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후손을 돌보라는 임금의 명령서)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경종

영조

정조

전교는 왕이 내린 명령서입니다
누대로 왕들은 문익점의 후손들을 돌보라고 누누이 명령하였지만
그 명령들은 중앙에서 지방에서 거의 실천되지는 못했습니다.

태종원년
1401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 (文益漸)은, 충과 효를 다했고, 학문이 순수하고도 바른 것이었으며, 또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은 영원히 힘입게 되었으니, 만세에 빛나는 불멸의 것이다. 조정(朝廷)이 그 은덕에 보답하는 길에 있어서 생각을 일으키는 정사(政事)가 없을 수 없도다. 그것은 나라의 법도에  따라 은명(恩命)을 내릴 일이다. 벼슬을 증직하고 작위를 봉하며 시호(證號)를 내려 공훈(功勳)을 기록하고, 살던 마을에 포창을 하여 사묘(祠廟)를 세우고 전토와 노비를 주어 특별한 은전을 내리노라. 
문익점의 자손은 문관(文官) 무관(武官)에  두루 들게 해서 계급의 차례를 거침이 없이 등용을 하고,비록 외롭고 가난한 자손이나 먼 자손이나 서자(庶子)의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군역(軍役)에 넣지 말고, 혹  관청의 종이 되었거나 개인의 종이 되어 있거든,남녀를 막론하고 다 같이 속량함을 면제하여 억만세에 이르도록 그 은전을 변동하지 않을 일이다.

세종22년
1440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덕행과 공로가 저같이도 남보다 뛰어나게 달라 선왕(先王)께서 이미 은전을 베푸시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대를 이어 임금이 된 당초에 마땅히 선왕의 뜻을 좇아 받들되,
선왕의 덕을 따르지 못하고 떨어지지 말게 해서, 교화(敎化)를 격려(激勵)하는 뜻을 보여야 할 바였다. 특히 총애(龍愛)하는 표시를 내리니 벼슬을 높이고 작위를 주며, 제사를 드리어 공로를 높일 일이로다 그의 자손은 문무관(文武官)으로 계급을 밟음이 없이 채용하고, 비록 갈려 나간 천한 서자손(庶子孫)이라  할지라도 군역에 넣지 말 일이다. 
선왕의 은전에 따라서 각별히 경계해서 시행할 일일지니 라.

세종 22년 1440년 상국(相國 삼정승을 뜻함) 남지( 南智 좌의정)가 지어 올리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었네.
중국(中國)의 간원(諫院)에서 허위 문서 불에 태우니,
하늘의 은하수도 감동하였어라,
귀양살이 3년을 하였건만,  그 의(義)된 기운은 펄펄도 하였지,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 고려(高麗) 서을 개성 (開城)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유익을 끼쳐 우리 뭇 백성 옷 입혀 주었네

세조 3년(1457)

고려(高麗)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공덕에는, 우리 나 라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 영원토록 잊기 어려운 혜택이 있었으니, 마땅히 만세(萬世)에 잊지 않을 보답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영(令)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전토를 불려 주어야 할 일이로다 그의 자손으로 혹 벼슬에 오른 자 있으면 좋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고, 계급의 차례를 밟음이 없이 등용하며, 만일에 자진해서 나서는 자가 있거든 문무관(文武官)을 막론하고 그의 소원을 따라  산관(散官 한직을 말함)에 붙여 주고, 비록 갈려 나간 가닥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천한 일군  속에 섞여 빠져 있는 자들을,  바로 특별히 사정을 보아 속전(贖錢)바치는 것을 면제케 할 일이니라. 
각별히 서울과 지방의 관원을 단단히 경계를 해서, 조정의  은덕에 보답하는 진실한 뜻을 따라, 만세에 불변할 두터운 은전을 보이게끔 할 일이 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세조3년 1457 세조임금이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남방 거친 땅으로 내쫓겨, 3년 동안 고생을 한 것    그 절개와 의 리는 높이도 솟았네.
몸이 죽는 것도 돌보지 않았으니         하늘이 복을 내리어 고려의 서울로 돌아왔었네.
좋은 씨앗 처음 가져옴에,    우리 백성들의 한이 풀렸도다.
큰 공 갚기 어렵지만, 철권(공신에게 훈공을 기록해서 준 책)으로 표창을 하여 
자손을 도와 줌이, 이 후로 억만년에 이르리

성종 8년 1477

옛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자손들에게는 더욱 은혜를  베풀어 도와주어야 할 일이니라. 모든 것을 다 선대 임금님들로부터 받은 전교의 조목대로 받들어 빠짐 없이 시행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중종18년 1523

전 왕조시대(前王朝時代)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였던 문익점(文益漸)의 덕행과 공훈과 공로가 지금도 우리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고, 그에 대한 포창의  큰 은총으로 이미 그 은전 내림이 자주 있었도다. 그의 자손이 좋은 벼슬길에  나가도록 해 주고 계급의 차례를 밟음이 없이 채용을 하며, 비록 갈려나간 서손 (庶孫)이어서 미천하다 할지라도 스스로 나서는 자가 있으면 원하는 바에 따라  관직에 붙여 줄 일이니라. 이조(吏暫)와 병조(兵暫)는 이러한 전교의 뜻을 받들어 각별히 단단하게 경계를 해서 시행토록 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선조3년
1570

비국(備局) 비변사의 별칭)에 특명을 내리신 조목의 말씀 뜻은 다음과 같다.
강성군(江城君)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게 해 준 덕이 있으니, 관공서와 조정이 그 보답하는 길의 살핌을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일곱  유명한 현인(賢人)의 후손들 중에서도 강성군(tl城君)의 자손은 특히 군역(軍役)에 넣지 말고, 혹 관청의 종이나 개인의 종이 되어 있으면 다 같이 속(贖)을 바치는 것을 면제하고, 혹 문무(文武)의 관적(官籍)에 몸을 붙이고 있거든  좋고 높은 지위에 오르도록 할 일이니라. 왕이 재결(裁決)한 취지를 받들어 빠짐 없이 시 행하라. 이 말씀이 있었다.

선조27년(1594)

문진강(文振綱)이 말씀 올림으로 말미암아 내린 것이다
병조(兵暫)에서 아뢰기를, "강성군(江城君)의 후손은 다 군적(軍籍)에 넣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군적에  정해 넣었다 하더라도 바로 풀어줌이 은덕에 보답하는 정사(政事)에 실제로 합 당하오니, 각 도의 감사(監司)에게 분부하여 이 뜻을 전해서 단단히 단속하고 지 방관이 다 잘 분간해서 시행하게 함이 어떠하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재가(裁可)한 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다.
강성군의 공덕은, 천지와 더불어 같이 있게 될 것이로다. 그 자손이  고단하고 가난하며 미천함도 또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군역의 대열에 섞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특별히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 도와 줘야 할 일이니라. 선대 왕들한테 받은 전교의 뜻에 의해서, 각별히 단단하게 안 팎을 경계할 일이다. 승지(承旨)인 신하 윤담무(尹覃茂 도승지역임)는 이 일을 맡고 있으 니, 밑으로 전달을 해서 이에 따르게 할 일이니라.

경종 2년(1722)

- 월천군(越川君) 문빈( 文彬 익점공 손자)을 포상하는 일로 말미암아 내림 -
충선공의 자손은 좋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허용하고, 아울러 더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와 줘야 할 일이니라, 각별히 전교의 뜻을 받들어, 서울과 지방의 관공서를 부디 단단히 경계를 해야 할 일이다.

영조23년
1747 

왕이 충훈부(忠勳府 국가에 공이 많은 사람이 있는 관청)에 오시니 한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정훈(正勳)의 자 손은 별도로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와 주고, 군역에 넣지 말아야 할 일이 옵니다. "라고 하였는데 왕이 재가한 중에는,
"일곱 유명한 현인(賢人) 중에서도 강성군(江城君)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준 공은 다른 이의 공과는 달리 구별되니, 결코 군역은 물론 집집마다  부과(賦課)하는 부역 일꾼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전교의 뜻을 곧 받들어 잘 시행하되 이것을 안밖으로 알리고, 일일이 밑으로 반포(頭布)가 되어 조정이보답하는 진실한 뜻에 알맞게 할 일이니라."

영조34년 1758

왕께서 춘당대(春塘臺 창경궁내 과거장 )에 납시어 구름 모양의 천막(天幕)을 가리키시고,
모시고 있는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문씨(文氏)의 공은 크기만 하도다. "라 하시고,
이어 "제사를 맡고 있는 후손을 찾아가서 등용하되, 만일 관원으로  있는 자가 있거든 곧 대궐로 들어와 나를 만나게 할지니라."

영조42년
1766

왕이 재가한 일을 새로 반포(頌布)한 조목 안에는,
"정훈(正勳)의 자손에 대하여, 각 고을에 조정의 정령(政令)이 없었던가 천한 일군으로 섞어 넣고 있는데 비록 전에 정해진 역(役)이다. 세계(世系)가 명백한 데도 곧 책임의 면제를 내리지 않으면 수령(守令)을 잡아다 물어 죄(罪)를 다스리고, 그 일을 맡은 아전(街前)은 잡아들여 자백시켜서 장소를 정하여 귀양보낼 일이니라, 좌승지(左承旨)인 신하 유언민(兪彦民 삼사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고, 예조찹판, 대사헌))은 이 일을 맡아 받들어 잘 시행할 것이니라
이에 강성군(江城君)의 자손은 다른 정훈의 자손들과 다르므로  결코 군역(軍役)은 물론 또 집집마다 부과(賦課)하는 부역(賦役) 일꾼에 넣을 수  가 없으니, 새로 반포하는 일의 조목을 지방관에게 여러 가지를 비추어 자세히  고찰해서 일일이 펴 내리고, 조정이 보답하는 진실한 은혜에 부응(副應)토록 해서, 어기는 곳이 없어야만 마땅한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영조44년 1768

전교를 내리어 말씀하시되, "우리나라가 3백년 전 이래 의관문물이 빛나게 일신(一新)된 것은, 실로 강성군(江城君)이 목면의 씨를 가져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공적이 강성 군보다 큼이 없고 덕이 강성 군보다 훌륭함이 없도다. 조종(祖宗) 때로부터 보답하는 길은 이 
미 좋은 은전 베푸심이 있었으니, 여러 선왕의 전교의 조목으로서 그 때 그 때의 것이 다 이에 있는데도 도감사(道監司) 지방 수령(地方守令)들이 아직도 소흘히 하였는데, 실로 군왕의 뜻을 우러러 받드는 길이 아니로다. 그 자손으로 관원(官員)이 되어 있는 자는 좋은 지위(地位)에 오르도록 허용하고, 혹 자진해서 나  서는 자라면 계급을 밟음이 없이 등용하며, 비록 갈린 가닥이 천한 서손이라 할 지라도 별도로 후한 은혜를 베풀어 더 도와 주되 군역 및 잡역에 섞여 끼여 넣지 말 일이니, 밑으로 뜻이 닿게 하여 받들어 잘 시행해서 조정의 진실한 뜻에 부응(副應)케 할 일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다.

정조8년1784

예조(禮曺)에서 아뢴 중에는,
"강성군(江城君)의 공적이 남보다 뛰어남은 다시 말할 것 없사오니, 서원(書院) 혹은 고을의 사당(祠堂)을 곧 수선하고 고치어서 기울어지고 무너짐을 면할 
수 있게 해야만, 실로 그 분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 는 정사(政事)에 알맞사 
오니, 도감사(道監司)에게 분부를 내려, 지방관(地方官)을 단단히 경계해서, 재정 
을 지원하여 빨리 수리하게 하고, 그 자손은 지방관청이나 감영(監營)에서 불러 쓰라는 등의 뜻과 같이 다 분부하옴이 어떠하오리까 라는 말이있었다 왕의 재가 중에는 특별히 그리하라고 허락하노니 시행하고서 그 자초지종을 곧 글로 보고하게 할 일이니라. 동부승지 인 홍인호(洪仁浩)가 이일을 맡고 밑으로 전달을 하여 이에 따르도록 알 일이로되 완전하게 행함이 있도록 밑으로 뜻을 전달하고 받들어 잘 시행토록 할 일이니라 

정조11년 1787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하와 같은 성인 전주이씨와 전쟁에 죽은 공신의 자손에 대해서는 각각 일정한 한도가 있사온즉  조종(祖宗)때의 조목대로 영원히 비천한 일꾼으로 넣지 말게 하옴이 어떠하오리까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왕의 재가 중에는 문충선공의 덕행과 공로가 그렇게도 칭찬할 것이어늘 ,오직 역대왕 때에 받은 전교의 뜻에 따르고 받들어 시행하여 교화를 격려하는 것으로 삼음이 마땅한 일이로다.

 순조4년1804

 자손들에게 후한 은혜를 베풀어 도우라 묘갈명 완성됨
      순조 18년
문치광 문계환에 의해 년보 지어짐

 철종5년1854

 부조묘 재건립과 사손을 정하여 세울 것 명함

 고종22년

 문묘배향 청함( 윤병일 및 삼남유학)            고종 1년 봉강서원 건립

 1928년

 장연서원에 배향

 1935 년

 경현사에 배향(장성 만수산 아래)

2002년

충선사(경북 영덕)에 배향

 

년보의 요약 뒷부분은 후손이 추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