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 서원

매산서원(梅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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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서원 개요

소재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

배향선조

10세 충선공 문익점,       목은 이색(李穡)

향사일

음력 3월 중정

창건일자

1456년(세조 2)

문화재지정

여주군 향토유적 8호








❏ 연 혁

매산서원은 1456년(세조 2) 양성지(梁誠之)가 문익점의 공로를 들어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함으로써 그의 출생지인 강성현(현 산청)에 창건되었다. 그 후 문익점과 친분이 두터웠던 목은 이색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병자호란 당시 문익점의 후손인 문겸(文謙)이 현재 위치인 여주로 이건하여 제향을 지내오다가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52년에 남평문씨 후손인 문광규가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후 복원하였고, 1978년에 보수가 이루어졌다. 사당은 1987년에 헐고 다시 지은 것이다. 서원에서는 음력 3월과 9월의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외삼문 앞에 홍살문이 있고 외삼문에서 전체경내를 담장으로 싸고 강당은 한식 골기와를 얹고 안에 내삼문이 있다. 경내의 160년 된 향나무는 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05년 9월 2일 14세 승손(承孫) 선조의 비석을 동재 아래에 건립하였다.

❏ 배향인물

1) 주벽-문익점(文益漸, 1331∼1400)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淑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국가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리학(性理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學堂)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이색 선생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신경(新京)에서 베푼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였다. 45세에 중현대부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制敎)가 되고 58세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右文館提學 經筵同知事)에 올랐다.
70세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돌아가시니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22년(144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다.

묘소(경남 산청)에서 4월5일(양) 묘제를, 부조묘(不祧廟 전남 보성)에서 돌아가신 날인 2월7일(음)에 제사를 지내며, 장연서원, 저산서원, 도천서원, 강성서원, 매산서원, 봉강서원, 운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2)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이곡(이李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예문응교(典理正郎 兼 史館編修官 知製敎 兼 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병부낭중(吏部侍郎 翰林直學士兼 史館編修官 知製敎 兼 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 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건축물

매산서원은 능서면 번도리 번머리마을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주변에는 남평문씨 가문들이 소규모 단위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좌향은 약간 남동향을 취하고 있는데, 외삼문은 다른 건물보다 조금 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내삼문, 강당, 동재, 서재, 외삼문, 홍살문 등이 있다.
전체 경내가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큰 마당의 강당은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혔다. 정면은 3칸(9.78m)으로 좌우에 작은 퇴칸 1칸씩을 달았고, 측면은 3칸(6.6m)이다. 그 위 높직한 대지에는 내삼문이 있어 또 하나의 담장을 시설하고 안에 사당을 세워 「매산사」란 사액(祠額)을 달았다.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달고 한식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은 4.4m (1칸)로 좌우에 퇴칸 1칸씩을 붙였고, 측면은 3.6m이다.

** 위의 글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매산서원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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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서원 영상

2018년 향사

2017년 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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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안내판

서원정문

동재

서재

강당

신실입구문

보호수

신실

아래 사진은 2018년 4월 25일 향사 모습입니다




주변 관광지

인근에 여주, 금강, 남녀주, 자유, 한일 등의 골프장이 있고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세종대왕과 효종의 능이 있으며, 이곳에서 20여분 거리인 남한강을 건너면 고찰 신륵사가 있다
남한강에는 황포돛대 유람선이 운행되고 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은혜를 갚은 꿩의 전설로 유명한  원주 치악산 국립공원은 차가 막히지 않으면 30여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