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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남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720번지 |
배향선조 |
◎시조 무성공 문다성 ◎2세 경정공 문공유 ◎3세 충숙공 문극겸 |
제향일 |
(음)9월 중정 11시 |
창건연도 |
1734년(영조 10) |
배치 |
홍살문(입구)을 지나면 헌성비가 있는 빙호루(서원의 정문)이다. 오른편 문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오현선조 사적비(1975년 건립),
오른 쪽에 강당인 악강당이 있으며 건너편에 오사재가 있다. 양춘문(신실문)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오현(다성 공유 극겸 유필 익점)을 모신 상덕사와 왼쪽에 충선공영당이 있다. |
❏ 연 혁 |
엎드려 생각컨데 옛터를 버리지 못함에 후손들이 백세가 지나도록
흥성하고 감덕을 반드시 제사드림에 사림들이 삼광선생 존모하여 영을
모시었네. 선세의 막훈 추언하여 새로운 제도 꾸몄더라. 가만히 생각컨데
무성공 문선생은 천지의 기운이 어리어 신인이 내려오심이라. 옛적 신라왕이
총애로 벼슬을 더하였더니 대개 그 영명한 자품이 기하에 표출됨이라.
비로소 동방에 문자의 성을 얻었으니 석함의 붉은 글씨 명확히
징험할 것이요. 남평이 악강을 고을 임을 알겠으니 소상히 여지승람에
실렸더라. 기린과 봉의 태어남이 진실로 다른 짐승과 다르니 사람들 상서로운 징조라 일겉고 산천의 기운이 모여 호걸스런 영웅이 됨에 세상에서 명문 우족이라하네. 처 砥石의 언든 바라봄에 효두의 의식 궐하였고 많은 충진을 이미 겪었음에 행인들의 손짓함 얼마나 많았던가. 비 세우고 단 설치함이 이루지 못함에 누차 후손들의 차탄을 일으켰네. 연이나 여러 의론 일치못하여 3년에 집세움 허송하였고 몇 사람이 힘을 모으니 문득 하루만에 공을 이루었네. 오직 이 일이 실로 마당함이라 이러므로 이루기 심히 쉽드라. 환연히 집 짓은 후에 밝은 영령이 일찍 이에 있었음 보겠고 우러러 향햐 드리는 앞에 성의있는 바를 알겠더라. 선생의 여경을 아득히 생각해 보니 후손이 창성하여 어진이 많은지라 경정공 같은 분 있어 사특함 물리치고 충숙공이 뒤를 이어 사기를 찬하였고 순평군의 높은 훈업이 후손에도 그 근훈끼쳐 충선공의 현명함 조선의 업적이 있드라. 이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맑으면 지류가 맑지 않을 수 없음을 보겠드라. 이에 네 군자를 추향함에 엄연히 오선생을 함께 제향 드립니다. 조문이 엄숙함에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깊으며 집이 아늑함에 청죽과 솔처럼 조밀하더라. 제손이 존모하는 마음 붙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많은 선비들 제향의 의식행하니 아! 그 성대하여라. 상량목 들어 올림에 칭송의 노래 이에 울려 퍼지네. 동을 보니 신인이 석함속에서 솟아나셨더라. 후에들 백세에 사당을 새로 지으니 못위에 지금까지 기이한 기운 붉더라. 남을 보니 천마봉 높다랗게 하늘 속에 솟았구나. 우러러 보아도 더욱 높아 잡고 오를 수 없으니 엄엄한 기상 옛부터 이야기 하네. 서를 보니 봉황이 천길 구름끝에 노는구나. 고색 빛나는 문장들 그 후에 창성하니 창창히 줄지어 당에 오르는 구나. 북을 보니 신이 서울이 어딘가 기리 탄식하구나. 영령이 어둡지 않을진데 응당 계실 것이니.녹후를 깨끗이 씻어 옛시절 돌이키리. 위를 보니 늙은 괴화 무성한 향나무 울창히 서로 향하였구나. 네 현인이 계셔 함께 배향하니 조손이 일체로 함께 제 올림 마땅하구나. 아래를 보니 띠를 두른 듯한 긴 강물 쉼없이 흐르구나. 광번을 캐어 제사 올리니 많은 선비들 분주하구나.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후에 춘추로 제향드림 쇠함없고 사우가 기리 보본되어 가을 국화 봄난초는 향기로움 함께하여 제사를 보답하고 봉의 나래 린이 발꼽은 마땅이 자손에게 상서로움 보이소서. |
장흥 고제요(長興 高濟堯) 삼가 기록함 |
대개 인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오랜 옛적부터 신명(神明)의 탄강이 있었다. 상(商)나라의 고신씨(高辛氏)의
후비(后妃) 간적(簡狄)이 현조(玄島)의 알을 머금어 설(契)을 낳은 것과 주(周)나라의 강원(姜源)이 상제(上帝)의 발자취를 밟고
후직(后稷)을 낳은 것 등은 천지가 배태(雁胎)하여 화육(化毓; 천지 자연이 만물을 자라게 함)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박석김(朴昔金) 삼성이 계림(鷄林)의 알속에서 낳은 것과 고부량(高夫良) 삼성이 한라산(漢拏山)에서 나온 것은 오랜 세월의 기형(奇形)과 이적(異跡)으로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 여지승람(輿地勝覽) 같은 책에 실려 있는 것이 한두 곳 뿐 아니다. 이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 역시 그 일례에 속한다. 신라(新羅) 때의 무성공(武成公)은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로서, 남평군 지석(砥石)강 동쪽 장자(長者) 못 언덕 바위 위의 석함(石函)에서 탄생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致)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한 것이요 그 명철함이 해와 달 같고 별 같다 하여 삼광선생(三光先生)이라 호를 삼은 것이 이 때문이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번창하여 널리 팔도에 살았으며,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에 명공거경(名公巨卿)과 충효문장(忠孝文章)이 역사에 끊이지 않았으니, 경정공(敬靖公)의 불교(佛敎)를 배척함과 충숙공(忠肅公)의 임금께 극간한 정절(靖節)과 효혜공(孝惠公)의 충훈도덕(忠勳道德)과 삼우당(三憂堂) 선생의 도학을 편 공덕 등 후예들의 세세로 훈업(勳業) 세운 것이 소상히 국사에 실려 있다. 그 자손중에 덕이 높은 이와 어진 선비가 계속 이어나와 과거에 급제하는 이가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으니, 만약 그 처음에 뭉치어 화육된 원류가 깊고 또한 길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아, 국내의 명문 집안들을 볼진대, 각기 그 선조를 위하여 비록 지팡이 짚고 유람(遊覽)한 곳일지라도 표방(標榜)을 구비하여, 보고 느낌을 잘하여 놓았거늘 슬프다! 문씨 초조(文氏初祖)의 유허지(遣虛地)가 천여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채 한 조각 문암(文巖)만이 풍우에 마멸되었을 뿐이니, 비단 후손들만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또한 행인들의 주시함이 아니었으리오? 크게 존경하고 사모할 옛터에 비를 세우고 제단을 설치하는 일이 아직까지 미치지 못하더니, 계해년(1923)부터 종론이 함께 일고 여러 의논이 일치되었었다. 이에 삼광(三光)선생의 후예 병구(炳九) 인환(仁煥) 치호(致晧)가 이 일을 맡아서 삼문(三門)의 사당을 지어 삼광선생 이하 경정공(敬靖公) 충숙공(忠肅公) 효혜공(孝惠公) 강성군(江城君) 제현을 함께 모시니 도내 유림들이 말하길 이 사당을 비록 본손들이 창건하였으나 존봉(尊奉)하며 유지하는 길은 실로 사림(士林)에게 달렸다 하므로 사실(事實) 한 통을 이상과 같이 삼가 기록한다. |
효혜공 원문은 순평군(順平君)이다. 순평은 고려말 공양왕 2년 화순(和順) 감무(監務)를 겸임시켰을 때의 지명이므로 출자지명(出自地名)에 의한 봉군(封君) 제도에 어긋나며 고려 중엽은 봉군제도가 없고 훈작제도가 시행되었기에 시호로 바꿔 기록하였다 |
* 악강은 신(神)이 신령한 기운으로 귀인(貴人)을 낳게 함을 축하하는 말 장자산 장자못은 예도 이와같고 지금도 이와 같더라. 아름답고 웅장하게 위채 아랫채 지었더라. 수림들 덕을 앙모함에 의절을 다 갖추었네. 밝게 생각건대 무성공 문선생이 영평의 대암석에서 탄강하셨음에 공중에 솟은 주기는 상서로운 해와 구름이 아님이 없고 일면의 붉은 글씨는 모두 이 기이한 모양 이상한 자취였네. 일세에 공훈 세워 나라에 큰 명위 떨쳤고 삼광이라 호 내리니 밝기가 일웡처럼 빛나더라. 천년간을 아직 세사 올리는 예 없었으니 많은 선비들 어찌 경모하는 마음 금하랴. 맞추어 협모함에 묵묵히 마음속에 계획세우고 여기 집 지음에 문득 안전에 우뚝솟음을 보겠더라. 중앙을 택하여 대청이 통하게 하여으니 여러 생도들 강습할 곳 갖춤이요 그 곁으로 방실을 설치하였으니 춘추 제향때 재계하는 곳이라. 비단 공직만 함께할 뿐 아니라 후손들의 성력에 나온 것이다. 제현을 배향함에 사방이 우러러 보며 성복하고 영열들 앎이 어둡고 막막한 구천에서 감격하였네. 양양이 오르심에 밝게 내림하시는 이치 가히 징흠하겠고 울울한 아음 펴었으니 신인의 화합 어긋나지 안았네. 이 진실로 백대에 함께 칭송할 일이니 어찌 일방의 숭암함 뿐이리오. 가을에 예 겨울에 시 배우는 선비들 줄지어 모이고 총죽과 벌송처럼 치밀함은 이 집의 질서 정영함 노래하네. 장노들 모여 락승함에 시를 창화하고 장인들 명하여 일을 마침에 상량올리더라. 어량처 동을 보니 푸르고 푸른 산색은 창공에 솟았구나. 저와 같이 의연한 큰 공업 이우었음에 천년이 흐른 이 나라에 도풍이 남았더라. 아량처 서를 보니 요망한 기운 필연코 바다 서쪽으로 통했구나. 봉황은 덕을 보고 천길 촐이 날으니 구조와 더불어 썩은 먹이를 다투지 않네. 어량처 북을 부니 띠 두른 듯한 긴 강물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우리 도의 참 근원이 이에 있음 볼 것이니 인으가 만이 쇠퇴함 못내 찬탄하네. 어량처 상을보니 지금도 추상하며 잊지 못하더라. 비론이 또한 다시 빛날 징조있으니 기도가 어찌 능히 상실됨 있으랴. 어량처 하를 보니 기장과 벼가 충실히 전야에 가득하구나. 제수를 올리니 정결하고 풍성하니 정성드려 제사올림 공경히 하더라. 엎드려 원하옵건데 상량한 후에 산수가 굽어 살피고 기신이 묵묵이 도와서 박부는 돈후해지고 유부는 강직해 짐에 어찌 비단 백세에 존모함이 무궁할 뿐이리오. 그 쉬를 외우고 그 서를 읽음에 가히 평생에 배운 바를 저 버리지 않으리라. |
악강당기(嶽降堂記) |
민경호(聞京鎬) 지음-자헌대부 장례원 향원임(資憲大夫 掌禮院 鄕原任) 규장각 직학사 (奎章閣 直學士) * 악강은 신(神)이 신령한 기운으로 귀인(貴人)을 낳게 함을 축하하는 말 |
남평 고을의 남쪽 문암은 삼광(三光)선생이
탄강하신 곳이다. 옛적 선생이 처음 탄강하실 때에 석함(石函)의 상서로움이 있었으니, 진실로 범상한 일이 아니다. 고려에 벼슬하여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라 후인들을 열어 주었으므로, 예천(醴泉;단맛이 나는 물이 솟는 샘)의 근원과 영지(靈芝
: 불로장생초) 뿌리 같다. 그러므로 세세로 명신석학이 이어나서, 경정공(敬靖公)의 출납(出納)에 진실하고 불교를 배척함이며, 충숙공(忠肅公)의 국사(國史)를 감수하여 정(鼎: 3정승을 뜻함)에 새길 공(功)이 있음과 효혜공(孝惠公)의 청직(淸直)한 절의로 호종의 공이 현저함과 삼우당(三憂堂) 선생의 성리학을 크게 밝혀 이전의 성인을 잇고 내학(來學)을 열어 준 위대한 공열(功烈)과 아름다운 역사에 빛나고 빛나는 후손들이 서로 이어남에 동방의 벌열(閥閱)한 집안을 말하는 자 문씨보다 더함이 없을 것이다. 그 본래의 근원을 미루어 볼진대, 어찌 삼광선생의 유음(遣蔭)이 미친 것이 아니리오. 지금까지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이 빛나니 오, 번성하여라. 역대로 포상(衰賞)이 모두 지극하여 혹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혹 서원에 봉향되기도 하였으나, 이곳 무성공이 강림한 유허(遺壇)를 돌아봄에 아직까지 제향 드림이 없었다. 풀만 무성하고 초동과 목수들을 금하지 않아 이끼에 파묻혀 행인들이 처량해 하니, 하물며 그 자손들의 추원(追遠)의 감회가 진실로 어떻겠는가? 이번에 문씨 제현들이 옛 자취를 기록하여 기리 세상에 전할 바를 도모하고, 이에 재실을 세워 첨앙(疇仰)하는 마음을 부치었는데, 해마다 제사 올려 보본(報本)의 정성을 펴며 함께 오선생(五先生)을 봉향하여 일묘(一廟)의 제도를 이루었으니, 비록 의(義)에 일어난 것이요 실로 예에 합당함이다. 사당을 세워 예배 드릴 곳을 갖추고 방을 만들어 재계할 곳을 만들어 제향을 드리는 날, 줄지어 뜰을 바삐 다니며 분향 제주하였다. 이때 개연(慨然)히 음성을 들은 듯하고 어렴풋한 모습을 본 듯하여, 천재(千載)의 멀고 아득함 알지 못하고 황홀히 사당에 올라 문안드린 듯함에 효제(孝悌)의 마음이 저절로 울어나는지라 사당 이름을 악강(嶽降)이라 하였다. 후세들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며 의를 생각하여 쇠함없이 이어가게 함이니, 어찌 오직 문씨 한 집안의 다행함일까 실로 이 선인(善人)을 낳게 하는 지극한 뜻이다. 이제 그 후손 병구(炳九) 성호(誠浩) 인환(仁煥) 지수(址洙) 치호(致浩) 종구(鍾龜) 제씨가 그 당호의 뜻과 집 세운 시말 일부를 기록하여 나한테 그 사실을 기록하여 기리 전하게 하니, 그 존조(尊祖)의 정성이 평상인 보다 특출한지라 내 듣고 기쁜 마음 뛰는 듯하여 분연히 붓을 잡아 기록한다. |
선생의 휘는 다성(多省)이요 자는 명원(明遠)이요 호는 삼광(三光)이요 시호는 무성공(武成公)이다. 신라 자비왕 15년 임자(壬子)에 자기(紫氣) 서편에 뻗치거늘 왕이 바라보고 기뻐하여 왈 우리 황조(皇祖)께서 탄강하실 때에 이런 상스러운 기운이 있었다 하드니 지금 또 이런 일이 있으니 반드시 신인(神人)이 하강할 것이라 하고 백결(百結)선생을 명하여 南平현 동쪽 큰 못가를 살펴보게 하니 오운(五雲)이 큰 바위 위에 서려있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거늘 이에 올라가 보니 암상(巖上)에 석함이 있어 그 속에 아이가 있으되 눈 같은 피부 옥(玉)의 동자에 용모가 웅장한지라 드디어 수양하였으니 함면(函面)에 붉은 글씨의 文字가 있어 文姓을 내리고 다성으로 이름하고 삼광이라 호 내렸으니 그 밝기가 日月 같고 빛나기 성신(星辰) 같음으로 해서이다. 배위는 눌지왕의 셋째아들 종교전감 이찬 부사(宗敎典監 伊飱 夫斯)의 따님이니 계림국부인(鷄林國夫人)을 봉하였다. 지증왕 원년에 시중아찬(侍中阿飱)이 되고 진흥왕 원년에 대국사(大國師)가 되어 관학(館學)을 성(城) 동편에 세웠다. 진지왕 2년에 대아찬대국사(大阿飱大國師)가 되고 식읍 삼천호(食邑 三千戶)를 받았으며 수가 107세였다. 진평왕 원년에 대광보국 상주국 삼한벽상공신 대사마대장군 겸 태사태부가 추증되고 남평개국백을 봉하고 무성공이라 시호 내리고 지증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국승(國乘)에 도학과 예법이 동방의 조(祖)로 삼았다 하였고 관학통론(館學通論)에 삼광선생은 사문(斯文)의 큰 스승이라 하였다. 선생의 휘는 공유(公裕)요 자는 이니 금황통(金皇統) 원년 壬戌 11월에 문림랑(文林郞)으로 상서 병부시랑 겸 동궁시강학사(尙書 兵部侍郞 東宮侍講學士)에 등용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臣 문공유 상감의 명을 받들어 연주(延州) 묘향산 보현사의 기문(記文)을 서하였다.(이 기문은 문열공 김부식(文烈公 金富軾)이 교칙을 받들어 찬(撰)한 것이니 서본(書本)이 인간되어 세상에 전한다) 인종 11년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직문하성 이중(李仲)과 함께 상소하여 왈 묘청과 백수한은 모두 요망한 무리들이라 사도(邪道)에 현혹되어 임군을 속이니 청컨대 목을 베어 천계(天戒)에 보답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음에 물러나와 죄를 기다렸다. 의종 원년 丁卯에 어사대사(御史臺事)가 되어 좌정언 정지원(鄭知源) 등과 함께 3일간 궐문에 엎드려 국사를 간하고 2년 戊辰에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3년 을사에 보문각학사로 승진하고 5년 신미에 예부상서가 되고 6년 임신에 병부상서가 되고 9년에 이부상서가 되었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이르기를 남평의 인물에 문공유가 벼슬이 문하성사 집현전태학사(門下省事 集賢殿太學士)에 이르고 시호를 경정공(敬靖公)이라 하였다. 동래 적취정(東萊 積翠亭)이 객관(客館) 후에 있었드니 지금 없어졌다. 곽동순(郭東珣)이 시 한수를 남겼더니 문공유가 대리(大理)가 되었을 때에 손수 써서 벽에 걸었더니 이후로 한편의 시도 지은 자 없는지라 학사 금정(學士 金精)이 기문을 짓고 평장사 최유청이 후기를 지어서 써 부치니 세상에서 적취정(積翠亭)의 셋 빼어난 이라 일컬었다. 인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선생의 휘는 극겸(克謙)이오 자는 덕병(德柄)이다. 예종 壬寅에 나으시고 의종 때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올랐으니 당시에 환관 백선연(白善淵) 등이 국권을 잡아 그 세력이 내외에 떨치거늘 이에 궐문에 엎드려 상소하니 사연이 심히 준엄한지라 왕이 크게 노하여 황주로 좌천되었더니 뒤에 대신의 주청으로 돌아와서 합문지후(閤門祗侯)를 배수하였다. 정중부의 난에 궁성이 포위 당했드니 왕이 남으로 피난 가며 탄식하여 왈 짐이 만약 일찍이 극겸의 충언을 따랐다면 어찌 이런 곤욕을 당 하리오 하였다. 미쳐 명종이 즉위함에 특별히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承)에 올랐드니 얼마 후 참지정사(叅知政事)를 배수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승진되어 판호부태자태보(判戶部太子太保)에 오르고 15년에 판례부사(判禮部事)에 오르고 19년에 판이부사 개부의동삼사(判吏部事 開府儀同三司)가 되어 국사를 감수하고 乙酉에 돌아가시니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충숙공(忠肅公)이라 시호하고 명종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고종 때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 도첨의원보상재(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都僉議元輔上宰)가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유필(惟弼)이오 자는 이니 명종 때에 벼슬이 추밀원사 좌산기상시 어사대부(樞密院事 左散騎常侍 御史大夫)로 헌부(憲府)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충정하고 강직하여 권세에 아첨하지 않았다. 고종 때에 숭록대부 판삼사사(崇祿大夫 判三司事)에 올라 조석(曺石)의 난을 당하여 왕을 뫼시고 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여 왈 강풍에 굳센 풀을 알아본다 함은 그대를 두고 한 말이구나 하였다. 중서시랑 평장사태자소경(中書侍郞 平章事太子少卿)을 역임하고 순평군(順平君)을 봉하였다. 벼슬을 사퇴한 후 돌아가시니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충혜공(忠惠公)이라 시호하였다.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니 이에 나라가 발전하지 못함과 성학(聖學)이 밝혀지지 못함과 자신의 도(道)가 서지 못함을 걱정하여 호를 삼은 것이다. 이가정(李稼亭)을 스승으로 모셔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제현들과 정자주자학(程子朱子學)을 강론하였고 庚子에 과거에 올라 좌사의우문관제학(左司議右文館提學)을 역임하고 壬寅에 사신으로 원나라에 가니 원주(元主)가 공민왕을 폐하고자 하거늘 선생이 힘껏 간쟁하여 굴하지 않으니 원주가 노하여 남황(南荒)에 귀양 갔다가 3년 후 석방돼 오면서 목면 종자를 얻어 와서 우리 우리나라 백성들에 이로움을 남겼다. 일찍이 시무(時務)를 논하여 팔조 소(八條 疏)를 올렸으니 첫쩨는 오부(五部)에 각기 학당을 세워 풍교(風敎)를 떨칠 것이요 둘째는 외읍(外邑)에 각기 향교를 세워 기강을 바루고 셋째는 쓸데없는 관원을 줄이고 어진이를 등용할 것이요 넷째는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요 다섯째는 원나라의 복을 혁신하여 중국 제도를 따를 것이요 여섯째는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자를 구제할 것이요 일곱째는 항만을 설치하여 배 운송을 편리하게 할 것이요 여덟째는 세금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기쁘게 할 것이라 하니 왕이 모두 가상히 여겨 수용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 살이 하고 고려가 망함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이조 태종 때에 가정대부 첨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嘉靖大夫 僉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知經筵春秋館事)가 증직되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하였으며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여 세우고 그 여(閭)를 정표하여 왈 고려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였다. 세종 때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이 증직되고 부민후(富民候)를 봉하였다. 역사에 전하기를 선생은 비단 목면의 공만 있을 뿐 아니라 일찍이 학문에 힘써 정도를 밝히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사람을 가르침에 반드시 효제(孝悌)와 성리학으로 교육시켜 삼한(三韓)의 물들여짐을 씻어내니 숨겨졌던 천리(天理)가 다시 밝혀지고 꺼졌던 문풍(文風)이 다시 떨치게 하였으니 동방도학의 사종(師宗)이라 하였다. 퇴계 선생이 왈 비단 이 나라 억만 창생이 동사함을 면케 했을 뿐 아니라 능히 일국의 의관과 문물을 홀연히 일신시켰다고 하였다. 우암(尤庵) 선생이 왈 정자 주자가 이미 돌아가신 후에 오직 우리나라에서 안유(安裕) 문익점 두 어진이가 낳으시어 그 전함을 이었다 하였고 또 가로대 안선생과 문선생 두 분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되놈들의 행의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 하였으니 기타 제현들의 찬양이 자상히 국사에 실려 있어 빛남을 가히 상고하겠고 항차 역대 왕조의 보전(藵典)이 태종 때부터 정조 때에 까지 누차 끊어지지 않고 내렸음이리오. 일곱 서원과 세 사우(祠宇)에 봉향하고 정조 때에 사림(士林)들이 문묘(文廟)에 배향코자 하였으나 나라에서 금하여 상소문이 올려가지 못하였고 고종 때에 다시 문묘에 올리고자 세 번이나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니 사림들의 한을 품음이 어떠하겠는가? 정종 계묘 9월에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어서 제사 드리고 액호(額號)를 내리셨다. * 장연서원 내의 五先生實蹟碑는 1975년에 건립되었으며, 번역문은 남평문씨 대동문헌록에서 이기하였음 |
빙호루기(氷壺樓記) |
장흥 고광선(長興 高光善) 삼가 지음 -빙호루는 장연서원 외삼문이며, 빙호란 얼음을 넣은 항아리로 맑고 깨끗한 마음을 비유한다- |
아, 공경스러워라. 영평(永平:남평의 옛지명)의 장연사(長淵祠: 현재의 장연서원)는 삼광(三光) 문 선생(문다성)을 모신 곳이니,
지난 갑자년에 창건하였다. 경정공, 충숙공, 효혜공, 충선공 네 분 선생을 함께 배향하니 3년 후 병인(1926)에 바깥 삼문이 이루어졌다. 문씨의 장로(長老)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묻거늘 내가 빙호문(氷壺門)으로 하라 하였으니, 대개 장자(長者) 못물이 가득히 넘실거리는데 빙옥(氷玉) 같은 가을달이 천재(天載)에 비침을 인용한 것이다. 아, 선생들께서 고려 때에 이단(異端)을 분별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 우리 동국(東國)으로 하여금 소중화(小中華)가 되게 하는 시발이 되었음에 이름이 있는 곳이다. 그 실상을 서로 믿을 만하다. 선생의 후손들이 이 땅에 가득하나, 오직 이 서석산(瑞石山) 아래 문태성(文泰聲)이 나이 팔순이 되었어도 곤궁하고 외로워 의지할 곳 없으면서 추원(追遠)의 본성만은 늙어도 더욱 돈독하여 단독으로 돈을 내어 기와를 덮었다. 이는 그 천재의 가을달이 지금도 빙옥(氷玉) 같음이 아니겠는가? 이들 후인들로 하여금 뒤에 수호하는 법도를 삼게 하면 이 누각을 보수하는 길이 용이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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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서원 전경 |
홍살문(입구문) |
빙호루(서원 대문) |
상덕사(장연서원 신실) |
신실 입구문 |
옮겨 모은 비석 |
옮겨 모은 비석 |
서원 증수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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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문 |
상덕사 |
신실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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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향사 |
유림의 축문 쓰기 |
유림과 본손의 인사 |
유림의 접대 |
일가간의 상견례 |
진설 |
준비된 술독과 술잔 |
집례 선취 재배 |
집례 |
참제자들 |
초헌례 |
엄숙하게 진행되는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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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재배 |
축문 |
음복 |
집사자 재배 |
집례 재배 퇴위 |
집례 |
삼상향 |
사준 |
진설확인 |
축문 |
독축준비 |
2002년 향사 |
오현제 향사 진설 |
기념촬영(칠순고문, 기호감사, 경동부회장) |
기념촬영(제주 및 부산종친회) |
충선공 영당제사 |
2009년 영당 집례 |
사준 |
종헌관 |
2005년 영당제사 |
충선영당 |
충선공 영당 |
충선공영정과 진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