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경상도

경상도지역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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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상남도

경앙재

강면사

충선사

고현재

모성재

서룡재

연강재

직하재

경앙재(景仰齋)

위치

경북 김천시 지례면

배향선조

판도판서공파 지례문중 선조

향사일

한식날(4월6일) 

경앙재

정면

재실 입구

재실 내부

안에서본 제실

밖에서본 제실

경앙재 현판

 

도암당

  옥성루

분정기

 

유허각기

유허각

상량문

병인대종사협찬기

남평문씨

시원기

 

 

 

 

 

 

 

 

마을의

근경

마을의

전경

감이 많은 마을

지례면 소재지 마을의 풍경

주변관광지(무주 적상산)

 

적상산

안국사

전경

성보박물관

극락전

 병준, 태주, 재룡, 병영

 병달 태주 재룡 병영

적상산 정상 등반기념(병준, 재룡, 태주, 병준)

적상산에서 본 덕유산

적상산성

강면사(江棉祠)(일명 충선공 별묘)

위치

경북 울진군 죽변 화성3리   울진종친회에서 관리

배향선조

10세 충선공 익점

향사일

음력 3월 11일

1943년 건립한 옥계서원에서 송시열님과 충선공을 함께 제향하였으나 1997년 송씨들이 옥계서원을 이건하게 되어 충선공을 모실수 없게 되니 화성리 40여호의 일가들과 울진의 110가구의 일가들이 힘을 충선공의 유허비를 모셔와서 강면사를 건립하고 수호했고 담장은 군에서 2,500만원을 지원받아 새로 쌓았으나 흐르는 세월속에 보수할 재정이 없어  곧 무너질 듯한 대문을 지나니 유허비각과 충선공 영정을 모신 영당이 보는 사람의 가씀을 아프게 한다
화성리(의안공 래선조의 차남 15세 순(珣) 후손들의 집성촌)의 3개 부락의 일가들이 수호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힘으로는 복원할 형편이 못된다면서 지원을 기다린다고 했다

외삼문

건립취지 비석

비각

비각

비각내의 비석

울진회장님의

강면사

설명

인근마을과 산하의 일가님

울진의

횟집에서

부산참배자들

울진

일가님들과

부산 및

서울참배자

  

충선사

위치

경북 영해읍 영해경찰서옆

배향선조

10세 충선공 익점

향사일

음력 4월 끝정일

영해는 이가정(李稼亭) 선생의 우거지요 아들 목은(이색)선생의 탄생지로서 유허비가 이미 고대에 건립되어 있는 성지임을 확인하였다.
가정선생의 문인인 삼우당 선조께서 영해에서 학업을 이루었는데 사적시설이 없어 추모비를 건립하고 주변에 목화를 재배하여왔으나 문석봉님의 발의와 경비일부 부담으로 2000년 대종회에서 사당건립을 결의하고 2002년 6월8일 준공하여 고유제를 했다

내         용

1955

3

신안사제에서 대동보 발간시 영해는 이가정(李稼亭) 선생의 우거지요 이목은(이색)선생의 탄생지로서 영선생의 유허비가 이미 고대에 건립되어 있는 성지임을 확인하였다.
우리 삼우당 선조께서는 가정선생의 문인으로서 여태 사적시설이 전무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선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유림제현의 찬동을 받아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선생의 찬문으로 건비준비를 시작하다

1957

지방 유림제위의 협찬과 본손의 정성으로 추모비 건립 완성

1958

3

유림주간으로 도유사 남세혁(南世赫) 초헌관 이항발(李恒發)선생 고유문 남병기(南炳基)선생 작문으로 유림 300여명의참석리에 교유제를 성대히 봉행하고 비원에는 목면화를 제배하여 매년 가을에 봉면제를 봉행하였다.

2000

6

대종회에서 추모비에 이어 사우 강당을 건립하기로 의결

2000

8

옛날 영해부관아 자리였던 번영회 장소 대지 일백평을 매수

2000

10

사우와 강당 건립공사 착공

2000

10

25

사우와 강당 상량식을 거행

2002

3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선조를 봉안하고 매년 향사를 봉행하며 강당 면화당에는 목면화 종자도입, 제배방법과 직조과정을 전시하고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삼우당 선조의 유적으로서 생전에 고려 조정에서 건립한 효자비와 묘소 불천위묘 서원 사당 영당 등을 화보로 전시하여 선조의 숭고한 유덕을 영세에 보전하고 추모함 추모비는 본사우정원에 이건 봉안 하였다.

2002

6

8

유림 200여명과 본손 200여명이 참석하여 고유제 거행
◎대종회 버스1대 ◎부산종친회 버스1대 ◎대구종친회 버스1대 및 봉고1대 등

충선사 건립동기

이 곳은 고려 말 충신 민족의 은인 문익점선생을 모실 사당이다. 선생(1329-1398)은 진주 강성 현에서 태어나 가정 이곡 선생의 문하에서 목은선생과 동문 수학하고 포은 정몽주선생 동방급제하여 벼슬이 좌사의대부,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
고려 공민왕때 원나라에 사실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에 숨겨가지고 들어와 재배에 성공하고,씨아, 물레, 베틀을 발명하는 등 부단한 노력으로 목화의 재배법과 무명베의 직조기술을 연구 함으로써 의복사에 일대혁신을 이룩하여 국민의 복리증진에 크게 공헌하였다. 선생은 학자요, 충신이며, 출천의 효자였다. 그래서 고려에서 효자정려되고, 조선에서 충선이라 시호를 내리고 장성을 부민후에 봉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이 충선사는 선생을 봉안제향하고 선생의 위엄과 유덕을 만세에 전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선생의 19세손 석봉(석봉)회장의 주관으로 종친의 정성을 모아 기존의 추모비 건립에 이어 저기 2000년에 창건 하였다. 면화당(綿花堂)은 목화씨 도입 과 재 배 방법, 무명베의 직조과정등을 전시하기 위하여 같이 건립하였다.

21세손 경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경현(暻鉉) 근직(謹職)
충선사 건립 보존 위원회

추모비명 병서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초휘는 익첨(益瞻)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사은(思은)이다. 중세(中歲)에 왕국의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학(聖學)이 밝지 못함을 근심하고 자신의 도(道)가지 못함을 근심하여 집을 강성의 도천(道川)위에 세우고 삼우(三憂)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삼우거사(三憂居士)라고 하였다. 고려 삼광(三光)선생 휘 다성(多省)시호 무성공(武成公)과 고려 명현 휘 극겸(克謙)충숙공(忠肅公)의 후라.고려 충혜왕 원년 신미 2월 8일에 선생이 강성(江城)의 배양리(培養里)에서 태어나 문학(文學)이 일찍 이루어 졌으니 가정(稼亭)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 목은(이색)과 정 포은(정몽주)으로 더불어 성리서(性理書)를 강구하였다
공민왕조에 벼슬이 예문관 직강 태상박사 좌정언에 이르렀는데, 그 때에 원나라 임금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워서 왕을 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서장관으로서 사신을 받들어 원나라에 가서 극구 변론함에 항의하여 굴하지 아니하니 원나라 임금이 크게 노하여 벌을 주고자 하다가 좌우의 신하들이 충간 함으로 인해 드디어 풍토가 심악한 교지(현재 월남)남쪽 만리에 귀향 보내어졌다.
선생이 걸출한 모습으로 귀양지에 이름에 약샘이 문득 뜰아래서 나자 원근(遠近)이 다 먹어서 그곳 사람들의 정이 스스로 낫는지라 그들은 공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3년만에 원나라 임금이 크게 뉘우쳐서 명령을 내려 돌아오계 하였는데, 도중의 들판에 꽂이 눈 같은 것을 또고 비로소 목면인 줄 알았다. 김용(金龍)에게 시키어 따려고 하자 지키는 자가 소리를 치며 빼앗고자 하다가 선생의 위의(威儀)를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국법이 심히 엄하여 외방으로서 알지 못하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깊이 감추어 잘 가지소서 하였다.
선생이 김용에게 명령하여 붓대롱에 감추어 돌아왔는데 몇해가 못되 성하게 퍼져서 이제까지 힘을 입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 할 때 왜구가 쳐들어 오자 사람이 다 숨었으나 선생은 평상시와 같이 울고 전을 올리니 도적들이 감복하여 나무를 깍아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놓고 감으로 한 고을이 편안하였고, 이에 조정이 정려(旌閭)를 내리면서 효자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병을 핑계하고 숨어서 삼우당을 세우고 작고 그윽한 이치를 강구 하더니 중간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와서 상소한 것이 팔조(八條)였는데 극히 당시의 마땅한 일을 의논하였다.
소매를 떨치고 고을에 돌아와서 크게 후학 장려하는 것으로 일삼다가 고려 사직이 이미 기울어지자 문을 닫고 스스로 교요함을 즐려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아니 하였다.

정종 경진년 2월8일에 돌아가시자 왕은 갈로개산 묘좌에 예장하고 묘와 사당을 세우고 묘지기를 두고 비와 제전(祭田)을 내렸다.
태종 신사년에 가정대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경연 홍문관 춘추관사를 증하고 갈충고국 계운순성3좌익탤중광리정량공신을 내려 강성군을 봉하고 시호를 충선공이라 하여 부조묘를 세워서 제전과 노비를 내렸다
세종 경신년에 대광보국 수록대부 영의정 부민후에 봉하고 그 후 열성왕(列聖王)이 치제(致祭)하였음에 전교로서 표창하고 사람이 제사 올려 제현이 찬양하여 선생의 충효 도학과 절의 공덕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선생은 5남을 두었으니 중용은 조선에 벼슬이 사간원 헌납 이르렀고 중성은 한림학사 간의대부요 중실은 문과 간의대부요 증진은 성균진사 밀직부사 문하시중이요, 중계는 문과 예부상서 참지도첨의니, 다 고려조의 명신이다. 후손이 극히 성함에 세대가 변함 없음을 이에 증험할 것이다.
선생의 후손으로 영덕, 영양, 울진에 있는 사람이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비를 세워서 매년 가을에 목면(木綿)드리고 제사하니 그 정성이 지극하도다. 나에게 글을 청하는 사람은 후손 명기 (明琦) 석봉(錫奉) 사손 승헌(承憲)이다. 따라서 명(銘) 하여 쓴다.

죽음과 쫓김을 생각지 아니 하고 임금을 위하니 그 충성이요,
칼과 창을 두려워 하지 아니 하고 여묘를 지키니 그 효성이요,
마음을 의리에 다하여 정밀하게 연구하니 그 학문(學文)이 크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고 문을 닫으니 그 절개가 크고
금하는 것을 무릎쓰고 길을 감추어서 돌아와 덕으로서 입히니 그 공이 넓은지라.
슬프다, 선생을 참 동방의 대현(大賢)이로다

삼우당 문선생 탄생후 628년 단기 4291(서기 1958)년 무술 10월 6일
성균관 관장 최찬익 삼가 지음


충선사 기문(記文)

목면 종자를 도입하여 동국에 의료혁명을 일으킨 민족의 은인 문익점선생은 고려말의 명현이다. 가정 이곡선생의 문하에서 목은과 동문수학하고 포은과 동방급제하여 관이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리민복을 생각하여 귀국시에 목면씨를 가져와 이용후생에 진심하고 족당이 전파에 노력하여 조국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겨레의 은인이다.
선생은 왕국의 부진과 성학의 부전관 기도의 불립을 근심하여 삼우당이라 호하여 성리학의 참명에 곻헌한 명유학자요 혁명기에 수절한 고려말의 앞선 충신이요 출천효자였으니 고려에서 효자정려되고 조선에서 공업과 충절을 높이 칭송하여 충선이라 시호를 내리고 부민후에 봉하고 영의정에 증했다.
선생의 빛나는 학문과 단충 만세불후 영원불멸할 공덕은 민족의 영세불망의 위인으로 추앙받아왔다.
선생의 십구세손 석봉 회장의 발의와 종친의 정성으로 기존 추모비 건립에 이어 영해도호부 옛터에 충선사와 면화당을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 제향하고 매년 항례를 봉행하며 목화의 유래와 기면물을 전히사니 선생의 빛난 공적과 숭고한 애국애민의 정신을 천추만세에 전하고 추모케 하리라
                서기 2000년 10월 10일   21세손 경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경현(暻鉉) 근직(謹職)


충선사 상량문

고려충신 공유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충효대본으로 바른 학문을 시작하여 융성하게 하고 대절종확하며의동지국에 공○우직(于稷) 하니 동방대현이라 만세에 추앙받아 조정이 강성군과 부민후를 봉하고 충선공의 휘호를 내리고 영의정에 증직하였다. ○라 추원보본(追遠報本) 오직 숭조의 단심으로 유림의 지원과 후손의 정성으로 선생의 추모비르 ㄹ건립하고 유림고유제를 성대히 거행하며 가정에 목화를 재배하여 매년 가을에 헌면제(獻綿祭) 봉행하는데 심형을 기우리는 선생의 19세손 석봉회장은 대종회와 후손의 협심으로 고도 영해부관아 유지(墟址)에 선생을 봉안할 충선사와 면호당을 건축함에 금일에 상량식을 거행하고 본 사우에서 주위 경치를 관찰하니 태백준령의 결맥처인 칠보산의 정기 받은 고부승지(古府勝址)이다. 동쪽을 살펴보니 상태산(上台山)과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이고    경사(鯨沙) 이십리에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서쪽을 살펴보니 형제봉과 국사봉이 ○翠(물총새 취)요 운구풍정해천공(雲舊風定海天空이라 남에는 봉화산과 태양산에 한운유유물환성이( 閑雲悠悠物煥星移) 아득하리라
북쪽을 살피니 승운봉과 필보산이 태백정기를 충선사에 쏱아주리라
위를 올려보니 아침의 햇살과 저녁의 노을은 기세가 셀수없고(朝暉夕陰氣萬天)이라
아래를 내려보니 송천 청류는 동해연안하고 팡대광야는 천흥곡창(天興穀倉)이라 천지인 화합에 명당하처(明堂何處) 오 곧 출현될 거(巨)사우인즉 성생 광영의 중추되고 서기 창창이라 세세향사 숭봉지불○잠(崇奉之不○잠)

서기 2000년 경진 10월 10일
   평생교육 동우회경상북도 부회장 김병헌(金炳憲) 근찬

상량문


사진 전시물

향사  사진

진설(유림에서는 익힌 것을 사용하지 않음)

향사

위패 개봉

헌주

초헌례

독축

집례인사

참신례

사신례

집례 배례

분축

촬영

접수

유림의 접대(중식)

중식후 배웅

본손들의 중식시간


인근관광지

괴씨마을

괴시마을 안내판

고가의 안내판

고현재(羔峴齋)

위치

경남 합천군 용주면 노리

배향선조

8세 간혜공 諱 근,  9세 세봉, 세린

향사일

음력 10월9일

고려말기의 혼란한 정국에 실망하신  판도판서 간혜공 諱 근(瑾)께서, 아드님 세봉(世봉)公, 세린(世麟)公과 함께 대야촌(합천의 옛이름)에 낙향하시어 합천의 남평문씨 입향조가 되시니 설단하고 제향을 모셔왔습니다.
2005년 제향 부터 세봉공과 세린공의 형제분을 합사하여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고현재

고현제

중건

성금비

고현재

건립

성금기

진설

지방

축문

축문

 

헌관(초헌:상안, 종헌:병준님과 축관)

헌관의 헌주

모든 참석자 재배

간혜공 종회 회의참석자

홍식회장, 총무

부산종친회

참석자

 

2005년 고현재 간혜공 삼부자 제향 참례기(11월10일)

 08:00 동래에서 1호승합차에는 병준총무, 재묵, 병열, 태주, 재룡, 판문, 상석, 석주님이 승차하시고 2호승합차에는 칠준, 경문, 병달, 칠순, 신만, 정근, 두표, 병준, 종일님이 승차하여 08:15 출발했다.
09:28 의령관문을 지나서 19:40 대의고개에서 음료수 하나씩을 마셨다.

10:30 고현제에 도착하니 차량 6대가 있어 주차할 곳이 없어 애를 먹었는데 문중소유라고 하는 고현재 옆의 밭을 주차장으로 만들면 해결이 될 것 같다고 병준님께 건의하라고 하여 건의 하였으나 회장의 답변은 시큰둥하게 집행부와 의논하겠다고 했다.
11:00 제사를 모시는데 신실의 창문을 떼어내어 도열한 일가들이 제사의 진행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신위는 봉익대부 판도판서 간혜공 부군과 비 평산군부인 청주한씨인데 평산군이 아닌데 평산군부인은 무슨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초헌:상안 아헌:병준 종헌:희주 축:찬도 집례:기주 진설:홍석 집사는 병식 용현 동주 홍대 동윤 영수님이었으며 경건하고 질서있게 제사를 모셨다.
이어 회의에서는 참석한 내빈소개후에 홍석회장님 인사가 있었고 병영총무의 문중별 참석자를 확인하고 의무금과 성금의 독려에 대한 사항이 있었다.
현재 8일인 제사일을 5일로 변경하여 소문중에서 먼저 제사를 모시지 않도록 하자는 안건은 거수에서 현재처럼 하기로 되었는데 타당함에도 변화를 싫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홍래고문과 용표 고문의 쾌유를 기원하는 응원의 박수도 있었다.
업무 보고에서 묘역보수와 묘지 진입로 개설 및 고현재 진입로 표지석 보수와 고현재 부분 보수가 있었다고 했고 재정보고에서는 잔액 6천만원이 조금넘었고 의무금 1억1천만원 입금액 4천6백 잔액6천5백으로 40%를 조금 넘었으니 독려를 위하여 지역의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종사를 위하여 의무금을 부과하고 이의 징수를 위하여 노력하는 집행부와 완납한 6개소문중들이 있으니 종회의 발전이 확실시 될 것으로 보여 흐뭇했다.
부산에서 오신 분들이 식사하고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술을 들고는 식사를 하였고
이어 시작되는 서룡재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출발했다. 

 

2004년 합천고현재 묘사 참례기 (음력10월 9일)

차량사정으로24인승 버스를 20만원 순평군파부산종친회에서 빌렸고 21명이 승차하였는데 24인승은 보조석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좌석이 좁고 불편하였고 10:30까지 합천에 도착하여야 했기에 휴게소에 한번 들리지 못하였는데도 함안쪽에 사고로 인하여 차까지 밀리고 있다가 사고지점을 지나는데 길에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으니 운전조심은 아무리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을 확인하는데 모두 남의 일로만 보니 문제이다.

군북에서 나와서 의령에 도착하니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고 대의고개 휴게실에서 화장실만 다녀오고 강행군을 하였다.
합천에 들어가니 수해복구와 도로공사로 덤프추럭이 많고 속도가 늦으면서도 비켜주지 않았고 도로옆의 간해공의 단비를 스쳐지난후 고현제에 도착하니 10:45이었다
냇가에서는 돼지고기를 다듬고 고사채 마당에는 돈육국과 반찬을 차려서 아침을 먹지 못한 사람들께 식사를 대접하는데 아침을 설쳤기에 한그릇 들었는데 국맛이 일품이었다.
11:15 일가들이 줄지어 서고 묘제가 거행되는데 촬영을 위하여 방안에 들어갔더니 마루에는 담배재가 수북한 재떨이가 있어 방안으로 들여 놓았고 진설은 병식님이고 초헌관이신 용표님이 진설을 살피러 오셨는데 집례인 기주님은 목소리도 좋고 진행을 잘 하시는데 삼상향을 하려하니 성냥의 준비가 없어 잠시 중단하였고 나의 라이타를 빌려 드렸고 초헌례를 올리는데 찬창이신 종주님이 진행을 보아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부르오"를 해야 함에도 하다 말다하시니 집례가 애를 태운다.

올해부터 간혜공과 두아드님이신 세봉, 세린을 합사하였으나 위패를 만들지 못하여 지방으로 왼쪽부터 붙였고  아헌인 신만님은 관이 작아 절을 하면 떨어지니 벗어 두고 절을 올렸으니 끈하나 달면 될 것인데 작은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던 것으로 느껴진다.
종헌은 상주님이 하시었고 예필까지 원만한 진행으로 예년과 달리 행사에 옳다느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없이 제사를 마쳤는데 홀기는 올해 새로 시행한 것인데 잔이 6잔이니 6회의 잔을 삼헌관이 올리게 되니 매 잔마다 잔을 내리시오, 퇴주하시고 술을 부어 헌관에게 드리시오 헌관은 술을 전작에게 주고 전작은 잔을 올리라는 것을 반복하기를 18회였으니 지겹다는 느낌이었고 초헌관의 잔을 아헌관이 퇴주를 하고 아헌관의 잔을 종헌관이 퇴주 하였으며 음복례가 없었고 분축에 초헌관이 입회하지 않는 점이 다른곳의 홀기와 달랐다

이어 충선공파에서 참석한 11명은 방안으로 모셨고 60여명의 순평군쪽의 참석자는 마당에서 병영총무의 사회로 총회가 시작되었는데 회장의 인사에서는 성금과 의무금의 납부가 미흡한데 어느 문중에서는 선조 기념사업에 5억을 모금 하기로 하였는데 기한전에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는 너무 미흡하다는 말씀이 있었고, 합천총무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결산보고를 하였는데 명규님이 미확인분이 무엇이며 예산도 없는 결산서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는데 답변은 미확인분은 성금을 받았으나 계좌입금이어서 의무금인지 분담금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일 뿐이며 예산은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답변이 있었고 지출항목중에는 고현재 보수가 6건의 지출이 있었는데 이렇게 적어서야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볼멘 소리가 들리는 속에서 결산보고를 마쳤다
이어 회장의 임기가 만료되어 신임회장 선출 순서가 되어 홍래님을 임시의장으로 하여 진행하여 유임으로 결정되었는데 수락을 하지 않고 유임은 건강상 할 수 없다고 고사한다고 하였고 총무님은 의무금을 내지 않은 집안에서 오신 분들을 찾았으나 나오지를 않았고 성금의 독려도 있었다

안건에서 묘사일이 늦어 소문중의 제사를 먼저 모시는 경우가 있으니 날짜를 10월3일로 변경하자는 안건이 있었는데 동성제와 같아서 곤란하다고 하고 초5일의 안건이 나왔으나 고사체를 관리하는 분은 날짜를 변경하여 변경된 줄을 모르고 오신 분들 때문에 골탕을 먹은 일이 있으니 그냥하자는 강경한 반대가 있었고 찬반으로 거수를 하였는데 부결되었다.
회의를 마칠무렵 회장께서는 수락연설을 하시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종인들의 성금과 의무금의 납부에 협조를 하는 조건으로 수락한다 하시고 즉석에서 성금하시는 분들이 있어 300만원의 성금 납부가 있었는데 앞으로 발전이 되리라는 확신이 서는 부분이었다.
고사체에서 일을 하시는 분은 국에 밥이 편한데 하시면서 끓여 내온 떡국으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탁주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었고 일가들이 떠나기 시작하였고 우리도 13:45 고현제를 출발하였다.

13:30 헌납집에서 오신 칠준님과 삼가출신인 정근님이 가는 길목이니 삼가의 부조묘에 잠시 들리자는 의견이 있어 청주한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고 함께 참배를 하였는데 나는 처음 오는 곳이었다.
관리하시는 일가님의 안내로 부조묘에 갔더니 신실과 앞에 마주하는 숙소와 음식을 마련하는 건물이 있었고 신실에는 충선공과 팔계주씨 진양정씨의 위패가 중앙에 함을 만들어 모셨고 함을 열었더니 함안에 비단으로 덮개를 만들어 모신 위패가 있었고 왼편에는 청의를 입으신 영정을 모셨다. 건물은 퇴락하였으나 이제까지 모신 후손들의 정성을 대하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하였다.
칠순님이 잔을 올리고 함께 제배를 하고 일행중에 저녁에 모임이 있는 분이 계셔서 일가분들을 찾아 뵙지는 못하고 바로 출발하였고 의령에서 고속도로를 진입하기 직전의 휴게소 매점에서 간단히 소주 한잔을 나누고 부산을 향했는데 냉정에서 북부산으로 방향을 잡은후 길이 막혀 가다 서다 하기를 구포까지 하니 장거리를 갔다 온 것보다 더욱 지친다.
17:30 동래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2002년 고현재 참례기 (2002년 11월 13일)

06:00 병준님이 종친회 승합차로 출발한다는 말을 듣고 06:20 명륜동에서 승차하고 06:25 형님을 동래에서 태우고 교대앞에서 경동부회장과 버스정류소 옆에서 석동씨가 타고 범냇골로 향했다.
06:50 범냇골에 도착하니 일가들이 나와 계셨고 칠순님, 홍래님, 종일님의 승용차를 이용하고 종친회 승합차에서 기주, 치주 병준운영, 병준자문, 재묵 해석 석동 차범님가 나까지 9명이 승차하고 병영 경동 석주 재동 호석님은 영수님이 운전하는 승합차에 올라 동서고가로를 거쳐 남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07:40 진영휴게소에서 커피한잔 들고 의령나들목을 나온 것이 08:10(도로비 3,100원)이었고 08:30 대의고개에 도착하니 승용차는 도착해 있었고 잠시후 영수님이 차가 도착하였고  병주님의 일행도 만났다.
고령합천지방도 33번도로를 달리면서 형님께서 태국의 한의사를 만났는데 뇌졸중이면 눈을 뜨지 말라고 하더라고 하여 모두 궁금해 하였는데 눈을 뜨면 불행해지니 아예 뜨지 말아야 하고 평소에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9:20 합천다리입구에서 좌회전하여 강을 왼쪽으로 따라 올라 노리마을 달산리입구에서 좌회전 한 것이 9:30이었다. 고현재에 도착하여 아직 묘제까지 시간이 있으니 간혜공 단을 가자고 제의하여 제묵님이 아신다고 하여 갔으나 길이 묵어 찾지 못하고 헤메이다 합천의 일가들이 오셔서 방향만 잡고 길을 만들며 가는데 뒤따라 가면서 가지를 분지르고 난 길이나마 먼저간 사람들이 있어 편했으니 인생사도 선조들이 닦아준 길을 후손들이 쉽게 가고 있다는 생각에 선인들께 대한 감사와 나의 의무를 느낀다.

산의 8부능선에 작은 단이 있고 중간에 큰 단이 있고 위에 비석없는 묘가 있어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여쭈니 아래는 옛부터 있었고 중간은 근래 만들었다고 하시고 위는 아마 배위의 산소로 짐작한다는 설명인데 단을 새로 만들면 옛날의 단은 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갖여온 술을 치고 절을 올리고 올라 갈 때와는 달리 작은 냇물을 끼고 내려가는 말끔한 산길을 내려와 농로에 도착했는데 이지점에 안내석이 하나 있어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농로를 걸으면서 이러다 제향에 참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염려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15명이나 두고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11:00 정각 고현재에 도착하니 종헌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소에 하던 홀기가 아니어서 인지 종종 옆사람들의 조언이 들어가고 유식에 모든 참제자가 읍을 하고 있는데 옆사람이 집례에게 일어나게 하라고 하니 집례는 홀기에 없다고 하시면서 홀기를 내미시니 집례를 맏은 분이 많이 당황하고 있는 듯 했다.
11:05 예필을 한후 일가들과 마당에서 음식을 들면서 용표님께서 작년보다 참제자도 적고 현재 운영진도 갖추어지지 못하고 재정또한 없으니 좋은 의견들을 구했는데  술을 한잔 받아 음복술을 드는데 돈육은 덜삶아 붉은 색이니 손이 가지 않지만 먹었더니 껍질은 아예 씹히지도 않아 다음잔은 떡으로 안주를 하려 했으나 작년에 남은 떡은 아닐텐데도 말라서 딱딱하여 소금으로 안주를 하면서 준비하시는 분들이 이왕에 돈은 드는 것이니 참석한 일가들이 먹기에 좋도록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또한 새벽부터 몇시간을 달려와 딴곳에 간 것도 아니고 산소를 참배하러 갔으니 10분만 기다렸으면 함께 제사를 모실수 있었을 터인데 배려하지 못한 점이 섭섭했는데 회의결과는 부산에서 주제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회의를 마쳤다
묘소에 가지 않은 분들은 아침을 대접받았지만 묘소를 참배하고 온 사람들은 식사도 하지 못하였건만 묘사에 갈 때마다 기본으로 주는 떡도 한쪽 나누어 주지 않은체  옥산재의 묘제에 참례하기 위하여 출발했다

 


2002년 세린공 묘제(무곡 옥산제 뒤) 참례기

12:10 옥산제(근 선조의 차남 휘 세린 묘소옆)로 출발했다.
용주 초등학교를 지나 무곡마을 입구를 지나 동네의 끝에 주차하고 5분가량 걸어 12:45 중현대부 소부윤 묘소에 도착하여 12:50 산신제를 모시고 진설하는 동안 용표님의 설명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문씨가 살지 않아 제사 준비를 다른 곳에서 해 왔으며 운영을 맞을 마땅한 사람도 없다면서 운영진을 선출하기로 동의하였고 내일에 있을 입향조 장남인 휘 세봉묘제는 여러 집안의 묘제를 함께 하므로 07:00 시작하여 15:00경에 마친다고 한다.

13:05 종일님이 초헌관으로 삼상향을 올리고 묘제를 시작하여 아헌 종헌을 거쳐 예필을 하였고 묘제후 술잔을 기울이고 산에 갖여온 음식은 가져가지 않는다고 과일 한쪽까지 비우고 일어났다.

14:00 내일 묘제에 참석할 분들은 남고 승용차에는 종일님, 칠순님 경동님이 타시고 나머지 10명은 종친회 승합차를 이용하여 무곡마을을 출발하고 의령의 곰탕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14:50 의령군청앞에서 할매곰탕집을 물었더니 수정식당을 가르켜 주었기에 일부는 방에서 기다리고 우리는 전화를 하면서 뒷차와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15:00 의령종로식당으로 오라고 하여 함께 만났다.
보드러운 수육을 안주로 술을 나누고 이어 식사가 왔는데 깔끔하고 시장도 한몫하여 맛도 좋았는데 종일님께서 20만원을 재묵님께서 5만원을 부담하여 계산하고 부산으로 향하다가 병준씨 신호위반을 하여 2만원의 고지서를 받았는데 재묵님이 내시기로 했다.
17:10 부산나들목을 나오니 조금씩 밀리더니 만덕에서 형님을 내려 드리고 나와 18:00만덕 요금소까지 지독하게도 밀리더니 요금소를 지나니 밀림이 없어 정체의 요인이 요금소에 있으니 요금체계를 변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데 나만 아니었을텐에 왜 이리 개선이 없을까 하고 원망해 본다
차안에서 차범님이 내일인 13일 11:00 거벌집 묘제에 가자고 하시는데 늦은 통보에 볼이 부어 집에가서 스케줄을 살펴 보아야겠다고 대답을 보류하고 병준님의  차로 명륜동까지 와서 내렸다.

 

2001년 고현재 참례기

 11월 23일(음력 10월 9일) 06:30 병준님이 종친회 승합차를 운전해 내려오다 06:35 명륜동에서 승차하여 교통부에 도착하니 06:50인데 홍래,칠순,차범, 상석, 광수,판문님의 얼굴이 보이고 병영, 병주 석주 태주씨등도 나오시고 차범님이 우유와 사탕등을 준비하는 동안 덕점님의 승용차가 도착해 두 대에 분승해 하여 07:10 도시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서김해 갈림길과 2566미터의 터널을 지나서 구마갈림길에 도착하니 08:00인데 마산을 들어가지 않고 바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08:10의령갈림길에서 나와 33번 국도에 들어가니 안개가 짙게끼어 비상등을 켜고 거북이 걸음들을 하고 있었는데 08:30 대의 고개에 도착하여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의고개는 의령,산청의 경계라고 하며 커피한잔을 들면서 잠시 쉬었다
합류한 승용차와 함께 08:50에 출발하여 09:00 산악회원들을 칠준부회장이 대접하였다는어전부락을 지나고 신기마을을 지나면서 옥산에 諱 세린묘소가 있으며 대양면에 諱세봉묘소가 있다는 설명을 병준씨에게 들었다
노리마을 입구에서 꺽어 외길을 따라 들어가더니 재실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는데 이른 탓인지 우리가 일착이었다 서원 대문인 자정문(自靖文)앞에는 단 보수 고현재 증건 성금비가 있는데 내용은 고려말에 남쪽으로 내려오신 판도판서 간혜공 諱 근 께서 대야촌(합천)에 은거하신후 직계후손만 삼천여호로 번창하였으나 묘단이 긴세월 동안 허물어지고 고현재가 풍우에 기울어져가서 1983년 위선에 뜻을 가진 후손들이 모여 보수할 것을 의논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전체 후손들이 의무성금과 성의를 더해주신 특찬금으로 묘단을 보수하고 단비를 새로 세우며 석물을 갖추어 정화하였으며 기우는 고현재를 새로히 중건하고 대문을 갖추었으며 묘답도 보충하였다 이분들의 기록을 남기고자 돌에 새겼으며 후손 인항의 협찬으로 건립하도다  1988년 무진 10월 9일 이라 되어있고 3명씩 42줄로 126명의 이름과 성금액수를 적었는데 많게는 300만원에서 10만원까지였다. 선조를 모시기위해 성의를 모으는 정성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있었는데 신도비는 용주면 소목리에 있는데 십리 정도 된다고 하여 보지 못함이 유감이었다.
09:30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돈육국에 햇쌀밥을 맛있게 먹었는데 일가들이 속속 도착하여 인사를 나누고 10:00 집사의 호명이 있었으나 아직 진설도 않았고 10:05 용표님 일행 5분이 도착하여 식사를 준비하기에 시간의 여유가 있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40여호의 집은 주차할 곳이 없어 길옆에 차들을 세워 두었고 이마을에서 문씨는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뿐이고 모두 타성이라고 하는데 몇 개 남은 모과가 노랗게 익었고 감나무에는 감이 20여개 매달려 있는데 까집집이 3개나 있어 까지 연립인데 출타중인지 마을에는 인적이 없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제실에 돌아오니 삼베도포를 입으신 분도 있으나 도포를 입지 않은 제관들이 많았고 10:30 찬인이 초헌관을 안내하는데 왼발부터 계단을 밟아 올랐고 도열한 사람들이 55명이며 집사들이 10여명으로 마당이 꽉찼다.
주련에는 동에서부터 淸風化作山之西(청풍화작산지서) 同道夷齊多限義(동도이제다한의) 落身不向京之北(낙신불향경지북) 백천隱居淑寞村(백천은거숙막촌) 이라 적었는데 맑은 바람부는 산의 서쪽에 자리했는데 함께 공부한 사람도 오랑캐되니 한이 많구나 낙향하여 서울을 보지 않을 것이요 적막한 촌에 숨어살리라 라는 뜻으로 느껴지는데 나름대로 해본 해석이니 틀려도 도리가 없다
신위전꿰, 봉작이작수헌작, 부복 흥, 참제자 궤 재배등의 홀기가 나오가 있으나 재실의 문이 좁아 안의 진행사항이 보이지 않는데다 육성으로 하니 잘 들리지 않는데도 덩치큰 아끼다견은 자꾸만 짖어대니 개라도 옮겨 메었으면 갑갑함이 들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배를 했다.
10:45 초헌관례에 이어 독축을 하는데 홀기가 들리지 않아 일부만 읖을하고 거의가 서 있었고 10:47 아헌례와  10:52 국궁, 흥 평신의 홀기에 따라 재배를 하였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음복례가 진행되는데 일부는 제사가 끝이 났다고 착석을 하고 옆에서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다렸으나 예필을 아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제사를 마쳤으니 바로 회의에 들어간다고 했다
창문에 붙여둔 성금록에는 부산종친회 30만원, 초헌관 炳哲님(대기부락) 20만원 아헌관
(대현부락)  10만원 洪丘(대현) 10만원 재부순평종회 10만원 협천종친회 10만원 斗桓 10만원 甲柱(천곡부락) 10만원 으로 110만원 이었다. 

정주 총무는 헌관은 망을 내어 모인중에서 의논하여 선임하였으며 부산종친회 등의 성금과 논 3섬수확에 50만원 정도인데 묘당보수 관리사수리등에 사용하고 식대만 1인당 3000원 정도로 남은 돈은 100여만원에 불과하여 회장도 별세하고 혼자서 하고 있으니 애로가 많은데 문중별 가구수를 뽑았더니 5405인에 호당 1만원씩 거출하면 무너진 단을 보수하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례에서 오신분이 지례와 동촌 죽전을 합하면 1235호라고 적혔는데 근거가 어디있으며 이런 큰 집안이면 집사자리 한 번 한일도 없는 것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따졌으며 홍래님은 그저 100만원 남았다고 하고 5천만원을 거두려면 예산이라도 세웠느냐고 하시니 장부에 보면 인계사항이 있다고 답하면서 돈을 주고서라도 총무는 내어놓고 싶다고 언성을 높이는데도 장부를 열람하거나 감사의 감사사항에 대한 반문이 없고 못하면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등 언성이 높아졌고 여기에서 준비없이 이런 의논은 힘드니 각 집안의 대표들이 모여 하자는 의견이 있은후
용표님의 제의로 회장유고후 후임 공석이니 회장의 선출이 우선이라고하여 호선제로 선출이냐, 선거인단제로 할 것인지의 결정에서 선거인단제로 결정이나자 즉석에서 대현, 역평, 골품, 광릉, 지례 심표 반여 7집의 대표를 추천받아 회장선거에 들어갔는데 일가들이 길옆에 주차한 차량들 때문에 마을버스가 길이 막혀 차주인을 찾느라 한동안 부산하다보니 회장은 누가 선출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대문의 양쪽에 붙은 주련의 내용을 병춘씨에게 물었더니 점필제의 시에 이르기를 어느사람이 먼저 동으로 옮겼는고 대야촌에 표박하였도다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12:15 일가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없는 형편에 봉심금의 답례로 5만원을 주셔서 홍래고문이 2만원을 가지고 칠순고문, 광수회장과 덕점님의 승용차로 남명사당에 간다고 떠나시고 우리일행은 3만원을 봉고차 용으로 받아서 용표님의 차를 뒤따랐다

 

2001년 세린공 묘제

 

11월23일(음력 10월 9일) 13:00  장소: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 묘소

판도판서 휘 근 묘제 참례기에서 이어집니다
용표님의 차를 따라 12:30 1011번지방도를 따라 대양면 갈림길을 지나고 12:35 합천군 대양면 무곡리에 도착하여 길옆에 주차를 한후 5분 정도 걸어 산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간혜공 근의 작은 아드님이신 부윤공 휘 세린의 묘소인데 비석의 내용은 다시 소개 하기로 하며 할머님의 묘소는 실전되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3:20 초헌관 19대손 주환, 아헌관 재곤, 종헌관 병도님이 도열하고 일동이 도열하여 묘제가 시작되었는데 참석자는 30여명이었고 절차는 앞의 청사제와 같았으나 엿이 올라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13:30 첨작례에 이어 재배를 하고 산신제를 지낸후에 이어 순평군파 부산반여집 용표회장님의 현황설명이 있었는데 후손은 2,600여명이 되나 묘답은 4년전부터 지을 사람이 없어 400여평은 밭으로 개조하여 벌초비용으로 충당하고 있으나 옥산제가 폐가가 되어 마루에 대나무가 올라오고 있어 개축도 불가능 하여 병식(세미실로 구대 진사 집안)씨 등과 옥산재를 평당 5만원 정도(총 200평 1000만원)에 구입할 사람이 있어 매매관계를 의논하였으나, 학주씨가 부친이 이룬 것을 후손이 파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하여 진척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병식씨가 주도하여 유사들이 제사만 모시고 있으니 이번에 조직을 구성하여 옥산제와 야산 5정보(15,000평) 등의 관리와 보수등의 일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여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바로 회장선거를 위한 선거인단을 추천하였는데 강능의 상태, 심묘의 홍렬, 세미실의 병식, 관방의 병영, 부산반여의 용표님이 선거인단이 되어 회장선출을 하였는데 교장으로 은퇴하신 용강의 제곤님이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2월 25일 총회에서 정식으로 결성을 하기로 하였는데 늦었지만 잘된 일이며 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는데 용표님은 킹메이커로 일에 무리가 없으면서도 추진력이 있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14:20 무곡리 마을에 내려오니 큰 느티나무에서부터 옥산제 땅이며 바로뒤가 옥산제인데 기와는 많이 낡았으나 기둥은 모두 튼튼하니 손만 보면 사용에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남쪽을 주민 오씨가 대나무를 심어 10여미터가 넘는 대나무 숲에 가려있고 마당이건 마루건 대나무가 올라오고 있는데 화가 치밀었다
사람의 양심으로 건물앞에 대밭을 만든 것부터가 잘못이지만 일조권보호를 위하여 자신의 경계에서 높이의 절반의 간격인 5미터는 띄어 두어야 하고, 대뿌리가 넘어오지 않도록 조치할 의무가 있으며 위의 모든 조건을 갖춘다고 해도 조망권침해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위의 조건으로 소를 제기하면서 전체 자손들의 정신적 피해와 건물의 손상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거나 대나무의 제거작업을 우리측에서 대집행 한 후에 경비를 청구하는 방법이나 아예 대뿌리의 제거가 쉽지 않을 경우에는 이전비용을 부담시키는 방법도 알아 보아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영표님은 25일 판도판서파 부산반여집 묘사에 참석하겠느냐 하시지만 동래파 반여집의 묘제에 참석하기로 약속하였다고 말씀 드렸는데 부산에만 5집에서 묘제를 모신다고 했다.
대구로 가시는 용표일가님의 뒷바퀴가 바람이 없어 타이어 교체를 병준님과 도우면서 타이어 교체하는 방법을 익히고 14:25분 대구와 부산으로 헤어지고 우리는 諱근 선조의 장남이신 휘 세봉의 묘소에 가기위해 5분가량 차를 달려 입구에 차를 세우고 5분가량 걸어 묘소에 도착하였다
비석에는 고려 봉상대부 전농판서 강헌공지묘라고 세겨있는데 오늘은 술한잔 준비하지 못하고 절만 올리고 내려오려니 결례이지만 내일 후손들이 모여 묘제를 모신다고 들었으니 그때 많이 드시라고 말씀 올렸으니 귀엽게 보아 용서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諱 세봉 산소 바로 앞에 판관 남평문공 휘 인범지묘라는 비석을 세운 묘지가 있는데 누가 앞에 묘를 쓴 것인지 알지 못하여  주인을 찾아보니 고성집에서 세웠기에 그냥 넘어갔다고 말씀 들었는데 선조의 무덤 바로 앞에 산소를 쓴 것이 잘하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일인 것 같다
15:05 묘소입구를 출발하여 15:25 대의고개에서 잠시 쉬고는 차내에서 홈페이지 소개를 간단히 하고 함께 만드는 홈페이지가 되어야 하니 자료가 있으면 부탁 드린다고 말씀 올리고 16:30 의령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17:20 거제리 시장안의 횟집에 자리잡았다
술잔을 나누면서 족의를 다졌는데 회가 워낙 맛이 있었고 술도 계속 마신 상태여서 조금씩은 술이 취한분도 계셨는데 상세한 소개를 하다보니 의안공파는 차범님이 경절공 31세이고 내가 33세인데 비하여 판도판서 집은  판문(69세)님과 상석(37년)님은 경절공 26세이고, 씨와 태주(43생)님은 관방집안으로 28세 부산순평집의 박태준씨를 닮은 정제(무인생)님과 멋쟁이이신 병영(32년)님은 29세, 오늘 종일 운전하시느라 술한잔 못드시는 병준님 29세였고, 상근부회장이신 월정집안의 홍렬(75세)씨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은 하시는데 한문학에 조예가 깊다고 하시니 앞으로 많은 도움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시간보아 종친회 사무실에 한번 들리겠다고 말씀 올렸다.  전어회는 병주님이 사시고 계산은 기름값으로 준 3만원을 보관하고 계시던 홍렬님이 초장과 술값을 부담하시고 19:00 횟집을 나와 19:15 명륜동에서 하차하고 병준씨는 세차를 하여 차를 종친회에 반납하였다고 한다. 

모성재(慕醒齋)

위치

진주시 관방동

배향선조

판도판서공파 관방문중 선조

향사일

음력 10월9일           

모성제

경지문(대문)

건물에 붙은 현판글

신실 주변의 기둥에 붇인 주련

 

대명화

모성재

상량문

모성재

성금록

대명화 재배지 비석

진설

헌주

일가님들과 인사

 참석한 부녀자들

 참례자

 소문중 제실건물(생가에 지었슴)

 진설

 위패

 기념촬영

 

소문중

묘제

유인

재령이씨

순절록

 

취성공 할 묘소

 묘의 앞면

 옛날 비석의 앞면과 뒷면

 묘의 전경(뒷부분)

 묘의 전경(앞부분)

 묘소의 유래 설명

참배

인근관광지

진주

월아산

산행안내도

월아산 청곡사 입구

청곡사 대웅전 안내문

청곡사 대웅전

종각

 

괘불(이동용 불상그림)

청곡사 영산회 쾌불탱

주차장(후문)

산신당

 

2005년 관방문중 제사(11월19일 음10월18일)

  06:25 병준총무와 함께 승합차로 출발하여 동래에서 관방 문중인 병영님부부 판문님과 덕점 석동 태주님을 만나고 조금 늦게 출환님이 도착하여 06:35 출발했다. 제사는 11:00라고 하지만 apec 관계로 승합차의 운행을 07:00가 넘으면 2부제에 적용되어 부득하게 일찍 출발한 것이다. 06:30 남강휴게소에서 병영님이 국수를 사시는데 태주님과 덕점님은 식사를 했다고 하시었고 나는 어제의 산악회에서 마신 전주가 있었기에 돈을 보태어서라도 5000원인 곰탕을 먹고 싶었지만  혼자 표나게 할 수가 없었는데 국물맛은 시원했다.
07:00 남강을 출발하여 문산나들목을 나온 것이 08:10 이었고 공군교육사령부로 가는 길을 가다가 08:16 청국사로 가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금어못을 지나고 금산면 가방리의 모선제에 도착하니 사람은 없었고 방을 덮히기 위하여 군불이 지펴져 있었다.
주련과 제실의 사진을 찍고 실내에 부착된 현판들의 촬영을 하였는데 대명화의 현판의 유래를 물었더니 집안에서 대대로 길러오던 철쭉 비슷한 형태의 나무로 겹꽃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이곳에서 재배되지 않고 번식을 위하여 다른 곳에서 기르고 있다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채송화를 대명화라고 적혀있으니 설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제실은 마루 한칸에 방이 두칸이고 방앞의 좁은 복도가 마루까지 이어지는데 30여명이 참석하면 꽉 차 버릴 듯 하였으나 깨끗하게 손을 보았으며 대문은 태풍의 피해로 인하여 헐고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청국사를 다녀 오기로 했는데 지난 6월 남문산악회의 산행지였기에 낯은 익었으나 참석한 사람이 없었으나 병영님의 국민학교때의 단골 소풍지라고 하셨다
09:50  청국사를 관광하고 돌아오니 일가분 몇분이 오셨기에 인사를 나누었는데 2005년 4월23일 경남일보에 실린 방주 문국현님의 기사를 보여주셨다.
참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앉을 곳이 없어 석동님과 함께 차안에서 쉬는데 일가간의 의견이 달라 목소리가 높아 지기도 하더니 절을 한다고 하여 갔더니 강신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신위를 모시지 않아 어느분의 제사인지 알기 어려웠는데 제수는 밥 대신에 떡을 산같이 세곳에 쌓아 놓았다 초헌후에 독축에서는 종가 외에는 방손이라고 읽는 것이 특이한데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바로 나왔고 아헌과 종헌은 즉석에서 지정하였으며 헌관이 정장을 하지 않았다는 꾸지람과 이에 반발이 있었고 제사중임에도 잡담도 하고 할말은 제사중에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병수님이 제물을 준비하여 윗대부터 차례로 3번의 제사를 모셨고 참석자는 50명이 넘었다. 중식을 하면서 술도 한잔 들었는데 내년에는 제복을 구입한다고 하니 복장문제는 없을 것 같다.

마을 위에 끝집인 생가를 고쳐 제실로 사용하는 곳에서 두차례의 제사를 모셨는데 위패를 프라스틱판에 새겨 둔 것이 특이했고 참제자는 30여명이었는데 제사의 분위기는 역시 자유분망했다.

마지막 제사는 10여분 산길을 올라 묘소를 가는데 시멘트 포장이된 도로였고 길옆에 홍살문이 누워있다
홍살문을 옮겨 세우기 위해 기초를 해둔 곳 뒤에는  남편의 상을 치르고 자결한 재령이씨의 순절비가 있었고 묘소는 6기를 합분으로 모셨는데 묘가 크서 카메라에 한번에 잡기가 곤란했으며 주변에는 쇄석을 깔았다. 비석이 없는 앞줄의 3기는 농학박사 문병원(병원)님의 가묘라고 했다
초헌은 병원님의 작은 아드님이 하시고 축은 한글로 읽었는데 우리 홈페이지에서 축문을 보고 하였다고 했다.
희주님의 댁으로 내려와 술잔을 나누면서 대담을 하면서 관방문중에서 박사는 8명이 나왔다고 하니 대단한데도 사법시험합격자가 나오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관방의 일가들은 회의를 하러 가셨는데 우리는 남은 일가들과 문중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관방부락은 진주에 편입되고 다리와 도로가 정비되어 30분 거리여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아 땅은 30만원 이하는 없으며 일가중에는 진주에서 출퇴근 하면서 파프리카 농장을 한다는데 씨앗을 외국에서 구입하여 이곳에는 기온이 맞지 않아 묘목제배를 위탁하여 재배하는데 주로 백화점에 납품한다고 한다
관방집의 회의 내용은 임원선출과 사업으로는 지붕고치기, 담장보수 대명화재생 대암리 무인석 망부석 입석건과 문중활성화였고 회의를 마치고 대암리의 진주입향조 할 선조님의 묘소를 참배하였는데 마을의 뒷편에 자리하였고 "성균진사 성광 남평문공지묘"란 비석과 "진사남평문공지묘"의 옛 비석도 있었다
병수님과 헤어져 의령에서 준비해준 술과 안주로 술을 한잔 나누었고 거마비로 10,000원씩을 주시니 봉심도 하지 못했는데 미안하기만 하였다. 도로가 다소 막혀 부산에 도착하니 20:00였다.


경남일보 2005년 4월23일 16면
방주 문국현

1866년 김해부사로 내려와 있던 성재 허전은 남명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덕천서원을 방문하고 진주에 들러 한 제자의 집을 방문했다. 성재 선생의 당시 영남학맥을 주도해 나가던 대학자였다. 진주에 들러 한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 집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성재가 진주를 방문했을 때 찾은 곳이 현재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방주(芳洲) 문국현(文國鉉)의 집이었다.
방주는 남명 선생의 제자 옥동 문익성의 후손으로 1838년 고성 무이산 아래서 출생한 선비로 당시는 진주에 살고 있었다.
성재가 방주의 집을 방문한 것은 방주가 남명 연원가 선비로 남명의 학문을 잘 계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명화(大明花)’라는 귀한 꽃을 가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명화는 명나라에서 전래한 꽃으로 공의 선조 급제공(及第公) 두징(斗徵)이 외가인 유판서 댁에서 구하여 집안에 심었다고 한다. 방주는 조상들이 소중하게 가꾸어 온 대명화를 보면서 선비의 굳은 절개를 기르고자 했다.
성재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 집안의 대명화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였다. 방주는 “저 단상에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라고 하니 선생이 친히 지팡이를 집고 다가가 꽃가지를 쓰다듬어면서 칭탄하며 말하기를 “본래 명나라의 아름다운 꽃이 전래하여 그대 집안에 있구나. 마땅히 이 꽃을 잘 수호하여 무지한 초동들로 하여금 베어 버리지 말게 하라”고 했다.
방주의 집을 찾은 성재 선생은 “공부는 지극히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달하기 어렵다면 예전에 어찌 한유 유종원의 문장과 정자 주자의 학문이 있었겠는가. 단지 이것은 정성일 뿐이다. 정성이란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일컫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학문태도를 가르쳐 주면서 훗날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방주는 27세 때 성재 선생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로부터 옛 선인들의 학문에 더욱 힘을 쏟았으며, 그 학문은 집안에서 효제(孝悌)로부터 남을 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수신과 근행을 근본으로 삼았다.
40세때 부친상을 당하자 평소 배워온 것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생전의 봉양과 조금도 다름없이 정성으로 받들어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당시 사학(邪學)이 날로 창궐하는 것을 보고 집안의 자녀와 조카들을 불러놓고 “나는 우리 유학 이외에 다시 무슨 도리가 있는 지 알지 못한다. 만약 지금과 같은 광란을 평정할 역량이 없다면 자기 몸을 지키고 그 집안을 보전해야 할 것”이라고 훈계했다. 남명연원가 후손으로서 조상들이 계승해온 우리 전통을 끝까지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방주는 남명 선생의 제자 옥동 문익성의 후예로 가문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옥동의 아들 광성공(醒狂公) 할은 임란때 창의하여 진중에서 별세하였고, 그의 손자 재자(在玆)는 병자호란때 창의하여 선전관으로 부름을 받았다. 조모 재령이씨는 26세에 남편상을 당하자 장례를 정성껏 치르고 뒤따라 자결을 해 열녀로서 칭송이 자자했다. 1904년 부인 강씨 상을 당하자, 근처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정진할 서재인 제광정(霽光亭) 을 지어 성현들의 서책을 탐독하면서 많은 학자들과 교유를 가졌다.
방주가 남긴 문집에 당시 벗들과 교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칠곡 선비 사미헌 장복추, 산청 선비 단계 김인섭, 고령선비 만구 이종기, 함안 선비 만성 박치복, 거창선비 교우 윤주하, 합천선비 후산 허유, 산청 선비 면우 곽종석 등 당시 영남 지역의 퇴계학맥을 주도하던 대학자들과 교유를 하면서 학문에 정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방주는 1910년 병석에 눕게 된다.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나이 8순에 가깝다. 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약물을 번거럽게 올리지 말라”고 하면서 이듬해 1911년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방주가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이 상여줄을 잡고 곡을 하면서“우리 고을의 참다운 선비가 죽었으니 이제 후생들은 누구를 따르겠느냐”고 하면서 애석한 마음을 드러냈다.
면우의 수제자 회봉 하겸진은 방주를 일러“금세의 유학자들이 옛 성현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두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짓는데 범람하고 날렵한 자는 화려하나 알맹이가 없으며 경서를 익히는데에 지루하고 번잡한 자는 허황하여 진면목이 없다. 이 두가지 잘못은 비록 다른 것 같지만 그 심성의 근본에 해가 됨은 동일하다.”며“공은 이 두 가지가 없었으니 무릇 그 언행과 사업은 한결같이 정성에서 나와 구차한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은거하여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풍범과 명망 또한 크게 떨치지는 못했지만 그 심중에 은은히 품고 있는 광채는 참으로 가릴 수 없었다. 대개 경향의 인사중에 성재에게 고족이라는 이가 많았으나 그 가르침의 요점 체득하여 일생 동안 수용한 이로는 공과 같은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아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나는 공에게서 보겠다.”라고 하면서 학덕을 칭송했다.
방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00년이 다돼 방주는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후손들이 문집을 번역하고 묘역을 단장해 길이 정신과 학문이 이어지길 바랐다.
손자인 전 진주산업대 교수 문병원씨(73·진주시 봉곡동 14-2)는 “40여년간 대학에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또 장학사업도 했지만 정작 우리 조상에 대한 선양사업은 미진한 감이 없지 않았다.”며 “방주공께서 성재선생의 문인으로 일생동안 선생의 학문 요결을 따랐으며,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선조의 업적과 남긴 교훈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 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다”며 후손들이 방주공의 유업을 잘 계승해 나갈 것임을 다짐했다.


서룡재

위치

경남 합천군 이사례

배향선조

판도판서공파 이사례문중 선조

향사일

음력 10월9일            

서룡재에 제사를 위해 참석한 일가님들

분정기

축문

진설

초헌례

독축문

축관

독축시의 제사 참석자

태주 집사      병준집사

병준집사  병주집사

제사 진행

주변 관광지(황강을 내려보는 누각)

한벽루 입구

한벽루 요사체

정자

비석

벽한정

기문

 

2005년 서룡재

 

고현재에서 오트바이를 타고 안내해주는 일가의 뒤를 따라 13:06 손목2구 마을의 서룡제에 도착하니

가정집같은 형태인데 옆에있는 가정집은 고사채로 짐작되는데 건물은 칠이 깨끗하게 되어있었으나 주변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어 황량하기 까지 하다.

마을을 돌아보니 용연서원이라고 돌에 새긴 벽한루가 인근에 있었는데 박연(朴연)선생을 모신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었고 황강이 아래에 펼쳐있고 뒤는 송림이 좋았다.
마침 문화재 관리상태를 점검오신 분을 만나 설명을 들었는데 원래는 황강쪽으로 세웠으나 수해가 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관리인도 구하기 어렵고 건물도 기울고 있어 수리가 시급하다고 한다.

합천에서 풍광이 좋은 정자들은 1.호연정(상주주씨) 주세봉, 2.이암(쌍책면) 관수사, 3. 연호사 함백루(합천읍)라고 설명해 주셨다.

헌관과 집사 분정과 진설등으로 제사가 늦어져 14:30에 종주님 초헌 아헌:병영 종헌:찬도 집례:기주 축:복주 진설:상석 집례:병준,태주,병주였고   정성을 다하여 경건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모셨다.

15:00에 마당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제실 수리비가 1000여만원이었고 제수준비는 덕점님이 30만원으로 준비하셨다고 하는데 참석자 40여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으니 저렴하게 준비되었다는 생각이었고,잔액은 논의 세를 받았을 때 190만원이라고 하였는데 제실의 샤시비용은 200만원이라고 하니 술한잔 먹기도 미안스럽지만 샤시는 설치해야 목조건물의 보존에 도움이 될 것같다. 아직 조경에는 손이 미치지 못하여 경내가 황무지여서 조경이 시급해 보이지만 예산이 없으니 식목은 일가들이 10만원씩을 기증하여 기념식수를 하는 방향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6:00 합천고려병원에 칠준님과 정근님이 문상할 일이 있어 20여분을 쉬었고 오면서 잠시 돌아서 용암서원(남명조식 배향)의 공사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입구에는 뇌용정이라 되어있었다.

진영으로 오기전의 휴게실에서 재묵님 부담으로 맥주한잔하였고 부산에 도착하여 19:14 용표님댁을 방문하여 문병하였는데 17명이 함께 가는 일은 모양새가 아닌데 생각외로 정정하시어 좋았으며 종사에 관한 간단한 보고를 하고 나왔다.
동래에서 헤어지고 차량반납과 석식을 하려고 남원식당에 갔으나 음식재료가 없어 큰손추어탕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대는 아헌관을 하신 상근부회장께서 부담했다. 

연강재(練江齋)

위치

 경남 하동군

배향선조

 18세 문後(號 연강재)

향사일

 4월 20일

연강재는 호가 연강재이신 문후공을 모신곳입니다.
1602년 건립하였고 1993년 5월2일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강변에 건립되어 경치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연강재 입구

안내문

신실 입구

신실

현판

   

부착물

 

 

현판

신실의 신위를 모신 함

입구의 비석

2007년 7월 부산 장년회원 방문

희구님의 제실 설명

관리사로 가는 문

직하재(稷下齋)

위치

경남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배향선조

 

향사일

 

하동 북천면 직전리는 의안공의 후손으로 연강재파에 속하는 문중의 집성촌입니다

마을입구의 문익점선조님 유허비

영모재와 직하재의 현판

   

2007년도 장년회원 방문

   

일가님들과 상견례

현판  

성금록

 

 

종가댁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