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공과 퇴헌공의 기록 비교

역사기록

생거지

목화시배지

 

 

목면의 역사기록 비교

내용

문 익 점 선 생

정천익선생

세조실록
(3권28편)

오동방에 예부터 목면종이 없더니 전조문익점이 사명을 받들어 원국에 유하다가 비로서 얻어와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두루 퍼지니 지금까지 귀천과 남녀의 구별없이 모두 면포를 입는지라 익점의 공은 만세의 민리를 일우웠으니 그 덕택이 생민에 피하였음이 어찌 적다 하오리까 사후를 세우고 춘추에 본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케하고 그 자손도 일컬어 공신이라 하여 죄도 유하고 녹용하라.

기록이 없음

정종실록
(20권27편)

일남에 귀향가서 3년만에 비로소 중조에 돌아올새 목면을 잠취하여 사람들에게 직조을 가르치니 그 백성에 리됨이 이와 같은지라 공정대왕이 그의 의민한 대공을 생각하시여 강성군을 추봉하시고 태조조에서는 명하여 서원을 세우고 세조조에서는 부민후를 봉하시고 시호를 사하여 충선이라 하시고 사전을 정취하셨으니 이제 이 은객의 청함은 다사의 공의로 나온것이라 조가숭상지도에 있어 마땅히 의시할지어라 종지하시다

기록이 없음

정종실록
(24권664편)

강성군 문익점이 일찍 여조에서 도학과 풍저이 세상에 존경한바되고 국조유현이 거개 칭술하는데 면목상 내지사같은데 이르러서는 실로 동방에 옷입힌 대공이 되는지라

기록이 없음

정종실록
(41권18년12월)

세상에 이와 같은 미물이 있어서 다행이 국내에 치종을 하였으니 마땅이 백성의 과종을 주어서 가르처 풍속을 이루어서 일국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미리을 힘있게 문씨의 면종과 같이 함이 가함이라

기록이 없음

수문쇠록(1권356편)

고려말 진주인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귀로에 면종을 잠정하여 가져왔으며 또한 그는 취자차와 소사차까지 만들어 함께 가져왔음으로 인하여 면화제배와 면포직조법이 경전되어 미만백년에 전국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국인의 상하가다 면포를 전용하게 된 것은 그 효과가 마포에 비하여 오배가 되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음

 

생거지 비교

내용

문 익 점 선 생

정천익선생

면화시배지

고려우왕9년계해(1383)여조에서 마을이름을 효자리라 명시하고 문익점선생이 살아계실 때 효자비를 세운곳으로 현재도 보존 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최초로 부동산등기령시행시(1913.11.15)부터 사손인 문택호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남평문씨 충선공파종친회 명의로 되어있음.

정천익선생께서는 단성면 사월리배양동에는 아무 연고가 없는데후손들이 연고를 만들기위해1994년 10월 19일 단성면 사월리에 전542평방미터을 구입하여 2000년 3월 17일 퇴헌정천익선생신도비를 세움.

소유자...진양정씨은열공파대종회

진양지속편권4-13고적(16220)

정천익의 사위 문익점이 교지에서 목면화를 가지고 와서 퇴헌에게 주니 퇴헌은 파지지 관정평에서처음심어 온나라에 번식되었다
(파지지관정은...지금의 단성면 관정리)

단성향지(178)

원에 갔다가 적교지에서 목면종을 구하여 국내에 널리 전파시켜 의피생민의 공을 남겼다. 효행으로 적려가 내려 효자리라 하였으며....

행단기

배양촌에는 삼우당 문선생이 사시던 옛터가 있고 문행한그루가 서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선생께서 손수심으셨다는 것이다(유문용행당귀문중) 경상남도지정보호수...노목수령610년

효자비각기

강성현의 남녁에 있는 배양산리는 전의 왕조의 분인 좌사의대부문공이 살던 옛터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서있는데 홍무16년 계해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표창해서 세우게 명하신것이었다. 가정사십년계해립비지후백팔십유일년야. 가정사십이년계해삼월 일 진보 이 황기

산청지명고(배양동) (276쪽)

삼우당의 처남되는 주판서경의 효자비문에 자호를 배양재라 한 이유가 지명에 유례하였다고 되어있다. 이조초 이태조 삼우당의 충성에 감복하여 문익점선생이 우거하던 동리라하여 효자리라 명하였던것인데 그리고 그때는 동명이 사동이었다. 삼우당선생의 증손녀되는 숙부인남평문씨께서 두아들을 데리고 이곳 친정마을로 와서부터 500년이 흘렀다.

고려사
인물탐구

문익점의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집은 사월리529번지로 현재 이병이소유이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시사월간려사인물탐구...정순태)

 

면화시배지 기록 비교

내용

문 익 점 선 생

정천익선생

생년월일

고려충혜왕 신미생

생년월일 미상

고려사
(111권46편)

목면의 종자를 얻어와서 그장인 정천익에게 속하여 심었으나 처음에 배양기술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죽고 단한줄기가 살아나 3년만에 크게 번식하였다.

문익점선생
기록과 동일

이태조실록(14권14편)

원조에 갔닥 돌아올때에 길가에 있는 목면나무를 보고 그씨 십여개를 따서 필낭에 간직하여 와서 갑진년에 진주에 이르러 그씨앗반을 마을사람전객령치사정천익에게 주어 심어서 기르게하였더니 오직한개만 살게되었다. 천익이 가을에 이르러 그열매 백여개를 취해서 해마다 가종하였다.

문익점선생과
동일

태종실록
(1권20편)

문익점이 처음으로 강남에 들어가서 목면을 발견하여 그 종자 두어개를 얻어와서 진양촌집에 보내어 비로서 목면베를 짜서

진상하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하여 널리 일국에 퍼져서 백성상하가 모두 얻어 입게되니 이것은 다 익점이 주는 베라 백성에게 큰 공덕이 있었다.

기록이 없음

태종실록
(19권35편)

사람이 힘입어 사는 것은 의식뿐인데 우리 동방에 본래 상과 파만 알고 목면이 무슨물건인지 알지 못하였더니 문익점이 사신으로 중원에 가서 씨를 얻어 돌아와서 우리 백성에게 은혜하니 상으로 경사대부로부터 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의을 모두 이것으로 하였으니 그 공이 백성에게 있음이 가히 크다하겠도다.

기록이 없음

세종실록
(150권34편)

동방에 본래목면이 없더니 문익점이 서장관으로써 경사에 조하였다가 그 종자와 경직기술을 구득하여와서 호분에 심어서 향곡에 전하여 드디어 일국에 편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