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효자비
      -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 106번지 목화전시장 내에 있음 -

효자비각기

비각중수기

재건립비 뒷면글

 

 

 

문익점 효자비각

효자비(孝子碑) 안내문

누각 안에는 우왕 9년(1383년)에 하사한 효자비가 건립되어 있다.
문익점 선생이 청도군수로 보임하고 있던중 어머니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지키다가 남해안 일대를 횡행하던 왜구에게 잡혔으나 부모의 무덤앞에서 3년간 시묘살이 하는 고려의 아름다운 풍속에 감동한 왜장은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헤치지 말라)란 팻말을세우고 철수하니 이로서 문익점과 이 일대는 잔학무도한 왜구로부터 화를 면했다
우왕은 잦은 외침 때문에 국법으로 정한 3년상의 상례(喪禮)가 무너진 시절, 이를 본보기로 삼기위해
문익점이태어난 동리를 효자리(孝子里)라명명하고 아울러 효자비까지 내렸다. 그 비가 지금 여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383년(흥무 계해년, 우왕10년) 왕이 효자 비석을 내림
1563년(명종18년)  강성현령 안전(安琠)이 재물을 모아 효자비각(孝子碑閣)을짓고,
                           퇴계(退溪) 이황(李混)이 기(記)를 지었다.
1597년(선조 30년)  왜군이 불을 질러 태웠다
1623년(인조 원년) 수령 이원길(李元吉)이 다시 세우고, 박사(博士) 권집(權據)이 기(記)를 지었다.
1803년(순조  3년) 후손 휘광(輝光)이, 1841년(헌종7년) 명식(命植)이 수리하고
1888년(고종26년) 병열(秉烈)·재조(在祥) 등이 서로 뒤를 이어 거듭 수리를 했다.
1923년 본래 자리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짓고 전의 비를 옮겨 모셨는데, 그 일을 주장한 이는
           사손(祀孫) 승헌(童憲) 및 후손 석표(錫約) 일모(一模) 정호(廷鎬)였다.
           맹헌(孟獻) 규하(圭河) 양주(良柱)가 새 비를  세우고, 은진(恩津) 송철헌(宋哲憲)이 기(記)를 짓다
           주변의 땅을 사서 비각(碑閣)에 소속케 한 이는 한석(漢석)이었다.   

※ 새 비를 새웠을 때에, 전의 빗돌을 앉힌 대(臺)를 파니, 1383년에 처음으로 세웠던 비(碑)가 나타났다.
       그 비는 비록 파손이 되어지기는 했으나, 자획들만은 분명했기에 도천서원의 신안사재(新安思齋)에
       옮기고, 선비들과 문씨(文氏)들이 보살피다가 31년 뒤인
       1954년 족보를 꾸밀 때 신안사재의 왼편 담 밑에 묻었다

효자 비각기

1563년  진보(眞寶) 이황 ( 李滉: 이퇴계) 지음 ( 비를 처음 세운후 181년 째가 된다)

강성현의 남녘에 있는 배양산리는 전 왕조의 좌사의대부 문공이 살던 옛터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홍무16년 계해년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포창해서 세우게 명하신 것이다.
애 당초, 공이 모친상의 복을 입고 산간에 있을 때, 왜구의 세력이 왕성하였었다. 그것들이 지나가는 곳은 무참하게 멸망하게 되자, 백성들이 도망하여 숨었다. 그런데, 공만은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며 맹세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도적들이 감탄을 하여 효자라 칭찬하고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모친의 신주를 모신 곳이 처참한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공의 이름은 익점(益漸)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강성현 출신이다.
올바른 행위가 있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지정 연간(至正年間)의 경자년에 과거에 뽑혀,
여러 벼슬을 지내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가, 고향의 집으로 물러나서 생애를 마쳤다.

이조의 태종대왕께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시었는데,
특히 공에게 의정부참지사 예문판제학을 추증하시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며,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주셨다.
공의 공덕이라 하는 것은,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갔다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
길에서 목면의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유익되게 함이 시급하기에 금지함도 무릅쓰고 가지고 왔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와 우리 나라에 비로소 있게 된 것이었으나 드디어는 나라 안에 크게 번지어 만세토록 길이 힘입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의 공적인 것이다.

하늘의 낳은 바이고 땅의 기르는 초목 만물의 그 시초가, 어찌 다 타지(他地)로 이종(移種)이 된 뒤에야 있을 것인가? 뽕 삼 콩 조의 심음은 다 백성들의 쓸모에 긴요한 것이나 땅의 성질에 알맞음이 어찌 기(氣)가 화(化)하는 자연에서 낳지 않음이 아닐 것인가? 그리고 우리 나라 땅이 목면에 적당한 것을 나라가 열린 때로부터 이후 몇천만 년이나 알지 못하여 하늘이 그 이익을 낳을 수가 없고, 땅은 그 보배스러운 것을 일으켜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다가, 공의 한몸이 나그네길에서 풀려 돌아올 때, 한 짐꾸러미 묶음으로 가지고 온 뒤에야, 이 땅의 산물(産物)이 되어서, 많은 백성들의 재물이 풍부해지고 나라의 쓰임에 넉넉해서 여유 없음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상한 일인가?
우리 나라의 뽕과 삼은 겨우 심기나 하여 실과 고운 명주솜의 쓰임과, 가는 베의 화려함은
민간에 보급되어지지 못했다. 즉 이에 앞서서 우리 나라 민속상(民俗上) 일반적으로 입었던 것은, 털옷과 칡베의 종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에 이르러서, 공의 식견과 생각이 원대(遠大)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지고 유통되어, 결국 오곡(五穀) 육부(六府)와 같이 그 공이 마찬가지 인 것이었다. 다만 우리 나라의 많은 백성이 헐벗음과 추위에서 면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빛나게 혁신시키었던 것이니, 즉 우리 이씨조선이 특별히 추증(追贈)을 하고 기리어 명을 내린 것은, 공연한 은전(恩典)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의 효성은 죽는가 사는가의 마당에 이르러 나타났고, 굴복시킬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國朝)의 혁명(革命)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음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이라 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 구해낼 수가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꾸어지기 전이었는데, 조준(趙液)이 한때 억지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으랴? 이리 말하고 보면, 공의 큰 절개는 이에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고 염려가 되는도다.

공의 묘는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있는데,
감사(監司)에게 글로 호소를 해서 묘의 옆에다 다시 사우(祠宇)를 짓고
공의 증손녀 참봉 이계통(李季通)의 처인 영인문씨(令人文氏)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나이 96세인데도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부인의 글을 가지고 지방 노인간에서 의논을 하여 사우를 늘리고,
또 제전일결(祭田一結)을 둔 사람은 그 문씨부인의 손자로, 전에 훈도(訓導)였던 이원(李源)의 형제였고, 나라 소유의 전토(田土)로 제전을 더하게 해 준 사람은, 현감인 성준(成遵)이었다.
 
그 후로는 묘역을 위해서 이리저리 노력한 사람들의 유감이 없게 되었으나
한 가지 비의 건립은 그 같이 오래 되었는데도, 비석을 가릴 비각이 없었다.
현 현감인 안전(安琠)이 봄에 고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다가 마침 보고는,
말에서 내려 존경하는 뜻을 표하고 내력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선세 현인(先世 賢人)의 아름다운 행실이 그러했고, 전대(前代) 임금님의 지극한 포상(衰賞)이 또한 이 같았는데도, 비석이 이러한 데에 서 있는 것은 곧 고을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로다. " 라 했다.
그리고는, 급히 공인에게 명하고, 비용과 재물을 모아 한 비각을 세워서 비를 덮었다. 비각의 집채가 아름답고 훌릎하여 마을의 빛을 더하게 하고, 비에 새긴 글이 다시는 비에 젖고 햇볕에 쬐어지는 걱정이 없게 했으며,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공경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일으키게 되었다.
현인을 존경함을 도와 세속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는 뜻이 크니 무어라 말 할손가?
안(安) 영감의 다스림은 그 근본되는 바를 안다고 믿을 것이다.
이에 감탄을 하고 전후사(前後事)로써 사적을 자세히 하여
비각기(碑閣記) 지을 것을 청한 사람은 이원(李源)이다.
그리고 전에 묘사기(墓祠記)를 지은 이는 방장산인(方丈山人: 조식의 호) 조식(曺植)이고,
그 뒤의 효자비각기를 지은 이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다.

 

문익점 효자비각(孝子碑閣) 중수기(重修記)
천계 연간(天啓年間)의 계해년 11월 22일 홍문관 박사(博士) 권거(權渠) 지음

오른편 면(面)의 66자는, 즉 홍무(洪武) 16년 계해년에 비석에 새겼던 사적을 기록함.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와 여지승람에는 다 익점(益漸) 이라는 이름으로 전(傳)하고 있는데,
여기는 익첨(益瞻)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무엇에 의거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되, 아마도 당시에는 이 이름도 쓰이지 않았을가 생각된다. 그래서 역시 감히 지워 고치지 못하고, 옛날 일에 널리 아는 군자(君子)가 밝힐 것을 기다리는도다.(
어릴적 아버님이 지으신 이름은 익첨이요 훗일 익점으로 개명함)
만력(萬曆) 25년 정유(
선조30년 1597)에 비각이 왜놈들의 전쟁으로 불타 헐렸다.
고을 사람들이 우리 공(公)을 사모하여, 더욱 오래됨을 잊지 않고 새로 지을 것을 꾀했었다.
그래서 천계(天啓) 3년 계해년(명종 18년)에 비로소 능히 이루어졌는데, 이원길(李元吉) 영감이 실로 힘써 한 일이다.
삼가 이 비석의 전후 사적을 생각하여 보면, 즉 홍무 연간(洪武年間)의 계해년에 이 비각(碑閣)을 세우라 명하셨고, 가정 연간(壽精年間)의 계해년에 다시 비각을 세우고, 퇴계 이 선생(
이황)께서 그 일에 대한 기를 썼다.
비석을 처음 세운 계해년에서 181년째 뒤에 다시 비각을 세우는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천계 연간(天啓年間)의 계해년(
인조원년)에 다시 지으니, 그 사이에는 혹 어느 이치라도 있는 것 같다.
이 후로 억만년에, 또 어찌 지금과 같은 일이 있지 않다고 할 수 가 있으랴 

 

문익점 효자비 재건립한 비(碑)의 뒷면글
다섯 번째 계해년(1922 인조원년) 겨을 은진 송철헌(恩津 宋哲憲) 지음

효(孝)는 모든 행위의 근원이고, 오륜(五倫)의 맨처음 도리(道理)이다.
효 이것은 다만 어버이를 섬기는 것만을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어 충성(忠誠)을 한다고 이른다. 충과 효의 도(道)가 지극한 데에 이르면, 절의(節義)를 겸해서 이룬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 토와 그 학문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이것들 여섯 가지는, 비록 근본과 끝의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원리와 그 응용에 있어서는 서로 돕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은 이름이 익점(益漸)이다.
고려(高麗) 말엽 정치가 문란했을 때에 벼슬하였는데, 선생은 공민왕을 되놈나라 조정에다 무죄임을 변명해서 구(救)하다가, 멀고 먼 궁벽한 땅으로 귀양을 가셨다. 나라로 돌아오시게 되자 선생은 목면(木綿)의 씨를 입수하여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셨고, 원(元)나라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왕에게 청원드렸다가, 영외(嶺外)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셨다.
고향으로 돌아오셔 상(喪)을 당하셨을 때, 마침 섬나라 되놈들이 들어와 들끓임을 당하였는데 선생이 상복을 입고 묘를 지키시고 울며 제물드리기를 일상과 같이 하시자, 도적들이 감탄을 하고 나무를 켜서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는 네 글자를 써 놓고 가니, 한 고을이 그 바람에 온전할 수가 있었다.

우리 이씨조선의 태조(太祖)께서 아직 지위가 낮았을 때에, 삼남의 지휘사(指揮使)로서 지나다 가
선생이 지키시는 묘로 조문(弔文)을 하시고, 조정에 아뢰어 마을에 포장하는 비를 세워서 그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했는데, 그것은 홍무(洪武) 16년 계해년의 일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왕국이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시고, 성인(聖人)의 학문이 밝지 못함을 근심하시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하셔서, 계시는 집의 현판에다 삼우(三憂)라 써 걸으시었다
왕씨(王氏)의 왕조(王朝)가 끝나 국조(國朝)의 혁명이 있게 되자, 선생은 집문을 꼭 닫고 스스로 편안히 지내시고는 그 몸을 마치셨다.

아, 충(忠) 효(孝) 절(節) 의(義) 도(道) 학(學)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말미암아 네 가지가 이루어지기는 쉬우나, 두가지가 없이 네 가지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선생이 행하신 바를 소상하게 살피어 보면, 그 떳떳한 성품을 좇아서 순탄하고도 쉽게하여 하기 어려운 것이 없고 그
리고 그리도 뛰어났는데, 그것은 즉 도와 학문이 속에 쌓여 있음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비(碑)를 세운 자초지종은 앞에 분이 기술(記述)해서 다 말했으니, 다시 어찌 너절한 말을 하랴.
선생의 후손인 맹헌(孟獻) 규하(圭河) 양주(良柱)가 옛 비석이 질어질 것을 걱정해서, 앞으로 돌을 다듬어 다시 세우려고, 마침내 그들의 일가 치열(致烈)이 내게 내력의 글을 청해왔다. 나로 말하자면, 문씨(文氏)와 전부터 의가 두터워었기에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서 사양을 못 했도다. 삼가 이 글을 지어 비석 뒷면에 새기게 하나니,
이후 천년토록 이를 보는 사람이 선생의 효행과 거룩한 업적을 알게 함에 그 근본을 두는도다. 

비의 앞면 
‥‥孝子里

비의 뒤면
‥‥前中顯大夫 知淸道郡事 文益膽爲母廬墓三年, 時方海窓, 執心不易
(전 중현대부 청도 군수 문익점은 모친을 위하여 묘를 3년간 지킴에, 당시 바다 도적들을 만났으나 지닌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 

홍무(洪武) 16년 계해 2월 일 정(旅)
안렴사(接廉使) 봉상대부 전리총랑(奉常大夫 典理摠郎) 여극인(呂克인)
차사원(差使員) 통상대부 고성군사(奉常大夫 圈城郡事) 최복린(崔卜麟 1506~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