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부산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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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 동래종중 | 성안문중 | 초읍문중 | 북면문중 | 금사문중 | 거벌문중 | 김해문중 | 부산시 |
명칭 |
배향선조 |
소재지 |
동성재 |
동래입향조 諱 평 |
부산시 금정구 님산동 |
성안재 |
문중선조 |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
초읍재 |
초읍파조 |
부산시 진구 초읍동 |
북면재 |
파조와 선대 |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
금사재 |
파조외 98위 |
부산시 금정구 금사동 |
상의사 |
세휘 덕겸 |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 |
충렬사 |
문도명 문덕겸 문세휘 문택용 |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
덕문재 |
繼祖이하 후손 | 부산시 강서구 덕도부락 |
명칭 |
소 재 지 |
날자 |
2019년 |
봉 사 선 조 |
충렬사 |
동래구 안락동 938 |
2월중정 |
20세 諱
澤龍(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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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재 |
금정구 남산동 980-13(남산고교 후문옆) |
10/3(음) |
14세 諱 평외 2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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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묘제 | (음)10월첫일요일 | 사상집 소문중 | ||
초읍제실옆 묘소 | (음)10월둘째일요일 | 파조(어모장군) 묘제 | ||
초읍집 | 초읍제실 | (음)10월첫일요일 | 초읍파조 | |
금성동 제실 | (음)10월둘째일요일 | 초읍소문중 제사 | ||
북면집 |
철마면 웅천리 |
11월 첫일요일 |
18세諱응기(북면파조)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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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둘째 일요일 |
21세諱상규조 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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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셋째 일요일 |
21세諱상익조 선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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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집 |
금사동 금사제실 |
(음)10월첫일요일 |
파조 및 98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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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10월2~4일요일 |
소문중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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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벌집 |
반송동 상의사 |
(음)4월14일 |
20세 諱 世輝(세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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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북 묘소 |
(음)10월1일 |
21세 諱 德謙(덕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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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밭 묘소 | (음)10월8일 |
19세諱응린(거벌파조)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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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묘소 | (음)10월10일 |
20세 諱世輝(세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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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용수동 | (음)10월14일 | 21세 성질공 후손 | ||
반여집 |
해운대구 반여동삼어 |
10/5(음) |
20세諱기종(반여파조) |
동성재(東成齋) |
재실 건립 개요 2008년 남산동의 토지를 구입해 아키펌에 설계를 의뢰하였고 토지구입은 경동님이 주도하고, 차갑님이 공사를 맡았으며, 수철님이 자체감리를 하여 공사비는 4억원
정도입니다 |
위치 | 금정구 남산동 980-13(남산고교 후문에서 50m정도임)
| 배향선조 동래입향조 14세 평외 10분의 선조님들과 배위 11분모심(총 2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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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사일 음력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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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成齋 記文 우리 南平文氏는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다. 신라 자비왕때의 武成公 휘 多省 할아버지가 시조로서 그 뒤 고려 공민왕때의 忠宣公 호 三憂堂 휘 益漸 할아버지에 이르는 近九百년동안 문무 두 방면에 걸쳐 나라에 공이 많으신 분이 끊이지 않으셨다.忠宣公의 三男 휘 中實이신 성균관 진사 휘 苹께서 처음 동래에 자리 잡으셨으니 동래에서는 입향시조가 되신다. 이후 대를 이어 많은 자손들이 모두 선조의 뜻을 받들고 그 은혜를 잊지 않았으되 유구한 세월을 겪는 동안에는 가문의 성쇠와 세정의 격변이 없지 않은지라 때로는 불의의 이산으로 묘소조차 분명치 못한 바 있게 되었음은 후손으로서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를 송구스럽게 여기오던 우리 동래파 일족은 단과 재실을 마련하여 입향선조의 제향을 올리며 추모의 정성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문중의 재정 사정으로 지연되어 오던차 다행히 후손중의 특지자와 문중의 성금으로 선대를 위한 永慕壇과 재실 東成齋를 동시에 준공함으로서 오랫동안 다하지 못한 후손의 도리를 겨우 이루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가문의 윤리를 세움이요, 한편 이어올 후손들에 대한 교훈도 되는 것이다. 우리 오늘 있음이 오로지 조선의 은덕일진되, 이일에 뜻을 같이한 일가들은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며 금후의 후손된자 역시 이 뜻을 명념하여 가문의 영원한 번영을 기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1955년 월 일 동성재관리위원회 백 |
기산재(基山齊) -성안문중재실 |
위치 |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배향선조
| 성안파조외 문중선조
| 향사일
| 추석,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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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
| 기산제 |
| 요사체 |
기산제서 |
성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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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증 고 문시환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있으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족장 1985년 8월 18일 대통령 김영삼 |
초읍재(草邑齋) |
위치 | 부산시 진구 초읍동
배향선조
| 초읍파조
| 향사일
| (음)10월 첫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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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읍제 기문 |
秀麗한 金井山의 한줄기가 南으로 달려 草邑平野에 다다라 봉긋한 봉우리를 이룬 곳이 頭留언덕인데 和池山이 左右로 감사 아늑하기 그지 없구나. 예부터 이곳을 지난사람은 無數이 많았건만 하늘과 땅이 아끼고 감추어 南平文門에 傳하였더라. 여기 모신 累代先塋을 정성껏 守護한지 三百余 星霜 뜻은 이어도 이루지 못했던 齋舍를 이제야 建立하여 齋宿과 治具道場으로 삼으니 物各有主은 有志必成 아닐런가.
南平文氏는 新羅朝 三韓壁上功臣南平伯多省이 始祖로서 高麗明宗때 中書侍郞門下平章 諱 克謙 恭愍王때 木棉을 傳播한 三憂堂 諱 益漸 등 名儒賢士가 代代로 輩出한 華閥임은 世上이 周知하는 바로다. 麗末의 進士 諱 苹이 新興朝鮮朝에 岡僕自靖하여 이곳 東萊로 隱身하니 後孫들의 世居地가 되있더라. 累傳하여 明宗때 諱 自周는 牧使로서 官職을 그만둔 後 老年에 이 草邑에 卜地 移居하였고 아드님 赫龍은 釜山僉使로서 나라의 關門을 지켰으며 孫 諱 道明은 壬辰倭亂때 東來城 域은 昌寧火旺山에서 暴虐한 倭賊과 血戰을
벌여 많은 賊을 차斬護한 功으로 宣武原從功臣 二等에 錄勳되 있고 孫男 理明은 生員이요, 曾孫奉日은 訓練院奉事인데 이 四代 祖들의 墓所아래에 우람한 齋閣을 세웠으니 二年에 걸친 役事에 一億六千余萬원의 巨財가 들었다. 무릇 先代의 빛나는 傳統을 이어 家門의 榮譽를 높임은 後代의 자랑이요, 祖의 墓所가까이 齋舍를 지어 致齋의 淨所로 삼음은 後孫의 道理가 아니겠는가. 地名을 따라 草邑齋라 하니 家門의 傳統과 더불어 千秋에 길이 이어지리라. 내 일찍 壬亂 東萊戰史를 賢中南平文門에 四義士 계심을 알고 欽慕의 情을 禁치 못하던차
이 齋閣 完工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大廳에 오르니 맑은 바람이 불어와 한 여름인데도 더위를 잊을레라 새가 날개를 펴듯 半空에 솟은 추녀는 造型美의 極致를 이루었고 靑龍白虎 날고 뛰듯 左右의 丘陵은 明堂護衛의 氣象도 壯하여라.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서늘하니 齋宿의 場만이 아니라 후손들의 修學積德과 敦宗睦族의 適所가 되겠도다.
뿌리가 길어야 가지가 번성함은 自然의 理法인데 草邑文門의 뿌리는 이미 깊게 뻗었으니 그 後孫들 거센 世波에도 길이길이 繁榮하리라. 檀紀 四千三百十九年 光復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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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실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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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읍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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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읍제실 대문안의 조경 |
벽의 부착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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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에 모신 12공신도 |
중산재- 북면문중 재실 |
위치 |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배향선조
| 18세 응기 19세윤장 20세 택용 21세여욱 22세상규 22세 상익 22세상벽외 배위
| 향사일
| 11월 첫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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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재-금사문중 재실 |
위치 | 부산시 금정구 금사동
배향선조
| 금사파조외 97위
| 향사일
| 음력10월 첫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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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금사집 파조 이하 98위 제사 |
축문 | |
위패 |
윗대 위패 |
진설 |
운송재(雲松齋) -거벌문중제실- |
위치 |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동 370-22번지
20세 諱 世輝(세휘) 21세 諱 德謙(덕겸)
음력4월14일 동래유림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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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사(尙義祠) 운송재(雲松齋)연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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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사는 남평문씨 동래파종중의 임진왜란에 순절한 공신 증 호조좌랑(戶曹左郞) 문덕겸(德謙)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의
병란중 시종 의병을 일으켜 분투하여 왜적을 토벌한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문세휘(世輝)의 충용을 본받고자 1960년 경자
4월14일 설단 봉안하여 매년 동래유림들이 향례를 봉행하던 곳을 장소가 협소하고 그 규모가 두분 충신을 봉안하는데 부족하여 유림과 후손들이
의논하여 단을 훼철하고 사우로 신축하여 영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부학의
유생인 문덕겸은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적이 동래성을 공격해 오자 가족들은 돌보지 않고 당시 남문밖에 있는 향교로 달려가 오성(다섯분의 성인)의
위판을 성내 청안루에 옮겨 모시고 항적하다가 부사 송상현과 성이 함락되자 함께 전사하시었다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문세휘는 당시 교생으로서 임진,정유 양란간 7년간을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적이 있어 전란후 선무원종공신록권을 하사받고 토적(討賊)공신
24인중 2등으로 기록 되었으며 복호록(復戶錄)을 하사 받고 영조 13년(1737) 증직시 2등으로 증 통정대부 장악원(掌악院) 판결사를
제수받고 또 영조 42년(1766) 증 병조참의를 제수받았다. 2000년 새로 건립한
상의사의 추원문(4평)은 4,000만원 신실(14평)은 평당 6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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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겸 전 |
문덕겸은 아버지의 이름이
經緯(경위)인데 선대는 본래 남평사람으로 동래에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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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 |
외삼문 |
위패함 |
세휘공 위패 |
덕겸공 위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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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사 |
덕문재(德文齋) |
위치 |
부산시 강서구 덕두리 |
배향선조 |
13세 諱 繼祖이하 후손 174위 모심 |
향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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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사 측의 차량 출입문 |
덕문재 대문 |
성금비(전후와 측면) |
휘 계조공 비석(뒷면은 담으로 인하여 촬영이 불가능함) |
제실 |
관리사 |
2009년 이임하는 치주 회장 |
2009년 신갑 신임회장 |
2009년 제사 준비 |
진설(밥은 없는 것이 특이함) |
헌관6명 (74위 모신후 100위를 모심으로 초헌, 아헌, 종헌 각 2명) |
부산종친회 운영위원님들의 참석 |
신갑 집례 |
1단의 신주님들 제사를 모시고 2단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커틴을 올리고 내림 |
2차 제사 진설 |
축문첩 |
초헌례 |
독축 |
굻어앉은 참제자들 |
제사후 식사(식사후 회의가 있었고 회장선출함) |
덕문재 주련(건물의 기둥에 적어서 붙인 글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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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신 물 염 수 은 신 물 망 |
남에게 베푼 것은 생각 말고 받은 은혜는 잊지 말라 |
세 한 연 후 지 송 백 지 후 주 |
겨울을 지나보아야 솔과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
오 생 야 유 애 이 지 야 무 애 |
나의 삶은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없다 |
부 윤 옥 덕 윤 신 심 광 채 반 |
재물이 넉넉하면 남에게 베풀어야 몸과 마음이 편하다 |
강서구 덕두 덕문재 제사 참석(2009년 11월22일) |
순평집에서 강서의 덕문재 제사에 참석한다하여 좌석이 있냐고 했더니 만든다고 하여 09:15 동래에 가서 병영 재룡 태주 병준님들을 만났다
잠시후 한주님이 차를 갖여 왔지만 좌석이 모자라서 3인석에 4인이 앉아야 했다 10:55 헌관은 6명이 도포를 입고 집사는 양복차림으로 도열하였기에 촬영할 장소를 잡고 살펴보니 신위는 3단으로 각각 커틴을 쳐 두었고 제상은 높이가 60cm이고 폭이 30cm 길이는 4m 정도로 짐작되는데 먼저 74위를 모신다는데 밥과 국은 없었고 술잔은 제상의 끝까지 놓여 100잔은 넘을 듯 했다.제사전 맨 윗단의 커틴을 열었는데 위패의 아래에는 신위가 아닌 신주라고 적었다. 관세는 초헌부터 집사까지 하여 시간을 줄였고 10:57 삼상향은 향 3개를 각각 피워 올리는 것이 신선했다 11:36 집례, 찬장의 재배로 시작하여 집사는 같았고 헌관은 바뀌었다. 비문에 적힌 내용등을 신갑님께 질문하니 황고(皇考) 왕고(王考)를 질문하니 부친과 조부라고 했다. 뒤에 찾아보니 증왕고(증조) 고왕고(고조)라고 한다고 나와있었다 주련의 뜻을 물었더니 사람에게 베푼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받은 것은 잊지말라 |
위치 |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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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지정년월일 : 1972년 6월 26일) |
| 배향선조 21세 문덕겸, 20세 문택용, 20세문세휘, 21세문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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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사일 2월중정일 8월중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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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1592년 임진왜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 부산지방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모든 선열의 위패를 직책또는 증직의 순서에 따라 93위의 신위를 모신곳이다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거의 건의로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1709년(숙종 35년)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이 읍성 남문안의 옛 송공사 자리에 별사를 건립,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등 동래9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735년(영조 11년) 동래부사 최명상과 경상감사 민응수가 두 개의 사당이 나뉘어 있으니 별사를 폐함 1864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순절한 선열을 봉안한 사액서원이라 폐하지 않았으나 매년 5월 25일에는 부산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
문덕겸 |
거벌문중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
문세휘 |
거벌문중 자: 世平(세평) 호:
百修(백수)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
문택용 |
북면문중 자: 雲甫(운보)
동래구 사직동 달북에 묘소와 제실있슴 |
문도명 |
초읍(草邑)문중 진구 초읍동에
묘소와 제실 |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38번지로 동래지하철역에서 약 2km정도 | |
충렬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을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10만 대군을 맞아 무기와 인원의 열세를 의연한 기개로 싸우시다 장렬히 순절한 부산지방의 호국선열의 영령 88위를 모신곳이며
5월25일은 시민들이 정성으로 제향을 올리고 |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
제6 공화국의 새 행정체재 확립과 400만 부산시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晝宵로 노심초사하시는 안시장님의 노고에 대해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저희 진정인들은 동래 유림의 유지및 宣武原從功臣의 後裔들로서 임란공신 11위의 위패를 忠烈嗣에 合祀해야 마땅하다고 관계 문헌을 첨부하여 이에 진정하는 바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부산시 안락동 소재 현 忠烈嗣에는 殉節하신 송상현부사를 위시하여 임란때 殉節하셨거나 전공을 세우신 71位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1978년 현재의 忠烈嗣를 준공했을 때 모든 임란공신을 다 合祀했던 것입니다. 1983년 12월 30일자로 발간된 별첨 대연논문집 창간호에 이태길씨는 忠烈嗣 합사에 관한 고찰 이란 논문을 통해 이에 대한 사실을 소상히 논증하고 있고 1984년 3월 4일자 부산일보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상기 문헌 및 동래부지, 동래군지, 忠烈嗣志, 등을 고찰해 본다면 文澤龍, 朴天樞, 宋龍景, 文道明, 金士立, 朴拏立 鄭彦龍 鄭好仁 李春祥 李成春 金好義 등 11人은 임란당시 동래출신으로서 동래 지방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분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다만 현 忠烈嗣 준공시에는 문헌의 未發掘로 漏落되었을 뿐입니다
동래출신으로서 동래 지방에서 참전한 모든 임란공신을 忠烈嗣에 합사한다는 것은 기존방침일 뿐만 아니라 당연한 도리이니 비록 당시에 문헌의 미비로 누락되었다. 하더라도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다면 지체없이 합사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은 지하에 계신 선열들의 英靈에 대한 보답이요 그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 주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후대 국민들의 마땅한 도리임은 贊言을 要치 않는 문제입니다.
원컨대 기계 학자들과 협의하시어 하루 속히 상기 11공신의 신패를 忠烈嗣에 합사해 주실 것을 거듭 간청하면서 이 진정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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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안내판 |
충렬사 안내도 |
본전 안내판 |
본전(순절 선열 남자 88위 모심 |
송상현공 명언비(戰死而假道難) |
소줄당(강당) |
의열각(왜적과 싸운 2의녀와 금섬,애향모심) |
동래읍성지 |
정화 기념비 |
군관청(군관의 집무실을 복원한 것) |
기념관(아래의 전시물 등을 전시함) |
동래부 순절도 |
부산진 순절도 |
전환기록도 6폭의전투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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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동래 24공신 공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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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추계대제 행사를 위한 입장 |
집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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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 |
장준부산종친회운영위원 |
수길부산종친회 운영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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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회 기념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