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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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
분류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제165호 |
배향선조 | 10세 諱 익점(작위:부민후, 군호:강성군, 시호:충선공, 호:삼우당 호:사은) |
향사일 | 음력 2월7일 23시(子時) |
부조묘는 공이 크신 분들께 국가에서 사당 건립 경비와 논밭과 노비등을 내려
4대까지만 모시는 제사를 영원히 모시도록 국가에서 배려한 제도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조선 충신들의 부조묘도 있고 문중에서 건립한 사설 부조묘도 있으나,
조선에서 고려 신하에게 내린 부조묘는 안유, 정몽주, 문익점으로 3분이 계실 뿐입니다. |
부조묘의 유래 |
태종1년(1401) |
조정에서 선생의 공덕을 치하하여 부조묘를 세우라 명함 |
중종34년(1539) |
사손(祀孫) 광서(光瑞)에게 후사가 없자 종질인 현령 세화(世華)에게 봉사(奉祀)하게 하고, 세화는 다시 순질공(純質公)의 현손(玄孫)인 군수 선창(善昌)께 사손을 전했다. 선창의 손자인 언상(彦祥)이 임진왜란때 서울에서 별세하니 제사가 끊어졌다 |
영조6년(1730) |
후손이 제사를 다시 모시게 해 줄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하여 영조는 특별히 심의해서 아뢰도록 하라는 명(命)을 내렸으나, 대신(大臣)들이 그 일을 덮어 두었다 |
정조20년1796 |
장령 이섭(李燮) ·주중옹(朱重翁)이 서로 이어 부조묘를 부활시킬 것을 청원드렸으나 답이없었다 |
헌종10년1844 |
선비들과 문씨후손들이 영조의 재가를 얻어 사손(祀孫)을 세웠고, |
철종5년1854 |
문정주가 말씀을 임금님께 아뢰고, 유생 임기백(任基伯)이
삼남(三南)의 선비들과 부조묘를 부활시키고 사손(祀孫)을 세워주시는 은전 베푸시라고 청원하여 특별히 윤허를 받아 선비들과 문씨(文氏)들은 부조묘를 보성의 도개리에 다시 세웠다, |
고종31년1894 |
사손 택호(宅鎬)가 원근(遠近)의 일가들과 함께 조금 위로 옮겨지었고 |
1934년 |
선비들과 문씨들이 합의하여 그 마을의 우봉촌(牛峰村) 신장에다 옮겨 짓고, |
부조묘를 강성에서 보성으로 이건한 유래(부조묘를 보성(寶城) 이전 고유문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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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에 있는 부조묘가 임진왜란으로 무너져 임금께 아뢰니 사손 병열(秉烈)이 보성에 살고 있으니 자손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임금의 배려로 보성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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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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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점 |
중용中庸 |
승노承魯 |
선동 |
광서 |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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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동 |
공현 |
상욱 |
자생 |
성호 |
용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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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동 |
광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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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
세화 |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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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 |
화 |
상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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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병열(秉烈)을 사손으로 지정됨 |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상소 |
장령(掌令) 이섭(李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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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분인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곧 그 당시에 있어서 한나라 소무
(蘇武)와 같은 사람이고, 우리 나라의 후직이옵니다. 그 분은 사신을 모시고 중국으로 가 절개를 지키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그 충의(忠義)의 빛남과
그 기개며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목면(木綿)을 우리 나라로 옮겨
심어서,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과 더불어 역대 어진 임금님 때의
포창과 너그러움을 베푸신 전교(傳敎) 및 예전의 어진 신하였던 이황(李湯) 송시열(宋時烈)의 나타냄이 떨치게 지은 글에 자세히 말해져 있기에, 신(臣)이 다시
중복되게 말씀 올릴 필요가 없사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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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비답은 이러하다."문익점에 대한 부조의 일은 이 뒤에 마땅히 헤아려 처리할 때가 있을 것이니, 너는 더 말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두번째 상소 |
정조 20년 1796년 8월 장령(掌令) 주중옹(朱重翁) |
우리 나라에서 목면(木綿)이 산출된 것은, 문씨(文氏)로부터 비롯한 것이옵니다.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은 만리 밖의 되놈 땅에서 그 씨앗을 입수하였는데, 금지함을 무릅쓰고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와서 우선 꽃들에다 심었사옵니다. 그것이 번성해짐을 기다렸다가 백성들에게 갈아 심는 것을 가르치고, 기계를 처음으로 만들어 조종케 함에 손수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었사온데, 세속에서 문래(文菜)라 하는 것이 그 것이옵니다. 목면(木綿)을 파종한 공(功)을 말할 것 같으면 후직이 곡식을
파종한 공과 다름없고, 기계를 만 |
임금님께서 결정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소(疏)를 살피어 자세히 알고, |
부조묘 복건을 청원하는 세번째 상소 |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유학(儒學)의 선비들이 임기백(任基伯)을 첫머리에 올림 |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옛날의 어진 임금께서 예법을 제정하심에 제전(祭典)보 다 높게 봄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만세에 불멸할 공이 있으면 곧 반드시 모시어 영원히 제사 지내는 법도가 있었사옵니다. 충선공 문익점은, 도학(道學) 충효( 忠孝) 절의( 節義) 공덕( 功德)이 다 함께 갖추어진 사람이었나이다. 고려 종말 기의 풍속(風俗)은 학교 교육이 쇠약해짐으로 무너졌는데, 문익점이 이를 위한 걱정으로 바른 길을 제창하여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해서 사람들을 가르침에
반드시 효도와 우애 그리고 성리학으로써 하였나이다. 그래서 온 나라가 추하게
물들여진 것이 씻어지고 천리가 어두어졌음이 다시 밝아지며,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시 들어졌음이 다시 떨치게 되어지므로 우리 나라 도학의 종(宗)이라 이를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이렇듯 역사책에 명백히 실려 있사옵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중략...>
그 섬나라 왜놈들의 감복이 이와 같았나이다.
그 분은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들어갔는데, 원나라의 황제가 공민왕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들어가 있던 자들이 감히 원의 황제(皇帝) 명을 거역하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문익점은 흘로 그 명(命)에 항거하여 조정에서 다투어 말하기 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이 없는 것이옵니다. " 라 하고는,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굴복하지 않으니, 원의 황제가 크게 성을 내어서 교지(交祉) 땅인 남방(南方) 만리 밖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3년이 되어서 덕흥군(德興君)이 요양(遠陽) 땅에서 격퇴되어지자 곧 풀어주라 영(令)을 내렸나이다. 돌아오는 날에, 그 분은 길에서 목면(木綿)의 씨를 입수하였다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땅에 심어 나라에서 씀에 족하게 하고, 백성들의 이익이 풍부하게 하여 우리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훤하게 일신되었사온데, 그 사람들에게 끼친 혜택은 이와 같은 것이었나이다. |
철종 갑인년(1854) 3월 일에 도승지(都承旨) 이원명(李源明)이 상소문을 임금께 올리자 임금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의 말씀을 내리셨다. "일을 담당하는 부처(部處)에 내려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케 할 일이다. " 예조판서 김보근(金普根)이 임금의 하문(下問)에 대하여 심의(審議)를 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을 아뢰었다. 벼슬없는 유학(儒學)의 선비 임기백 (任基伯) 등이 올린 말씀의 글을 보옵건대, 강성군 문익점의 부조묘를 복건하시는 은전을 청원하는 일로 이 부르짖음이 있었나이다. 문익점은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은 우리 나라 올바른 학문의 종(宗)이었고,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어 그 공은 만세토록 이어져, 자주 역대 어진 임금에서 포창하시는 은전을 내리셨고, 또한 전의 어진 분들이 추앙(推仰)한 논(論)이 많았나이다. 작봉(爵封)이 이미 훈공(勳功)을 기록한 책 중에 보이고, 부조묘에 제사 지내는 일 또한 이미 행하고 있는 바가 많사오니, 지금 이같이 부르짖음은 근거함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뜻의 요지(要旨)는, 정녕 마땅히 허락해서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오나, 부조묘의 은전은 일이 중대하옵기 신(臣)들로서는 감히 멋대로 결정지을 수가 없사온즉,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어 처사토록 하시옴이 어떠하오리까? |
임금께서 결정하시기를, "좋다. "라 하시고 비변사(備邊司)로 내리 시었다 |
부조묘 보성이전 고유문(告由文) |
예조판서(禮曹判書) 김보근( 金普根) 지음 |
아, 선조 어른은 효자였고 충신이셨도다. |
삼우당(三憂堂)의 장자는 중용(中庸)이고 장손은 승로(承魯)이며 그 분의 장증손은 선동(善全)이며, 장고손은 광서(光瑞)는 사자(祀子)가 없어, 승로(承魯)의 셋째 아들인 의동(義全)이 잇고, 그 분의 아들인 광부(光富), 그 분의 아들 세화(世華)가 대를 이었으나 그뒤 또 사자가 없어 화(和)의 차손(次孫) 상능(尙能)의 후손 병열(秉烈)을 사손으로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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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 전경 |
도로의 안내판 |
입구문 |
경내 |
충신문(신실입구) |
부민후관(신실) |
문건 |
충선공 묘정비 |
부산 일가들의 사당 참배 |
진설(제사음식 상차림) |
분정(헌관, 집사등의 임무 분담) |
헌관 집사 호명 |
집사들 정열 |
창석봉작, 칠준아헌관, 태기초헌관 |
헌관 집사 입장 |
기호 집례 |
행사진행 |
독축 |
부북한 참례자들 |
태기 경남회장 아헌례 |
칠준 헌납회장 종헌례 |
영종총무와 사회자 |
흔주재무 |
문재구님 공노패 |
인근의 목사공묘소 참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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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정 |
위패 |
진설 |
재웅님과 승열님 |
단성이씨(문익점선조 장녀가 출가한 집안) 대종회의 참배 |
음복 |
부산팀의 귀향시 나로도의 자연산횟집 |
상견례 |
개회선언 |
재구회장인사 |
영종총무와 승환사손 |
영종총무 재구회장 흔주재무 |
참석 일가님들 |
2005년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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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관, 집사 호명 |
헌관과 집사 명단 |
헌관과 집사 및 참석자 |
재국 집례 |
수철집사, 상배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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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
아헌관 헌주 |
아침식사 |
재구 부조묘관리위원장 |
부조묘관리위원회 이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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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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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심금 접수 |
행사장 |
축화 화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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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빈기념촬영 |
참석한 본손들 |
본손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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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유씨 차종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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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 기념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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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호(광주) |
문화호 |
문윤섭(장흥) |
문병준(부산) |
문영복(부산) |
문영호(강진) |
부조묘 제사 헌관 |
땅끝 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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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참례기 |
2008년 부조묘 제사(2008년 3월15~16일)- 문병달 |
08:55 동래에서 수상님이 운전한 종친회 승합차에 철식 경문님과 출발하고 15:15 마당에서 70여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열렸는데 예년의 100여명이던 예년보다 적었으며 연단을 서쪽에 차리고 참석자를 동쪽에 배석하니 햇볕이 얼굴을 가려 책으로 가리기도 하고 얼굴표정이 찡그러진다. 식순에 따라 회장인사가 있었고 내빈소개에서 나를 대종회홈페이지관리자로 소개하여 잠시 당황했다. |
2004년 부조묘 제사(2004년 음력2월 7일~8일) - 문병달 |
2월7일 차량은 9인승인데 신청자가 많아 조정한 결과 칠순고문, 신만, 광수, 병준부회장 병준총무, 두표, 정득, 경문님과 함께 9명이 14:00 부산을 떠났다. 20:00 재구님의 주재로18차 정기총회를 만조총무의 사회로 시작하여
경과보고에서 묘정비제작 등의 결실이 있었다고 하고는 유인물로 대처하였고
감사보고 후 흔주재무님의 결산보고가 있었다 09:40 꼭 가고 싶었던 윤선도의 무릉도원인 보길도 출항하는데 청해진 카페리는 정원235명이며 선실에는
히타가 들어왔고 배의 운행은 gps의 모니터로 하는 깨끗한
배이다. 실비가든횟집(061-553-6253)에서 회2접시(10만원)와 식사(9천원)
및 음료수(1만원)를 시켰는데 낙지회의 서비스와 음식맛도
깔끔하다. 계산은 도포입은 신만,경문님은 각 5만원 나머지는 각
2만원씩 거출한 것이 부족하여 경문님이 4만여원을 추가 부담하였다. - 어부사시사의
현대문으로 번역한 전문 - |
2003년부조묘제사 및 묘정비 제막식(2003년 3월 9일) - 문병달 |
05:20 일어나 국밥을 먹고 06:00병준씨가 운전하는 종친회승합차에 승차하여 06:15동래에서 홍래고문 경동자문 신만부회장 병준부회장 영복 재조님과 천안의 찬호님까지 9명과 10:00 입구에는 주차를 금하여 40여대의 차량이 주차된 마을회관앞에 주차후 돌아오니 관리사앞에는 30여명이 선채로 보성군 종친회 회의를 하고있었고 접수처에 종친회의 성금과
동래파6개문중 각 20만원 동래파종중 100만원의 성금을 내고 동제에는
성금자 명단이 걸렸는데 부산의 신만부회장 10만원이 적혀있다. 11:00 식순에 따라 내빈인사가 있었는데 해남윤씨 퇴계종손 하회유씨 등 한국의 명가의 종손들이 많이 오셨고 제막식에서는 장소관계로 5분이 테이프를 잘랐는데 기존의 비석과 같이 6자치수이나 하단과 상단이 높아 같은 크기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2:45분
4분의 축사가 있은후 13:00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고는 13:30
부산팀은 승용차와 승합차에 분승하여 토말이란
비석과 기념관이 있는 땅끝에 도착하여 한국의 최남단을 밟고는 모두들
끝까지 왔다는 감회에 서렸다 자갈이 깔려있는 목눙개에서 사자봉(땅끝 전망대)을 보고 소원을 빌고, 자갈을 하나 물속에 던지면서 다시한번 소원을 빌면 두 개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하는데 곁에 아무도 없어야 한단다 아래는 보길도행 배가 서있는데 섬은 안개로 희미하게 보인다. 다리 두곳을
건너 완도에 들어갔는데 생긴지 7년 정도라는
해산물시장에서 회와 술한잔 하는데 주인은 완도는 개상어를
회를 먹지 않아 모두 부산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20:00 충선공파 회의에서 어린측인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은 없어야 하겠기에 광주의 태훈씨와 장흥의 남주씨 서울의 인탁씨 부산의 병준씨함께 승합차에 앉아 젊은 세대가 본 종사에 관한 의견을 30여분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갖는다. 11:00
제사에는 겨우 30여분이 참석했고 부조묘의 제복은 인조견이니 50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목화를 보급한 충선공의 공덕을 기린 후손들이
부조묘 제사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태훈씨와 함께 철상을 하고 기호님이 소개한 지역의 일가 몇분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손에 대한 말들을 나누다가 옆방의 홍래고문님이 자자고 하는 말씀에 서제로 옮겨 경동님과 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느라 병준씨의 잠을 방해하고 늦게 잠이들었다 3월10일
07:00 기상하여 세수와 식사를 하고 09:00
일가들과 헤어져 매실마을에 도착하니 만발한 매화도 있고
아직 피지도 않은 매화도 있는데
눈덮이 지리산의 설경을 배경으로 핀 12:20 남강휴게소에서 희탁님이 중식을 부담하였는데 속을 풀기위해 나는 갈비탕을 먹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중에 돈가스를 드시는 분들이 많았으며 동래에서 일단 해산을 하고 나는 종친회로 향했다에 들렸다 |
2002년 부조묘 제사(2002. 3.20) - 문병달 |
18:00경 부조묘에 두 대의 승합차로 도착한 것이 20:00였고
일가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문익점 생가 복원에 대한 말에서 익점선조의
묘역에 관한 소송으로 사이가 나빠져 생가를 팔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원만하게 해결이 되고 있으나 문익점면화시배지의 비석에 정천익씨의
글자한자를 넣지 않아 불화하게 되어 목면전래지가 된 것은 계속 문제를
풀기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들이 오고 갔으며 분정은 초헌:칠순(부산) 아헌:영환 종헌:덕회 집례:인열
축:욱현 봉향:병준 봉노:양근 사준:중섭 존작:정선 진설:순모,학근 봉작:경식
찬인:태훈이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