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부산지역

부산지역 재실

연결표 (재실명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향사일

동성재

기산재

초읍

중산재

금성재

운송재

덕문재

충렬사

부산지역 동래종중 성안문중 초읍문중 북면문중 금사문중 거벌문중 김해문중 부산시

명칭

배향선조

소재지

동성재

동래입향조 諱 평

부산시 금정구 님산동

성안재

문중선조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초읍재

초읍파조

부산시 진구 초읍동

북면재

파조와 선대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금사재

파조외 98위

부산시 금정구 금사동

상의사

세휘 덕겸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

충렬사

문도명 문덕겸 문세휘 문택용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덕문재

繼祖이하 후손 부산시 강서구 덕도부락

부산지역 향사일

명칭

소 재 지

날자

2019년

봉 사 선 조

충렬사

동래구 안락동 938

2월중정
8월中丁

20세 諱 澤龍(택용)
20세 諱 世輝(세휘)
21세 諱 德謙(덕겸)  
21세 諱 道明(도명)

동성재

금정구 남산동 980-13(남산고교 후문옆)

10/3(음)

14세 諱 평외 21위

사상묘제   (음)10월첫일요일   사상집 소문중
초읍제실옆 묘소 (음)10월둘째일요일   파조(어모장군) 묘제
초읍집 초읍제실 (음)10월첫일요일 초읍파조
금성동 제실 (음)10월둘째일요일 초읍소문중 제사

북면집

철마면 웅천리
중산제실

11월 첫일요일

18세諱응기(북면파조)외

11월둘째 일요일

21세諱상규조 선조

11월셋째 일요일

21세諱상익조 선조

금사집

금사동 금사제실

(음)10월첫일요일

파조 및 98위

(음)10월2~4일요일

소문중 제사

거벌집

반송동 상의사

(음)4월14일

20세 諱 世輝(세휘)  
21세 諱 德謙(덕겸)

달북 묘소

(음)10월1일

21세 諱 德謙(덕겸)

도화밭 묘소 (음)10월8일

19세諱응린(거벌파조)양위

반송묘소 (음)10월10일

20세 諱世輝(세휘)

정관 용수동 (음)10월14일 21세 성질공 후손

반여집

해운대구 반여동삼어

10/5(음)

20세諱기종(반여파조)


* moon51.com 폐쇄로 일부 사진 볼 수 없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동성재(東成齋)

재실 건립 개요

2008년 남산동의 토지를 구입해 아키펌에 설계를 의뢰하였고
2009년 3월 기공식을 하였고 재실36평 관리사18평 주차장2면을 완공하여 10월23일 준공식을 하였습니다

토지구입은 경동님이 주도하고, 차갑님이 공사를 맡았으며, 수철님이 자체감리를 하여 공사비는 4억원 정도입니다
회장 성득님은 공사기간중 현장에 출근하다시피 하시고 총무 병달은  업무 지원과 조경 및 비품 구입을 하여 건립후 첫 제사를 모시고 임기를 종료하였습니다

위치

금정구 남산동 980-13(남산고교 후문에서 50m정도임)

배향선조

동래입향조 14세 평외 10분의 선조님들과  배위 11분모심(총 22위)

>향사일

음력 10월 3일

東成齋 記文

우리 南平文氏는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다. 신라 자비왕때의 武成公 휘 多省 할아버지가 시조로서 그 뒤 고려 공민왕때의 忠宣公 호 三憂堂 휘 益漸 할아버지에 이르는 近九百년동안 문무 두 방면에 걸쳐 나라에 공이 많으신 분이 끊이지 않으셨다.

忠宣公의 三男 휘 中實이신 성균관 진사 휘 苹께서 처음 동래에 자리 잡으셨으니 동래에서는 입향시조가 되신다. 이후 대를 이어 많은 자손들이 모두 선조의 뜻을 받들고 그 은혜를 잊지 않았으되 유구한 세월을 겪는 동안에는 가문의 성쇠와 세정의 격변이 없지 않은지라 때로는 불의의 이산으로 묘소조차 분명치 못한 바 있게 되었음은 후손으로서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를 송구스럽게 여기오던 우리 동래파 일족은 단과 재실을 마련하여 입향선조의 제향을 올리며 추모의 정성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문중의 재정 사정으로 지연되어 오던차 다행히 후손중의 특지자와 문중의 성금으로 선대를 위한 永慕壇과 재실 東成齋를 동시에 준공함으로서 오랫동안 다하지 못한 후손의 도리를 겨우 이루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가문의 윤리를 세움이요, 한편 이어올 후손들에 대한 교훈도 되는 것이다. 우리 오늘 있음이 오로지 조선의 은덕일진되, 이일에 뜻을 같이한 일가들은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며 금후의 후손된자 역시 이 뜻을 명념하여 가문의 영원한 번영을 기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1955년   월  일       동성재관리위원회 백



기산재(基山齊) -성안문중재실

위치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배향선조 성안파조외 문중선조
향사일 추석, 설
현판

기산제

요사체

기산제서

성금록

                               훈장증
                                             제3146호

고   문시환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있으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85년 8월 18일

대통령 김영삼


초읍재(草邑齋)

위치

부산시 진구 초읍동
배향선조 초읍파조
향사일 (음)10월 첫일요일

초읍제 기문

草邑齋 記

秀麗한 金井山의 한줄기가 南으로 달려 草邑平野에 다다라 봉긋한 봉우리를 이룬 곳이 頭留언덕인데 和池山이 左右로 감사 아늑하기 그지 없구나. 예부터 이곳을 지난사람은 無數이 많았건만 하늘과 땅이 아끼고 감추어 南平文門에 傳하였더라. 여기 모신 累代先塋을 정성껏 守護한지 三百余 星霜 뜻은 이어도 이루지 못했던 齋舍를 이제야 建立하여 齋宿과 治具道場으로 삼으니 物各有主은 有志必成 아닐런가.

南平文氏는 新羅朝 三韓壁上功臣南平伯多省이 始祖로서 高麗明宗때 中書侍郞門下平章 諱 克謙 恭愍王때 木棉을 傳播한 三憂堂 諱 益漸 등 名儒賢士가 代代로 輩出한 華閥임은 世上이 周知하는 바로다. 麗末의 進士 諱 苹이 新興朝鮮朝에 岡僕自靖하여 이곳 東萊로 隱身하니 後孫들의 世居地가 되있더라. 累傳하여 明宗때 諱 自周는 牧使로서 官職을 그만둔 後 老年에 이 草邑에 卜地 移居하였고 아드님 赫龍은 釜山僉使로서 나라의 關門을 지켰으며 孫 諱 道明은 壬辰倭亂때 東來城 域은 昌寧火旺山에서 暴虐한 倭賊과 血戰을 벌여 많은 賊을 차斬護한 功으로 宣武原從功臣 二等에 錄勳되 있고 孫男 理明은 生員이요, 曾孫奉日은 訓練院奉事인데 이 四代 祖들의 墓所아래에 우람한 齋閣을 세웠으니 二年에 걸친 役事에 一億六千余萬원의 巨財가 들었다. 무릇 先代의 빛나는 傳統을 이어 家門의 榮譽를 높임은 後代의 자랑이요, 祖의 墓所가까이 齋舍를 지어 致齋의 淨所로 삼음은 後孫의 道理가 아니겠는가. 地名을 따라 草邑齋라 하니 家門의 傳統과 더불어 千秋에 길이 이어지리라. 내 일찍 壬亂 東萊戰史를 賢中南平文門에 四義士 계심을 알고 欽慕의 情을 禁치 못하던차 이 齋閣 完工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大廳에 오르니 맑은 바람이 불어와 한 여름인데도 더위를 잊을레라 새가 날개를 펴듯 半空에 솟은 추녀는 造型美의 極致를 이루었고 靑龍白虎 날고 뛰듯 左右의 丘陵은 明堂護衛의 氣象도 壯하여라.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서늘하니 齋宿의 場만이 아니라 후손들의 修學積德과 敦宗睦族의 適所가 되겠도다.

뿌리가 길어야 가지가 번성함은 自然의 理法인데 草邑文門의 뿌리는 이미 깊게 뻗었으니 그 後孫들 거센 世波에도 길이길이 繁榮하리라.   檀紀 四千三百十九年 光復節

제실조감도

초읍제실

초읍제실 대문안의 조경

 벽의 부착물

충렬사에 모신 12공신도

중산재- 북면문중 재실

위치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배향선조 18세 응기  19세윤장 20세 택용 21세여욱 22세상규 22세 상익 22세상벽외 배위
향사일 11월 첫 일요일

금성재-금사문중 재실

위치

부산시 금정구 금사동
배향선조 금사파조외 97위
향사일 음력10월 첫 일요일

2006년 금사집 파조 이하 98위 제사

축문
위패

윗대 위패

진설

운송재(雲松齋) -거벌문중제실-
운송제는 거벌문중 상의사의 제실입니다

위치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 370-22번지  

배향선조

20세 諱 世輝(세휘)  21세 諱 德謙(덕겸)

향사일

음력4월14일 동래유림 주관

상의사(尙義祠)  운송재(雲松齋)연혁


상의사는 남평문씨 동래파종중의 임진왜란에 순절한 공신 증 호조좌랑(戶曹左郞) 문덕겸(德謙)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의 병란중 시종 의병을 일으켜 분투하여 왜적을 토벌한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문세휘(世輝)의 충용을 본받고자 1960년 경자 4월14일 설단 봉안하여 매년 동래유림들이 향례를 봉행하던 곳을 장소가 협소하고 그 규모가 두분 충신을 봉안하는데 부족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의논하여 단을 훼철하고 사우로 신축하여 영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경내에는 상의사와 내삼문에 지경문 외삼문에 추원문이 있고 헌관집사가 행사를 준비하는 거소인 운송제가 있고 본손들이 회합하는 무사소인 백수당(百修堂)과 관리인 거소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부학의 유생인 문덕겸은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적이 동래성을 공격해 오자 가족들은 돌보지 않고 당시 남문밖에 있는 향교로 달려가 오성(다섯분의 성인)의 위판을 성내 청안루에 옮겨 모시고 항적하다가 부사 송상현과 성이 함락되자 함께 전사하시었다
전란후 공의 공적이 알려져 영조13년(1737) 증 호조좌랑의 상전을 받아 충렬사에 배향받았다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문세휘는 당시 교생으로서 임진,정유 양란간 7년간을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적이 있어 전란후 선무원종공신록권을 하사받고 토적(討賊)공신 24인중 2등으로 기록 되었으며 복호록(復戶錄)을 하사 받고 영조 13년(1737) 증직시 2등으로 증 통정대부 장악원(掌악院) 판결사를 제수받고 또 영조 42년(1766) 증 병조참의를 제수받았다.
위와같은 역사적 사실은 선무원종공신록 복호록 모충결의록 포충속후록에 기재되어 있다
증 호조좌랑 문덕겸은 동래남평문씨입향조이신 고려조 진사 문평의 후예이나 임진병화로 문적이 소실되여 상계가 미상이며 아들에 건중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여 후사가 없다.
건중의 딸로서 암굴에 숨었던 아이가 사노 검산에게 길러져 읍인 김천상에게 시집갔다.
천상은 자손이 자뭇 번성하여 문공을 제사하였으며 고을 선비 이동향의 글을 빌어 비를 세웠다
군자는 말하기를 덕겸은 선비로서 난을 당하여 고성의 위판을 이안하고 항적하다 죽었으니 선비가 마땅히 죽을 곳에 죽었으니 덕겸은 열사이다 하였다.
증 통정대부 문세휘는 충선공 문익점의 9세손이며 동래파 문씨 입향조 고려 진사 문평의 7세손이며,父는 처사 응린이며 자손에 10남2녀를 두었다. 공의 자는 세평이며 호는 백수제이다 공
의 충용을 기리기 위하여 1942년경 설립한 숭의계가 있었고 1960년경 문公덕겸과 문公세휘 兩公을 추모하고저 설립한 쌍충계가 상의단 건립의 기초이다 

2000년 새로 건립한 상의사의 추원문(4평)은 4,000만원 신실(14평)은 평당 6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문덕겸 전

문덕겸은 아버지의 이름이 經緯(경위)인데 선대는 본래 남평사람으로 동래에 옮겼다.
만력임진년에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먼저 부산을 함락학 다음으로 동래부성에 미쳤다.
당시는 황황하고 급하여 백성들이 모두 꿩과 토끼처름 피난 하였으나 덕겸은 집안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로 향교에 나아갔으나 교수 노개방이 마침 집에 돌아 갔음으로 향교안이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덕겸은 드디어 선성(공자)의 신주를 받들어 성내의 객관인 정원루에 옮겨 모셨는데 조금 지나서 교수가 또한 왔으므로 함께 모시고 서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성이 포위된지 하루만에 또 함락됨에 덕겸은 교수와함께 죽었다.
성이 이미 함락되자 적병이 모두 북으로 올라 갔는데 덕겸의 종 검산(儉山)이 있어 몰래 덕겸의 시체를 훔쳐서 부의 서쪽 여고리에 묻었으니 곧 덕겸의 사는 곳이었다.
덕겸에게는 아들 건중이 있어 먼저 죽자 아내 민씨가 건중의 아내 정씨와 아홉 살 난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함에 며느리와 함께 길옆에서 죽었다.
검산이 다니면서 여주인을 찾다가 성의 서문에서 마주치니 아홉 살난 계집애가 두시체 밑에서 거의 죽어가므로 검산은 계집얘를 금강곡의 암굴에 숨기고 두 시체를 지고가서 묻었는데 지금 덕겸의 묘는 실로 민씨로 더불어 같은 구덩이라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자 본부에서는 충렬사를 세우고 순절한 여러 신하들을 모셨는데 뒷사람들이 덕겸을 함께 재사하였으며 영조13년(1637)에는 감사의 말에 따라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덕겸은 후손이 없었으며 건중의 딸로서 암굴에 숨었던 아이가 검산에게 길러져서 후에 읍인 김천상에게 시집갔다. 청상은 후손이 자못 번성해서 서로 더불어 고을 선비 이동형이 글을 빌어 돌에 새겨서 무덤에 세웠다. 열 김씨들이 말하기를 검산은 주인집의 서적을 거두어 우물 가운데의 돌밑에 감추었다가 도둑이 물러가자 햇볕에 말렸는데 이로서 문씨의 전토와 가종이 김씨에게 돌아갔다고 하였다.
군자는 말하기를 덕겸은 열사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한번 죽음이 있지만 그 죽을 곳에 죽는 것은 어려운데 덕겸의 죽음은 그 죽을 곳에 죽은 것이다 덕겸은 하나의 벼슬이 없는 선비이니 반듯이 의리에 죽을 것은 없다. 그러나 이 때를 당해서 처자를 이끌고 산골짜기에 달아나서 군사의 칼날에 죽어서 남이 알지 못하는 자가 몇사람이겠는가 죽음은 한가지라도 공자의 사당에서 죽은 것은 선비의 영광이다. 그 죽음이 명백하니 내 마음이 평안한 바를 얻은 것이지마는 명사들이 후세에 가히 현명하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덕겸은 선비라서 마땅히 책을 읽은 힘이 있었지만 검산은 남의 종이 되었어도 충의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으니 시경에 백성의 뜻뜻한 도리는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한 것을 믿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덕겸에게 보고 느꼈다고 하였다. 그렇다 검산도 역시 아들은 없고 외손만 있었다.
살피건데 묘문에는 이르기를 성이 장차 함락됨에 위판을 땅에 묻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양조한에 모두 묻고 단지 고성(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만을 받으려 종향하였다고 일컬음은 억측에서 나온 것이고 또 사실이 마땅하지 못하여 윤의(倫疑)가 너무 지나친 까닭에 지금 기록하지 않는다

 신실

 외삼문

위패함

세휘공 위패

덕겸공 위패

관리사

덕문재(德文齋)
-
판서공파 세봉-진-여녕-찬-계조(13세)-

위치

부산시 강서구 덕두리

배향선조

13세 諱 繼祖이하 후손 174위 모심

향사일

 

관리사 측의 차량 출입문

덕문재 대문

성금비(전후와 측면)

휘 계조공 비석(뒷면은 담으로 인하여 촬영이 불가능함)

제실

관리사

  2009년 이임하는 치주 회장

2009년 신갑 신임회장

2009년 제사 준비

진설(밥은 없는 것이 특이함)

헌관6명 (74위 모신후 100위를 모심으로 초헌, 아헌, 종헌 각 2명)

부산종친회 운영위원님들의 참석

  신갑 집례
   
   
   
   

1단의 신주님들 제사를 모시고 2단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커틴을 올리고 내림

2차 제사 진설

축문첩

초헌례

독축

굻어앉은 참제자들

제사후 식사(식사후 회의가 있었고 회장선출함)

덕문재 주련(건물의 기둥에 적어서 붙인 글귀)

남에게

베푼

것은

생각

말고

받은

은혜는

잊지

말라

겨울을

지나보아야

솔과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나의

삶은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없다

재물이

넉넉하면

남에게

베풀어야

몸과 마음이

편하다

강서구 덕두 덕문재 제사 참석(2009년 11월22일)

순평집에서 강서의 덕문재 제사에 참석한다하여 좌석이 있냐고 했더니 만든다고 하여 09:15 동래에 가서 병영 재룡 태주 병준님들을 만났다 잠시후 한주님이 차를 갖여 왔지만 좌석이 모자라서 3인석에 4인이 앉아야 했다
 2005년 덕문제를 방문했을 때는 제사를 모신 후이었고 3년간 문중선조 묘소의 벌초를 장년회에 하였으나 올해는 인원관계로 금년에는 하지 못한데에 대함 미안함도 있어 꼭 가고 싶어 억지로 참석한 것이다
10:20 제실에는 10여분이 진설을 준비하고 있었고 치주회장님과 신갑총무님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10:55 헌관은 6명이 도포를 입고 집사는 양복차림으로 도열하였기에 촬영할 장소를 잡고 살펴보니 신위는 3단으로 각각 커틴을 쳐 두었고 제상은 높이가 60cm이고 폭이 30cm 길이는 4m 정도로 짐작되는데 먼저 74위를 모신다는데 밥과 국은 없었고 술잔은 제상의 끝까지 놓여 100잔은 넘을 듯 했다.제사전 맨 윗단의 커틴을 열었는데 위패의 아래에는 신위가 아닌 신주라고 적었다.

관세는 초헌부터 집사까지 하여 시간을 줄였고 10:57 삼상향은 향 3개를 각각 피워 올리는 것이 신선했다
11:01 관우모상 후에 헌관잔을 세잔한 다음 모든 잔을 집사들이 세잔을 하였으며 육적을 올렸다.
11:03 초헌이 양위분의 잔을 올리고 다은 잔들은 반잔 정도를 집사들이 따루었다
11:09 정저때 젓가락은 70 여벌중에 10 여벌만 상에 올렸는데 손잡이를 동쪽을 향하게 놓는 것이 특이했다
11:14 독축은 윗대와 큰집을 모시는데 축관이신 신갑님이 책자처럼 적은 축문을 5분에 걸쳐 읽었다.
11:20 아헌이 술을 올리면서 삼제 소경우지를 하였고 집사들이 첨작을 하였고 계적을 올렸다.
11:24 종헌도 아헌처럼 하였고 어적을 올렸는데 참석자는 모두 54명이었다.
11:29 사신례에 이어 분축하고 홀기에는 음복이 없었으나 음복을 하였고 철상을 하였다
회장께 질문하니 김해,합천,산청집안의 6대조까지를 모셨으며 다음에는 5대이하를 모시는데 2단에 모신 100위를 모시며 마지막단은 예비로 마련하여 비워 두었다고 한다

11:36 집례, 찬장의 재배로 시작하여 집사는 같았고 헌관은 바뀌었다.
11:42 초헌례에 이어 11:56 독축에는 ○○敢考라는 읽는 것이 무척 좋았다
12:05 종료하였다

비문에 적힌 내용등을 신갑님께 질문하니 황고(皇考) 왕고(王考)를 질문하니  부친과 조부라고 했다. 뒤에 찾아보니 증왕고(증조) 고왕고(고조)라고 한다고 나와있었다

주련의 뜻을 물었더니 사람에게 베푼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받은 것은 잊지말라
겨울을 지나야 송백의 푸르름을 알게된다
재물이 넉넉하면 남에게 베풀어야 몸과 마음이 편하다
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전화를 주신 내용이 나의 삶은 끝이 있으나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끝이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말 알아애 할 것은 끝이 없음을 공감하였다.

충렬사(忠烈祠)

위치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

문화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지정년월일 : 1972년 6월 26일)

배향선조

21세 문덕겸, 20세 문택용, 20세문세휘, 21세문도명

향사일

2월중정일   8월중정일

충렬사는 1592년 임진왜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 부산지방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모든 선열의 위패를 직책또는 증직의 순서에 따라 93위의 신위를 모신곳이다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산 교육장이자 호국충절정신의 요람지이다.
1605년(선조38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宋象賢)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 남문안에 송공사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온 것이 시작으로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거의 건의로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鄭撥)을 동시에 배향하였다.

1652년(효종3년) 동래부사 윤문거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 사당을 창건하고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서원의 규모로 확장하였으며 유생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안락서원이라 칭하였다.

1709년(숙종 35년)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이 읍성 남문안의 옛 송공사 자리에 별사를 건립,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등 동래9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735년(영조 11년) 동래부사 최명상과 경상감사 민응수가 두 개의 사당이 나뉘어 있으니 별사를 폐함
1736년 별사에 모신분을 충렬사에 합사함
1772년(영조 48년) 다대첨사 윤흥신공을 추배하고
         송상현공과 정발공을 따라 순절한 금섬과 애향도 충렬사 동문밖에 별도로 사당을 지어 모셨다.

1864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순절한 선열을 봉안한 사액서원이라 폐하지 않았으나
일제 36년간은  서원에서의 교육과 동래의 유림이 매년 2월과 8월에 봉행하는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여러 형태의 방해로  서원과 사우(祠宇 )는 보수를 하지 못하고 낡아 허물어져 갔다.

1976년~1978년 정화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규모로 정화한 후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모든 선열의 위패 93를 모셨다.

매년 5월 25일에는 부산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춘추(3월중중일, 8월중정일)로 동래유림의 주관으로 향사를 모시고 있다.

 

문덕겸
(德謙)
21세

거벌문중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임진왜란때 왜군이 부산진 함락후 동래성을 향하자 오성(공자, 안자, 증자, 노사자 맹자)의  位板(위판)을 동래성의 청원루에 옮겨 모시고 송상현부사와 함께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임진년 4월에 순절(殉節)하였다.      호조좌랑을 증직  안락서원(安樂書院). 향교  벼슬 : 교관 유생(儒生)으로써 문묘를 지켰다. ≪신증문헌비고 輿地考 사원 東萊縣≫

문세휘
(世輝)
20세

거벌문중  자: 世平(세평) 호: 百修(백수)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  의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올림  특수훈련원 정차위 당예원판결사 통정대부병조참판의 증직과 宣武原從功臣錄(선무원종 공신록) 券 三等條및
寡忠結義錄(모충결의록)에 오름

문택용
(澤龍)
 20세

북면문중 자:  雲甫(운보)      동래구 사직동 달북에 묘소와 제실있슴
유학과 말타기, 활쏘기를 잘하고 임진왜란때 8촌형  세휘, 7촌조카 도명과 함께 동래성에서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도명과 의병을 일으켜 동래와 양산등에서  유격전술로 많은 공을 세우고 전란후 독서와 후진을 양성함
종2품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 증직과 宣武原從功臣錄券 三等條에 오름

문도명
(道明)
21세

초읍(草邑)문중    진구 초읍동에 묘소와 제실
정한강(鄭寒崗)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때 세휘, 택용과 함께 동래성에서 혈전을 벌렸으나 성이 함락되자 택용과 의병을 일으켜 동래 양산등에서 적의 수송로  습격등으로 활약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유격전으 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전쟁후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씀  宣武原從功臣錄券 二等 條에 主簿 로 오름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38번지로 동래지하철역에서 약 2km정도

충렬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을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10만 대군을 맞아  무기와 인원의 열세를 의연한 기개로 싸우시다 장렬히 순절한 부산지방의 호국선열의 영령 88위를 모신곳이며 5월25일은 시민들이 정성으로 제향을 올리고
2월과 8월중정일에 부산시에서 주관하고 동래유림이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우리의 선조 4분이 모셔져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1605년(선조38년) 동래읍성 남문안에 충렬공 송상을을 모신 송공사가 세워졌고 1624(인조 2년)에는 충렬사는 사액(賜額)이 내려짐과 함깨 충정공 정발을 모셨다

그후 1709(숙중35년)에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때 함께 전사한 남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문덕겸과 양조한, 비장송봉수외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사 송백,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터에 건립하였다

1736(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합향하고 1772년(영조48년) 다대진첨사 윤흥신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 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김섬과 애향을 위해 충렬사 동문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가 있었으며 현재는 28,400평의 경역에 본전 외 10채의 건물이 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1605년(선조 38) 공신도감자로 발간한 활자본으로 규격 35.5 cm X 22.5cm.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 공신에 기록된 사람들에게 내린 녹권(錄券:책)으로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중에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주청(兵糧奏請)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관원등에게 내린 공신號로써 1604년에 扈聖功臣 淸難功臣 등과 함께 결정했다
1등은 효충장의의협력(孝忠杖義毅協力)선무공신 으로 이순신, 권률 원균이며 
2등은 효충장의협력(孝忠杖義協) 선무공신으로 申點 등 5인이며,
3등은 효충장의(孝忠杖義)선무공신으로 정기원 등 10인을 임명하였다.
공을 세우고 선무공신 들지 못한 사람들을 이듬해에 선무원종(原從)공신에 녹훈하고 扈聖原從功臣 淸難原從功臣도 함께 책록하였는데, 원종공신은 왕족~노비까지로 , 직역(職役)을 면천(免賤) 면역(免役) 면향(免鄕)이란 내용도 있다

제6 공화국의 새 행정체재 확립과 400만 부산시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晝宵로 노심초사하시는 안시장님의 노고에 대해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저희 진정인들은 동래 유림의 유지및 宣武原從功臣의 後裔들로서 임란공신 11위의 위패를 忠烈嗣에 合祀해야 마땅하다고 관계 문헌을 첨부하여 이에 진정하는 바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부산시 안락동 소재 현 忠烈嗣에는 殉節하신 송상현부사를 위시하여 임란때 殉節하셨거나 전공을 세우신 71位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1978년 현재의 忠烈嗣를 준공했을 때 모든 임란공신을 다 合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몰랐던 공신들의 별첨 宣武原從功臣 錄券에 등재되어 있음이 그 후에 밝혀졌습니다

1983년 12월 30일자로 발간된 별첨 대연논문집 창간호에 이태길씨는 忠烈嗣 합사에 관한 고찰 이란 논문을 통해 이에 대한 사실을 소상히 논증하고 있고 1984년 3월 4일자 부산일보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기 문헌 및 동래부지, 동래군지, 忠烈嗣志, 등을 고찰해 본다면 文澤龍, 朴天樞, 宋龍景, 文道明, 金士立, 朴拏立 鄭彦龍 鄭好仁 李春祥 李成春 金好義 등 11人은 임란당시 동래출신으로서 동래 지방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분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다만 현 忠烈嗣 준공시에는 문헌의 未發掘로 漏落되었을 뿐입니다

동래출신으로서 동래 지방에서 참전한 모든 임란공신을 忠烈嗣에 합사한다는 것은 기존방침일 뿐만 아니라 당연한 도리이니 비록 당시에 문헌의 미비로 누락되었다. 하더라도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다면 지체없이 합사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은 지하에 계신 선열들의 英靈에 대한 보답이요 그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 주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후대 국민들의 마땅한 도리임은 贊言을 要치 않는 문제입니다.

원컨대 기계 학자들과 협의하시어 하루 속히 상기 11공신의 신패를 忠烈嗣에 합사해 주실 것을 거듭 간청하면서 이 진정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첨부
1. 宣武原從功臣 록권(선조 33년)
2. 대연논문집(1983년 12월30일 간행, 대연여자 상업고등학교)
3. 충렬사 정화지(1980년 12월13일 간행, 부산직할시)
4. 忠烈嗣지(忠烈嗣, 安樂書院 편)
5. 동래부지(영조16년 동래부사 朴師昌 편)
6. 동래군지(1937년 9월 18일 文錡周 편)
7. 부산일보(1983년 3월4일)
8. 文澤龍제실 기문
9. 文澤龍묘비문사진
10. 주산제기문(朴天樞 단소옆 제실 이일해 찬)
11. 朴天樞 묘비사진
12. 초읍제기문(文道明묘하제실 이태길 찬)
13. 文道明 묘비사진
                                                                                                         1988년 8월 진정인

충렬사 안내판

충렬사 안내도

본전 안내판

본전(순절 선열 남자 88위 모심

송상현공 명언비(戰死而假道難)

소줄당(강당)

의열각(왜적과 싸운 2의녀와 금섬,애향모심)

동래읍성지

정화 기념비

군관청(군관의 집무실을 복원한 것)

기념관(아래의 전시물 등을  전시함)

동래부 순절도

부산진 순절도

전환기록도 6폭의전투를 그림

임란동래 24공신 공적비

2002년 추계대제 행사를 위한 입장

집례자

진설

장준부산종친회운영위원

수길부산종친회 운영위원

유도회 기념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