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경상도
|
연결표(재실명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
|
경앙재(景仰齋) |
위치 |
경북 김천시 지례면 |
배향선조 |
판도판서공파 지례문중 선조 |
향사일 |
한식날(4월6일) |
|
경앙재 정면 |
|
|
재실 입구 |
재실 내부 |
|
|
안에서본 제실 |
밖에서본 제실 |
|
|
경앙재 현판 |
|
|
|
도암당 |
옥성루 |
|
|
|
분정기 |
|
|
유허각기 |
|
유허각 상량문 |
|
병인대종사협찬기 |
|
남평문씨 시원기 |
|
|
|
|
|
|
|
|
|
|
|
|
|
|
|
|
|
마을의 근경 |
|
마을의 전경 |
|
|
감이 많은 마을 |
지례면 소재지 마을의 풍경 |
주변관광지(무주 적상산) |
|
|
적상산 안국사 전경 |
|
|
성보박물관 |
극락전 |
|
|
병준, 태주, 재룡, 병영 |
병달 태주 재룡 병영 |
|
|
적상산 정상 등반기념(병준, 재룡, 태주, 병준) |
|
|
적상산에서 본 덕유산 |
적상산성 |
강면사(江棉祠)(일명 충선공 별묘) |
위치 |
경북 울진군 죽변 화성3리 울진종친회에서 관리 |
배향선조 | 10세 충선공 익점 |
향사일 |
음력 3월 11일 |
1943년 건립한 옥계서원에서 송시열님과 충선공을 함께
제향하였으나 1997년 송씨들이 옥계서원을 이건하게 되어 충선공을 모실수 없게 되니 화성리 40여호의 일가들과 울진의 110가구의 일가들이 힘을 충선공의 유허비를 모셔와서 강면사를 건립하고
수호했고 담장은 군에서 2,500만원을 지원받아 새로 쌓았으나 흐르는 세월속에 보수할 재정이 없어 곧 무너질 듯한 대문을 지나니
유허비각과 충선공 영정을 모신 영당이 보는 사람의 가씀을 아프게 한다 |
|
|
외삼문 |
|
|
|
|
건립취지 비석 |
비각 |
|
|
비각 |
|
|
|
| ||
비각내의 비석 |
|
울진회장님의 강면사 설명 |
|
|
인근마을과 산하의 일가님 |
|
울진의 횟집에서 부산참배자들 |
|
울진 일가님들과 부산 및 서울참배자 |
| |
|
위치 |
경북 영해읍 영해경찰서옆 |
배향선조 | 10세 충선공 익점 |
향사일 |
음력 4월 끝정일 |
영해는 이가정(李稼亭) 선생의 우거지요 아들 목은(이색)선생의 탄생지로서 유허비가 이미 고대에 건립되어 있는 성지임을 확인하였다. 가정선생의 문인인 삼우당 선조께서 영해에서 학업을 이루었는데 사적시설이 없어 추모비를 건립하고 주변에 목화를 재배하여왔으나 문석봉님의 발의와 경비일부 부담으로 2000년 대종회에서 사당건립을 결의하고 2002년 6월8일 준공하여 고유제를 했다 |
년 |
월 |
일 |
내 용 | ||||||||||||||||||||||||||||||||
1955 |
3 |
|
신안사제에서 대동보 발간시 영해는 이가정(李稼亭) 선생의 우거지요 이목은(이색)선생의 탄생지로서 영선생의 유허비가 이미 고대에 건립되어
있는 성지임을 확인하였다. 1957
지방 유림제위의 협찬과 본손의 정성으로 추모비 건립 완성
1958
3
유림주간으로 도유사 남세혁(南世赫) 초헌관 이항발(李恒發)선생 고유문 남병기(南炳基)선생 작문으로 유림 300여명의참석리에 교유제를 성대히
봉행하고 비원에는 목면화를 제배하여 매년 가을에 봉면제를 봉행하였다.
2000
6
대종회에서 추모비에 이어 사우 강당을 건립하기로 의결
2000
8
옛날 영해부관아 자리였던 번영회 장소 대지 일백평을 매수
2000
10
사우와 강당 건립공사 착공
2000
10
25
사우와 강당 상량식을 거행
2002
3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2002
6
8
유림 200여명과 본손 200여명이 참석하여 고유제 거행 |
충선사 건립동기 |
이 곳은 고려 말 충신 민족의 은인
문익점선생을 모실 사당이다. 선생(1329-1398)은 진주 강성 현에서 태어나 가정 이곡 선생의 문하에서 목은선생과 동문 수학하고 포은
정몽주선생 동방급제하여 벼슬이 좌사의대부,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
충선사 건립 보존 위원회 |
추모비명 병서 |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초휘는 익첨(益瞻)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사은(思은)이다. 중세(中歲)에 왕국의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학(聖學)이 밝지 못함을 근심하고 자신의 도(道)가 서지 못함을 근심하여 집을 강성의 도천(道川)위에 세우고 삼우(三憂)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삼우거사(三憂居士)라고 하였다. 고려
삼광(三光)선생 휘 다성(多省)시호 무성공(武成公)과 고려 명현 휘 극겸(克謙)충숙공(忠肅公)의 후라.고려 충혜왕 원년 신미 2월 8일에 선생이 강성(江城)의 배양리(培養里)에서 태어나
문학(文學)이 일찍 이루어 졌으니 가정(稼亭)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 목은(이색)과 정 포은(정몽주)으로 더불어 성리서(性理書)를
강구하였다 |
충선사 기문(記文) |
목면
종자를 도입하여 동국에 의료혁명을 일으킨 민족의 은인 문익점선생은 고려말의 명현이다. 가정 이곡선생의 문하에서 목은과 동문수학하고 포은과
동방급제하여 관이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 |
충선사 상량문 |
고려충신 공유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충효대본으로 바른 학문을 시작하여 융성하게 하고 대절종확하며의동지국에 공○우직(于稷) 하니 동방대현이라 만세에 추앙받아 조정이
강성군과 부민후를 봉하고 충선공의 휘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증직하였다. ○라 추원보본(追遠報本) 오직 숭조의 단심으로 유림의 지원과 후손의
정성으로 선생의 추모비르 ㄹ건립하고 유림고유제를 성대히 거행하며 가정에 목화를 재배하여 매년 가을에 헌면제(獻綿祭) 봉행하는데 심형을 기우리는
선생의 19세손 석봉회장은 대종회와 후손의 협심으로 고도 영해부관아 유지(墟址)에 선생을 봉안할 충선사와 면호당을 건축함에 금일에 상량식을
거행하고 본 사우에서 주위 경치를 관찰하니 태백준령의 결맥처인 칠보산의 정기 받은 고부승지(古府勝址)이다. 동쪽을 살펴보니 상태산(上台山)과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이고 경사(鯨沙) 이십리에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서쪽을 살펴보니 형제봉과 국사봉이 ○翠(물총새 취)요
운구풍정해천공(雲舊風定海天空이라 남에는 봉화산과 태양산에 한운유유물환성이( 閑雲悠悠物煥星移) 아득하리라 평생교육 동우회경상북도 부회장 김병헌(金炳憲) 근찬 |
|
상량문 |
사진 전시물 | |
|
|
|
|
|
|
|
향사 사진 | |
|
|
|
|
진설(유림에서는 익힌 것을 사용하지 않음) |
|
|
|
|
위패 개봉 |
헌주 |
|
|
초헌례 |
독축 |
|
|
집례인사 |
참신례 |
|
|
사신례 |
|
|
집례 배례 |
분축 |
|
|
촬영 |
접수 |
|
|
유림의 접대(중식) |
|
|
중식후 배웅 |
|
본손들의 중식시간 |
|
인근관광지 괴씨마을 |
|
|
| |
위치 |
경남 합천군 용주면 노리 |
배향선조 |
8세 간혜공 諱 근, 9세 세봉, 세린 |
향사일 |
음력 10월9일 |
고려말기의 혼란한 정국에 실망하신 판도판서 간혜공 諱 근(瑾)께서,
아드님 세봉(世봉)公, 세린(世麟)公과 함께 대야촌(합천의 옛이름)에 낙향하시어
합천의 남평문씨 입향조가 되시니 설단하고 제향을 모셔왔습니다. |
|
고현재 |
|
|
|
|
|
고현제 중건 성금비 |
|
|
|
|
고현재 건립 성금기 |
|
|
|
|
|
|
|
|
|
진설 |
지방 |
|
|
축문 |
축문 |
|
|
|
|
|
헌관(초헌:상안, 종헌:병준님과 축관) |
|
|
|
|
|
|
헌관의 헌주 |
모든 참석자 재배 |
|
|
| |
간혜공 종회 회의참석자 |
홍식회장, 총무 |
|
부산종친회 참석자 |
2005년 고현재 간혜공 삼부자 제향 참례기(11월10일) |
|
08:00
동래에서 1호승합차에는 병준총무, 재묵, 병열, 태주, 재룡, 판문, 상석,
석주님이 승차하시고 2호승합차에는 칠준, 경문, 병달, 칠순, 신만,
정근, 두표, 병준, 종일님이 승차하여 08:15 출발했다. |
2004년 합천고현재 묘사 참례기 (음력10월 9일) |
|
차량사정으로24인승 버스를 20만원 순평군파부산종친회에서
빌렸고 21명이 승차하였는데 24인승은 보조석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좌석이
좁고 불편하였고 10:30까지 합천에 도착하여야 했기에 휴게소에 한번
들리지 못하였는데도 함안쪽에 사고로 인하여 차까지 밀리고 있다가
사고지점을 지나는데 길에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으니 운전조심은
아무리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을 확인하는데 모두 남의 일로만 보니
문제이다. 군북에서 나와서 의령에 도착하니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고 대의고개 휴게실에서 화장실만 다녀오고 강행군을
하였다. 올해부터 간혜공과 두아드님이신 세봉, 세린을 합사하였으나
위패를 만들지 못하여 지방으로 왼쪽부터 붙였고 아헌인 신만님은
관이 작아 절을 하면 떨어지니 벗어 두고 절을 올렸으니 끈하나 달면
될 것인데 작은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어 충선공파에서 참석한 11명은 방안으로 모셨고
60여명의 순평군쪽의 참석자는 마당에서 병영총무의 사회로 총회가 시작되었는데
회장의 인사에서는 성금과 의무금의 납부가 미흡한데 어느 문중에서는
선조 기념사업에 5억을 모금 하기로 하였는데 기한전에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는 너무 미흡하다는 말씀이 있었고, 합천총무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결산보고를 하였는데 명규님이 미확인분이 무엇이며 예산도 없는
결산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는데 답변은 미확인분은 성금을 받았으나
계좌입금이어서 의무금인지 분담금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일 뿐이며 예산은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답변이 있었고 지출항목중에는
고현재 보수가 6건의 지출이 있었는데 이렇게 적어서야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볼멘 소리가 들리는 속에서 결산보고를 마쳤다 안건에서 묘사일이 늦어 소문중의 제사를 먼저 모시는
경우가 있으니 날짜를 10월3일로 변경하자는 안건이 있었는데 동성제와
같아서 곤란하다고 하고 초5일의 안건이 나왔으나 고사체를 관리하는
분은 날짜를 변경하여 변경된 줄을 모르고 오신 분들 때문에 골탕을
먹은 일이 있으니 그냥하자는 강경한 반대가 있었고 찬반으로 거수를
하였는데 부결되었다. 13:30 헌납집에서 오신 칠준님과 삼가출신인 정근님이
가는 길목이니 삼가의 부조묘에 잠시 들리자는 의견이 있어 청주한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고 함께 참배를 하였는데 나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
2002년 고현재 참례기 (2002년 11월 13일) |
|
06:00 병준님이 종친회 승합차로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 06:20 명륜동에서
승차하고 06:25 형님을 동래에서 태우고 교대앞에서 경동부회장과 버스정류소
옆에서 석동씨가 타고 범냇골로 향했다. 산의 8부능선에 작은 단이 있고 중간에 큰 단이 있고 위에 비석없는
묘가 있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여쭈니 아래는 옛부터 있었고
중간은 근래 만들었다고 하시고 위는 아마 배위의 산소로 짐작한다는
설명인데 단을 새로 만들면 옛날의 단은 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갖여온 술을 치고 절을 올리고 올라 갈 때와는 달리 작은 냇물을 끼고
내려가는 말끔한 산길을 내려와 농로에 도착했는데 이지점에 안내석이
하나 있어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
2002년 세린공 묘제(무곡 옥산제 뒤) 참례기 |
|
12:10
옥산제(근 선조의 차남 휘 세린 묘소옆)로 출발했다. 13:05 종일님이 초헌관으로 삼상향을 올리고 묘제를 시작하여 아헌 종헌을 거쳐 예필을 하였고 묘제후 술잔을 기울이고 산에 갖여온 음식은 가져가지 않는다고 과일 한쪽까지 비우고 일어났다. 14:00 내일 묘제에 참석할 분들은 남고 승용차에는 종일님, 칠순님
경동님이 타시고 나머지 10명은 종친회 승합차를 이용하여 무곡마을을
출발하고 의령의 곰탕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
11월 23일(음력 10월 9일) 06:30 병준님이 종친회 승합차를 운전해 내려오다 06:35 명륜동에서 승차하여 교통부에 도착하니 06:50인데 홍래,칠순,차범, 상석, 광수,판문님의 얼굴이 보이고 병영, 병주 석주 태주씨등도 나오시고 차범님이 우유와 사탕등을 준비하는 동안 덕점님의 승용차가 도착해 두 대에 분승해 하여 07:10 도시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서김해 갈림길과 2566미터의 터널을 지나서 구마갈림길에 도착하니 08:00인데 마산을 들어가지 않고 바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
11월23일(음력 10월 9일) 13:00 장소: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 묘소 |
판도판서 휘 근 묘제 참례기에서 이어집니다 |
위치 |
진주시 관방동 |
배향선조 |
판도판서공파 관방문중 선조 |
향사일 |
음력 10월9일 |
|
|
모성제 |
경지문(대문) |
|
|
|
|
건물에 붙은 현판글 |
신실 주변의 기둥에 붇인 주련 | |||||
|
|
|
|
|
|
|
|
|
대명화 기 |
|
모성재 상량문 |
|
모성재 기 |
|
|
성금록 |
대명화 재배지 비석 |
|
|
진설 |
헌주 |
|
|
일가님들과 인사 |
|
|
참석한 부녀자들 |
참례자 |
|
|
소문중 제실건물(생가에 지었슴) |
진설 |
|
|
위패 |
|
|
|
|
|
|
|
기념촬영 |
|
|
소문중 묘제 |
|
유인 재령이씨 순절록 |
|
|
|
|
|
취성공 할 묘소 | |||
|
|
|
|
|
|
|
묘의 앞면 |
옛날 비석의 앞면과 뒷면 |
|
|
묘의 전경(뒷부분) |
묘의 전경(앞부분) |
|
|
묘소의 유래 설명 |
참배 |
|
인근관광지 진주 월아산 산행안내도 |
|
|
월아산 청곡사 입구 |
|
|
|
|
청곡사 대웅전 안내문 |
청곡사 대웅전 |
|
|
종각 |
|
|
|
괘불(이동용 불상그림) |
청곡사 영산회 쾌불탱 |
|
|
주차장(후문) |
산신당 |
2005년 관방문중 제사(11월19일 음10월18일) |
|
06:25
병준총무와 함께 승합차로 출발하여 동래에서 관방 문중인 병영님부부
판문님과 덕점 석동 태주님을 만나고 조금 늦게 출환님이 도착하여 06:35
출발했다. 제사는 11:00라고 하지만 apec 관계로 승합차의 운행을 07:00가
넘으면 2부제에 적용되어 부득하게 일찍 출발한 것이다.
06:30
남강휴게소에서 병영님이 국수를 사시는데 태주님과 덕점님은 식사를
했다고 하시었고 나는 어제의 산악회에서 마신 전주가 있었기에 돈을
보태어서라도 5000원인 곰탕을 먹고 싶었지만 혼자 표나게 할
수가 없었는데 국물맛은 시원했다. |
경남일보 2005년 4월23일 16면 |
방주 문국현 |
1866년 김해부사로 내려와 있던 성재 허전은 남명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덕천서원을 방문하고 진주에 들러 한 제자의 집을
방문했다. 성재 선생의 당시 영남학맥을 주도해 나가던 대학자였다. 진주에 들러 한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 집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성재가 진주를 방문했을 때 찾은 곳이 현재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방주(芳洲) 문국현(文國鉉)의 집이었다.
|
위치 |
경남 합천군 이사례 |
배향선조 |
판도판서공파 이사례문중 선조 |
향사일 |
음력 10월9일 |
|
|
서룡재에 제사를 위해 참석한 일가님들 |
|
|
분정기 |
축문 |
|
진설 |
|
|
초헌례 |
독축문 |
|
|
축관 |
독축시의 제사 참석자 |
|
|
태주 집사 병준집사 |
병준집사 병주집사 |
|
|
|
제사 진행 |
|
|
주변 관광지(황강을 내려보는 누각) |
|
|
한벽루 입구 |
한벽루 요사체 |
|
|
정자 |
비석 |
|
벽한정 기문 |
|
|
고현재에서 오트바이를 타고 안내해주는 일가의 뒤를 따라 13:06 손목2구 마을의 서룡제에 도착하니 가정집같은 형태인데 옆에있는 가정집은 고사채로 짐작되는데 건물은 칠이 깨끗하게 되어있었으나 주변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어 황량하기 까지 하다. 마을을
돌아보니 용연서원이라고 돌에 새긴 벽한루가 인근에 있었는데 박연(朴연)선생을
모신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었고 황강이 아래에 펼쳐있고 뒤는 송림이
좋았다. 합천에서 풍광이 좋은 정자들은 1.호연정(상주주씨) 주세봉, 2.이암(쌍책면) 관수사, 3. 연호사 함백루(합천읍)라고 설명해 주셨다. 헌관과 집사 분정과 진설등으로 제사가 늦어져 14:30에 종주님 초헌 아헌:병영 종헌:찬도 집례:기주 축:복주 진설:상석 집례:병준,태주,병주였고 정성을 다하여 경건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모셨다.
15:00에 마당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제실 수리비가 1000여만원이었고 제수준비는
덕점님이 30만원으로 준비하셨다고 하는데 참석자 40여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으니 저렴하게 준비되었다는 생각이었고,잔액은 논의 세를
받았을 때 190만원이라고 하였는데 제실의 샤시비용은 200만원이라고
하니 술한잔 먹기도 미안스럽지만 샤시는 설치해야 목조건물의 보존에
도움이 될 것같다. 아직 조경에는 손이 미치지 못하여 경내가 황무지여서
조경이 시급해 보이지만 예산이 없으니 식목은 일가들이 10만원씩을
기증하여 기념식수를 하는 방향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영으로 오기전의 휴게실에서 재묵님 부담으로 맥주한잔하였고 부산에 도착하여
19:14 용표님댁을 방문하여 문병하였는데 17명이 함께 가는 일은 모양새가
아닌데 생각외로 정정하시어 좋았으며 종사에 관한 간단한 보고를 하고 나왔다. |
위치 |
경남 하동군 |
배향선조 |
18세 문後(號 연강재) |
향사일 |
4월 20일 |
연강재는 호가 연강재이신 문후공을 모신곳입니다. |
|
|
연강재 입구 |
안내문 |
|
|
신실 입구 |
신실 |
| |
현판 |
|
|
|
|
부착물 |
|
|
현판 |
|
| |
신실의 신위를 모신 함 |
입구의 비석 |
|
|
2007년 7월 부산 장년회원 방문 |
| |
희구님의 제실 설명 |
관리사로 가는 문 |
위치 |
경남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
배향선조 | |
향사일 |
하동 북천면 직전리는 의안공의 후손으로 연강재파에 속하는 문중의 집성촌입니다 |
|
|
마을입구의 문익점선조님 유허비 |
|
|
영모재와 직하재의 현판 |
|
|
| |
|
|
2007년도 장년회원 방문 |
|
|
| |
일가님들과 상견례 |
| |
현판 |
| |
성금록 |
| |
|
|
|
종가댁 |
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