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씨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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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문다성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文多省)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文多省)의 휘(諱)는 다성(多省), 자(字)는 명원(明遠)  호(號)는 삼광(三光) 이시며 시호(諡號)는 무성(武成)공입니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상주국(上柱國) 동평장사(同平章事)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으로 봉군 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셨으며 98세에 별세하셨습니다.
(* 휘(諱)란 돌아가신 분의 존칭으로 이름 앞에 붙여 사용합니다)

무성공 휘(諱) 다성 시조님의 묘소가 전하지 않으므로 1993년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20일 단제를 모시며  장연서원(長淵書院)에 배향하여 9월 중정일에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문바위(文巖)는 전남 민속자료 32호로 시조단의 서쪽에 있으며, 2000년 11월 문암각을 지어 문암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시조단 동쪽의 장자못(長者池)은 1970년경에도 고기가 많아 수렵도 하고 시조단 앞으로 배가 다녔으나 토사가 쌓여 매립된 상태며 주변은 논이 되었습니다. 장연서원은 직선거리 300m 정도로 마주 보입니다.

남평문씨의 뿌리-시조 무성공 문다성 전 (始祖 武成公 文多省 傳)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1731 영조7년) 서두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널리 전해오는 옛 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 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 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럼으로, 문(文)자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 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傅)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武成)으로 받으셨다. 

* 김광순 교수의 <시조신화의 양상에 대한 연구>란 논문에, 시조 무성공의 오색구름은 수신(水神)의 영향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이름이요, 수신(水神)이 석함을 봉정(奉呈)하고 그 안에서 동자가 나오는 경이적인 탄생은 시조신화의 신성성(神聖性)과 생명(生命)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암(文巖) 옆의 못을 장자지(長者池)라 이름하였고, 공을 모신 서원도 장연(長淵)이라 하였음은 예삿일이 아니므로 시조께서 태어난 문바위(文巖)는 성스러운 바위(聖巖)이요 장자지(長者池)는 성지(聖池)인 것이다.

☆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된 남평문씨 시조 출생에 대한 전설은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라고 되어 있으나
* 대종회에서는 472년(신라자비왕 15년) 탄생은 역사 기록과 맞지 않아 신라말기로 정정하였습니다



시조단과 문암각 - 2018년 10월




2017년 3월 20일(월) 시조단제 모습

2017년 3월 20일(월) 시조단제 모습



문씨 본관

문씨의 본관(本貫)

본관은 관향(貫鄕)이라고도 하며 성씨 앞에 붙은 지명이며 우리의 본관은 전라남도 나주시의 남평(南平)이기에  남평문씨라고 합니다.

문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등의 문헌에  남평, 단성, 영산, 보령, 감천, 정선, 결성, 개령, 강릉 등의 156본으로 기록되어 있고 2000년 인구조사에서 문씨는 40여개의 본관이 있지만 남평문씨에서 갈려나간 본으로 시조가 같은 동일본입니다.

201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평문씨는 46만 여명으로 남한 인구의 0.9%이며,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 순위 23위이고 본관별 인구순위는 20위입니다.(2015년 인구주택 총 조사 자료 참조)

본관 땅 남평(南平)의 연혁

남평문씨의 본관인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인근에는 시조인 문다성(文多省)의 시조단, 문바위와 문암각, 시조 유허비, 장연서원 등 많은 문씨관련 사적이 있습니다.
또한 나주시 남평은 나주평야의 벼농사 외에도 축산 원예와 전국 배의 2/3를 생산하며 55성씨의 본관으로 남평문씨 성향비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닌 고장입니다.
남평은 본래 백제 때 미동부리현(未冬夫里懸)이었으나 신라 때는 현웅(玄雄)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오산(烏山), 영평(永平)을 거쳐 남평으로 고쳤다. 고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조 3년(1394)에 현감(懸監)을 두었다. 조선후기에 남평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에 나주군에 편입하여 남평면이 되었다. 1985년에 나주군이 나주시로 승격되면서 남평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남평문씨 본관 - 남평의 위치

남평문씨 시조단

시조탄강지인 문바위와 문암각

시조를 제향하는 장연서원 - 상덕사

시조 유허비 - 지석강변


중시조 문익
중시조(中始祖)란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말합니다. 시조 이후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을
자손들이 추존하여 중시조로 모시는데 이러한 경우 온 종중의 공론에 따라 추존하게 됩니다.

남평문씨 중시조 문익((中始祖 文翼)

시조에서 중시조까지는 해석상 모순이 있어 1731년 장흥 월천서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에서 경절공 문익(敬節公 文翼)을 중시조로 모시고 1세(世)로 하였고 이후 최초의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를 1세로 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의 휘(諱)는 익(翼)이시고 시호(諡號)는 경절공(敬節公)이시다. 성품이 곧아 왕께도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가 불교인 상황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해 헌종1년(1095) 근신으로 보제사 상량준비문 받음
1098년 (숙종3년) 찬선대부, 급사중(종4품)을 거치시고
1099년 (숙종4년) 요나라에 원자 책봉 임무를 마치고 좌복야 승진하시다
1102년 (숙종7년) 직문하성사로 서북면 병마사를 하시고
1103년 (숙종8년) 우산기상시(정삼품)로 승진하고
1108년 (예종 3년) 병부시랑지어사대사 충상장군 병부상사
1112년 (예종7년) 참지정사(종2품)로 누진하셨다
강종 때 평장사 상주국 영동정의 추증과 풍산군으로 봉함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중흥조로 네분 아드님(공인, 공원, 가관, 공유)도 모두 뛰어나시었다

 
경절공 문익 사적 - 남평문씨 세덕록

공의 휘는 익이요 남평현 사람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인년 3월 문명이 높아 세자시강원 좌찬선대부를 제수 받고 이어 급사중이 되었다. 이듬해 가을에는 고주 겸 밀진사로서 원자 책봉을 청하러 요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임오년에는 직문하성 서북면병마사가 되었고 계미년 6월에는 우산기상시가 되시었다. 시조 무성공 이후 공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실전하여 계대를 잇지 못하고 있음은 공구(恐懼;무섭고 두려움)할 일이로다. 예전에 창간 신해보를 편수한 선인들이 공을 남평문씨 일세조로 기록하였는데  털끝만치라도 사실을 매우 조심스럽게 여긴 까닭일 것이다.



윗대 세계표
세계표(世系表)는 세수와 이름만을 적은 가장 간단한 족보의 한 표현방식입니다. 이는 족보의 내용을
생략하여 간단하게 윗대를 알고 분파를 알기 위함입니다.
남평 문씨 10대 종파 파조 윗대의 세계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씨 파분류

남평문씨 파(派) 분류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면서 여러개의 가지로 나뉘어 번성하듯이, 하나의 성씨도 나무처럼 그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가 있는데 이를 파(派)라고 합니다.
남평문씨는 10개의 큰 파로 나누어져 있고, 각 파는 다시 작은 파(지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파 이름은 호나 벼슬 및 세거지 등으로 표시하고 선조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문씨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모여 이룩한 숲이 아니고, 본관이 남평(南平)이라는 뿌리를 갖인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번성한 것임으로, 모든 문씨는 친척이며 일가라는 점입니다.
남평문씨를 만났을 때 파(派)를 따져보면 멀고 가까움을 알 수 있으며, 세손(世孫)을 따지면 위, 아래를 알 수 있습니다.

남평문씨 10대 종파의 파 분류는 아래와 같습니다(파란색 이름이 각파의 파조임).



* 10대 종파 분류 이외에, 종파를 크게 분류할 경우 10세 휘 익점 선조 후손들 5개파를 충선공파(전에는 강성군파라 했음), 4세 휘 유필 선조 후손들 2개파를 순평부원군파라고 합니다.

* 본인이 속한 파와 세를 알아보려면 남평문씨 홈페이지 "인터넷대동보"의 "족보검색"에서 "본인이름"과 "아버지 이름" 입력하여 검색하면 알 수 있습니다.



1. 충혜공파 파조- 충혜공 익겸(忠惠公 益謙)
10세 충혜공 휘 익겸(益謙)은 충혜공파 파조이시다. 아버지는 숙선(叔宣)이며 충선공 익점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선 합문지후를 거쳐 전중내급이 되셨고 부인은 청주 정씨이다. 후손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크게 활약하신 모계공(茅谿公) 위(緯)가 있으며 후손들이 경남 거창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17세 모계공 위는 용원서원에서 제향)

2. 헌납공파 파조- 헌납공 중용(獻納公 中庸)
11세 헌납공 휘 중용(中庸)은 충선공 익점의 장남으로 헌납공파 파조이시다. 字는 도보(道甫)로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출생했으며, 37세인 우왕 18년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을 지내고 조선 때 불사이군을 고집하시며 사임하셨다. 아들로 승로(承魯), 승손(承孫) 두 아들을 두셨으며, 묘를 실전하여 2004년 도천서원 입구에 설단하였고 매년 4월 5일에 단제를 올리고 있다.

3. 순질공파 파조 - 순질공 중성(純質公 中誠)
11세 순질공 휘 중성(中誠)은 충선공 익점의 둘째 아들로 순질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출생하셨으며 우왕11년 형 중용과 함께 문과 국자 진사에 급제 한림원 학사가 되셨다. 이성계의 전횡에 봉직 중이던 합문지후 간의대부를 사임하고 태종5년(1405) 동생인 중실, 중계와 함께 수차례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불사이군을 고집하고 사양하였다. 별세 후 정헌대부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셨다. 아들로는 화(和), 임(稔), 빈(彬) 세 아들을 두었다. 묘는 실전하여 도천서원 입구에 설단하였으며 매년 양력 4월 5일 단제를 모시고, 음력 3월 20일 삼락재(전남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에서 제향하고 있다.

4 의안공파 파조 - 의안공 중실(毅安公 中實)
11세 의안공 휘 중실(中實)은 충선공 익점의 셋째 아들로 의안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친의 불사이군 유언을 지키기 위해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사임하셨다. 사후에 참지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래(萊), 영(英), 종(종), 평(苹) 자(蔗) 5남을 두었다. 묘를 실전하여 2004년 도천서원 입구에 설단하였으며 매년 4월5일 단제를 올리고 있다.

5. 시중공파 파조 - 시중공 중진(侍中公 中晉)
11세 시중공 휘 중진(中晉)은 충선공 익점의 넷째 아들이며 시중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때 성균관 진사 시랑밀직부서 참지문하시중을 역임하셨다. 아들로는 헌(獻), 유(猷), 영(榮) 3남을 두었다. 묘를 실전하여 1976년 전북 옥구군 회현면 고사동에 설단하고 단소 옆에 영모재란 재택을 세웠으며 음력 3월15일에 제향하고 있다.

6. 성숙공파 파조- 성숙공 중계(成淑公 中啓)
11세 성숙공 휘 중계(中啓)는 충선공 익점의 다섯째 아들로 호는 창주(滄洲)이며 성숙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예부상서로 봉직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사임하였으며 은거 중이던 태조4년(1395) 조정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86세에 돌아가시니 조정에서는 정헌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하고 시호를 성숙이라 하였다. 아들로는 길(吉), 보(甫), 필(弼) 세 아들을 두었다. 묘를 실전하여 도천서원 앞에 설단하였으며 매년 4월5일 단제를 올리고 있다.

7. 감천군파 파조- 감천군 구(甘泉君 龜)
9世 감천군 휘 구(龜)는 감천군파 파조이며 시호는 경양(敬襄)이다. 아버지는 재도(載道)이며 안동부 감천현에서 태어 나셨다. 조선 초기에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셨고 감천군에 봉해졌다. 경북 예천군 감천면 현내리 큰 제사골에 묘소가 있으며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8. 남제공파 파조- 사간공 착((司簡公 言卓)
5世 사간공 휘 착의 호는 남제(南濟)이며 남제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의종 14년(1160)에 출생, 문장이 저명하여 명종 14년(1184년)에 등과하였다. 대제학으로 재임할 때 왕이 탐라에 문교가 없음을 불쌍히 여겨 1194년(명종 24)에 공을 탐라로 특파 선화케 하니 이 고장의 문물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에 문씨 제주 입도(入島) 시조가 되었다. 서거 후 상주국평장사(上柱國平章事)를 추증하고 가나군(加那君)을 봉하여 시호를 사간(司簡)이라 했다. 고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양부(陽夫)를 두었다. 묘소는 실전하여 1981년에 예손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하기리에 추모탑을 건립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4월5일 청명가절에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9.충익공파 파조- 충익공 달한(忠翊公 達漢)
9세 충익공 휘 달한(達漢)은 충익공파 파조이시다. 고려 충숙왕 6년(1337) 남평에서 출생하여 이교의 따님 고성 이씨와 혼인하셨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을 제수 받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영전하여 추충익재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음. 경기, 충청, 경상도 도체찰사로 왕명으로 군대를 순시 중 왜적 1천여 명을 소탕하였다. 원나라로 우왕을 배행하던 중 말을 탄 채 물을 건너려는 왕을 위험하다고 만류했다가 왕의 길을 막았다하여 삭탈관직까지 당하고 찬성사가 된 후 헌사(憲司)의 탄핵으로 합포, 철원으로 잠시 귀양을 다녀오시고 삼사우사를 임명 받은 후 이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를 당하였다. 공양왕 4년(1392)에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해진 후 56세에 별세하셨다. 아들은 계종(繼宗)과 효종(孝宗)이다. 저산서원(전북 김제시 공덕면 회룡리)에서 매년 음력 2월16일 배향하고 있다.

10. 판도판서공파 파조- 간혜공 근(簡惠公 瑾)
8세 간혜공 휘 근(瑾)은 판도판서공파 파조이시다. 아버지는 녹천(祿千)이며 봉상대부 판도판서를 하셨다. 고려말기의 혼란한 정국에 실망하신 간혜공 諱 근(瑾)께서 아드님 세봉(世鳳), 세린(世麟)과 함께 대야촌(합천의 옛이름)에 낙향하시어 합천의 남평문씨 입향조가 되셨다. 경남 합천군 용주면 선목리에 단(壇)을 모시고 고현재(羔峴齋-경남 합천군 용주면 노리) 에서 매년 음력 10월 9일 제향하고 있다.


문씨 항렬표

    남평문씨  항렬(행렬:行列)표

항렬은 대수의 높낮이를 이름으로 구분하도록 이름의 앞 글자나 뒷 글자를 같게 하는 것이나, 남평 문씨는 문파마다 항렬자가 달라서 다른 파와는 항렬로 따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충선공파(문익점선조의 후손)는 음양과 오행을 이용하여 제정되었습니다.
1. 음양 : 홀수세대는 이름의 첫 자가 같으며, 짝수세대는 이름의 뒷자가 같습니다.
2. 오행 :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이 있는 글자를 사용합니다.

항렬이름은 세손을 구분되는 장점은 있으나 모두가 함께 사용할 경우의 일이며, 족보에는 항렬에 따른 항렬(족보)이름으로 수록하고 실제 사용하는 호적이름은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후손들이 선조의 항렬(족보)이름을 몰라 족보를 찾아보기 어렵게하는 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한글 이름이나 종교적인 이름 사용으로 항렬이름의 효용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 오행의 순서는 같으나 32세의 경우 남평문씨 항렬표는 木이나 순평군파는 水가 되고 있습니다.



남평문씨 인구
남평문씨 인구는 2015년 현재 46만 여명(남한 인구의 0.9%)으로
성씨별 인구순위 23위, 본관별 인구순위 20위의 거대 씨족입니다




선조 향사일/묘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