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지

남평문씨 사적지(史蹟地) 

사적지는 선조들의 숨결이 베인곳으로 선조와 후손이 함께 하는 공간입니다. 서원과 재실은 별도의 메뉴에서 소개하였고 문화유산과 정려를 소개합니다. 전란이나 세월속에 무너지고 사라진 사적은 발굴하여 복원해야 할 것이며, 남은 사적이 소외와 무관심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선조사적을 찾고 주변의 관광도 하면 가족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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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적시조단전남 나주 효자열녀익점효자비경남 산청기타옥미주경기 안양
문바위전남 나주재도효자비경북 영주정승감나무전남 나주
시조유허비전남 나주오효자비경남 합천자료수집중
성향비전남 나주쌍효문광주시
뿌리공원대전고사정경남 합천
백암숲전남 화순랑효자비전북 부안
균산정광주시열녀문경기 파주


남평문씨 시조단(始祖壇)

구분 민속자료 32호
소재지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
설명 시조의 묘소가 전하지 않아 탄강지인 문바위옆에 단을 만들고 3월20일 제사를 모심.
인근에 문바위와 문암각, 장자 못, 장연서원, 시조유허비가 있습니다.

시조(始祖) 무성공전(武成公傳)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1732 영조3년) 서두의 내용

널리 전해오는 옛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文)자로서 성(姓)을 삼아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1등급) 삼한벽상공신(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溥)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武成)으로 받으셨다. 

* 김광순 교수의 <시조신화의 양상에 대한 연구>란 논문에, 
시조 무성공의 오색구름은 수신(水神)의 영향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이름이요, 수신이 석함을 봉정(奉呈)하고 그 안에서 동자가 나오는 경이적인 탄생은 시조신화의 신성성(神聖性)과 생명(生命)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암(文巖) 옆의 못을 장자지(長者池)라 이름하였고, 공을 모신 서원도 장연(長淵)이라 하였음은 예삿일이 아니므로 시조께서 태어난 문바위(文巖)는 성스러운 바위(聖巖)이요 장자지(長者池)는 성지(聖池)인 것이다.


시조 제단비

1993년 季夏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운운(많은 모양)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糶赫: 위엄이 밝게 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족보를 만듬)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 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英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에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별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輔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 : 여럿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 밑 지석강 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艮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진저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



시조단제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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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탄강지영상

2019학술심포지엄

2019년 시조단제

2018년 시조단제-1

2018년 시조단제-2

2017년 시조단제-1

2017년 시조단제-2

2016년 시조단제-1

2016년 시조단제-2

2016년 시조단제-3

2008이전 시조단제

 

 

 

 


시조탄강지(문바위 시조단 장연서원) 소개 영상
- 중앙의 ▶ 클릭하세요


시조단 사진

시조단의

시조단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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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단비

단비

후손들의 참배

헌성비

헌성비


                  2008년도 시조단제(촬영 및 전송 :문병옥 모니터)

헌관과 집사

도열한 일가님들

독 축문

일가들의 인사

대종회장 인사

부산종친회 단체 촬영(참석자 41명중 일부)

뷔페식으로 배식한 식사

     

   


2008년 단제 참석기   -문병준 부산종친회장

부산종친회에서는 신청자 46명중 사정이 생겨 42명이 7시 10분에 교대앞을 출발하였다.
10시 45분 장연서원에 도착하여고 상덕사와 충선공영당의 참배를 먼저하고 시조 단소로 갔다. 오랜만에 보는 일가님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예년에 비해 참석자가 많아 500여명이 될것 같았다. 11시 40분에 단제를 시작하여  초헌관에 光明 광주.전남 종친회장, 아헌관에 炳虎 서울종친회장  종헌관에 永熙 대종회감사(제주도) 집례는 基湖님의 건강상 불참으로 旭鉉(전남)님이 하시고 축은 應漢 부산부회장이 맏아서 봉행 하였다. 진행이 메끄럽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엄숙하고 질서 정연하여 무리없이 마쳤다.
12시30분에 단제를 마치고 경규 장연서원사장님의 인사말씀이 있은 후에 영훈 대종회장님의 인사말씀이 이어졌다.
점심식사는 예년과는 달리 뷔페를 준비하고 4곳에서 배식을 하였기에 혼잡없이 식사를 잘 할수 있었다. 먹어보니 부폐식으로 착안한 것은 도시락 보다 엄청 좋았다.

제주도 종문회 일가님들께서 제주에서 버스를 배에 싣고 와서 참석했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성의가 참으로 놀랍고 남제공파 종회에서는 매년 종보를 만들어 단제에서 배포하는데, 부산에서는 창간호를 발간한후에 아직 발간을 하지 못하고 있음이 마음에 걸리는데, 전국에 43만 종인들께서는 보고 배워야 할 일들이었다. 우리 모두 제주도 종문회 회원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시다.


2006년도 시조단제

진설

분정

집례

헌관

집사

헌관

산신제수

산신제

참석한 부녀자들

문근모 대종회장 인사

부산종친회

참석자

기념촬영

2002년 시조단제

영훈 부산회장

 진설

 


문바위(文巖)와 문암각   민속자료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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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
설명 문바위는 시조 무성공(다성)께서 탄강하신 바위이며, 문암각은 문바위를 보위하기 위해 세워진 각(閣)입니다.
장자지(長者池)는 시조 께서 탄강하신 장자산 기슭 문암(文巖)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써 덕망이 높은 큰 위인이 태어났다 해서 장자(長者)라는 이름을 붙여 장자지(長者池)라 했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이 연못은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연서원은 직선거리로 300m 정도로 마주 보입니다.

지방문화제 제 43호 문선명님이 2000년 11월 14일 완공


문 바위

안내판

문암각낙성기념비 문암

시조 유허비(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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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구분

남평문씨 시조이신 무성공 다성공의 유허비입니다.

소재지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서 차량 3분정도 거리인 드들강(지석강)강변 도로옆

설명

잦은 침수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도로의 확장과 포장으로 인하여 현재는 도로옆에 붇어있는 형편입니다. 참배를 하실때는 통행하는 차량을 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남평읍 인근의 드들강(지석강)

너들강옆의 도로

도로변의 시조 유허비

유허비 원경

유허비 중경

유허비 근경

유허비의 참배

 

성향비(姓鄕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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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남 나주시 체육공원옆
설명 나주는 50여개의 성씨의 발생지입니다. 이중 20여 성씨들이 참여하여 성향비를 세웠습니다

성향공원

성향공원 입구

성향비 건립직후

비석의 삼면

묘제후 방문한 성향비


남평문씨 성향비문

1990년 소춘절(음력10월)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殊) 삼가 짓고
성균관 전례위원장 강정휴(姜正休) 삼가 쓰다. 

금수강산이 남녘으로 펼치어 호남(湖南)의 경치좋고 아름다운 땅을 형성(形成)하니, 그 곳에는 역사에 우뚝하여 이름난 나주(羅州)가 있었다. 변방의 진관(鎭管)을 설치함에 이군8현이 소속되었는데, 이 지역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토대를 닦아 번영한 성씨가 무려 백여 문중(門中)이었다. 금반 지방문화유적을 밝게 나타낼 방안으로 나주에 성향공원(姓鄕公園)을 설치하므로 남평문씨도 이 비(碑)를 건립한다.
선대의 계보를 상고해 보건대, 성조(姓祖)께서 신라(新羅) 말엽(末葉)에 탄강하셨다. 지금의 나주군 남평면 동편에 있는 장자산(長者山) 아래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이나 드높은 바위가 깍아 세운 듯 서 있었는데 공의 사적(史跡)으로 인해 후에 문암(文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고을 수령이 하루는 그 바위 아래를 두루 돌아다니며 놀고 있는데, 문득 바위 위에서 오색구름이 피어 오르다 하나로 모아지는 가운데 어린아기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심히 이상하게 여겨 사다리를 만들어 타고 올라가 보니 석함(石函)이 있어 내려다가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옥같이 희고 용모가 기이하므로 거두어 기르기로 하고 관가(官家)에서 양육하였다. 타고난 자질(資質)이 뛰어나게 총명한지라 나이 5세에 글과 사상이 통달하고 군사의 책략이 뛰어나 사물의 이치에 막힘이 없으므로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며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당시 사람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여 말하길 문군(文君)은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고 별처럼 맑다고 하여 삼광(三光)으로 호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道)가 되시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시고 삼중대광(三重大匿) 보국삼한벽상공신(輪國三韓壁上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사(太師) 태부(太博)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으로 봉작하고 시호는 무성공(武成公)이요 향수(享壽)는 98세이 시다.

문씨의 시조이신 삼광선생의 탄강(嶽降)이 신령하고 기이한 사적으로 제주의 성혈(姓穴)과 계림(鷄林)의 금란(金난卵: 김알지가 금알에서 나옴)에 유사한 일로서 문씨의 기초를 확립한 신화(神話)는 수많은 제사에 의한 조상숭배의 정신으로 승화(昇華)되어 자손만대에 번영의 토대로 삼고 있다 이 계세(系世)의 기사(記事)로는 족보 첫머리에 시조 무성공전(始祖 武成公傳)이라 기재되어 후손 필독의 책으로 제공하고 있다. 배위(配位)는 김씨(金氏)이시고 시조 삼광선생의 크게 남기신 음덕(蔭德)이 깊고 두터워 후손이 널리 퍼져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지체가 드러나게 높은 후손으로 휘 익(翼)은 경절공(敬節公)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시며,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의 휘는 공인(公仁)이니 충의공(忠諦公) 평장사(平章事)시고, 다음의 휘는 공원(公元)으로 정경공(貞敬公)이니 의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셋째의 휘는 가관(可觀)이니 조계종 대선사(大禪師)시며 막내의 휘는 공유(公裕)이니 경정공(敬擴公)이시며 국자감 대사성(國子監 大司成)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시다. 충숙공(忠肅公)의 휘는 극겸(克謙)이니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명종묘정(廟庭)에 배향이요, 효혜공(孝惠公)의 휘는 유필(惟弼)이니 지 문하성사(知門下省事)시고, 삼우당 충선공(忠宣公)의 휘는 익점(益漸)이시니 고려 말엽의 충신으로 부민후(富民候)에 봉작되시었는데 모두 이름 높이 드러난 조상들이시다.

문씨의 발상지인 남평 장자못가에 시조를 배향하는 장연(長淵)서원을 설립하고 삼광선생을 주벽(主壁)으로 경정, 충숙, 효혜, 충선 네 선생을 배향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일을 받들어 펴니, 후손과 후학(後學)이 재실에 가득 모여 선생의 위업(偉業)을 경모(景慕)하며 비를 세워 밝게 드러내므로 동방의 지체 높은 가문인 문씨의 성(姓)을 얻게 된 내력을 밝히노라.

 

뿌리공원 성씨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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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산 34번지
설명

대전 남구에서 효를 주제로한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토지를 무상 제공하였고 성씨의 상징인 조형물은 각 성씨들의 문중 부담으로 설치하였다
처음 개장시 72개 성씨가 설치되고  2008년 10월11일 2차 제막식에서 69개 성씨가 추가 설치하여 136개 성씨들이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남평문씨는 80번으로 옆에 팔각정이 있어 명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씨 유래비 비문내용

시조 무성공(武成公)은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에 있는 장자지(長者池) 옆 문암(文巖)에서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태어났다고 전해오고 있다
군주께서 양육하니 문사와 무략이 뛰어나 글월文자를 성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 자를 명원(明遠)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에 오르고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하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
무성공이 탄강한 바위를 문암(文巖)이라 하고 문암을 보하하는 문암각을 남평문씨의 발상지로 하여 장자지 옆 장연서원(長淵書院)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후손 익(翼)은 고려 숙종조에 우산기상시를 지내고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는 공인(公仁)이니 인종조에 수상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충의공(忠懿公)이다. 둘째 공원(公元)도 수상의 지위에 오르고 의종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정경공(貞敬公)이다. 셋째 가관(可觀)은 조계종 대선사이고, 넷째 공유(公裕)는 강직한 명필재상으로 시호는 경정공(敬靖公)이며 글씨는 묘향산 보현사기(妙香山 普玄寺記)로 전해지고 있다. 공유의 아들 극겸(克謙)은 고려조 일대의 명재상으로 시호는 충숙공(충숙공)으로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극겸의 아들 후식(侯軾)은 신종때 대부경과 동북면 지병마사로 유필(惟弼)은 고종조에 참지정사 판예부사를 지낸 명재상이다. 5대에 걸쳐 여러명의 수상과 재상을 배출하고 귀족가문과 통혼함으로써 고려시대의 귀족문벌 가문이 되었다. 극겸의 손자 착(言卓)은남제공(南濟公)으로 남제공파의 파조이고, 극겸이 5대손인 근(瑾)은 판도판서(判圖判書)로 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이며, 려말(麗末) 달한(達漢)은 극겸의 6대손으로 찬성사를 지내고 순평군(順平君)으로 봉하였다.
극겸의 8세손인 구(龜)는 감천군(甘泉君)으로 감천군파 파조이고, 극겸의 9대손 익겸(益謙)은 충혜공(忠惠公)으로 충혜공파의 파조이다. 익점(益漸)는 극겸의 9대손으로 공민왕때 목화씨를 전래하여 의류혁명의 대공을 세운 명유(名儒)로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증 영의정(領議政) 부민후(富民侯)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고 도천서원과 부조묘에 배향되었다.
문씨는 고려조에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나 조선조에서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이 절의를 지키고 은거 불사한 영향을 받아 벼슬한 이가 고려조에 비해 적은 편이다
문씨는 단일본으로 전국에 40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2008년 7월  29일
                                                 南 平 文 氏  大 宗 會


성씨유래비 종친 헌금(총액 4,920만원)   단위:만원

남평문씨 대종회

지역과 파종친회

개인

 명예회장 건모

300

 서울시

100

 대구경북종친회  남정

100

 고문       인주

300

 부산시

100

 부여마정종친회  정모

100

 회장       영훈

500

 충청북도

100

 경남사천 벌리동 제웅

100

 부회장    재희

200

 천안시

100

 경남 창녕           휴건

100

 부회장    성규

100

 김해시

100

 경남 창녕           휴원

100

 부회장    형식

100

 창녕군

100

 충남태안 몽대     서호

100

 

 

 대전종친회

1,450

 충남태안 몽대     헌일

 

 

 

 사천시일족회

100

 부산시                판식

30

 

 

 충선공파종회

100

 경남 사천            태기

20

 

 

 헌납공파종회

100

 경남 사천            낙원

10

 

 

순평부원군파종회

100

 경남 사천            창기

10

 

 

 김해 삼계문중

100

 

 

소계

1,500

소계

2,550

소계

670


마중나온 가문들
다리를 건너서 행사장으로 가는 일가님들

행사장 전경

성씨별 홍보용 부스

남평문씨 부스(목화씨앗 배포)

행사전의 축제

남평문씨 유래비

성금하신 일가님들

접수처

행사안내

제막식 준비

남평문씨 유래비

기념촬영

행사장 전경

행사장 원경


뿌리공원에 조형물이 설치된 성씨들

순번

성씨

시조

번호

인구수

유명인물

1

가평이씨

 

13

 

 

2

강릉김씨

김주원

87

168,988

김시습 김첨경 김상익

3

거창신씨

신 수

49

45,009

신승선 신수근 신희복

4

경주김씨

김알지

110

2,132,423

김부식 김정희 김홍집

5

경주배씨

배지타

81

22,537

배현경 배은우 배중손

6

경주석씨

석탈해

94

8,476

석의홍 석상률 석봉길

7

경주손씨

손 순

100

80,969

손중돈 손신형 손만웅

8

경주이씨

이알평

26

1,776,938

이제현 이항복 이상설

9

경주정씨

정진후

86

305,989

정지운 정 위 정명원

10

경주최씨

최지원

30

994,994

최승로 최익현 최제우

11

고령신씨

신성용

74

119,117

신 장 신숙주 신광한

12

고부이씨

이경조

6

18,415

이양빈 이효맹 이향즙

13

고성남씨

 

32

 

 

14

고흥류씨

류 영

103

55,437

류청신 류세웅 류몽인

15

곡부공씨

공 자

113

74,567

공 소 공 기 공인주

16

곡산연씨

공 자

76

74,567

공 소 공 기 공인주

17

공주공산이씨

이천일

88

36,332

이명덕 이 저 이필주

18

광산김씨

김흥광

95

860,789

김장생 김집 김만중

19

광산탁씨

탁지엽

47

15,903

탁광무 탁동규 탁운한

20

광주이씨

이자성

9

160,867

이극돈 이준경 이덕형

21

광주정씨‘

정신호

2

15,236

정세운 정 서 정구당

22

교하노씨

노강필

83

54,201

노영순 노수신 노광의

23

금산김씨

김정보

4

14,218

김 선 김시창 김상찬

24

김녕김씨

김시흥

92

534,159

김문기 김세좌 김경의

25

나주정씨

정 해

21

95,724

정가신 정 지 정 국

26

나주최씨

 

66

 

 

27

남양홍씨

홍은렬

41

391,002

홍달손 홍순목 홍윤성

28

남평문씨

문다성

80

390,897

문익 문극겸 문익점

29

남포백씨

 

116

 

 

30

노씨

 

46

 

 

31

능성구씨

구존유

56

122,669

구 인 구치관 구 겸

32

단양우씨

우현

36

164,563

우탁 우현보 우홍수

33

담양전씨

전득시

65

129,895

전희경 전자존 전 우

34

대구빈씨

빈 문

34

1971

빈영선 빈균기 빈서온

35

대구서씨

서진

58

447,890

서기준 서섭 서인원

36

대흥이씨

 

61

 

 

37

동래정씨

정희문

120

460,998

정원용 정수홍 정택

38

면천복씨

복지겸

48

7,689

복 기 복팽손 복윤길

39

무송유씨

유점필

20

12,725

유자량 유순도 유득화

40

무안박씨

혁거세

115

80,788

박언승 박승중 박의장

41

문화류씨

류차달

73

286,761

류 관 류정현 류관순

42

밀양박씨

혁거세

72

3,230,367

박언침 박강생 박충원

43

밀양손씨

손순

53

276,470

손응상 손효려 손병희

44

반남박씨

혁거세

99

141,186

박응주 박지원 박영효

45

벽진이씨

이충인

63

93,756

이상길 이약동 이장곤

46

봉화금씨

금 의

24

금 취 금 훈 금 유

47

부안김씨

김 일

16

57,645

김경수 김승인 김석필

48

사천목씨

목효기

22

8,675

목덕창 목철경 목세평

49

상곡마씨

마귀

40

1,045

마 엄 마순상 마하백

50

상산김씨

김수

51

65,014

김귀영 김우석 김동필

51

선산김씨

김선궁

77

111,980

김숙자 김종직 김효원

52

성주도씨

도순

68

47,332

도효신 도기원 도유도

53

성주이씨

이순유

79

198,759

이인임 이숭인 이자화

54

수원백씨

백우경

54

319,764

백득창 백인걸 백정기

55

순천박씨

혁거세

29

89,573

박언지 박팽년 박원종

56

순흥안씨

안자미

104

472,567

안향 안침 안중근

57

시산경씨

91

58

신안주씨

주잠

67

152,548

주정홍 주원부 주기철

59

신창표씨

주잠

64

152,548

주정홍 주원부 주기철

60

신천강씨

강후

131

45,500

강지영 강부전 강윤성

61

신평이씨

이인수

133

34,119

이첨 이상 이천계

62

아산장씨

장서

121

18,197

장득분 장영실 장극맹

63

안동권씨

권함

102

644,944

권근 권 제 권율

64

안동김씨

김숙승

118

440,102

김방경 김시민 김용구

65

안산이씨

이중선

97

20,229

이 희 이숙번 이양헌

66

안악이씨

이 진

134

16,574

이극규 이 위 이성흥

67

안음서문씨

서문기

7

2,006

서문근 서문경 서문신

68

안정나씨

 

23

 

 

69

양씨

 

117

 

 

70

양주조씨

조 잠

125

24,315

조말생 조태구 조두순

71

양주최씨

90

72

양천허씨

허전문

5

131,997

허 준 허목 허균

73

여산송씨

송유익

11

234,569

송 질 송문중 송익필

74

여흥민씨

민칭도

38

144,614

민제 민유중 민영환

75

연안김씨

김섬한

55

80,539

김안로 김자지 김경사

76

연안이씨

이무

96

148,469

이석형 이정귀 이호민

77

연안차씨

차효전

71

164,257

차약송 차천로 차보명

78

연주현씨

현담윤

93

60,665

현치룡 현광일 현 채

79

영광김씨

김심언

129

33,334

김천보 김광찬 김 찬

80

영산/영월신씨

신경

112

85,121

신 유정 신 돈 신계영

81

영산김씨

김영의

12

17,508

김수온 김경존 김종경

82

영양천씨

천 암

57

74,495

천만리 천일성 천 담

83

영월엄씨

엄 임이

109

126,843

엄 광 엄흥도 엄 우

84

영일정씨

정종은

15

219,983

정몽주 정 철 정재두

85

오씨

 

42

 

 

86

온양방씨

방 지

28

66,002

방 운 방신우 방 용

87

온양정씨

정보천

108

25,399

정 유 정순붕 정광진

88

용인이씨

이존권

25

33,007

이세백 이의현 이 일

89

원주원씨

원극유

78

112,434

원천석 원 호 원두표

90

원주이씨

이신우

62

67,544

이방계 이영화 이계정

91

유씨

 

3

 

 

92

은진송씨

송대연

136

213,238

송시열 송길준 송상기

93

의령남씨

남민

101

152,746

남군보 남 지 남은

94

임씨

 

10

 

 

95

장흥위씨

위 경

119

25,550

위창주 위백규 위천우

96

재령강씨

이우칭

98

51,767

이맹현 이현일 이윤룡

97

전씨

 

17

 

 

98

전의예안이씨

이 탁

130

136,615

이정간 이언충 이 명

99

전주최씨

최순작

59

398,323

최성지 최준옹 최석정

100

제주고씨

고을라

85

328,857

고거정 고연 고사원

101

죽산박씨

혁거세

126

54,267

박언립 박인량 박중의

102

진원박씨

혁거세

82

24,330

박진문 박양두 박승종

103

진주강씨

강이식

14

966,710

강감찬 강희맹 강 항

104

진주류씨

류 정

105

61,489

류인숙 류용생 류진혁

105

진주정씨

정예

8

241,002

정자우 정 현 정익

106

진주하씨

하공진

19

122,767

하 윤 하 연 하위지

107

창녕성씨

성인보

127

170,860

성석린 성삼문 성 혼

108

창녕조씨

조계룡

69

340,435

조민수 조식 조봉진

109

청송심씨

심홍부

111

213,975

심덕부 심의겸 심환지

110

청주곽씨

 

128

 

 

111

청주송씨

 

27

 

 

112

청주이씨

이능희

123

35,653

이중강 이공승 이천기

113

청주한씨

한난

37

667,890

한언공 한명회 한석봉

114

초계주씨

 

44

 

 

115

충주/홍주석씨

석 린

50

36,289

석여명 석 관 석 선

116

충주박씨

혁거세

1

28,453

박언창 박 영 박 순

117

충주지씨

지 경

135

120,997

지득상 지종해 지석영

118

통천김씨

 

89

 

 

119

파주염씨

염형명

70

54,139

염제신 염상항 염 증

120

파평윤씨

윤신달

106

765,744

윤 관 윤지완 윤봉길

121

평산신씨

신숭겸

107

521,005

신개 신흠 신립

122

평해구씨

구대림

84

13,346

구성혁 구종직 구달손

123

풍기진씨

진필명

114

11,208

진 영 진중기 진유경

124

풍양조씨

조 맹

33

115,675

조현명 조 엄 조인영

125

풍천임씨

임 온

45

107,648

임원준 임 주 임유겸

126

하남정씨

정 유

60

8,037

정유달 정춘한 정종평

127

한산이씨

이윤경

75

138,967

이색 이개 이산해

128

한양조씨

조지수

124

310,886

조인옥 조위한 조 경

129

함양박씨

혁거세

18

125,028

박언신 박이량 박흥량

130

함양여씨

여어매

31

26,989

여임청 여성재 여규형

131

함창김씨

김세순

122

27,215

김 융 김규오 김시빈

132

해주최씨

최온

43

183,793

최충 최자 최만리

133

해평길씨

길당

35

20,902

길재 길겸 길경성

134

행주은씨

은홍열

39

12,505

은 상 은여림 은성호

135

현풍곽씨

곽경

132

142.352

곽여필 곽재우 곽종석

136

흥양이씨

이언림

52

17,347

이 치 이원규 이 준

 

백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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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남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
설명 문씨들이 조성한 방풍림

 

1544년 남평문씨 문창후가 마을 터를 잡으면서 수해를 막기 위해 하천변에 나무를 심은 곳으로,
생명의 숲 운동본부, 산림청, 유한킴벌리가 공동 주최한 제4회『아름다운 마을 숲 전국대회』에 신청한 25개 마을중 현지실사 등을 거쳐 11월 18일 아름다운 마을 숲 부문에 선정되어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었으며, 이팝나무, 푸조나무, 느티나무 등 11종 165본의 다양한 수종이 하천변을 따라 당산나무형태로 숲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이팝나무와 단풍나무 등 계절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수종들이 많아 사계절 가볼만 합니다.
도곡온천과 지석강이 있어 인근 광주시민의 쉼터로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균산정(筠山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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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광주시 북구
설명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선생을 기리는 정자;

남평문씨 신제공파(愼齊公派) 소유의 선산 밑(비암술산)에 위치하였으며, 정자는 하천가의 도로로부터 7∼8미터 정도의 높은 축대 위에 있고 축대 아래에는 맑은 계천이 흐르고 있다.  정자 뒤에는 나즈막한 산이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추고 주위에는 녹음이 무성하여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1921년 이 마을 출신 해사 문인환(海史 文仁煥)은 문행이 높을 뿐 아니라 남평의 향사 건립 및 이곳의 서석단 축조 등 많은 좋은 일을 하였고 효행도 지극하였는데 선친의 유지(遺志)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내종질(內從侄)인 전교관(前敎官) 김기홍(金基洪), 종제 국환(從弟 國煥), 문체환(替煥) 등의 협력을 얻어 창건하였고 그 후 1961년경의 지붕 개와(改瓦)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으며 담밖 열 걸음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고 '죽파재' 위에 괴양정이 또 '괴양정' 위에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이러한 여러 시설들은 모두 이 마을 문씨 문중의 소유이다

균산 문용현은 기로사(奇蘆沙)의 제자로 죽파재(竹坡齋)라는 문각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한 당시의 처사(處士)이다.
문용현의 오대조(五代祖) 성제공(惺齋公)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이곳에 지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이 집이 무너져 없어지면서 황폐해졌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문용현이 그의 아들 인환에게 이 집의 복구를 당부하였으나 당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러 해를 끌어오다 아버지가 작고한 36년 후에 이 정자를 지어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하였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균(筠)은 대나무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살을 보호하는 겉 살갗을 이르기도 한다.
정자의 구조는 도리 석초,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자 입구에 단간 와가(單間 瓦家)의 정문이 있고 정면 또는 좌측 전면에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의 '균산정'이라는 대서 판각이 걸려 있다.
정내에는 창건주 문인환의 정기(亭記), 정운(亭韻)을 비롯한 22개의 판각이 걸려 있고 전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연이 부착되어 있다. 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 달리 네 개의 기둥이 별도(別途)로 건립하여 판자 마루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이 꾸며져 있고, 그 위에 이층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서석단(瑞石壇)   청풍동 1008번지

서석단은 남평문씨 신재(愼齋) 문선(文璿)과 행주기씨 복재(服齋) 기준(奇遵)을 제향한 단으로 1929년에 지어졌다. 이들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79)의 문인이었다.
단소(壇所)는 삼문(三門)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내부에는 시멘트로 50cm 높이의 단을 만들고 2개의 단비(壇碑)를 봉안했다. 비는 각각 높이 80cm, 폭 30cm, 두께 9cm로 <文愍公服齊奇先生壇(문민공복제기선생단)>과 <司宰奉仕愼齊先生壇(사재봉사신재선생단)>이 새겨져 있다.
제향일은 11월 4일(음력)이다.

남도일보 정자기행             김선기 기자

모진 폭풍한설에도 그 절개를 꺾지 않는다는 대나무, 그래서 예로부터 지조있는 선비를 일컬어 ‘대나무’로 불리웠던 것일까. 광주 인근에도 이러한 대나무의 절개를 빗대어 지어진 정자가 있다. 바로 광주시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서 있는 균산정(筠山亭)이다.
이 정자를 찾아 떠난 날은 때마침 눈발이 소금처럼 흩뿌려졌다. 듬성 듬성 쌓아놓은 짚다발과 해충 방제를 위해 불을 놓은 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겨울 들판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한 아늑함까지 안겨준다.
경렬사를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 제4수원지 방향을 향해 가다보면 ‘신촌마을’이란 석비(石碑)’를 만날 수 있다. 이 표지석을 끼고 돌면, 마을 저편으로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는 균산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자 밑으로 돌바기 아이의 눈망울 만큼이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그 위에 균산정이 아름다운 자태로 길손을 맞고있다.
사실, 이 정자의 건립 연대는 그리 오래 되지않았다. 그러니까, 한말 때 이 마을 출신의 선비 해사 문인환(海史 文仁煥·1863~1930) 선생이 1921년에 건립했으니, 80여년 이쪽저쪽에 이른다.
그러나 균산정의 건립 정신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쳤던 균산 문용현(筠山 文龍鉉)의 유지를 받아 그의 아들인 해사 문인환이 건립했다.
균산은 노사(蘆沙) 선생의 제자로 죽파재(竹坡齋)라는 문각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한 당시의 처사(處士)였다. 특히 정자의 옛터는 균산의 5대조(五代祖) 성제공 필상(惺齋公 弼尙·1671~1735)이 수헌(水軒)이라는 별당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인지라 더욱 그 역사성이 깊다.
훗날 해사는 초막을 지어 아버지의 학문을 이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균산이 작고한 지 36년 만에 비로소 이 터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그의 선친 균산의 호를 따라 ‘균산정’이라 명하였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균(筠)은 대나무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살을 보호하는 겉 살갗을 이르기도 한다.
균산정의 구조는 도리 석초,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 3간, 측면 3간의 아담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자 입구에 단간 와가(單間 瓦家)의 정문이 있고 정면 또는 좌측 전면에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의 ‘균산정’이라는 대서 판각이 걸려 있다.
또 정내에는 정자 주인 문인환의 정기(亭記)와 정운(亭韻)을 비롯한 22개의 판각이 걸려 있고 전면 좌우의 기둥에 10개의 주연이 부착되어 있다.
정자의 한 중앙에는 다른 정자와 달리 네 개의 기둥이 별도(別途)로 건립하여 판자 마루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의 거실이 꾸며져 있고, 그 위에 이층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 좌측에는 석축 토담이 둘러 있고 그 옆에 노암괴석이 있으며 담밖 열 걸음정도의 거리에 죽파재가 있다. 또 죽파재 위에 괴양정이, 그 위에 서석단이라는 단소가 있다.
이러한 여러 시설들은 현재 남평문씨(南平文氏) 신제공파(愼齊公派)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있다.


균산정

당대명필

석촌

윤용구님

글씨



문익점 효자비
      -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 106번지 목화전시장 내

효자비각기

비각중수기

재건립비 뒷면글

 

 

문익점 효자비각

효자비(孝子碑) 안내문

이 누각 안에는 우왕 9년(1383년)에 하사한 효자비가 건립되어 있다.
문익점 선생이 청도군수로 보임하고 있던중 어머니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지키다가 남해안 일대를 횡행하던 왜구에게 잡혔으나 부모의 무덤앞에서 3년간 시묘살이 하는 고려의 아름다운 풍속에 감동한 왜장은 물해효자(勿害孝子;효자를 헤치지 말라)란 팻말을세우고 철수하니 이로서 문익점과 이 일대는 잔학무도한 왜구로부터 화를 면했다
우왕은 잦은 외침 때문에 국법으로 정한 3년상의 상례(喪禮)가 무너진 시절, 이를 본보기로 삼기위해 문익점이 태어난 동리를 효자리(孝子里)라 명명하고 아울러 효자비까지 내렸다. 그 비가 지금 여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383년(흥무 계해년, 우왕10년) 왕이 효자 비석을 내림
1563년(명종18년)  강성현령 안전(安琠)이 재물을 모아 효자비각(孝子碑閣)을짓고,
                           퇴계(退溪) 이황(李混)이 기(記)를 지었다.
1597년(선조 30년)  왜군이 불을 질러 태웠다
1623년(인조 원년) 수령 이원길(李元吉)이 다시 세우고, 박사(博士) 권집(權據)이 기(記)를 지었다.
1803년(순조  3년) 후손 휘광(輝光)이, 1841년(헌종7년) 명식(命植)이 수리하고
1888년(고종26년) 병열(秉烈)·재조(在祥) 등이 서로 뒤를 이어 거듭 수리를 했다.
1923년 본래 자리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짓고 전의 비를 옮겨 모셨는데, 그 일을 주장한 이는
           사손(祀孫) 승헌(童憲) 및 후손 석표(錫約) 일모(一模) 정호(廷鎬)였다.
           맹헌(孟獻) 규하(圭河) 양주(良柱)가 새 비를  세우고, 은진(恩津) 송철헌(宋哲憲)이
           기(記)를 짓다. 주변의 땅을 사서 비각(碑閣)에 소속케 한 이는 한석(漢석)이었다.   

※ 새 비를 새웠을 때에, 전의 빗돌을 앉힌 대(臺)를 파니, 1383년에 처음으로 세웠던 비(碑)가 나타났다. 그 비는 비록 파손이 되어지기는 했으나, 자획들만은 분명했기에 도천서원의 신안사재(新安思齋)에 옮기고, 선비들과 문씨(文氏)들이 보살피다가 31년 뒤인 1954년 족보를 꾸밀 때 신안사재의 왼편 담 밑에 묻었다.

효자 비각기

1563년  진보(眞寶) 이황 ( 李滉: 이퇴계) 지음 ( 비를 처음 세운후 181년 째가 된다)

강성현의 남녘에 있는 배양산리는 전 왕조의 좌사의대부 문공이 살던 옛터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홍무16년 계해년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포창해서 세우게 명하신 것이다. 애 당초, 공이 모친상의 복을 입고 산간에 있을 때, 왜구의 세력이 왕성하였었다. 그것들이 지나가는 곳은 무참하게 멸망하게 되자, 백성들이 도망하여 숨었다. 그런데, 공만은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며 맹세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도적들이 감탄을 하여 효자라 칭찬하고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모친의 신주를 모신 곳이 처참한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공의 이름은 익점(益漸)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강성현 출신이다.
올바른 행위가 있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지정 연간(至正年間)의 경자년에 과거에 뽑혀, 여러 벼슬을 지내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에 이르렀다가, 고향의 집으로 물러나서 생애를 마쳤다.
이조의 태종대왕께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시었는데, 특히 공에게 의정부참지사 예문판제학을 추증하시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시며,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주셨다.
공의 공덕이라 하는 것은,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갔다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 길에서 목면의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유익되게 함이 시급하기에 금지함도 무릅쓰고 가지고 왔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와 우리 나라에 비로소 있게 된 것이었으나 드디어는 나라 안에 크게 번지어 만세토록 길이 힘입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의 공적인 것이다.

하늘의 낳은 바이고 땅의 기르는 초목 만물의 그 시초가, 어찌 다 타지(他地)로 이종(移種)이 된 뒤에야 있을 것인가? 뽕 삼 콩 조의 심음은 다 백성들의 쓸모에 긴요한 것이나 땅의 성질에 알맞음이 어찌 기(氣)가 화(化)하는 자연에서 낳지 않음이 아닐 것인가? 그리고 우리 나라 땅이 목면에 적당한 것을 나라가 열린 때로부터 이후 몇천만 년이나 알지 못하여 하늘이 그 이익을 낳을 수가 없고, 땅은 그 보배스러운 것을 일으켜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다가, 공의 한몸이 나그네길에서 풀려 돌아올 때, 한 짐꾸러미 묶음으로 가지고 온 뒤에야, 이 땅의 산물(産物)이 되어서, 많은 백성들의 재물이 풍부해지고 나라의 쓰임에 넉넉해서 여유 없음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상한 일인가?
우리 나라의 뽕과 삼은 겨우 심기나 하여 실과 고운 명주솜의 쓰임과, 가는 베의 화려함은
민간에 보급되어지지 못했다. 즉 이에 앞서서 우리 나라 민속상(民俗上) 일반적으로 입었던 것은, 털옷과 칡베의 종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에 이르러서, 공의 식견과 생각이 원대(遠大)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지고 유통되어, 결국 오곡(五穀) 육부(六府)와 같이 그 공이 마찬가지 인 것이었다. 다만 우리 나라의 많은 백성이 헐벗음과 추위에서 면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빛나게 혁신시키었던 것이니, 즉 우리 이씨조선이 특별히 추증(追贈)을 하고 기리어 명을 내린 것은, 공연한 은전(恩典)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의 효성은 죽는가 사는가의 마당에 이르러 나타났고, 굴복시킬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國朝)의 혁명(革命)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음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이라 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 구해낼 수가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꾸어지기 전이었는데, 조준(趙液)이 한때 억지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으랴? 이리 말하고 보면, 공의 큰 절개는 이에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고 염려가 되는도다.

공의 묘는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있는데, 감사(監司)에게 글로 호소를 해서 묘의 옆에다 다시 사우(祠宇)를 짓고 공의 증손녀 참봉 이계통(李季通)의 처인 영인문씨(令人文氏)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나이 96세인데도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부인의 글을 가지고 지방 노인간에서 의논을 하여 사우를 늘리고, 또 제전일결(祭田一結)을 둔 사람은 그 문씨부인의 손자로, 전에 훈도(訓導)였던 이원(李源)의 형제였고, 나라 소유의 전토(田土)로 제전을 더하게 해 준 사람은, 현감인 성준(成遵)이었다. 
그 후로는 묘역을 위해서 이리저리 노력한 사람들의 유감이 없게 되었으나
한 가지 비의 건립은 그 같이 오래 되었는데도, 비석을 가릴 비각이 없었다.
현 현감인 안전(安琠)이 봄에 고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권장하다가 마침 보고는,
말에서 내려 존경하는 뜻을 표하고 내력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선세 현인(先世 賢人)의 아름다운 행실이 그러했고, 전대(前代) 임금님의 지극한 포상(衰賞)이 또한 이 같았는데도, 비석이 이러한 데에 서 있는 것은 곧 고을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로다. " 라 했다.
그리고는, 급히 공인에게 명하고, 비용과 재물을 모아 한 비각을 세워서 비를 덮었다. 비각의 집채가 아름답고 훌릎하여 마을의 빛을 더하게 하고, 비에 새긴 글이 다시는 비에 젖고 햇볕에 쬐어지는 걱정이 없게 했으며,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공경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일으키게 되었다.
현인을 존경함을 도와 세속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는 뜻이 크니 무어라 말 할손가?
안(安) 영감의 다스림은 그 근본되는 바를 안다고 믿을 것이다. 이에 감탄을 하고 전후사(前後事)로써 사적을 자세히 하여 비각기(碑閣記) 지을 것을 청한 사람은 이원(李源)이다. 그리고 전에 묘사기(墓祠記)를 지은 이는 방장산인(方丈山人: 조식의 호) 조식(曺植)이고, 그 뒤의 효자비각기를 지은 이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다.

 

문익점 효자비각(孝子碑閣)중수기(重修記)
천계 연간(天啓年間)의 계해년 11월 22일 홍문관 박사(博士) 권거(權渠) 지음

오른편 면(面)의 66자는, 즉 홍무(洪武) 16년 계해년에 비석에 새겼던 사적을 기록함.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와 여지승람에는 다 익점(益漸) 이라는 이름으로 전(傳)하고 있는데,
여기는 익첨(益瞻)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무엇에 의거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되, 아마도 당시에는 이 이름도 쓰이지 않았을가 생각된다. 그래서 역시 감히 지워 고치지 못하고, 옛날 일에 널리 아는 군자(君子)가 밝힐 것을 기다리는도다.( 어릴적 아버님이 지으신 이름은 익첨이요 훗일 익점으로 개명함)
만력(萬曆) 25년 정유( 선조30년 1597)에 비각이 왜놈들의 전쟁으로 불타 헐렸다.
고을 사람들이 우리 공(公)을 사모하여, 더욱 오래됨을 잊지 않고 새로 지을 것을 꾀했었다.
그래서 천계(天啓) 3년 계해년(명종 18년)에 비로소 능히 이루어졌는데, 이원길(李元吉) 영감이 실로 힘써 한 일이다.
삼가 이 비석의 전후 사적을 생각하여 보면, 즉 홍무 연간(洪武年間)의 계해년에 이 비각(碑閣)을 세우라 명하셨고, 가정 연간(壽精年間)의 계해년에 다시 비각을 세우고, 퇴계 이 선생(이황)께서 그 일에 대한 기를 썼다.
비석을 처음 세운 계해년에서 181년째 뒤에 다시 비각을 세우는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천계 연간(天啓年間)의 계해년(인조원년)에 다시 지으니, 그 사이에는 혹 어느 이치라도 있는 것 같다. 이 후로 억만년에, 또 어찌 지금과 같은 일이 있지 않다고 할 수 가 있으랴 

 

문익점 효자비 재건립한 비(碑)의 뒷면글
다섯 번째 계해년(1922 인조원년) 겨을 은진 송철헌(恩津 宋哲憲) 지음

효(孝)는 모든 행위의 근원이고, 오륜(五倫)의 맨처음 도리(道理)이다. 효 이것은 다만 어버이를 섬기는 것만을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어 충성(忠誠)을 한다고 이른다. 충과 효의 도(道)가 지극한 데에 이르면, 절의(節義)를 겸해서 이룬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 토와 그 학문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이것들 여섯 가지는, 비록 근본과 끝의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원리와 그 응용에 있어서는 서로 돕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 선생(文先生)은 이름이 익점(益漸)이다.
고려(高麗) 말엽 정치가 문란했을 때에 벼슬하였는데, 선생은 공민왕을 되놈나라 조정에다 무죄임을 변명해서 구(救)하다가, 멀고 먼 궁벽한 땅으로 귀양을 가셨다. 나라로 돌아오시게 되자 선생은 목면(木綿)의 씨를 입수하여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셨고, 원(元)나라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왕에게 청원드렸다가, 영외(嶺外)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셨다.
고향으로 돌아오셔 상(喪)을 당하셨을 때, 마침 섬나라 되놈들이 들어와 들끓임을 당하였는데 선생이 상복을 입고 묘를 지키시고 울며 제물드리기를 일상과 같이 하시자, 도적들이 감탄을 하고 나무를 켜서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는 네 글자를 써 놓고 가니, 한 고을이 그 바람에 온전할 수가 있었다.
우리 이씨조선의 태조(太祖)께서 아직 지위가 낮았을 때에, 삼남의 지휘사(指揮使)로서 지나다 가 선생이 지키시는 묘로 조문(弔文)을 하시고, 조정에 아뢰어 마을에 포장하는 비를 세워서 그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했는데, 그것은 홍무(洪武) 16년 계해년의 일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왕국이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시고, 성인(聖人)의 학문이 밝지 못함을 근심하시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하셔서, 계시는 집의 현판에다 삼우(三憂)라 써 걸으시었다
왕씨(王氏)의 왕조(王朝)가 끝나 국조(國朝)의 혁명이 있게 되자, 선생은 집문을 꼭 닫고 스스로 편안히 지내시고는 그 몸을 마치셨다.

아, 충(忠) 효(孝) 절(節) 의(義) 도(道) 학(學)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말미암아 네 가지가 이루어지기는 쉬우나, 두가지가 없이 네 가지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선생이 행하신 바를 소상하게 살피어 보면, 그 떳떳한 성품을 좇아서 순탄하고도 쉽게하여 하기 어려운 것이 없고 그리고 그리도 뛰어났는데, 그것은 즉 도와 학문이 속에 쌓여 있음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비(碑)를 세운 자초지종은 앞에 분이 기술(記述)해서 다 말했으니, 다시 어찌 너절한 말을 하랴.
선생의 후손인 맹헌(孟獻) 규하(圭河) 양주(良柱)가 옛 비석이 질어질 것을 걱정해서, 앞으로 돌을 다듬어 다시 세우려고, 마침내 그들의 일가 치열(致烈)이 내게 내력의 글을 청해왔다. 나로 말하자면, 문씨(文氏)와 전부터 의가 두터워었기에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서 사양을 못 했도다. 삼가 이 글을 지어 비석 뒷면에 새기게 하나니, 이후 천년토록 이를 보는 사람이 선생의 효행과 거룩한 업적을 알게 함에 그 근본을 두는도다. 

비의 앞면 
‥‥孝子里

비의 뒤면

‥‥前中顯大夫 知淸道郡事 文益膽爲母廬墓三年, 時方海窓, 執心不易
(전 중현대부 청도 군수 문익점은 모친을 위하여 묘를 3년간 지킴에, 당시 바다 도적들을 만났으나 지닌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 홍무(洪武) 16년 계해 2월 일 정(旅)
안렴사(接廉使) 봉상대부 전리총랑(奉常大夫 典理摠郎) 여극인(呂克인)
차사원(差使員) 통상대부 고성군사(奉常大夫 圈城郡事) 최복린(崔卜麟 1506~1521)


재도(載道) 정려,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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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북 영풍군 영주읍 읍삼동

설명 경절공 10세손 감천군파 평해군사공(平海郡事公) 재도(載道) 정려와 효자비

평해군사공 휘 재도정려각 중건기(旌閭閣重建記)

주상 재위(主上在位) 9년 을사(乙巳) 9월 하순 병조좌랑(兵曺佐郎)
한양 조보양(漢陽 趙普陽) 지음

모든 일이 마땅히 폐(廢)해서는 안 될 것이나 폐(廢)해진 것이 있고 쉽게 이를 수 없는데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니 비록 모두가 수(數)이나 또한 사람에 매였다.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원대조(遠代祖) 지평해군사공(知平海那事公)이 옛적에 영주(榮州)의 두서리(斗西里)에 살았는데, 고려말에 왜란을 만나 부친을 업고 산속을 가다 부친이 도적의 화살을 맞음에 공(公)이 피를 빨아 화살을 뽑아내고 격분하여 칼로 도적들을 쳐부수어 부자가 모두 안전하였다. 난이 평정됨에 사실이 알려져 정려(旅閭)가 내렸으니, 갑인년(홍무 7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들 구(龜)가 검교군기감( 원문은 감천군이며 정승이라 했으나 맞지 않아 수정함)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높은 벼슬이 이어져 오다가 6, 7세가 지난 감사공(監司公) 휘 근(瑾)과 장령공(掌令公) 휘 관(瓘)에 이르러 용성(龍城)에 옮겨 살았으니 사화(士祿)를 만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되었고 그 재종 사성공(司成公) 휘 경동(敬全) 호 창계(滄溪) 역시 문장과 절행으로 저명하였으나 불행히도 자손들이 영주(榮州)에 사는 자 없었다.

이로부터 문씨(文氏)의 문호(門戶)가 퇴락하여 정려각이 보존되지 못하고 다만 한 발되는 판각문만 전해 흙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을 옆에 사는 이씨(李氏)가 외손이 됨으로 주워서 집에 간수하였고, 길 옆에 있는 비석은 자획(字劃)이 이그러져 겨우 효자리(孝子里) 세 글자만 분별할 수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누구의 정려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이른바 마땅히 폐(廢)하지 않을 것인데 폐하게 된 것이니 어찌 수(數)가 아니겠는가? 효자공(孝子公)의 예손 광억(光億)씨가 구보(舊譜)로 인하여 옛날 살던 곳의 소재를 알았으나 고로(古老)가 생존한 이 없어 자취를 찾을 수 없음에 반나절이나 서성거리다가, 이씨(李氏)집에 들어가서 그가 오게된 사유를 말하니 이씨(李氏)가 추연(撚然)한 얼굴로 말하기를 "그대가 과연 문효자(文孝子)의 후손인가? 내 또한 문씨(文氏)의 외손이네" 하였다.

대개 이씨(李氏)의 집이 즉 효자공(孝子公)의 옛집이었으니 문씨(文氏)가 이 집을 여서(女斷)인 현감 김숙량(金叔良)에게 전하고, 김공(金公)은 여서(女斷)인 이공(李公) 진(畛)에게 전하여 이씨(李氏)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으며, 그 중세(中世)에 부사맹(副司猛) 휘 정헌(廷憲)이 있으니 임진란에 부산(釜山)에서 순절하였고, 그 손자 유형(惟馨)은 모진병에 일곱 살 나이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우고 효심이 더욱 돈독하여 늙도록 쇠하지 않았으니, 만약 조정에서 그 자상함을 들을려면 마땅히 복호(復戶)에 그치지 않았을 것을 애석해 하였다. 영조 임술에 신하들의 주청으로 인하여 사맹공(司猛公)을 포증(褒贈)하면서 그 정려(旅閭)가 내리어졌으니, 기둥에 붉게 쓴 글자가 휘황하게 마을을 빛내나 홀로 문씨(文氏)의 옛 정려가 폐퇴되어 전하지 않음에 이치가 마땅히 이같지 않을 것이라 이씨(李氏)가 매양 한(恨)하더니 마침내 문씨(文氏)의 후손을 보고 기뻐하고 또한 감격하여 들보사이에 감춰두었던 판서(板書)를 내보이니, 「효자 지평해군사 문재도 지려(孝子知平海郡事 文載道 之間)라 쓰여 있었다 광억(光億)씨가 희비가 어울려 심정을 누르기 어려움에 눈물을 흘리떠 말하기를 "판서(板書)가 광억(光億)이가 사는 삼십리 가까운 이곳에 있었으되, 5, 6대(代)가 지나도록 그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가 지금에야 공(公)의 집에서 얻어보니 이 필연 선조의 영령이 보호하심으로 불초(不肖)가 오기를 기대하셨는가? 광억(光億)이 비록 가난하나 어떠한 고난도 무릅쓰고 고판(古板)을 수집(修緝)하여 정려각(旋閭閣)을 옛터에 세워서 후일 이곳을 지나는 이로 하여금 고려 효자 문모(文某)의 정려임을 알게 한 즉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겠다 하고 드디어 영주(榮州) 사림회(士林會)에 가서 그 일을 알리니 그 중 열 몇 사람이 평해공(平海公)의 외후손으로 꾀하지 않고도 함께 말하기를 함께 도을 것을 원하였다. 
광억(光億)씨가 다시 절하며 말하기를 "지난 신유 연간(辛酉年間)에 각문(各門)의 선부형(先父兄)들이 통문(通文)을 내어 문씨(文氏)의 예전 묘(墓) 퇴폐한 것을 손보고 위토(位土)를 두어 수호하게 해준 것을 광억(光億)이가 마음 속에 느껴 새긴 지 오래이다. 지금에 이 판서(板書)가 다시 외후손의 집에서 나오고 제공(諸公)들이 모두 도을 것을 원하니 이 본손 외손의 구별없이 위선(爲先)의 정성이 하나인 것을 알겠노라. 하고 이에 마침내 서로 함께 재목을 모으고 일을 동독하여 몇 달이 안 되어 공역(工役)을 마쳤다. 이에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을 이룬 것이니 또한 이른바 수(數)가 아닌가? 
여각(閭閣)이 이루어짐에 나한테 기(記)를 청하나 나의 누추한 글이 효자공(孝子公)의 명덕(名德)을 더럽힐까 저어하여 재삼 사양했으나, 그 청(請)이 더욱 강근함으로 내가 공경함을 지으며 문군(文君)은 진정효자(孝子)의 후손이구나 하였다. 문씨(文氏)가 수세(數世) 이래로 방선조(傍先祖)를 제사 지내지 못한 자 4, 5가(四五家)였으니 문군(文君)이 모두 힘을 다해 위토를 마련하고 산소를 손질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므로 내가 일찍 가만히 그 사람됨을 흠모했었는데, 지금 와서 이 일을 주선하여 수백년(數百年) 버려둔 일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사람에 매였다 한 것이 그 군(君)에게 있음이다. 이에 시경(詩經)의 불궤(不濫)의 글귀를 외우며 석류(錫類)의 축원을 한다.


오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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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설명

판도판서공파 심묘파 파조 문계창(文繼昌)을 모신 양심정내에 있는 비석.
부친의 병환에 아드님들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게하여 부모님의 병환을 돌봄(5효자는 필성弼聖, 주성周聖, 경성敬聖, 흥성興聖, 유성有聖)

설단 인사

서문

사적비문

청원문

고유문

필성묘갈

주성묘표

홍성묘표

오효자 비 설단 인사 말씀

공사간 바쁘신데도 불원하시고 비문(卑門) 오효자(五孝子) 유적비 제막 행사에 왕림하여 자리를 빛내 주신 귀빈 여러분께 충심(衷心)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生의 어린시절 어른들로부터 야화(野話)처럼 듣고 넘겨왔던 우리 현조(賢祖) 일실(一室) 오형제(五兄第) 오효자의 효행 천상문(薦狀文)이 우연하게도 우리집을 이사할때 문갑에서 출현 되었기에 탐독(耽讀)한 바 일희일비 감격의 눈물과 참회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현조(顯祖)이신 오효자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기에 천문사(天門使)라 이름하여 우리면의 都尹(도윤;면장)을 위시하여 성주(城主;군수) 및 관찰사(도지사) 또는 순국상(巡國相;암행어사)에 까지 오효자의 효행 천상(薦狀)을 연명(連名)으로 수년간 오회(五回)에 걸쳐 상소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효자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요 만선지장(萬善之長)이란 구절이 세상 수백가지 종교(宗敎)중에도 일, 이항에 속한 바 그 얼마나 인륜도덕의 미행이 아니리오
오호라 그 당시는 국력과 국고가 쇠약탕진되고 혼란한 시기라 정려(旌閭) 서원등의 인허(認許)에는 권력과 금력에 좌우되었던 것이라. 향내 유림명사 팔십여명의 간절한 상소에도 아랑곳 없이 미몽정려(未蒙旌閭)하여 군여지(郡輿誌) 및 향교지에만 기재되고 지금에 이른 바 늦게나마 비문(卑門)에서는 적은 정성이나마 선조 오효자 행적비를 세우는 영광의 날을 맞이하여 원근을 마다 않고 참석하여 본 행사를 빛내주신 귀빈 및 종친들께 심심한 경의를 표하오며 소대(疎待)함을 여량하옵시고 가내에 건승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2003년 계미년 봄 죽헌공 육세 주손(胄孫) 문정주(文正柱)

오효자 비석(양심정내)

양심정과 출입문

서 문

장장 육백여년동안 문갑속에 은장(은장)되어 효행의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조부모로부터 전설 또는 옛날 이야기 처럼 들어 왔을 뿐 우리 현조께서 일문 오효자의 효행을 탐문한 군내 유림명사 팔십여명이 명도윤(면장)을 위시하여 성주(군수) 또는 유림명사 팔십여명이 면도윤(명장)을 위시하여 성주(군주) 또는 관찰사(도지사) 및 순상국(어사)에게 까지 오효자의 열양(열揚)을 위하여 6년간 5회에 걸쳐 연명 천상(薦狀)을 상소하여 5효자 포상 및 정려를 내릴 것을 탄원한 문증(薦狀)이 발견 되었음은 천우신조가 아닌들 어찌 지금까지 생생히 남아 있으리오.

그 당시는 국운이 점차 쇠약하여 혼미한 시대라 충효사상이 결핍되어가는 시점에도 극효이우(極孝以友) 돈목(敦睦)하여 가깝고 먼곳의 흠모와 경앙(敬仰)을 받아왔던 제음천상(題音薦狀)이 수차 온갖 전란의 와중에도 소멸되지 않고 종가집 유물함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중에 종손 정주(正柱)군이 집을 신축하여 이사할 때에 기적으로 발견되었음은 실로 천고감응지고(天固感應之故)라 명도(冥途)하신 5효자의 효행을 금세에 널리 주지케 함이 아니라오.

오호라 그 당시에 미몽정려(未蒙旌閭)함은 후손들의 천추유한(千秋有恨)이라 만시지탄이오나 우리 제손들은 적은 성과 열을 모아 표각(表刻)하여 민몰(泯沒)하신 오효자의 희세지효행(稀世之孝行)을 영세토록 빛내고 오효자의 열양(열揚)을 위하여 애써주신 명유명사 팔십여명의 은공에 심심한 경이를 표하오며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일대경종이 되기를 바라면서 위와 같이 전말을 대략 삼가 서술함
2003년 계미년 신춘      오효자 건비 추진위원장 묵제공(默齊公) 현손 홍범 삼가 적음

 사인(士人) 남평문공 오효자 사적 비문

효도는 인륜의 근본이요 인간선행의 으뜸인 바 우리가 노태산 자락 유서 깊은 이 양심정(양심정) 경내에 청석을 세워 남평문씨 오효자의 효행 일단을 새기는 뜻 또한 여기에 있다.
무릇 세상만사 우연이 아닌즉 어찌 깊이 연유함이 없으리요
남평문씨는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 난 분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는데 고려말 판도판서 위 근(瑾)공은 오효자의 15대 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남하하여 협천 대야촌에 자리를 잡아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조선조 중종때 문과에 급제한후 함양군수로 선정을 베풀고 양주목사의 벼슬을 역임한 휘 계창(繼昌)공의 호는양심정이니 곧 심묘파조요 오효자의 10대조이다.
아버님 휘 정방이 호는 죽헌(竹軒)공인데 숨은 덕행으로 고을의 칭송을 받았고 어머님 상산이씨는 현모양처로 가문의 모범이 되었다.
오효자는 육형제로 맏형은 휘 필성이요 호는 덕천(德泉)공이며  순조 2년 서기 1803년에 출생 1860년에 별세 2남 휘 주성(周聖) 호 심계공(心溪公)은 1804년에 출생 1869년에 별세 3남 경성(敬聖) 호 덕세공(德世公)은 1809년에 출생 1844년에 별세 4남 휘 흥성(興聖) 호 묵제(默齊)공은 1812년에 출생 1871년에 별세 5남 휘 인성(仁聖)은 1819년에 출생 1874년에 별세 6남 휘 도성(道聖)은 1838년 생으로 당시는 어린 유아였음으로 위 5형제를 5효자라 일컬었다.

5형제 모두 어릴적부터 뛰어난 총명으로 가문의 촉망을 받았고 천성이 효성스러워 보모명령을 거스름이 없었으며 합심하여 양친을 봉양할 제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과 맛나는 음식 차려 드리는 일과 거처를 마련해 드리는 일에 마음씀이 지극하였다.
어머님 병환에 정성껏 시병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시니 애통함이 예절을 넘어 보는 사람들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어머님 묘소에 묵제공께서는 성주의 불공정한 판결에 관문을 떠나지 않고 불복항거하여 끝내 승소하게 되니 모두들 지극한 효심에 감탄했다.
아버님 죽헌공의 병중에는 5형제가 아버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대소변을 맛을 보고 병세를 살피며 의약을 처방하며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무효하고 더 위중하여 덕천공과 심계공께서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니 기절 반나절 만에 소생하시어 그후 10여년을 더 사셨다.
전후상에 조종장제를 한ㄱㄹ같이 가례에 따라 정성을 다하니 향인들이 천생효자들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여 고을 선비80여명이 연명으로 5형제의 효행을 군수와 관찰사와 순행어사에게 6년동안 5회에 걸쳐 끈질기게 오형제 생전에 정려를 내려 주실 것을 진정 호소하니 여론의 당연한 귀추일러라.
그러나 당시 국정이 어지럽고 세도정치가 난무하여 효자 포상같은 문제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끝내는 국권마저 상실하는 비운에 빠져 부득이 군지와 향교지에 수록으로 그쳤으니 어찌 후손들의 천추여한이 아니리요. 오호라 물질문명이 도도히 세상을 휩쓸어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진 가운데 전래의 미풍양속은 점점 사라져가고 새로운 가치관은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곳 남평문문에서는 선대 오효자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니 이는 조상의 미덕을 기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수차례에 연명 진정하여 주신 많은 선비님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귀감이 되고 삶의 참된 방향을 제시하는 불멸의 밝은 등불이 되리로다.
                                         2003년 봄날 인천 이태길(李泰吉) 짓다

효자 덕천공 휘 필성(弼聖) 묘갈명 병서(竝序)

묘산 관기뒤 당산밑 자좌언덕에 집채같이 높이 사척으로 된 것은 고 효자 덕천문공이 의이(依履)를 감춘곳이다. 공의 휘는 필성이요 자는 윤세요 덕천은 그의 호이다. 관은 남평이니 신라 벽상공신 개국백 휘 다성이 시조가 된다. 누전(누전)하여 휘 극겸은 문하평장사 충숙공이요 5세에 이르러 휘 근은 간혜공이니 려운(려운)이 장차 쇠할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합천 대야촌에 복거하니 자손이 인하여 거하니 고을의 대성이 되었다.
고조의 휘는 도휘요 증조의 휘는 창서요 조의 휘는 계익이요 고의 휘는 정방이요 비는 동래정씨 이형이 따님과 성산이씨 관복이 따님인데 공은 후비에서 출생하셨다.
순묘 임술(1802)에 출생하셔서 오형제의 거장이 되셨다.
천성이 순인하고 사친지효하여 음식 의복의 지공과 정성 온정의 절차를 한시도 궐한 바가 없었으며 넷 아우로 더불어 우애가 여욱 돈독하여 문친장유에도 은의를 골고루 베풀어셨다.
그 환심을 얻었으며 무릇 중인을 사랑하여 그 잛은 바는 용서하여 효제충신의 행실로써 개유하고 후생에게 또한 그러하였으며 어머니 초상을 당하여서는 애척이 극진하여 예에 따라 봉향하였고 뒤에 아버지 병환을 만나서는 백방 구약하고 기천원대하여 위독함을 당하여서는 작지주혈하여 갱득회생하여 십일년이나 연수하였으니 이 어찌 효성의 감천함이 아니리오.
사적은 다 합천여지에 실려있고 사림정장에도 보존되어 있다. 철모 경신(1860년) 정월 삼십일로써 졸하니 향년이 59이다. 전처는 청주한씨 석운의 딸이니 묘는 사야상동 뒤 정관령 선조우 좌요 후처는 합천 이병홍의 딸이니 묘는 화성산 신좌이다.
삼남일녀를 길렀으니 남 호흠은 한씨 출생이요 남 태흠과 우흠과 녀서(사위) 농서 이효권은 이씨 출이요 호흠의 남은 한태와 한성과 한팔과 한필이요 대흠의 남은 한숙과 한경과 한대와 한룡과 한진과 한석이요 우흠의 남은 한범이다.
슬프다 공의 효성이 출천한 것은 마땅이 생민의 모범인데 천문이 심히 아득하여 정포를 얻지 못한 것이 어찌 자손들의 통한이 아니리요. 비록 그러하나 사림이 여지에 기록하고 순상어사가 그 정장에 제사한 것이 가히 세상에 천할 것인즉 정전을 얻고 못얻은 것이 공의 행덕에 가손(加損)될 것이 있으리요 사손 정주가 저쪽과 더불어 석물을 갖추고저 하여 그 기록한 것을 안고 와서 나에게 글월을 청하니 내 이르되 이 또한 시전에서 이르는 바 영석(의) 유가 아닌가 하노라 그후 명에 이르되 이 오직 효자가 온전히 돌아간 유택이여 족히 백행의 근원이 됨인즉 마땅히 그 자손이 삼가 수호할 것이며 고을 사람이 공경할 것이다.                           협천 이상학 撰

효자 심계공 휘 주성(周聖) 묘갈명 병서(竝序)

근고 심묘관기촌에 5효자가 있어 군지에 실려 고을 사람의 공경하는 바가 되었으니 남평문공 휘 주성이 곧 그 하나이다.
삼가 상고 하건데 공의 자는 희세요 심계는 그의 호이다. 신라 벽상공신 남평백 휘 다성의 세계에 여러번 전하며 휘 극겸은 문하평장사에 시호는 충숙공이니 송호서원에 향사하고 휘 근은 판도판서에 시호는 간혜이니 려운이 장차 옮김을 알고 인끈을 끌러 놓고 남하하여 합주에 둔거하니 곧 점필재 이른 바 대야촌에 표박한 자 그이다.
아들 세린은 중현대부 소부윤이요 휘 계창은 창서요 조의 휘는 계익이요 고의 휘는 장방이요 비는 동래정씨인데 통덕랑 리형의 따님이요 후비는 성산이씨인데 관복의 따님이다.
공은 이씨에게 출생했으며 형제 5인에 차례로는 그 둘째이다. 성품이 효우하여 그의 형 필성과 그의 아우 경성과 홍성과 유성으로 더불어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길제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물건을 일찍 궐한 일이 없이 매사를 반드시 품명하여 행하여 감히 자전함이 없으며 병환이 있어 시탕할 때에는 밤이 되어도 웃입은 채로 수잠을 자면서 기천원대 하고 위급할 적에는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며 작지주혈하여 연수 십년타가 뒤에 천년으로써 돌아감에 애통하고 회신하여 거의 멸성한데 이르니 진실로 지성이 감천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 같으리오. 이에 고을 선비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르되 효자의 특행을 마땅히 천양하여야 한다 하면서 연장하여 고을 원에게 암행어사에게 감영에다 정장하였으니 천장이 심히 멀어 포정을 얻지 못한 것이 가히 아깝도다.  공이 세상에 있은지 66년에 순묘 갑자(1804)와 고종기사(1869) 7월초 9일은 그의 생졸년이다. 묘는 관기 뒷산 간좌이다. 배위는 평산신씨 중용의 딸이며 송계 계성의 후예이다.
묘는 공의 묘 우측에 부장되었다. 일남이녀를 낳았는데 남은 익흠이요, 녀는 진양 강유봉과 밀양 박동화다.
손남은 한기와 한직과 한설이요 나머지는 기록치 않는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장차 백년이 가깝도록 오히려 묘도를 궐하였음에 사손 석주가 비로소 문친으로 더불어 석물을 갖추고저 그의 장축으로써 나에게 와서 글월을 청하거늘 내 사양타 못하여 드디어 그가 장을 모아서 비깨 보고서 명하여 이르되,
효도는 어버이 수를 연장하였고 우애는 사람의 말을 끊었도다. 관부에 제사요 예사에 재논이로다. 세가 고단하고 땅이 멀매 천장을 미몽하였도다. 오직 이 정석이 가히 정려문을 당하도다. 내 명을 현각하여 길이 후손에게 주노라.
                                                               협천 이상학 撰

효자 묵제공 휘 흥성(興聖) 묘표(墓表)

남평문씨가 합처서 망족(望族)이었는데 중세에 심묘리에 거함으로부터 침체하여 약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점점 문호가 빛나서 그 마을에 들어가면 묘소가 치산이 되었고 관우(정사)가 꾸며져 있으니 그새 그 근본을 뉘가 기창하였는고? 이르되 오직 고 묵재공의 유모(惟模)이다. 공이 돌아간후 친당들이 송모하기를 쇠하지 않으며 상의하여 그 묘에 묘하고자 공이 증손 택현이 나에게 청하여 공의 묘에 표하는데 공의 행사를 일으는데 심히 자상하거늘 내 일으되 무릇 효도하고 우애하고 정성한 것은 과연 인도 행치의 대단인데 공 이에 갖춤이 있는 것이 아니냐 공이 나서 수명(秀明)하여 형제 5인에 차례로 사학서(四學書)에 글배우기를 적게 하였다. 성년이 안되어서 사친지효하여 역농 화유하여 그 찾을 이을새 강작하여 노고하는 빛이 일찍 친전에 보이지 않으며 형제로 더불어 우애가 돈독한데 중형과 계씨가 조요하거는 초상장사에 정예가 극진하고 무유 어린 질자를 자기 자식이나 같이하여 성취하는데 일으니 이 효와 우애가 아니냐? 공이 단중하고 질직하여 언소가 구차함이 없고 추향하는데 과감하며 구색하는데 병들어 서예를 행하지 못하면 저족들과 꾀하여 고식을 염출하여 써 식리하고 이에 친영에 의물을 갖추어 제수를 공봉하고 더욱 송종의 예를 삼가여 무릇 저족의 성장에도 친소에 무간하게 주선한데 법도가 있어 뒤에 유감이 없게 하고 일찍 모에 송사가 있어 공이 누차 관문에 나가 명백하게 변직하여 조금도 굴함이 없이 마침내 얻어서 기정을 보는 것이 이 성과 과간한 것이 아니리오.  항상 자질을 경계하되 감히 태만하고 음황하여 써 가법을 추락하지 말라하니 가히 전가하는데 본대가 있는 것을 보리로다.
공의 휘는 흥성이요 자는 화세요 호는 묵재이니 상조 휘 다성은 신라 개국백 시호는 무성이요
고려 휘 익은 시 경절이요 휘 공유는 집현전학사에 시 경정이요 휘 극겸은 평장사에 시는 충숙이요
조선에 와서 명망과 덕망이 대로 그침이 없었으며 휘 계창의 호는 양심정이니 여러번 열읍을 반시 저적이 있으며 아들 세걸의 호는 도암이니 박야천 소소와 더불어 도의의 사귐이 잇으니 이공의 10세 9세조이다.
증조의 휘는 창서요 조의 휘는 계익이요 고의 휘는 정방이요 비는 동래정씨 통덕랑 의형의 따님과 성산이씨 관의 따님인데 공은 이씨에게 나셨다. 공이 순묘임신(1821)에 낳아서 고종신미(1871)10월 19일에 졸하니 두월 선영 좌편 합곡 건좌에 장사하다. 배는 동래정씨 윤복의 따님이니 임신생으로 부덕이 있어 부자에게 잘 배우가 되었다. 임진 11월 9일에 졸하니 묘는 합폄이다. 3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상흠과 영흠과 하흠이요, 딸은 박휘윤과 한응규와 류방대에게 시집가다.
상흠의 아들은 한정과 한복이요, 영흠의 아들은은 한봉과 한종과 한구와 한린이요 딸은 백주수에 시집가고,  화흠의 아들은 한수이고 딸은 이동연에 시집갔다. 희윤의 아들은은 정재이며 응규의 아들은 용원과 용형과 용리와 용정이요 방대의 아들은 도희요 증현 이하는 다 기록치 못한다.                                     정사 10월   일   강성 이동희 근술

오형제 오효자 행적비 제막 고유문

顯祖孝心(현조효심) 稀世東方(희세동방) 隱幽百年(은유백년)  今世出炫(금세출현)
현조님의 효심은 세상에 드물도다 백년동안이나 깊이 감추어있다 금세에 나타났도다
人在五輪(인재오륜)  孝極丹衷(효극단애) 身在父母(신재부모) 至誠深海(지성심해)
인간이 지킬 오륜은 효심이 충성스러워야 하고 몸은 부모에게 받았으니 깊은 바다같이 지성을 다하고
略記行蹟(략기행적) 貞珉屹立(정민흘립) 비之天秋(비지천추) 長爲是式(장위시법)
행적을 기록한 옥돌 비석을 깍아 세워  천추에 오래 오래 남기는 것이 이또한 오래된 법도이다.
 洞壑煥明(동견환명) 鄕里增色(향리증색)
좋은 곳을 찾아서 마을에 널리 알리고
恭渭吉日(공위길일) 邀賓飮落 敢告厥由(감고연유)矜伸濟濟(긍신제제)
좋은 날을 받아 손님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사유를 감히 알리며 옷깃을 단정히 하였다.
淸酌牲幣(청착희폐) 恭伸奠獻(공신전헌) 虔告虔告(처고처고)
맑은 술과 고기를 공손히 드리오니 받아 주옵소서 삼가 고하고 삼가히 고합니다.

 

청원문

청원문1

화민(化民) 박상덕 신재곤 박시항 등은 합하께 엎드려 비나이다. 효도는 민 부자를 친함에 덕과 행실이 아름다움이라.
슬프다 동생과 창려를 칭찬함은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부모님의 공적을 펴고 휘날림은 아름다운 덕행이라 조정에서는 밝은 법으로 특이한 행실을 높이 천거함은 법을 집행하는 자의 책임이라 민부자를 칭함은 민 부자의 효행을 알지 못했고 창려를 천거하야 동생의 효도를 누가 나타내리요.
이제 본면 관기동 거주하는 거주하는 사인 문필성 문주성 문경성 문홍성 문인성 오형제 그의 부모 섬김에 이르러 전모친 초종지례 삼년상을 법도에 따라 엄숙하게 마치고 이제 또 그의 부친이 년세 육십에 숨은 전염병에 걸리매 모든 형제가 그 부친의 똥을 맛보아 백방으로 이약을 쓰며 온갖 정성을 다 한 바이나 병세 점차 심하야 구하고저 한 바이나 구하지 못해 장자 필성 차자 주성 손가락을 짤라 수혈하고 남은 헹제 역시 형과 같이 단지 수혈코져 하나 좌우에서 붙들고 만루하여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나서 다시 소생함에 계속하여 의원과 약을 쓰니 평소대로 돌아옴은 그 아들의 효성과 그 모친의 마음이 움직여 소생한 연유라 그리고 하느님이 진실로 감동함이라 탄식함에 한 집안의 오형제는 이 세상에서 드문 효자이며 오형제 한몸같이 성한 일이라 옛날 겨울에 죽순, 어름에 잉어, 중국 효자 육적의 귤, 항양의 베개머리 부채질등 이에 더할나이 없이 더욱 가상하다.
이와같이 착한 행실이 천리밖까지 응하며 하물며 평일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남보다 뛰어나지 아니함이 없다.
효는 백행지 원인즉 기타 항상 행하는 도리 보이지 아니해도 생각할 수 있다. 붉은곳 한 짓에 족희 징흠하여 전체의 누른 한점의 고기살점에 전체의 맛을 알 수 있고 그 의륜에 우르러 보고 공경이 정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한건의 가행으로 가이 일만선의 족할 것을 징흠해 볼 수 있다. 동민들이 합심하여 같은 소리로 우르러 외치나이다. 효도의 이치는 문질러 없애고 문필성 문서정 형제 손가락 짤라 어버이를 소생케한 열행으로 어버이 병이 쾌유함은 오형제 한 몸같이 아름다운 이 행실을 낱낱이 열거 보도하여 영문 높이 걸고 상을 주고 착한 선행을 어둠에서 밝게 이땅에 널리 알리도록 행하여 주시기 하교 하옵소서

 성주님 처분 정유년 사월 : 효도는 백행의 근원이라. 들어니 지극히 가상하다 다시 마땅히 대중의 의론을 널리 채택하여 올릴 것이니 이 뒤로 그것을 가지고서 영도에 보일 일이라.

청원문 2

합천군 유학 신사택 류용원 이언경 등은 목욕재배 상서 하나이다. 순상국(어사) 합하 엎드려 비나이다.
사람은 항상 떳떳함이 있고 효도와 공경함이 그 베리라 집에서 곧은 도와 공경하고 우애함이 그 베리라  효도와 우애함은 즉 일신이 법칙이 아니라 사방의 법칙이라 고로 전하되 한집을 사양하고 한나라를 사양함은 어찌 법을 집행하는 군자의 공경한 생각과 착함을 권하는 바라 이제 본군 사인 문필성 문주성 문경성 문흥성 문인성 등은 대대로 고을에서 오래된 세족으로 출생시부터 영리하여 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경하야 부모 섬기고 형제간에 사랑하여 항상님이 우러러 보았고 전 모친의 병에 근심과 그 도리를 다하여 향리 사람들에게 공경과 사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후 부친의 모질고 독한 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하여 장자 필성 차자 주성은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수혈하니 그에 부친 효력이 있어 하느님이 감동하여 다시 이 세상세 소생한 바 몇 년을 더 가 수할지 알지 못했다.
사랑은 가히 효가 아니요 또한 귀가 아니요 공경이라 생등은 불필 피수혈한 한끝은 흔이 있을 수 있으나 평일 처신지 도리 뛰어나지 아니함이 없다.
이른고로 면에 글로써 보고를 올리옴은 유림에 글이 오니 엎드려 비오니 합하께옵서는 취해 살피옵소서
동생의 숨은 효행이 관리들의 불천이요 장공의 돈독 우애를 천자가 듣고 불러 옥과 돌을 가려서 양공으로 하여금 그릇을 만들고 마군이 좋은 말을 만났고 백냑의 날랜 말을 찾는 것고 양공이 그릇을 만드는 것이 어찌 금일이 아니라오 합하의 책임이 아니오리까?
한 집에 같이 사는 오효자의 특이한 공적과 행실을 면보에 기재해 반드시 거듭 실어 수고로움을 애원하오니 복원 합하께서는 이러한 천사 문필성 오형제의 효행이 세상에 빛이 나게 열어주시기를 삼가 엎드려 몽매함을 무릎쓰고 진정하나이다. 하교 하옵소서.

순상국 처분  정유 9월 : 오형제가 효로써 하고 우애로써 하여 향당에 소문이 난 것이 지극히 가상하니 더욱 공의를 채택하여 이루어지게 할 것이니라. 기다려 성사케 할 일이라.

청원문 3

합천군 유학 박상덕 정환근 신주필 등은 목욕재배 상서 하나이다.
합하 선비는 한가지 선과 한가지 행실이 있어 없는 사실을 지어낼 수 없는 법이라 효도는 어찌 말로 바꾸리오 이런고로 구차하게 그 숨은 효도를 밝게 들어낸 표함은 국가의 밝은 법을 서로 지키는 고로 제도가 있고 혹 효를 밖으로 들어내지 않는 바 있어 섞인 옥과 돌을 자리지 못하고 한가지로 취급되어 민몰해 짐은 가이 애석하지 아니할까 엎드려 비나이다.
합하 굽어 살피소서 본읍 사인 문필성 주서 경성 흥성 인성 오형제 전에 일찍 돌아가신 모친 조종상을 어려운 중에도 극직이 예로써 마치고 또 아버지의 숨은 병마로 손가락을 짤라 피를 되루니 기절지명을 구함은 하느님 그리고 신이 감동함이라 무릇 이 세상에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곧 효라 일언이 폐지라 재능이 남달리 뛰어난 발자취라 본읍에서는 이를 가상이 여기시고 영문에 첩첩이 사실을 걸어 모범이 되게 해주시기 복원하나이다.
하늘이 내리신 천문사 문필성 오형제이 효행을 살아 생전에 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삼가 몽매함을 무릎쓰고 진정하나이다.

성주님 처분 임인 7월  : 오형제 아름다운 행실 믿어 심히 가상한 일이라.

청원문 4

화민 유학 신중용 전윤복 이후만 등은 삼가 목욕재배하고 합하에게 엎드려 비나이다
특해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면 국가각 제도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난 효행은 서로 지켜 드러냄이 옛법이라.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렇지가 아니하며 혹 명예를 기다려 포상 받는 자가 혹 위에 있는자가 있는 고로 능히 진짜 가짜를 아래 있는자가 섞인 옥석을 가려내지 못함은 마음으로 싫어함을 듣는 바라 민등은 멀고밖에 있어 비록 바로보지 못하며 옛 사람이 어버이를 봄이 내 몸 본 듯 기뻐하는 자가 있으니 오직 엎드려 비오니 살피옵고 본읍 사인 문필성 주성 경성 흥성 인성 등은 어버이 섬김이 지극히 효도하여 돌아가신 전 모친 섬김에 어려운 중에도 뛰어난 효행이 있으며 이제 또 그에 부친이 독한 병마에 걸려 다섯 아들이 서로서로 환자의 똥을 맛보아 치료한 바이나 극히 구하기 어려워 장차 필성 차자 주성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니 사라진 명이 반나절만에 다시 소생함은 참으로 하늘과 신령이 감동한 바라 탄식컨데 한 집안 다섯 효자 만고에 드문 천사라 이와 같이 뛰어난 행실을 밝게 나타내어 민몰해 알지 못한 한 대의 사람보는 느낌이 위에 있는자가 마땅히 행할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아름다운 정보를 굽히 모아 이에 엄숙하게 외치오니 원하옵건대 영문에 높이 걸어 명백하게 나타내여 주시옵기 삼가 몽매함을 무릎쓰고 진정하오니 하교하옵소서

성주님 처분 정유 5월  : 일찍이 앞 공문에서 이미 공경과 감탄을 다하였고 또 고을의 의논이 있으니 이 뒤로 천양하는 일은 염려하지 말 것이다.

청원문 5

심묘면 도윤이 보고할 사실은 본면 관기동에 사는 사인 문필성 주성 경성 흥성 인성 오형제는 어버이를 섬김에 특이한 행실이 있음은 고기와 나물을 갖추어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온갖 정성을 다함을 그치지 않고 돌아가신 전 모친의 삼년상을 예로써 마치고 항상 웃사람에 대접을 받아왔다. 또 금년봄에 그에 부친이 숨은 독한병에 걸리매 오형제 서로서로 분을 맛보아 의원이 처방대로 약을 섰으니 명을 구하기 어려워짐에 장자 필성 차자 주성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하니 끊어진 명이 반나절만에 다시 살아나니 하느님이 진실로 도운 바라 한가지 지혈 뿐이리오.
오형제 평소 어버이를 섬긴 도리가 남보다 뛰어남이 없지 아니한 연유라 급히 보고하오니 경험에 비추어 시행해 주시기를 굽어 살피시기를 바라나이다.
         심묘면 도윤 행 군수님 앞

처분  : 효도란 백가지 행실중에 근본이라 힘써 이와 같이 남보다 뛰어난 사실이라 밑어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가히 예로서 엎드려 생각함


쌍효문(雙孝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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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광주 남구 사동 124-2번지

설명 의안공 윤경공 사현공파 경절공 27세 시채공 아들들의 효자정려

경절공 27세인 시채(時采,윤서공)님은 다섯아들이 모두 효자였다
특히 장남이신 장갑(文章甲 1798-1832)과 4남이신 장섭(章燮)의 효성이 지극하고 학덕이 뛰어나신 분으로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시어 숭앙 받았다.
부친의 병환에 지성으로 2년 동안을 한결같이 간호하였으며, 임종에 당하여서는 단지수혈(斷脂輸血)하는 등 정성을 다했으며 마침내 상을 당하자 예제(禮制)대로 장사하니, 향당(鄕堂)의 효자로 칭해지면서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 귀감을 삼고자 사림들과 조정신료들이 왕에게 청원하여 국가에서는 명려하여 쌍효문을 건립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금이 내린 교지(후손 인채님 보관)에 의하면 휘 장갑공은 1865년 6월22일 종사품인 동몽교관 조종대부이 증직과 孝行倬異(효행이 남달리 뛰어남)에 가자(加資)하신데 이어  1867년 9월 19일 거듭하여 정삼품인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승계 추증해 호행탁이의 교지를 내렸으며 아우인 장섭공께도 그의 효행과 학덕을 칭송하여 1867년 9월29일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과 효행탁이의 교지를내리시니 두 형제분의 영예뿐만 아니라 가문의 크나큰 광영이었고 세인들 또한 우러러 흠앙하였으며 그 후광이 후손들에게도 크게 미치었다.

내부에는 정려기외(程閭記外)에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광무 6년 9월 25일(1903년)에 효자정문을 짓기를 명하였으나 형편이 어려워 10년 정도 있다가 초가집으로 효자비를 세우고 다시 20년 후에 기와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형체인 기와집이 된 것은 1930년경입니다.
관리는 김재선님이 하고 있다.

도로안내 : 호남고속도로 서광주나들목 -> 무등경기장 입구 ->광주 문화방송 -> 사동
주변명소 : 사직공원, 광주공원, 이장우가옥, 최승효가옥, 무등산

 

쌍효문

어사나무

현판

입구문


고사정( 孤査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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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합천군 대병면 오동마을

설명 경절공 15세  판도판서공파 오동문중 고사(孤査) 諱 덕수(德粹) 정려
조선시대에는 좋은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효자 충신 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왕명에 의해 그 사람이 사는 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효자가 태어난 마을에 정려가 세워지면 그로부터 그 마을은 효자리(孝子里)로 불린다. 지금도 도내 곳곳에 효자리가 있는데, 모두 효자가 살았던 마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 지금껏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합천군 대병면 오동마을. 합천댐으로 가는 길목 양리 3거리에서 우측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동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충효탑’이라고 쓰여진 길가의 표지석은 보통 시골마을 입구에 의례적으로 세운 그런 것이 아니다. 오동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충효’를 널리 드러내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10리 남짓 들어가면 오동마을이 나오는데, 요즘 보기 드문 집성촌이다. 이 마을 30여가구가 모두 남평문씨(南平文氏)로 고사(孤査) 문덕수(文德粹)의 후손들이다.

고사 문덕수. 그는 효행이 뛰어나 살아서 정려를 받은 합천 선비로 임란 때는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倡義)한 인물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고사가 효와 충을 다 갖춘 조상으로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널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오동마을에는 고사의 학덕과 효행을 기리는 고사정(孤査亭)과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이 마을 남평 문씨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은 고사정을 찾았을 때, 후손들은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고사는 한마디로 어떤 분입니까” 기자의 물음에 후손들은 한결같이 “孝忠兼全한 선비”라고 했다. “살아서 정려를 받았으니 효자요, 국란을 당했을 땐 분연히 의를 위해 일어났으니 충신”이라는 말이었다.
이어서 기자를 고사정 옆 정려각으로 안내했다. “孝子里”라고 새겨진 비석과 “부모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서 6년동안 죽을 먹었고 형 덕순이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삼년을 입었고 봉선전 참봉, 순릉참봉과 진중어사로 조정에서 여러번 불러도 모친봉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 라는 뜻의 현판이 걸려있다. 또 1555년 명종조에 행실을 좋게 여겨 삼강록에 기록하고 정려를 내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사 문덕수는 1519년 합천군에서 서쪽 20리쯤 떨어진 가례리 고사동에서 태어났다. 현재 행정명으로는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인데, 이곳에는 지금 고사가 살았던 곳에는 유허비가 서 있다. 지명도 ‘고사등’이라 불리고 있다.
고사는 남명 제자이다. 남명과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게서 학문을 익힌 고사는 젊어서부터 효자로서 이름이 나 있었다. 효행과 학문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번 참봉, 사헌부 감찰, 의령·칠원 현감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역시 남명 제자인 덕계 오건, 각재 하항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사는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는 것도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단성현감으로 임지에 나간 적이 있다. 하지만 직접 양식을 가지고 가서 선정을 베풀다 석달 만에 돌아왔다. 이때 석달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고사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정자를 짓고 모친을 봉양하며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익히며 선비로서의 고고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1591년 경상감사 김수에게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히게 된다. 선정을 베풀지 않던 김수에게 글을 보내 백성을 생각하는 선정을 베풀라고 충고한 때문이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수는 왜적에게 패하여 도망을 가는데, 고사는 송암 김면 대소헌 조종도, 대암 박성, 송암 이노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했다. 이때 고사의 나이 77세였다. 이를 두고 세상사람들은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이 늙어서도 더욱 장하니 예전에 이른바 충신은 효자 중에서 나온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다”라고 하면서 고사의 충성이 효를 실천한데서 나왔다고 칭찬했다.

이로부터 3년후 인 1595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였다. 묘소는 현재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 중촌에 있다.
현재 고사정과 정려각은 원래 용주면 봉기리에 있었다. 고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호수가 넘어 정자가 물에 잠기어 무너지면서 자손들이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산을 넘어 현재 오동골에 터를 잡아서 새로 지은 것이다. 고사에 대한 기록 역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거의 인멸되어 알 수 없었는데, 면우 문인인 11세손 문용이 고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0년이 지난 후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지금 전하는 고사실기(孤査實記)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고사실기를 엮은 문용의 손자 문백이 80노구를 이끌고 고사정에서 선조의 유지를 지켜가고 있다.
강동욱 기자


문랑(郞) 효자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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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북 부안현
설명 문랑(郞)은 아버지가 악질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이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34권 全羅道 扶安縣 新增 孝子 本朝≫


김석몽의처 남평문씨 열녀문(烈女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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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구분

경기도 파주시 향토유적 제4호

소재지

경기도 파주읍 백석1리(금촌시외버스터미널 문산행(16번) 버스로 백석리 마을 앞)

설명

영조 40년(1764) 8월 조정에서는 문씨의 열부, 정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
烈女 金石夢妻 南平文氏之門 英廟甲申 八月日 命旌癸亥二月日 重修立』이라 음각된 현판과 『烈女旌閭記』있슴
향토유적 제4호(1986년 4월 17일 지정)로 지정된 정면 2.2m, 측면 2m 맞배지붕 한식기와의 목조건물로 1964년 2월에 신축    관리는 남평문씨 종중

사유

일찍이 김씨 가문에 출가한 문씨는 효행이 뛰어나고 현모양처로서 부덕을 갖춘 부인이었으나 젊어서 남편을 잃고 수절하던 중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악한이 달려들어 겁탈하려 하자 목숨을 걸고 저항하다 순절하였다



옥미주(玉味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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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구분

향토지적재산 한국 전통민속명주 제1호

소재지 안양유원지에서 시판
설명

남평문씨 가양주

100여년동안 충북의 제천, 단양 지방의 관혼상제나 큰행사에 쓰이던 문씨종중주(文氏宗中酒)로 내려온 술인데 동동주로 서민의 술이다.
문씨 집안에 시집온 임송죽씨가 시어머니로부터 제조 기법을 전수받아 도수 11도의 발효시켜 관광민속주로 지정받아 제조하여 오다가 지금은 며느리 김미선씨 내외가 안양의 안양유원지에서 시판하는데 현미를 주원료로 하여 옥수수, 고구마, 엿기름 및 누룩을 사용하여 16일간에 걸쳐 만들어 지는데 이름처름 구슬처럼 아름다운 술이다.
옥미주는 담황색 빛깔에 그윽한 향과 독특한 맛을 지니며 그 취기도 은근히 올라 서서히 깊게 취한다.
깊고 순한 맛을 내며 피부미용과 동맥경화 예방에도 좋다. 특히 술이 깬 후에도 갈증은 물론 두통과 숙취가 없어 건강에도 득이 되는 약주이다
일반 소비자들이 민속주에 대한 선입견이 안타까워 양질의 민속주를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집안의 이름을 걸고 시판하고 있다고 한다
옥미주 특유의 향과 맛은 현미가루와 찰옥수수 가루를 어떻게 혼합하느냐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옥미주의 제조과정을 보면, 먼저 벼의 외피인 왕겨만을 벗겨낸 현미 3kg을 지하수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12시간동안 지하수에 담가 놓는다. 담가놓았던 현미를 물에서 건져 물기가 완전히 빠지게 한 다음 거칠게 빻아 2시간 정도 증자(蒸煮)한다. 다음으로 증자한 분말 현미에다 누룩 1kg을 콩알만하게 빻아 면밀하게 혼합한 후 지하수 4리터와 효모 20g을 희석시키고 이것을 도기에 부어 골고루 저어 주어야 한다. 이때 저어주는 용구는 반드시 나무로 만든 지팡이나 주걱을 사용한다. 이러한 공정을 거친 뒤 1차 당화과정이 있는데 이때 온도를 25 - 30도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1차 당화과정후 옥수수, 고구마 가루, 엿기름을 적당히 넣고 보름동안 숙성시킨 다음 주맥을 자루에 넣어 짜내면 맑고 그윽한 향을 지닌 옥미주가 빚어지게 된다. 하루동안 짜내도 겨우 30리터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제조과정은 1단계 공정으로부터 160 - 170시간이 소요된다

안양 옥미주 판매장 :안양역에서 서울방향으로 (103-1번) 버스로 안양 유원지 입구에서 내려 안쪽으로 200m정도인 대형풀장 맞은편

일제시대 양곡관리법 및 주세법 등에 의한 밀주단속으로 전통 민속주의 대부분이 맥이 끊겼지만 다행히도 옥미주는 문씨 집안의 일부가 경북 안동 산골로 이주하여 그 뿌리를 내려 단절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임송죽씨는 문씨 집안에 시집온 뒤 황경분씨로부터 제조법을 전수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1990년 들어 전통문화발굴 및 관광문화개발 차원에서 전통주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자 임경숙씨는 옥미주에 대한 제조 및 시판 면허신청을 하여 1990년 3월에 제조면허를 취득했다. 그 해 4월에는 안양유원지 안에 옥미주 시음장을 열었으나 처음 하는 주점이라 어설픈 점도 많았고 유원지내 상인들의 텃세가 심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손님이 없어 빚어 놓은 옥미주를 버리기도 했으며. 옥미주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찾아온 고객들이 옥미주시음장의 간판을 보고 동동주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옥미주 시음장은 문을 연지 몇달 안되어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여 찾아오는 고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임송죽씨는 오직 순수한 진품만을 내놓으며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음장 운영의 철칙으로 세우고 있으며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많은 사람들에게 옥미주를 알리겠다는 의지로 생산하고 있다

2)제법
옥미주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미 3Kg을 물로 깨끗이 씻은다음 12시간 담가 두었다가 건져서 물기를 뺀 후에 거칠게 빻은 후 곡자 1 Kg을 콩알만하게 빻아 섞고 물 4리터에 효모 20g을 희석해서 깨끗한 도기에 붓고 혼합한 것을 넣어 잘 젓는다. 그 뒤 고구마와 엿기름 등을 첨가하여 숙성시킨 주요를 넣어 짜내면 11도의 옥미주가 얻어진다.

3)특징
원래 충북, 강원도 지방은 감자와 옥수수술이 대종을 이루었는데 현미를 넣어 만든 술은 그 고장에서는 고급주로 취급되어 제조된 듯하다. 고급 약주로써 문씨 가문의 술로서 재주로 많이 빚은 듯하나 지금은 쌀의 생산이 많아 옥수수, 감자등의 원료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옥미주는 모든 향토주의 공통적인 장점이기도 하듯이 재래식 누룩과 공정을 사용함으로써 뒤끝이 깨끗한 서민적인 약주이다.

4)옥미 동동주
전래되어온 옥미주기법을 활용하였으나 주원료는 찹쌀과 누룩으로 빚었으며 그 외 몇가지 비방의 재료가 들어갔으며 맛의 우열은 물과 숙성시기, 온도에 좌우된다.

옥미주제조장 : 평촌역에 하차하여 열병합 발전소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문정승 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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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구분 보호수 지정요청중
소재지

전남 나주시 산포면 신도리 552

설명

감나무(수령 600년 추정, 높이17m, 둘레 8m 직경 2.7m) 희귀 노목

보호수 지정 현황

지정사유 : 남평문씨 광주종친회의 지정요청을 받아 타당성 조사 및 검토결과 보호수로
                지정 보호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우리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호수로
                지정하였기 통보하오니 향후 보호수가 고사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주변 환경정비 및 사후관리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      치 : 전남 나주시 산포면 신도리 552
관리번호 : 15-4-11-3
품      격 : 시(市)나무
수      종 : 감나무(수령 600년 추정, 높이17m, 둘레 8m 직경 2.7m) 희귀 노목
관 리  자 : 김현수
지 정  일 : 2005년 4월 4일

광주 종친회(회장 문광명)에서 대종회장님께 보낸 서신의 내용

1170년 경 충숙공 휘 극겸 선조께서 전남 나주시 산포면 신도리 도민동 마을에 거주하시면서
손수 심으신 감나무가 이후 800여년 동안 별 탈 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도민동 마을회관이 목각현판에도 고려 명종때 문정승이 도민동 마을에서 출생하셨으며 문정승이 심은 황새 큰 감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도민동 마을 주민들이 문정승 감나무를 잘 보호해 왔습니다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보호의식도 점차 약해지고 있으며 감나무도 노목으로 자생력이 약해져 가고 있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도민동 주민 김현욱(80세 전 교장,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이 마을이 예로부터 문정승 마을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감나무도 주민들이 잘 보호해 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후손들이 너무 무관심하다고 합니다.또한 감나무의 보존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여야 할 문씨들이 안일한 행동을 한다며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광주,전남 종친회에서 지난 5월4일 전남 나주시에 문정승의 감나무의 역사적 가치성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주시에서도 문정승 감나무가 보호수로 지정할 만한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보호수로 지정하였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정승 감나무를 앞으로 수천년 동안 보족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 하다고 사료됩니다. 대종회장 께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5년 8월

 

자료부족으로인한  미정리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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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각

삼척김씨

강원도 동해 (문제홍의 처)

경암별묘

문동도

경남 합천군 용주면

표열각

수원백씨

경남 합천군 본량면 항곡리 (문택수의 처)

효자각

문찬석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표열각

파주염씨

충남 서산군 남면 몽산리 (문정호의 처)

효자각

문흥주

전북 옥구군 옥산면

숭의전

문익

경기도 연천

숭의전

문극겸

경기도 연천

경현사

문익점

전남 장성군

구암사

문익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장암리

삼현사

문자수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표충사

문홍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충렬사

문기방

전북 남원

구암사

문상례

평북 의주

학봉사

문응규 문기호

평북 의주

효열각

제주고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한규의 처)

정려문

문덕중

전북 옥구군 회현면

쌍효문

진주강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정학의 처)

광동영당

문익점 문래 문영

광주직할시 서석동

쌍효문

문장갑 문장박

광주직할시 서석동

효열문

장흥오씨

전남 장흥 (문흥로의 처)