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서원

운산서원(雲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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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향사

 


운산서원 개요

소재지

전남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406

배향선조

10세 문익점(益漸),   12세 문빈(彬),   12세 문래(萊),   13세 문완(琬),    15세 문완(完)

향사일

음력 3월 중정일

창건연도

1722년(경종 2)





❏ 연 혁

1722년(경종2) 창평현 금구동에 건립하였고 1799년(정조23)에 주벽으로 문익점(文益漸)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5)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1933년 현 위치인 대전면 갑향리에 재건하였으며 1972년 재거축하였고, 2002년 일가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자리인 마을입구에 옮겨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 배향인물

1) 주벽-문익점(文益漸, 1331∼1400)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淑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국가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리학(性理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學堂)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이색 선생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신경(新京)에서 베푼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였다. 45세에 중현대부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制敎)가 되고 58세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右文館提學 經筵同知事)에 올랐다.
70세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돌아가시니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22년(144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다.

묘소(경남 산청)에서 4월5일(양) 묘제를, 부조묘(不祧廟 전남 보성)에서 돌아가신 날인 2월7일(음)에 제사를 지내며, 장연서원, 저산서원, 도천서원, 강성서원, 매산서원, 봉강서원, 운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2) 문빈(文彬 1384 - 1413)

순질공 휘 중성(中誠)의 셋째 아들로 문익점의 손자이다.
1400(정종2년) 대장군(大將軍)으로 재직할 때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이방원(李芳遠 : 후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지낸 후 1409년 풍해도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운산서원에 배향되어 3월 중정일에 제사를 모신다.

3) 문래(文萊)

자(字)는 자봉(子蓬), 호(號)는 이곡(理谷), 시호(諡號)는 정혜(靖惠)이다.
의안공 휘 중실(中實)의 장남으로 경사(經史)에 통(通)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산수(算數)·척도(尺度) 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드신 분이다.
1395년(태조 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가 치사(致仕)를 거쳐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大夫)·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4) 문완(文琓)

순질공 휘 중성(中誠)의 손자로 자는 형옥(亨玉), 호는 경암(敬菴)이며 시호는 익정(翊定)이다. 관직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5) 문완(文完)

성숙공 휘 중계(中啓)의 4세손으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 건축물
운산사 입구에는 문씨 오선생실적비가 있고 대문을 지나면 신실인데 운산사란 현판이 있다. 강당과 동제나 서제 등의 건물이 없어 서원의 구조로는 부족함도 있다.

❏ 중요물건 - 운산사 입구에는 문씨오선생 실적비가 있다.

* 위의 글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운산서원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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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2017년 4월 10일 향사 모습임






2003년 향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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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 정면과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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