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선조에 관련한 청원서

사손(祀孫)세움 청원

사손(祀孫)세움 재 청원 

문묘배향 청원

 

사손을 세울 것을 말씀 올리는 글

무신년(戊申年헌종14년 1848) 8월  첫머리의 사람은 문정주(文鼎周)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조의 제사를 지낼 종손(宗孫)을 세울 일을 말씀 아뢰되 그 글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이 해를 보내고 이에 이르렀음에, 억울한 심정을 일일이 다 들 수가 없사옵니다.
신하된 몸들의 전의 일은 과연 분수없이 예의에 거슬리었다든가 망녕되고 경솔한 짓이 아니라,
다만 왕가(王家)에서 명(命)해서 세우신 은전에 의거하고, 또 전의 학자들이 찬양한 기술로 증명을 했고,
그리고  선대로부터 전해 받은 문서에 의거 했음이온데, 일단 폐(廢)해졌다가 다시 한 번 후사를 세우는 사이에도 제사의 예절을 소흘히 함은 용납될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인도상(人道上)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차례로 모시는 일을 어찌 감히 경솔히 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옛날의 어진 임금께서 예법을 마련하심에 얼마나 엄하고 분명히 했사옵니까?

군자의 혜택에 대해서는 5세손까지 제사 지내게 했다가 끊고, 만세토록 불멸(不滅)할 혜택이 있고서야
특별히 만세(萬世)에 변함없는 제전(祭典)을 베풀어 있게 되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해서 그의 공(功)에 보답하고 그 덕을 생각해서 그 은혜를 갚는 것이온데,
자식이 없어 대(代)가 끊어지게 된 집에 양자를 두어 대(代)를 잇게 함은 천만년까지에 게을리 말 것의 경계이니,
나라의 끝과 처음을 같이하게 하는 거룩한 뜻이옵니다.
우리의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워 등극하신 이후 전 왕조의 유명한 현인들에게 보답함에, 부조묘에 신주를 모시게 하라고 명하신 것은 회헌 안유 포은 정몽주 사은 문익점 의  세 현인에 대해서였나이다.
포창하시어 보답하심은 한결같이 우리 왕조의 훈공을 세운 현인들을 대함과 꼭 같았음에,
천리(天理)와 신도(神道)에 있어 반드시 보살피고 도와줌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신하된 몸들의 선세(先世)에 가운(家運)이 좋지 못하와 제사 모시는 종손(宗孫)이 자주 끊어지고
화(禍)의 기운이 거듭 있으며, 일가가 흩어지고 가업을 잃어서 주고 받을 사람이 없사옵니다.
머뭇거리다가 아직껏 제사 지냄을 계승하지 못하여 드디어는 제사가 끊기었으니,
이리저리로 가운이 몹시좋지 않았사옵니다.
연전(年前)에, 선비들의 소(疏)와 가문의 글로 호소했음은 비록 정리(情理)상 서두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언정
문헌의 미비로 연조(年條)와 시대간(時代間)을 분명히 밝힐 수가 없었고, 또 후(厚)하고 박(薄)하며 취하고 버릴 것을 분간하지 못하여 우물우물 헛탕에 빠지게 되었음은,
역시 저희들 스스로가 반성할 책무이옵고 복(福)이 적다는 탄식을 아니할 수 없사온즉, 누구를 탓 하오며
어찌 어둠이 밝아지고 운수가 있기를 바라오리이까?

근년 이래, 선비들의 여론이 일제히 이루어지고 종친들이 의논해서 계획함이 같아졌으니,
공사(公私)간의 옛 업적을 자세히 살피되 감히 종손을 세워 제사 지내기를 계승케 하는 일을 낳게 한 것은,
실로 옛적 분을 그리워하는 정성이었사옵니다
이미 태종대왕의 은택 갚는 제전(祭典)이 있어서 그 명(命)이 새로웠는데다 역대 어진 임금님의 포창과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구해 주신 은전이 또한 그리도 정중(鄭重)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찬양해서 글로  나타낸 자국이 이미 저같이도 분명하오며,
도학과 충효는 역사의 기록에 표나게 나타나 있고 의관문물이 훤하게 빛나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도
다 따스함의 낙(樂)을 누리고 있사오니, 끼친 은택은 실로 만세(萬世)에 불멸(不滅)할 것이옵니다.

신하된 몸들은, 태종대왕 때 이래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벼슬하지 않은 후손들로,
세세로 역대 어진 임금님의 학자를 존중하는 교화(敎化)의 덕을 입었으나 다만 대(代)가 끊어진 집안에 양자를 두어 대를 잇는 법만은 행하지 못하고 있은즉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사옵니까?
이것은 다만 고위고관에 있는 이나 선비로서 유식한 사람들이 개탄하고 한탄할 일일 뿐만 아니라,
항간의 만민(萬民)으로 비록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부녀(婦女)라 할지라도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사오니, 곧 왕가(王家)의 흠이 있게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나이다.
맨처음에 부조묘를 세웠던 연도나 중간에 끊어진 제사를 이은 연도는, 모든 성상(聖上)의 전교(傳敎)안의
만세(萬世)에 남을 많은 말씀을 헤아림에 한결같사온즉, 어찌 연대가 오래 되었다고 틀리오리이까? 
그것을 상고할 수 있는 사적(事蹟)이 세 가지 있사온데, 
그 하나는 예조(禮普)가 전교(傳敎)를 받은 자세한 목차이옵고, 
그 둘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지은 장편의 시이오며, 
셋은 신하된 몸들이 선대(先代)로부터 전해 받은 글발이 옵니다.
이것들을 조사하면 밝힐 수 있고 이것들을 가지고 상고하면 분별할 수가 있은즉,
그 밖의 많고 번거로운 사적(事蹟)이야 무엇하러 낱낱이 다 아뢰어 올리오리까?

제사 지내기를 이어받게 종손(宗孫)을 세우는 일은, 다 예조(禮暫)에서 상의해서 아룁는데 관계되는 것이오나,
연달아 공사(公事)로 떠들썩함을 만나 중지 되었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질고 밝으신 우리의 어버이께서는 특별히 받아들이사,
벼슬이 없는 유학(儒學)의 선비인 문병열(文秉烈)로 하여금 사손(祀孫)이 되어 제사 지냄을 이어받게 하오면,
300고을의 사람들이 그 누가 아름답다 찬양하지 않을 것이옵니까?
그리고 비록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부녀(婦女)라 할지라도, 다 가가호호가 제사 지내겠다는 정성의 만의 하나가 이루어졌다고 칭송할 것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니다. 천은(天恩) 베푸시라고 바라는 까닭으로 간절히 아뢰는 것이옵니다.
바라서 아뢰온 일을 이에다 삼가 아뢰옵니다.

임금께서 명(命)해서 말씀하시기를,
"예조(禮著)에 내려 공적(公的)인 업적을 자세히 상고해서 상의하고 처사케 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잘 알고 물러갈지어다. "라고 하셨다.

예조판서(禮暫判書) 이약우(李着愚)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학(儒學)의 선비 문정주(文端周) 등이 올린 말을 보면,
글의 안에는 저희들의 선조인 충선공 문익점이, 도학 충효 공(道學 忠孝 功)과  혜택이 다 같이 갖추었기에,
정종대왕께서 그 분을 예장(禮葬)하라 명하셨고, 태종대왕께서는 벼슬과 시호를 주시고, 부조묘 건립을 명 하시면서,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하셨고, 종손(宗孫)을 등용하셨는데,
제4세의 종손에 이르러서 후사(後關)가 없어, 대(代)가 끊어져 양자를 들여 대(代)를 이었으나 
세 번이나 끊어진 것이온데 여러 후손이 각 도에 흩어져 있어서, 오래간 사손(祀孫)을 세워 계승시키지 못했다가
오늘날에는 그 여러 씨족(氏族)이 합의를 해서, 종손을 세워 제사를 받들어 지내도록 하겠다는 뜻이옵니다.
충선공 문익점은 고려 종말기의 유학을 닦은 현인임은 짐작 되오나 자세히 실상을 알아보아야 하므로,
곧 공적(公的) 사적(私的)의 실적을 상고한즉, 즉 문익점의 학문의 근원은 안유( 安裕)에게 있고,
이색과 같이 배우고 정몽주와 같은 해에 급제 했나이다. 
그 분의 도학의 근본이나 충효 절의는 칠명현(七名賢)에 받들어졌고 삼강록(三綱錄)에 분명히 나타나 있사옵니다.
또 뛰어나게 특이한 공(功)은, <중략...> 반출이 금지된 목면(木綿)의 씨를 입수하여 우리 나라에 퍼지게 하여 
우리 왕조에 재산을 불리게 한 지 400여 년에 국가가 그 공(功)에 힘을 입고, 백성들이 입은 혜택은 만세(萬世)에 불멸할 공입니다.
정종대왕 경신년 2월 8일에 졸하자 단성(丹城)에다 예장(禮 葬)할 것을 명하셨고,
태종대왕께서는 가정대부(壽培大夫)를 증(贈)하시고 충선공의 시호를 하사하셨으며,
묘(墓)에다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부조묘를 명해서 건립하시고는 전토(圈土) 백결(百結)과 노비 70인을 하사하셨으며, 역대 어진 임금께서 자주 포상을 내리시었음은 그 근거가 뚜렷하옵니다.

슬프게도, 적선(積善)을 하고 어질었던 학자의 종손(宗孫)이 세 번이나 끊어져 이제 그의 18세손인
벼슬이 없는 유학의 선비 문병열을 사손으로 정하겠다고 연명으로 말씀을 올리었사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새로운 명을 우러러 체득하자면, 문익점의 부조묘 복구의 행사에 제사를 이어 지내게 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아주 마땅하옵니다.        (당시 시끄러움으로 말미암아 논의가 중지되었다. )


사손을 세울것을 말씀올리는 두 번째의 소(疏)

상소 올리는 일의 첫머리의 사람은 임기백(任基伯)이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음에 대(代)가 끊어진 것을
양자를 두어 대(代)를 잇게 하는 일은, 옛 어진 임금님께서 낸 바인 정치 (政治)의 근본적 법도(法度)이옵고, 어짐을 그리워하고 성실을 미루어 생각하며  사손(祀孫)을 중히 여기고 근본을 두텁게 함은,
후손들이 끊이지 않는 바의 의리이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삼우당(三憂堂) 충선공 문익점은, 즉 고려 종말기의 유학(儒學)의 현인(賢人)으로 충효 도학 절의 공덕이, 예조와 충훈부(忠勳府) 및 국조보감(國朝寶鑑 : 90권 26책으로 , 조선의 역대의 사적서(事蹟書)과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지은 글 중에 명백히  실려 있어서, 일일이 들추어 말할 필요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온데 문익점의 공이 된 것은, 목면의 씨가 우리 나라에서 나게 한 것이옵니다.
그것은 26년동안 온 나라 안에 퍼져서 우리 국가의 만세에 무궁토록 아름다운 일이었나이다.
정종대왕께서는 2년 병신년에 예장(禮葬)을 하라 명하시고, 묘지기의 집을 두시었나이다
태종대왕께서는 원년 신사년에, 고향 살던 터에다 부조묘를 세우시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시며 벼슬을 주시고
작(爵)을 봉하시며 시호를 주시고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시며, 자손에게 후하게 은혜를 베풀어 돕는 만세(萬世)에 변치 않을 은전은 내리셨나이다.
그 후로, 역대 어진 임금님들이 다 포창을 하심에, 한결같이 선왕(先王) 때의 성(盛)한 은전을 따르시어,
왕가의 보답을 할 대로 다 하지 않음이 없었사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중간에 후손이 보잘 것 없이 되고, 집의 화(祝)가  자주 일어나
종손이 지내는 제사가 여러 번 끊어짐에, 각파(各派)의 자손이  그 뒤를 이을 수가 없나이다.
그래서, 부조의 제사는 폐지하지 않았는데도 자연 끊어지고 말았나이다.
이것은 다만 후손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비들의 슬픈 일이옵기에,
발을 싸매고 와 우러러 부르짖는  것이옵니다.
삼가 동사집요(東史輯要)를 살펴보옵건대,
'나라에 공훈(功勳)이  있는 어진 사람이 후사(後朧)가 없으면 따로 제사 지내는 손(孫)을 세워서, 제사를 받들어 지내게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나이다.
그 예가 정해진 법전(法  典)에 있고, 근래 의령부원군 남재(南在 1351~1419 영의정)의 부조묘의 사손의 일을 보니, 후손이 예조에다 서면을 제출하자 주상(主上)에게 아뢰어 허락의 은전을 받았사온데,
이것은 다 국법상의 상례 이옵니다 
제사  일같이 엄숙한 것이 없사옵고 종손(宗孫)의 서계(序系) 같이 중한 것이 없나이 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殷下)께서는 특별히 후한 은전을 내리시어, 강성군의 차자의 자손 중 윗파에서 18세손인
벼슬에 있지 않는 선비 문병열(文秉烈)을 세워서 사손(祀孫)으로 삼으시고, 옛 전례(典禮)를 다시 지키게 하옵소서. 그러면, 전대(前代) 어진 임금님들이 베푸셔 널리 장려한 은전이 빛나게 되옵고,
이 백성의 공에 보답하는 정성을 따르게 되옵니다. 신들은 격렬하고 절실하게 비는 간절한 마음의 지극함을 견디지 못하옵고, 삼가 죽을 죄를 범하면서 아뢰옵니다.

임금께서 결정하시기를, "예조(禮嘗)에 내려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할 일이니라." 라고 했다.

갑인년(철종5년 1854년) 3월 7일에, 도승지 이원명(李源明)이 이 소(疏)를 임금님께 올리고,
같은 해 6월 19일에, 예조판서 김보근(金普根)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유학(儒學)의 선비 임기백(任基伯) 등 300명이 올린  말씀을 보옵건대,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의 사손(j祀5R)으로 종손을 세울 것을 청원하는 일이옵니다.
문익점의 자손은 비록 번창하다고는 할지라도 종손이 여러 번 끊어져 대를 잇지 못하고 있어서,
제18세손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유학의 선비 병열(秉烈)을 의논해서 종손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온데,
근거가 닿지 않는 것 아니나 일이 가벼운 것이 아니어서, 신(臣)들이 감히 멋대로 결정짓지 못하오니
주상(主上)께서 결정하시옴이 어떠하오리까?"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하라."라고 하셨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청원소(疏)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1)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5월 6일(갑진) 5번째기사
유학(幼學) 정재경(鄭在慶) 등이 충선공 문익점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높이고 공경하는 것은 도(道)를 보위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이것은 구태여 그대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대번에 허락할 수 없다. 모두 그리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2)고종 22권, 22년(1885 光緖11년 9월 29일 2번째기사
방외(方外) 유생 홍재성(洪在誠)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충선공 문익점을 문묘(文廟)에 합사(合祠)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현인(賢人)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는 일을 어떻게 그대들의 말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진달한 문제를 갑자기 윤허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지극히 신중하고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잘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3)고종 22권, 22년(1885/ 청 光緖11년) 11월 7일(신축) 4번째기사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건수(金健秀) 등이 올린 상소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과 충선공 문익점을 문묘(文廟)에 배향해 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이전에 이미 비답에서 유시하였으니 그대들도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는가? 이해하고 물러가라.” 하였다.

 첫머리의 사람은 생원(生員) 이우(李福)이며 위백규(魏伯珪)지음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하늘이 우리 나라를 보우하여 전하(嚴下)께서 하늘이 내린 맑은 마음과 뛰어난 지혜로 무궁할 대통(大統)을 이으심에 제왕(帝王)으로 서 인륜의 모범과 표준을 세우고 만민(萬民)의 법칙(法則)을 정하는 마음씨 쓰는 법을 전해 받으셨사옵니다.
이에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밝고 새로운 도학(道學)의 도통(道統)을 잇게 하시었으나
이 나라 모든 백성에게 기운이나 정신을 일으킴과 풍속을 두텁게 하고 법도에 맞게 하는 은전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어느 일의 첫 공로자에 대한 큰 제사나 절의(節義)와 효도(孝道)의 숭상과 장려함을 샅샅이 다 들추심에 8도의 백성들이 큰 덕의 두터운 교화에 흠뻑 젖어 있고, 왕성한 국운하(國運下)에 길러짐에 춤을 추는 것들이 비록 살아나 감의 바른 일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따르게 하는 교화에 스스로 마음을 일으키고 있나이다.
옳은 것을 좋아하는 천도(天道)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것들의 양심(良心)을 드림에,
어버이신 어른에게 정(情)과 정성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오니,
적이나 먼 땅의 신(臣) 등이 즉 허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되옵니다.
이에 민간(民間)의 되지 못찬 말씀으로 감히 관중(官中)에 계시는 어지신 주상(主上)께서 들어 주시도록 올리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굽어 살퍼시어 통찰하셔 채택하여 주옵소서.
저 고려(高麗) 종말기의 유명한 현인(賢人)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태어날 때부터 빼어나서 재주가 유달리 좋은 자질로, 쇠퇴하여 문란한 풍속에서 벗어나 성인(聖人)의 학문에 힘썼사옵니다.
그 학술(學術)의 도(度)는 아주 높은 데에 이르렀고, 그의 진실한 효도(孝道)는 하늘이 낸 것으로
섬나라 되놈들이 감복한 것이었나이다.
그가 원나라에 사절로 갔는데, 원나라 황제(皇帝)가 모함하는 말을 믿고 공민왕을 왕자리에서 몰아내려 함에 문익점이 의리(義理)로 항거하여 따르지 않자, 드디어 남방 교지(交祉) 땅으로 귀양을 보냈나이다.
그렇듯 크게 어지러운 일을 이겨내어 안정이 되고, 반역의 신하가 목을 바치고 나서, 문익점은 3년간 고향을 잃었다가 요행히도 살아 돌아왔사옵니다.
이때 몰래 목면(木縮)의 씨를 입수하여 돌아와 우리의 땅에 심음에, 우리 나라에 목면이 있게 된 것은
즉 문익점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옵니다.
무릇 그의 평생의 학문 효행(孝行) 절의(節義) 및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힌 공은,
당시에 포창해서 세운 비문(碑文) 원나라 사람의 시(詩) 야사(野史)의 기재에 명백히 있사옵니다.

우리의 태종대왕께서는 공신(功臣)의 칭호(稱號)를 내리시고 충선공(忠宣公)이라는 시호(證號)를 주셨으며, 살던 터에다 사당을 세우시고는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셨나이다.
그리고 세종대왕께서는 부민후(富民候)에 봉(封)하셨나이다.
이에, 그의 공덕을 포창하고 장려하시는 임금님들의 전교(傳敎)와, 후한 은혜로 그의 자손을 도와주신 은전을 말씀드릴 것 같으면, 세조대왕을 비롯하여 성종 중종 선조 경종대왕의 여러 임금들께서 베푸신 일들을 거쳐 영조대왕에 이르도록  세세(世世)로 거행하시지 않음이 없었고, 그것은 왕령(王令)의 첫머리에 있었던 것이옵니다.
성상(聖上)께서 왕통을 이어받으심 에 이르러서,
특히 호남(湖南) 영남(嶺南) 두곳에 있는 사원(祠院)에 현판을 하사(下賜)하시옵고,
이어 예의를 밝히어 제사 지내주셔서 공을 갚고 덕을 숭상하는 은전이 극진하여 유감이 없었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면(木綿)을 파종함에 가죽옷과 갈포옷 입었던 풍속이 크게 변해져
우리의 관대(冠帶)의 풍(風)이 이루어졌고, 백성들이 떠는 것을 면(免)하게 되었사옵니다.
그의 공을 논할 것 같으면, 마땅히 주(周)나라 임금의 선조인 후직을 모시는 사당에 같이 모셔야 하옵고,
팔도강산의 백성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 지내야 할 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분에게 제사지내는 공은, 다만 단성(丹城)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장흥(長興)의 강성사(江城 祠) 두 곳뿐이오니, 삼백(三百) 고을의 인심(人心)이 그 누가 그 분을 문묘(文廟)에 모시는 분들의 열(列)에 들게 하여 그리워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지 않으오리01까?
그러하오나, 오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다만 마음에 쌓인 정성이 간절할 따름이옵니다.
그 분을 논하려 하온다면 마땅히 그에 대한 전부를 들어야 하옵니다.
문익점(文益漸)은 학문을 열어 일으킨 공이 실로 목면으로 백성들을 옷 입힌 혜택보다도 큼이 있사옵니다. 다만 추위에 떤 자들이 자기 몸에 간절해서 목면의 이 일로 학문의 저 일을 가리게 했사오니,
사리(事理)를 헤아리면 정말로 개탄스럽고 애석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은 원 나라로부터 돌아온 뒤로 당시의 사정이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방장산(方丈山) 아래에 숨어 살면서 삼우(三憂)라는 현판을 그가 거처하는 집에 걸었사온데,
즉 왕국(王國)이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기의 도(道)가 확림되어지지 못했음을 근심한다고 했나이다.
당시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학문 서적이 들어왔으나 그것을 본 사람이 없거니와,
문익점이 홀로 주야로 그것에 대하여 파고들어서 마음 속에 그 내용을 깨달아 얻고 자신이 실제로 행동했사온데, 이는 그 분이 지닌 바가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같이 마음에 기(期)한 데서 였사와
거취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만 했었나이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어진 왕조(王朝)는 우리 나라 도학(道學)의 조(祖)로 정몽주를 문묘(文廟)에 올려 모셨는데,
정몽주와 일체(一體)가 되었던 이는 달리 대우함이 없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생각하오면, 중국의 한(漢) 진(晋)및 당대(唐代)에, 여러 유학자(儒學者)의 근본 학술과 행(行)한 일을 가지고 배향(配享)을 함에, 의논할 것이 많은 즉 그것은 옛 현인(賢人)들의 논(論)에 자세하옵니다.
그런데, 다만 진시황제(素始皇帝) 때에 전해지는 책을 다 불에 태운 분서의 악정(惡政)이 있었던 뒤에,
경서(經書)나 전서(傳書)에 대해서 주(註)를 달고 해석을 해서 전하게 하고, 공자 맹자를 칭송하여
이단(異端)의 세력이 컸던 세상에 경종(警鐘)을 울리었던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자고(自古)로 각각 한 가지의 절의(節義)를 취해서 문묘에 모시어 같이 제사 지내도록 했사온 바 그 의의는 정성스러운 것이었나이다

문익점을 말할 것 같으면, 불탑(佛塔)과 불가(佛家)의 사묘(寺廟)가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아 있고,
불공드리는 향(香)의 냄새가 구름까지 닿는 불교의 세력이 큰 세상에 태어나서,
흘로 공자 맹자의 글을 좋아하고 정자 주자의 학문을 익히어 체득했사온즉,
국조(國朝)가 바뀌어질 운수의 세상에 당해서, 어질고 밝으며 학문을 존중하는 교화(敎化)의 터를 닦은 이가 그 어찌 이 분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하온즉, 그 분의 공이 어찌 한(漢) 당대(唐代)의 여러 유학자가 경서(經書)와 전서(傳書)에 주(註)를 달고 해석을 붙인 공에 뒤떨어질 것이옵니까?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으로 말씀하자면,
반드시 성인(聖人)의 학문만을 순수하게 한 분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전의 어진 분들이 이미 논(論)했사옵니다. 

고려시(高麗時)에, 그 분이 특히 곡령의 네 글자로써 나라의 운(遵)을 은근히 찬양했다고 해서
드디어 문묘에 배향을 하고, 지금에 이르도록 변동시키지를 않았나이다.
문익점이 목면의 씨를 입수하여 들여온 것에 대해서 말씀할 것 같으면,
그 분은 당시의 나라 운이 다 되고, 천명(天命)의 계시(啓示)가 있음을 알지 못했음이 아니옵고,
그 분의 뜻은 이 나라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심(苦心)을 하며 가꾸어서, 우리 나라의 무명베가 있게 하여
우리 어진 분의 백성을 옷입혀 주었사오니,
그 분이 우리 국조(國朝)의 큰 운(運)을 은밀히 도왔음이 어찌 다만 고운(孤雲) 최치원 학사가 은밀히 미래의 일을 예언(豫言)한 글에 당할 따름이겠나이까?
옛날 우리의 태종대왕께서 문익점을 계운좌익공신으로 봉(封)하신 것은, 이 때문이었나이다.
하물며 학술(學術)의 순수하고 바르기가 다른 만인(萬人)보다 뛰어났음에야 다시 말할 것 있사오리이까?
백세(百世)토록 공론(公論)이 오래 전부터 일어나 더욱 굳어졌고, 일신(一身)에 관한 일의 나타나고 감추어짐은 먼 오래의 일이라도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민간인(民間人)들의 말씀을 특별히 받아들이시사 삼우당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시어서 큰 은전을 미루어 베푸신다면, 팔도 사람들이 간절히 사모하는 정성을 편 것이 되옵고 가가호호가 제사 지내자는 소원이 이루어져 작역나무의 무성하게  됨과 같이 사람들의 좋은 풍속이 일어날 바이옵니다.
그리하여 미나리를 캐고 제사 지내어 어진 분을 사모하는 습관이 고르게 될 것이오니,
반드시 억만세토록 한이 없는 교화에 도움이 있을 것이옵니다.
문익점의 공(功)과 행실의 실적은, 우리 나라의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의 시(詩)와 글로 역력히 증명할 수가 있사옵기에 더는 누누히 아뢰지 않나이다.
엎드려 비오니, 망녕되고 외람됨을 허물하지 마시옵고 참작하시어 어지신 판단을 내려 주옵소서.
기원(祈願)함이 간절하옴을 이기지 못하와 황송히 여기며 원망(願望)의 지극함을 올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