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남평문씨 세거지(世居地)

세거지란 일족이 모여사는 마을로 옛날에는 세거지가 양반의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습니다.산업화 후에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하여 떠나고 선조의 묘소들이  마을을 지키는 현실이지만 수많은 전쟁과 가난속에서도 씨족을 자랑과 긍지로 여겼던 선인들의 자취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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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명
소재지
산청세거지
경남 산청군 신안면
인흥세거지
대구시 달서구 인흥마을
장암세거지
전남 영암군 장암리
웅천세거지
부산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문정동
서울 송파구 문정동
미정리세거지
전국 각지

 

산청 세거지

남평문씨는 크게 합문지후(4세 후식)파와 순평부원군파(4세 유필)로 나누고 있습니다
산청은 합문지후파의 세거지이며 산청군지에는 산청출신 문과합격자 명단인 방목에는 문정(의계처리됨)선조의 이름도 있고 익점공과 아드님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는 남평에서 오래전에 산청으로 이거하여 누대의 세거지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초기 익점公의 조카인 가학公의 난으로 인하여 헌납공파 승손공 계열은 강원도 명주로, 순질공파의 후손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도피하니 하루 아침에 산청의 세거지는 폐허가 되었고 이후 300여년 동안을 산청에는 문씨들이 살지 못하였습니다

150여년전 순질공의 후손들이 진동을 거쳐 산청에 자리잡고 의안공 후손들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흥 세거지와 인흥문고

구분

시도민속자료  3호로 대구시에서 관리
남평문씨 세거지로 전국 문중문고중 책이 가장 많은 집안

소재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401-2          ☎ 053-637-5416 

설명

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구마고속 화원 나들목에서 5번 국도 이용 대구쪽 1.4km에서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여 하천 따라 2.5km 지점

고려 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적었던 인흥사의 터에 99칸 이하로 제한하던 건축법이 없어진뒤에 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우수한 자재와 기량으로 11개 건물 3,500여평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과 안목을 높였다

남평문씨 의안공 이곡파의 후손인 인산제 문경호(文敬鎬1812-1874) 씨가 건립한 후  160여년에 걸친 문씨세거지인데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씨종가와 함께 국가에서 관리하는 3개 문중의 하나이다

후손에게 일제치하의 식민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하여 7000여질의 2만권이 넘는 서적을  국내는 물론 중국에 구입단을 파견하여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의 태산준령을 넘어 운반한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을 보관하고 있다.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님 집안이며 주관리자는 종손 문정기님이고 서책관리는 서울신문사 사장을 하신 문태갑님이 하고 계시면서 안내를 하시기도 하는데  언제 방문하여도 좋으나
늦여름 담장마다 능소화가 만개 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서고 소개

*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 광거당(廣居堂) -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 인수(仁壽)문고 -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 중곡(中谷)문고 -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2만권 고서 소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 조용현님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출판)에서 발췌 -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인수문고는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된
①경(교과서 격인 경전) 536책 ②사(역사서)1813 ③자(기예와 술수 소설등 )588  ④집(개인문집)4011으로 총 6,948책과 1975년 이후에 구입한 1,500책으로 8,500책에 20,000여권으로 서원중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안동 도산서원이 4,400책이니 책의 량을 가늠할 수 있다.

경술국치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학교에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하여 남평문씨의 자녀 교육을 위한 독자적 프로그램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겸 도서관이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만권당은 돈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과 재력의 뒷받침을 남평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萊파) 문세근(世根)씨가 500여년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에 이주한후 화원에 들어온 것은 문세근의 9대손인 문경호(敬鎬)로 1840년경이었다.

인흥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역대연대표를 작성하고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의 절터였는데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이 대웅전 자리이고,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인 고려정은 인흥사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밭가운데의 석탑도 인흥사 유물이라고 전한다.
절터 중에서는 명당이 많으나 그렇지 못한 곳도 있는데 바위로 된 곳은 기도처로는 좋지만 주택으로는 좋지 못한데 이곳은 바위산이나 보이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다.
이집의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데 왕가가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여년에 걸친 조상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는 집안의 가통이 확실하게 정립되었음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경호는 천석의 재력을 갖추었고 처음부터 계획한 마을로 우물정(井)자 형태로 400~500여평의 대지를 가진 9개의 가옥과 공공건물인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까지 도합 12채의 건물이 1만여평의 대지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1만여평은  동네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유공간에 건물이 들어서면 품격이 떨어짐을 우려하여 앞으로도 더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고 현재 처럼 9채만 유지하기로 문중에서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 살고 차남은 다른 곳에서 사는데 다른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보다 주택을 받은 장남이 적게 가지는 등으로 상속되지만 주택만은 장남상속의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데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며 직장을 다닐 때는 객지에서 생활 하더라도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이며 외부인에게 집을 판매하지 않아 문씨들만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휴지나 빈병등의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조선소설사 저자)은 인흥의 모습을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 나면 수년전 연희 전문학교에 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전남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 壽峯 문영박)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방문하니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이 모여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전채 제시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건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고 했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그 재력은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이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어 1만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도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들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이다 만권당의 기획은 문영박이 하고 아버지가 적극 후원하였으니 부자간의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문경호가 터를 잡고 손자인 문봉성이 대들보를 세우고 증손자인 문영박이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으로 문장지와 수봉선생이란 표현들은 문영박을 지칭하며 수봉정사도 수봉 문영박의 사후(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이 교류한 인물중에는 심제 조긍섭(영남지방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창강 김택영(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있음) 난공 이건방(강화학파 핵심멤버), 이정, 변정상 등이며 강화학파는 개화기때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 학파로 일제 강점기를 수용하지 않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만주로 갔으나 강화학파의 맥을 잇기 위해 이건방을 남겼고 위당 정인보에게 전했기에 수봉의 묘갈명을 정인보가 짓게된 것이며 수봉 사망후 상해 임시정부발행으로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은 1931년의 이 조문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인흥 방문기(2002년 6월 문병달 작성)

08:45 柄俊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丙準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구마고속도로의 화원 나들목으로 나와 5번국도를 이용 대구쪽으로 가던중 본리동과 남평문씨 세거지의 안내판에 따라고 다리를 건너 하천의 옆길을 가니 왼편에는 인흥서원(추적 선생 배향)이 있고 오른편이 문씨 세거지로 참깨밭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인수문고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연락을 받으신 정기님(종손)과 태갑님(전 서울신문사장)께서 마중해 주셨다
입구에 심어둔 목화가 30cm 정도 자라 있기에 가져간 목화묘목은 화분에 심으신다고 하셨고  종가댁을 가는 길은 도로폭은 2m정도인데  양쪽은 2m 가량의 흙과 돌로 담은 쌓아 골목길로 만들었다. 60여m 를 걸어 대문을 지나니  거북모양의 잠금장치가 보이는데 종가에만 거북의 등에 무늬를 세겼다한다. 사랑채의 대문과 안채의 대문이 있어 대문이 3개였다. 대지는 400여평에 300여평의 채마밭이 딸렸다

공직에서 물러난후 인흥에서 생활 하시는 정기님의 집안은 의안공 이곡파인데, 원래 성당동에 입향하여 경호선조께서 인흥에 터를 잡으셨고 10여리 떨어진 뒷산에 14대에 걸친 선조님의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손수 커피를 내어오신 김신자(종부)여사 께서는 응접실은 창고를 개조 하였고 안채에서 생활하는데 안채는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곳곳을 짚어 가면서 건축 전문가인양 긍지와 자신있는 표정으로 친철하게 설명하셨다
조용현 교수님(한국의 명가 저자)도 안채에서 하루를 머물었다고 하고, 건축가와 풍수 관련 분야등의 전문가들의 방문이 잦다고 하신다.안채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청의 우측은 부엌이고 좌측은 아담한 방인데 천장의 구조가 특이하였고 아름드리 홍송으로 지어 지금도 다른 나무 한쪽 덧된 것이 없다는 종부님의 설명이 아니어도 견고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음을 느꼈으나 현판과 그림 앞에서는 무식이 탄로날까 하여 질문조차 못했다.
내부는 생활을 위해 개조하였다는데 부엌은 일핏보면 현대식 주방으로 보이지만 싱크대 옆에는 대를 물려온 고색창연한 찬장과도 잘 어울리고 위에 걸린 에어컨 까지 원래 부터 있었던 것인양 자연스러우니 현대와 고대가 이질감이 없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종부께서는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받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부엌의 문을 열어 보이시는데 현대식의 욕실이 나타나니 문경의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에 갔을때 한식의 기와지붕을 한 화장실 건물에 들어가 수세식 화장실을 본 것이 생각났다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무릎이라도 치고 싶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도 3년째 기르며,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꾼다고 하신다
녹색 바탕에 수채화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한데 컹컹대며 서성대는 순하게 생긴 개는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2칸의 행랑채는 행랑살이가 없어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으며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고깔을 쓰고 영글고 옆의 우물이 고려정이라 하시는데 차범총무님은 고려정의 안내판을 붙여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신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채의 대청에서 마을 입구가 보여 손님의 내방을 미리 알 수 있는 구조였다
경호 선조님께서는 초가로 지었으나 1910년 광거당과 3채의 집에  기와를 올리고 차례로 작업하여 30여년전에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1:30 인터넷 족보 입력을 위하여 인흥파보 한권을 기증받아 종가를 나오는데 종손님과 함께 종부님께서 마을 입구까지 전송하면서도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함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에서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베인 종가집 며느리의 품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조용현 교수의 글에서 안동 김성일씨의 집안에서는 종부에게 해가 바뀌면 모든 일가들이 세배를 올리고 종부는 서울에 살면서도 일년의 절반을 안동에 내려와 손님을 접대하면서 종가를 지킨다는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 했는데 남평문씨 인흥세거지의 종부를 뵙고나니 부럽지가 않았다.

인흥에서 서고 관리를 하시는 태갑님의 안내로 들어간 인수문고는  근간에 건축하여 현대의 인문에 관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며 열람은 맞은편 건물에서 한다고 하시고 겨우 지나다니는 좁은 통로외에는 책들로 가득 채웠는데 나도 읽은 왕비열전등이 앞쪽에 꽂혀있고 영어로된 책들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수봉정사 마루에는 추사의 글씨외에 문진경(송나라의 명필)씨가 적었다는 사백루 현판의 글씨는 날아갈 듯 한데 복사한 글씨로 목판에 세긴 것으로 짐작하지만 만약  진품글라면 가격이 없다는 설명도 하셨다.
2시간이 잠간인 듯 흘렀고 다음 일정이 있어 전송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인 군위로 향했다

인흥 사진첩



















 

장암세거지

구분

 

소재지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설명

순평군파 문맹화 후손 가계로 최초의 복식부기를 사용

1454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세조의 패륜에 분개한  문맹화(순평군 후손)祖 께서 벼슬을 떨치고 경기도 파주에서 이거 하신 곳으로   전체 3백50여 가구중 3백여가구가 남평문씨요, 시인묵객들에 의해 ‘용강에 붉게 타는 노을’ ‘월출산의 자욱한 안개’   ‘토끼동산 허리의 보름달’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역사스페셜<다큐·KBS1 밤8·00>
전라남도 영암군 장암리에는 300여년 전부터 유지되어온 장암 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두 계의 총회가 열리고 엄격한 회계 감사를 실시하며 회계장부인 ‘용하기’에는 문중재산과 마을 공동재산의 쓰임이 정확하게 기록된다. 300년 전부터 전해진 ‘용하기’를 통해 ‘신용사회 조선’을 들여다본다.

장암에 대한 게시판의 글들의 내용

문규연

2003년 4월 12일 KBS에서 방영한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대동계를 보고 우리 선조들의 단결과 평등정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300년전 조선시대에 정확하고 투명한 회계로 신용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상업회계상 자랑스런 지혜의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방송에서는 남평문씨가 고려시대 상업을 주로 한 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상업은 평민들이 하는 걸로 아는데...

문병달

저도 방송을 잠시 보다 자리를 떠나야 했기에 내용은 모릅니다만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마을은 순평군 달한선조의 후손들의 세거지로 알고 있습니다
사농공상이란 서열은 조선시대의 산물이고 고려시대는 군벌(지방토호)들이 양반이었다고 봅니다.
고려태조 왕건도 무역선단을 운영하던 상인의 집안이었고 제2부인인 나주오씨는 염전을 운영하던 집안이었습니다.
고려의 양반은 문반과 무반으로 벼슬을 한 사람을 일컬으며
조선의 양반은 우선 집성촌이 있어야 하고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 삼대 이내에 벼슬을 하는 집안이 명문으로 대접받았고, 반상의 구분이 뚜렸하여 신분상승을 제한하고 직업 또한 귀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세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상업에 치중하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문태훈

장암이라면 순평군파일가분들이 살고 계시며 우리의 전통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오고있는 마을로만 알았는데 이번역사스페셜을보고 새로운것을 알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할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한것인데 고려시대 우리의 선조님은 최고로 위세를 떨쳤던 시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자금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나 장사는 양반이 하는것이 아니라 중인이나 평민이 하되 총괄하는 것은 권력이있는양반일것이구요
고려시대 개성에는 시전이 크게 있었다는데 시전은 권력있는 양반이 운영하는 그런 상가아닙니까
심지어 왕까지도 비단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했다는 말도 있으니 송상하면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의 코리아라는 명칭도 고려의 송상들이 세계각국으로 장사를해 고려를 알려 지어진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선조님들이 그렇게 TV이에 나오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그리고 승권씨 순평군파 24대손이라는데 어느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순평군 달한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아니면 유필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저는 광주에 거주힙니다 장암하고는 가까운 거리지요 예전부터 마음은 있었는데 실천을 못했지만 직접 장암을 체험하려합니다

문승권

저는 순평군파 24대손인 문승권이라 하며, 바로 '장암(일명 '마당바우)이 고향입니다.
저는 아침에 www.kbs.co.kr/history를 통해 회원가입 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대부분 아는 분들이 나오시더군요..
경영학 중 회계학을 전공했던터라 유심히 눈여겨 보았는데 몰랐던 부분도 발견되었습니다.

1. 1668년부터 창립되어 유지되어 온 '장암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는데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있었고, 현재도 거의 중장년층에도 상부상조정신에 따라 동년배들끼리 또다른 '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2. 남평문씨가의 대동계는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을 하는 장부인 용하기(用下記)로 쓰임새를 아래로 기록한다는 의미로, 조선사회의 공동재산 관리에 대한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3. 내(內)를 중심으로, 경주최씨의 경우는 이(以)를 중심으로
예를 들면, '1781년 봄 벼장부'라는 보조부로서, 왼쪽에 차변(항목과 두, 승, 홉), 오른쪽에 대변( 항목과 두, 승, 홉)을 대차평균의 원리에 의해 기록, 집계했다는 사실입니다.

4. 장부기록 용어를 보면,
질(秩, 차례질)이라는 계정(account), 과목, 항목과 유사한 의미로서 순서대로 정리, 기록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봉차질(수입), 급(給)차질(지출)로 현재의 손익계산서의 비용과 수익으로 대응하여 분리, 회계처리함과 같으며
또한 이익질(秩), 소비(秩)로 구분도 했으며, 단위는 계량형에 의한 척도로서 두, 승, 홉, 작까지 명확하게 기록했다.

4. 부기(簿記)에 대한 세계최초는 이탈리아의 베니스상인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 때 개성상인들이 작성한 '四介松都治簿法' 이 복식부기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5. 대동계의 시초는 역사책에도 나옵니다만 영암 월출산 바로 아랫마을인 '구림'이며, '장암'은 장암대동계를 운영하면서 기록면에서 충실했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전계원들 앞에 공개하고 잘못된 오류 즉 '오록'은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결산보고나 주주총회에서 보고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6. 장암의 동네는 경기도 파주 봉일천 지역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낙남(落南)하여, 나주목사로부터 장암으로 터를 받아 정착하여 3개파(영보, 서계, 율산)로 3형제가 터를 이루고, 4km 떨어져 월출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전형적 농촌지역 입니다.

7. 지역적으로는 상업지역은 아니라고 보며, 장보고를 연상할 수 있는 바닷가인 목포와는 20km 이상 떨어져 있어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불편해서, 사농공상으로 분류함은 착오가 아닌가 합니다.
고려시대 때 선조들께서 영의정 등이 특히, 많이 배출되어 고려시대를 피크로 보며, 조선시대에는 영호남 지역으로 흩어져 특별히 상업에만 의존한다고 봄은 무리라고 봅니다. 장암의 동네는 집성촌으로 사와 농의 중간정도로, 수년전에는 '효의 마을'로 군내에서 지정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 향리에 이렇게 오래 된 장부기록을 보존 해 옴은 처음 알았으며, 어느 정도 종가집에서 족보정도만 보관되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리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전계원 참여하에 300여년동안 빠짐없이 기록, 보고함이 의의가 큰 것 같고, 중년계층에서 이어 받을 세대가 없어서 단절이 될까 우려도 됩니다. 이농현상이 심한데다 회계기록이 요즘은 PC프로그램에 의해 기록, 정리되고 한문에 의한 붓글씨 기록을 부담스러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9. 최근 회계부정으로 미국의 엔론(에너지회사)사태, SK 분식회계처리와 같은 경우가 많음은 회사를 곱게 포장(자산이나 이익이 많게)해서 대출이나, 투자자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 효, 투명성(유리알), 계, 장부기록, 상부상조, 예절, 조상숭배 등이 느껴지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한국계의 장부기록에 관한 연구"를 논제로 하고픈 맘도 있습니다.
남의 것, 큰 나라것만 좋다고 무조건 찾고, 보고, 관심가지는 것보다 우리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지혜도 가져여 한다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10. 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성호 박사 (물가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명희 박사 (향토윤리)
- 국립문화재연구소

장암마을 사진첩

 

장암마을 회관과 공동주차장

장암정 안내판

장암정

장암에서본

월출산과

억세

장암마을의 문창집님 가옥

 
가옥전경 문창집가옥 안내판

부산의 일가들과 대담

창집님(흰옷입은분)과 동생분

본체

대문과 정원

사랑채인

애송정의

주련과

현판

               

애송정현판과 벽화와 부착물

웅천세거지

구분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설명

 

웅천리는 행정구역으로 중리 미동 석길의 자연부락 3곳을 합한 법정동 이름입니다.
1955년 경에는 200여 가구 중 80% 이상이 남평문씨 동래파종중의 북면파 후손들이 모여 살았으나 현재는 50% 정도의 비율인데 주로 부산으로 많은 이주를 하였으며 타성들이 들어오기도 한 것입니다.

문연정이란 정자는 21세 여욱(장악원정)공이 수계가 기장유림 주관으로 열립니다
문연정 인근의 철마 제1경으로 불리는 홍류동 계곡의 홍류폭포는 상단 5m 중단 20m이며 아래는 100m 정도의 와폭인데 햇살이 비치면 무지개가 보이는 곳입니다. 50여년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주민들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마을에 전기를 공급했습니다
아래의 못은 1945년 98m의 사력둑을 막아 못으로 만들었는데 유료낚시터로 운영되고 있으며 중리부락에는 남평문씨북면파의 제실인 중산제실은  1992년 신축하여 선조들의 제향을 모십니다.
북면파의 종가인 문용호 고택은 2007년도 발행한 철마면지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동 부락에는 1988 내무부, kbs, 서울신문사 공동주관으로 아름다운 가정 개인대상에 문동길님이 선정되었으며 해마다 식목일이면 나무를 잘 가꾸는 조림가의 집안으로 문백섭님이 소개되곤 합니다
 2001년 아름다운 정원으로 방송에 소개 되기도 한 집도 있는 마을이며 마을의 경로당에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드높은데 마을의 길흉사나 객지에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면 꼭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로당 옆에 있는 당산입구에는 1974년 산수회에서 건립한 수리정이란 비석과 문성운, 문덕수가 건립한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 문공 휘 세명 집승유허비가 있다
수리정(愁離亭)은 숙종때 이조참판을 지났던 이선(李選)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는데 21세 상익(증 통정대부, 공조참의)공의 집에 기거하면서 집승정과 유란헌에서 소일하면서 송강 정철의 일부문집을 재정리하고 별세했는데 집승정은 수리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한우 쇠고기 전문점의 단지가 되어 30여곳 이상의 음식점이 한우만을 취급하는 영업을 하고 있으며 가을에는 철마한우 축제가 열립니다.홈관리자의 출생지 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가는 헐리고 없습니다.


문정동(文井洞)-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사는 문씨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의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의류상가인 로데오 거리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 문정골, 혜경머리,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두댐이마을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광주군 문정리라 불렀다 
분당 신도시와 인접하여 주택지, 농지, 임야 등이 혼재한 도농(都農) 복합지역이다.
송파대로가 동의 중심을 지나 경기도 성남시로 통하고 문정1동사무소 옆에는 수령 500년, 높이 20m, 둘레 4.7m의 서울시 지정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미정리 세거지

충남

서산군(128)은 성숙공의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전북

김제군 공덕면(146)은 순평군파의 집성촌이며
옥구군(132)은 시중공의 후손

전남

화순군 보성군(764)은 순질공의 후손

경북

경북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23)

경남

경남 합천군(196)은 판서공파후손

제주

북제주군(135)은 남제공의 후손의 집성촌들이며

북한

함남 함흥시(250) 
황해도 봉산,장연군(133) 
평북 평창군(150) 등에도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자료를 구하지 못한 미정리 정려

효열각

삼척김씨

강원도 동해 (문제홍의 처)

효열각

제주고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한규의 처)

표열각

수원백씨

경남 합천군 본량면 항곡리 (문택수의 처)

효자각

문찬석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표열각

파주염씨

충남 서산군 남면 몽산리 (문정호의 처)

효자각

문흥주

전북 옥구군 옥산면

경암별묘

문동도

경남 합천군 용주면

숭의전

문익

경기도 연천

숭의전

문극겸

경기도 연천

고간원

문극겸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경현사

문익점

전남 장성군

구암사

문익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장암리

삼현사

문자수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표충사

문홍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충렬사

문기방

전북 남원

구암사

문상례

평북 의주

학봉사

문응규 문기호

평북 의주

광동영당

문익점 문래 문영

광주직할시 서석동

쌍효문

진주강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정학의 처)

쌍효문

문장갑 문장박

광주직할시 서석동

효열문

장흥오씨

전남 장흥 (문흥로의 처)

정려문

문덕중

전북 옥구군 회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