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대응

문씨종친회

신안사제

충선공파1차통고

충선공파2차통고

경남종친회

건의서

정천익선생의 신도비에 대하여 남평문씨 들이 철거를 요청하는 글들입니다.
우리의 외조이신 퇴헌 정천익 선생님의 업적을 함께 찬양하여야 함에도
이런 글을 적어야 하는 우리의 입장도 딱하고 황당합니다만,
문익점 선조의 공을 가로채는 황당한 내용을 그냥 보고 있을수는 없습니다.
진양정씨 문중에서는 역사 사실과 맞지 않는 잘못된 비석은 철거하시고  
양 문중이 화합하고 함께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남평문씨종친회(2000년 8월)

600년의 유구한 세월을 두고 온세상이 잘 알고 있는 목면유래사실을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바 이나
최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입구에
高麗判府事致仕 晋陽君 文忠公 退軒 鄭天益先生神道碑를 밤중에 세웠는데 비문내용이
역사문헌을 허위날조하여 문익점선생의 목면사적을 왜곡하여
정천익 선생을 높이려는 계략으로 인하여 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세인의 이목을 현혹케 한 것을 묵과할 수 없어 별첨과 같이 역사문헌에 위배된
정천익선생신도비 철거를 촉구하는 통고서를 발송한바 있음을 아뢰옵니다.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선비의 고장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하여
도내 유지님께서 현명한 판단과 협조를 바라고저 감히 이 글을 올립니다.

 

新安思齋 山下宗人一同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2000년 8월

일가님께 보고 말씀드립니다
성하지절에 일가님의 가정에 화평과 축복이 함께 하시고
하시고저 하는 모든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보고드릴 말씀은 사적108호 문익점 면화시배지 100m지점에 진양정씨 문중에서 퇴헌 정천익 선생 신도비를 세우면서 삼우당 선조님의 목면사실을 왜곡하고 정천익선생을 推尊할 目的으로 歷史文獻을 허위날조 하였기 때문에 별첨과 같이 역사문헌에 위배된 퇴헌 정천익 선생 신도비철거를 촉구하는 통고서를 내용증명으로 발송하였습니다. 郡內 有志님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셔서 현명한 판단과 協助를 받고 있음을 우선 보고 드립니다.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진양정씨 문중에서 임의로 發刊한 청계지를 보시고 신도비문을 瑕하신 김황선생께서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뒤에 아시고 1970년 2월 18일 정씨문중으로 자기가 찬하신 비문을 폐기 없애버리도록 통문한 비문을 버리지 않고 30년이 지나고 김황선생께서 작고하신 뒤에 死文化된 비문을 도용하여 그대로 비를 세운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40만 남평문씨 후손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허위날조된 이 신도비를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배양마을에 그대로 비를 세워둘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비를 세워둔다면 삼우당 선조님의 목면사실은 완전히 뒤바뀌고 맙니다.
우리가 힘만 합한다면 허위조작 날조된 이신도비를 철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허위날조된 이 신도비를 꼭 철거시키고 삼우당 선조님의 목면사적과 衣被生民의 大功을 萬世에 영원토록 보존합시다.

 

충선공파 종친회1차 통고서

회장 문칠순  2000년 6월

역사문헌에 위배된 고려판부사치사진양군문충공퇴헌 정천익선생신도비명 철거를 촉구합니다.
서기 2000년 3월 17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8-8번지에 세운
고려판부사치사진양군문충공퇴헌정천익선생 신도비문이 역사문헌에 위배되어 상기 비문을
찬(撰)하신 김황선생으로부터 수문 회수 폐기되어 사문화(死文化)된 것이며 목면사적을 왜곡하였음으로 상기비석을 즉각 철거하고 공식사과할 것을 촉구합니다
.
    1. 상기비문을 撰하신 김황선생께서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뒤늦게 아시고
        1970년 2월 18일
       귀문중에 폐기토록 통문하여 버리도록 하였음에도 30년이나 경과되고 김황선생께서 작고하신뒤에        사문화된 비문을 그대로 도용하여 비를 세운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며

    2. 진양정씨 은열공파 문중에서 역사고증 없이 임의로 만든 청계지를 보시고 김황선생께서 비문을
        찬 하였는데 청계지 내용이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뒤늦게 아시고 비문을 폐기토록 한 것임.

    3. 김황선생께서 버리도록한 비문을 1980년 7월 진양정씨 은열공파 문헌록을 발간하였는데
        문헌록 내용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8-8번지에 세운 비문의 내용이 찬하신분은
        같은 김황선생이신데 내용이 각기 틀리도록한 것은
정씨문중이 임의로 역사문헌을 허위날조
        기록하여 충선공 문익점 선생의 목면사적을 왜곡시키고 정천익선생을 높이려는 계략으로밖에
        볼수 없으며 이런 행위는 김황선생을 모독하는 기만행위이며

    
4. 청계지에도 역사문헌에 없는 봉후 봉작 시호 면화사적등을 진양정씨(정상규, 정필규)문중에서
        임의로
허위기록 되어 있음

    5. 문학박사 이은상선
생께서 1971년 5월... 문충공 정천익 사적비문을 찬하였는데 사기(史記)와
        위배되었음을
 아시고.. 1972년 1월 13일 수문폐기통문  
        수문폐기 이유는 진양정씨 문중에서 임의로 만든 청계지에 의해서 비문을 찬하였기 때문에
         
(1) 문익점선생이 정천익선생의 문하생이 아니므로
         (2) 목면씨를 처음 심은 곳이 단성의 배양동이 아니므로
         (3) 조선 태종때 선생에게 진양군에 봉하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는 근거가 증명되지 않음으로

    
6. 문학박사 이병도선생께서 1974년 7월... 퇴헌정공천익목면사적비문을 찬하였는데
        비문중에 약간 잘못이 있어... 1976년 9월 30일 수문폐기 통문의
수문폐기 이유...
        
(1)배양촌에 거주사실이 없음으로
        (2)봉군(封君)시호가 진양군 문충공이 아니므로
        (3)청계지내용이 진양지와 다르므로
        (4)삼우당이 퇴헌의 문인(文人)이 아니므로
        (5)양가(兩家)의 시비에 개입함을 원치 않음으로


     7. 이헌주선생께서 관정 정선생 묘정비문을 찬하였는데 비문중천익정객령판부사... 이하...
         면종시파부분 17자삭제  1987년 11월 16일 삭제수문 始播棉種成功병取子소絲兩車以織綿布
         17자 삭제


     8. 1988년 1월 17일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8 청계서원에 세워져있는 은열공정신열묘정비문안중
         시파면종성공자중 시(始)자를 1988년 1월 28일까지 삭자작업을 완료한다는 동의서
         진양정씨 문중대표 정덕환 정호준(은열공파종회장) 정기형

     9. 상기비문에 우리동방에 목면을 처음으로 심어 온나라에 펴고 만백성에게 옷을 입힌 큰공을 세운
        분은
  고려 공민왕때 판부사를 지내시다 치사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이시다
        라고 되어 있는데
         (1)고려사에는 부탁하여 목화를 심게 하였다라고 되어있고....고려사권 111-406
              乃還得木棉種歸屬其舅鄭天益種之初不曉   培養之術機槁止一莖在比三年遂大蕃衍

         (2)태조실록에는 반을 나누어서 심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며 문익점의 심은 것은 죽고
             정천익이 심은 것은 한그루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태조실록권 147-6
             還見路傍木棉樹取其實十許枚盛襄以來甲辰以其
             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種而培養唯一枚得生

          (3)
진양지에는(1622) 정천익의 사위 문익점이 교지에서 목면화를 가지고 와서 퇴헌에게 주니
              퇴헌은 파지지관정평에서 처음 심어 온나라에 번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으로.....
              진양지속지권 4-13
古蹟
              鄭退軒天益甥三憂堂文益漸自交趾還取木棉花而歸遺退  軒退軒種于巴只之官亭
             坪漸以蕃殖國中之有木綿始比
             
문익점선생께서 교지땅으로 유배되셨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시면서 가지고 온 목면화씨를
             정천익 선생께서 얻어 단성면 관정리 고향에서 심어 3년만에 번식시켜 온나라에 펴지게 하여
              만백성에게 옷을 입힌 큰 공을 세운분은 정천익 선생이시다 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10. 상기비문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배양동에 받들어 세우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일찍이 선생의
           조부때부터 사시던 곳이고 또한 선생께서 목면을 처음심어 성공시킨 사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곳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배양동에는 정천익 선생께서 목면을 심은 곳이 없으며
              거주한 사실도 없음. 
            
*정천익선생이 사위 문익점선생으로부터 목면종자를 받아 재배한곳은 서기 1622년에 제작된
              진양지에
 분명하게 나와 있듯이 위 사월리로부터 약 6km 떨어진 단성면 관정리이며
              지금도 진양정씨 20여호가 거주함.

            *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에는 정천익 선생의 사적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수 없음.
            *눈가림식의 연고를 만들기 위하여 1976년도에 밭을 취득하여 그 자리에 신도비까지 세운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1. 상기비문에 원나라 수도에서 목면씨를 가져왔고 마땅한 땅가려 처음으로 심었다네 라고 했는데

            *정천익 선생께서 원나라에 간 사실도 없으니 원나라에서 목면씨를 가져온 것은 웃음거리이다.
      12. 상기비문에 선생의 봉작과 시호는 조선태종조에서 추록했으니..로 되어 있는데
           *정천익 선생에게 진양군 문충공이란 봉작과 시호를 추록한 사실이 없음.
           *한국인명대사전등 시호 일람표 참조
           *상기비문내용이 역사문헌에 위배된 곳이 너무 많음을 볼 때 역사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역사문헌을 별첨하오니
 잘 살피시어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유첨 : 1.고려사111권46편 2. 이태조실록14권14편 3.태종실록1권20편 4. 태종실록19권35편
          5.세종실록150권34편 6.세조실록3권28편 7.정조실록20권27편 8.정종실록24권664편
          9.정종실록41권12월 10.수문쇄록1권356항 11.목면역사기록비교표
          12.사적제108호문익점면화시배지 비교표

 

충선공파 종친회 2차 통고서

회장 문칠순  2001년 1월

역사 문헌에 위배된 고려판부사 치사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선생 신도비 철거를 재 촉구 합니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상기 신도비문에 역사 문헌을 허위 날조하여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木棉史蹟이 왜곡되어 명예가 훼손되므로 즉각 철거하고 공식 사과할 것을 2
000년 6월 15일 귀 문중으로 통고하였음에도 상당 기간이 경과된 于今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유감지사이며 비문 내용이 역사문헌을 위배된 곳이 너무 많아 다음 4가지 사항만 우선 지적하오니 조속히 철거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상기 비문에 우리동방에 목면을 처음 심어 온 나라에 펴고 만 백성에게 옷을 입힌 큰 공을 세운 분
        은 고려 공민왕때 판부사를 지내시다 치사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이시다...라고
        되어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역사 문헌에도 정천익선생께서 우리 東方에 목면을 처음 심어
        만백성에게 옷을 입힌 큰공을   세웠다는 사실과 역사 기록은 없습니다.
    
*문익점선생에 대한 역사기록에는 우리 東方에 목면을 처음 심어 만백성에게 따뜻한 옷을 입힌      큰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역대 왕조실록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태종실록 1권20편
      문익점이 처음으로 江南에 들어가서 木棉을 발견하여 그 종자 두어개를 얻어와서 진양촌집에 보내어       비로서 목면베를 짜서 進上하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하여 널리 一國에 퍼져서
      백성 上下가 모두 얻어 입게되니 이것은 다 익점이 주는 베라 백성에게 큰 공덕이 있었다.
    ○ 태종실록 19권 35편

      사람이 힘입어 사는 것은 衣食뿐인데 우리 東方에 본래 桑과 麻만 알고 목면이 무슨 물건이지
      알지 못하였더니 문익점이 사신으로 中原에 가서 씨를 얻어 돌아와서 우리 백성에게 恩惠하니
      위로는 鄕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庶民에 이르기까지 上下衣를 모두 이것으로 하였으니 그 공이
       백성에게 있음이 가히 크다 하겠도다.
    ○ 세종실록 150권34편

      東方에 본래목면이 없더니 문익점이 서장관으로써 京師에 朝하였다가 그 종자와 耕織之術을
      求得하여와서 花盆에 심어서 鄕曲에 전하여 드디어 一國에 扁한지라.
    ○세조실록 3권28편

        吾東方에 옛부터 木棉種이 없더니 前朝 문익점이 사명을 받들어 元國에 留하다가 비로소 얻어와
        심어서 드디어 一國에 두루 퍼지니 지금까지 貴賤과 남녀의 구별없이 모두 綿布를 입는지라
        익점의 공은 만세의 民利를 이루었으니 그 덕택이 生民에 被하였음이 어찌 적다하오리까
        祠宇를 세우고 春秋에 本官으로 하여금 祭祀를 行케하고   그 자손도 일컬어 功臣이라 하여
        죄도 宥하고 錄用하라
     ○정종실록 20권27

        문익점이 使臣으로써 들어가니 元이 공민왕을 昏暴함으로 장차 廢立코자 하는지라 諫爭하여

        詔를 받들지 아니하다가 드디어 남황에 귀향가서 3년만에 中朝에 돌아올새 木棉을 潛取하여
        사람들에게 織造를 가르치니 그 백성에 利됨이 이와 같은지라 세종대왕이 그의 衣民한 大功을
        생각하시여 江城君을 追封하시고 太祖朝에서는 명하여 서원을 세우시고
        世祖朝에서는 富民侯를 封하시고 諡號를 賜하여 忠宣이라 하시고 祀田을 贈職하셨으니 이제 이

        恩額의 請함은  多士의 公議로 나온것이라 朝家崇奬之道에 있어 마땅히 依施할지어라 從之하시다.)
      ○정종실록 41권66편

         강성군 문익점이 일찍 麗朝에서 道學과 風節이 세상에 존경한바되고 國朝儒賢이 擧皆 稱述하는데
         木棉상 來之事같은데 이르러서는 실로 東方에 옷 입힌 大功이 되는지라. 세상에 이와 같은 美物이
         있어서 다행이 국내에 致種을 하였으니 마땅이 백성의 課種을 주어서 가르쳐 풍속을 이루어서
         一國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美利을 힘있게 함은 씨 棉種과 같이 함이 可함이라.
         고려말 晋州人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歸路에 棉種을 潛貯하여 가져왔으며
         또한 그는 取子車와 絲車까지 만들어 함께 가져왔음으로 인하여 면화재배와 면포직조법이
         競傳되어 백년미만에 전국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國人의 上下가 다 면포를 轉用하게 된 것은
         그 효과가 麻布에 비하여 五배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상기 비문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배양동에 받으려 세우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일찍이
        선생의 조부때부터 사시던 곳이고 또한 선생께서 목면을 처음 심어 성공시킨 사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기 때문에...(수문쇄록 1권356편)
정천익선생과 조부께서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에 살았다는 것과 목면을 처음 심었다는 사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은 진양정씨 은열공파에서 만든 청계지와 진양정씨 족보에의 기록을 말합니다.
정천익선생의 生居地와 목면재배지는 단성면 사월리가 아니고 이곳에서 약 6km 거리인
단성면 관정리라고 1622년에 간행된 진양지속편 4권 13頁와 단성향교지 243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晉陽誌 續篇 古蹟(권4-13페이지)
鄭退軒天益甥三憂堂文益漸自交趾還取木棉花而歸遺退 軒退軒種于巴只之官亭坪漸以蕃殖國中之有木綿始比 정천익 號는 퇴헌이요 진양인으로 殷烈公官亭臣烈의 後로서 예의판서 愈의 子이다. 고려공민왕조에 文科에 壯元하여 判府事典客令을 역임하다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목화씨를 받아 播巴只里하여 그 재배에 성공하다...
*문익점선생의 生居地와 목면을 처음 시배한 곳은 단성면 사월리입니다.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에는 고려 우왕 9년 癸亥(1383) 麗朝에서 효자가 살았다하여 마을이름을 孝子里라 命旌하고 문익점선생이 살아 계실 때 효자비를 세운 곳이며 현재도 면화시배지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문익점 선생께서 손수 심으셨다는 杏壇記 단성향교지 효자비각기 산청지명고등에 문익점선생의 생거지가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棉花始培地에
고려우왕9년 癸亥(1383) 麗朝에서 마을이름을 효자리라 名旌하고 문익점선생이 살아계실 때 효자비를 세운 곳으로 현재도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부동산 등기령 시행시(1913.11.15)부터 祀孫인 문택호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남평문씨 충선공파종친회 명의로 되어있음.

元에 갔다가 적교지에서 목면종을 구하여 국내에 널리 전파시켜 의피생민의 공을 남겼다.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 효자리라 하였으며...(丹城鄕誌 178면)
배양촌에는 삼우당 문선생이 사시던 옛터가 있고 문행 한 그루가 서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선생께서 손수 심으셨다는 것이다(柳汶龍 杏壇記文中) 경상남도지정보호수...老木樹令610년

孝子碑閣記에
강성현의 남녘에 있는 배양산리는 前의 王朝의 분인좌사의대부문공이 살던 옛터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서있는데 洪武16년 癸亥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표창해서 세우게 명하신 것이었다. 嘉靖립四十年癸亥立碑之後百八十有一年也. 嘉靖四十二年癸亥三月 일 眞寶 李滉記


삼우당의 妻男되는 周判書璟의 효자비문에 自號를 培養齋라 한 이유가 지명에 유래하였다고 되어있다. 李朝初 이태조는 삼우당의 충성에 감복하여 문익점선생이 寓居하던 洞里라하여 효자리라 銘하였던것인데 그리고 그때는 동명이 巳洞이었다. 삼우당선생의 증손녀되는 淑夫人남평문씨께서 두아들을 데리고 이곳 친정마을로 와서부터 500년이 흘렀다. (山淸地名考(培養洞) 276페이지)

문익점의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집은 사월리529번지로 현재 이병미 소유이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시사월간 려사인물탐구...정순태)

셋째, 상기비문에 원나라수도에서 목면씨를 가져왔고 마땅한 땅가려 처음으로 심었다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어느 역사문헌에도 정천익선생께서 원나라에서 목면씨를 가지고 온 사실이 없는데도
        목면사적을 왜곡하여 정천익선생이 직접가지고 온 것이라고 새겨 허위 조작했습니다

넷째, 상기비문에 선생의 封爵과 諡號는 조선태종조에서 추록했으니..라고..되어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역사문헌과 시호록에도 정천익선생께서 진양군 문충공이란 봉군과 시호를 받은
         사실이 없는데도  신도비문에 거짓으로 진양군 문충공이라고 허위조작하여 새겨져 있습니다.

귀회에서 보낸 回信 2頁에
정천익선생의 봉작 시호에 대하여 현재까지 내려온 진양정씨 구족보에 진양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후 계속 출간한 각 족보와 각 종문헌에 진양군 문충공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궁색한 답변을 하고 있는데 역사문헌을 허위 조작한 신도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기비문을 찬 하신 김황선생께서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뒤에 아시고 1970년 2월 18일 귀문중(정씨)에 수문폐기토록 통문하였음에도 30년이나 경과되고 김황선생께서 작고하신뒤에 비문을 임의로 개서하여 문익점선생의 목면사적을 왜곡하고 허위조작하여 신도비를 세운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귀회에서 보낸 回信 11頁에
김황선생께서 신도비문을 폐기하라는 통문에 대하여 문씨들이 가지고 있다고 제시한 그 문서는 너무 희미해서 정확한 비교를 못하겠고 분명한 것은 중재선생 본인의 글씨가 아니고 타인이 쓴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하면서 인정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은 무슨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김황선생의 문집에 정천익선생의 신도비문이 없는 것이 死文化된 것입니다.
청계지(진양정씨 은열공파에서 임의로 만든책)를 보시고 퇴헌 정천익선생 신도비문을 瑕하신 김황선생 외에도 이은상 선생 이병도선생 이헌주 선생께서 다음과 같이 수문폐기 통문하였습니다.

○문학박사 이은상선생께서 1971년 5월... 문충공 정천익사 적비문을 瑕하였는데 史記와
  위배되었음을 아시고...1972년 1월 13일 수문폐기통문(별첨)
  수문폐기 이유는 진양정씨 문중에서 임의로 만든 청계지에 의해서 비문을 瑕하였기 때문에
     (1)문익점 선생이 정천익 선생의 문하생이 아니므로
     (2)목면씨를 처음 심은 곳이 단성의 배양동이 아니므로
     (3)조선 태종때 선생에게 진양군에 봉하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는 근거가 증명되지 않음으로
○문학박사 이병도선생께서 1974년 7월.,.. 퇴헌정공천익목면사적비문을 瑕하였는데 비문중에 약간
   잘못이 있어...1976년 9월 30일 수문폐기통문(별첨)
  수문폐기이유
      (1)배양촌에 거주사실이 없음으로
      (2)봉군 시호가 진양군 문충공이 아니므로
      (3)청계지 내용이 진양지와 다르므로
      (4)삼우당이 퇴헌의 門人이 아니므로
      (5)양가의 시비에 개입함을 원치 않음으로
이헌주선생께서 관정정선생 묘정비문을 찬하였는데 비문중천익정객령판부사...이하...
   면종시파부분17자삭제  1987년 11월 16일 삭제수문(별첨)
   始播棉種成功병取子?絲兩車以織綿布 17자 삭제
-경남 진주시 소재(진주성지)청계서원에 세워져 있는 은열공정신열묘정비문중...始播棉種成功자중.. 始字를 1988년 1월 28일까지 削字한다는 동의서(진양정씨은열공파종회장 정호준외2인)을 진주시장 입회하에 작성하였음... 削字작업은 진주시기획실장 책임하에 수행한다는 상기 동의서에 副署하였으나 아직까지 削字는 하지않고 始字위에 시멘트로 발라놓은 상태임

귀회에서 보낸 回信 11頁에
정천익선생의 신도비문을 쓴 撰者에게 문씨들이 어떻게 알고 撰者에게 찾아다니며 회유 설득 협박 공갈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碑文撰者(우봉이병도 노산 이은상 이헌주 선생들마다 비문을 폐기하라는 편지를 문씨들이 어떻게 받아내었으며 어떻게 문씨들이 그런 문서를 가지게 된 것인지 문씨들은 그 경위를 소상히 밝힐 것을 요구한데 대하여
*우리 남평문씨들은 퇴헌 정천익선생 비문을 청계지에 의해 瑕하였기 때문에 비문이 역사문헌에 위배되어 삼우당 문익점선생에 대한 직접적인 명예가 손상되므로 수문폐기하는데 노력했고 또 상기 大先生께서 瑕하신 비문이 정사에 왜곡된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비문을 瑕하신 여러 大先生께서 자존심을 버리고 폐기시킨 것입니다.
수문된 것만 보아도 역사문헌에 위배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청계지에 자기내 조상인 정천익선생을 推尊해보자는 심산에서 封侯 封爵 諡號의 사실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태종때 삼우당 문익점선생과 같이 진양군에 봉하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은양 되어있고
2.정천익선생의 世居地는 단성면 관정리인데도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이 자기내 世居地이고
   목화시배지인양 해놓고
3.삼우당 문익점선생의 건소한 年上인 後娶부인으로서 학력의 차가 컸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사제 관계로
   한 것은.... 그때부터 목화사적에 관한 야심과 음모가 내포되어 역사문헌을 허위 조작한 것입니다.

귀회에서 보낸 回信 58頁에
목화씨 전래와 정천익 목면사적과 정사의 차이 成大敎授 碧史 李 佑 成
1967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기사(기고문)에 중략...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그의 生居地는 晋州 召南里였다... 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귀회 回信 60頁 13行에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그의 생거지는 진주 사월리였다...라고 원문을 고쳐 거짓으로 생거지를 사월리로 바꾼 것은 정천익선생의 목면 재배지를 사월리라고 주장하기 위한 괴략으로 보아지며 그런 기만행위는 崇祖가 아니라 오히려 先祖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귀회에서 보낸 회신에
淸溪書院記 晋州士林通 道川書院文 德川書院講會時發文 丹城道川書院通 晋州鄕校文 三嘉鄕校通文 呈丹城縣監文 呈禮曹狀 關文등에 정천익선생의 봉작 시호를 晋陽君 文忠公으로 되어 있고 목면 재배를 단성면 사월리로 되어있다고 귀회에서 변명을 하나 이상 통문 등을 정씨 문중에서 임의로 만든 것으로 거의가 동아일보기사와 같이 원문을 변조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귀회에서 보낸 回信에
단성면 사월리 배양동에 대하여 정천익선생이 목면을 배양해서 재배하였기 때문에 생긴 동명이 배양동이고 후생 周璟은 자랑스런 배양촌명을 따라 自號를 培養 齋라 썼다. 禮曺關文에 되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며 조작된 것입니다.

*培養洞의 由來에 대하여
培養이라 이름한 것은 문익점선생의 妻男 尙書周璟의 號가 배양재다. 그號를 綠由로 해서다. 行狀에 公이 平生篤於 自修齋以 배양하고 爲偏盖取는 諸培養節行之義하고 所居山名村號가 皆以培養으로 ?之함은 貴亦推己及物之義라 하였다.
김황선생의 문집에 정천익선생 신도비문이 없는데도 임의로 비를 세우면서 撰者에 김황謹瑕이라고 한 것과 封侯 封爵 諡號의 사실이 전무함에도 진양군 문충공이라고 허위 기록하는 것 世居地와 목면 재배지가 巴只之官亭인데도 사월리 배양동이라고 거짓으로 허위 조작하는 것 등은 崇祖하는 것이 아니라 先祖에 대한 욕이 됨을 아셔야 합니다.

*저희들(남평문씨)의 바램은
外祖이신 정천익선생의 生居地가 단성면 관정리이고
사위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종자를 얻어서 처음 심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으로 퍼트린 곳이 단성면 관정리이고 (1622년에 발간된 진양지에 기록이 있음...4권13페이지)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목화씨를 받아 播巴只里하여 그 재배에 성공하다. 라고 丹城鄕誌에 기록이 있음...243페이지
정천익선생의 先祖...관정선생의 묘소가 단성면 관정리에 있고
정천익선생의 先祖 은열공의 號를 官亭으로 하여 이를 綠由로 洞名이 官亭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음(山淸地名考 378페이지)
현재도 단성면 관정리에는 정천익선생 후손이 많이 살면서 진양정씨가 集姓村을 이루고 있음.
아무연고도 없는 단성면 사월리 문익점 면화시배지가 있는 배양마을에 억지로 신도비를 세우지 말고
정천익선생의 生居地이고 목화를 처음 심어 성공한곳인 단성면 관정리에 정천익선생의 목화시배지 또는 사적비를 세운다면 저희들도 물심양면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저희들의 바램을 外面한다면 부득이 외가집과의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음을 통고하는 동시에 진주성지내 청계서원에 세워져 있는 정선생비문 내용이 역사를 왜곡 허위 날조되어 신성한 城址內에 不美스러운 碑를 그냥 방치한다면 역사를 왜곡시킬 소지가 있음으로 城外로 移轉 또는 撤去하도록 관계당국에 陳情도 不辭 할것임을 예고하오니 省察하시여 후회됨이 없도록 통고하는 바입니다.

 

경남종친회

                            산청에는 이런일도 있다.       -문영환회장-   2001년 1월

1. 정천익선생 신도비를 밤중에 세운 이유

 

산청은 예부터 위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리는 항상 위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바르게 전하여 줄 의무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바로 민족의 고유전통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며 산청의 역사를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객지에 가서 산청에 산다고 하면 참 좋은 곳에 산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 것은 흔히 경관의 아름다움이나 물 맑고 산 높은 지리산이 있어서 하는 말이아니요,
여러 사가(史家)들이 산청은 선비의 고장 이라고 하며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산청에서 태어나시고 살면서 또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을 바치신 위인들중 몇 분을 말씀드리면

①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충효와 유학과 목면
② 농은 민안부 선생의 표절
③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과 학통
④ 덕계 오건선생의 학문과 덕치
⑤ 대소헌 조종도 선생의 순절
⑥ 심원재 배세겸 선생의 창의
⑦ 동계 권도 선생의 지행(志行)
⑧ 용호 박문영 선생의 학행
⑨ 면우 곽종석 선생의 파리장서
⑩ 명의 유의태와 임란때의 의병장등
⑪ 불교계의 거승 성철 큰스님등 많은 인물들이 계시나

 
그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빛난 업적을 남기시고 영원히 만인의 존경을 받을 분이라고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칭송하건만 목면 전래를 놓고 유독 진양정씨가 공을 시기하여 최근에는 아무 연고도 없는 단성면 배양마을 앞에 세운 정천익선생 신도비를 세운 정천익 후손들의 그 속셈을 공개합니다.


문익점 선생은 고려때에 진주(晉州)의 속현인 강성현(江城縣)에서 태어나셨는데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입니다. 산자수명한 경관이 뛰어난 곳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가는 마을이었고
흔히 우리는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예절도 지켜진다고 하는데 문익점 선생의 목화도입은 우리들로 하여 의관문물을 정재(整齋)케 해서 명실공히 동방예의지국을 완성시킨 큰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목화가 생산되기전 서민 대중들의 옷이란 삼베나 갈포(칡넝쿨베) 따위였으나 겨울의 추위에 떨었습니다. 옷을 입혀 예의(禮儀)를 갖추니 이는 문화요 몸을 따스하게 보전함은 보건후생이며 베(布)를 생산하는 것은 산업(産業)으로 경제 사회 문화 등 실로 모든 분야에 걸친 일대혁명 이었으니, 영원히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것이 당연한 분입니다.

 

선생께선 죽음을 무릎쓰고 목면씨를 가져온 것은 오직 애국애족의 목민애정(衷情)이고 국가에 끼친 공로가 너무 크기에 이조(李朝)에서는 자기들의 역성혁명을 저지했던 문선생이 세상을 떠나시자
조정에서는 3일간의 정사(政事)를 멈추게하고 국가에서 예장(禮葬)을 베풀고 노비와 제전(祭田)을 내렸으며 조선태종원년(1401)에 임금이 선생의 공덕을 더욱 길이 빛내기 위하여 가정대부참지 의정부사 겸 예문관제학 지경연 홍문관 춘추관사를 추증하고 갈충보국 계운순성 좌익태중광이 정양공신에 록(錄)했으며 강성군을 봉(封)하고 시호는 충선공을 사(賜)하시고 다시 부조묘(不兆廟)를 세우게하고 제전백결(祭田百結)과 노비 70인을 내리면서 고려충신지문이란 명칭을 내리시고 자손 대대로 록용토록하는 만세불혁지전(萬世不革之典)을 베풀었고.

세종 22년(1440)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追贈)하고 부민후(富民侯)를 봉하였으며 상신 남지에게 명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세조7년(1461)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케 하였고 도천사에 사액(賜額)하면서 예관을 직접 내려보내 치제케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정종대왕등 역대 이조 오백년동안 어진 임금들이 선생의 자손들을 비롯하여 많은 특전(特典)을 내리신 내용등이 많이 있지만 선조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옵고, 최근 이곳 단성마을에서 문씨와 정씨들이 목면사적을 놓고 양 문중의 시비의 전모를 밝혀기 위함임을 말씀드립니다.


양 성씨의 문중은 600여년간 동안 화목하게 지났으나 약 35년전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 마을앞 국도변에 "문선생이 원나라(지금의 중국)에 들어가 목화씨를 가기고 오셔서 손수심었던 곳에 대한 나라에서 문선생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하였다" 하시면서 국비를 지원하여 면화시배 사적기념비를 세운후 진양정씨 정천익(문익점 장인) 선생의 후손들이 외손인 우리 문씨들에게 고려사 및 태조실록 등에 정천익 이름이 들어 있는데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 비문에 정천익 선조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문씨들을 모략중상하므로 정씨가문과 오해가 없도록 설득시키다 양문중 대표들이 모여서 합의한 내용은 "
본 사적비는 우리문씨들이 세운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지시로 국가기관에서 세운것인데 함부로 개조하고 변경할 수가 없으니 우리 문씨들은 승낙할 터이니 정선생 이름자를 비석에 삽입하는데 소요되는 모든경비 부담은 정씨측에서 부담한다."였으나 정씨측에서 시행치 않고 미루더니 단독으로 정천익 사적비를 아무 연고도 없는 배양마을에 세우려 하여 문씨 문중에서는 정천익 선생과는 아무 연고가 없는  배양리에 세우지 못하게 하였는데, 몇 년후에 진주성지 내의 청계서원( 정씨들 제실)뜰에다 정천익 선생 공적비를 크게 세웠습니다만, 비문내용이 문익점 선생의 역사사실과 틀린다는 항의를 하고 역사사실에 맞도록 하라고 권유도 하였습니다. 이후 약 30년이 흐른후 국가에서 문익점 선생 면화시배지 사적지 (사적108호)내에 후세교육을 위하여 무명베 전시관을 세운 후 정씨들이 남평문씨와 정부를 상대로 시비를  하고 있는 바 아래와 같이 자초지종을 상세히 말씀올리오니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양문중의 입장에 대하여 군내유지 여러분의 현명하신 판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2. 고려사열전과 태조실록등의 기록은 정확한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왕(태조)이 된 후 이성계의 충신인 정도전의 지시로 만든 것이 고려사열전 및 태조실록인데 자기들의 반대편인 고려충신(최영장군, 이색, 정몽주 등)들을 역적으로 처단하거나 주살하였는데 정몽주와 이색과 뜻을 같이하던 문익점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두문불출하시며 오직 목화재배에만 정성을 다하였는데 정몽주 선생의 참살소식을 듣고 앙천통곡하시었고 그후 태조3년 (1394) 이성계가 여러차례 사신을 내려보내 벼슬로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 나는 고려충신이다. 천무이일(天無二日;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이요 신무이왕(臣無二王;신하에게는 두 개의 왕이 없다)이라" 하시고 사신을 돌려보냈으니 역성혁명을 도운 조준 정도전등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니 공적이 될만한 것은 감추고 애매모호하게 기록하다보니 문익점 기록편 중에 정천익의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으나 여러 임금들이 정천익선생이 아닌 문익점 선생을 최고의 벼슬과 노비와 제전까지 내렸고 그의 자손들까지도 특별대우를 누누히 말한 교지들을 살피지 못하고
고려 공민왕때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문익점이 목면씨 10여개를 가지고 돌아와서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앗 반은 전객령치사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하였는데 문익점이 심은 것은 싹이나지 않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가 심은 것이 유일하게 한 개 싹이나서 이것이 번식되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은 생각치 못하고 이런 내용만 보고 정천익 후손들이 215년전 족보책을 만들고 청계서원을 세울 당시부터 자기들 선조를 추존(追尊)하였는데, 문익점선생 면화시배지내에 무명배 면화(棉花) 전시관을 세우자 설명문중에 정천익 이름이 있음을 기회로 아예 전시관 명칭을 정천익 목면유지로 변경하려고 일가들의 성금을 독려하고(정계의 큰힘을 이용했다는 설도 있음) 정부 문화재청에 문익점을 평가 절하한 고려사열전 및 태조실록 등을 근거로하여 명칭 변경 진정서를 제출하였습니다

3. 찬자 김황선생과 비석의 내용

 

배양리 정천익의 신도비문을 지워주신 분이 중재 김황선생으로 명기하였으나 김황선생님의 생전의 모든 문집을 확인하여 그런 비문을 찬하신 기록이 없음을 확인 한 바 배양에 세운 문선생 사적비 내용에 정천익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하여 문씨측에서 정씨들에게 사과하고 정천익선생 이름을 넣기로 합의하였으나,
정씨들은 정천익선생 비석을 따로 세우기로 작정하여 문중일을 보던 정천환과 정홍두 등이 정씨구족보책과 청계서원기문 및 청계서원지 내용 등을 준비하여 중재 김황선생에게 비문을 찬하여 주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김황선생도 자기선인의 외가로서 끝내 사양을 못하시고 족보책 행장(行狀)만 보고 본비문을 지었는데 (그당시 찬한 글과 현재의 비문과는 완전히 다름) 문씨문중에서 김황선생을 방문하여 김황선생이 만든 비문내용등이 역사사실과 틀린 것을 지적하고 항의하여 김황선생께서 사실을 확인한 바 정천익선생의 봉군시호를 나라에서 내린 사실이 없으며 또 배양마을에 정천익선생이 살았다는 것과 목화를 맨 처음 배양동에 심은 사실 등에 확실한 고증문헌등 증거가 없음을 아시고 문씨문중에 잘못된 점을 사과하시고 정씨문중에 글을 보내기를 내가 쓴 비문은 역사 사실과 다르니 폐기 하라고했습니다. (통고문과 내용을 적은 일기가 김황선생의 문집인 건건록에 실려 있음)
그러나 정천익 후손들은 여태껏 보관하다 김황선생님과 문씨문중의 일을 보시던 분들이 별세하지 김황선생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하였을 뿐 아니라 내용까지 왜곡 조작하여 비석을 세운 것은 김황선생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고 모든 유지들의 지탄을 크게 받게된 것입니다.

4. 기타의 내용

 

이번에 정씨들이 이곳 단성. 신안등 관내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정씨들 회신문 책자에는 우왕1년에 춘추82세로 별세하시니 온나라 백성들이 옷깃에 동정을 달아 정선생에 대한 보은의 조의를 표했다고 하며 동정이란 동방의 정천익이라 뜻이고 이때부터 동정을 달게 되었다고 전한다. 라고 했는데 동정(同情)에 대한 기록이 한문이어서 번역하면 동정을 달게된 것은 이조세종원년 기해(己亥)에 임금님이 특별히 생각하여 강성군 문익점이 이나라에 대한 공덕이 막대하여 긴세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한 뜻으로 온백성이 높고 낮음이 없이 남녀모두 저고리 윗깃에 동정을 달게 한 것이다. 라는 자료 원본이 도천서원에 있습니다.

문익점은 장인의 목면 재배의 큰공덕으로 인하여 벼슬길에도 나가게 되었으며 삼우당이란 호(號)도 정천익 자기들 선조가 지어주었으며 원나라에 이공수와 같이 사신으로 가서 원제(元帝)의 미움을 사서 교지땅으로 귀양간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배양마을에 있는 문익점 면화시배 사적비도 모두가 허위로 되어 있으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수십년동안 역사를 왜곡하여 기록해 놓은 것을 어찌 오늘까지 향토사가와 향교에서 유림들이 말한마디 없이 있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면서 정사(正史)대로 기록한 정씨들이 신도비를 세우니까 문씨들이 반격하여 온다고 합니다

5.정씨문중이 주장하는 목면유지로 명칭변경후 입간판의 내용

 

정씨문중이 보낸 책 32쪽의 내용은 산청 권순영 군수에게 졸라대는 내용은 이곳은 고려 공민왕때 정천익이 목면을 처음 재배하여 온나라에 퍼뜨린 곳이다. 사위인 문익점이 공민왕 12년 3월에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목면씨를 전객령 치사로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사는 장인 정천익이 이듬해 봄에 처음 심어 배양에 성공하여 국민생활과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6. 배양리 거주여부에 대하여

 

1.정씨문중의 회신문 55쪽에 삼우당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지고온 목화씨를 받아 파파지리에서 그 재배에 성공하다고 했는데 파파지리는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관정마을입니다.
2. 진주 문화원 소장의 진양지 고적편에 정천익은 목화를 처음으로 소남 관정밭에 심어서 우리나라에 번지게 한 것이 처음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3. 회신문 책자 60페이지에 서울성대 이우성 사학교수가 쓴 목화씨의 전래와 정천익, 목면사적과 정사(正史)의 차이란 제목의 글로서 정천익선생을 이나라 목면전래자로 크게 부각시켜 쓴 1967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원문(原文)에는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서 그의 생거지(生居地)는 진주 소남리라고 기록했으나 정씨들이 보낸 회신문에는 진주 사월리로 변조하여 보낸 것은 배양마을을 정천익 연고지를 만들기 위한 조작임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7.정씨들의 다른 비석들

 

진주시 상봉동 주택가에도 문익점선생 공적보다 정천익선생의 공적을 크게 꾸미고 고려사 및 태조 실록사실을 큰자랑인 듯 비석을 높게 세웠는데 그곳 주민들의 철거 종용을 받아 곧 철거하겠다고 정씨문중에서 각서까지 써 주었다고 합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태조실록내용 등을 가지고 글을 청하여 유방백세(流芳百世)란 글을 받았는데 몇십년전에 남강댐으로 인하여 원래 진양군 대평면 마동리에 있든 진양정씨 은열공의 위패를 모신 청계서원을 진주성지내로 옮겨서 세웠는데 그뜰에도 정천익 사적공적비를 높게 세우고 그비문 역시 우리선조 문선생을 자기선조 정천익의 문하인으로 꾸미고 목화전래 업적 역시 모두 정천익 공적으로 날조하여 세울 때 우리 문씨들의 항의는 사실과 다르게 날조했기 때문에 항의를 하였습니다만 억지로 세웠는데 임진왜란의 역사 성지이므로 진주문화원과 이곳 사학자를 비롯하여 시민환경단체에서 철거운동이 추진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천익선생이 목면재배에 큰공이 있었다면 이조 오백년간 칭송한 임금이 없으며 삼우당 문선생처럼 세상을 떠나도 높은 벼슬하나 내려주지 않았을까요
사실을 왜곡한 비석들로 인하여 퇴헌 정천익선생의 목면재배와 의류문화혁신에 큰업적을 남기신 부분까지 퇴색시키는 일을 중단하고 잘못된 비석의 철거 및 바른 내용을 적어 문익점선생과 함께 길이 남아있는 큰 인물이 되도록 하여야 하며 장인과 사위이던 옛 선인들의 관계처럼 정씨들과 문씨들이 더욱 친숙하며 자자손손 사이좋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양씨 문중에서 옛선인들의 목면전래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내용들을 자세히 필자가 알고있는 데까지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문화재청 관계공무원 그리고 산청군민여러분의 현명하신 판단을 우리들은 바랄뿐입니다.
                            (문맥의 순서와  원래의 취지를 살려서 일부내용은 편집함-관리자-)

 

건의서

1. 고려사(高麗史)에는 부탁하여 목화를 심게 하였고
   乃還得木棉種 歸屬其舅鄭天益 種之初不曉  培養之術機槁止 一莖在 比三年遂大蕃衍

2.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반을 나누어서 심게 하였다

3. 문익점이 심은 것은 죽고 정천익이 심은 것은 한그루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還見路傍木棉樹取其實十許枚盛襄以來甲辰以其 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種而培養唯一枚得生
   위 내용으로 보아 함께 한밭에서 심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문익점선생의 시배지는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고
     정천익 선생이 문익점 선생으로부터 종자 5개를 받아 심은 곳은 1622년에 제작된 진양지에
     사월리로부터 약 6km 떨어진 산청군 단성면 관정리입니다. 晉陽誌 續篇(권4-13페이지) 古蹟
     鄭退軒天益甥三憂堂文益漸自交趾還取木棉花而歸遺退
     軒退軒種于巴只之官亭坪漸以蕃殖國中之有木綿始比
     外祖이신 정천익 선생의 生居地가 丹城面 官亭里이고 사위 문익점으로부터 목면종자를 얻어서
     처음 심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으로 퍼트린 곳이 단성면 관정리이고
                                                                                   (1622년에 발간 진양지4권 13페이지)
      정천익 선생의 선조...官亭 선생의 묘소가 단성면 관정리에 있고, 정천익선생의 선조 殷烈公의 號를
      官亭으로 하여 이를 綠由로 洞名이 官亭으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음(山淸地名考 378페이지)
      현재도 단성면 관정리에는 정천익선생 후손이 많이 살고있어 진양정씨가 集姓村을 이루고 있음.


아무 연고도 없는 단성면 사월리 문익점 면화시배지가 있는 배양마을에 억지로 신도비를 세우지 말고
정천익선생의 生居地이고 목화를 처음 심어 성공한 곳인 단성면 관정리에 정천익선생의 목화시배지
또는 사적비를 세운다면 저희들도 물심양면으로 협조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