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혁
저산서원은 1577년(선조 16)에 창건되었다가, 고종 6년(1869)에 철폐되었던 것을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당에는 문극겸(文克謙)을 중심으로 하여 문달한(文達漢), 문익점(文益漸), 문찬(文贊), 유지강(柳之綱), 유지기(柳之紀) 등이 모셔져 있다.
❏ 배향인물
1) 주벽-문극겸(文克謙, 1122∼1189)
자는 덕병(德柄)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려 제16대 예종 17년(1122)에 남평에서 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문공유(文公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의종(毅宗) 8년(1154)에 음직으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 判官)이 되고 37세이던 의종 12년(115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의종 17년(1163) 좌정언(左正言)으로 왕에게 조정의 내시와 점장이로 인한 정사의 폐해를 상소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좌천되어 황주판관으로 나간 문극겸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기림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근신들은 대수롭지 않은 실수를 부풀려 왕에게 고하고 파면을 건의하자 왕은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유사(有司)에서 “문극겸은 바른 정론을 주장하는 신하인데 거듭 외직으로 내몰아 언로를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했다.
왕은 이 간언을 받아들여 문극겸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고 후에 전중 내급사(殿中 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의 무신 난으로 폐위가 된 의종이 남쪽으로 쫓겨 가다가 말 위에서 “짐이 진즉 문극겸의 말을 쫓았다면
어찌 이런 욕된 일을 당 했겠는가”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뒤 문극겸은 우승선(右承宣)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을 겸임했으며
재상이 된 후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했다. 무신정권 하에서 문신으로서 문무의 요직을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명종 15년(1185)에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고 이듬해에 아상(亞相)으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하다가 이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19년(1189)에 향년 86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사흘간 조회를 중단했으며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문극겸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성품이 자상하고 인자했으며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당시 유능한 재상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명종(明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간원(叩諫院-공주시 유구)에서 10월1일(음) 묘제를 지내며 장연서원, 송호서원, 저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으며, 고려대전(파주) 전당에도 배향되어 있다.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2003.2 - 2004.8 방영)에서 문극겸의 강직하고 충성스운 활약상이 소개되었다.
2) 문달한(文達漢 1337 - 1392)
문달한(文達漢)은 고려 평장사(平章事) 극겸(克謙)의 6세손으로 충익공파 파조이시다.
우왕 때에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고 여러 벼슬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받고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승진하고 평리(評理)에 옮겨졌다.
양광(楊廣) 경상도부 도체찰사(慶尙道部 都體察事)가 되었는데,
우왕 39년 8월 왕이 명(命)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하고 게으름과 사졸의 강약을 살피고 그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거든 가두어 명을 기다릴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곧 처단하라"고 하였다.
당시 왜적 천여명이 옥천(沃川) 보령(保寧) 등의 고을을 함락하고 개태사(開泰寺)로 들어와 계룡산(鷄龍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문달한은 왕안덕(王安德) 도흥(都興)과 더불어 공격하여 적(賊)들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자
공주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과 판관(判官) 안자호(安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우다 자호(子浩)가 패하여 죽었으므로,
달한이 또 안덕 (安德)과 흥(興), 김사혁(金斯革) 안경(安慶) 박수연(朴壽年) 등과
더불어 공주(公州) 반용사(盤龍寺)에서 싸워 팔급(八級)을 베었다.
그 후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니 물이 바야흐로 불어서 깊고 얕음을 측량할 수 없었다.
왕이 말을 타고 건너려 하니 달한이 "물의 깊고 얕음도 가히 알지 못하는데 어찌 갑자기 들어감이 마땅하리까" 하고 만류하였는데,
별안간 사냥꾼 한 사람이 물을 건너가 짐승을 쏘는지라 우왕이 크게 노(怒)하며
"만약에 물이 깊다면 저 사람은 날아서 건넜느나? 문평리(文評理)가 나를 속였도다"하고
곧 달한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 출입을 금지하고 이어 벼슬을 깍았다.
오래된 후 최영(崔瑩)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최단(崔鄭)을 보내어 우왕에게 아뢰기를
"달한은 우직으로써 어지(御旨)를 거슬리고 집에 있어 억울하니 청컨대 출입을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허락하거늘 최영이 정방(政房)에 있으며 달한의 직책을 회복시켰다.
우왕이 달한의 이름을 보고 말하기를 "지난 번에 단(鄲)이 김실(金實)을 시켜 달한을 용서하도록 청하더니 벌써 죄를 면하였느냐?" 하고
붓을 잡고 글귀를 없애버렸으며 또 단(鄲)과 실(實)의 직(職)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렸다.
이어 달한을 기용(起用)하여 평리(評理)를 제배(除拜)하고 추충익재보조공신(推忠翊戴寶祚功臣)의 호를 더해 내렸다.
찬성사(贊成事)로 오름에 헌사(憲司)가 탄핵하기를
"달한이 외척을 빙자하여 탐람(貪勢)을 방종히 하였다"고 하므로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는데
도당(都堂)이 가까운 지역에 두기를 청하여 철원(鑛原)에 옮겼고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제배(除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함에 대간(臺諫)이 서로 상소의 글을 올리기를 '달한이 이림(李琳)의 매서(妹壻)로써 정사에
참여하여서 불의를 방자히 행하거늘 이림의 족속이 모두 이미 귀양되었는데도 달한은 홀로 도중(都中)에 있으나
청컨대 관직을 거두고 내쫓으소서' 하므로 이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
공양왕 4년에 순평군(順平君)을 봉하여 졸(卒)하였다.
아들은 계종(繼宗) 효종(孝宗)이다.
3) 문익점(文益漸, 1331∼1400)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淑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국가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리학(性理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學堂)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이색 선생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신경(新京)에서 베푼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였다. 45세에 중현대부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制敎)가 되고 58세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右文館提學 經筵同知事)에 올랐다.
70세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돌아가시니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22년(144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다.
묘소(경남 산청)에서 4월5일(양) 묘제를, 부조묘(不祧廟 전남 보성)에서 돌아가신 날인 2월7일(음)에 제사를 지내며,
장연서원, 저산서원, 도천서원, 강성서원, 매산서원, 봉강서원, 운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4) 문찬(文贊)
순평군 휘 달한(達漢)의 3세손으로 호는 명천(明泉)이며 서천군수를 행직했다.
저산서원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김제군 공덕면 제말리에 있는데 묘표는 다음과 같다
문찬공 묘표
공(公)의 휘는 찬(贊)이요 호는 명천(明泉)이요 성(姓)은 문씨요 남평인이니
고려조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이 공(公)의 9세조 되신다
고조 휘 경(環)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요 증조 휘 달한(達漢)은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端蘿補祥功臣)
삼중대장문하 찬성사 순평부원군(三重大匿門下贊成事 順平府院君)이요
조부 휘 효종(孝宗)은 이조(李朝)에 판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이니 시호 호간(胡簡)이요 아버지 휘 치(致)는
세종(世宗)의 내외6촌동계(內外六寸同潔)에 참여하고
호익시위 좌령부호군(虎翼侍衛佐領副護軍) 좌익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 영안군(永安君)에 기록되고 경기(京畿) 마전군(麻田郡) 서쪽 삼화리(三和里) 앞산
기슭 병좌원(丙坐原)에 예장(禮葬)되었으며 어머니 정부인하음봉씨(河陰奉氏)는 소윤(小尹) 안국(安國)의 따님이니 묘(墓)는 함께 묻히 었다
공(公)이 서천군에서 처음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경전(經傳)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후학(後學)들 열어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니 사림(士林)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서 저산(楮山) 서원에 배향하였다.
묘(墓)는 전주군(全州郡) 이동면(梨東面) 장산 유좌원(長山齋坐原)이다. 배위 숙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공(公)의 묘(墓)
오른편에 쌍봉(雙封)이다 아들 상경은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이요 네 아들을 낳았으니 명서(命瑞)는 생원(生員)이요 명현(命賢)은 진사(進士)이며 명필(命弼)은
생원(生員)이요 명창(命昌)은 호조좌랑(戶曺佐郎)이다. 명서(命瑞)는 자식이 없고 명현(命賢)의 아들에 세경(世敬)이요 명필(命弼)은 1녀를 두었으니 이세규(李世珪)에
출가하였고, 명창(命昌)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세영(世英)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이요 세웅(世雄)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낭장(郎將)이고 세걸(世傑)은 참봉이다
세경(世敬)은 자식이 없고 세영(世英)의 아들 응성(應星)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요
세웅(世雄)의 아들 응벽(應壁)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아들 넷을 낳았으니 응락(應洛)은 전력부위(展力副尉)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대행하였고
응하(應河) 응한(應漢)과 응렴(應濾)은 공조좌랑(工曺佐郎)이요 세걸(世傑)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응서(應瑞)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회(應會)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시(應時)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이다.
아, 공(公)이 잠영세가(替榮世家)의 후예로 벼슬이 군수(郡守)에 그쳤으나 종손(宗孫)이 떨어지고 문헌(文獻)이 유실 되어 그 덕행(德行)을 만(萬)에 하나도 알길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으리오? 옛 비(碑)가 이즈러져 이번에 다시 세우면서 삼가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을 비(碑) 후면에 기록한다.
5)유지강(柳之綱)
별암당 유선생이 돌아가시니 이름은 之綱(지강)이고 字는 백거이며 시조 장령공 휘 濕은 완산백에 봉하였으며 자손들이 관향(완산=전주)으로 삼았다.
배는 전주최씨 이시고 다섯 아들과 한 분의 사위를 두었는데 모두들 과거에 급제하여 삼한 국대부인으로 봉호를 받았으며 막내 아들은 생원 문과이신
휘 克渠(극거)이시고 관직은 호조판서 이시니 즉 공의 7대조이시다. 대대로 벼슬을 이어 세습함은 가정의 가르침이 있음이며 공의 덕기는 순수하고
성품은 강명하여 어릴때 우뚝한 거인의 뜻과 같이 홀연하였다. 마치 학이 닭무리중에 있는 것 같고 오동에 난세가 앉은 것 같았다.
매양 사마광이 독을 깨여 친구를 구한 지혜가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약관의 나이로 사문숙성하여 호남과영남의 이재를 겨루는데
연첩삼장 하였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 입문 사문의 난해를 즐거움과 유익하게 탐구하여
같은 처사중에 학행이 고명한 죽헌을 벗삼는 지기가 되었다.
정여립이 허명으로 몰래 조야를 경동하니 공은 한번보고 그가 허식에 의한 역모임을 알고 단교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감복하였다.
공은 본성이 효우정성 하여 충성과 봉양의 의절은 한결같이 소학을 준수하니 사림의 표준이 되어
방백(관찰사)이 효행청념 으로 천거하였다.
선조조에 북부참봉에 제수하니 세가대신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공은 장차 크게 쓰이리라 하였다.
공은 붕당이 극성한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독서와 제자를 가르치며 지방에 머무르던
중 정유년 왜구가 창궐하니 백의창의하여 김제 땅에서 적의 무리를 물리쳤다.
만력병오 공년 오십사세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고도 과거에는 힘쓰지 않았다.
어머니 명으로 사마시에 삼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공의친족 춘호공(유영경.영의정) 이
과거를 보아 청요직에 발탁됨을 권하였으니 공은 공손이 사양하고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 수년에 광해군이 왕이 되니
삼창(유희분.박승종.이이첨)이 전권을 잡았고 칠신이 쫓겨났다.
이때 감사 이경전이 향인과 체결하여 무뢰한 무리들을 이끌고 장차 간당과 부합하여 소의를 모아
외응계획을 삼아 일향장보를 위협하니 두렵고 실색하여 겁을 내어서 따랐다.
공의 형제는 우뚝서서 굴하지 않고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니 고을 동지중 동의자 최석계 김봉곡 유조헌 박매포 (청하서원종향) 유춘포(화로)
김동계 제현도 홀연이 지주가 되어 혹한의 잣나무와 같은 모든 호남의 선비들은 이에 의지 하지 않고 난에 추종하지 않았다.
공은 은둔하여 시골에 살면서 송죽을 벗삼아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수석사암에 소요완보하며 청풍명월에 스스로 회포를 풀었다 .
공명과 부귀는 일장춘몽처럼 여기고 암운계어로 사시의 경치를 보면서 호를 별암으로 짓고 제호로 삼아 편액하였다.
대계 석인에게 보여주는 고반(쟁반을 두드리며)을 즐긴다는 뜻이다.
만세력 신유년에 어머니가 향년 구십일세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육십구세요
늙었어도 어머니를 사모함이 젖을 잃은 어린애처럼 가슴을 치며 주야로
통곡하였고 이에 시묘살이 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효로서 일생을 마쳤다.
어찌 일향의 현사라고만 할까 가이 백세의 사표일지어다.
병건도광 정해(1827년.선조27년) - 후손의 자료제공에 의해 전주부 향현사 성책의 내용으로 대체했다.
6) 유지기(柳之紀)
정암 유선생 휘 지기는 별암 선생의 아우이다.
공은 신기가 수려하며 재기가 무리 중 에서 뛰어나 연보 십육세에 예능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백석 유사부 즙이 한번 그 위의가 연정함을 보고 연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명세진유라 할 만하다. 그 당예제 하여 말하기를 정암이라 하였다.
공의 아버지 병이 있을때 형과 더불어 뫼시면서 병석을 떠나지 않았으니 한 노인의원이 말하기를 꿩의 알이 묘약이라고 하였다.
이 겨울에 구할 까닭이 없어 밤낮으로 축천 하니 문득 꿩 한 마리가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또한 부모상의 범절은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으며 시묘 살이 3년 동안 제복을 벗지않고 애통해 하였다.
또 형의 상사에는 모든 장상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복을 벗은 후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침범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공은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파천함을 듣고 분함을 여기지못하면서 말하기를 천도가 어찌하여 나라일이 어려움이 많은가.
지금 내가 살아서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서 임금에게 보답하지 못함이니 살아서 다시 무엇하리 라고 맹세하고
가동을 거느리고 난에 달려가기 위하여 계룡산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됨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십여장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의로서 생을 마치니
어찌하여 충효가 아울러 형제에서 나왔는가?
이는 곧 질풍에 굳센 풀이요 세한에 송백이니 예로부터 절의의 선비는 어찌 공과같이 생을 버리고 의에 나감이 있을까?
비록 죽었다 한들 후회함이 없으리라
- 후손의 요청에 의하여 고종5년(1868년)에 발행한 전주부 소재 서원 및 향현사 성책 예조 존안에 실린 내용을 전재
❏ 건축물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있고 강당이 있다. 사당에는 충숙공 문극겸을 중심으로 하여 문익점, 문찬, 유지강, 유지기 등이 모셔져 있다.
* 위의 내용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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