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묘

부조묘(不祧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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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유래

상소문 고유문

묘정비명

사진첩

유물전시관

제사참례기


위치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분류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제165호

배향선조   10세 諱 익점(작위:부민후, 군호:강성군, 시호:충선공, 호:삼우당 호:사은)
향사일   음력 2월7일 23시(子時)

부조묘는 공이 크신 분들께 국가에서 사당 건립 경비와 논밭과 노비등을 내려 4대까지만 모시는 제사를 영원히 모시도록 국가에서 배려한 제도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조선 충신들의 부조묘도 있고 문중에서 건립한 사설 부조묘도 있으나, 조선에서 고려 신하에게 내린 부조묘는 안유, 정몽주, 문익점으로 3분이 계실 뿐입니다.
처음에는 산청에 세웠으나 사손(제사를 모시는 후손)이 후손이 없어 제사가 중단되니 철종 갑인(1854)년에 문중에서 사손을 정하고 철종의 윤허로 현 위치로 옮겼다.
산청 인근 일가들은 합천군 삼가면 어전부락에 50년전 부조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모셔왔으나 칠준님과 헌납집안의 협력으로 2006년 어전의 부조묘를 폐하고 합사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부조묘의 유래

태종1년(1401)

조정에서 선생의 공덕을 치하하여 부조묘를 세우라 명함

중종34년(1539)

사손(祀孫) 광서(光瑞)에게 후사가 없자 종질인 현령 세화(世華)에게 봉사(奉祀)하게 하고, 세화는 다시 순질공(純質公)의 현손(玄孫)인 군수 선창(善昌)께 사손을  전했다. 선창의 손자인 언상(彦祥)이 임진왜란때 서울에서 별세하니 제사가 끊어졌다

영조6년(1730)

후손이 제사를 다시 모시게 해 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하여 영조는 특별히 심의해서 아뢰도록 하라는 명(命)을 내렸으나, 대신(大臣)들이 그 일을 덮어 두었다

정조20년1796

장령 이섭(李燮) ·주중옹(朱重翁)이 서로 이어  부조묘를 부활시킬 것을 청원드렸으나 답이없었다

헌종10년1844

선비들과 문씨후손들이 영조의 재가를 얻어 사손(祀孫)을 세웠고, 

철종5년1854

문정주가 말씀을 임금님께 아뢰고, 유생 임기백(任基伯)이 삼남(三南)의 선비들과 부조묘를 부활시키고 사손(祀孫)을 세워주시는 은전 베푸시라고 청원하여 특별히 윤허를 받아 선비들과 문씨(文氏)들은 부조묘를 보성의 도개리에 다시 세웠다,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이 묘(廟)에 거는 현판에 부민후묘(富民候廟)라  쓰고, 사손(祀孫) 병열(秉烈)은 기(記)를 지었다

고종31년1894

사손 택호(宅鎬)가 원근(遠近)의 일가들과 함께 조금 위로 옮겨지었고

1934년

선비들과 문씨들이 합의하여 그 마을의 우봉촌(牛峰村) 신장에다 옮겨 짓고,
사손 승헌이 그 사실의 기(記)를 지었다.

 

부조묘를 강성에서 보성으로 이건한 유래(부조묘를 보성(寶城) 이전 고유문 참고)

강성에 있는 부조묘가 임진왜란으로 무너져 임금께 아뢰니 사손 병열(秉烈)이 보성에 살고 있으니 자손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임금의 배려로 보성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익점

중용中庸

승노承魯

선동

광서

무후

 

약동

공현

상욱

자생

성호

용실

 

의동

광화

 

 

 

 

 

광부

세화

무후

 

중성 

화 

 상능

 

 

 

 

 

후손 병열(秉烈)을 사손으로 지정됨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상소

장령(掌令) 이섭(李燮)

옛 분인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곧 그 당시에 있어서 한나라 소무 (蘇武)와 같은 사람이고, 우리 나라의 후직이옵니다. 그 분은 사신을 모시고 중국으로 가 절개를 지키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그 충의(忠義)의 빛남과 그 기개며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목면(木綿)을 우리 나라로 옮겨 심어서,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과 더불어 역대 어진 임금님 때의 포창과 너그러움을 베푸신 전교(傳敎) 및 예전의 어진 신하였던 이황(李湯) 송시열(宋時烈)의 나타냄이 떨치게 지은 글에 자세히 말해져 있기에, 신(臣)이 다시 중복되게 말씀 올릴 필요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 태종대왕께서는 그 분의 공(功)을 미루어 생각하사 여러 가지로 포상을 하시었으니, 그 공훈을 기록하시고 벼슬을 내리심에 지극하게 하시지 않음이 없고, 또 전답과 노비를 하사(下賜)하시고 옛날에 살던 터에다 사당을 세워 제사를 길이 지내도록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세대(世代)가  멀어지고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고 갈라진 후손들이 흩어지고 몰락했으며 종 손의 대(代) 이음이 끊어져, 제사 지법을 궐(闕)하였음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온데, 선대(先代) 임금님 때의 경술년(영조6년)에, 그 분의 후손이 말씀을 올림으로 말미암아, 특히 부조묘(不조廟)에 대해서 살피어 생각하시는 어진 은전(恩典)을 내리시사, 공(功)을 갚으려는 생각에서 나온 근본을 잊지 말고 갚도록 하라는 명령이, 임금님의 말씀 중에 있어 분명했고, 특히 의논해서 아뢰라는 명(命)을 내리시었나이다 그런데 그 때의 재상인 신하들이 그대로 덮어 두었기에, 지금토록 왕성한 세대(世代)에 있어서의 은전이 궐(闕)함이 되고 있사옵니다
아, 사당을 세워 제사를 주관해서 세세로 변함이 없게 되면, 효도를 두텁게 숭상하는 큰 은전이 높이 드러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백성의 근본을 미루어 생각하는 정성을 인도하고 공(功)을 보답하는 왕가의 은전을 넓히어서, 어진 임금님의 덕이 빛나게 할 수 있고 그래서 악하고 타락한 풍속이 바르게 될 것이옵니다. 신(臣)이 청원 드리옵건대, 이 일을 담당하는 부처(部處)에게 의논해서 아뢰게 명하시어 선대상(先代王)이 끼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임금님의 비답은 이러하다."문익점에 대한 부조의 일은 이 뒤에 마땅히 헤아려 처리할 때가 있을 것이니, 너는 더 말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두번째 상소

정조 20년  1796년 8월 장령(掌令) 주중옹(朱重翁)

우리 나라에서 목면(木綿)이 산출된 것은, 문씨(文氏)로부터 비롯한 것이옵니다.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은 만리 밖의 되놈 땅에서 그 씨앗을 입수하였는데, 금지함을 무릅쓰고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와서 우선 꽃들에다 심었사옵니다. 그것이 번성해짐을 기다렸다가 백성들에게 갈아 심는 것을 가르치고, 기계를 처음으로 만들어 조종케 함에 손수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었사온데, 세속에서 문래(文菜)라 하는 것이 그 것이옵니다. 목면(木綿)을 파종한 공(功)을 말할 것 같으면 후직이 곡식을 파종한 공과 다름없고, 기계를 만 
든 일은 신농황제(神農皇帝)가 쟁기를 만든 것과 같사옵니다. 게다가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우리의 유도(儒道)를 부조(扶助)한 공은, 또한 정몽주(郵夢周)등 여러 현인(賢人)과 같이 칭송되옵니다. 그리고 우리 성스러운 왕조가 천명(天命)을 받은 처음 시기에, 우리가 털옷을 입고 가죽옷을 입었던 것을 크게  변하게 하여, 의장(衣裝)을 일신케 해서, 솜둔 옷과 도포로 따스한 옷차림을 하게 되었사온데, 그것은 진실로 그 분의 공이며 실로 영구히 힘을 입게 되었습니 다.
우리의 태종대왕께서는 강성군(江城君)으로 봉(封)하시고 그 분의 정문을 「고 려충신문익점(高麗忠臣 文益漸)의 마을에 세운 정문」이라고 이름 지으셨으며, 만 세에 제사 올릴 사당을 지으라 명하셨고,전답 백결(百結)과 노비 70명을 내리시 어 그 제사 지냄이 오래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벼슬을 추가로 올리라 명하시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시어 으뜸되는 공신(功臣)의 위치로 올 리시었나이다. 선대상(先代王)의 무인년1)에 이르러선, 임금님께서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구름 모양의 막(幕)을 가리키시고, 모시고 있던 신하들에게 말씀을 내리 시기를, "문씨(文氏)의 공은 크기도 하다. " 라 하시고, 이어 제사를 모시는 종손(宗孫)을 방문하고 등용하라고 명하셨으나, 우물쭈물하여 그대로 하지 않았나이다. 전하(嚴下)께서는 등극하신 이래 자주 제사를 지 내주라는 명(命)을 내리시고, 두 서원(書院)에 현판을 하사하시어 전후의 은전(恩典)이 이에 더할 나위가 없사오나 그 공(功)에 보답하는 길에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바가 있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공이란 것은 혹은 한 때의  공이 있고, 혹은 백 년이 가는 공이 있사온데, 문익점(文益漸)의 공을 돌아보면, 몸에 면사(綿絲)를 붙이고 있는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다 고르게 그 공덕을 입어 비록 천백년이 되더라도 그 기한의 한이 없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비록 농업의 시창자(始創者)나 잠업(蠶業)의 시창자와 같이 제사 지내자고 논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분을 부조묘에 모시는 일은 어진 임금 때의 특별한 은전(恩典)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분의 후손이 보잘 것 없이 되어서, 제사를 올림이 없사오니, 그 공을 생각하고 그 분의 도를 숭상하는 데 있어서, 진실로 불쌍하옵니다 전 하께서는 특히 위로하고 구제하는 은전을 베푸사, 오늘날 무명옷을 입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 어진 임금님께서 근본의 일에 힘쓰시고 공에 보답하시는 덕의 뜻을 알도록 하옵소서.

임금님께서 결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소(疏)를 살피어 자세히 알고,
소의 글은 이 일을 담당하는 부에 내리어 상의하여 처리해서 아뢰게 하겠노라.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세번째 상소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유학(儒學)의 선비들이 임기백(任基伯)을 첫머리에 올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옛날의 어진 임금께서 예법을 제정하심에 제전(祭典)보 다 높게 봄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만세에 불멸할 공이 있으면 곧 반드시 모시어 영원히 제사 지내는 법도가 있었사옵니다. 충선공 문익점은, 도학(道學) 충효( 忠孝) 절의( 節義) 공덕( 功德)이 다 함께 갖추어진 사람이었나이다. 고려 종말 기의 풍속(風俗)은 학교 교육이 쇠약해짐으로 무너졌는데, 문익점이 이를 위한 걱정으로 바른 길을 제창하여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해서 사람들을 가르침에 반드시 효도와 우애 그리고 성리학으로써 하였나이다. 그래서 온 나라가 추하게 물들여진 것이 씻어지고 천리가 어두어졌음이 다시 밝아지며,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시 들어졌음이 다시 떨치게 되어지므로 우리 나라 도학의 종(宗)이라 이를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이렇듯 역사책에 명백히 실려 있사옵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중략...>  그 섬나라 왜놈들의 감복이 이와 같았나이다. 

그 분은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들어갔는데, 원나라의 황제가 공민왕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들어가 있던 자들이 감히 원의 황제(皇帝) 명을 거역하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문익점은 흘로 그 명(命)에 항거하여 조정에서 다투어 말하기 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이 없는 것이옵니다. " 라 하고는,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굴복하지 않으니, 원의 황제가 크게 성을 내어서 교지(交祉) 땅인 남방(南方) 만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3년이 되어서 덕흥군(德興君)이 요양(遠陽) 땅에서 격퇴되어지자 곧 풀어주라 영(令)을 내렸나이다. 돌아오는 날에, 그 분은 길에서 목면(木綿)의 씨를 입수하였다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땅에 심어 나라에서 씀에 족하게 하고, 백성들의 이익이 풍부하게 하여 우리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훤하게 일신되었사온데, 그 사람들에게 끼친 혜택은 이와 같은 것이었나이다.
학문을 하여서 일곱 유명한 현인(賢人)에 들어 함께 높이 나타났고 효도를 하여서 삼강록(三綱錄 충효열의 삼강을 지킨 사람에게 은전을 베푼책)에 찬양되어 있사오며, 충성을 바쳐서 역사글 중에 나타나있고 절개를 지켜서 충열비에 다른 분들과 같이 이름 새겨졌사오며, 공(功)을 올려서 충훈부(忠勳府)의 기록에 적혀 있사온즉, 보답과 찬양의 기록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부조묘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한 가지 행실이나 한 가지 절개를 행한 사람에 대한 것만도 못하여 신(臣)들은 개탄하는 바이옵니다. 우리 나라 온 땅의 모든 선비나 여인들이 누가 집집마다 제사 지내고 싶지 않으오리까? 고려 시대의 유명한 현인들 및 우리 왕조의 공훈이 있는 어진 분들에 대해서 미루어 보답하는 제사 지냄을 두루 생각하옵건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다 우리 왕조에서 부조묘에 제사 지내는 은전을 받고 있사온데, 이 문익점만은 아직 부조묘에 제사 지내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사오니, 그 어찌 은덕을 갚는 도리에 홈이 있음이 
아니오리이까? 더구나, 옷 입힌 공은 안(安) 정(鄭)의 두 현인보다도 유별나게 더한 것이었고, 그 행위의 여러 가지를 갖추어 완전했음을 논한다면 그 분은 즉 우리 나라의 후직이옵니다. 그러니 사당에 제사 지내야 하옵고 마땅히 후직의 짝으로 삼아야 할 것이로되, 또한 어찌 본종손(本宗孫)이 세세(世世)로 제사 지내어 끊어지지 않게 함과 같사오리이까? 법전에 이르기를, "처음으로 공(功)을 세운 신하에게는 따로 하나의 사당집을 세운다. " 라 했사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옷을 입힌 공(功)은 실로 문공(文公)에서 비롯된 것이오니, 마땅히 왕가의 부조묘에 제사 지내게 할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공(功)이 있는 선조(先祖)는 제사를 끊지 않는 것이다. " 라고 했사옵니다. 공덕이 실로 영원히 힘을 입히는 것이온데, 어찌 영원토록 은택을 갚는 제사를 지내자는 소원이 없겠사옵니까? 그런데도, 조정에서 복건(復建)하라는 명이 없을 것 같으면 법을 범하고 예를 범하는 것이므로 걱정되옵니다. 이제 신(巨)들이 같이 부르짖는 것은 다만 한 때의 사사로운 뜻의 발로(發露)는 아니옵니다. 역대 어진 임금님이 은덕 갚는 새로운 명을 내리셨음을 삼가 
살퍼옵고, 또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글을 지어 찬양했음이 거짓이 아닌 뜻에 의거해서, 이에 감히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주상(主上)의 앞에서 부르짖나이다. 엎드려 비옵건대, 천지의 어버이께옵서는 특별히 받아들이는 은혜를 내리시옵소서. 특히 다시 문익점을 부조하라는 두 자(字)의 은전을 내리사 안유(安裕) 정몽주와  같은 혜택이 베풀어지게 하셔서 모든 선비들과 여인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어하는 소원에 응해 주옵소서. 신(臣)들은  정성의 지극한 바를 견딜 수가 없사와, 삼가 죽을 죄를 범하며 아뢰옵니다.

철종 갑인년(1854) 3월 일에 도승지(都承旨) 이원명(李源明)이 상소문을 임금께 올리자 임금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의 말씀을 내리셨다. "일을 담당하는 부처(部處)에 내려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케 할 일이다. " 예조판서 김보근(金普根)이 임금의 하문(下問)에 대하여 심의(審議)를 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을 아뢰었다. 벼슬없는 유학(儒學)의 선비 임기백 (任基伯) 등이 올린 말씀의 글을 보옵건대, 강성군 문익점의 부조묘를 복건하시는 은전을 청원하는 일로 이 부르짖음이 있었나이다. 문익점은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은 우리 나라 올바른 학문의 종(宗)이었고,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어 그 공은 만세토록 이어져, 자주 역대 어진 임금에서 포창하시는 은전을 내리셨고, 또한 전의 어진 분들이 추앙(推仰)한 논(論)이 많았나이다. 작봉(爵封)이 이미 훈공(勳功)을 기록한 책 중에 보이고, 부조묘에 제사 지내는 일 또한 이미 행하고 있는 바가 많사오니, 지금 이같이 부르짖음은 근거함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뜻의 요지(要旨)는, 정녕 마땅히 허락해서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오나, 부조묘의 은전은 일이 중대하옵기 신(臣)들로서는  감히 멋대로 결정지을 수가 없사온즉,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어 처사토록 하시옴이 어떠하오리까?

임금께서 결정하시기를, "좋다. "라 하시고 비변사(備邊司)로 내리 시었다

 

부조묘 보성이전 고유문(告由文)

예조판서(禮曹判書) 김보근( 金普根) 지음

아, 선조 어른은 효자였고 충신이셨도다.
공을 세우고 덕이 있어, 이 나라에 큰 은택(恩澤) 베푸셨네.
그 때의 세상을 창성(昌盛)케 하시고,    그 남은 좋은 덕 끝이 없도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이들이 많기도 하여,  마치 제후가(諸候家)의 풍도(風度)가 있도다.
종손(宗孫)은 벼슬을 하지 않았고, 5대째에 끊어졌었네.
후사(後嗣) 세우시게 한 은전(恩典) 내리심에,  서손(庶孫)이야 있으되 삼지 말게 했도다 
그래 의성( 의성현감 이었던 세화(世華)이 지손(支孫)으로 대를 이어 제사 모시었다.
우리 왕조 현인(賢人)을 존숭(尊崇)함에, 부조묘 세우는 예로 의기(義氣)를 일으켰다.
의성(義城)이 아들 없음에, 봉산(鳳山)에게 다시 사손(祀孫) 자리를 전했다.
임진란에 병화를 만나, 묘사(廟舍)가 무너져 여러 해가 되었다.
후손들 다 한탄하고,    서울로 올라가 임금 앞에 아뢰니,  임금님 괴로워 하시고는,
"아, 슬프도다. "라 하시어,  사손(祀孫) 세우고 묘사 짓게 하시고,
'너 후손 병열(秉烈 )은 뜻을 받들어 행하되 사퇴 말지어다"라 하셨다.   
명(命)을 받음에 황공스럽기만 하는 판에,  감히 불효의 생각이 나겠는가?
생각건대 강성(江城)은 비록 선생의 고향이나, 증손의 집 산양(山陽  전남 보성의 옛 이름)에 있었다.
자손이 있는 곳이라야, 혼령이 편안하실게라.  그래 이제 옮겨 모시며, 이어 그 까닭을 고하옵니다.

삼우당(三憂堂)의 장자는 중용(中庸)이고 장손은 승로(承魯)이며 그 분의 장증손은 선동(善全)이며, 장고손은 광서(光瑞)는 사자(祀子)가 없어,   승로(承魯)의 셋째 아들인 의동(義全)이 잇고, 그 분의 아들인 광부(光富), 그 분의 아들 세화(世華)가 대를 이었으나 그뒤 또 사자가 없어   화(和)의 차손(次孫) 상능(尙能)의 후손 병열(秉烈)을 사손으로 이었다

 

부조묘 묘정비명


 

사진첩

부조묘 전경

2009년 제사

2008년 회의

2005년 제사

2002년 제사

묘정비 제막


부조묘 전경

부조묘 전경

도로의 안내판

입구문

경내

충신문(신실입구)

부민후관(신실)

문건

충선공 묘정비


2009년 회의와 제사

부산 일가들의 사당 참배

   
   
   
   

진설(제사음식 상차림)

분정(헌관, 집사등의 임무 분담)

헌관 집사 호명

집사들 정열

창석봉작, 칠준아헌관, 태기초헌관

헌관 집사 입장

기호 집례

행사진행
사손 성환님의 초헌례
 

독축

  부북한 참례자들

태기 경남회장 아헌례

칠준 헌납회장 종헌례

 

 

2008년 회의

   

정기총회
영종총무와 사회자

흔주재무

문재구님 공노패

인근의 목사공묘소 참배

 

 

   

분정

위패

진설

   

재웅님과 승열님

단성이씨(문익점선조 장녀가 출가한 집안) 대종회의 참배

음복

부산팀의 귀향시 나로도의 자연산횟집

 

 

2005년 회의

상견례

개회선언

재구회장인사

영종총무와  승환사손

     영종총무        재구회장       흔주재무

참석 일가님들

 

2005년 제사

 

2005년 경과보고 동영상

2005년 축문 동영상

 

 헌관, 집사 호명

헌관과 집사 명단

헌관과 집사 및 참석자

재국 집례

     수철집사,                  상배집사

 

유식

아헌관 헌주

아침식사

 

부조묘 2002년 제사

재구 부조묘관리위원장

부조묘관리위원회 이사회

 

 

 해남 두륜산 대흥사 관광

 

부조묘 묘정비 제막식(2003년)

 

봉심금 접수

행사장

축화 화환

제막 테이프 자르기

 

내빈기념촬영

참석한

본손들

본손인사

 

 

인주

석봉

하회유씨 차종손

승환사손

재구

 

칠순

 

 

제막식 기념촬영

문기호(광주)

문화호

문윤섭(장흥)

문병준(부산)

문영복(부산)

 문영호(강진)

부조묘

제사

헌관

땅끝

관광


유물 전시관

유물전시관에는 전남 지방문화재 제165호로 지정된 부조묘 관련 문서 15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사 참례기

2008년

2004년

2003년

2002년

 

2008년 부조묘 제사(2008년 3월15~16일)- 문병달

08:55 동래에서 수상님이 운전한 종친회 승합차에 철식 경문님과 출발하고
09:10 만덕에서 병준회장님과 정근총무님은 만덕에서, 09:40 선암다리에서 도식님이 승차하여 부산종친회4명 김해삼계문중 3명이 되었으며. 11:50 남강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서순천에서 2번 국도를 찾아가면서 12:00 주유소옆의 기사식당에 식사를 하는데 반찬이 12가지나 된다. 부조묘는 자주 왔기에 지도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네비게이션에만 의지하다 오늘 가져오지 않았기에2번국도에서 보성으로 빠지지 못하고 보성의 끝부분으로 진입하여 읍내를 거치고 보성체육관을 지났으니 다 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부조묘까지는 8km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오신 일가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실에서 참배를 마치고 나와서 준비해둔 동동주와 돼지고기로 한잔했다.

15:15 마당에서 70여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열렸는데 예년의 100여명이던 예년보다 적었으며 연단을 서쪽에 차리고 참석자를 동쪽에 배석하니 햇볕이 얼굴을 가려 책으로 가리기도 하고 얼굴표정이 찡그러진다. 식순에 따라 회장인사가 있었고 내빈소개에서 나를 대종회홈페이지관리자로 소개하여 잠시 당황했다.
감사보고, 경과보고 등이 있었고 기타토의에서 영훈대종회장님께서 전자대동보에 대한 말씀에서 대종회에서 주관하여 대동보를 만들지는 않지만 소문중들이 전자대동보를 신청하여 만들면 대동보가 된다고 하시면서 일가님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고, 자세한 설명을 나에게 하라고 하시기에 가족법 개정으로 족보의 위기이나 위기도 기회이니 족보제작의 필요성과 수단방법을 설명했다
기타토의를 마친다고 하기에 손을 들어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발언권을 얻었다
회의시간을 변경하였는데 참석자 중에는 저가 어린편이고 계속 오시던 분들이 많이 보이지를 않으며 제사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많으니 회의는 종전처럼 19:00 하면 직장에서 퇴근 후에도 참석이 가능하니 환원하여 줄 것을 제안했다.
회의를 마친후 홈페이지 모니터들이신 남주님과 병옥님 수상님과 함께 정담을 나누었다. 제사가 목적이나 전국의 일가들과 만남도 큰 즐거움의 하나로 술까지 무제한이니 더욱 좋다
빈방을 차지하여 사천일족회의 재웅회장과 정열 부회장과 종사의 운영에 대한 의견교환도 했다.
10여분 거리인 목사공제실을 영종님의 안내로 20여명이 참배하고 왔으나 부산면에 있는 의열사를 다녀올 생각은 잊어버렸다.
영종총무는 음식을 300명분을 준비하셨다는데 100명을 넘은 일이 없었는데 왜 그리했을까? 바쁘신 분들은 참배만하고 떠나고 새로운 분들이 오셔서 저녁식사에 아지매 4분이 음식을 차렸는데 영훈회장님, 용호이사장님, 영환충선공종회 국장의 부인들이시고 한분은 보성 분인 것 같았다
식사를 식당에 주문했다고 하는데 돈육국과 김치에 산나물이며 족할 것인데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 어디의 종사이건 큰 문제인데 좋은 대책이 없을까?

21:00 성환사손님과 차남이 제수를 실어와 함께 신실로 옮겼다
동제에서는 영훈대종회장님께서 목화시배지의 소송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고 서제에서는 충선공의 장녀가 출가한 집안인 단성이씨 대종회에서 4분과 경남회장 부산회장이 계시는데 서제로 들어가 이하룡 단성이씨대종회장님, 이정한 장학회장겸 안산파종친회고문님, 이훈상님외 한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단성이씨는 42만명 정도이며일가들이 흩어져 있어 찾아 다니면서 찾는 중이어서 체계적이 아니라는데 남평문씨의 홈페이지와 전자대동보에 대하여 질문을 하시기에 저가 필요하면 돕겠다고 했다.

23:00 진설을 마치고 제관들을 확인하는데 초헌:성환, 아헌:영훈, 종헌:기식 집례:장호 축:경문 진설:욱현,규율, 사준:남주 봉향:찬식 봉로:중섭 봉작:제웅 전작:승열이었다.
신실마당에 자리를 깔고 도열하였는데 참석자는 50여명으로 전년보다 많았고 조명도 많이 설치했으나 외등이 하나 뿐이라 사진을 찍어도 바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제수는 예년보다 풍성했고 삼헌관이 잔을 올리는데 신실은 좁은데 제상이 큰 탓인지 잔의 올림과 내림이 무척 어렵다.
제사후에 해반하여 음식을 나누어 5개의 방에 상을 옮겨 함께 음복을 미치니 01:30이었고 산청과 사천에서 오신분들이 마지막으로 떠났고 인근인 총무와 재무가 가시니   남은 사람은 부산의 7명과 진주에서 오신 병구님과 기호감사님과 계환님과 일가분까지 모두 11명이 잠자리에 들었다.

07:00 기상하니 정근 총무가 코를 많이 곯아서 잠을 설쳤다는데 나도 자다가 잠시 일어났을 때 양쪽에서 모두 코를 곯든데 자기 코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수를 마치고나니 영종총무가 물을 끓이는데 세숫물이라 했다. 흔주재무가 오시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아침과 반주를 들고 09:00 병구님과 함께 보성을 떠났고 09:20 나루도의 갈림길에서 나루도방향으로 길을 잡았는데 소록도와 갈림길인 휴게소의 안내판에는 8品은 유자,석류,간척지쌀,마늘,참다래,꼬막,미역, 유자골순한한우이고 9味가 참장어 낙지 삼치 전어 서대 굴 매생이 유자향주 등으로 적혔다.
외나로도를 지나 11:30 내나루도에 오니 부두에는 흑산도행 비가 1일1회 다니며 유람선의 안내도 있었는데 자그마한 포구로 관광거리는 없었다.
횟집에 가니 자연산이라고 하는데 전문가인 수상님이 맞다고 하니 자연산이 맞는 것 같았고
어제 중식을 부산에서 부담했으니 오늘 회는 삼계문중에서 하겠다고 하여 맛있게 먹었다.
식사후 돌아오면서 광주쪽으로 길을 들어 뒤를 보면서 후진하여 가기도 하면서 17:00 진영에 도착했고 일요일인 탓에 길이 막혀 부산까지 오는데 100분이나 걸렸다.

 

2004년 부조묘 제사(2004년 음력2월 7일~8일)  - 문병달

2월7일 차량은 9인승인데 신청자가 많아 조정한 결과 칠순고문, 신만, 광수, 병준부회장 병준총무, 두표, 정득, 경문님과 함께 9명이 14:00 부산을 떠났다.
15:40 섬진강휴게소에서 20분을 쉬면서 경문님이 주신 커피를 마시고 17:10 기러기 휴게소에 잠시 쉬고는  부조묘에 도착하니 17:30이다. 먼저 신실에 들려 예를 행하고 부조묘의 재구님, 만조총무 흔주재무 남주님등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30여분이 도착해 계셨기에 합동으로 인사를 나누었다.간단한 주연에 이어 식사를 하고 마을을 산책해도 어둡기만 할 뿐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는 없었고반짝이는 별을 세면서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기는 했다.

20:00 재구님의 주재로18차 정기총회를 만조총무의 사회로 시작하여 경과보고에서 묘정비제작 등의 결실이 있었다고 하고는 유인물로 대처하였고 감사보고 후 흔주재무님의 결산보고가 있었다
예산안도 유인물로 대처하고 질문만 받기로 하였는데 도비 지원금 1억을 받았다고 하여 박수를 받았는데 해마다 주는 것이냐 하여 한 바탕 웃기도 하였다.
성금자 명단은 벽에 붙였으니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하였고, 임원의 임기가 만료되어 회장선거를 하기 위하여 임시의장으로 충선공파 영훈회장님을 선출한후에 칠순충선공파 명예회회장, 계항부조묘부회장, 승열충선공파국장님 영환충선공부회장등을 선거인단으로 선출하였고 회칙변경요청이 있어 문중부회장5명외 2명의 부회장을 선임하기로 하였는데 이런 제도는 우리의 동래집에도 참고할 사항인데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어도 문중별로 배분하니 융통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임원선출을 기다리는 동안 경호전남경찰청장의 인사가 있었는데 광수님은 재빨리 보성삼거리에 안내판 설치를 건의하여 즉석에서 보성경찰서장에게 안내판 설치를 검토해달라는 전화를 하였다. 임원은 위원장은 재구님이 유임하시고 칠준,계환,진우,영환,재동님이 문중부회장이 되시었다

재구님은 취임사에서 3년간 하면서 욕도 먹었으나 칭찬을 하시는 분이 더 많았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하시고 많은 박수를 받았는데 올해는 60여분이 참석하셨으니 무척 많은편이었다.
영훈충선공회장님의 문익점목화시배지의 명칭변경을 위한 활동보고에서
현재의 청계지는 정천익은 단성면 사월리에 거주하였다고 하나 진양정씨의 족보인 청계지 원본을 국립도서관에 찾아보니 관정리에 거주했다고 되어있으니 희망적이라고 하셨다.
진양정씨측에서 선조의 벼슬을 높이고 이의를 신청하여 시배지 명칭이 바뀌었으니 후손들은 명칭환원을 위한 노력은 아무리 하여도 모자람이 없겠으나, 양문중이 머리를 맞대고 상대문중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함께 발전하는 길을 찾는 노력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동족상잔의 처참한 6.25를 만든 북한에도 지원과 화해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중공군을 보내어 통일을 무산시킨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10:40 재구초헌, 경호아헌 등 헌관들이 입장하고, 부산에서는 신만축관, 경문봉향이 도열하고 제사가 시작되었는데 행사를 찰영하려니 신실의 조명이 어두워 적외선촬영을 한다.
뒤에 흔주님께 조명설비의 보완을 말씀드렸고, 참제자는 30명 미만이니 회의때의 절반도 되지 못하니 여기까지 오고도 제사에 참석치 않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사를 마친후 방으로 돌아가 대종회상근국장님께 세덕록과 cd족보에 대한 질의를 했더니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대종회에서는 길철님등 4분이 오셨으나 대표자이니 질문을 할수밖에 없었는데 cd족보는 구조상의 문제가 있는 듯 했고 산청의 영한님과 목화에 대한 대화를 잠시나누고는 밤길을 떠났다.
남은 사람 20여명이 방4개에 나누어 잠을 청하는데 한쪽에서 코골고 한쪽에서는 화투놀이로 시끄러워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였는데 세수하라고 한다.
식사후에 남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08:00 부조묘를 떠났다.

09:40 보길도행 배를 타기위하여 땅끝으로 가는데 08:40 완도 진입로를 지나고 옥천에 도착하니 09:00인데 땅끝까지는 47km여서 배는 탈 수 없겠기에 10:20 화흥포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기위하여 차의 방향을 돌려야했다
09:10 완도 갈림길에 접어들고 09:40 완도입구의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여 10:10 화흥포에 도착하여 왕복요금은 7000원이며 경로는 20% 할인이며 차량은 2만원인데 기사는 무료이다

09:40 꼭 가고 싶었던 윤선도의 무릉도원인 보길도 출항하는데 청해진 카페리는 정원235명이며 선실에는 히타가 들어왔고 배의 운행은 gps의 모니터로 하는 깨끗한 배이다.
바다는 온통 김양식장이고 노화도의 동천에서 잠시 머물고 소안도에 들린뒤 11:10 하선하여 배시간 안내표를 받아들고 세연정(자연과 인공을 교묘히 접합시킨 정자) , 곡수당(고산의 아들 학관이 건립한 독서당), 낙서제(주거 및 공부방) 동천석실(석실위에 정자를 지은곳)만 돌아볼 계획이나 이미 세연정은 지났기에 동천석실로 향했는데 11:25 작은 다리를 건너니 주차장에는 동천석실 400m의 안내판이 있다.
공사중인 하천을 건너 산길을 오르는데 보길중학의 자연보호 리본만 있을뿐 안내판 하나 없없으니 행정당국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20여분을 올라서니 길이 왼쪽으로 꺽이면서 바위로 이루어진 연못이 있으나 석실은 없고 위의 정자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는데 사방 7자 정도로 문짝 하나는 떨어져 있어 초라하다
아래는 상록수의 병풍을 친한 농경지는 그림이니 고산의 안목을 짐작할 수 있었고 38세나 연나이어린 3째부인 설씨와 단둘이서 다녔다 하니 풍류를 짐작하게 한다.
11:50 내려오려다 신만님과 정득님이 늦게나마 도착하셔서 함께 머물다 내려왔고
12: 10차를 타고 내려오다  좌회전하여 곡수당을 찾으니 발굴중이란 안내판만 있었고었고,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지으며 30년 이상을 기거하다 생을 마쳤다는 낙서제 역시 고산의 흔적은 찾을수 없고 비석없는 무덤 한쌍 뿐이니 허탈하기 짝이 없다.
해남윤씨의 종가에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던 많은 유물들과는  대조적이 아닌가.
고산은 서울 태생이나 해남 종가에 양자로 들어갔고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던 중 이이첨일파의 죄상을 상소하였다가 함경도 경원에서 8년의 유배생활을 하다 인조반정(1623)후에 의금부 도사를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지냈다.
42세때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인평대군의 사부로 지냈고, 51세때 청나라에 항복함으로 세상을 멀리하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를 발견, 산수에 매혹되어 부용동(芙蓉洞)에 낙서재를 짓고 살다 이듬해 경북 영덕에서 1년의 유배생활을 하였고 65세(효종1651)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으며 73세에 함경도 삼수로 귀양가서 81세에 풀려나서는 보길도(甫吉島) 부용동으로 돌아와 낙서재에서 85세로 눈을 감으셨다고 하였는데...

12:20 안내판도 숨겨둔(?) 세연정(1992년에 복원)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연못에 띄워둔 배를 타고 놀고 있었고 인공연못위의 가산은 복원하기 위하여 돌마다 번호를 붙여 두었다.
옆의 4개의 석비에는 어부사시사 춘하추동의 일부가 새겨있기에 참고로 전문을 아래에 소개하였으며.
12:50 세연정을 떠나 부두에 도착하여 음식값을 물어보니 많이 비싼 것 같아 13:00 출발하는 배로 완도로 가려했으나 배가 없단다 오늘받은 뱃시간표 조차 맞지 않으니 황당한데
보길도에서는 놀랄일만 겪는 것같았고 차라리 보길도는 마음속의 무릉도원으로 남겨 두었어야 했다는 후회 뿐이다.
백도리에 우암 송시열이 글쓴 바위가 있다고 하나 시간상 가지 못하고 글의 내용을 소개하면
83세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 있어 감격한 외로운 속 마음 눈물 지우네

실비가든횟집(061-553-6253)에서 회2접시(10만원)와 식사(9천원) 및 음료수(1만원)를 시켰는데 낙지회의 서비스와 음식맛도 깔끔하다. 계산은  도포입은 신만,경문님은 각 5만원 나머지는 각 2만원씩 거출한 것이 부족하여 경문님이 4만여원을 추가 부담하였다.
14:10 승선하였으나 배에 차량들을 싣느라 20여분을 연발하였고  화투놀이와 소주를 마시기도 하면서 15:40 화흥포에 도착하였고 16:25 완도대교, 17:30 보성입구를 지났다
18:40 순천에서 고속도로에 올렸고 계속 달려 20:00진영휴게소에 도착한다
병준부회장님의 부담으로 가락국수를 한그릇씩 먹었고 30분후 출발하여 구포다리를 지나는데 옆의 차가 경적을 울리고 인사를 하는데 금사집의 영석님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다리를 건너 신만님 칠순님 두표님은 영석님의 차로 옮겨탔고 만덕에 병준 부회장님을 내려드린후 명륜동에서 내가 하차하면서 병준님과 정득님과 경문님과 헤어지면서 내일은 동래서원의 제사에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 어부사시사의 현대문으로 번역한 전문 -
⊙ 春詞(춘사)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뛰워라 배 뛰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날씨가 덥도다 물 위에 고기떳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 실었느냐
동풍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를 돌아보며 西湖로 가자꾸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맑은 깊은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고운 볕이 쬐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배저어라 배 저어라   그물을 넣어 둘까 낚싯대를 놓으리까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漁父歌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도다
석양이 기울었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물가의 버들꽃은 고비고비 새롭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정승도 부럽잖다 萬事를 생각하랴  芳草를 밟아보며 蘭芷도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이 무엇인가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갈 때는 안개더니 올 때는 달이로다
醉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잋이 흘러오니 神仙境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걸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느냐 두견 소리 맑게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남은 홍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더라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그리 길까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어부의 평생이란 이러구러 지낼러라

⊙ 夏詞(하사)
궂은 비 멈춰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고 깊은 흥이 절로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낸고
蓮잎에 밥을 싸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닿 들어라 닿 들어라  삿갓은 썼다만는 도롱이는 갖고 오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무심한 갈매기는 나를 쫓는가 저를 쫓는가
 마름잎에 바람 나니 봉창이 서늘하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정할소냐 가는대로 배 맡겨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남쪽 개와 북쪽 강 어디 아니 좋겠는가
물결이 흐리거든 발 싯은들 어떠하리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오강에 가자 하니 子胥怨限 슬프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楚江에 가자 하니 屈原忠魂 낚을까 두렵다
버들숲이 우거진 곳에 여울돌이 갸륵하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다리에서 앞다투는 어부들을 책망 하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백발노인을 만나거든 舜帝 엣 일 본을 받자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쳐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돛대를 두드리며 水調歌를 불러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뱃소리 가운데 만고의 수심을 그 뉘 알꼬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웠도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푸른 나무숲 꾀꼬리 소리 곳곳에 들리는구나
모래 위에 그물 널고 배 지붕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 하랴 쉬파리와 어떠하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다만 한 근심은 桑大夫 들을까 두렵다   
밤 사이 바람 물결 미리 어이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사공은 간 데 없고 배만 가로놓였구나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물가의 파란 풀이 참으로 불쌍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가로 쥐고 돌길 올라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漁翁이 閑暇터냐 이것이 구실이다

⊙ 秋詞(추사)
物外의 맑은 일이 어부 생애 아니던가  배 뛰워라 배 뚸워라 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실컷 즐겨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흰 그름 일어나고 나무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西湖 가고 썰물에 東湖 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흰 마름 붉은 여뀌곷 곳마다 아름답다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강 뵈는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취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석양이 눈부시니 많은 산이 금수 놓였다
크다란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느냐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갈대꽃에 볼을 붙여 골라서 구워 놓고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질흙병을 기울여 바가지에 부어다고 옆 바람이 곱게 부니 다른 돗자리에 돌아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어두움은 가까이에 오되 맑은 흥은 멀었도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단풍잎 맑은 강이 싫지도 밉지도 아니하다   흰 이슬 비꼇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宮殿이 아득하니 맑은 빛을 누를 줄꼬    
찌거덩찌거덩어야차 옥토끼가 찧는 약을 快男兒에 먹이고저 하늘 땅이 제각긴가 여기가 어디메뇨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바람 먼지 못 미치니 부채질하여 무엇하리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들은 말이 없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옷 위에 서리 오되 추운 줄을 모르겠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가 좁다 하나 속세와 어떠한가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내일도 이리 하고 모레도 이리 하자
솔숲 사이 내 집 가서 새벽달을 보자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空山 落엽에 길을 어찌 찾아갈꼬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흰 구름 따라오니 입은 옷도 무겁구나

⊙ 冬詞(동사)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텁도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끝없는 물결이 비단을 편 듯 고요하다
낚싯줄대 다스리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瀟湘江 洞庭湖는 그물이 언다 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이떼에 고기 낚기 이만한 데 없도다 얕은 개의 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느냐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은 때 바다에 나가 보자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미끼가 꽃다우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간 밤에 눈 갠 후에 景物이 다르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仙界인가 佛界인가 人間界인가 아니로다
그물 낚시 잊어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개를 건너고자 몇 번이나 생각하고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공연한 된바람이 혹시 아니 불어올까   자러 가는 까마귀가 몇 마리나 지나갔느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운데 저녁눈이 꽉 차 있다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거위떼를 누가 쳐서 (차취) 를 싯엇던가
붉은 낭떠러지 푸른 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좋은 물고기를 낚으나 못 낚으나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孤舟에 도롱 삿갓만으로 흥에 넘쳐 않았노라
물가에 외롭게 선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 마라 인간세상 가린다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파도소리 싫어마라 속세 소리 막는도다 滄洲가 우리道라 옛부터 일렀더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七里灘에 낚시질하던 嚴子陵은 어떻던고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십년 동안 낚시질하던 강태공은 어떻던고
아 날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에 붉은 꽃이흩어진다
흥청거리며 걸어가서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  눈달이 西山에 넘도록 松窓을 기대어 있자
                                                           孤山 尹善道 (1651년효종2년) 

 

2003년부조묘제사 및 묘정비 제막식(2003년 3월 9일)   - 문병달

05:20 일어나 국밥을 먹고 06:00병준씨가 운전하는 종친회승합차에 승차하여 06:15동래에서 홍래고문 경동자문 신만부회장 병준부회장 영복 재조님과 천안의  찬호님까지 9명과
승용차에는 4분(진우님과 아드님이신 인탁님,희탁님,칠순고문)이 승차하여 만덕터널에서 병우님이 승차했다.
차량이 많았으나 막히지는 않아 07:05 남강휴게소에서 10분을 쉬면서 커피한잔 마시고 08:00 섬진강을 건너고 08:10 순천나들목에서 2번국도를 이용 08:55 산을 깍은 곳이 보이는 기러기휴게소에 들린후 체육관에서 좌회전하여 부조묘에 도착한 것이 09:10 이었다
주차장에는 10여대의 차량이 주차되었고 성금접수를 받고는 기념품인 우산과 묘정비제막에 대한 안내책자를 배포하고 마당에는 의자를 내어 놓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신실에서는 산청의 유림외에 유림관계자 20여분이 고유제를 지내고 있었고 대종회의 국장님은
어제 이곳에서주무신 분들이 100명이라 한다다.

10:00 입구에는 주차를 금하여 40여대의 차량이 주차된 마을회관앞에 주차후 돌아오니 관리사앞에는 30여명이 선채로 보성군 종친회 회의를 하고있었고 접수처에 종친회의 성금과 동래파6개문중 각 20만원 동래파종중 100만원의 성금을 내고 동제에는 성금자 명단이 걸렸는데 부산의 신만부회장 10만원이 적혀있다.
10:50 내빈과 유림 및 본손의 좌석배치가 완료되고 재구님의 안내방송은 예정대로 11:00정각에 묘정비 제막식을 한다고 알린다.
단상뒤의 내빈석에 30여분이 앉으시고 마당의 의자에는 20명씩 9줄로 180명 선 사람 100여명과 성금접수대 부근에 100여명 등으로 450여명이 참석하고도 계속해 입장을 하고 있었으며, 대종회,충선공파종회, 대통령비서실장 문희상 외 2기의 화환이 걸렸다.

11:00 식순에 따라 내빈인사가 있었는데 해남윤씨 퇴계종손 하회유씨 등 한국의 명가의 종손들이 많이 오셨고  제막식에서는 장소관계로 5분이 테이프를 잘랐는데 기존의 비석과 같이 6자치수이나 하단과 상단이 높아 같은 크기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2:45분 4분의 축사가 있은후 13:00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고는 13:30 부산팀은 승용차와 승합차에 분승하여 토말이란 비석과 기념관이 있는 땅끝에 도착하여 한국의 최남단을 밟고는 모두들 끝까지 왔다는 감회에 서렸다
해남 땅끝마을의 전설은 땅끝마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사재끝이란 곳에 샘이 있는데, 우리나라 북단의는 백두산의 천지물이 스며들어 산맥을 타고 백두산의 정기를 나눠준 뒤 최종 종착역인 이곳 토말 사재끝 샘에서 다시 용솟음친다고 한다. 

자갈이 깔려있는 목눙개에서 사자봉(땅끝 전망대)을 보고 소원을 빌고, 자갈을 하나 물속에 던지면서 다시한번 소원을 빌면 두 개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하는데 곁에 아무도 없어야 한단다 아래는 보길도행 배가 서있는데 섬은 안개로 희미하게 보인다.

다리 두곳을 건너 완도에 들어갔는데 생긴지 7년 정도라는 해산물시장에서 회와 술한잔 하는데 주인은 완도는 개상어를 회를 먹지 않아 모두 부산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16:30 길을 잘못들어 해남으로 돌아가느라 30여분을 헤메고 땅거미가 짙은 19:00 부조묘에 오니 식사를 마쳤지만 영복 부회장님 늦더라도 식사를 준비해 두라는 부탁을 해두었기에 남겨둔 식사를 하였고 서제의 방에서 만난 사손님은 무명옷을 입었는데 비단옷이나  비싼 안동포보다 좋았는데 남평문씨는 문익점 할아버님의 제사에는 물론이고 예복도 무명으로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20:00 충선공파 회의에서 어린측인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은 없어야 하겠기에 광주의 태훈씨와 장흥의 남주씨  서울의 인탁씨 부산의 병준씨함께 승합차에 앉아 젊은 세대가 본 종사에 관한 의견을 30여분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갖는다.

11:00 제사에는 겨우 30여분이 참석했고 부조묘의 제복은 인조견이니 50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목화를 보급한 충선공의 공덕을 기린 후손들이 부조묘 제사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제수 중 생선은 미동두서(꼬리는 동이요 머리는 서쪽이라)이고 맨위의 과일은 헌관들에게 꼭지가 보이도록 눕혔는데 전에 재구님은 남인이었던 문씨들은 서인인 송시열과 같이하지 않기 위하여 제수를 이렇게 차린다고하신 말씀이 생각났지만 송시열이 가신지 500년이니 이제는 잊어도 될 것 같았고 할아버님은 갑자기 생선과 과일의 방향이 돌아 갔을때 뭐라고 하셨는지 궁금했다.

태훈씨와 함께 철상을 하고 기호님이 소개한 지역의 일가 몇분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손에 대한 말들을 나누다가 옆방의 홍래고문님이 자자고 하는 말씀에 서제로 옮겨 경동님과 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느라 병준씨의 잠을 방해하고 늦게 잠이들었다

3월10일 07:00 기상하여 세수와 식사를 하고 09:00 일가들과 헤어져 매실마을에 도착하니 만발한 매화도 있고 아직 피지도 않은 매화도 있는데 눈덮이 지리산의 설경을 배경으로 핀
매화의 절개가 보이고 섬진강을 배경으로한 매화도 좋았기에 많은 분들이 촬영을 하고있고 매화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많은 매화축제였다.  

12:20 남강휴게소에서 희탁님이 중식을 부담하였는데 속을 풀기위해 나는 갈비탕을 먹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중에 돈가스를 드시는 분들이 많았으며 동래에서 일단 해산을 하고 나는 종친회로 향했다에 들렸다 

 

2002년 부조묘 제사(2002. 3.20)  - 문병달

18:00경 부조묘에 두 대의 승합차로 도착한 것이 20:00였고 일가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문익점 생가 복원에 대한 말에서 익점선조의 묘역에 관한 소송으로 사이가 나빠져 생가를 팔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원만하게 해결이 되고 있으나 문익점면화시배지의 비석에 정천익씨의 글자한자를 넣지 않아 불화하게 되어 목면전래지가 된 것은 계속 문제를 풀기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들이 오고 갔으며
산채와 동동주를 반주로 식사를 마치고 나니 19:35이었다
19:40 마당의 임시 천막에서 보성군 청년회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기에 태훈씨의 소개로 옵서버로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는데 결산승인, 예산상정후 세입세출 등을 검토하고 산청 충선공묘제에는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리고 단합대회 일자는 농한기에 한다고 결정하는데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보성청년회는 선조의 위업계승과 종친간의 번영과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98년 4월 16일 50세 미만의 남자로 결성되어 회원수는 67명이나 상시 참석인원은 20여명이며 거의가 충선공파라고 한다.
나에게도 발언 기회가 주어졌기에 부산청년회를 간단히 소개한후 정보화 시대의 종친회운영에는 홈페이지 운영등으로 종친회를 홍보하여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일가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청년들이 앞장을 서야하며 종친회 어른들의 뜻과 현실을 맞춘 새로운 형태의 종친회 운영을 하기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할 책임이 청년회에 있다는 말로 끝을 맺고 홈페이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회의장을 나왔다.
20:10 동제의 마루에서 부조묘 관리위원회의 16차 정기총회를  경청하였는데 계환상임부회장의 개회선언후 선조에 대한 향배가 있은후 경과보고는 흔주재무님이 하시고 태보감사의 감사보고후 결산보고는 흔주재무가 하였다
이어진 예산심의에서 상배님은 성금에 대한 현판을 한다고 하셨는데 종전에는 와비(돌비석)로 하였고 이후 10년은 현판으로 한다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으니 모두 와비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현판으로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21:00예산승인을 마치고 기타 토의시간에는 기문내용의 일부 수정이 논의되었고 병준부산종친회원의 질문에서 등기명의가 충선공파종문회와 개인명의로 된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어 회의를 마치고 일가간의 담소를 나누는데
나는 대종회 사무국장님과 토론을 하였는데 대종회는 회관건립에 주력하고 있으나 회관건립하면 들어갈 인재도 키워야 하는데 홈페이지나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니 안타깝다는 뜻을 전했고 저가 사이버 족보를 만들기 위해 족보 한질의 기증을 요구했으나 소식이 없은 이유가 족보가 없다는 답변을 하시기에 돈을 주고 주문하면 족보가 오더라고 반박하였더니 개인에게 기증하는 전례가 없다고 하시기에 개인이 사이버 족보를 만든 전례도 없었다고 반박하고 후손이 종친회 일을 하겠다는데 밀어주는 전례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학회도 통일교 측에서 운영하고 있고 청주한씨도 종친회에서 별도의 장학회를 설립하였으니 우리도 회관건립후 종친회 장학회 설립을 해야 한다고 하시기에 장학회 문제는 선발에 투명성이 부족하고 장학금도 이자가 떨어진 이유도 있으나 사립대 분기 등록금이 300여만원인데 100만원의 장학금으로는 부족하여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장학금 조성시 총장님이 5억을 내셨지만 우리 일가들이 1억6천여만원의 성금을 내었으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올리는 등으로 한시간 가령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대종회를 지키시느라 개인주머니에서 낸 돈으로 대종회 명의의 봉심을 내는 등으로 대종회를 지켜온 사무국장님께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지 못한 점이 후회스러웠다.

분정은 초헌:칠순(부산) 아헌:영환 종헌:덕회 집례:인열 축:욱현 봉향:병준 봉노:양근 사준:중섭 존작:정선 진설:순모,학근 봉작:경식 찬인:태훈이었고
23:00 헌관과 집사들이 사당으로 입장하고 모든 일가들도 자리를 정리하여 묘제가 봉행되었는데 칠순고문님이 강신례를 마치고 나왔다가 초헌례를 하기 위하여 다시 들어가시는데 계단이 가파르고 높아 나이 드신 분들이 출입하기에 많이 불편해 보였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땀이 나던 낮과는 달리 날씨가 차다
23:12 독축에서 축을 읽지 않았는데 다음 순서로 넘어가 참제자들이 일께워서 23:15 독축을 하였는데 축을 읽는 분의 소리가 무척 낭랑한데 캠코드 건전지가 떨어져 녹음조차 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23:20 아헌례가 진행되고 23:25종헌례에 이어 23:35첨작례를 하고 23:40 숙사때는 일동이 읍을 하였으며 이어 일동이 재배를 하고 헌관이 모두 나오고 분축을 한후에 23:50음복은 상을 밖으로 내어 음복을 하는데 안에서 하는 것 보다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24:00사당을 나와 동제에서 음복잔을 나누는데 청년회원들은 거의 돌아간 듯 나이 드신분이 음식을 나르는 모양이 보기에 좋지 못하다
0:03 전 유적관리위원장의 공로패는 본인의 사정으로 일찍 가셔서 대신 받았고 흔주재무님과 술잔을 나누면서 부조묘는 단청을 하지 않는다 하여 단청을 않고 있다기에 계단은 너무 가파르고 높아서 고쳐야 하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몸을 조심하라고 일부러 만든 것이라고 하여 충신문이 나의 턱높이니 모두가 몸을 낮추고 있는데 나이 드신분이 조상 제사모시다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01:00 옆방에서는 고스톱이 시작되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빗소리가 들리니 내일 일정에 차질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07:00 기상하니 비는 오지 않았으나 날씨가 많이 흐리다.
아침을 먹고 08:15 부산으로 승합차 1대에 8명은 떠나야 했기에 싫다는 분도 억지로 가시게 했으니 남은 9명은 미안함을 느끼며  08:20 여천목사겸 병마첨절제사 諱우창선조의 묘를 참배했는데 3대에 걸친 4분의 묘소가 정비되어 있었다.
09:40 다산 유물관에서 비디오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전시관에서 귀양중에 지은 많은 책들에 놀라고  보존된 많은 자료들이 부러워하며 10:15 다산유물관을 떠났다
대흥사에 도착하니 11:10인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사액사당을 돌아서 법당을 다녀오니 12:00였다.
12:15윤선도 유적지 의 유물관에 도착했는데  여자들의 전쟁을 격으면서 적은 기록 등 많은 자료에 놀랐는데 윤선도의 손자인 공재 윤두수의 그림도 대단했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빠른 1710년에 제작된 지도에 놀라고 일본여도를 보고는 경탄하면서 우리의 유적지는 자료가 없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해남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은 수리중이었고 주변에는 동백꽃이 만발했는데데 동백은 낙화도 감상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발길을 조심해야 했다다.
차의 동력전달 장치에 문제가 생겨 클러치디스크와 삼발이를 교체하는 동안 강진에서 중식을 하고 식대는 진우동래파회장님이 내시고 14:50 부산으로 향했다
종친회 사무실에 도착하니 19;30인데 7명이 화투를 치면서 기다리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