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 서원

도천서원(道川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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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노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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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개요

소재지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7번지

배향선조

   10세 삼우당 충선공 문익점

제향일

   묘제 : 4월5일 10:00   향사일 : 음력 9월 1일 09:00

창건연도

   1461년(세조 7)

사액연도

   1787년(정조11)

문화재지정

   신안사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1983.08.24지정)



도천서원 전경


삼우사- 삼우당 위패 봉안소


도천서원- 강당


신안사재-경남문화재 237호

❏ 연 혁

이곳은 고려(高麗) 때의 문신(文臣)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연고지(緣故地)로,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祠堂)을 세웠었다. 사당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며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891년(고종 28)에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 배향인물

주벽-문익점(文益漸, 1331∼1400)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淑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국가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리학(性理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學堂)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이색 선생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신경(新京)에서 베푼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였다. 45세에 중현대부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制敎)가 되고 58세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右文館提學 經筵同知事)에 올랐다.
70세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돌아가시니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22년(144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다.

묘소(경남 산청)에서 4월5일(양) 묘제를, 부조묘(不祧廟 전남 보성)에서 돌아가신 날인 2월7일(음)에 제사를 지내며, 장연서원, 저산서원, 도천서원, 강성서원, 매산서원, 봉강서원, 운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 건축물

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공부하는 공간인 강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앞쪽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삼우사가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있다. 또한 출입구인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으며, 제사 때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신안사재가 있다. 신안사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양쪽 끝 한칸씩 넓은 마루를 두었다.

❏ 중요유적

도천서원신안사재(道川書院新安思齋)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237호(1983.08.24지정)

신안사재는 문익점 선생의 향사(享祠) 때 제관(祭官)들이 숙소로 쓰던 건물로 명종(明宗) 6년(1551)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순조(純祖)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서원 바로 옆 산에는 문익점 선생의 묘소가 있다.
2005년 문화재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도천서원에는 고문서 8건, 전적 253건 등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문서 8건 중에는 소지·첩정 · 품목 등이고 전적 253건 중에는 ≪남평문씨족보≫≪동국아운≫등이 중요한 자료로 보고되었다.

참고- 위의 글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도천서원 유래

* 태종 1년(1401)- 유림이 문익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해 묘소옆에 건립
* 세조 1년(1455)- 왕명으로 삼우당 건물 자리에 세움  
* 세조 7년(1461)- 도천사 현판과 제문을 내림
* 명종 19년(1554)- 침수 우려 있어 이전하고 `도천`의 사액을 받음
* 선조 25년(1592)- 임란으로 불탄 후 
* 광해 12년(1612)- 생원(生員) 이곡(李穀)이 주민들과 재건
* 현종13년(1672) -서쪽 기슭으로 이전     
* 정조11년(1787)- 도천서원의 현판 하사 
*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
* 고종28년(1891)- 주민들과 자손들이 노산정사(蘆山精舍)를 건립하여 춘추로 석채례(釋菜禮)를 지냈는데 오른쪽이 앙지헌으로 숙사로 이용되고 왼쪽의 학이제는 강의실이다. 향교옆에 興學堂을 지어 향교석전(鄕校釋奠)을 올림
* 경신년(1980)에 사림들이 주창하여 정사뒤에 삼우사((三憂祠))를 다시 지어 위패를 봉안하므로 서원이 복원되어 노산정사는 강당이 되고 옛 도천서원 현판을 다시 달아 매년 9월 1일 향례를 올리고 있다.
정부의 지원으로 삼우사(三憂祠) 증축과 도천서원 복원해 유림이 향례 올림

서원 경내에 있는 신안사재(新安思齊 )는 경남문화재 237호로 향사(享祠) 때 제관(祭官)들이 숙소로 쓰던 건물로 명종(明宗) 6년(1551)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순조(純祖)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명종 6년 1561묘사(墓祠) 재건축. 당시, 종손(宗孫) 광서(光瑞)는 후사(後祀)가 없어, 멀리 사는 여러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다시 세우고, 남명(南淚) 조식(曺植)이 고시를 지었다. 
◈임술년에 고을의 수령 성준(成遵)이 공전(公田)을 가지고 제전(祭典) 을 불리었다. 
◈ 순조대왕의 갑자년에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다시 짓고, 
◈철종 계축년 사손 병열(秉烈)이 재현(在賢)과 같이 고치면서 그 규모 를 크게함. 
◈고종황제의 무자년에는 사손 택호(宅鎬)가 재조(在祥)와 같이 다시 수리함
◈1941년 가을 사손(祀孫) 승헌(臺憲)이 다시 세우자고 발의(發議)를 했고
◈1942 영철(永哲)과 영남(嶺南)의 일가들이 다시 짓기로 합의하고 채호(彩鎬) 홍수(洪洙)가 도왔다.


노산정사 (蘆山精舍) 기문(記文)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잔 춘추관 수찬관
1894년 음력 정월 일  전주인(全州人) 이교하(李敎夏) 삼가 지음

우리 나라는 신라 고려 때로부터 이씨조선에 이르도록 모든 유명하고 어진 분에게 은덕을 갚음에는, 도학(道學) 충효(忠孝) 훈공을 가지고 각기 계제에 따라 사당(祠堂)에 모시고 서원에 모시었으되 구별에 아무런 한계선이 없었다. 그러나 세 가지의 큰 업적을 함께 갖춤으로써 제사를 받은 분을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우리의 삼우당(三憂堂) 문선생뿐이다. 
선생은 고려 종말기(終末期)에 높은 벼슬에 계셨고,좋은 학문 좋은 행실 좋은 공(功)을 경하여 갖춤이 남보다 뛰어나셨다. 이에 우리 이씨조선의 역대 어진 임금님께서는 자주 포상을 내리사 강성군에 봉하시고 부민후(富民候)에 봉하셨으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시고 충신공의 시호를 주시며, 제사를 지내어 주시되 제문(祭文)에는,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밝히고, 효도를 지극히 지키고 충을 다했다.(정조 때 내린 강성사(江城祠)의 현판과  제문의 내용)라 하셨고, 또 "우리의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었으니, 그 공(功)은 곡식을 먹게 한 후직의 공과 같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러 도학(道學)의 대가(大家)들이 서로 이어 찬미하고 칭송했음이 빛나게 책들 속에 실려져 있으니,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을 베품이 지극했다.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은 모두 일곱 사원이고, 문묘(文廟)에 모시기를 청원(請願)했음이 또한 네 번이었다. 토정(土亭)의 시에 이르기를 "지금토록 오두막집 에서 강성군 제사 올린다 라고 한 것은, 집집마다 숭배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그런데, 근래에 모든 서원의 철거를 명하심에 단성(丹城)의 도천서원 또한 달리 남게 된 공신 충신들의 서원과 같이 영구 보존하게 되지 못했다. 그래서, 헌 것을 수습하여 향교(鄕校)의 터 밑에다 임시로 집을 지어 배움의 집을 일으켰다. 그러나,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집은 되어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땅 선비들의 여론은 답답하게 막힌 채 몇 해를 지냈는데, 지난 신묘년 봄에 해려(海閭) 권상적(權相迪)이 비로소 많은 선비들과 상의하여 계책(計策)을 세우고, 고을을 다스리는 유도기(柳道夔)와 협의하여, 배움의 집의 약간의 재물을 가지고 정사를 본현(本添)의 북녘에 있는 노산의 기슭에다 다시 지었는바 이곳은 선생이 사신 옛곳이자 선생의 묘 옆이다.
즉 이 정사에서는 주자의 창주정사에서 행해져 온 의식을 참작하고 취해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하룻낱에 많은 선비가 모여 선생의 종이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분향(努香)하고 참배를 한다. 그리고는, 고을의 선비들이 같이 지켜야 할 규약을 닦고 경학(經學)을 강(講)해서 그 의의를 넓힘에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임은, 아마도 옛날 서원에 모시고 제사올렸던 일에 못지 않고 유학을 흥하게 함이 더욱 빛이 나는도다.
후손인 문정욱(文正都)이 해려(海閭) 영감의 편지를 가지고 와 나에게 한 마디의 글을 청하였다. 나는 평소 사모하고 받들었으나 늘 사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음을 한탄했더니, 이제는 노산을 천연스럽게 우러러보게 되어 감히 붓에 먹을 적시는도다. 그런데 대체 후학들이 전의 현인을 사모함은, 다만 그 도를 지키고 그 덕을 존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름지기 마땅히 먼저 그 도와 그 덕을 배워야 할 것임에, 우리들은 이를 힘써야 할 것이다.



노산정사 창설기 (蘆山精舍 創設記)

* 노산정사는 도천서원이 철폐후 중건 되기 전 사용한 정사
1891년 음력 3월 16일 후학 안동 권상적(權相迪) 지음

지금 우리는 삼우선생(三憂先生)에 대한 사모심을 붙일 곳을 가졌다. 정사(精舍)를 창건하였는데, 즉 이 땅에 집짓되 선생이 살으셨던 옛땅이고 선생의 신(神)이 머물러 계셨던 땅을 다시 다듬은 곳으로 이곳의 이름은 노산(蘆山)이다. 그러므로 노산정사(蘆山精舍)라 했다. 이 노산정사의 자초지종은 흥망의 깊은 도리(道理)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아, 우리 선생은 우리나라의 올바른 학문의 종(宗)에다 경하여 만세에 전할 특별한 공훈까지를 지니시었다. 생각건대 도천서원(道川書院) 또한 마땅히 다른 훈공(勳功)이 있는 분을 모시는 사원과 같이 영구히 전하게 함이 타당한 바였다. 그런데 결국 근년(近年)에 철폐하는 서원에 끼게 된 것은 즉 먼 시골 사람들의 천박한 정을 임금님에게 달(達)하게 할 틈을 갖지 못했으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천서원을 헐어 버린 뒤 쓸 수 있는 것을 주워 모아 향교의 터 밑에다 약간의 서까래를 얹어 얽어매어서 그저 임시로 흥학재(興學齋)라는 명칭을 붙였다. 10여 년이 지나서 이곳에다 옮겨 놓고 선생의 묘각(墓閣)과 서로 바꾸어 새롭게 해서, 지금은 사재(思齋)와 한 곳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생각하건대, 선생에게 전에 제사 모시었던 일곱 사원들을 다시 세움은 기약이 없고, 선생을 문묘(文廟)에 모실 것을 청원(請願)한 일이 여러 차례였음에도 임금님의 허락하시는 답(答)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방(南方)의 많은 선비들이 탄식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고을 원님인 유(柳)사또에게 도 지킴을 고하여 협의했으니 그 모양 그대로 산수(山水)의 경치가 우리 선비들이 영원히 의지하여 따르는 바가 되겠도다. 거기다가, 이 지방의 승경(勝景)이 산은 대성산(大聖山)을 근원으로 하여 뻗어났고, 강으로는 신안강(新安江)이 베개처럼 흘러 기이하고도 우연스러우니, 이는 또한 남방(南方)의 한 기록할 곳이다.
정사(精舍)는 남쪽을 향해 있고 5각형의 집으로 되어서 오른편의 현판에는 앙지헌(仰止軒)이라 하였고, 왼편의 현판에는 학이재(學而齋)라 하였는데 내 일찍이 이 이름을 곰곰 살펴보았거니와 무슨 생각한 바가 있었음이던가? 특히 이 정사는 삼가 주자의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의식을 취하여, 그것에 널리 더할 것 과 줄일 것을 참작했고, 매년 음력 3월 1일과 9월 1일에, 모이는 많은 선비가 선생의 종이신주를 모시고는 분향을 하고 참례(참禮)를 한다. 그 일을 마치고 나서는, 서로들 읍(揖)을 하고 예(禮)를 지키며 술을 마시는 잔치를 벌이는 등의 예절을 행하고, 그리고 고을의 선비들이 같이 지켜야 할 규약을 닦고, 경학(經學)을 강(講)하니 감화시키는 거리의 촛불의 끝빛과 노래와 음악의 인재를 교육하는 밝은 교화(敎化)가 이와 같으니, 유도(儒道)를 닦는 사람들의 교화가 다시 떨쳐지게 되었다.
유도가 전해짐이 있다면, 즉 그것은 이 단성(丹城) 언덕의 노산정사(蘆山精舍)로부터일 것이니, 장차 우리 나라의 백세 후까지 뛰어나고 높게 있을 것이로다.

삼우당(三憂堂)의 도학과 은혜스러운 공에 대해서 라면, 국사 및 유학자 사회의 글에 빛나게 펴져 있으므로 후학이 감히 찬미하는 한 마디를 할 것이 아니지만, 이제 나는 동지 성주(星州) 이도영(李道韺)과 외람되게 이 일에 참여했고, 그리고 후손 문재록(文在祿) 및 정하(正夏) 등의 여러 사람이 또한 같이 의논하여 힘을 썼기에 드디어 이 글을 짓노라.

고종 8년(1871)에 수많은 서원(書院) 중에서 47개소만 존속시키고, 나머지를 철폐시 도천서원도 철폐되어, 고종 28년(1891)에, 그 대신 노산정사(蘆山精會)가 건립되었다


노산정사(蘆山精舍) 창설 후기(創說後記)

1898 음력 2월 상순 후학(後學) 성주인(星州人) 이도영(李道영) 삼가 지음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이 처음으로 면(綿)을 심는 것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게 한 공은 후직과 짝이 될 수 있다고 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백세토록 잊지 않음은 마땅한 일이다. 선생에게는 더욱 큰 공이 있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 복장이 선생이 아니었으면, 바꿀 수 없었던 것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식 복제를 중화식(中華式) 복장으로 변경하게 한 것 또한 선생의 덕택이다. 
선생은 고려의 끝 시기에 되놈의 예식을 쓰고 불교(佛敎)를 숭상하던 때를 당해서, 발분하여 우리 유학(儒學)에 뜻을 두시고는, 포은(圃隱) 목은(牧隱)을 벗삼아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을 강(講)하시었고, 강성(江城) 땅에서 상제의 거처소를 지키시고, 교지땅에서의 충정을 다하신 일은 되놈들씨나 중화(中華)사람들이 다 본 것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을 논(論)하는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옷을 입혀 준 공을 말하고, 학문과 충효에 있어서나 유학을 위함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시고 세상의 풍습(風習)이 잘 되게 도와 우리 이씨조선 오백 년 간의 문명적 정치를 열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어둡기도한데, 이는 역시 선생을 알음이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 후직은 순임금의 신하 다섯 사람 중의 하나로 성인의 짝이 될 수 있는데도 시경(詩經) 서경(書經)에 말해져 있음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먹인 공(功)에 대해서만 찬양하고 감탄하였다 선생이 우리들에게 옷 입힌 공은, 다만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춥지 않게 했을 뿐에 그치지 않고, 실로 되놈의 풍속을 고치게 할 바탕이 되셨으니 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로다. 강성(江城)은 선생께서 태어나신 고향이다. 서원을 도천(道川)에 세워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려 높이 받들고, 조정에서는 현판을 내리시어 표창을 하셨는데, 이제는 제사를 폐(廢)하고 서원은 빈터만 있게 되었다. 고을의 선비들은 사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지자, 노산(蘆山)의 기슭에 자리를 잡아 수간의 정사(精舍)를 짓고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제사 지내는 의식을 대체로 모방했다.

노산은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정사 건립에 대한 사실은 기록 중에 자세히 말해 있다. 벗 권상적(權相迪)이 실질적으로 이 일을 주관했고, 죽은 내 아들 회근(晦根)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거들었다. 이런 고로, 고을 사람들이 내게 한 마디 말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없는 것과도 같이 병고(病苦)를 오래 겪고 있는 처지인데 차마 말을 하랴. 그러나 고을 사람들의 부탁을 거듭 어기었고, 또 세상이 천했던 사람들이 교만을 부리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선생한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벌벌 떨어 몸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지라 아픔을 참고 분수에 넘는 것을 잊고서 감히 한 마디 말을 하여 이 곳에 와 놀고 쉬는 이들에게 고(告)하노라, 원컨대, 제군(諸君)은 충효로 근본을 세우고 학문을 하여 일을 하신 바를 잊지 말라. 그러면 곧 좋지 않으리오. 정말 좋지 않으리오.


단성 건원기 (丹城建院記)

1766 영조42년   월     일 고을의 후학(後學) 박사휘(朴思微) 지음

사원(祠院)을 세운 해와 그 본래의 자리는 세대가 오래 되고, 여러 번 병화(兵火)를 거쳤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옛 노인이 전한 바로는 정덕(正德) 연간에 이 현(縣)에는 벽계서원(碧溪書院)이 있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선생의 후손 문희석(文熙碩)이 기록한 것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선생의 서원은 함양(咸陽)의 벽계(碧溪)에 있었고, 또 문윤명(文允明)이 임금님께 올린 글 중에 선생의 행장(行狀)이 함양 벽계서원(碧溪書院)에 있다고 한 것을 고찰한다면, 그 말이 과연 유전(流傳)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함양의 산수(山水)를 고찰하되 벽계라 이름 불리는 것이 없으니, 다만 함양군의 행정구역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즉 본현(本黑)이 옛날 함양군에 속했기에 그리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현(本燃)에는 벽계산(碧溪山)이 있고 또 본현은 고금(古今)으로 나타나게 뛰어난 현인(賢人)이 없었던 터에 단지 선생이 태어나 크셨으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사원(祠院)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서원이 본현 벽계에 있었던 것 같지만, 자세한 근거가 없어서 이제 감히 바로 지적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선생은 큰 현인(賢人)으로 여러 어진 임금의 학문을 존중하는 세대(世代)를 거쳤는데, 유독 서원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치 못한 것만 같다. 그러나 옛날에는 비록 아는 이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와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글로 증명할 수가 없어서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1564년에, 고을 선비가 글을 올려 도천(道川)의 위에다 중건(重建)했는데, 임진왜란에 잿더미가 되어 헐어 졌었다. 난리가 끝난 후 광해12년에,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다 같이 지방장관에게 호소를 하고, 도내(道內)의 선비들이 꾀함이 없이도 서로 같이하여 옛터에다 또 다시 지었는데, 그 자리는 지금 있는 원(院)의 터의 동편 산기슭이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경사져서 원(院)이 오래도록 온전하게 서 있기 어려을 것 같았다. 그래서, 1672년에, 지금 서 있는 원(院)의 곳으로 옮겨 지었던 것이다. 원(院)이 세워져 지나온 역사는 옛 기록이 불에 타 없어져 있지 않아, 다만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올린 글에 기록된 바에 따라, 가정 연간 이후의 해와 그 터를 자세히 밝힌 바를 붙여 기재(記載)하고, 이 뒤에 옛일에 널리 아는 군자(君子)가 나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할 따름이로다.


성덕재 기 (盛德齋 記)

순조18, 1818년 7월 일 생원(生員) 오우상(吳弱羽) 지음

성덕재는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의 강당이다. 서원은 고려조(高麗朝)의 학자 충선공(忠宣公) 문 선생(文先生)을 위해서 설립된 것이다. 우리 나라는 바다 밖 너머에 있어 단군(檀君)의 태고시(太古時)에는, 백성들이 일정한 장소에 살지 않았고, 농잠(農蠶)과 정전법(井田法)은 기자(雲子) 때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기자는 즉 중국인(中國人)으로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우리 나라 땅에서 생산(生産)되는 것은 모시풀의 베와 흰모시었는데, 삼베는 더울 때의 옷 만들기에 쓰이고 비단은 천(賤)한 사람이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풍속이 아직은 가죽옷과 삼베옷을 입고 무의있는 베옷은 없었다. 오늘의 눈과 같이 흰 무명베는 실로 선생이 북경(北京)으로부터 붓대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돌아오셔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넓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옷이 있게 되었고, 길(吉)한 일의 때와 흉(幽)한 일의 때에, 제복(制服)을 달리하고, 천후(天候)가 추을 때에 얼어 죽지 않게 되었다 모든 역사를 고찰한다면, 원래 중국과 우리 나라의 일어남은, 요임금 때와 같이 운을 탔고 오곡(五穀)은 은(殷)나라 말에 나오게 되었는데, 면포(綿布)는 고려(高麗)의 끝 시기에야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두 가지가 나오게 된 서로의 시간차는 천여 년이나 되고, 현인군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루어졌으며, 의식(衣食)의 근원은 그 지나온 바가 먼 옛날이기도 하다. 의식은 천하의 큰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 요순임금)은 배불리 먹고 따습게 입고 편히 살면서도 가르침이 없음은 천하의 큰 근심이 된다고 하여, 앞잡이가 되어 천하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큰 윤리(倫理)를 체득했는데 그 도(道)는 부자(父子) 군신(君臣)간의 일로부터 시발(始發)이 되었다. 이에 덕(德)을 바르게 하고 생활을 넉넉히 하며 화목(和睦)을 하게 된다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세상에 탈이 날 틈이 많은 때를 당하셔, 일찍이 몽고족(蒙古族) 나라의 조정에서 씻은 옥(玉)의 빛을 나타내고, 남방(南方) 되놈 땅인 변방에서 고생하시게 되어, 만리(萬里) 밖에서 구속 당하고, 곤란 중에서도 즐거워 하시었다 이에 의(義)는 시랑(對狼) 같은 자들의 위협(威脅)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덕흥군(德興君)인 왕혜(王謠)와 최유(崔漏)의 반역도당을 살피시어, 마침내는 간사한 자들의 간담이 무너지게 해서 되놈지의 얼굴빛을 고치게 했던 것이다. 만사(萬死)의 고통 끝에 우리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고려의 기강(紀綱)이 이미 무너졌음을 보시고는 정계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어, 9년간이나 사람들을 접(接)하지 않으셨다. 이윽고 천명(天命)이 떳떳하지 못함을 통탄하시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기에 자숙(自肅)을 하셨는데, 이가 곧 선생(先生)의 임금 섬기시는 태도였다

당시에, 상례(喪禮)가 무너져서 사대부가 모두 상을 당한 지 100일에 복을 벗었는데, 공(公)만은 흘로 묘지키기를 3년을 하며, 슬퍼하는 예(禮)를 다 갖추어 세속을 따라·그 천성(天性)을 바꾸지 않으셨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하고 계실 때, 바다 도적들이 미쳐 날뛰고, 선비나 여인들이 뿔뿔이 달아났으나, 공만은 홀로 상복을 입고 묘 앞에 무릎 꿇고 앉으셔서, 소리내어 울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시니, 도적들이 서로 바라다보며 감탄하고는 묘의 옆 나무에다 명백하게 쓰기를,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다시 경내에 들어가지 않고, 전현(全縣)이 온전하게 되었는데, 이가 곧 어버이 모시는 정성이었다. 전조 즉 고려조는 선생의 그 행위를 가상히 여겨 효자리(孝子里)라는 효자비를 세됐다. 우리 이씨조선은 선생의 절개를 높이어 충신의 정문을 세우고 포장하시니, 전해지는 명성이 빛났다. 역대의 임금님 때에 더욱 포장하였는데 공이 전한 면(綿)의 옷을 입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느끼게 하였다. 공은 또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지켜야 할 큰 윤리(倫理)를 밝힘이 있었으니,공이 이 나라 백성들에게 끼친 것이 크지 않은가? 공의 학문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요망함에 머리 訃은 중에 의해서 정치와 사회가 흐리고 어지러워지자, 탑(塔)과 절이 구름을 가리고 부처를 찬미하는 불가(佛家)의 노래가 하늘 닿도록 요란하였다. 이에 6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경,낙경,춘추)은 소홀히 여겨져 유행(流行)되지 않고 윤리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땅에 떨어져 행해지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이 우리 나라로 전해 온 것을 보고도 거기에 무슨 말이 씌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포은(圖隱)정몽주(鄭夢周) 반남(潘南) 박상충등의 여러 어진 분들과 같이 유학(儒學)을 강(講)하는 벼슬에 선출되었는데, 드디어는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들어 미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깊이 터득하여서, 분연(奮然)히 침체되고 있는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고 이단(異端)을 배격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다.

그래서, 상소하여 먼저 학교를 건설하고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시며, 되놈의 복제(服制)를 고치고 의창(義倉)을 두어야 한다는 의론(議論)을 펴고 주장하섰는데, 이것들은 다 후세의 법도가 되었다. 고려(高麗)는 큰 나라였음에, 진실로 마땅히 정직하고 훌륭하기 가 세상에 나기 드문 신하가 있어서, 왕실의 빛을 위해서 그 끝맺음을 크게 해야 했다. 공 같은 분은 참으로 기자(淇子)가 세운 나라에 태어나 장성(長成)했음을 부Rm러워 하지 않고, 나가 벼슬을 하고 물러나 집에 거처하는 도(道)와 학술(學術)이 먼저 단단히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들은 그 어짐을 어질게 알아 스스로를 착하게 할 수가 있었고, 일반 민간인들은 그 이익을 이익 삼아 스스로 살 수가 있으니, 옛날에 큰 덕을 잊을 수가 없음이라고 말한 그 큰 덕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리라.

사당(祠堂)은 세조의 신사년5)에 되어졌는데, 그것은 조정의 명(命)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壬辰)의 난리에 불탔으나 광해군(光海君) 경신년( 1620)에 다시 건립했고, 정조의 정미년(1787)에 이르러서, 현판이 다시 내려졌는 바 앞의 시대는 도천(道川)이라 하고, 서 있는 산은 집현산(集賢山)이라 하며, 있는 마을은 오리동(梧里洞)이라 한다. 백세토록 이 사당에 올라 공의 풍도(風度)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곧 또한 산천동학(山川洞壑)에서 구하기를 세상에 나타나는 이름을 돌아 보고 떨치어 일어남일 것이니, 많은 어진 이들이 모이게 되어 아마도 어진 분의 훌륭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로다.


신안사재 기 (新安思齋 記)

1899년 음력 9월 9일 후학(後學) 성주(星州) 이도복( 李道復) 지음

명(明)나라 혜제(惠帝) 건문(建文) 2년인 경진년에,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삼우당선생(三憂堂先生) 문공(文公)이 돌아가시니, 우리 이씨조선의 정종대왕께서는 강성현(江城順) 북녘의 신안리(新安里)에 있는 갈로산의 양지에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하시고 묘사(墓祠)를 묘의 밑에다 짓게 하시며, 묘지기의 집을 두시고 세(稅)와 부역(賦役)을 면제케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신사년에는, 임금께서 포장하는 정문을 세워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이름 지으시고 의정부참지사(議政府恭知事)를 추증(追贈)하시며,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고 시호를 내려 충선공(忠宣公)이라 하셨다. 선생은 고려의 끝머리 시기에 군주를 섬기었는데, 그 충성은 되놈나라 조정(朝廷)을 움직이게 했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효도(孝道)는 외국 것들을 감복시키었으며,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만세에 옷을 입게 했고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이단(異端)을 물리치니, 유학(儒學)의 공로 또한 선생에게 미치는 이 없었다. 그래서 역대 임금의 포장과 여러 어진 분들이 찬양해서 서술한 것이 다 이미 갖추어 졌으니,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빛나게 일신(一新)시키었던 것이다" 라고 했다 (이황이 효자비각기에서 말함). 우암(尤菴)이 이르기를,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사적의 서문에서) 라고 하였다. 두 선생의 의논은, 간단하면서도 선생에 대해서 다 말한 것이 된다. 묘사(墓祠)에 대해서는 남명(南淚) 조식(曺植) 선생이 그 묘사기를 지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입은 뒤로는 사당이 없어 빈 터만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글이 비록 일부는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백세에 그 내용을 완전히 믿게 할 수가 있으니, 어찌 다시 너절한 말을 할 것이랴? 원근(遠近)의 후손들이 일찍이 그 빈 터를 찾아 한 초당(草堂)을 짓고서, 거기서 1년에 한 번의 제사를 올리었다. 철종 계축년에, 사손(祀孫) 병열(秉烈)이 그의 일가 재현(在賢)과 더불어 서러워하여 탄식하고 말하기를, "이건 우리 선조를 높여 받드는 길이 아니로다. " 라 했다. 그러고는, 곧 여러 일가들과 도모(圖謀)하여 정성을 다해 재물을 모아서, 기와로 갈아 이고 전의 관례를 더 새롭게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차마 폐지 할 수 없고, 차마 황폐(荒廢)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따름이었다. 현 임금님의 신묘년(고종28년 1891)에, 고을 사람들이 여러 칸의 깨끗한 집채를 그 옆에다 짓고, 춘추로 큰 제사를 올리고 학문을 강의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그 집이 좁으므로 고을에서 군자들이 찾아옴을 수용(收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꿔치기를 하여 정사(精舍)의 현판을 앞의 집채에 걸고, 새로 지은 집채의 이름을 신안사재(新安,思齋)라 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선비들이나 문씨들이 다 모여 일이 잘 되도록 보살피기로 했다 사(舍)는 현인을 존경하자는 뜻으로 된 것이고, 재(齋)는 지나간 먼 옛 분의 일을 그리워하자는 뜻으로 되었음에, 현인을 친(親)히 하는 도(道)가 또한 구비(具備)되었도다.

내 흘로 가만히 우암(尤菴) 선생께서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라고 말한 바를 생각하는도다. 전해진 것이란 무슨 일인가? 이 신안사재에 올라선 사람이라면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다만 선생의 묘가 있고 선생의 고향이었다는 것만을 생각할까 보냐? 갈로산(葛蘆山)의 추백(楸栢)이 신안 (新安)의 강에 비치어 움직이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로다. 땅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집 이름을 붙이었음에, 거슬러 올라가 주자(朱子)의 전한 것을 터득하고, 선생께서 전해 받았던 것을 강의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후손이나 후학(後學)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으리라. 사손(祀孫)인 택호(宅鎬)가 나더러 선생의 고향 땅의 후생(後生)이라 해서 이 재(齋) 내력을 지으라 청함에, 나는 감히 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서 사양하지 못하는도다.


서원 제사 축문 

순탄한 경우나 역경이나 간에 충효를 다하시고,
나가 벼슬하건 물러나 집에서 거처함에 도의(道義)를 지키셨네.
혜택을 이 땅 위에 끼치시어, 만세(萬世)에 돌봄이 되도다.


도천서원 현판 내림 청원소(疏)

숙종34년 1706, 상소 첫머리의 사람은 박항태(朴恒泰)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것은 써진 임금님의 거룩한 은전(恩典)이옵고, 어짐을 그리워하고 도(道)를 존중한다는 것은 선비들의 공정한 의논인 것이옵니다. 만일에, 도학(道學)이 출중해서 후인들에게 사표(師表)가 되고, 올바른 행위가 백세(百世)에 모범이 되는데도 신주(神主)를  섬겨 모신 곳에 그 이름의 현판을 걸라는 은혜를 입지 못하면, 그것은 곧 국가가 베푸는 예법의 흠이 되온즉, 선비들이 애석히 여겨 탄식함을 무엇에 비하오리까?
신(臣) 등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 왕조의 유학(儒學)의 현인(賢人)인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의 도덕 학문 충효 절행(道德 學問 忠孝 節行)은 일세의 모범이어서 천년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격려함이 되오니, 어찌 다만 시골 선생으로서 사당에 제사 지내야 할 분이오리이까? 
그런데도, 100년되는 사당에 아직껏 빛나는 사당 호(號)의 현판이 없어, 지금토록 왕가(王家)가 아직도 표창의 거행을 궐(關)한 채이오니, 이는 한 지방의 선비들이 개탄스러워하고 애석히 여기는 바이옵니다. 그래서, 신 등이 서로 사람들을 이끌고서 부르짖는 것 이옵니다. 신 등이 국사(國史)에 실린 바와 선배들이 찬양하여 높인 바 그리고 역대 어진 임금님이 장려하신 바로서 청원드림은, 그 실상(實狀)을 대강 들어 주상께서 마음에 느끼심에 대비하는 것이옵니다.
문익점은 진주(晋州) 강성현(江城顧)의 사람으로 고려 시대 말기에 태어나셨습니다. 학교 교육이 쇠약해져 무너지고 온 세상이 다 불교로 내닫는 것을 보시고, 분개하고 한탄하며, 전해 졌다가 끊어져 가는 학문을 다시 일으킴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니, 올바른 도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을 배격하며 사람들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효도 우애 충성 신의를 주장했나이다.
공민왕 때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글을 올리어서 정치를 위한 도를 논함에 고금에 통하는 말 수천 마디를 했는데, 이치를 명확히 하고 참되고 올바르지 않 음이 없었사옵니다.
 그 분은 누차 간관(談官)을 제수받았사온데, 직언(直言)함을 꺼리지 않아 고상한 성명(聲名)이 맑게 뛰어났습니다. 만년에는 병이라 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즉 시국의 일을 미리 깨달아 알고서 스스로 편안히 지내자는 뜻이었나이다.
고향의 마을로 돌아가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삼우거사(三憂居士)라 하였는데  국운을 떨치지 못함과,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기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었나이다. 
나라가 바뀌는 혁명이 있었던 때에는, 절조를 지키며 생애를 마쳤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고수하여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밝힘으로써, 일대(一代)의 명성(名聲)을 수립했는데, 진실로 평소 학문의 정대(正大)와 지조가 단단하지 않았던들, 그 분의 행(行)한 바가 어찌 그 같이 탁월했사오리이까?
그 분의 효행에 있어서는, 실로 천성(天性)에 뿌리를 두었나이다 일찍이 모친의 상을 당해서 산간(山間)에서 지내었는데, 왜놈의 도적들이 왕성함을 만나 그것들이 지나가는 곳은 처참하게 멸망하게 됨에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었으나, 그 분만은 상복을 입고 제물을 드리어 묘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고 죽기를 맹세하고 떠나지 않으니, 도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하고 감히 해치지를 않았던 바 비록 강혁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求)한 것이나 화추(華秋)가 도적들을 감탄케 한 것이 어찌 이보다 더 나으리이까? 
또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국가의 일로 남방(南方)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가서 구속 당하고 곤액(圈厄)을 당했음이, 다만 소무(蘇武)가 백설(白雪)의 움막 속에서 고생을 겪은 것 같음이 아니었건만, 절개 지키기를 더욱 단단히 했나이다.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옴에, 길에서 목면의 씨를 입수하여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는데, 드디어 온 나라에 크게 번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받고, 국가는 그 힘의 덕을 보았사오니, 그 분은 또한 우리 나라의 후직이옵니다. 고운 솜을 가져온 혜택과  그 씨가 먼 데까지 펴지게 한 덕(德)이 또한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하오나, 이것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었나이다. 고려사의 찬(贊)을 살피옵건대,
"문익점은 다만 목면의 이익에만 공(功)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학문에 힘을 써 바른 도(道)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온 나라가 좋지 못한 것에 물들여진 것이 씻기어지고, 천리(天理)의 어둠이 다시 밝아지며, 글을 숭상하는 풍습의 망해진 것이 다시 떨쳐졌으니, 우리 나라 도학(道學)의 종(宗)이라 할 수가 있다. " 라 일렀고, 또 전의 어진 분인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擺)이 지은 효자비각기에 "공에게는 올바른 행위가 있었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라 하였고, 
또 "공의 효성(孝誠)은 죽는가 사는가의 마당에 다달아 나타났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國朝)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라 하였으며, 
   또 "공이 만년(晩年)에 병이라 하여 벼슬하지 않은 것은, 생각건대, 또한 일찍 앞을 내다보고 닥쳐오는 운명을 기다렸던 것이니, 즉 공의 큰 절개는 이에 더 나타났던 것이다. "
라고 했사옵니다. 그리고, 전의 어진 분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말한 것을 살펴보면,"문익점의 공덕이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의 이익을 가져온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유가(儒家)의 학문(學問)에도 공이 있었다고 했고,
    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충선공) 문익점은, 우리의 유도(儒道)를 서로 계승할 수가 있어서, 우리의 유도(儒道)가 찬연히 다시 세상에 밝아졌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그 학문을 체득하여 우리 나라에 전해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安) 문(文)의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도 추잡한 되놈의 행실을 면(免)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했사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믿어지는 진실을 기록하는 임무가 있거늘 사관한테서 이미 그렇게 칭찬을 받았고, 아첨하여 남을 사모하고 남을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은 어진 분으로서는 하지 않는 일이온데, 전의 어진분들이 높이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사온즉, 이가 믿어지고 증거정이 아니오리이까? 
   다만 이것뿐이 아니오라,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는 그 분의 공덕을 미루어 칭송하사 그 고향에다 포창하라 명하시었고, 벼슬을 내려 주고 시호(論號)를 내리시었으며, 훈공(勳功)을 기록하시고 사당(祠堂)을 짓고 전토(田土)를 하사하셨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봉작(封爵)을 더 높이시고, 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했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친히 글을 지으시어 묘에다 제사 드리게 하시고 제전을 불리시었나이다. 아, 보통이 아닌 큰 공이 있었음에 반드시 보통이 아닌 큰 보답이 있는 것이오니, 역대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포창과 두터운 보답이 어찌 도에 넘은 것이오리까.
     일찍이 명종15년(1560)에 고을 안의 노인들과 도내의 유학생(儒學生)들이 이구동성으로 뜻을 같이하여, 도감사(道監司)에게 글로 호소를 하여 도감사가 임금님께 아뢰게 되어서, 단성(丹城)의 도천(道川) 위에 사당을 창건하였사온 바 그 곳은 문익점이 살고 덕(德)을 닦았던 곳이었나이다. 제사는 비록 그 분이 살던 옛터에서 지내고 있사오나 포창하여 하사하시는 현판은 이미 되어 있는 사당에 아직 궐(關)된 채이옵기에 선비들의 실망은 말할 수 없사오니, 이것은 어진 임금님 세상의 예에 흠이 되는 일이 아니오리이까? 아, 우리의 주상전하께서는 유도(儒道)를 숭상하시고 덕을 존중하시옵니다. 그래서, 비록 한 가지의 절개나 한 가지의 스스로 좋아하는 행위를 잘 행함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창하여 이름을 높여 주시고, 공경하여 모범으로 삼게 하시지 않음이 없사온데, 이제 문 충선공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에 만은 두 자(字)를 쓴 빛나는 현판 내리 시기를 묵살하실 수가 있겠사옵니까?
     자고로 도학이 있는 사람이라고, 반드시 절개를 지키는 행실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반드시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이다. 그러하온데, 문 충선공은 그의 학술(學術)을 논하오면,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룬 학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의 곧은 절개를 말씀하오면, 백이숙제(伯夷叔齋)와 같은 인물이 었다고 말할 수 있사오며, 그의 올바른 행위를 생각하오면 비록 증자, 민손에 비견한들 그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을 표창하는 방식은 유달리도 한 가지의 절개를 지킨 사람이나 한 가지의 좋은 행실을 한 사람에 대한 것만도 못하오니, 이 어찌 유학의 불행이며 선비들의 부끄어움이 될 뿐이겠나이까? 이는 진실로 또한 어진 임금의 교화(敎化)를 더럽힘에 작은 일이 아니옵니다.
신(臣) 등은 이에 스스로가 반성되고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사온데, 멀리 시골에 있지만 예절에 어둡고 언행이 똑똑하지 못한 것들이고, 어진 교화(敎化)를 흡족히 받지 못한 것들이지만 현인(賢人)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나 아직껏 현인을 사모하는 실적을 내지 못하와, 사당을 건립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바친 지 거의 100년이 되었사온데도, 아직것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은전이 막히고, 고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 됨에 불과하게 하여, 옛날 현인의 자취로 하여금 없어져 나타나지 못하게 했사옵니다.
그래서,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가 절하여 행해지지 않고 있음에, 옛날 송(宋)의 주자(朱子)가 노산(盧山)에서 개탄하신 일을 생각하오면, 즉 이같은 일 때문에 그 개탄을 발로(發露)한 것이오니, 이는 신(臣)들의 슬퍼하여 마지않는 바이옵니다. 이에 감히 한 도의 선비들을 이끌고 발을 싸매고 천리길을 와서, 같이 소리를 내어 전하께서 들어주시도록 우러러 부르짖어, 감히 두 자(字)의 현판 내리시는 은혜를 청원드리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많은 선비들의 지극한 소망을 굽어 살피시사 일을 담당하는 관원(官員)에게 곧 명하셔서 그 표시를 들어 걸게 하시어 유도(儒道)의 요행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또 엎드려 아룁건대 새로 국가의 금지령이 있어서 무릇 새로 사당(祠堂)을 짓고 현판을 청원하는 상소(上疏)는 전하께 받들어 드림을 허락치 않는다 하오나 지금이 사당집의 건립은 거의 100년이 되옵니다 이미 오늘날의 새로 창립한 것이 아니옵고, 본현(本縣)의 밖 다른 데에 사당을 설립한 일이 없사오니, 중복되게 설립한 것도 아니옵니다. 그러하오니, 쾌히 허락의 말씀을 내리시어 특별히 사당집 호(號)의 현판을 하사하셔서, 제사 지내는 사묘(祠廟)를 훤하게 꾸미게 하시오면, 충성스러운 현인(賢人)에게 은덕 갚는 은전이 흠 되는 바 없게 되고, 선비들의 보고 느끼는 뜻에 황송히 여겨 감동되는 바 있을 것이오니, 그 어찌 후세에 길이 칭송하는 말씀이 있지 않으오리이까? 신 등은 연연히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옵고, 삼가 죽을 죄를 범하오며 아뢰나이다.

숙종(肅宗) 34년(1706) 임금님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의 말씀을 내리시었다.
소(疏)를 살펴 다 잘 알았도다.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지금토록 현판을 드리지 못해서 내 어진 임금들의 두터운 은전에 어김이 되었으니, 애석하고 한탄스럽기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 일을 맡은 부처(部處)로 하여금 영을 받아 처사하고 아뢰게 할지니라." 


도천서원 현판 다시 내림의 청원소

경기 경상 전라 3도의 유학 선비들이 올렸는데 일의 첫머리의 사람은 이형복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영남 단성의 도천서원은, 즉 문익점의 영혼을 모신 곳으로 세조대왕 때에 창건하고, 이름을 쓴 현판을 하사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되 봄 가을에 제전을 올리어 폐하지 않았나이다. 그러하온데, 일찍이 임진의 병화를 겪고 나자, 사당의 집채가 무너져 부숴지고 하사받은 현판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었나이다.
만력의 임자년에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전의 터에다 서원의 집채를 다시 짓고, 비록 전의 이름을 따라 도천서원이라 했으나, 다만 옛현판대로의 것을 사사로이 걸기가 어려워, 그만 고을의 사당과 같이 되어진 채여서 관에서 제사 지내는 예가 빠졌사온데, 이는 즉 전쟁을 치른 나머지 일에 겨를이 없었던 탓이었나이다. 앞서 숙종대왕 때의 무자년에, 영남의 유학선비 박항태가 상소하여 현판의 하사를 청원드리니, 즉 임금님께서 대답의 말씀을 하시기를,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지금토록 현판을 드리지 못해서, 내 어진 임금들의 두터운 은전에 어김이 되었으니, 애석하고 한탄스럽기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라 하시고, 곧 예조로 하여금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케 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예조가 우물우물 넘기어 아직까지도 시행을 안 했사옵니다. 
영조대왕께서 말씀 내리 시기를, 우리 나라가 300년 전 이래 의관문물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강성군이 목면을 가져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공이 강성 군보다 큼이 없다. "라 하시고는, 제사 모시고 있는 사원에서 제사 지내게 명하셨고, 전하께서는 조종의 정치를 잘 계승하심에 마음을 쓰시어서, 사당을 수리케 하시는 일이 있었사옵니다. 아, 역대 어진 임금님들의 은공 갚는 은전과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이, 이같이도 지극했고 다 바쳐졌는데도,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현판을 다시 거는 일이 지금 토록 성취가 미루어졌사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나라 안의 현인이 이 제는 한 고을의 어진 사람과 같은 격이 되었고, 옛날에는 관에서 제사 지냈던 것이 이제는 개인의 제사로 떨어지게 되었나이다 
이에 선비들의 한탄이 이미 형언할 수 없사온데, 어찌 국운이 강성한 때의 은전에 흠이 있는 것이 되지 않으오리까? 그리고 또, 엎드려 생각 하옵건대, 우리의 어진 왕조가 충성을 포창하고 절의를 장려하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존중하는 마당에서, 비록 한 가지의 절개나 한 가지의 좋은 행실을 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창 되지 않음이 없이 공경하여 표본 됨을 지니게 했사온데, 하물며 충효 절의 도덕 공과 교화력을 함께 갖추어 그것들이 다 세상에 나타난 사람이야 다시 말할 것 있겠사옵니까?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의 곧은 충성과 돈독한 효도,그리고 깊은 학문과 큰 공은 진실로 백세)의 사표라 이를 수가 있사옵고, 만세에 영원히 힘을 입힌 사람이었나이다.

그 분의 도학을 논하오면 정자 주자의 학문을 본받았고, 그 분의 절의를 말하옵자면 백이, 숙제가 더 훌륭했다고 양보가 안 되오며, 출천의 효행은 증자 민손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사옵고, 사람들에게 이익과 혜택을 끼친 것은, 후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사와 비록 가가호호가 다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또한 그 분의 공을 갚기에는 족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을 표창한 바의 은전은, 오히려 한 가지의 절개를 지키었다든가 한 가지의 좋은 행위를 행한 사람에 대한 것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이 어찌 유도의 불행이 아니겠사옵니까? 대체로 국내의 서원과 고을 사람끼리 제사 지내는 사당은 본시 물론 같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예조의 문서에 그 사원의 이름을 쓴 현판을 하사 받았는가 여부에 따라서 기록한 서원과 고을 사람끼리 제사 지내는 사당인 향사는 아주 명백히 구분되옵니다.
도천서원을 말씀하온다면 특서해서 서원이라 했사오니, 즉 세조대왕께서 현판을 하사하셨음이 또한 분명하옵니다. 아, 도천의 현판은 본시 조정의 명령으로 없앤 것이 아니라 실로 병화의 재가 되었던 것이옵고, 그리고 서원의 집이 다시 지어진 지 거의 200년이 되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어진 임금님의 융성한 은전의 길이 막히고 사사로이 사모하는 뜻을 붙이는 곳이 됨에 불과해서 전 세상 현인의 자취로 하여금 없어져 나타나지 않게 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가 결여되고 행해지지 않음에 신들은 스스로 억울한 마음 간절하므로 이에 널리 의논한 바를 연명해서 우러러 부르짖사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지시고 밝으신 전하께서는 특별히 옛 현판대로 복구 시키시옵고, 곧 제물의 제사로 하여금 옛 의식을 새로이 갖추게 하사 백세토록 선비들의 공의가 불멸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요행이겠나이다.

임금께서 결정해서 말씀하시기를, "아뢴대로 시행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어, 왕가의 은공 갚는 뜻을 보이되, 관으로는 도내의 시종수령으로 정해 맡기어서,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내림을 기다렸다가 곧 제례를 행하게 할 지니라."


도천서원에 현판 내림 제문과 고유문

 

정조 11년 1787년 지제교 한용구(知製敎 韓用龜)가 지어 올렸다

아, 충선공(忠宣公)이여    고려(高麗)의 말엽에 남달리 빼어났도다.
부정(不正)을 거부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가져,
나라의 사직(社種) 지킨 충성 지극도 하였어라.
어진 모친 묘소를 소중히 간수함에   그 효도 되놈들을 감동케 했다.
우리에게 목화의 씨앗 가져다 주어,   퍼뜨려 잘도 심게 했도다.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무명옷 입게 해서,
그 공적은 황제비 서능(黃帝妃 西陵)의 공적과도 같았네.
역대 임금 그 공로를 포상하시고, 제사 드려 모시었도다.
임진년(1592)에 난리 만나  묘사(廟會)가 허물어지고 말았었다.
새로이 옛 모습으로 수선을 했으나, 아직 현판은 다시 걸지 못했네.
선비들이 주장하는 여론에,  내 마음에 깊이 감격했도다.
예를 갖추어 은덕(恩德)을 갚음에, 이전의 의식을 따라 하는도다.
관원을 시켜 제사를 드림에,  맑은 술 살찐 짐승 바칩니다.
어리석고 둔하지 않는 사람의 위안 드림이니,  부디 흠향하소서





후학 이 형복(李亨復) 지음  -고유문(告由文)은 신명(神明)에게 고하는 글

하늘이 우리 나라 돌아보셔 덕 두텁게도 선생을 낳아 주셨다.
도의(道義)를 실천하시고 문장(文章)이야 여사(餘事)로 하셨네.
그 옛날 원나라에 사절로 가심에,    원제(元帝)는 공민왕을 폐하려 했었다.
선생은 황제의 명 거역하여 굴복치 않으시고, 죽이려는 칼날을 무시하셨도다.
패옥(俱玉)은 남방 거치른 땅에 울었으되, 절개 지키기를 3년,
중국 조정 살려서 돌려 보내니, 귀신이 보호하고 신이 돌봤음이로다.
붓대 속에 넣어 가져온 면화씨, 우리의 전역에 퍼졌지요.
백성이 다 그 이익을 입고, 나라는 그 공로에 힘 입 었도다.
어버이 섬기심에 효도 지극하셨으니, 그거야 천성에 근본했던 것이로세.
왜놈의 난동 무릅쓰고 묘를 지키심에 도적떼 또한 감복하고 존경하였네,
효도로는 증자(曾子) 민손(閔損 공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한 두 사람)과 견줘지고 
그 공은 후직의 공과 같았어라.
일대의 충효인이셨고, 천고의 절의 인이셨다. 
아, 조선시대 어진 임금 공에 보답하여 포창을 하심에,
부민후(富民候) 내리시고 단성(丹城)에 사당 지으셨네.
임진의 왜란(儀亂) 있어, 사당집 불타 없어졌다 
그 후 다시 지었건만 옛 모습 대로 현판을 걸지 못해서,
제사 지법에 쓸쓸하여, 선비들 의론은 답답하다 할 뿐이었네.
요행히도 선비들 말씀 들어 특별한 은택 갚는 명 내리시니,
도천(道川)의 옛 현판이, 다시 사당문에 걸리도다.
춘추에 드리는 제사는, 백세 후까지도 끊이지 않으리라.


사당(祠堂) 건립 청원소(疏)

직제학(直提學) 양성지 (梁誠之 1415~1482 홍문관대제학, 중추부지사 역임

신(臣)은 성인께서 제사 예법을 제정하셨음을 들었사온데 법이 백성들에게 잘 시행된 까닭은, 그 분을 제사 지내어서 큰 환(患)을 막을 수 있다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옵니다. 
우리 나라에는 오랫동안 목면(木綿)의 씨가 없사온데, 전의 왕조 시대의 문익점(文益漸)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가, 처음으로 그 씨를 입수하여 왔었습니다. 드디어는 온 나라 안에 퍼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귀(貴)하건 천(賤)하건 남자건 여자건 다 무명베 옷을 입사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신라(新羅) 시대로부터 다만 돌을 쏘는 이기(利器)만이 있고, 역대를 통해 화약(火藥)이란 없었는데, 전의 왕조 말기에 최무선(崔茂善)이 비로소 원(元)나라에서 화약의 법을 배워, 우리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 기술을 전해서 지금에 이르러 군진(軍陣)에서 씀에 그 이로움은 말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최무선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해(害)를 없앨 것이옵고, 문익점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들의 이익을 흥성케 할 것이옵니다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입혀졌음이 어찌 적다고 하오리까? 그러하온즉, 두 공(公)의 고향에다 국가 기관에서 사당을 세우고, 봄 가을로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시옵고, 그 분들의 자손을 공신이라 일컬어 죄가 있으면 용서하시어 등용하시옵기를 바랍옵니다

세조 2년에 글을 올려 왕의 재가를 얻었고, 세조 7년에 현판(懸板)을 하사(下賜)했다

 

문익점 묘사(墓祠) 중수기 (重修記)

무자년(1888) 응력 5월 상순(上旬) 후학(後學) 진사(進士) 권재규(權在奎) 삼가 지음

현의 관청 소재지에서 북으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으니, 그 산을 갈로개산(葛麗介山)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묘방(卵方)에서 유방(酉方)을 향하는 언덕은, 곧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의 관구(棺柩)가 묻힌 곳이다. 선생은 고려시대 말엽의 분이었다. 선생의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와 도학(道學)과 대공(大功)은 역사의 글에 씌어져 있고, 또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고 있으니 거듭거듭 들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 이씨조선의 역대 어진 임금들께서 존경하고 높이어 포장을 하시고 벼슬 등을 주었는데, 그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어서 오래 되어질수록 더욱 나타나 고 있으니 아, 훌륭하기도 하다.

삼가 실기를 살펴 보건대, 정종 3년인 경진년에는, 예장(禮葬)하는 비용을 내주라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下賜)하시고 묘사(墓祠)를 지으시며 묘를 지키는 집 4채를 두시고 세금과 부역(賦役)을 면제하시고 땅 2결(二結)을 주셨다. 그리고 남명(南潔) 선생은 묘사기(墓祠記)를 지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불에 타버린 후로는 묘사(墓祠)는 없어져 버려서, 오랫동안 사회(社會)의 원한(怨恨)이 되었다. 그래서 철종 계축년(1853) 봄에 선생의 사손(祀孫)인 병열(秉烈)이, 재현(在賢)과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협력한 끝에 다시 짓는 일을 해내었다. 그 뒤 세월이 오래 되어지자 기등이 틀어지고 기와가 새어 곧 무너지려 하는 지경이 되었음에 정문(族門)의 재각 또한 매 한가지로 그럴까 여겨져 걱정함을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묘(墓)의 밑에 사는 여러 자손들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서로 같이 자주 도모(圖謀)하고 말하기를, '전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잘 간수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손들의 잘못이다. 지금 형편으로는 지붕을 이고 수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종친(宗親)들은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어 다 똑같이 협력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강성군 할아버지를 문묘(文廟)에 모셔 달라고 상소를 올리는 일로 큰 비용이 들게 되는데 재물을 모을 길이 아주 없도다. 그러니 우선 고을에 사는 종중으로부터 계의 재물을 빼내고, 성년남자(成年男子)들에게 부담금을 매겨 거두어서 비용의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로다. " 라고 하였다. 그래서 금년 음력 정월 사당 수리의 일을 시작했다. 묘사(墓祠)를 수리하고 나서 이어 정문의 재각을 수리했는데, 처음에서 끝까지 4개월이나 걸려서 두 곳의 집채가 완연히 일신(一新)되었다. 이 일은 자손들의 정성과 힘으로 되지 않음이 없거니와, 선생께서 끼치신 원대(遠大)한 혜택(惠澤)이 널리 미치고 있음이 나타나게 되었다. 재조(在祥)는 재현(在賢)의 어진 아우님으로서 이일의 전후 자취를 갖추어 내게 내력글을 쓰라고 청하였다. 나는 글을 잘 짓지 못해서 짓기를 감히 담당할 수가 없다고 사양을 했으나 한편 이 고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선생이 남기신 풍도(風度)를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데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뒤에 서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에 분수에 넘는 일을 잊고 대강 쓴다. 


도천서원 중수기 (道川書院 重修記)

순조5년 1801년   월  일 성균생원(成均生員) 유문용(柳波龍) 지음

서원(書院)은 집현산(集賢山)의 서쪽 도천(道川)의 위에 있고, 삼우당 문선생을 모신다.
선생은 고려 말기의 분으로 충성은 중국에 떨쳐 나타났고, 효도는 외국 되놈들을 감탄케 했으며, 도학(道學)은 우리 나라 선비들을 인도했고, 공리(功利)를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끼치 시었다. 역대(歷代) 임금님들의 포창과 벼슬 주심이 이미 계속 잇달아 있고 여러 어진 분들의 찬미 또한 많았으니, 마땅히 백세토록 토셔 제사 올림에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 이 현(添)의 남쪽 배양산(培養山)에는 정문(雄門)의 각(閣)이 있고 그 각 안에는 비가 있는데, 그 비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새겨져 있는 바 이곳이 곧 선생이 사시던 터인 것이다. 사손(祀孫)이 집안의 화를 피하느라 그 곳을 지키지 못하자, 선생의 증손녀이고 참봉(泰奉) 이씨(李氏)의 영부인(令夫人)인 문씨(文氏)가 96세에 도감사(道監司)에게 글을 올려서 신안사(新安祠)를 묘의 옆에 또세웠다. 그리고, 부인의 손자로서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께서 불렀으나 나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이원(李源)이, 아우와 더불어 가만히 부인의 편지글을 가지고 고을 노인들과 상의를 하여서 사당집을 증축하고 제전(祭閨)을 두었는데, 이에 대한 말은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지은 비각기(碑閣記)에 있다. 그 때의 사당집과 제전은 지금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
현재의 도천서원은 즉 유학 선비들이 낸 진정으로 종손이 살던 옛터에 지어진 것이다 서원은 1461 세조7년에 창건되고, 1564,명종9년에 옮겨졌으며, 선조25에 불에 탔고, 1620 광해12에 다시 지었으며, 또 무너지자 현종13 1672에 서쪽 기슭에 옮겨 지었고 정조11 1787년에는 다시 현판을 내리고 제사 지내게 하셨다. 생각건대, 서원(書院)의 서원됨은 오래 가야만 하거늘 오래 되면 상하게 되고 상하면 수리하게 되는 것인데, 선비들의 정성이 한가지로 같지 못하고 부족했었다. 금년에 이르러, 선생(先生)의 후손들이 하나로 마음을 모아 재물을 내어 또 묘와 정문을 수리하고 나서, "선조의 사당을 잘 다스리지 못함은 자손들의 잘못이다. "라 말하고는, 드디어 공인(工人)에게 맡기어 기등을 갈고 지붕을 뜯어 고치었는데, 권시(權翅)와 이한규(李漢圭)가 감독하여 이루게 하고, 박계삼(朴啓三)과 권일전(權一銓)은 빛이 나게 색칠을 했다. 
아, 서원을 존중함은 선생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끼쳐 주신 옷을 고맙게 생각하고 선생의 말씀을 칭송해야만 선생을 존경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이 끝나자, 나 문용(汶龍)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위촉을 하는 것이었다.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기에 분수를 잊고 대강을 서술하여 말하노라.

 

도천서원(道川書院) 사우중수기(祠宇 重修記)

정조 21 (1797) 8월 일  고을 후학 성주인(星州人) 이봉흥(李鳳興) 지음

본 서원(書院)은  강성군 충선공 문 선생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여러 임원(任員)들이 감독을 하여 수리함에 내가 가서 위로를 했다. 여러분이 말하기를, "이 서원은 즉 우리 고을 선대 어른들이 출입하신 곳입니다. 당신의 당숙(堂叔) 어른이 갑자년에 중수(重修)를 하셨고, 당신이 또 경인년에 수리를 했으며, 그 후 작은 수리를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소이다. 그 사실의 상황이 묻혀지고 말까 염려가 되니, 이번 일을 인연 삼아 당신이 한꺼번에 기록을 하시오." 라고 하는 것이다. 
내 이 말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고을 안에서 꼴찌이어서 사람이 못나고 글의 능력이 좋지 못한데, 어찌 감히 글을 지을 수 있겠소? 그러나, 내 평생의 뜻이 현인(賢人)을 존경함에 있고, 또 당신들과 같이 현인을 떠받드는 사람을 또한 내가 존경하는 바요." 라 했다. 
그리고, 끝내는 그 분들의 말을 어길 수가 없어서 이에 분수 넘음을 무릅쓰고, 대강을 서술한다.

선생의 충효(忠孝) 절의(節義) 도학(道學) 큰 공은, 서원의 사적(事跡) 글에 실려 있으니, 이제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역대 어진 임금님이 널리 권장하셨음과 여러 어진 분들이 지은 글을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될수록 더욱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현 임금님(정조)께서 다시 서원 이름의 현판을 내리시고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질서확립에 빛이 나고, 은사(恩賜)한 현판이 번쩍번쩍하기도 하여, 나라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선비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봄과 이 서원을 지킴에 공경하고 삼가함을 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년(近年) 이래, 바람과 비가 계절에 따라 순조롭게 불고 내리지 않아서 많이 헐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을 안의 의논이 일어나 봄의 제사를 계기로 신주(神主)를 강당으로 모시고, 후손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음에 이르러 이 일이 시작되었으니, 특히 선생께서 끼치신 원대한 은택이 넓은 데에 미쳤음이 나타나는도다. 바람을 맞는 추녀와 달빛을 대하는 처마가 새로 단장을 하게 되어 집이 아름답고 훌륭하며, 돌 계단과 기왓장들의 줄이 옛 제도 대로여서, 거북이 엎드린 모양임에 드디어 음력 4월의 초일에 신주를 경건하게 제자리로 도로 모시었다.
아, 옛날에 귀부인이었던 문씨가 선생의 여손(女孫)으로서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사당을 신안(新安)에 세웠고, 이제는 이석관(李錫관) 군이 그 부인 문씨의 후손으로서 또한 이 일에 참여를 했으니, 감응(感應)하는 이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인을 높이 받드는 도(道)가 다만 사당에 모셔 제사 드리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고을의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어버이를 섬김에 선생께서 진심의 효도가 지극했음을 본받고, 임금을 섬김에 충절이 굳었음을 본받으며, 백성들에 대해서는 선생의 크게 감싸준 공을 본받고 도학은 전 해지다가 침체된 것을 다시 일으킨 선생의 수고를 본받아 행하며, 선생의 신주를 모신 방에 들어서 선생의 도를 배운다면, 그 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바가 어찌 이보다 더 좋을 것이 있을손가? 
원컨대, 여러 군자는 각기 힘써 주시라.


충선공 묘정비문 병서


도천서원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우리나라 역사상 여러 선현들이 각 방면에서 후세에 끼친 은택과 영향이 많지만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게 그 은택과 영향을 고루 끼친 인물을 친다면 삼우당 문익점선생을 맨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목화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전파시켜 온 백성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데서 영원히 구제한 공적은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선생이 목화 종자를 가져온 큰 공적 때문에, 그 학덕 충절 효행 등 여타의 뛰어난 점이 도리어 묻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당시 중국에서 막 들어온 성리학을 포은 정몽주선생과 함께 힘써 연구하고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공로가 있는 분이다. 당시는 불교가 성행하여 온 나라가 거기에 물들었고, 유학은 미미하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세였는데 선생 등의 노력으로 유학이 뿌리를 내렸다.
선생은 또 부모상을 당하여 여묘를 하면서 삼년상을 지내 그 효성을 몸소 실천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자주노선을 걸으려는 공민왕을 축출하고 그 앞에서 머나먼 교지로 유배를 당하였다.
조선왕조가 건립된 뒤 높은 관직으로 불렀으나 선생은 고려의 신하로 자처하며 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선생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유학이 크게 힘을 얻어 학문하는 기풍이 일어났고 윤리도덕이 회복되어 예의지국이 되었다. 그래서 사신이 선생을 동방도학지종이라고 칭찬했다.
선생의 공적이 널리 인정되어 세상을 떠난 뒤 조선 태종은 가정대부 참지의정부사 겸 예문관제학 지경연홍문춘추관사를 증직하고 갈충보국 계운순성 좌익택중광리 정량공신 강성군에 봉하고 충선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조묘를 세우도록 명하고 제전 일백결과 노비 70명을 내리고 고려충신지문이라는 정려를 세워주었다.
세종대왕은 다시 대강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하고 부민후에 봉하고 제전을 더 보태주고 친히 제문을 지어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또 자손을 만세토록 녹용하라는 특전을 내렸다.
세조는 사우를 세우도록 제물을 내리고 향사하라고 명했다. 이에 영남 유림들이 도천 위에 사우를 창건하자 세조는 도천사라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사우가 세워진 곳은 선생의 독서 강학하던 터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광해군 임자(1612)년에 이르러 유림에서 도천사를 중건하였고 정조 정미년(1787)에 이르러 다시 도천서원이라 사액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원을 너무 많이 건립하여 자격이 안 되는 인물까지 향사하여 막대한 민폐를 끼치자 나라에서 금령을 내려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도천서원도 억울하게 그 금령에서 면하지 못하여 마침내 고종 신미(1871)훼철당하니 사림이나 후손들의 원통한 심정 어떠 했겠는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신묘(1891)에 사림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묘 아래에 노산정사를 건립하여 향사를 했다. 대한민국 수립후 임진(1952)년에 다시 칠 간의 큰 집을 지었고 사우를 갖추어 도천서원을 복원하였다

선생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 음력 2월8일에 강성현 원당리 배양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으로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삼한벽산공신 남평개국백 휘 다성이 시조다. 그 후손 상서좌복야 휘 익(翼)을 족보상의 1세로 삼는다. 2세 는 지중서문하성사 이부상서 경정공 휘 공유(公裕)이다. 3세 중서시랑 문하평장사 판이부사 충숙공 휘 극겸(克謙)이다. 4세는 태부경 동북면 지병마사 충렬공 휘 후식(候軾)이다. 이 분들은 고려조에서 환력(宦歷)과 훈업(勳業)에 훤혁(烜赫)하였다. 이후 대를 이어 인물이 많이 나와 국사에 찬연하다.
고조는 판도판서 의안공 휘 득준(得俊), 증조는 판도판서 정렬공(靖烈) 휘 극검(克儉), 조부는 문한학사 휘 윤각(允恪), 부친은 보문각제학 충정공 휘 숙선(叔宣)이다. 모친은 함안조씨로 평장사 조진주(趙珍柱)의 따님인데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선생의 휘는 익점 자는 일신(日新), 삼우당은 그의 자호(自號)인데 나라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성인의 학문이 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자신의 도가서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는 뜻을 담았다
12세부터는 대학자 가정 이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가정의 아들 목은 이색선생과 교유를 갖고 학문을 강토하였다.
20세 때 추천으로 국학에 들어가 공부하여 30세 때 과거에 급제했는데 포은선생과 동방급제했다. 그 이후 예문관 직강 태상박사 좌정언 등 직을 역임하였다.
33세 때 좌정언으로서 원나라에 사신 갔는데 원나라 황제는 고려반역자 덕흥군을 고려왕에 추대하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선생을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자 머나먼 교지로 귀양을 보냈다.
36세 때 방면되어 돌아오면서 목화 종자를 비밀리에 가지고 원나라 서울인 대도로 돌아왔다가
37때 고려로 돌아와 목화씨를 전래하였다.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근친하고 의구(장인) 정천익공과 함께 목화를 재배 번식시켜 점차 온 나라에 보급시켰으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산업을 일으킨 원훈(元勳)이라 일컬을 만하다. 다시 성균관 학관에 임명되어 목은 포은 등과 힘을 합쳐 학문을 일으켰다.
38세 때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어 목은 포은 등과 힘을 합쳐 학문을 일으켜 성균관에서 강학을 계속하며 많은 인재를 길렀다.
3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하며 삼년상을 지냈는데 그 당시로서는 선생이외에는 고례를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45세 때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생은 원나라를 배척하다가 좌천되어 청도군사로 나갔다.
46세 때 모친상을 당해서도 여묘하며 삼년상을 지냈다. 왜구들이 침략하였으나 선생이 여막을 떠나지 않고 묘소를 지키니 왜구들도 감동하여 해치지 않았다.
48세 때 탈상을 하였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미한 기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3세 때 나라에서 선생이 사는 마을을 효자리라 하여 정려를 내렸다.
58세 때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동지서연사에 제수되어 병으로 사양하다가 부득이 조정에 나왔는데 이듬해 주준의 탄핵을 받자 초연히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60세 때 다시 좌사의대부 무문관제학 동지연연사에 제수 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해도 되지 않아 조정으로 나왔다. 봉사를 올려 시무를 논하였다. 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설치하여 풍교를 진작시키고 사당을 설치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상례와 제례를 바로잡고 오랑캐 옷을 버리고 명나라의 의제를 따르고 기강을 정돈하여 나라의 체통을 세우고 쓸데없는 벼슬을 줄이고 인재를 등용하고 세금을 줄여 민심을 얻고 의창을 세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수참을 세워서 조운을 편리하게 하라고 건의했다.
62세 때에 조선왕조가 건립되어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았다.
70세 되던 조선 정종 2년 2월8일 고향집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고을 북쪽 갈로개산 묘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조정에서 예장을 치르는데 필요한 물자와 제전을 내려주고 묘사를 건립하여 묘소를 수호할 4호(戶)를 주었다

배위는 팔계주씨로 이부상서 세후의 따님인데 군부인에 봉해졌다. 계배는 진양정씨로 판사 천익의 따님이다.
5남을 두었는데 첫째는 중용으로 헌납을, 둘째는 중성으로 한림학사를, 셋째는 중실로 간의대부를, 넷째는 중진으로 참지문하시중을, 다섯째는 중계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중용의 아들 승로는 현령을 지냈는데, 목화재배와 보급에 공이 많았다. 승손은 좌랑을 지냈다.
중성의 아들 화는 도승지를, 임은 목사를, 빈은 병조참판을 지냈다.
중실의 아들 래는 좌찬성을, 영은 홍문관 직제학을, 종은 시중을 지냈다. 평은 진사에 자는 무과에 급제했다.
중진의 아들 헌은 판관을, 유는 대사성을 영은 병조참의를 지냈다.
중계의 아들 길은 부사직을, 보는 참봉을, 필은 도승지를 지냈다.
이하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문학이 있고, 과학을 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무릇 서원이란 도학이 있는 분을 존숭하여 향사하고, 그 분의 학덕을 모범으로 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 옛날 학교이다. 비록 위대한 공덕이 있고, 문한이 넉넉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도학이 없으면 서원에 향사할 수 없는 법이다. 선생을 향사하는 서원이 전국적으로 일곱 곳에 달한다. 또 성균관 문묘에 선생을 종사하기를 청원한 상소가 전국의 유림들에 의하여 네 차례나 있었다. 이런 것을 볼 때 선생의 도학이 얼마나 뛰어나고 유학을 진흥한 공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목은선생은 “동방 도학의 으뜸이다” 라고 칭송했고, 퇴계선생은 “학문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났다.”라고 했고, 남명선생은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여 우리 동방에는 성인의 유학이 거의 떨치지 못했는데, 공이 홀로 이런 것을 개탄하여 학문에 힘써 후학들이 갈 길을 제시했다” 라고 했고, 우암선생은 “정자와 주자가 서거하고 나서 우리 동방에서는 문성공 안유와 충선공 문익점 두 선현이 능히 그 학통을 이어받아 우리의 유교가 다시 찬란하게 밝았다. 이 두 선현이 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더러운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문공 같은 분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문공과 같은 분이 없으며, 그 이후에도 문공과 같은 분이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정조는 “바른 학문을 일으켜 밝혔고 평소 실천하는 것이 강직하고 확실했다”라고 했고, 강한 황경원공은 “의리는 군신의 윤리를 바로잡을 수 있고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참된 도리를 구명할 수 있도다”라고 했다. 여러 선현이나 국왕의 칭송하는 글이 이러하니, 선생이 어찌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유학자이며, 백세의 스승이 아니겠는가?
본래 문학에도 뛰어나 지은 글이 많았을 것이나, 오랜 세월에 거의 다 없어졌다. 몇몇 남은 글과 관계문건을 모아 ‘삼우당실기’라 이름 붙여 간행했는데, 다시 자료를 수집하여 문집을 편찬 중이다.

지금 도천서원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옛 법도대로 향사를 드리고 있어 전국적으로도 저명한 서원의 반열에 들어 있다. 그러나 삼우당 선생의 학덕과 공적 충절 효행과 서원의 연혁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묘정비가 없어 아쉬웠다. 이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종회장 전교 용호 사문이 종원들을 창솔하여 수비를 위해 정성을 다하던 중에 선생의 21대손 인주씨가 갸륵한 효침을 발휘하여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독담하여 거룩한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게 하였다. 돌이 다 준비되자 원임 유집과 용호 두 사문이 문적을 갖추어 불녕을 방문하여 청문을 하였다. 불녕이 평소에 선생의 학덕과 공적을 알고 있고, 또 원임들이 준비해온 문적을 참고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끝에 명을 붙인다.

나라가 어려울 때 구제할 인물나니
고려말 혼란기에 선생이 탄강했네
포은과 성력합쳐 도학을 일으켰고
삼년상 실천하여 예법을 바로했네

충절은 선비바탕 불의에 타협않아
교지에 유배되도 기개가 준엄했네
석방돼 돌아올제 백성들 생각하여
목화씨 가져와서 온백성 입혔다네

학생과 공적으로 큰은덕 끼쳤기에
나랏님 표층에다 선학들 칭송이라
일곱곳 서원중에 도천이 주원이라
탄성지 신후지지 영령이 척강하리

학덕과 공적새긴 묘정비 우뚝하니
선생의 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됐네
서원을 찾는이들 이 비문 읽어보오
천추에 불후하리 나라의 큰 스승은

계사년(2013) 입추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인근 유적지

신도비각

경남 문화재 자료 제 53호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1847년 강화도 수중석을 채석하여 천리길을 운석하는데 각고을 성주(현 군수)는 관할경계까지 운반을 협조하여  3년여에 현지(신안리 527)에 도착하여 순조34년(1834)에 비가 서고 고종8년(1871)에 후손들이 힘을 모아 비각을 세웠으나 실화로 소실됨.
1940년 자손들의 협조와 경남 도비 보조로 현 장소로 비를 옮기고 비각을 지었다.
일제때는 경상남도에서 삼우당선생 목면의 공을 길이 빛내기 위해서 면화기념비를 비각 좌측에 건립하고  매년 면화감사제를 거행하여 왔으나 해방후 왜색일소로 땅에 묻혀 있었으나 1979년에 후손들에 의해 재건립 되었다.

문익점 묘소

서원에서 오른쪽 산으로 300m 거리
석등은 도난 당했다가 다시 찾아 설치했다
비석은 익점공과 팔계주씨만 기록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익점공과 팔계주씨 진양정씨의 합분이라고 적었다(족보는 뒤에 제작됨)

목화시배지

사적108호 서원에서 약 4km 정도 거리이며 시배지 및 전시장이 있슴 
경내에 효자비각과 부민각이 있슴
☜ 문씨사적 - 산청목면시배유지 참조

생가&은행목

목화시배지에서 서쪽으로 500m. 건물은 무너지고 2007년 5월14일 생가유지의 비석세움.
생가에 익점공께서 손수 심은 은행나무로  2007년 행단기를 적은 비석을 세웠다
☜ 문씨사적 - 문익점 생가터와 은행나무 참조


도천서원 사진영상

사진보기 연결표(아래 항목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도천서원 영상

현판과주련

2019년 향사

2018년 향사

2017년 향사

2016년 향사

묘정비제막식

2006년 행사

2002년 행사

 

 

 



도천서원 소개 영상 - 붉은 색 ▶ 클릭하세요




홍살문과 서원

서원전경

서원내부

서원강당

서원강당

서원입구의 신도비각

서원 원경

동재

신안사재


현판과 주련







도천서원 편액



2014년 충선공 묘정비 제막식

  

 

2006년 행사사진

2006년 춘계 향사

   
   

2006년 축문

유림 참례자들의 접대


2006년 충선공파 정기총회

영훈회장 인사

   

2006년 충선공 묘제

진설

준비

집사
집례

삼헌관

초헌례

   
   
 
 

2002년 행사사진

2002년 추계향사

일가들과 담소

충선공묘소에서 묘제

묘제후의식사


2002년 충선공파종회 총회사진

회장인사

일가들의 소개

목련꽃  그늘에서   총회를 열고


2002년 충선공파종회 묘제사진

2002년 묘제

2002년 묘제헌관



노산매(산청의 매화) 인터넷에서 퍼온글

1 노산매(蘆山梅)

문익점의 민초 사랑 기리며아침 일찍 서울을 떠났습니다. 산청은 더 이상 첩첩산중 '오지'가 아닙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타니 네 시간 만에 산청 땅을 밟았습니다. 휴게소에서 국밥 한 그릇을 만 시간을 빼면 그보다 짧은 거리죠.먼저 찾은 매화는 '노산매'입니다. 바로 앞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시는 도천서원이 있습니다. 고려 말 중국에서 몰래 목화씨를 들여왔던 분이죠. 그 목화씨를 뿌린 시배지가 이곳 산청에 있습니다. 150년가량 묵은 노산매는 민초를 아끼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삼베 한 장만 달랑 걸쳤다고 하네요. 그것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 얘기였죠. 가난한 민초는 칡넝쿨 껍질을 벗겨서 얼기설기 엮은 '갈포'를 입었답니다. 찬 바람이 뼛속까지 숭숭 들어오는 마대와 같은 옷이었죠. 600~670년 전, 겨울은 훨씬 혹독했겠죠. 바깥 출입 자체가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목화로 만든 무명옷이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요즘으로 따지자면 '오리털 파카'인 셈이었죠.그래서 노산매는 더욱 애틋합니다. 발걸음을 옮겨 곁으로 갔습니다. 기품있는 매향이 코를 적십니다. 여기서 150m가량 떨어진 문익점 선생의 묘소까지 노산매의 향기가 흘러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관광용 안내자료에 담긴 노산매와 생김새가 다르네요. 한쪽으로 축 늘어진 아름다운 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천서원 곁에 사는 관리인 박민동(45)씨를 찾았습니다. "며칠 전, 외출한 사이에 누가 와서 가지를 쳐버렸지예. 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가지치기를 해버린 거라예." 뿌리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가지까지 잘려 있었죠. 자세히 보니 노산매는 밑동도 썩기 시작했더군요. 빨리 손을 써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산청군 차원의 보살핌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노산매

밭둑에 방치된 노산매의 보호 시급함 잘려나간 가지들

2 정당매(政堂梅 ; 조선왕조 흥망 함께한 고목)

통일 신라 시대, 산청에는 '단속사'란 큰 절이 있었죠. 절을 한 바퀴 돌고나면 짚신이 다 해질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또 절 안에 있었던 불상 수만 500개, 모두 생김새가 달랐다니 참 대단하죠. '산청 3매'의 하나로 꼽히는 정당매는 바로 이 단속사 터(단성면 운리 탑동)에 있습니다. 절은 이미 불탔고, 지금은 1000년 고찰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 570살 먹은 매화가 있습니다. 조선 초 대사헌까지 지낸 강희안(1419~64)이 직접 심은 매화라고 합니다.예사롭진 않네요. 조선 왕조의 세월만큼 나이를 먹은 매화죠. 매화를 심을 당시, 강희안은 '고시생'이었다고 합니다. 형과 함께 단속사에 들어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네요. 그는 급제를 기원하며 이 매화를 심었을까요? 나중에 의정부의 '정당문학'이란 벼슬에까지 오르자 사람들은 이 매화에 '정당매'란 이름을 붙였습니다.고목에서 핀 꽃은 남다르네요.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합니다. 강희안은 온화한 성품에 말 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했다고 합니다. 매화의 기품과 꼭 닮았습니다. 선비들은 매화를 '지조'의 상징으로 여겼죠. '아무리 가난해도 매화는 일생 동안 향기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梅花一生寒不賣香)는 옛말도 있습니다. 세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었죠. 옛말처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매향을 팔지 않았습니다. 산청의 매화 가운데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딱 한 그루, '정당매' 뿐입니다. 그나마 관리를 받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매화 둘레에 친 쇠사슬 울타리는 '옥에 티'입니다. 산채비빔밥에 생선이 들어간 기분입니다. 찜찜하네요. 앞에 선 표석도 너무 높아 매화를 가립니다. 표석이 주인인지, 매화가 주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산청선비<청향당 이원>

우리 나라 목화 시배지로 널리 알려진 단성 배양(培養)마을. [培養]이란 마을 이름이 바로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이 면화를 처음 심어 길렀다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마을 입구에는 문익점 선생을 기리는 사적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원래 상주(尙州) 주씨(周氏)와 남평(南平) 문씨(文氏)들이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은 고려 때는 사동(巳洞) 즉 [뱀마을]이라 불렀는데,
면화가 처음 재배되었던 곳이라 하여 지명을 [배양]으로 고쳤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500Μ쯤 들어가면 배산서당(培山書堂)이 있다. 이 서당은 청향당(淸香堂)의 후손인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1870-1940)이 세웠는데, 진암은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말 유학자로 전통 유학을 고수하기보다는 개혁을 통해 유교를 종교화시키고자 했던 사람이다. 1914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 개혁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강유위(康有爲)를 만나 그의 사상을 전수 받았다. 그리하여 1923년 이곳 배양에 배산서당을 세우고 문묘(文廟)를 만들어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공자 상을 그려 와서 봉안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 서당은 우리 나라 최초의 [공자교회]라고 할 수 있다.
문묘 바로 밑에 도동사(道東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여기에 청향당을 남명 퇴계와 나란히 모셔 놓고 있다. 청향당과 남명, 퇴계와는 동갑이며 평소 친근하게 지냈기 때문에 함께 모신 것이다.  
청향당은 1501년(연산7) 10월 10일 참봉 승문(承文)과 이씨(李氏)사이에서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난 배양은 상주 주씨와 남평 문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인데, 단성 소이곡(所耳谷)에 살다 참봉공때 배양으로 이주하였다.
청향당 조부 부호군(副護軍) 계통(季通)이 남평문씨 집안으로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바로 문익점 선생 손자 승노(承魯)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청향당의 할머니는 문익점 선생의 증손녀가 된다.
참봉공이 배양에 오게 된 것은 당시 문씨 집안에 변고가 있어 문씨들이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참봉공은 어머니 문씨의 명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외선조(外先祖) 문익점선생의 묘역및 비각을 지키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50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난 선생은 6세때 책을 읽었으며, 8세때는 소학을 배웠다. 이때부터 20세전까지 침식을 잊어 가며 사서를 비롯한 경전을 읽어 그 뜻을 체득하고자 노력하였다.
20세때 의령(宜寧)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퇴계 이황과 처가가 같은 동네이다.
1년후 퇴계가 의령 가례촌 허씨 집안으로 장가들 때 선생이 찾아가서 만났는데 이로부터 두사람은 평생을 돈독한 우의로써 지내게 되었다. 23세때는 함께 서쪽 지방으로 유람 가서 당대 석학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만나기도 하였다. 26세때는 퇴계가 의령 처가에 들렀다가 배양으로 선생을 찾아와 밤새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남명과도 동갑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남명이 청향당 시에 화답하면서 {네 가지가 같아 응당 새로 안 사람과 달라/나를 일찍이 종자기에 견주었지}라고 하였다. 여기서 4가지가 같다는 말은, 남명과 청향당이 같은 해(1501) 같은 경상도 땅에서 태어나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종자기(鍾子期)에 견주었다는 말은, 옛날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이를 듣기를 좋아했는데, 종자기가 죽은 후 백아가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백아와 종자기 같이 서로 알아주는 진실한 벗이라는 뜻이다.
29세때 의령 자굴산 명경대(明鏡臺)로 남명을 찾아갔다. 이때 남명은 명경대 근처 산사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찾아가 경전의 뜻을 토론하였다. 30세 되던 해 4월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을 찾아갔다. 이때 같이 모인 사람들은 대곡(大谷) 성운(成運)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등이었는데 당대 촉망받는 선비들이었다. [남명선생연보]에 의하면 {이 해에 대곡이 서울에서 찾아왔는데 송계 청향 황강 및 여러 선비가 함께 모여 여러날 동안 강독을 하고 토론하니 당시 사람들이 德星이 모였다고 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모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세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해 벼슬에 뜻을 버리고 [淸香精舍]를 지어 청빈하게 숨어살면서 선비로서의 그윽한 아치를 간직하며 살고자 했다. 평생 학문을 탐구하며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해 3월에 남명이 찾아와 [淸香精舍 八詠]이란 시를 지어 정사의 경치와 선생의 안빈낙도하는 삶을 읊기도 하였다.
남명은 청향정사에 올라 7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읊고 마지막 한 수에 정사의 주인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잊혀지지 않을 것을 말하였다. 이때 지은 7가지 풍광은 竹風(대밭에 부는 바람) 松月(소나무에 비친달) 琴韻(거문고 소리) 雪梅(눈속의 매화) 霜菊(서리속의 국화) 盆蓮(화분에 심은 연꽃) 經傳 등인데 하나같이 단아한 선비가 가까이 두고 완상하는 것들이다. 선생은 정사에 서서 이들을 벗삼아 평생을 보냈으니 그 단아함이란 후학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39세때 부모를 여의고 상을 치를 때 예로써 극진히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고 42세때 경주에 가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만났다.
46세때 조정에서 곤양훈도(昆陽訓導)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8세때 청향정사옆에 구사재(九思齋)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때 구사재의 편액은 공자의 말씀에서 따온 것인데,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가지 생각이란 뜻이다. 사물을 볼 때 밝은 것을 생각하며, 어떤 것을 들을 때는 총명한 것을 생각하며, 얼굴색은 온화한 것을 생각하며, 외모는 공손한 것을 생각하며, 말을 할 때는 충직한 것을 생각하며, 일을 할 때는 공경을 생각하며,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 성이 나거든 성낸 후 뒷감당 어려움을 생각하며, 이로운 것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의 학문은 9가지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조카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가 지은 언행록에 의하면 선생은 유독 [敬]을 중요하게 여겨 성인의 학문을 함에 있어 철두철미하게 시종일관 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3세때는 구사재로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57세때 뇌룡정으로 남명을 방문하여 성리 등에 관해 질정을 하였다. 64세때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효행으로 조정에서 상을 내렸으며 69세때는 함양훈도(咸陽訓導)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568년 9월 16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1588년 지역 유림 일신당(日新堂) 이천경(李天慶) 송암(松巖) 이노(李魯)등이 선생을 위해 신안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아 이듬해 신안서원(新安書院)을 완공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후 전쟁으로 신안서원이 불타 없어지자 1702년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선생을 모셨는데 이 서원은 원래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서원이었다. 1787년 조정에서 도천서원에 사액이 내려 선생을 배향할 수 없자 이듬해 배산에 덕연사(德淵祠)를 지어 1791년에 봉향하였다. 이후 사당이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진암 이병헌이 배산서당을 세워 선생을 모셨다.
지금 배양마을의 합천이씨들은 배양서당을 중심으로하여 자손들에게 선조의 유덕을 착실히 전수하고 있다. 기자는 500여년을 이어온 전통의 맥이 사라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져 감을 볼 때 흐뭇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1996.8.16.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