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108호 명칭 변경

명칭변경 정씨준비 문씨대응 명칭환원노력 요청서 청원서 청원서회신 신안사제건의 신문기사
사적 108호는 문익점 목면 시배지였으나 목면시배유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이유는 진양정씨 측에서 명칭의 부당함에 대해 문화재청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문화재청의 고위직에 있던 정씨일족은 졸속하게 처리해 명칭의 변경을 고시하였습니다
남평문씨는 지속적인 명칭 변경을 위한 노력을 위하여 그 경위를 설명합니다

 

명칭변경

1997.8.13

진양정씨대종회장 정효준이 고려사태조실록에 목면씨를 가져온 사람은 문익점이지만 이를 재배하여 성공한 사람은 정천익이라 하여
사적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정천익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을 청원

1997.10.31

문화재위원회 10차 회의에서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 결정

신청일로부터 3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황급히 처리한 것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임

1997.11.10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 예고함(문화체육부고시 제 1997-50호)

신청으로부터

1997.12. 1

남평문씨충선공파종친회장 문영갑 예고내용에 대한 이의제기

1997.12.17

문화재위원회에서 청원서를 접수한지 122일만에 명칭변경 처리

1999. 12. 22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문화재청기념 86741-1058호로 고시)

1999.12. 29

관보에 게재 확정함

문화재청에서는 문씨들에게도 고증자료나 옛기록 문헌 등을
                      문화재 관리청으로 보내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1. 주요 문화시설이며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108호) 문익점선생 면화시배 사적지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지정하실 때 역사사실에 부합하였으므로 결정된 명칭인데
      진양정씨의 일부 사람들이 자기선조(정천익공)를 높이기 위해 보낸 진정서로
      명칭이 변경될 사안이 아니며
  2. 또한 이런 일은 예측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준비해 둔 자료도 없었기에
      간단한 몇가지 서류만 제출하였던 것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해 당사자간이나 사학자 및 이 고장 향토사가들의 공청회나 공개토론회 같은 것 한 번 갖지 않고 몇사람의 탁상공론에 의해 청원서 제출후 122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절차를 처리하는 졸속함을 보이며 문익점 목화시배지를 목면새배유지로 명칭을 변경한 것입니다.

 

명칭변경을 위한 정씨측 준비

일자

내         용

비   고

1800년대

정상규(1794.5~1834.2) 청계지 서원규약 창안
  정천익의 봉군시호와   관작, 공민왕 초 문과장원 급제로 날조함

  정천익을 삼은의 반열로 추존하고 삼우당과 화답한 시 한수를 수록함

  사액서원을 청원함                                정천익의 생거지 : 진주 소남

청계서원의 사액을 목적으로함

고종39년
(1902년)

고종39년 정씨 4현(정신열 정천익 삼계공 남계공)의 행적과
청계사의 내력을 기록하고 자료를 수습하여 청계지를 편찬함.
사액서원 청원하고 정천익 공적 찬양           정천익의 생거지: 진주 소남

청계서원의 사액을 목적으로함

1963.1. 21

사적 제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지정에 반목함
(문교부고시 174호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 3조)

비문 문제 제기

1990년 6월

청계지 번역판 발행. 1990년 6월 청계지에 정천익 목면사적 부제 붙임

이은상, 이우성, 이병도 박사 비문 및 논문수록 정천익의 공적을 찬양
                                                              정천익의 생거지 : 진주소남

 

1967년

진주성내에 봉남서당을 재건

 

1989년

박정희대통령 휘호인 유방백세를 정면에 적은 정천익 목면사적비 건립

 

1977.6월~
1978.10월

3회에 걸친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에서
문익점 면화사적비를 철거하고 정천익의 목면사적비를 건립 결의

 

1978.10~
1977.12

문익점 선생 유적보존위원회 문정동, 문원근, 문해술 명으로
문화재위원장, 문공부장관, 청와대, 경남도지사,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진정서를 내어 문익점면화 사적비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정천익 목면사적비를 세우려는 것을 문씨 측에 의해 저지됨

정씨 측에서는 진주성내 봉남서당(청계서원)에 유방백세를 사적비세움(대통령 휘호 날조함)

 

1994.5.22

진주성내에 있는 봉남서당을 증축하고 청계서원을 복원하고 “청계서원”이라는 책자를 발행함.

          정천익의 생거지를  진주 소남에서 단성면 사월리로 모두 변조함

 

1999.4

족보를 변조하여 정천익의 조부가 단성 사월리에 이사와서 정천익이 사월리에서 출생했다고 적어 사후에 이장이 아닌 이사한 것으로 날조함

 

 

남평문씨의 대응

내용

1997

5

21

산청군청이 면화 시배지 안내판 변경 요청

24

안내판 사진 촬영 답변서 제출

6

4

정씨문중 진정서에 의한 산청군청이 안내문 변경하여
문화재 관리국 안내문 변경 요청에 따른 의견 제출 작성함
    1. 목면 유래에 대한 사실 2. 면화 시배의 근원을 알아본다의 고증자료 첨부 답변

20

산청군청이 문씨 정씨 협의회 개최 통부

27

협의회 개최에 대한 답변서 제출

7

2

산청군청 시배지 안내문 변경(안)에 대한 답변서 제출 첨부서류 5개 항목 및 세종지리지

11

18

지정명칭 목면시배유지로 변경예보 통보 받음

28

임원회의 개최(서울 하나로 식당)
면화시배지 명칭 변경예고에 대한 답변서 작성위원으로 문영갑 문건모 문용호 문재구
문병식 문락현 문학술씨 이상 7명을 선임하고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이의신청키로 함

29

충선공파 종친회장 문영갑 문화체육부 문화관리국에 사적 108호 문익점 면화 시배지 지정명칭 변경 예고에 대한 이의신청서 제출

12

3

문화재 관리국 이의신청에 대한 자료검토에 상당시일 소요됨에 대한 중간회신 받음

1998

1

5

전문위원회의(서울 하나로 식당) 문영갑 문학술 문재구 문건모 문락현 문병운씨 등 참석하고 문용호 문병식씨는 불참

16

명칭변경 예고에 대한 이의신청건은 계속 연구 검토 필요하다는 통보받음

20

문영갑회장 문화재 관리국 방문 관계자등을 만나 명칭변경 부당함을 주장

23

명칭변경 부당함에 제 2차 이의제기 민원제출

25

이의신청에 대한 회신받음(문화재관리국에서) 관계 전문가의 검토 등을 거쳐야 되므로 상당시일 소요됨

4

3

민원에 대한 중간회신(문화재 관리국)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는 과정으로 더 지연됨

4

28

문화재 관리국에서 문익점 면화시배지 명칭변경관련 민원회신(받음)
제 3분과 회의에서 역사적 사실 규명 이전에 양문중의 선의적인 합의가 이루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양문중 조금씩 양보하여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간곡히 부탁한다는 내용

11

30

임원회의(서울 하나로 식당)
목면시배 유지로 변경 예고에 대한 대책위원으로 문영갑 문건모 문재구 문동호씨를 선임
자료를 수집하여 이의제기토록 하고 문재구님이 문화재 관리 위원회측과의 몇차례 면담결과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문익점 목면전래지로 한다면 정씨문중에서는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고 해도 용호 상근부회장은 글자 한자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해 전래지 건은 무산됨

1999

10

21

사적 제 108호 문익점 목면 시배유지를 사적 제 108호 목면시배유지로 변경공고

11

15

명칭변경에 대한 이의신청

22

이의신청에 대한 중간회신(문화재청장) 상당한 시일이 소요됨

23

대종회장(문태준)명의로 진정서 제출 산청군 지역주민들의 명칭병경은 부당하다는 16,802명의 서명날인 받아 진정서에 첨부하여 문화재 청장께 제출

30

대종회에서 소송 및 대책강구키로 결정함

12

22

문화재청이 사적 제108호 문익점면화시배지를 사적 108호 목면시배유지로 변경
  명칭변경의 근거
     ①고려사의 “문익점이 중국에 가서 가져온 면화종자를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서
        심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고 문익점 자신이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주장하고
     ②조선 태조 실록에는 “문익점이 그 종자를 장인 정천익과 반씩 나누어 심었는데
        문익점의 것은 모두 자라나지 못했고 정천익이 심은 것중 겨우 한 개가 살아나서
        그해 가을에 정천익이 100여개의 씨를 얻어 그 후 해마다 더 심어서 이웃마을과
        고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번식 시켰다” 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진양정씨 문중에서 시배지 명칭변경 진정

 

명칭 환원 활동

문익점선생의 조부때부터 사시던 곳이며 직접가지고 오신 목화씨를 손수 고향밭에 심었던 곳을 문익점 면화 시배지란 그 명칭 부당하다는 결정에 대하여

고려의 충신인 문익점이 역성혁명의 준비작업인 전제개혁에 반대하고 고려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했던 반감으로 역성혁명을 성공한 무리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역성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교려의 창임금은 신창(신돈의 자식으로 함)으로 기록하고
문익점의 목화보급 공적을 폄하하려고 문익점의 열전에 치차나 방추차등 모두 정천익이 발명하였다고 기록하면서도 정작 정천익의 열전이나 시호는 주지않았고
역대의 왕들은 전교를 내려 문익점의 공로를 치하하였음에도 단한줄 고려사 열전의 글자를 주장한 진양정씨의 편을 들은 것은
진양정씨문중과 일족이
1975.9부터 진양정씨가 문화재청의 고위직에 있음을 기화로 위조한 공문서를 제출하여 공문서위조 및 동행사의 범죄행위까지 하였고
문화재청의 처리 또한 위원들의 답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명칭변경을 예고하고 일사천리로 명칭을 졸속 변경한 경위를 밝혀 명칭변경의 부당함을 주장할 것이며

우리는 명칭 회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입니다.

2000년도

일    자

내                   용

1.13

산청군청이 108호 안내문 변경의견 조회

3.17

면화시배사적지앞에 봉군시호관작을 날조한 정천익과 그의 아비 정유의 신도비를 건립하고 1965년 9월에 고 박대통령의 하사금으로 건립한 삼우당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의 철거를 요청함

2.21

사적제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지정 변경 처분 취소청구의 소를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함
원고 남평문씨 충선공파종회 회장 문영갑  피고 문화재청장

2.22

문화재청에 지정명칭 변경에 대한 재심청구해 줄 것을 대종회에 의뢰
    유첨 : 1. 고려사열, 태조실록을 부정하는 내용 1부
             2. 세종실록지리지  3. 세종실록 4. 정종실록  5. 수문쇄록 
             6.이조명현 선생당시 사학자 실록등 7.진양향지
○산청군청에 고증자료 첨부 변경 인정 할 수 없음을 통보
○문화재청에 명칭변경건에 대한 행정소송판결시 까지 명칭변경의 유보청원서 제출

3.7

문화재청에서 2월 22일 청원에 대한 회신
   청원한 사항에 대해 동건 변경함에 관계전문가의 검토 예고 문화재 전문위원의 심의 등
   적법절차를 거쳐 사실에 맞게 변경 한 것이므로 유보할 수 없음을 통보받음

9.21

2월 21일 제기한 행정소송 결심공판에서 소 각하 결정 통지
    각하이유 : 사적 108호 사적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명칭을 변경하는 것은
                    재판사항이 아니고 행정사항이므로 명칭변경 처분이 부당하다는
                    고증자료를 첨부 행정부에 청원 또는 민원 신청 사항임

10. 1

행정소송 항소제기
1심 변호인(이희석)은 사건이 되지 않는다고 2심의 선임을 거부하였으나
항소를 하지 않으면  명칭이 바뀌게 되니 몇 개월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항소 제기함

11.24

소송서류 작성 및 대처에 대한 전담부서 결성(충선공 유적보존 위원회 위원장 문백)

2001년

일    자

내                   용

2001.6.15

2000년 10월 1일 제기한 행정소송 항소기각 결정 통지(내용은 1심 결정과 동일함)

2001.6.25

남평문씨측에서 명칭변경이 부당하다는 청원을 시작하여 2002.2.24까지 요로에 5차례 진정하였지만

12.12 감사원과 대통령 비서실에 문화재 사적 제 108호 명칭 변경의 부당함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

2001년

일    자

내                   용

2002.3.8

문화재청에서 명칭변경 불가 통보받음

2002. 5. 16

문화재청에서 명칭변경 불가 통보받음
감사원과 대통령비서실에 청원한 사항에 대하여 문화재 위원등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처리하겠다는  답신을 받음.

2001.12.15

감사원과 대통령 비서실에 문화재 사적 제 108호 명칭 변경의 부당함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

2002. 5. 16

문화재 위원등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처리하겠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2003년

일    자

내                   용

2003.6

남평문씨 대종회장 명의로 명칭변경이 부당하다는 진정서 제출

2003.9

명칭변경 취소요청 추가자료 제출(충선공파 종회장명의)

2003.1.13

1975.9부터 문화재 1과장을 시작으로 1999.4까지 기획관 전문위원 문화재 관리국장을 역임하고 1997.4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있는 정재훈을 공문서 위조혐의로 대전지검에 고소함(고소인 : 문영훈 )

03.12.10

수사과정에서 위조된 공문서 작성일자가 오래되어 공소시효 완성으로 고소 취하함.

2003.11.30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는 청계지, 청계지 국역본 청계서원지 복사본 3권을 입수함.

정천익 생거지를 진주소남에서 단성사월리로 변조한 것 발견함

2004년

일    자

내                   용

2004.1.19

국사편찬위원회에 조회하여 정천익의 진양군 문충공 봉군 시호 및 문과장원급제 판부사 등 관작이 허위임을 통보받음. 급제는 승보시, 관작은 전객령

2004.1.15

삼우당선생 면화사적비를 철거하라는 행정명령을 문화재청에서는 시달하지 않았음을 거듭 박혀 드린다는 통보받음.

2004.3.31

봉군시호 관작, 행적 등 날조한 진양군 문충공과 그의 아비 정유의 신도비를 철거토록 촉구한 데 대하여 문화재청에서 해당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게싸는 문서 답변받음

2004.4.24

정천익의 생거지가 단성사월 리가 아니라는 사실과 종회 회원 930명의 진정서 제출에 대하여

2004.5.17

문화재위원회 검토 거친바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한다는 통보받음.

 

 

 

 

 

 

 

취소 요청서

남   평   문   씨     대   종   회

                  우편번호143-150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 446-20번지             전화 (02)3409-2220

 

문서번호 : 남문 제2003-                                                                   2003. 9. 15.

수      신 : 문화제청장 귀하

참      조 : 사적과장

제      목 : 사적제108호 명칭변경처분 취소

                1. 귀 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귀 사적 86743-1364호(2003.7.3) 관련입니다.

           3 귀 청에서 97.8.13 정호준 등이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목면시배유    지로  명칭변경 및   경내 문익점 사적비의 경외 철거를 요청하는 청원을 받아들여,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이 부당한 여러 가지 고증과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첨부하여 청원 또는 진정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귀 청에서는 계대로 점토하지도 않고   기각 처리하였습니다

 

          4. 이에 당 종친회에서는 명칭변경이 부당한 사유와 입증사실을 별첨과 같이 보충 제출하오니 면밀히 조사검토하여
    불법으로 처리한 명칭변경
 처분을 취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유첨 : 사적 제108호 명칭변경이 부당한 사유와 입증자료

 

                 남평문씨 대    종     회            회 장  문 건 모

                 남평문씨 충선공파종회            회 장  문 영 훈

 

▣사적 제108호 명칭변경이 부당한 사유와 입증자료

 

1. 97. 8.13 진양정씨 대종회장 정호준이 고려사 태조실록에 "목면종자를 가져은 분은 문익점 선생이고 그 종자를 처음 심어 재배(시배)한 분은 그의 장인 정천익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이라는 사유로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목면시배유지로 변경해 줄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청원서를 문화제청에 제출하고 같은 날 정재철이라는 정씨측 사람이 문화재관리국에 직접 찾아와 경내(사월리106-1번지) 사적비(문익점 면화시배사적비 1965. 5월 건립)의 철거를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2. 문화재청에서는 신속하게 97.8.27 국사편찬위원장에게 검토의뢰를 하고 97. 9. 11 국사편찬위원장은 고려사 태조실록을 근거하여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그의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노력한 결과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가 싹이 터서 이를 3년 동안 배양, 씨앗을 수확하여 이웃에 보급하었고...' 라고 15일 만에 의견서를 회신하였습니다.

 

3. 귀 청에서는 국사편관위원장의 졸속하고 불성실한 의견을 받아 97.10.31 문화제위원 제3분과 제10차 회의에서 심의?변경키로 하고 97 11.10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예고를 하었습니다. 이런 졸속한 처리를 두고 번갯불에 콩구위 먹는식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4 97.12 1 남평문씨 충선공파종회장 문영갑이 예고 내용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하었는데 "사적 제108호 소재지인 경남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은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 소유의 토지이며, 문익점 선생이 처음으로 면화를배한 곳이며, 단성면 사월리는 문익점 선생이 거주했던 강성현 배양리의 현지명임. 산청군 단성면의 舊 지명은 강성, 단계 등이 있음.
정천익은 단성면 사월리에 거주한 적이 없고 舊 지명 晋洲 召南 官亭(현 지명 : 단성면 관정리)에 거주했음. 기념관 건립 대지도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 소유의 토지임. 사l적 제108호의 명칭은 1963년도 지정 당시 문화재 위원들의 면밀한
토와 결의 끝에 지정된 명칭임' 이라고 이의 제기함

 

5. 97 12.6 이의 제기 민원에 대하여 문화재위원장 최영희 등 9명에게 검토의뢰한 바 97.12.13 정동오 위원이 점토의견을 내었는데 "민원을 점토한 결과 문익점 연화시배지의 지정명칭을 목면시배유지로 변경한 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정을 보류하는 것이 좋겠음

- 동 문화계의 소재지인 「경남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은 문익점이 거주했던 유지이지만, 정천익은 거주했던 사실이 없다고 한 민원인의 주장에 대한 사실 여부 확인

- 정천익의 당시 거주지와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씨를 받아 번식 재배했다는 토지에 대한 고증

 

  97.12.15 김일진 위원이 검토의견을 제출했는테 이의제기 4항에서 「사적 제108호의 소재지인 경남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은 문익점 선생이 거주했던 강성현 배양리의 현지명이고‥‥ 정천익은 단성면 사월리에 거주한 적이 없고 단성면 관정리에 거주했다」 는 내용은 정천익이 사월리 소계의 사적 제108호 사적지와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은연중에 내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천익이 씨앗에 싹을 피우고 3년동안 배양하여 않은 씨앗을 수확하여 보급한 밭이 그가 살았다는 관정리 또는 현 사적지가 아닌 딴 곳이란 말인가?
만약 이러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현재 지정된 사적지 자체의 지정 문제가 재검토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임

 

6. 귀 청에서는 이상 정동오 위원과 김일진 위원의 점토의견에 대한 문씨측의 자료제출이나 답변의 기회를 주지 않고 97,12.19 문화레위원회에서 "신중히 심의한 결과 당초와 같이 목면시배유지"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심의 의결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졸속의 극치요 정씨측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문씨 측 해명기회를 봉쇄하고 공정성이 결여된 처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평문씨측 이의 제기에 대하여 문화재위원에게 의견제출의뢰
한지 13일만에 정씨측 요구대로 "문익점면회시배지"를 "목면시배유지"로 변경한 것이 신중히 심의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는 필시 문화계청의 고위급 인사가 개입된 하자있는 행정처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7. 97.12.29 한영우 위원의 의견접수에 대한 내용에 3항에서 현재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곳은 문익점의 부탁으로 정천익이 목면씨를 재배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의 명칭을 '문익점면화시배지"로 호칭하는 것은 "문익점이 목면을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라는 뜻이 되므로 오해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목면시배유지"로 바꾸는 것이 그러한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 이다  
5항에서 그러므로 정천익이 목면을 재배한 그 땅(땅의 소유가 누구이던 간에) 위에 "문익점이 목면을 처음으로 재배한 땅"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은 엄연히 사실에 어긋날 뿐 아니라 두게의 사건을 혼란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한영우 뒤원은 97.12 19 문화재 위원회에서 명칭변경심의 결정 후에 의견 제출함)

8. 이상 문화재위원 3명의 의견제출 내용을 점토해 보면 한영우 위원이 3항에서 사적 108호 사월리 106-1번지는 정천익이 목면을 재배한 곳이라고 단정한 것과 5항에서 정천익이 목면을 재배한 그 땅위에 '문익점이 목면을 처음으로 재배한 땅'이라 명칭을 붙이는 것은 엄연한 사실에 어긋날 뿐 아니라고 한 것은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인가? 정동오 위원이 정천익 당시 거주지와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씨를 받아 번식 재배했다는 토지의 고증문제, 김일진 위원이 사월리 106-1은 문익점이 거주 했던 곳이고 정천익은 단성면 사월리에 거주한 사실이 없고 단성면 관정리에 거주했다‥‥ 에 대하여
사월리 106-1번지 땅은 문익점의 생거지로색 생거지와 목화시배지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효자비각기, 행단기, 목면화기, 운창지, 배산서원기, 청향당선생실록, 죽각선생문집, 산청지명고, 단성향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이상 문헌은 진정서에 첨부되어 있음)
정천익이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사월리 106-1에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양속지 권4에

  古跡

  鄭退軒天益甥三憂堂文益漸自 交趾還取 木棉花而歸還退軒種于 巴只之官亭坪漸

  以蕃殖國 中之有木棉始此(1622년)

 

단성향지 인물난 鄭天益 편에도 정천익이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木花씨를 받아 播巴只里하여 그 栽培에 成功하다"로 되어있는 단성향지를 속간할 때 같은 단성향지 243페이지에 '三憂堂 文益漸이 中國에서 가지고 온 木花씨를 받아 傳播하여 그 栽培에 성공하다"로 播巴只里 4자를 빼고 傳播 2자를 위작하여 관정리에서 면화를 재배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정천익 목면시배유지로 바꾸기 위한 을모와 술책으로 꾸며낸 일로씨 이러한 정씨들의 작태를 보고 단성유림에서는 이를 회수토록 조치하고(별첨확인서 참조) 또한 이런 허위?날조된 행위를 항의성토하니 이를 비유 풍자하여 郭公巢託伏卵(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까게하는)이라 하고 있습니다.

 

9 사월리 106-1번지는 일정시대 총독부령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토지등기제도가 처음 도입 실시된 대정2년 11l월 25일에 삼우당 문익점의 부조묘 봉사손인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문택호(文宅鎬)명의로 등기되어 있는 것을아도 이 땅은 오랜 역사 동안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손이 관리해 온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택호는 현 봉사손 문성환의 조부임(별첨 토지대장, 호적등본, 부조묘 관리위원장의 봉사손확인서 참조)
또한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사월리 106-1 138평, 106-2 23평, 108-2 54평, 계 215평은 문교부 고시 제79호 (1959.1.23)로 고적 제154호 문익점화시배지로 지정받아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 소유와 관리하여 유지해 오다가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으로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3조의 규정에 의하여 문교부 고시 제174호(63.1 .21)로 문익점 면화시배지로 재 지정되고 박대통령의 친서에 의하여 문익점 면화사적비를 65년 5월에 건립하여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회에서 40년간 관리해 왔던 것입니다.(고적 및 사적지 지정 관보 참조)

 

10 97.8.13 정씨 대종회장 정호준이 낸 청원서에 의하여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목면시배유지로 변경한데 대하여는 정씨측과 문화재청 공무원이 공모하여 사적 제108호 관련서류를 위조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땅(사월리 96-1)을 끼워 넣는 방법으로 사적지의 내용을 변조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는 편법을 써서 59. 1. 23 고적으로 지정되고, 63.1.21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사월리 106-I  138평(현 토지대장 430㎡) 106-2 23평(현 토지대장 75㎡) 108-2 54평(현 토지래장 36㎡) 계 215평(토지대장에는 541 ㎡)을 끼워 넣어 가지고 문화재 위원회에 부의한 사적 제 108호 명 칭 변경 안건에

  1) 문화재 지정현황

     ⊙소재지 :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I

     ⊙문화재명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 시배지

     ⊙지 정 면 적 1,131 ㎡
 ⊙지정일자 : 63.1.21(59.1 23 고적지정)

   ※이때 문화재명 :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의 면적은 215평이 분명한데 지정면적이 1,131㎡ (342평) 이 되어 있습니다.

97. 8. 13 정씨 문중의 청원에 의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착수하여 99 12.22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목면시배유지로 변경될 때까지, 그리고 명칭변경의안을 부의할 당시는 사적 제108호는 3필지 215평이 분명한레 어떻게 하여 문화재위원회에 부의 할 때 지정면적이 1,131㎡(342평)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는 필시 명칭변경을 가장하여 사적지 내용을 3필지 215평을 4필지 342평으로 변조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사적지의 내용(지번 지적)을 변경하려면 별도 문화재 위원회의 조사 심의를 거쳐 고시하여야 할 것으로 아는데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위계와 공문서 조작으로 96-1번지를 지정문화재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사적지 명칭변경서류철 2-1 ~ 2-4 4매(진정서 30~33페이지 참조)의 지정문화제 실태 조사서를 보면 이 실태조사서는 고적 제154호로 지정할 당시 문교부의 고적지정절차에 따른 현지조사 지시에 의하여 경상남도 산청교육청에 장학사로 56. 6. 4부터 58. 6. 30까지 근무했던 권순익(별첨 경력증명서 참조)이 작성 보고한 고적 154호 지정 문화재 실태조사서인데 2-3(진정서 32,33페이지) 실태조사서는 완전히 위조된 서류입니다.  


59.1.23 고적으로 지정당시에 사월리 96-1번지 124평은 엄연히 이복주 소유로 있었으며
81. 2. 19 정씨 문중의 정흥기 명의로 매입한 땅인데 실태조사서에는 소유자 및 관리자란에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문정동(文正東)으로 허위 기계되어 있고, 토지의 현상란에는 ①"문선생이 시배한 이후로 전은 매년
면화의 시작 기념포로서 면화재배에 공하다".②"토질은 중이며 면화재배에는지임"이라고 1958년 장학사 권순익이 작성자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정천익 신도비(사적비)가 세워져 있는 사월리 96-1번지를 사적 제108호로 거짓으로 끼워 넣기 위한 사술로 문화재청 내부의 공모가 없이는 절대 불가한
범죄행위입니다.
사월리 96-1이 어찌하여 고적 제154호, 사적108호로 둔갑하였는지는 문화재청장이 직접 밝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적 154호 및 사적 108호 지정 관보 참조)

정부의 긍문서가 이렇게 조작 변조된다면 어떻게 정부문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11. 정씨 문중에서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를 정천익 목면시배유지로 뺏을 음모를 꾸민 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만이 아닙니다. 문화재청 기록에 의하면
(77.6.28) - 문화계 12호 p.211


5 면화사적비 건립에 따른 비문작성자 검토


-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에 건립할 비문작성 담당자는 이선근 위원장을 선정함 (진정서 36페이지 문화재청 문서철 3-3)


※65년 5월에 문익점 면화시배지에 건립되어 있는 공적비를 철거하고 정천익 사적비를 세우는데 비문작성자를 당시 문화재위원장이던 이선근 위원장을 선정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필시 문화재청의 주무과장 또는
그 이상의 고위직 공무원이 관련되었을 겁입니다.
 


(78,2,23) - 문화재 13호 p.206


1. 면화사적비 건립

-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에 건립할 면화 사적비에 관한 사항은 동비문 작성자인 이선근 위원장(1977.6.28 제6차 회의시 의뢰함)으로 부터 면화는 문익점 선생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이론이 제기 되었으므로 차기 회의시 이에 대한 고증자료의 제시를 받아 재심의 하기로함
(진정서 35페이지, 문화재청 문서 3-2)

 
2. (78.10.6) 10차 회의 - 문화재 13호 p.22


3, 면화사적비 건립

그간 문씨, 정씨 양 문중의 이견으로 시행하지 못했던 면화사적비 건립사업은 양 문중이 합의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부의안대로 실시토록 심의 의결함

     가. 비명 : 면화사적비(棉花事跡碑)로 변경키로 함.

     나. 비건립 방침 : 현재 사적비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비를 건립함(문익점 사적비                           를 철거하고 정천익 사적비를 세움)

     다. 비정면은 대통령 각하의 휘호인 流芳百世로함 (이것도 날조된 것임)

           비의 규모 :  - 비의 전체높이 4.5m

                            - 비선(오석) 2.7m
                        
- 귀부 90cm

                           - 이수 75cm

                           - 지대석 15cm

                             (진정서 34페이지 문화재청 문서 3-f)  


※65년 5월에 세운 문익점 면화시배지 사적비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비(정천익 사적비)를 세운다는 음모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탐문한 문씨측 문익점 선생 유적 보존위원회에서 이의 부당함을 청와대, 문화공보부장관, 문화재 위원장 등 관계요로에 진정하므로씨 이 음모는
중단되 었다고 짐 작됩니다.
 

"그간 문씨, 정씨 양 문중이 합의함에 따라"고 문화재청 기록에 있는데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이며 이는 필시 당시 주무과장이던 정씨 직계손인 문화재 관리국 제1과장인 정모씨가 주도한 행위이며 이러한 조작행위에 대한 항의는 당시 제출한 청원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77.10.I5 및 77.12.5 청원서 사본 별첨)

 

12. 이로부터 다시 20년 이후로 넘어와서 1997년8월13일 정씨 종친회에서 또 다시 사적 제108호 명칭변경을 획책하여 청원서를 내게하고 청원서를 접수한지 126일 만에 사적지 명칭을 변경한 경위와 과정을 살펴보면 사실의곡, 허위, 날조, 문화계청에 보관되어 있는 고적 및 사적지 지정 문서를 변조해 가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면에는 앞 11항에서 지적했던 정모씨가 문화재청국장으로 있으며 문화제청 내부에서 공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화계청에서 처리한 사적 제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명칭변경
처리 경위를 보면 문화재청의 주무과장이 적극 개입하여 정씨측이 유리하고 문씨측에는 기회를 주지 않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도 형식적으로 심의한 흔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국가지정 문화계인 고적과 사적소재지의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고 부의안건도 사실과 다르게 문화제가 아닌 정씨측 사적비가 서 있는 토지를 슬그머니 끼워 넣는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로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한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 결정은 당연히 취소되어야 할 것이므로 사적 제108호 명칭변경은 재심의하여 문익점 면화시배지로 원상복구하여 주시기 바라옵고 만약 이를 이행치 않으면 이러한 비위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성토할 것임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명칭변경에 중요한 오류를 범하도록 공문서를 위조하여 행사한
     전 문화재청정호준(정천익씨 방계손)에 대해서는 개인의 처벌이 목적은 아니고
     명칭변경의 부당성을 밝히기 위하여  문영훈 충선공파 종회 회장님의 고소로
     충남 부여경찰서에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청원서

문서번호

남대충 제2002-1호

시행일자

2002. 2. 15

수신

감사원장 제작 문병달

참조

총무과장

제목

문화재 사적 제 108호 명칭 변경의 부당함에 대한 청원

1. 귀원의 발전과 귀하의 건승하심을 기원합니다.

2. 일찍이 문교부는 1959년 2월25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셩면 사월리 106-1 전 138평 106-2 전 23평 108-2 전 54평을 문익점 선생의 고적으로 지정하였고 1963년 1월21일 다시 문교부 고시 제174 문화재 보호법 부칙 3조 규정에 의하여 사적108호 문익점면화시배지로 지정하였으며,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문익점면화시배사적비를 세우도록 친서를 보내고 재정을 내주었습니다.
그후 1984년 후손들이 2,000여평의 토지를 마련하고 면화시배전시관 건립을 정부에 건의하였던 바 정부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30여억원의 공사비로 전시관을 건립, 일년여 동안 산청군 및 우리 종친회의 협력하에 1997년 면화시배전시관을 개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위 지역이 고적 및 사적지로 지정되고 마침내 면화시배전시관까지 건립하게 된 연유는 문익점성생이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가져온 면화씨를 몸소 시배했던 곳이기 떄문입니다. 이곳 배양리는 문익점 선생의 생거지로서 효자비는 경상남도지방문화재로 손수 심으신 은행나무는 경상남도 지정 보호수로 각각 보존되고 있으며, 생거지와 목화시배지에 관한 내용은 효자비각기, 행단기, 목면화기, 운창지. 산청지명고 단성향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문익점선생의 외손으로 배양리에서 태어나고 거주했던 이원(1501-1569) 이광우(1529-1619) 양선생의 문집에 배양리는 고려조의 판서 주세후의 옛터전이다. 강성군 문익점은 주공의 사위로서 이곳에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배양리의 매산서원 묘사의 상량문을 지을 때 문공이 목화를 심은 밭에서 흙을 채취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기와를 올렸도다' 라고 했으니 배양리는 문익점 선생의 생거지요 면화시배지가 분명한 까닭에 1963년에 결정했던 사적 108호 문익점면화시배지 지정이 옿은 일이었습니다.(배양리는 문익점 선생의 처남 주경이 호가 배양재이므로 그 호를 연유로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배양재행장에 기록되어 있음)

4. 반면 정천익 선생은 그의 생거지인 파지리(현단성면 관정)에서 면화를 시배하였습니다. 그곳은 배양리에서 6km 떨어진 단성면 관정리로서 1622년에 간행된 진양지 속편과 단성향지에 그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관정리는 정천익 선생의 선조 은열공 정신열이 호가 관정이므로 그 호를 연유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산청지명고는 전하고 있음)

.진양지속지권 古蹟 4권13쪽에  鄭退軒天益甥三憂堂文益漸自交趾還取木棉花而歸遺退  軒退軒種于巴只之官亭坪漸以蕃殖國中之有木綿始比(1622)

단성향지 243쪽에 정천익의 호는 퇴헌이요 진양인으로 은열공 관정 신열의 후로서 예의판사 유의 자이다. 고려공민왕조에 문과에 장원하여 판부사전객령을 역임하다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 곤 목화씨를 받아 播파지리하여 그 재배에 성공하다...

역시 동국여지승람, 세종지리지, 산청읍지(군의 성씨 분포), 단성읍지 등의 성씨조에 정씨가 보이지 않으며, 당시의 관정은 진양에 속해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익점선생의 면회시배지는 생거지인 단성의 배양리이고, 정천익선생의 면화시배지는 생거지인 진양 관정리가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이러한 사실을 고찰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객관성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질의
① 명칭변경사유에서는, 문헌상 기록(고려사, 태조실록 등)에 의한다고 했는데 고려사, 태조실록 이두 책에는 시배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시배지에 대한 결정을 하면서 지방의 인적 물적 자원의 파악이나 지리의 소개에 목적을 둔 진양지, 운창지, 단성향지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울러 문익점 선생이 면화씨를 워난라에서 가져와 헐벗은 백성들에게 옷입힌 공이 크자 우왕은 전객주부를 내렸고,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충선공 강성군에 봉하였으며, 세종은 태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부민후에 추봉하였으며, 세조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정조는 도천서원에 사액하여 선생의 국리민복 사상을 기리도록하였습니다.(정천익 선생은 고려사와 태조실록 이외에는 공적기록이 없으며 국가로부터 공로를 기리는 은전이 전혀없슴)
그런데도 명칭변경사유의 문헌 고증자료에서 공작사료인 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정조실록은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②국사편찬위원장이 의견접수(1997,9,11)이후 불과 64일만에 단2회의 족속회의로서 문화재 명칭을 변경하기로 의결(1997.10.31)하고 목면시배유지로 명칭변경 예고(1997.11.10)를 하였으니 신중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지정된 문화재 명칭을 민원에 의해 변경하면서 그 문화재를 보존 관리해온 자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결정해도 되며, 현지 답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요?

③1997. 12. 1 우리 종친회에서 명칭변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자 문화재청은 1997.12.6 문화재위원 9명에게 검토의뢰를 하였으나 정작 의견제출자는 정동오위원과 김일진 위원 두사람뿐이었습니다.(한영우위원은 1997.12.19 목면시배유지로 심의 결정후 1997.12.29 의견제출) 9명중 단 두명의 의견 제출인데다 정동오 위원은 제반 사실의 고증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며, 김일진 위원 역시 정천익이 사월리 소재의 사적108호 사적지가 아닌 다른 곳 또는 관정리에 면화를 심었다는 증거가 있다면 현재 지정된 사적지(목면시배유지) 자체의 지정문제가 재검토 대상이라고 이견 제시했는데도 문화재청은 조사확인도 하지 않은채 4일후인 1997.12.19 전격적으로 문화재 명칭 변경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문화재위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 정당한 일이며 심의 절차의 신중하지 않음과 문화재 명칭변경을 이렇듯 쉽게 처리해도 되는지요

청원

①이상과같이 문,정 선생의 면화시배지가 명백히 다른데 문화재청은 사월리106-1 전 138평, 106-2 전 23평 108-2 전 54평에서 면화를 두 선생이 같이 심었던 터라고 진양정씨측의 의견만 수용하여 사실을 왜곡 문화재심의위원회에 부의하였습니다. 또한 문호재위원 9명중 의견 제출한 정동오 위원과 김일전위원의 의견조차도 반영이 되지 않은채 문화재 명칭을 변경하였기에 그 부당함을 밝히며 재심해 주실 것을 청원합니다.

2002년 2월 일


경삼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5번지내 신안사재
남평문씨 대종회 충선공파종친회 회장 문칠순
삼우당 문익점선생 유적보존회 회장 문  백
남평문씨 대종회 경상남도 종친회 회장 문용호

 

청원서의 회신

문    화    재     청
(www.ocp.go.kr)

우 302-701/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920/전화(042)481-4809/전송(042)481-4892
사적과 과장 김종진  연구관 윤광진 담당자 김동대(kddae100@ocp.go.ke)

문서번호 사적 86740-348
시행일자 2002. 05.16(10년)

수      신 남평문씨 충선공파종친회장

참     조

제     목 : 진정민원에 대한 회신

         1. 귀 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귀하가 감사원 및 대통령비서실에 제출, 우리청으로 이첩된 사적 제 108호 명칭변경에 대한 진정사항에 대해서는 문화재위원등 관계전문가의 검토 등을 거쳐 처리할 예정이므로 다소 시일이 소요되겠음을 알려 드리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

문 화 재 청 (관인)

 

신안사제 건의

제목

문익점 목면시배지 명칭환원에 대한 건의 및 요망사항

건의자

신안사제(2002년 4월 5일)

충선공파 종희의 목적이 선조님의 유적을 보존관리하고 숭조사항을 고취시켜 일가상호간의 족의를 돈독히 하기 위한 것임으로 임시종회를 개최하여 일가들에게 사안설명과 남평문씨의 중대한 사건임을 인식시켜야 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의 사항들을 건의합니다

1. 사적 제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명칭이 목면유지로 변경된 것을 되돌림
2. 목면사적을 왜곡한 정천익 선생신도비를 철거또는 이전시키는 일

3. 잘못 수록된 삼우당선조님의 역사를 바로 찾기위한 대책위원회 설립

전담기구의 세부사항

인원구성

일가 중에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근무경력자 및 연관 부서의 근무 경력자 등

연구과제

(1) 명칭변경에 대한 배경분석
(2) 목면사실에 대한 확실한 고증자료
(3) 정천익선생에 대한 목면사실 (4) 문화재청, 문화재심의위원, 국사편찬위원 방문설명 (5) 잘못변경된 명칭을 환원이 되도록 한다.

현장확인

1.신도비문 내용확인

2. 김황선생 후손을 방문하여 폐기사실 확인과 비석 철거 협조 요청

3. 진양정씨종중 방문하여 단성면 사월리에 면화를 처음 심었다는 뚜렸한 사적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확인과 사실이 아니면 비석 철거 요구 및 법적대응

4. 1622년 간행의 진양지와 단성향지의 기록확인
사위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종자를 얻어 관정리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퍼짐

역사세우기

1. 충신을 역신으로 만든 유부덕흥군으로 왜곡된 고려사
2. 월남(교지국)으로 3년간 유배간 사실을 빠트려 목면사실을 왜곡한 내용(태조실록)
3. 정천익의 아들 문래가 제사법을 발명하였으며 그의 손자 문영이 면포짜는 법을 고안했다고 기록된 완벽국사대사전 등

활동사안

1. 사학자, 대학교수에게 연구토록 의뢰한다

2. 역사에 가려진 목면사실을 바로 찾는다

문익점선조님에 대한 학술발표회(목면사실, 충,효,도학)를 개최

연구발표 논문집, 책자의 발간

기타 사항

시배지명칭이 목면시배유지로 변경됨에 따라 문익점선생의 이름이 없어졌기 때문에 관광객이 누구의 사적지인지 잘 알수 없으므로 시배지 주위와 전시관 내외에 문익점 선생의 사적지 시배지 전시관이라는 것을 알수 있게끔 시설보완이 시급함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①태종실록1권20 ②태종실록 19권35편 ③세종실록150권34편 ④세조실록3권28편
⑤정종실록20권27편 ⑥정종실록24권 664편 ⑦정종실록 41권

지방기록

①수문쇠록1권356편 ②진양지 ③단성향지 ④단성읍지 ⑤산청지명고
⑥목면화기 ⑦운창지 ⑧행단기 ⑨효자비각기 ⑩배양재향장(상주주씨 연원보)
⑪청향당일기 ⑫죽각선생문집

 

신문기사

한국 경제신문[사회] 2000년 02월 22일 (화) 15:33

"문익점 사적지 명칭변경은 부당" 행소

원나라에서 고려로 목화씨를 처음 들여온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인 남평문씨 충선공파 종친회는
22일 당국이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문 선생의 사적지 명칭을
`문익점 면화시배지'에서
`목면시배유지'로 바꾼 것은 부당하다며 문화재청을 상대로 서울 행정법원에 소송을 냈다.

종친회는 소장에서 "문화재청은 문선생이 5개, 장인인 정천익이 5개를 심었지만 정천익이 심은 목면씨 1개에서 싹이 나와 전국에 전파된 만큼 사적 108호의 명칭 변경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지만 문헌에 따르면 정천익은 사적 108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목면을 심은 것이 분명하므로 명칭 변경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서울=연합) 이충원기자 chungwon@yonhapnews.co.kr

 

                         문익점 첫 목화재배지는 경남 산청군 사월리 <동아일보   2003-09-25 19:21:13> 

문익점 첫 목화재배지는 경남 산청군 사월리(사적지 108호)가 분명합니다.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선생이 목화를 처음 재배한 곳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문경현(文暻鉉·68·한국사) 경북대 명예교수는 최근 ‘경북사학’이란 학회지(제26편)에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문익점의 사행(使行)과 목면 전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어 “정 선생이 재배한 목화가 성공해 10년 만에 온 나라에 확산된 것은 정씨의 큰 공이지만
그렇다고 문 선생이 목화를 첫 재배한 곳까지 잘못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경남 진주와 단성 지방에는 ‘정천익 선생이 단성에 살면서 목화를 재배해 배양마을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문 교수는 또 그동안 논란이 돼 온 문 선생의 출생 및 사망 연도,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시기 등에 대해
문헌을 정밀 분석한 결과
△출생은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
△원나라 사신으로 간 때는 1362년(공민왕 11년) △귀국은 1364년(공민왕 13년)
△면화 시험재배는 1365년(공민왕 14년) △사망은 1398년(조선 태조 7년)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는 “문 선생은 중국 원(元)나라 강남지방에서 목화씨 10개를 가지고 공민왕 13년(1364년) 10월 고려에 돌아온 뒤 곧 고향인 산청에 내려왔다”며 “문 선생은 목화씨 절반을 고향마을(사월리)에서, 문 선생의 후처 아버지였던 정천익(鄭天益) 선생은 사월리에서 6km 떨어진 진양 정씨 집성촌인 관정마을에서 나머지 절반을 재배했다”고 밝혔다.

 

 

경남종친회장의 발언에 대한 답변

2002년 4월 16일 충선공파 상근부회장 문병준

문익점면화시배지의 명칭이 변경되어 종인의 한 사람으로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갑 전회장님은 8년간(1992.4.5~2000.4.4) 회장직을 수행하시면서 재정이 없어 사비로 종친회 일을 보시면서 문화재 위원, 문화재 국장, 진양정씨 대종회장, 경북대학 문화재위원 문정현 교수 등을 수차례 방문하고,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참고서류를 첨부한 수 차례의 이의를 제기하였고 소송을 맡아서 근 2년간 심혈을 기우렸습니다
또한 대종회 태준회장님과 문희상 국회위원님도 문화재청 방문과 진정서를 작성 제출하였으며, 대종회 건모회장님, 대식 전회장님도 소송비용 500만원씩 부담하고 재구 고문님도 관계위원들을 여러 차례 만났으며, 병운 전 사무국장도 명칭유지에 대한 자료제출 등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문화재 위원들은 고려사와 이조 태조실록 만을 주장하여 명칭변경이 되었고, 
2000년 4월5일 회장직을 맡은 칠순회장님은 “나는 회관건립 성금모금에 전력하고 소송관계는 용호부회장님이 전담하되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업무를 분담하자”고 제의하여 2000년 11월 23일 유적보존 위원회(위원장 문백)가 발족했습니다.
문백 위원장님은 공직에 계실 때부터 종사에 많은 관심을 가져 도천서원에 물심 양면의 지원도 하는데, 늦게나마 할아버지를 위하여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실 만큼 모두 힘을 합하여 수고 하셨습니다만 .
종인들이 합심하여 명칭회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함에도 대책위원회의 일선에 서셨던 용호부회장님은 수차례의 종인들의 모임에서 "종회와 회장의 무관심으로 발생한 일이라" 하여 분열을 초래한 발언에 대하여 회의 당시는 시간관계상 상세한 해명을 드리지 못하였기에 늦게나마 경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앞날을 위하여 일치단결하고 우리의 목표인 회관의 매입은 물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유적보호위원회의 활성화로 할아버지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는 학회를 만들어  사적 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의  명칭을 복원하고 산하 각 유적지 관리와 후손들이 화합단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은 이사님들께서 앞장 서 주시고 전국의 종인들이 협조하여 우리들의 숙원 사업이 꼭 이룩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 하겠습니다.

2001년 충선공이사회(강성서원)과 경남종친회의 발언에 대한답변

①종인들의 무관심과 전회장님의 무성의와 안일한 대응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영갑회장의 노력은 아래의 일자별 대응 내용을 참고 하십시오.
②문화재청의 9회의 회의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여 종인들이 분통을 터트린 내용은
    문화재 위원회의는 자체회의로 종인들은 참석할 수 없음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왜곡
 
③칠순회장님 역시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협조하지 않으며

   2000년 4월5일 회장직을 맡아 “나는 회관건립 성금모금에 전력하고
   소송관계는 용호부회장님이 전담하되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업무를 분담하자”고 제의하여    2000년 11월 23일 유적보존 위원회(위원장 문백)가 발족했습니다.

④문백 유적보존위원회 위원장은 발족후 6개월이 지나도 회의조차 소집하지 않아
   나 혼자 70여만의 경비를 부담하며 뛰어 다녔다”

    소송관계 서류작성이나 정씨 문중과의 문제들을 위원장님께 사전 보고나 상의도 없이
   
○○부회장님께서 독단으로 일방처리 하였으며
   종회는 회비로 운영되는데 회비 120만원(97, 98, 99, 2000년 4년간)이 미납입니다.

2001년 3월 27일 충선공이사회(부산시청)의 발언에 대한답변

①칠순 회장님은 성금거출 한 것 외에는 2년 동안 한 일이 없다
   할아버지 위상이 떨어졌는데도 전혀 무관심하고 나를 피하며 전화도 받지 않는다,

   답 :  5개의 사업에 8,000여만원의 예산을 투입하였고  소송관계는 유적보호 위원회에서 하기로 한 조건부 회장 승낙이었다.

②할아버지를 위한 일을 하는데 돈 한 푼 주지 않고 금년도 예산에도 한 푼 책정하지 않았다.

    답 : 2002년도 예산서 작성시 예산책정을 건의한 일이 없었으며     비용에 대한 신청이나 사용 후 명세를 보내지 않았다

③ 2심 소송에서 공판이 네 번이나 있었지만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답 : 1심내용이 법원에서 다룰 사건이 아니라고 각하된 사건이니 변호인이 선임을 사양하였고
         영갑회장님도 항소를 반대하였으나 부회장은 항소를 해야 판결시까지 명칭이 유지되니
   일할 시간만 벌면 된다고 요구하여 항소를 제기하게된 것입니다
   실무를 맡은 부회장님은 몇 번이나 참석 하셨다는 말씀은 없었고,
   97년 7월 18일 대책전문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회의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 건에 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그 동안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은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