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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道川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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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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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근사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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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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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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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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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7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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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향선조 |
10세 삼우당 충선공 문익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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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일 |
묘제 : 4월5일 10:00 향사일 : 음력 9월 1일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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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연도 |
1461년(세조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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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연도 |
1787년(정조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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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 |
신안사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1983.08.24지정) |
![]() ![]() 도천서원 전경 ![]() 삼우사- 삼우당 위패 봉안소 ![]() 도천서원- 강당 ![]() 신안사재-경남문화재 23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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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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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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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1년(1401)- 유림이 문익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해 묘소옆에 건립 서원 경내에 있는 신안사재(新安思齊 )는 경남문화재 237호로 향사(享祠) 때 제관(祭官)들이 숙소로 쓰던 건물로 명종(明宗) 6년(1551)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순조(純祖)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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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6년 1561묘사(墓祠) 재건축.
당시, 종손(宗孫) 광서(光瑞)는 후사(後祀)가 없어, 멀리 사는
여러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다시 세우고, 남명(南淚) 조식(曺植)이 고시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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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정사 (蘆山精舍)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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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음력 정월 일 전주인(全州人) 이교하(李敎夏) 삼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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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는 신라 고려
때로부터 이씨조선에 이르도록 모든 유명하고 어진
분에게 은덕을 갚음에는, 도학(道學) 충효(忠孝) 훈공을
가지고 각기 계제에 따라 사당(祠堂)에 모시고 서원에
모시었으되 구별에 아무런 한계선이 없었다. 그러나 세
가지의 큰 업적을 함께 갖춤으로써 제사를 받은 분을
말할 것 같으면, 오직 우리의 삼우당(三憂堂)
문선생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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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정사 창설기 (蘆山精舍 創設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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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음력 3월 16일 후학 안동 권상적(權相迪)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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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삼우선생(三憂先生)에 대한 사모심을 붙일 곳을 가졌다. 정사(精舍)를 창건하였는데, 즉 이 땅에 집짓되 선생이 살으셨던 옛땅이고 선생의 신(神)이 머물러 계셨던 땅을 다시 다듬은 곳으로 이곳의 이름은 노산(蘆山)이다. 그러므로 노산정사(蘆山精舍)라 했다. 이 노산정사의 자초지종은 흥망의 깊은 도리(道理)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아, 우리 선생은 우리나라의 올바른 학문의 종(宗)에다 경하여 만세에 전할 특별한 공훈까지를 지니시었다. 생각건대 도천서원(道川書院) 또한 마땅히 다른 훈공(勳功)이 있는 분을 모시는 사원과 같이 영구히 전하게 함이 타당한 바였다. 그런데 결국 근년(近年)에 철폐하는 서원에 끼게 된 것은 즉 먼 시골 사람들의 천박한 정을 임금님에게 달(達)하게 할 틈을 갖지 못했으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천서원을 헐어 버린 뒤 쓸 수 있는 것을 주워 모아 향교의 터 밑에다 약간의 서까래를 얹어 얽어매어서 그저 임시로 흥학재(興學齋)라는 명칭을 붙였다. 10여 년이 지나서 이곳에다 옮겨 놓고 선생의 묘각(墓閣)과 서로 바꾸어 새롭게 해서, 지금은 사재(思齋)와 한 곳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생각하건대, 선생에게 전에 제사 모시었던 일곱 사원들을 다시 세움은 기약이 없고, 선생을 문묘(文廟)에 모실 것을 청원(請願)한 일이 여러 차례였음에도 임금님의 허락하시는 답(答)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방(南方)의 많은 선비들이 탄식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고을 원님인 유(柳)사또에게 도 지킴을
고하여 협의했으니 그 모양 그대로 산수(山水)의 경치가
우리 선비들이 영원히 의지하여 따르는 바가 되겠도다.
거기다가, 이 지방의 승경(勝景)이 산은 대성산(大聖山)을
근원으로 하여 뻗어났고, 강으로는 신안강(新安江)이
베개처럼 흘러 기이하고도 우연스러우니, 이는 또한
남방(南方)의 한 기록할 곳이다. 삼우당(三憂堂)의 도학과 은혜스러운 공에 대해서 라면, 국사 및 유학자 사회의 글에 빛나게 펴져 있으므로 후학이 감히 찬미하는 한 마디를 할 것이 아니지만, 이제 나는 동지 성주(星州) 이도영(李道韺)과 외람되게 이 일에 참여했고, 그리고 후손 문재록(文在祿) 및 정하(正夏) 등의 여러 사람이 또한 같이 의논하여 힘을 썼기에 드디어 이 글을 짓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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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년(1871)에 수많은 서원(書院) 중에서 47개소만 존속시키고, 나머지를 철폐시 도천서원도 철폐되어, 고종 28년(1891)에, 그 대신 노산정사(蘆山精會)가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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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정사(蘆山精舍) 창설 후기(創說後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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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음력 2월 상순 후학(後學) 성주인(星州人) 이도영(李道영) 삼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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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이
처음으로 면(綿)을 심는 것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게 한 공은 후직과 짝이 될 수 있다고 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백세토록 잊지
않음은 마땅한 일이다. 선생에게는 더욱 큰 공이 있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 복장이 선생이 아니었으면,
바꿀 수 없었던 것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되놈식
복제를 중화식(中華式) 복장으로 변경하게 한 것 또한
선생의 덕택이다. 그런데도, 선생을 논(論)하는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옷을 입혀 준 공을 말하고, 학문과 충효에 있어서나 유학을 위함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시고 세상의 풍습(風習)이 잘 되게 도와 우리 이씨조선 오백 년 간의 문명적 정치를 열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어둡기도한데, 이는 역시 선생을 알음이 얕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 후직은 순임금의 신하 다섯 사람 중의 하나로 성인의 짝이 될 수 있는데도 시경(詩經) 서경(書經)에 말해져 있음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먹인 공(功)에 대해서만 찬양하고 감탄하였다 선생이 우리들에게 옷 입힌 공은, 다만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춥지 않게 했을 뿐에 그치지 않고, 실로 되놈의 풍속을 고치게 할 바탕이 되셨으니 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로다. 강성(江城)은 선생께서 태어나신 고향이다. 서원을 도천(道川)에 세워 고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려 높이 받들고, 조정에서는 현판을 내리시어 표창을 하셨는데, 이제는 제사를 폐(廢)하고 서원은 빈터만 있게 되었다. 고을의 선비들은 사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지자, 노산(蘆山)의 기슭에 자리를 잡아 수간의 정사(精舍)를 짓고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제사 지내는 의식을 대체로 모방했다. 노산은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정사 건립에 대한 사실은 기록 중에 자세히 말해 있다. 벗 권상적(權相迪)이 실질적으로 이 일을 주관했고, 죽은 내 아들 회근(晦根)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거들었다. 이런 고로, 고을 사람들이 내게 한 마디 말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둬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없는 것과도 같이 병고(病苦)를 오래 겪고 있는 처지인데 차마 말을 하랴. 그러나 고을 사람들의 부탁을 거듭 어기었고, 또 세상이 천했던 사람들이 교만을 부리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선생한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벌벌 떨어 몸을 가누지 못할 것 같은지라 아픔을 참고 분수에 넘는 것을 잊고서 감히 한 마디 말을 하여 이 곳에 와 놀고 쉬는 이들에게 고(告)하노라, 원컨대, 제군(諸君)은 충효로 근본을 세우고 학문을 하여 일을 하신 바를 잊지 말라. 그러면 곧 좋지 않으리오. 정말 좋지 않으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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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 건원기 (丹城建院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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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 영조42년 월 일 고을의 후학(後學) 박사휘(朴思微)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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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祠院)을 세운 해와 그 본래의 자리는 세대가 오래 되고, 여러 번 병화(兵火)를 거쳤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옛 노인이 전한 바로는 정덕(正德) 연간에 이 현(縣)에는 벽계서원(碧溪書院)이 있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선생의 후손 문희석(文熙碩)이 기록한 것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선생의 서원은 함양(咸陽)의 벽계(碧溪)에 있었고, 또 문윤명(文允明)이 임금님께 올린 글 중에 선생의 행장(行狀)이 함양 벽계서원(碧溪書院)에 있다고 한 것을 고찰한다면, 그 말이 과연 유전(流傳)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함양의 산수(山水)를 고찰하되 벽계라 이름 불리는 것이 없으니, 다만 함양군의 행정구역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즉 본현(本黑)이 옛날 함양군에 속했기에 그리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현(本燃)에는 벽계산(碧溪山)이 있고 또 본현은 고금(古今)으로 나타나게 뛰어난 현인(賢人)이 없었던 터에 단지 선생이 태어나 크셨으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사원(祠院)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서원이 본현 벽계에 있었던 것 같지만, 자세한 근거가 없어서 이제 감히 바로 지적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선생은 큰 현인(賢人)으로 여러 어진 임금의 학문을 존중하는 세대(世代)를 거쳤는데, 유독 서원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치 못한 것만 같다. 그러나 옛날에는 비록 아는 이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와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글로 증명할 수가 없어서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1564년에, 고을 선비가 글을 올려 도천(道川)의 위에다 중건(重建)했는데, 임진왜란에 잿더미가 되어 헐어 졌었다. 난리가 끝난 후 광해12년에,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다 같이 지방장관에게 호소를 하고, 도내(道內)의 선비들이 꾀함이 없이도 서로 같이하여 옛터에다 또 다시 지었는데, 그 자리는 지금 있는 원(院)의 터의 동편 산기슭이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경사져서 원(院)이 오래도록 온전하게 서 있기 어려을 것 같았다. 그래서, 1672년에, 지금 서 있는 원(院)의 곳으로 옮겨 지었던 것이다. 원(院)이 세워져 지나온 역사는 옛 기록이 불에 타 없어져 있지 않아, 다만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올린 글에 기록된 바에 따라, 가정 연간 이후의 해와 그 터를 자세히 밝힌 바를 붙여 기재(記載)하고, 이 뒤에 옛일에 널리 아는 군자(君子)가 나오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할 따름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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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18, 1818년 7월 일 생원(生員) 오우상(吳弱羽)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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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재는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의 강당이다. 서원은 고려조(高麗朝)의 학자 충선공(忠宣公) 문 선생(文先生)을 위해서 설립된 것이다. 우리 나라는 바다 밖 너머에 있어 단군(檀君)의 태고시(太古時)에는, 백성들이 일정한 장소에 살지 않았고, 농잠(農蠶)과 정전법(井田法)은 기자(雲子) 때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기자는 즉 중국인(中國人)으로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당시에, 상례(喪禮)가 무너져서 사대부가 모두 상을 당한 지 100일에 복을 벗었는데, 공(公)만은 흘로 묘지키기를 3년을 하며, 슬퍼하는 예(禮)를 다 갖추어 세속을 따라·그 천성(天性)을 바꾸지 않으셨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하고 계실 때, 바다 도적들이 미쳐 날뛰고, 선비나 여인들이 뿔뿔이 달아났으나, 공만은 홀로 상복을 입고 묘 앞에 무릎 꿇고 앉으셔서, 소리내어 울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시니, 도적들이 서로 바라다보며 감탄하고는 묘의 옆 나무에다 명백하게 쓰기를,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다시 경내에 들어가지 않고, 전현(全縣)이 온전하게 되었는데, 이가 곧 어버이 모시는 정성이었다. 전조 즉 고려조는 선생의 그 행위를 가상히 여겨 효자리(孝子里)라는 효자비를 세됐다. 우리 이씨조선은 선생의 절개를 높이어 충신의 정문을 세우고 포장하시니, 전해지는 명성이 빛났다. 역대의 임금님 때에 더욱 포장하였는데 공이 전한 면(綿)의 옷을 입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느끼게 하였다. 공은 또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지켜야 할 큰 윤리(倫理)를 밝힘이 있었으니,공이 이 나라 백성들에게 끼친 것이 크지 않은가? 공의 학문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요망함에 머리 訃은 중에 의해서 정치와 사회가 흐리고 어지러워지자, 탑(塔)과 절이 구름을 가리고 부처를 찬미하는 불가(佛家)의 노래가 하늘 닿도록 요란하였다. 이에 6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경,낙경,춘추)은 소홀히 여겨져 유행(流行)되지 않고 윤리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땅에 떨어져 행해지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이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이 우리 나라로 전해 온 것을 보고도 거기에 무슨 말이 씌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포은(圖隱)정몽주(鄭夢周) 반남(潘南) 박상충등의 여러 어진 분들과 같이 유학(儒學)을 강(講)하는 벼슬에 선출되었는데, 드디어는 성리학(性理學)에 깊이 들어 미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깊이 터득하여서, 분연(奮然)히 침체되고 있는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고 이단(異端)을 배격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다. 그래서, 상소하여 먼저 학교를 건설하고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시며, 되놈의 복제(服制)를 고치고 의창(義倉)을 두어야 한다는 의론(議論)을 펴고 주장하섰는데, 이것들은 다 후세의 법도가 되었다. 고려(高麗)는 큰 나라였음에, 진실로 마땅히 정직하고 훌륭하기 가 세상에 나기 드문 신하가 있어서, 왕실의 빛을 위해서 그 끝맺음을 크게 해야 했다. 공 같은 분은 참으로 기자(淇子)가 세운 나라에 태어나 장성(長成)했음을 부Rm러워 하지 않고, 나가 벼슬을 하고 물러나 집에 거처하는 도(道)와 학술(學術)이 먼저 단단히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들은 그 어짐을 어질게 알아 스스로를 착하게 할 수가 있었고, 일반 민간인들은 그 이익을 이익 삼아 스스로 살 수가 있으니, 옛날에 큰 덕을 잊을 수가 없음이라고 말한 그 큰 덕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리라. 사당(祠堂)은 세조의 신사년5)에 되어졌는데, 그것은 조정의 명(命)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壬辰)의 난리에 불탔으나 광해군(光海君) 경신년( 1620)에 다시 건립했고, 정조의 정미년(1787)에 이르러서, 현판이 다시 내려졌는 바 앞의 시대는 도천(道川)이라 하고, 서 있는 산은 집현산(集賢山)이라 하며, 있는 마을은 오리동(梧里洞)이라 한다. 백세토록 이 사당에 올라 공의 풍도(風度)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곧 또한 산천동학(山川洞壑)에서 구하기를 세상에 나타나는 이름을 돌아 보고 떨치어 일어남일 것이니, 많은 어진 이들이 모이게 되어 아마도 어진 분의 훌륭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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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사재 기 (新安思齋 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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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음력 9월 9일 후학(後學) 성주(星州) 이도복( 李道復)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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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혜제(惠帝) 건문(建文) 2년인 경진년에,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삼우당선생(三憂堂先生) 문공(文公)이 돌아가시니, 우리 이씨조선의 정종대왕께서는 강성현(江城順) 북녘의 신안리(新安里)에 있는 갈로산의 양지에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하시고 묘사(墓祠)를 묘의 밑에다 짓게 하시며, 묘지기의 집을 두시고 세(稅)와 부역(賦役)을 면제케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신사년에는, 임금께서 포장하는 정문을 세워 「고려충신지문(高麗忠臣之門),이라 이름 지으시고 의정부참지사(議政府恭知事)를 추증(追贈)하시며,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고 시호를 내려 충선공(忠宣公)이라 하셨다. 선생은 고려의 끝머리 시기에 군주를 섬기었는데, 그 충성은 되놈나라 조정(朝廷)을 움직이게 했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효도(孝道)는 외국 것들을 감복시키었으며,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만세에 옷을 입게 했고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이단(異端)을 물리치니, 유학(儒學)의 공로 또한 선생에게 미치는 이 없었다. 그래서 역대 임금의 포장과 여러 어진 분들이 찬양해서 서술한 것이 다 이미 갖추어 졌으니,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빛나게 일신(一新)시키었던 것이다" 라고 했다 (이황이 효자비각기에서 말함). 우암(尤菴)이 이르기를,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났음에,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사적의 서문에서) 라고 하였다. 두 선생의 의논은, 간단하면서도 선생에 대해서 다 말한 것이 된다. 묘사(墓祠)에 대해서는 남명(南淚) 조식(曺植) 선생이 그 묘사기를 지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입은 뒤로는 사당이 없어 빈 터만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글이 비록 일부는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백세에 그 내용을 완전히 믿게 할 수가 있으니, 어찌 다시 너절한 말을 할 것이랴? 원근(遠近)의 후손들이 일찍이 그 빈 터를 찾아 한 초당(草堂)을 짓고서, 거기서 1년에 한 번의 제사를 올리었다. 철종 계축년에, 사손(祀孫) 병열(秉烈)이 그의 일가 재현(在賢)과 더불어 서러워하여 탄식하고 말하기를, "이건 우리 선조를 높여 받드는 길이 아니로다. " 라 했다. 그러고는, 곧 여러 일가들과 도모(圖謀)하여 정성을 다해 재물을 모아서, 기와로 갈아 이고 전의 관례를 더 새롭게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차마 폐지 할 수 없고, 차마 황폐(荒廢)하게 할 수가 없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따름이었다. 현 임금님의 신묘년(고종28년 1891)에, 고을 사람들이 여러 칸의 깨끗한 집채를 그 옆에다 짓고, 춘추로 큰 제사를 올리고 학문을 강의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그 집이 좁으므로 고을에서 군자들이 찾아옴을 수용(收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꿔치기를 하여 정사(精舍)의 현판을 앞의 집채에 걸고, 새로 지은 집채의 이름을 신안사재(新安,思齋)라 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선비들이나 문씨들이 다 모여 일이 잘 되도록 보살피기로 했다 사(舍)는 현인을 존경하자는 뜻으로 된 것이고, 재(齋)는 지나간 먼 옛 분의 일을 그리워하자는 뜻으로 되었음에, 현인을 친(親)히 하는 도(道)가 또한 구비(具備)되었도다. 내 흘로 가만히 우암(尤菴) 선생께서 그 전함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라고 말한 바를 생각하는도다. 전해진 것이란 무슨 일인가? 이 신안사재에 올라선 사람이라면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다만 선생의 묘가 있고 선생의 고향이었다는 것만을 생각할까 보냐? 갈로산(葛蘆山)의 추백(楸栢)이 신안 (新安)의 강에 비치어 움직이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로다. 땅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집 이름을 붙이었음에, 거슬러 올라가 주자(朱子)의 전한 것을 터득하고, 선생께서 전해 받았던 것을 강의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후손이나 후학(後學)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으리라. 사손(祀孫)인 택호(宅鎬)가 나더러 선생의 고향 땅의 후생(後生)이라 해서 이 재(齋) 내력을 지으라 청함에, 나는 감히 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서 사양하지 못하는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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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한 경우나 역경이나 간에 충효를 다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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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현판 내림 청원소(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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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34년 1706, 상소 첫머리의 사람은 박항태(朴恒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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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것은 써진 임금님의 거룩한 은전(恩典)이옵고, 어짐을 그리워하고 도(道)를 존중한다는 것은 선비들의 공정한 의논인 것이옵니다. 만일에, 도학(道學)이 출중해서 후인들에게 사표(師表)가 되고, 올바른 행위가 백세(百世)에 모범이 되는데도 신주(神主)를
섬겨 모신 곳에 그 이름의 현판을 걸라는 은혜를 입지 못하면, 그것은 곧 국가가 베푸는 예법의 흠이 되온즉, 선비들이 애석히 여겨 탄식함을 무엇에 비하오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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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34년(1706) 임금님께서 다음과 같은 결정의 말씀을 내리시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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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현판 다시 내림의 청원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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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영남 단성의 도천서원은,
즉 문익점의 영혼을 모신 곳으로 세조대왕 때에 창건하고, 이름을 쓴 현판을 하사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되 봄 가을에 제전을 올리어 폐하지 않았나이다. 그러하온데, 일찍이 임진의 병화를 겪고 나자, 사당의 집채가 무너져 부숴지고 하사받은 현판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었나이다.
그 분의 도학을 논하오면 정자 주자의 학문을 본받았고, 그 분의 절의를 말하옵자면 백이, 숙제가 더
훌륭했다고 양보가 안 되오며, 출천의 효행은 증자 민손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사옵고, 사람들에게 이익과 혜택을 끼친 것은, 후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사와 비록 가가호호가 다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또한 그 분의 공을 갚기에는 족하지 못한 것이옵니다. |
| 임금께서 결정해서 말씀하시기를, "아뢴대로 시행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어, 왕가의 은공 갚는 뜻을 보이되, 관으로는 도내의 시종수령으로 정해 맡기어서,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 내림을 기다렸다가 곧 제례를 행하게 할 지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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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에 현판 내림 제문과 고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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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문 |
정조 11년 1787년 지제교 한용구(知製敎 韓用龜)가 지어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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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충선공(忠宣公)이여 고려(高麗)의 말엽에 남달리
빼어났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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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 문 |
후학 이 형복(李亨復) 지음 -고유문(告由文)은 신명(神明)에게 고하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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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우리 나라 돌아보셔 덕 두텁게도 선생을 낳아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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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臣)은 성인께서 제사 예법을 제정하셨음을 들었사온데 법이 백성들에게 잘 시행된 까닭은, 그 분을 제사 지내어서 큰 환(患)을
막을 수 있다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옵니다. |
| 세조 2년에 글을 올려 왕의 재가를 얻었고, 세조 7년에 현판(懸板)을 하사(下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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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관청 소재지에서 북으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으니, 그 산을 갈로개산(葛麗介山)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묘방(卵方)에서 유방(酉方)을 향하는 언덕은, 곧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의 관구(棺柩)가 묻힌 곳이다. 선생은 고려시대 말엽의 분이었다. 선생의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와 도학(道學)과 대공(大功)은 역사의 글에 씌어져 있고, 또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고 있으니 거듭거듭 들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 이씨조선의 역대 어진 임금들께서 존경하고 높이어 포장을 하시고 벼슬 등을 주었는데, 그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어서 오래 되어질수록 더욱 나타나 고 있으니 아, 훌륭하기도 하다. 삼가 실기를 살펴 보건대, 정종 3년인 경진년에는, 예장(禮葬)하는 비용을 내주라 명하시고 제전(祭田)을 하사(下賜)하시고 묘사(墓祠)를 지으시며 묘를 지키는 집 4채를 두시고 세금과 부역(賦役)을 면제하시고 땅 2결(二結)을 주셨다. 그리고 남명(南潔) 선생은 묘사기(墓祠記)를 지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불에 타버린 후로는 묘사(墓祠)는 없어져 버려서, 오랫동안 사회(社會)의 원한(怨恨)이 되었다. 그래서 철종 계축년(1853) 봄에 선생의 사손(祀孫)인 병열(秉烈)이, 재현(在賢)과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협력한 끝에 다시 짓는 일을 해내었다. 그 뒤 세월이 오래 되어지자 기등이 틀어지고 기와가 새어 곧 무너지려 하는 지경이 되었음에 정문(族門)의 재각 또한 매 한가지로 그럴까 여겨져 걱정함을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묘(墓)의 밑에 사는 여러 자손들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서로 같이 자주 도모(圖謀)하고 말하기를, '전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잘 간수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손들의 잘못이다. 지금 형편으로는 지붕을 이고 수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의 종친(宗親)들은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어 다 똑같이 협력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강성군 할아버지를 문묘(文廟)에 모셔 달라고 상소를 올리는 일로 큰 비용이 들게 되는데 재물을 모을 길이 아주 없도다. 그러니 우선 고을에 사는 종중으로부터 계의 재물을 빼내고, 성년남자(成年男子)들에게 부담금을 매겨 거두어서 비용의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로다. " 라고 하였다. 그래서 금년 음력 정월 사당 수리의 일을 시작했다. 묘사(墓祠)를 수리하고 나서 이어 정문의 재각을 수리했는데, 처음에서 끝까지 4개월이나 걸려서 두 곳의 집채가 완연히 일신(一新)되었다. 이 일은 자손들의 정성과 힘으로 되지 않음이 없거니와, 선생께서 끼치신 원대(遠大)한 혜택(惠澤)이 널리 미치고 있음이 나타나게 되었다. 재조(在祥)는 재현(在賢)의 어진 아우님으로서 이일의 전후 자취를 갖추어 내게 내력글을 쓰라고 청하였다. 나는 글을 잘 짓지 못해서 짓기를 감히 담당할 수가 없다고 사양을 했으나 한편 이 고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선생이 남기신 풍도(風度)를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데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뒤에 서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에 분수에 넘는 일을 잊고 대강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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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 중수기 (道川書院 重修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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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5년 1801년 월 일 성균생원(成均生員) 유문용(柳波龍)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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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은 집현산(集賢山)의
서쪽 도천(道川)의 위에 있고, 삼우당 문선생을 모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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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서원(道川書院) 사우중수기(祠宇 重修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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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1 (1797) 8월 일 고을 후학 성주인(星州人) 이봉흥(李鳳興)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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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원(書院)은
강성군 충선공 문 선생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여러
임원(任員)들이 감독을 하여 수리함에 내가 가서 위로를
했다. 여러분이 말하기를, "이 서원은 즉 우리 고을
선대 어른들이 출입하신 곳입니다. 당신의 당숙(堂叔)
어른이 갑자년에 중수(重修)를 하셨고, 당신이 또
경인년에 수리를 했으며, 그 후 작은 수리를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소이다. 그 사실의 상황이 묻혀지고 말까 염려가
되니, 이번 일을 인연 삼아 당신이 한꺼번에 기록을
하시오." 라고 하는 것이다. 선생의 충효(忠孝) 절의(節義)
도학(道學) 큰 공은, 서원의 사적(事跡) 글에 실려
있으니, 이제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역대 어진
임금님이 널리 권장하셨음과 여러 어진 분들이 지은
글을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될수록 더욱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현 임금님(정조)께서
다시 서원 이름의 현판을 내리시고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질서확립에 빛이 나고, 은사(恩賜)한 현판이
번쩍번쩍하기도 하여, 나라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선비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봄과 이 서원을 지킴에
공경하고 삼가함을 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년(近年)
이래, 바람과 비가 계절에 따라 순조롭게 불고 내리지
않아서 많이 헐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을 안의
의논이 일어나 봄의 제사를 계기로 신주(神主)를
강당으로 모시고, 후손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음에 이르러 이 일이 시작되었으니, 특히 선생께서
끼치신 원대한 은택이 넓은 데에 미쳤음이
나타나는도다. 바람을 맞는 추녀와 달빛을 대하는
처마가 새로 단장을 하게 되어 집이 아름답고 훌륭하며,
돌 계단과 기왓장들의 줄이 옛 제도 대로여서, 거북이
엎드린 모양임에 드디어 음력 4월의 초일에 신주를
경건하게 제자리로 도로 모시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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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여러 선현들이 각 방면에서 후세에 끼친 은택과 영향이 많지만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게 그 은택과 영향을 고루 끼친 인물을
친다면 삼우당 문익점선생을 맨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계사년(2013) 입추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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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유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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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문화재 자료 제 5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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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묘소 |
서원에서 오른쪽 산으로 300m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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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108호 서원에서 약 4km 정도 거리이며 시배지 및 전시장이 있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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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은행목 |
목화시배지에서 서쪽으로 500m. 건물은 무너지고 2007년 5월14일 생가유지의 비석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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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기 연결표(아래 항목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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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과 서원 |
서원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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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내부 |
서원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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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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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입구의 신도비각 |
서원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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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 |
신안사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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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행사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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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춘계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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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축문 |
유림 참례자들의 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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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충선공파 정기총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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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회장 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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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충선공 묘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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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 |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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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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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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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헌관 |
초헌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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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행사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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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추계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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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들과 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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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인사 |
일가들의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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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묘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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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묘제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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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매(산청의 매화) 인터넷에서 퍼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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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의 민초 사랑 기리며아침 일찍 서울을 떠났습니다. 산청은 더 이상 첩첩산중 '오지'가 아닙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타니 네 시간 만에 산청 땅을 밟았습니다. 휴게소에서 국밥 한 그릇을 만 시간을 빼면 그보다 짧은 거리죠.먼저 찾은 매화는 '노산매'입니다. 바로 앞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시는 도천서원이 있습니다. 고려 말 중국에서 몰래 목화씨를 들여왔던 분이죠. 그 목화씨를 뿌린 시배지가 이곳 산청에 있습니다. 150년가량 묵은 노산매는 민초를 아끼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삼베 한 장만 달랑 걸쳤다고 하네요. 그것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 얘기였죠. 가난한 민초는 칡넝쿨 껍질을 벗겨서 얼기설기 엮은 '갈포'를 입었답니다. 찬 바람이 뼛속까지 숭숭 들어오는 마대와 같은 옷이었죠. 600~670년 전, 겨울은 훨씬 혹독했겠죠. 바깥 출입 자체가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목화로 만든 무명옷이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요즘으로 따지자면 '오리털 파카'인 셈이었죠.그래서 노산매는 더욱 애틋합니다. 발걸음을 옮겨 곁으로 갔습니다. 기품있는 매향이 코를 적십니다. 여기서 150m가량 떨어진 문익점 선생의 묘소까지 노산매의 향기가 흘러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관광용 안내자료에 담긴 노산매와 생김새가 다르네요. 한쪽으로 축 늘어진 아름다운 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천서원 곁에 사는 관리인 박민동(45)씨를 찾았습니다. "며칠 전, 외출한 사이에 누가 와서 가지를 쳐버렸지예. 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가지치기를 해버린 거라예." 뿌리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가지까지 잘려 있었죠. 자세히 보니 노산매는 밑동도 썩기 시작했더군요. 빨리 손을 써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산청군 차원의 보살핌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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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매 |
밭둑에 방치된 노산매의 보호 시급함 | 잘려나간 가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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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 산청에는 '단속사'란 큰 절이 있었죠. 절을 한 바퀴 돌고나면 짚신이 다 해질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또 절 안에 있었던 불상 수만 500개, 모두 생김새가 달랐다니 참 대단하죠. '산청 3매'의 하나로 꼽히는 정당매는 바로 이 단속사 터(단성면 운리 탑동)에 있습니다. 절은 이미 불탔고, 지금은 1000년 고찰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 570살 먹은 매화가 있습니다. 조선 초 대사헌까지 지낸 강희안(1419~64)이 직접 심은 매화라고 합니다.예사롭진 않네요. 조선 왕조의 세월만큼 나이를 먹은 매화죠. 매화를 심을 당시, 강희안은 '고시생'이었다고 합니다. 형과 함께 단속사에 들어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네요. 그는 급제를 기원하며 이 매화를 심었을까요? 나중에 의정부의 '정당문학'이란 벼슬에까지 오르자 사람들은 이 매화에 '정당매'란 이름을 붙였습니다.고목에서 핀 꽃은 남다르네요.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합니다. 강희안은 온화한 성품에 말 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했다고 합니다. 매화의 기품과 꼭 닮았습니다. 선비들은 매화를 '지조'의 상징으로 여겼죠. '아무리 가난해도 매화는 일생 동안 향기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梅花一生寒不賣香)는 옛말도 있습니다. 세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었죠. 옛말처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매향을 팔지 않았습니다. 산청의 매화 가운데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딱 한 그루, '정당매' 뿐입니다. 그나마 관리를 받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매화 둘레에 친 쇠사슬 울타리는 '옥에 티'입니다. 산채비빔밥에 생선이 들어간 기분입니다. 찜찜하네요. 앞에 선 표석도 너무 높아 매화를 가립니다. 표석이 주인인지, 매화가 주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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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선비<청향당 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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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목화 시배지로 널리 알려진 단성 배양(培養)마을. [培養]이란 마을 이름이 바로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이 면화를 처음 심어 길렀다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