의 음덕(陰德)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종친들과 같이 지낸 충숙공 향사의 의미를 새겨 보겠다고 마음 먹기는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조상의 유지(遺地)를 찾아 묘제를 지내면서 느낀 소회(所懷)와 감동이 어찌 없겠는가. 없는 글재주로 개인적인 생각을 중언부언(重言復言)하기 보다는 전국에서 모인 종친들 모두가 엄숙히 절하고 유업을 생각했던 충숙공 선조가 누구인지 알아 보는 것으로 그날의 의미를 되새겨 간직할까 한다. 중시조(中始祖)와 충숙공(忠肅公) 새로운 역사 사실을 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기도 한다. 고 말한 유교수처럼 신문을 보던 나도 흥분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800여년 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조상을 만났으니 흥분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문공유(1088~1159)는 고려 16대 예종(1105~1122 재위)때 급제하여
18대 의종(1146~1170년 재위)때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집현전
태학사 지문하성사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지추밀원사를
추증받은 분이다. 1. 충숙공연보 2. 충숙공의 치적(治積) 충숙공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 실린 만시(挽詩
; 죽은이를 애도하여 지은시)를 보자 옥골영영응상태(玉骨英英應上台) 영특한 그 모습 상대성을 응했었고 한글세대인 나는 한시를 잘 모르지만 마지막 연만 봐도 선조께서 만인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겠다. 또 조선왕조 선조때 문필가로 지봉유설을 남긴 이수광은 우리나라에 글씨로서 유명한 사람은 신라때 김생, 고려때 요극일 문공유 문극겸 이망 중(승려)탄연 영업이 있고 우리왕조에는 안평대군 강희안 성임 황기로가 뛰어나다. 남창, 김현성은 서법에 능한데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의 붓솜씨는 다른 기능에 비하여 가장 좋아 중국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2001년도 고간원 묘제 참례기 -문병달 |
이침 식사 준비를 위해 05:00 종친회에 도착하여 불위에 국을 올려 데우고 준비물과 그릇 등을 갖여 갈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컴퓨터를 만지는데 병준님 내외분이 도착하셔서 함께 준비를 마치고 07:20 도착한 버스에 짐을 실고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칠순고문님 경동부회장님 칠준부회장님 상석운영위원님은 전날 출발하시고 버스에 승차한 분은 33분 이시고 경산에서 명규님 부부가 승차 한다고 한다.
07:25 영훈회장님은 윤리운동과 청년회주도로 도덕재무장 운동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경산휴게소에 차를 세워 중단되었고, 용표 조카님 내외분이 합류하셨다
이어 부회장님은 동래정씨의 선대 묘소에 대한 전설을 말씀 하시고
07:55 병준자문위원님은 산소에 관한 일화를 말씀 하시는데 금오산에 임금이 날 명당이 있다 하여 장택상씨 부친이 산을 구입하고 지관을 초청하여 찾았더니 박정희의 조부묘 자리라고 하기에 이장하라고 했으나 해방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다시 옮기라고 했지만 6.25로 무산되었고 이후 장택상씨가 국회의원일 때 박정희준장에게
옮기라고 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여 계속 압력을 행사하던중 군사혁명이 일어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묘가 있는 산을 박정희에게 이전하고 방문하여 본가를 보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여 고속도고가 굽어지게 되었다는 일화를 말한후에
손석우지관에게 부탁해 김영삼부인 명숙여사 집안에서 왕이 난다는 자리에 조상묘를 옮기려다 포기하였는데 김대중 집안에서 구입하여 묘를 쓰게 되었으며 이순자씨 집안이 아버지와 삼촌의 별을 합하면 다섯일 때 공원묘지에 묘가 있어 옮기고 나서 왕비가 된다고 하는 꿈을 꾸었다고한다
10:45 청양 갈림길을 지나서도 계속 32번길을 달리다 11:10 아산쪽인 39번 국도를 따라 가다 11:20 고간원지의 팻말앞에 차를 세웠는데 고간원이 보인다 |
충숙공묘소 및 고간원 관리 제안서 |
2004년 2월 4일 종무회의 글 : 문형동 종무위원 |
묘제 축문 직함 |
영정 |
고간원 안내판 |
충숙공 안내판 및 고간정사 활용 |
조경 |
경절공 및 경정공 설단 |
제안요지 |
충숙공 선조의 유적에 대해 숭조정신을 발휘하여 보존관리는 물론 治山, 造景 등의 사업에 있어서는, 우리 조상의 유적이기도 하거니와 국가의 문화재로서 품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관리․조경하는 일이 바람직하고, 충숙공 선조의 업적과 정신을 옳게 전할 수 있는 안내판과 조형물을 배치함으로서 자손된 도리를 잘하는 것이라 여겨지며, 타성에게도 전범이 되고 자랑스러울 것이기에 위의 내용으로 의견을 제안함. |
1. 忠肅公 墓祭 祝文 職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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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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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都僉議 元輔 上宰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太子太保 諡忠肅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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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
高麗 때 文官의 正1品 品階. 高麗初에 開國功臣에게 授與하다 잠시 中斷, 高麗末 忠烈王 34년에 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고쳐사용됨. |
都僉議 |
中書省 門下省 尙書省의 3省을 합해서 僉議府라 했던 것을 |
元輔 |
領議政의 別稱 |
上宰 |
宰相을 일컬음 |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
中書侍郞平章事는 高麗 때 中書門下省의 正2品.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는 잘못된 내용. 門下侍中에 가운데 들어갈 수 없음. |
太子太保 |
太保는 三公의 하나.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으로 이름지었음 |
축문 수정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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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庭享功臣 權判吏部事 太子太保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修國史 諡忠肅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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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庭享功臣 |
明宗 廟庭配享(庭享)功臣의 뜻임. 한 왕조에 壁上功臣은 여러 名이
될 수 있으나 |
權判吏部事 |
班次 第一의 首相. 고려시대에는 班次第一의 宰相을 首相이라 부르고, 班次第二의 宰相은 二宰 亞相이라 하였다. |
太子太保 |
정1품. 太保는 三公의 하나로서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임 |
中書門下侍郞平章事 |
中書省과 門下省의 平章事를 兼하심. 平章事는 朝鮮時代에는 贊成事로 바뀜. |
修國史 |
史館의 정2품으로 毅宗實錄을 編纂하심 |
2. 忠肅公 影幀 (초상화) |
인물의 모습(形)과 내면(影)을 화가가 그린 繪畵를 말한다. 이 초상화는 자손들의 조상숭배 대상으로 갖추어야 할 중후하고 숭고한 면모를 최대한 이상적으로 구현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런데 현존의 충숙공 초상화는, 모습면에서 文臣이요 많은 유학자를 길러낸 名儒의 숭고함이 보이지 않고 武臣의 경직된 像으로서 친근감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관복의 색깔도 자색에서 벗어나 홍색에 가깝다.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문무관 겸직이라는 잘못된 인식 아래 무관을 중히 여겨 그린 탓에 인자하고 근엄한 모습이 아닌 무신의 초상화였으므로 필자는 봉안을 반대하였으나 최종심의시 불참으로 결국 봉안되었다. 하지만 상장군은 곧 무신정권하에서 중방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벼슬(무식한 무신들의 자문역할, 무신들의 전횡을 견제하였음)이지 상장군의 직함으로 兵權을 호령하신 적이 없고, 또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결코 명예롭지 못한 직함이다. 그러므로 충숙공 선조의 참모습과 어지신 내면이 담긴 유학자의 氣稟의 초상화로 바꿔 봉안하는 일이 마땅하다. |
3. 叩諫院 案內板 內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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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지(叩諫院址) 기념물 제51호 소재지 :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산 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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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이곳은 고려 의종,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1163년(의종17)에 좌정언으로 왕에게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간곡한 상소를 하다가 지방 판관으로 좌천되었고,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이곳에 묘소와 영당을 세웠다. |
수정안 |
이곳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1163년(의종17)에 좌정언으로 왕에게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간곡한 상소를 올렸으나 의종이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평으로 돌아가다 유구역 숙소 벽에 충간(忠諫)하는 시를 썼다. |
이유 |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와 |
4. 忠肅公 案內板 및 叩諫精舍 活用 |
충숙공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影堂과 재실이 갖추어져 있으나 안내판이 없어 누구의 유적인지 방문자에게 친절한 안내를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TV의 ‘무인시대’ 방영으로 충숙공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 방문객이 많은데 관리면에서 소홀함이 있어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알리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또한 충숙공 선조의 忠諫했던 사실과 그 유적을 照明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 자손의 도리일진대, 현존의 고간원에는 당시에 충숙공께서 쓰셨던 忠諫詩와 여러 客이 차운한 시편, 그리고 고간원기 등이 걸려 있으나 자손들조차 알지 못할 지경이고 보면 현재 고간정사는 곧 고간원의 별채 성격인 만큼 이 강당에다 관련된 글들을 누구나 알기쉽게 한글(원문 포함)액자로 걸어 충숙공 조의 위업을 선양하여야 한다 |
5. 忠肅公 묘소 및 叩諫院 造景 |
고간원관리위원회에서는 건물의 단청 및 경내 조경을 착수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데, 한편 묘소 앞의 느티나무 등의 식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느티나무는 神木으로서 보통 마을 앞의 당산나무로 쓰이고 있는 바 묘소 앞이나 재실 영당 근처에는 식수하면 곤란하다. 산소는 곧 산신의 영역이므로 이에 합당한, 그리고 범례에 비추어 식수를 함이 옳다고 본다. 왕의 능이나 명현들의 묘소를 둘러보고 거기에서 알맞은 격을 따와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 민족의 사상적 배경, 즉 유교사상과 도가사상을 담아 조경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요즘에는 학문적으로 風水造景이 연구되고 있는데, 거기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산소나 재실에 스며있는 天人合一思想, 그리고 조상과 자손이 하나가 되는 조상숭배사상이 뒷받침되는 식수가 되어야 한다. 조경에 쓰이는 식물에게도 상징성을 두고 있는데, 洪萬選의『山林經濟』에 보면 가령 좌청룡(복숭아, 느티, 버들, 벽오동, 자두), 우백호(치자, 느릅, 석류, 산뽕), 남주작(매화, 대추), 북현무(벚, 능금, 살구, 진달래) 등과 같은 의미를 두기도 하였고, 상징성에 따라 등급 및 품계를 매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姜希顔의『養花小錄』에 보이는 花木九等品階論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花木九等品階論(강희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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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2등 : 모란, 작약, 파초, 3등 :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 4등 : 소철, 瑞香花, 포도, 귤 5등 : 석류,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 6등 : 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나무, 오동나무 7등 : 배나무, 정향목, 목련, 앵두, 단풍 8등 :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나무 9등 : 해바라기, 금잔화, 석창포, 화양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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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품 : 소나무, 대나무, 연꽃 2품 : 모란 3품 : 사계화, 월계화, 영산홍, 석류, 벽오동 4품 : 작약, 서향화, 노송, 단풍, 수양버들, 동백 5품 : 치자, 해당화, 장미, 진달래, 백두견, 파초 6품 : 백일홍, 홍철쭉, 두충나무 7품 : 자두, 살구나무, 嬪嬙花, 목련, 향나무, 8품 : 蜀葵花, 山舟花, 옥매, 山薔花, 해바라기 9품 : 옥잠화, 연교화, 초국화, 석죽화, 무궁화, 개나리, 봉선화 등 |
또한 자연물에 의한 상징적 의미의 추구는 동양사상의 영향이나 古事逸話에 관련하여 吉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선조의 묘역이나 서원 사당에 길상적인 화목을 심어 자손들이 찾았을 때 은연중에 인품을 수양하는 공간으로 꾸미는 게 하나의 미덕이요 상례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크게 무성하면 묘소와 영당이재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숲이 중심이 될 우려가 있다. 王陵을 보면 묘역 담장 밖으로 소나무가 있을 뿐 어떠한 수목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은 훤하게 티여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숭조 정신을 발휘하여 고간원의 보수 및 조경 사업에 착수하였으니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충숙공의 정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배치하여 방문객들이 관심있게 둘러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이한 花木, 즉 와룡매나 배룡나무 영산홍 등 꽃도 볼 수 있고 老巨樹가 되어도 크게 자라지 않는 수목을 심어야 한다. |
상 징 성 |
소 재 |
지조 절개 고귀한 기상 부귀영화 고귀 자손번성 무병 무릉도원 탈속초연 10장생 신선세계 辟邪逐鬼 길상 입신출세 四季平安 송구영신 군자 순결 超世 태평성세 학자 무욕 분수 열정 애정 우정 부부금실 융성 번성 순결 |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소나무, 연꽃, 오동나무 모란, 작약, 배룡나무, 계수, 오동, 닭, 원앙 석류, 포도, 대추, 복숭아, 고추, 밤 복숭아, 자두, 살구, 귤, 석류, 잣나무, 怪松, 거북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어성초), 거북, 학, 사슴 주로 假山과 자연석으로 상징 老巨樹, 대나무, 용, 봉황, 곰, 소 소나무, 연꽃, 매화, 버드나무, 감나무, 백합, 梨花, 갈대, 용, 호랑이, 봉황, 학, 백로, 꾀꼬리, 까치, 두견새, 갈매기, 기러기, 물오리 연꽃, 맨드라미, 잉어, 닭 장미 매화, 수선화, 동백(山茶花) 연꽃, 살구 오동, 벽오동, 대나무, 봉황 회화나무 동백, 앵두, 나비, 벌 측백나무 자귀나무, 복숭아, 원앙 무궁화(木槿花) 등 |
♧ 위의 화목품계와 상징성 도표는 이대우(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 조경담당) 씨의 『風水造景』에서 발췌하였음. |
6 . 敬節公 및 敬靖公 設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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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절공 휘 翼 1세조와 경정공 휘 公裕 2세조 두 선조의 설단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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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性 문제 |
역사란 한마디로 창조되어질 수 있다. 시조께서 남평에서 태어나시고 본관을 얻으셔 우리 후손들이 일천여 년 동안 남평을 본관으로 삼아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만일 공주 유구에 두 선조의 단소가 모셔진다면 백년이나 2백년 후에는 시조는 남평에서 태어나셨으나 경절공과 경정공의 단소가 공주에 있는 까닭이 있을 터이니 1세조부터는 공주에서 시작되었다고 公州誌나 혹은 다른 문헌에 기록해 놓으면 그게 氏族史가 되는 것이다. 씨족사란 후손들이 주장하는 대로 증명될 뿐 역사적으로 조명할 수 없는 맹점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고간원지 안내판에 오기된 내용 즉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처럼 먼 훗날에는 사실과는 다르게 쓰여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
禮가 아니다 |
두 선조의 단소가 시조 유적산하에 모시는 일은 조금 소홀해도 미안하지 않지만 만일 고간원 우측 공지에 단소를 모신다면 아들과 손자의 故土에서 더부살이가 되어 민망해진다. 손자에게는 묘소와 영당 재실까지 갖추어져 있는데, 아버지와 조부는 손자의 묘역보다는 협소한 곳에 설단되는만큼 웃어른을 받드는 예로서는 죄송할 뿐이어서 유구의 경절공 경정공 설단은 禮가 아니므로 설단 추진을 중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여태까지도 기다렸으니 시간을 두고 연구 검토하여 남평의 시조 산하에 설단하는 방안을 강구함이 옳을 듯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공주 유구의 설단은 유보 되었음) |
7. 結論 |
숭조 정신을 함양하여 위선사업을 하는 일은 경하할 일이요 대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한 일이 있으니, 심사숙고하여 집행해야 할 것이다. 하여, 충숙공의 유적지인 고간원도 도지정 문화재이니만큼 격이 높은 조경사업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이요 남이 보기 좋게 성공적으로 완성을 이룬다면, 모든 사람들의 칭송이 충숙공께 올려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