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제실

전라남도 지역

의열사

구암사

애송정

영성재

영모재

백동사

상곡사

영모재

3세극겸
10세익점
기방

15세
익주

 

14세
경숙공
상행

15세
영해부사공

18벽
18삼
21성질

15세 雍(옹)
16세 彬(빈)
17세 九淵       (구연)

16세 우창
(
佑昌)
목사공

장흥군

영암군

화순춘양

장흥군

장흥군

강진군

보성군

전남북과 광주에는 많은 제실들이 있으나 소개하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자료를 보내 주시면 소개하겠습니다. 일가님들의 협조 당부드립니다

경현사

문익점

전남 장성군

 

삼현사

문자수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표충사

문홍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광동영당

문익점,문래,문영

광주직할시 서석동

조선대 확장으로 철거함

구암사 와 애송정

위치

  전남 영암군 장암부락

배향선조

  15세 순평군파 익주公

향사일

 

영암의 장암부락은 순평군파의 후예입니다.

구암사 현판

구암사

구암사 입구표석

구암사 원경

구암사 전경

구암사 근경

구암사 대문

 

관리사

담밖에서 본 구암사

신실 입구문

 

애송정

위치

전남 영암군 장암부락

배향선조

 

향사일

 

애송정 전경

애송정과 월출산

주련

현판

애송정옆 애송정유허비

늙은 고목나무와 애송정

애송정비와 애송정

대문

제사준비

일가님들 상견례

애송정기

송시열 시

김상헌 시

애송정기

헌관과

집사

지방

진설

축문

 

 

제사후 음복

애송정 주변

석별전의 기념촬영

 

영모재(永慕齋)

위치

전남 보성군 미력면 용정리 춘정마을

배향선조

16세 목사공 우창(佑昌)  순질공-경숙공파 -목사공파조

향사일

 

부조묘에서 차량으로 5분 거리에 있고 제실인 영모재와 묘역이 함께 있습니다
우창(1482~1574)공께서는 능주에서 보성에 처음 자리를 잡고 여주목사를 하셨습니다.

영모재

전경

영모재와 우창공 묘역

제실 입구문(계승문

영모재

영모재 현판

영모재 입구문 현판

 

 

 

주련

 

 

 

 

헌성록

 

미력면 용정리 춘정마을 목사공(諱우창)묘역

 

통정대부 여주목사겸 병마절제사 휘 우창공 묘소

 

 

 

 

 

 

 

의열사

위치

전남 장흥군 부산면 효자리

배향선조

3世충숙공 諱 극겸(克謙)선조,   20世 농제(聾齋)公 諱 기방(紀房)

향사일  

1907년 後孫 성호(成鎬)님이 창건(創建)하였다.
농재공 기방선조는 충선공 익점공의 10대손으로 임진왜란에 공을 세우시고
정유재란에도 참전하시어 남원성 전투에서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하시었다.
의열사 서쪽50여m의 거리에는 의마총이 있으니

농재공이 타고다니며 아끼던 말이  부상당한 몸으로(칼을 물고) 울부짖으며 마을에 돌아와
힘을 잃고 쓰러진 후 앓다가 죽으니 마을 입구에 묻고 의마총이라 새겨 비를 세웠다

장흥(長興)사람 문기방(文紀房)은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 형(炯)이 꿈을 꾸니, 커다란 별이 지붕에 떨어져 환하게 비추자 곁에 있던 사람이 방성(房星)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 깨어났는데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그날 밤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름을 기방(紀房)이라고 하였다.
기방은 어려서 놀이를 할 때 죽마(竹馬)를 타고,종이를 오려 기(旗)를 만들어서 자칭 장군이라 하였으며,
뭇 아이들은 모두 기방의 명령을 따랐다.
15세때 사서를 읽다가 장순(張巡)허원전(許遠傳)에 이르자 비분강개하여 무릎을 치며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다.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말타고 활을 잘 쏘았다.
재종제(再從弟) 명회(明會)와 더불어 신묘(1591)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뽑혀 수문장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기방은 명회와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일으켜 전라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랐다. 정유년(1597) 8월에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오자 전라병사는 순천에서부터 점차 이동하여 남원에 이르렀는데 사졸(士卒)들은 모두 흩어지고 부장(副將) 50여 명만 남아 있었으며 적의 선봉대는 점차 성 아래로 육박해왔다. 기방은 명회와 더불어 눈을 부릅뜨고 기운을 내 일에 착수하며 말하였다. “오늘 결연히 죽어 나라에 보답하리라!”
북을 치고 행군하며 남문을 거쳐 들어가니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기방과 명회가 화살을 쏘아 적을 무수하게 많이 죽였다. 오른손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가니 왼쪽 손으로 적을 쏘았으며 왼쪽 손가락마저 떨어져 나가자 기방은 한구절을 소리쳐 읊기를 “평생 순국에 뜻을 두었던 것을 요하(腰下)의 옥룡검(玉龍劍)은 알으리라!”
명회가 이어서 읊기를“고성(鼓聲) 속에 힘이 다하니, 누가 사직의 위태로움을 구원할 것인고!”
적삼 소매에 혈서를 쓴 뒤 마침내 병사(兵使)와 더불어 싸움터를 누비다가 죽었다.
종 단쇠(甘金)가 피묻은 적삼을 가지고 시체 가운데 엎드려 있다가 몸을 빼내어 집으로 돌아가 그가 순절한 상황을 모두 말하였고, 혈서가 쓰여진 적삼으로 고산(高山)에 장사지냈다.
두 사람 모두 선무원종(宣武原從)2등에 녹훈되었고,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후에 본도의 선비 200 여명이 글을 올려 이들에게 증직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답이 없었다가
그 후, 문기방은 나라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의마총은 주인이 숨을 거두자, 말은 주인의 칼을 입에 물고 남원에서 장흥까지 300리를 뛰어와 칼을 내려놓고 계속 울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이로 인해 문 장군의 변을 알고 초혼장을 지낼 수 있었다.
마을 뒤에 의열사를 지어 배향했고, 말무덤에도 비를 세웠다.

마을입구의 안내비석

의열사 전경

충절문의 현판

의열사의 현판

충절문(의열사 대문)

의열사 안내판

의열사(문이 잠겨 밖에서 촬영함

담장 수리전의 의열사(책자에서 스캔)

입구에 있는 의마총(책자에서 스캔)

 

영성재(永成齊)

경숙공은 예조참의로 1456년(세조 2년)에 곧은 말로 상소를 하셨다가 단성으로 유배되셨고
뒤에 능주로 유배지가 변경되고 유배가 풀린 뒤에 능주에 머물러살으셨다

아드님3형제는 목(穆;광주목사),온(縕;영해부사),옹(雍;홍문관교리)으로
온은 장흥에 입향하였고 옹은 강진에 입향했는데 큰집의 면수제공(諱자수)과 중간집은 풍암공(諱위세)과 작은집은 월파공(諱구연)이 뛰어났다

위치

전남 화순군 춘양면 양곡리

배향선조

14세 경숙공 諱 상행(尙行)

향사일

<음>10월3일   매년 100여명의 후손들이 묘제를 모십니다   

경숙공묘소(전남화순군 춘양면 진곡 長嶝 乾坐)

경숙공 永成齋(영성재)

2007년 묘제(촬영 : 문병옥 모니터)   참석자 100 여명 경숙공묘소

  봉산문중 묘제
  (촬영 : 문병옥 모니터님)

봉산문중의 파조님은
22세 홍우선조님으로
능주에서 남평으로 이거하시니
현재는 시조단의 산하문중으로
단의 수호와 장연서원 관리에
많은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2007년 묘제에는
남자 23명과 여자8명으로
모두 31명참석하여 정성껏
제사를 모셨습니다

 

 

장흥 영모재(永慕薺)

 

위치

전남 장흥군 장평면 임리 백동

배향선조

15세 영해부사공 자헌대부 공조판서(배창녕조씨) 휘 온(蘊)
묘소에 영죽이 있어 방송에서도 몇 번을 나온 적이 있으며 전설이 있다.

향사일  

전남 장흥 장평면 임리(백동) 영해부사공 묘소 오시는 길

☜ 남해안 고속도로(6번)이용 순천톨게이트에서 나옴
☜ 남해안 고속화 도로(2번)를 이용 순천20km→벌교20km→보성8km
☜ 장흥을 가기전 장동면(839번)도로이용 3km→장동면의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836번)5km ☜ 임리로 가는 외길따라 2km→ 임리(백동 산소가 보임)

영모재 전경
영모재

세장지 비석

세장지(상;영해부사공, 중;해미현감공, 하;다대포첨사공)

영죽이 있는 영해부사공과  배 정경부인 창녕조씨 합영묘

묘소전경

해미현감공 배숙인 광산김씨 묘

고창현감공 諱희개 망군대비  

2009년 부조묘 제사 참석후 부산종친회 회원들의 참배

월곡제(전남 보성군 보성읍 옥암리)

영은제(전남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

 

백동사

(參) 字: 여로(汝魯) 호: 백초당(白草堂)
진사로 형인 벽(壁)과 효를 다하고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할 때 3년동안 근처의 풀잎이 빛을 잃어     마을이름을 백초동이라 하였다 제실 인근에 묘역이 있는데 영죽이 있는 묘도 있다

위치

전남 장흥군 장평면 임리 백동

배향선조

20세 벽(璧)  20세 삼(參) 23세 성질(成質;삼(參)公의 증손)

향사일  

전남 장흥 장평면 임리(백동) 영해부사공 묘소 오시는 길

☜ 남해안 고속도로(6번)이용 순천톨게이트에서 나옴
☜ 남해안 고속화 도로(2번)를 이용 순천20km→벌교20km→보성8km
☜ 장흥을 가기전 장동면(839번)도로이용 3km→장동면의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우회전(836번)5km ☜ 임리로 가는 외길따라 2km→ 임리(백동 산소가 보임)

영모재 전경
영모재
백동사

백동사

내삼문

백동사 설단기

관산의 선비 문군이 나를 찾아 정산 산중에 까지 와서 그 문중 부노(父老)의 말을 전하며 말하기를 고향에 엣적 백동사가 있었는데 우리선조 우곡(友谷) 백초당(白草堂) 뇌촌(磊村) 세분의 선생을 향사(享祀)하다가 중간에 변란을 만나서 사우가 헐리고 절단되어 버림에 수십년이 거의 지났으나 천운이 회복될 것을 바랄수 없음에 자손들이 마땅히 그 한 순간이나마 권도에 맞춰서 굴신(屈伸)의 예를 펼 길이 있어야 하거늘 괏에도 증거 될 곳이 없음에 장차 어찌 하리오? 하여서 내가 예를 표하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옛적에 우리 선왕들은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소중히 여겼기에 그 규모가 크게는 서원을 두었고 적게는 향사를 두어 예절을 닦아 행함을 허락하고 혹시라도 그 예를 폐하거나 떨쳐 버림이 없게 한 것은 인심을 잡아 매어서 국맥을 부지되게 하는 기본적인 전지를 삼는 바이었으매 비록 백세를 가더라도 소홀히 하지 않게 함이었는데 하늘이 회화(悔禍)하지 아니하여 좋은일에 마가되어 일거에 황조를 훼철하고 재차 서원과 향사우를 철폐해 버림으로 삼강이 죽고 구법이 사라져 버렸음에 그 반복된 재화로 인하여 금수의 입장으로 돌아가게 되어 버렸음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상곡사(上谷祠)

위치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척동

배향선조

15세 雍(옹) 1425~1494    16세 彬(빈) 1441~1506   17세 九淵(구연) 1458~1519

향사일 음력 9월15일 유림주관

음력 10월  20일은  강진입향조이신 20세 우주公부터 선조들의 제사를 모시고 문중회의를 한다
부친 구연공께서 작천면 척동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강진을 자주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강진에 입향하시었는데 처음에는 작천면 용정에 자리하시고 뒤에 척동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후손 중 25세인 광신, 명신 두 형제는 학문도 뛰어났으며 극진한 효자들이었다.
척동마을에서 3년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매일 새 물을 길러서 밥을 지어 부모님에게 올렸는데
샘에서 매일 참게가 한 마리가 나타나 반찬으로 올릴 수 있었는데 시묘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 샘물의 이름은 참게샘이 되었다고 전한다.
광신형제께서 척동마을에 간송재를 지어 후학을 양성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호남유림들이 1858년에
상곡사(上谷祠)를 세워 계속하여 제향을 모셔왔으나 1868년(고종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74년(고종11년) 호남 유림이 중심이 되어 복건한 후에 계속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상곡사는 신실(정면3칸과 측면 1칸)과 영모재(정면 5칸 측면2칸)는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신실의 앞에는 둘레가 2m20cm인 거대한 동백나무가 역사를 설명하는데
꽂봉우리가 조롱조롱 달려있어 노목답지 않게 세력이 좋았는데
보호수로 지정하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보호하여야 할 나무였다.

강진종친회 소식

강진에는 척동마을에 12호를 비롯해 관내 곳곳에 120여호 300여명의 후손들이 기거하고 있다.
공직에서 은퇴하여 종사에 열심이신 충식회장님과 영호부회장과 함께 제실을 참배를 하였고
문재동 총무, 문병현 문임과 함께 묘소정화와 사당의 관리에 노력하고 계시는데
이곳 출신의 일가들 중에는 목포의 초등학교 교장인 명남님, 서울에서 강진군보건소 장기님,
도암농협의 경식님, 양지마을을 운영하는 남윤씨, 뜸북이 건강원을 운영하는 승현씨등이 있다고 한다.

 안내판

기념촬영(신만,병준 충식회장 경문 수철 영호부회장)

상곡사

전경

상곡사 기문

위패

 영은문

 동백나무

주련

현판

                             강진마을 강진신문(http://www.gjon.com)기사

작천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829호선을 따라 영암방면으로 가다보면 널따란 논들사이로 오롯하게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척동(尺洞)마을이다. 마을뒤에 위치한 산과 마을의 형태가 예전 나무로 만든 자의 모양을 닮았고 선녀가 길쌈할 실을 뽑아내는 형태로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는데, 본 마을을 잣골이라 하고 지방도 829호선을 넘어서는 풍낙골이라고 불렀다. 마을뒤편은 병풍산이 막고 남쪽으로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예전부터 겨울에도 따뜻한 마을이다.주민들의 대부분은 논농사에 의존하고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한 척동저수지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다.

▲ 마을입구에는 400여년된 느티나무 두그루가 손님을 맞이한다
동마을로 들어서면 대형 느티나무 두그루가 손님을 반긴다. 40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변함없이 마을을 지켜주면서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공동건조기가 있다.
지난 60년대 만들어진 저장창고를 이용해 정부지원을 받아 건조기를 설치했다. 본격적인 수확철을 맞아 마을 공동건조기는 쉴새없이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재배한 벼를 말리고 있다.
예전에는 20여개의 선돌들이 마을입구에 자의 눈금처럼 자리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경지정리로 사라지고 몇 개만이 남아 당시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또 마을에는 토속적인 명칭이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 마을의 서북쪽에는 가는골이 있다.

▲ 남평문씨 문옹, 문빈, 문구연 3대의 충효를 기린 상곡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전 모양이 좁게 길처럼 생긴 논이 있었고 가재가 많이 있다고 해서 가재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근에는 소 멍에처럼 생겨 붙여진 멍에배미, 병풍산과 차일봉의 중간에 위치해 서당이 있었다는 서재골, 가는골 뒤편으로 그릇을 구웠던 점골, 안골내에 자리잡고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됐던 오금실 등 마을의 곳곳에 남아있다.
척동마을에는 참게샘이 있다. 마을의 효자였던 남평문씨의 광신, 명신형제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를 자주 구해 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광신형제는 묘의 밑 작은샘에서 물을 길러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샘에서는 이상하게 광신형제가 물을 뜨러오면 참게가 나타나서 광신형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참게를 잡아 제사상에 올릴 수 있었다.
광신형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시묘살이를 했고 이때도 참게샘에서는 참게가 올라왔다고 한다. 광신형제는 효종과 현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매일 3년간 산에 올라가 곡소리를 내는 충절을 나타내 후손들이 이산을 제사를 지내는 봉우리인 제봉(祭峰)이라고 불렀다.
이후 광신형제의 효성과 충절이 알려지면서 숙종은 후손들에게 세금을 없애는 면세해택을 줬다.
이와 함께 광신형제에게 정3품 당산관벼슬인 호조참의 벼슬을 내려줬다. 예전 척동마을은 남평문씨, 장수황씨, 장흥마씨 성씨들이 주로 생활했다.
현재는 28호 5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충효가 살아있는 마을로 간주할 수 있다.
예전부터 충효를 중시했던 마을이라는 것은 관내를 대표하는 2개의 사당으로 알수 있다. 마을뒷편에는 상곡사가 자리잡고 있다. 문옹, 문빈, 문구연 3대의 충효와 도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1858년 지역의 유림들이 만든 것이다.

▲ 마을입구에서 만난 주민들이 환한 미소를 띄고있다.
이후 수차례 개보수를 거쳐 지난 92년 다시 모습을 정비했다. 매년 음력 9월 15일 강진유림들이 상곡사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곳이다. 장흥마씨의 마천목, 마응정, 마응방을 모신 충정사도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충정사도 매년 상강(10월 23일경)때 강진유림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척동마을 출신으로는 교직에서 퇴직한 윤주현씨, 한국전쟁에 참여해 화랑무공훈장과 금성무공훈장을 받은 문종윤씨, 광주 북부경찰서에 근무하는 마덕열씨, 2000년 성균관 효부상을 수상한 오을순씨, 강진읍 금성양화점을 운영하는 한기연씨등이 있다.

- 마을에서 만난 사람- 마을공동 건조장에서 만난 문종환씨
마을입구에 위치한 마을공동 건조장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문종환(63)씨를 만나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 었다. 문씨는 "척동마을은 예전부터 잣골과 풍낙골로 나눠서 불렀다"며 "명칭의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현재 행정구역이 같은 풍낙골에서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마을에 대해 문씨는 "예전부터 척동마을은 효자가 많고 충신들이 많은 마을이였다"며 "마을에 매년 유림들이 제사를 지내주는 제각이 2개나 있는 것으로 봐서 유서가 깊은 마을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마을의 생활권에 대해 문씨는 "마을의 위치가 성전, 병영, 영암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며 "예전에는 영암으로 시장을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교통편이 좋아져 강진읍과 영암읍이 반반이라고 볼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조기를 보면서 문씨는 "50여명의 주민중 대부분 60대를 넘어선 노인들이고" "일을 해줄 젊은 사람들이 많아야하는데 노동력이 떨어지는 노인들만이 남은 것이 농촌의 현실"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어 문씨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척동마을의 충효사상은 변함이 없다"며 "항상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성은 척동마을의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밝게 웃었다.

연계 관광지(해남, 진도)

진도대교 전망대

진도대교

진도명주 홍주(40도) 공장방문

귀가길의 한잔술로 피로를 달래고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홍주에 취해서 관광을 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